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이사야 66:10-14 2023.01.29. 主日禮拜
“10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11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1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13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14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사66:10-14)
세례 요한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의 좋은 소식을 듣고 회개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이들은 먼저 두 벌 옷을 옷 없는 자들에게 나눠는 섬김을 가졌습니다(눅3:11.참고/마11:11;눅7:28;눅3:2-3). 당시는 한 옷을 갖고 1년 내내 입어야 하는 때입니다. 그들이 어렵게 어렵게 해서 두 벌을 옷을 갔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한 벌을 나눈다는 것은 수십 벌의 옷을 갖고 있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말씀은 곧 부족함에도 나누어야 함을 가리켜주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많다고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나눔을 잃어버리고 사는 시대이니까요? 바라기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물질의 복을 주셔서 부유한 가운데 나눌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여유롭지 못할 때부터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음 가운데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게하는 세례를 통해 회개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첫 번째는 ‘나누라’ 섬기라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10:45). 우리 예수님은 나눔의 본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통해 회개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두 번째는 ‘부과된 것 외에 거두지 말라’고 하십니다(눅3:13). 이것은 ‘정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은 정할 ‘定’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고 하십니다(참고/출20:16-17). 이것이 부과된 것 외에 거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 여러분 자기 것 아닌 것에 미련 두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영적 육적 모두 말입니다.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통해 회개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 두 번째는 ‘정하라’ 인데요. 예수님은 전도하러 보낸 제자들에게 “9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10:9-10). 우리 예수님은 정함의 본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이 감당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 세 번째 ‘족하라’와 연결됩니다.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눅3:13). 만족할 때 족 ‘족하라’입니다. 내가 받을 것보다 일 이만 원이라 더 받으면 좋은 게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의 심리는 더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해요. 그것이 합당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급료에 족할 줄 안다는 것은 감사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눅9:58.참고/마8:20). 자신의 쉴 곳조차 없으심에도 아버지 하나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의 삶도 수용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족함의 본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의 ‘좋은 소식’을 듣고도, 회개를 거부한 자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헤롯과 그의 가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제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악을 행하고도, 이를 비난하는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어 악에 악을 더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 남편과 이혼하고 시숙과 재혼한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는 기회를 엿보다가 세례 요한을 참수토록 하였습니다(마14:1-12;막6:14-29;눅9:7-9). 이러한 죄에 딸 살로메까지 가담하게 했습니다. 가장이 악에 악을 더하고 그 가족이 그 악을 끊지 않자, 악에 악에 악을 더하는 가문이 된 것이지요. 이 집안 훗날 유배지로 추방되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불행의 가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상기합시다. 죄 사함의 세례를 통해 회개하면 ‘나누라’, ‘정하라’, ‘족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나누라’ 섬기라는 것이고요. ‘정하라’ 욕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고요. ‘족하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요. 주님의 본을 보이신 말씀입니다. 이 저와 여러분은 장차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게 될 신분입니다. 세상과 같아서는 안되는 이유이죠. 우리는 회개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복 주시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사66: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이 말씀을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평안합니다. 어머니의 위로함이 얼마나 포근하다는 것은 체험한 바입니다. 어릴 때 엄마의 품속에서 쌔근쌔근 잠들던 기억이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 엄마 품만큼 편안한 곳이 세상 어디에 있겠어요. 엄마가 항상 안아주고만 있을 수 없기에 포대기로 업지 않습니까? 이때 과학적으로 볼 때는 아이들에게 굉장히 불편한 자세라고 합니다. 그러나 엄마에게 업혔을 때, 그 엄마의 등이 얼마나 따듯하고 볼을 갖다 데기가 좋습니까? 그러니 과학이 아무리 불편한 자세라도, 엄마 등에서도 입을 벌리고 잠들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은 우리 민족 명절인 설이었습니다. 설에 고향을 찾을 때 우리는 먼저 부모님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부모님 중에서도 우선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고향 그 자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설과 같은 명절이 되면 엄마를 보는 설렘이 있는 것이고요. 반대로 아무리 고향 집이 좋고 형제와 친구들이 있다 해도,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면 고향에 대한 애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데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위로를 받을 곳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먼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하나님이 직접 ‘너희를 위로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이 땅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과 같은 사랑이 깊게 배어있는 위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심을 믿기는 믿는데요.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고 계시는지, 피부로 느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인간의 한계를 아시고, 하나님은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받는 위로함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함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는 ‘예루살렘’은 어디를 말씀합니까? 문자적으로는 ‘예루살렘’ 그 도성 자체를 말합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수리아, 앗수르, 바벨론에 의해 침략을 당할 것이고,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7:1-9,17-25,13-14장.참고/대하 28:5-15). 그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나라 수도인 예루살렘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방 나라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이 초토화되는 비극을 목도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 니푸르Nippur라는 곳으로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그곳 이방의 땅에서 무려 70년의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70년의 시간 동안 유대인들은 고향을 그리워했음은 당연한 것이고요. 돌아가고 싶은 고국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만의 의미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로 믿는 성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구심점이었습니다.
남산에 있는 서울 국립극장에서 북한 예술단이 내한 공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행사 마지막에 소녀시대의 서현이 깜짝 등장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서현은 북한 가수들과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부르며 피날레를 장식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던 유대인들에게 꿈에도 소원은 하루빨리 그 예루살렘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소망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70년 바벨론 유수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였고, 하나님께 예배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는 이스라엘이 포로 생할을 마치고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는 지금 우리들에게는 ‘교회에서 위로 받으리니’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새 예루살렘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누구나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교회에서 위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로하심을 내리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를 바꾸어 ‘교회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로 적용하면 바른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알 것 같으면서도 막연한 것 같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목사가 가장 마음이 아플 때가 언제일 것 같아요? 교회가 부흥이 안 될 때, 어려움이 찾아올 때, 시험이 들 때, 속상하게 할 때, 목사가 마음이 아플 때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성도가 목사의 마음을 못 알아줄 때입니다. 이것만큼 목사의 마음이 아플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몰라줘도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알아줄 때, 그것만큼 큰 위로가 없습니다. 나의 마음을 알아 줄 때가 가장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란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청아비전교회공동체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라
하나님의 위로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첫 번째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66:10). 먼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즉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다고 말씀할 정도로 하나님의 첫째 관심입니다(행20:28). 그렇게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더욱 풍성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은 청아비전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인데요. 이 말은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성도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면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하게 됩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인사하라고 시키니, 할 수 없어도 하는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 혹 그렇다면 이왕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할 거라면, 진심으로 성도님을 사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는 아세요. 내가 정말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인사하는지, 립서비스로만 하는지요. 예! 하나님은 아십니다. “왜 사랑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기에 사랑하는 것이요. 사실은 내가 교회를 성도를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더욱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합니까?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고 말씀합니다(잠27:23). 목사는 성도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는 누구를 사랑해야 합니까?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씀합니다(갈6:6). 성도님은 목사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갈6:10). 우리는 더욱 믿음의 가정들 즉 성도들을 사랑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가 특별히 교회 공동체 안에 성도들을 사랑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 슬로건이 “서로 사랑하라” 교회 공동체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 값을 주고, 살만큼 사랑하는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오늘도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풍성이 임하기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교회와 함께 기뻐하라
하나님의 위로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두 번째 교회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66:10). 하나님은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성읍’은 예루살렘을 일컫는 것이고요. 오늘날에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후배 목사님 딸이 연세대학교에 합격했다는 낭보를 전해 들었습니다. 참 좋은 아닙니까? 여러분 이럴 때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는 하지만, 속으로 “나도 목사인데 내 딸은 뭐야!” 이런 마음도 들어요! 안 들어요! 솔직히 조금이라도 들지 않습니까? 이 말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 마음으로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간단치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딸이 좋은 대학에 입학한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서로 기뻐하라고 가르치시는지 찾아볼까요?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귀신을 내어 쫓을 만큼 큰 능력을 기뻐하기보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서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생명책을 말씀합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 여기 말씀에 기록된 인물들은 사도 바울과 함께 교회를 굳건히 세워갔던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 모두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충성된 일꾼이었다는 점보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이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가장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구원받지 않았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책에 녹명된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창세기 5장에는 인류의 시조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족보를 상세하고 있는데요. 이상한 것은 아담의 장자는 가인인데요. 창세기 4장에서는 가인과 그 후손들의 부와 번영과 발전을 장황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창세기 5장 아담의 계보에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창세기 4장에서는 짧게 언급되어 있던 셋, 아담과 그의 아들 셋을 통해 내려오는 후손들만을 창세기 5장에 열거하고 있습니다. 왜!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장자인 가인과 그의 후손은 생략되고 있고, 셋과 그의 후손만이 레코드Record되어 있을 까요?
하나님께서는 세속의 문화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배의 문화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부와 번영과 발전을 이루었어도, 그것은 하나님 떠나서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신 흠이 없는 온전한’ 제물을 드린 아벨, 그리고 그와 같은 셋의 후손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올려드린 예배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그의 후손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면서 전혀 언급이 없고, 셋과 그의 후손들을 성경에 남기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가인과 그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흠이 없이 온전한 제물’을 드린 셋과 그의 후손들로서, 아담의 계보에 올려져야 되고, 그것이 저 천국 생명책The Book of Life,生命冊에 녹명까지 이어져야 할 줄 믿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천국에 들어갈 자에 대하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계21:27). 이 세상에서 부와 번영과 발전을 이루었어도, 그 마지막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어리석은 자’라고 지칭한 부자와 같은 것입니다(눅12:20).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말씀합니다(계20:15). 그러나 이 세상에서 믿음 때문에 환난과 궁핍을 당했더라도, 그는 ‘실상은 부유한 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계2:9).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 ‘생명의 관’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계2:10). 그가 바로 생명책에 녹명된 자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여 생명책에 기록된 것만큼 귀하고 귀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떤 큰 능력이 있는 것보다 너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입니다. 구원받은 은혜 이 한 가지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시33:1). 생명책에 자기의 이름이 녹명된 것을 기뻐하는 자는 그 누가 아닌 하나님 한 분만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즐거워한다는 말은 여호와를 찬송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잡혀갔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데로 70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토故土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땅을 밟는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였습니다. 그 분을 송축했다는 말씀입니다.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아 라고 단수가 아니라 ‘의인들아’라고 복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여호와를 즐거워 하라, 함께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생명책에 기록된 것에 대해 기뻐하는 자들이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찬송한다.’ ‘하나님만을 송축한다.’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찬송을 합니다. 그러면 찬송은 우리의 영의 찬양이 됩니다. 우리의 심령에 찬양이 각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일상 중에 순간 순간 나의 입술에서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그 찬양이 내 입술에서 나올 때, 동반되는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입니다. 더욱이 심령이 상한 일에 있을 때, 찬송을 하게 되면 회복을 경험하고 일어서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함께 기뻐하고, 생명책에 내 이름을 녹명해 주신 하나님만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신앙의 근원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여호와만을 즐거워하는 자들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때 ‘행복바이러스’라는 말이 많이 쓰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합니다.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면 더욱 행복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에게서 생명책에 기록된 기쁨과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는 행복바이러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은혜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가족들은 그 무엇보다도, 내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며, 그 생명책에 기록해주신 하나님만을 즐거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기쁨과 즐거움의 시너지 백배가 나타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교회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더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와 함께 슬퍼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66:10).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성은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고요. 오늘은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라는 교회와 함께 슬퍼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함께 슬퍼하는 성도에게 그 위로하심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 말입니다. 그렇기에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와 함께 슬퍼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크신 위로하심을 내리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광야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야는 황무지입니다. 거칠고 메마른 곳입니다. 아무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무척 고독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광야는 하나님에게만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만치 않은 현실 앞에 걱정과 염려 더 나아가 두려움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고층 아파트 숲과 수많은 인파 가운데 있음에도, 나는 혼자라는 생각하게 합니다. 광야에만 있다고 광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모두는 광야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있는 현대인들에게 위로함은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위로를 받게 할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교회에 허락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나와 이익의 관계가 아니어도, 서로 주 안에 있기에 슬픔을 나눌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함께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더욱 임하실 줄 믿습니다.
때로는 다른 분들의 사정을 들어주면서, 그들을 주의 이름으로 위로할 때, 버거운 마음이 없지 않아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항상 문을 개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알게 된 타 교회 성도님들 가운데 우리 교회를 찾아오셔서, 여러 이야기들을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평소에도 기도 제목을 나누는 한 권사님이 방문하셨습니다. 명절 전날이어서, 슈퍼에 왔다가 들리셨다면서, 과일 상자를 갖고 오셨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그분이 기도하시는 사이, 제가 커피를 타서 대접해 드렸습니다.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목사이기에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은 걱정과 염려의 말들을 하셨는데요. 한참을 들어드리고 주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고 간절히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해 드렸습니다.
이제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입니다. “지금 내가 다른 교회 성도들 말 들어주고, 주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축복하고, 그러면 나와 우리 교회는 뭔가!”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분들을 위로할 때, 버겁다고 앞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나는 무언가 내 교회가 있고, 내 성도들이 있는데”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을 해보세요. 그분이 저를 보고 무엇을 믿고 중요한 말을 하겠어요. 하나님 안에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비록 내 교회에 성도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슬픔을 함께 할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위로하는 자에게도, 위로 받는 자에게도, 더욱 크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함께 슬퍼할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더 더욱 크게 나타날 줄 믿습니다. “5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7:5-7)
이 말씀은 배경은 사도 바울 일행이 마게도냐로 전도 여행을 떠났을 때입니다. 그곳에서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다고 했습니다. 선교 현장에서 전후좌우 사방으로 큰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이지요. 이때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낙심한 자를 위로하신 분이신데요. 사도 바울의 제자 디도가 찾아 왔을 때,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 임하였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디도가 바울에게 찾아와 고린도교회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자라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마게도냐 선교 현장에서 사방으로 고초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중에 디도가 전해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건강한 성장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이가 사도 바울입니다. 더 더욱 디도는 고린도교회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디도를 통해 사도 바울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이 이제 성장해서, 오히려 바울을 위로하고 있으니 얼마나 바울이 위로가 되겠어요.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고린도교회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사도 바울을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바울 일행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바울이 전도했던 성도들이 성장하여 이제는 바울을 위하여 사모하고 애통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다니 이 말을 들은 사도 바울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어요. 이 서로 위로한 자리에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슬퍼할 때 임하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가득 넘치게 하심을 너무나도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서로의 위로로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여, 그들이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소망을 갖는 역사가 날마다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성도
하나님께서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심과 같이 세상에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위로하심을 부어주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기 위해 세 가지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사랑하라, 교회와 함께 기뻐하고, 교회와 함께 슬퍼하라고 명령대로 행했을 때, 하나님께 위로를 받는 자는 어떤 성도로 세워지게 되는 것일까요?
충족한 성도
첫 번째는 충족한 성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함에 대하여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고 말씀합니다(사66:11). ‘젖을 빠는 것 같이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만족하겠고’라는 표현이 여러분에게는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엄마의 젖을 빨고 “꺼억” 소리를 내며,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잠든 순간 말입니다. 완전히 만족해하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만족한 위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때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렇게 가득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가득하고 충족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함께 사랑하고, 기뻐하고, 슬퍼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 공동체에 갈급한 영혼들이 찾아 만족함을 얻는 성도들로 충족한 성도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평강한 성도
두 번째는 평강한 성도가 됩니다.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사66:12). 젖을 빠는 아이가 젖을 마음껏 섭취한 후, “꺼억”소리를 내듯이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충족한 성도는 이제 평강을 얻게 됩니다. 평강, 평안은 언제 찾아옵니까? 부러운 것이 없을 때 마음이 평안한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위로하심, 하나님의 만져주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데, 이렇게 확실히 믿음의 대상이 있으니 그 마음이 평안 한 것입니다.
예전에 금요기도회에 한 중보 동역자 분이 기도하러 왔습니다. 그 분은 지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세요. 당장 가족들이 살아갈 집을 시급히 준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요즘 가정에서 어려움을 당한 가정들 많지 않습니까? 그러한 가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질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은 걱정이 하나도 안 된데요. “잘되겠지”, 염려가 하나도 없데요. 그런데 이렇게 걱정이 하나도 없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고 합니다. 남들 같으면 안달복달하고,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야 맞는 것 같은데, 자신이 너무 태평한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마음에 이렇게 평안할 수 있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형편을 알아주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그의 마음에 가득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찾아오는 평안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평강을 갖게 합니다. 평강을 강 같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때 우리 교회 공동체에 평강한 성도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강건한 성도
세 번째는 강건한 성도가 됩니다.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고 말씀합니다(사66:14).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는 신성한 생명력이 풍부함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젖을 빠는 아이가 젖을 마음껏 섭취한 후, “꺼억”소리를 내듯이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충족한 성도가 됩니다. 마음에 평강이 강 같이 흐르는 평강한 성도가 됩니다. 그리고 영육 간에 강건해지게 됩니다.
스스로 강건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건하게 해 주십니다.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충족한 만족한 감사한 성도에게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니 영육 간에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원수에게 더하리니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격려 정도가 아니에요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건한 성도를 누가 무너뜨릴 수 있겠어요. 우리가 함께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때 임하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강건한 성도로 세우게 될 것입니다.
정리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하나님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위로를 받을 곳을 주셨다고 하십니다(사66:13).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63:13). 예루살렘에서 받는 위로함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함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문자적으로 ‘예루살렘’ 그 도성 자체를 말합니다. 훗날 느부갓내살에게 예루살렘은 멸망당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스라엘은 70년 포로 생활 동안 돌아가고 싶은 고국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도로서 만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로 믿는 성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소망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70년 바벨론 유수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였고, 하나님께 예배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게 된 것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는 ‘교회에서 위로 받으리니’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새 예루살렘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교회에서 위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로하심을 내리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알 것 같으면서도 막연한 것 같지 않습니까? 목사가 가장 마음이 아플 때는 교회가 부흥, 어려움, 시험이 들 때 등이 그렇다 할 수 있지만, 성도가 목사의 마음을 못 알아줄 때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몰라줘도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알아줄 때, 그것만큼 큰 위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란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청아비전교회공동체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라. 하나님의 위로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첫 번째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요’(사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즉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다고 말씀할 정도로 하나님의 첫째 관심입니다(행20:28). 그렇게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더욱 풍성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위로하심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은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성도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사만 아니라, 진심으로 성도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는 아세요. 내가 정말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인사하는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왜 사랑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기에 사랑하는 것이요. 사실은 내가 교회를 성도를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더욱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성도님을 사랑해야 합니다(잠27:23). 성도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 목사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는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더욱 믿음의 가정들 즉 성도들을 사랑해야 된다고 말씀입니다(갈6:10). 금년도 우리 교회 슬로건이 “서로 사랑하라” 교회 공동체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 갑을 주고, 살만큼 사랑하는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오늘도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풍성히 임하기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교회와 함께 기뻐하라. 하나님의 위로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두 번째 교회와 함께 기뻐해야합니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사66:10). ‘성읍’은 예루살렘이요, 오늘날에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귀신을 내어 쫓을 만큼 큰 능력을 기뻐하기보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눅10:20). 생명책에 녹명錄名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함께 교회를 굳건히 세워갔던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빌4:3). 그들이 교회에서 충성된 일꾼이었다는 점보다.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구원받지 않았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에는 인류의 시조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자 가인과 그의 후손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아벨대신 셋과 그의 후손들만 레코드Record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속의 문화’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배의 문화’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부와 번영과 발전을 이루었어도, 그것은 하나님 떠나서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신 흠이 없는 온전한’ 제물을 드린 아벨, 그리고 그와 같은 셋의 후손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올려드린 예배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그의 후손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면서 전혀 언급이 없고, 셋과 그의 후손들을 성경에 남기신 것입니다. 이 아담의 계보는 저 천국 생명책The Book of Life,生命冊 기록까지 이어집니다(참고/창5:1;계21:27).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천국에 들어갈 자에 대하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계21:27). 창세기 아담의 계보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디에 이름이 녹명되어야 함을 계시록에서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라고요. 생명책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와 번영과 발전을 이루었어도, 그 마지막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어리석은 자’라고 지칭한 부자와 같은 것입니다(눅12:20).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말씀합니다(계20:15). 그러나 이 세상에서 믿음 때문에 환난과 궁핍을 당했더라도, 그는 ‘실상은 부유한 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계2:9). ‘생명의 관’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계2:10). 그가 바로 생명책에 녹명된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떤 큰 능력이 있는 것보다 너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33:1). 생명책에 녹명된 것을 기뻐하는 자는 그 누가 아닌 하나님 한 분만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즐거워한다는 말은 여호와를 찬송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잡혀갔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데로 70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토故土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땅을 밟는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분을 송축했다는 말씀입니다. ‘의인들아’는 복수로 함께 여호와를 즐거워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생명책에 기록된 것에 대해 기뻐하는 자들이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한 때 ‘행복바이러스’라는 말이 많이 쓰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합니다.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면 더욱 행복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에게서 생명책에 기록된 기쁨과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는 행복바이러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은혜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가족들은 그 무엇보다도, 내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며, 그 생명책에 기록해주신 하나님만을 즐거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기쁨과 즐거움의 시너지 백배가 나타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교회 함께 기뻐할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더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와 함께 슬퍼하라. 하나님의 위로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세 번째 교회와 함께 슬퍼해야 합니다.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사66:10). 성은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고요. 오늘은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라는 교회와 함께 슬퍼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함께 슬퍼하는 성도에게 그 위로하심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 말입니다. 그렇기에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와 함께 슬퍼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크신 위로하심을 내리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광야입니다. 고층 아파트 숲과 수많은 인파 가운데 있음에도, 나는 혼자라는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광야는 하나님에게만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광야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위로함은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이 위로를 받을 곳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서로 주 안에 있기에 슬픔을 나눌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함께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더욱 임하실 줄 믿습니다. 때로는 다른 분들의 사정을 들어주면서, 그들을 주의 이름으로 위로할 때, 버거운 마음이 없지 않아 들 때가 있습니다. 나도 힘든데 힘든 분들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슬픔을 함께 할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위로하는 자에게도, 위로 받는 자에게도, 더욱 크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마게도냐에서 선교 사역을 할 때입니다. 그곳에서 사도 바울 일행은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다고 했습니다(고후7:5). 선교 현장에서 전후좌우 사방으로 큰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이지요. 이때 바울의 제자 디도가 찾아 왔을 때,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고후7:6).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이가 사도 바울입니다. 그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디도를 통해 사도 바울에게 위로를 전했습니다(고후7:7). 예전에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이 이제 성장해서, 오히려 바울을 위로하고 있으니 얼마나 바울이 위로가 되겠어요. 바울이 전도했던 성도들이 성장하여 이제는 바울을 위하여 사모하고 애통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고후7:7). 이 말을 들은 사도 바울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어요. 이 서로 위로한 자리에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함께 슬퍼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가득넘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성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교회를 사랑하라, 교회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라, 교회와 함께 슬퍼하라. 행했을 때, 하나님께 위로를 받는 자는 어떤 성도로 세워지게 되는 것일까요?
충족한 성도. 첫 번째는 충족한 성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함에 대하여, ‘젖을 빠는 것 같이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만족하겠고’(사66:11).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엄마의 젖을 빨고 “꺼억” 소리를 내며,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잠든 순간 말입니다. 완전히 만족해하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만족한 위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함께 슬퍼할 때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렇게 가득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가득하고 충족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함께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슬퍼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 공동체에 갈급한 영혼들이 찾아 만족함을 얻는 성도들로 충족한 성도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평강한 성도. 두 번째는 평강한 성도가 됩니다.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사66:12). 평강, 평안은 부러운 것이 없을 때 찾아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위로하심, 하나님의 만져주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데, 이렇게 확실히 믿음의 대상이 있으니 그 마음이 평안 한 것입니다. 한 분이 기도하러 오셨는데 지금 당장 가족들이 살아갈 집을 준비해야 하는데, 물질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걱정이 하나도 안된다고 합니다. 그 분의 마음에 이렇게 평안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형편을 알아주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그의 마음에 가득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찾아오는 평안입니다. 평강을 강 같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함께 슬퍼할 때 우리 교회 공동체에 평강한 성도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강건한 성도. 세 번째는 강건한 성도가 됩니다.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사66:14). 신성한 생명력이 풍부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엄마의 젖을 빤 아이가 “꺼억”소리를 내듯이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충족한 성도가 됩니다. 마음에 평강이 강 같이 흐르는 평강한 성도가 됩니다. 그리고 영육 간에 강건해지게 됩니다.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사66:14).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충족한 만족한 감사한 성도에게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니 영육 간에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사66:14) 하나님이 겅건하게 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원수에게 더하리니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건한 성도를 누가 무너뜨릴 수 있겠어요. 겅건한 성도를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결론
오늘 교회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하나님의 위로 하심을 받는 성도들이 세워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말하는 교회론과 상이한 교회론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지 않나 염려됩니다. 미디어가 참 발달한 시대입니다. 요즘은 웬만하면 인터넷 무료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YouTube에서 활동하는 유튜버YouTuber이 많습니다. 이를 통하여 신앙적인 부분에서 많은 정보를 제공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십일조에 관계된 것은 어느 교회 것을, 헌신에 관한 것은 어느 교회 것을, 건축에 대한 것은 어느 교회 것을, 설교에 관한 것은 어느 교회 것을, 성경 공부에 대한 것은 어느 교회 것을 선별하여 취합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자칫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여기 저기 찾아서, 자기에게 맞는 교회를 만들 뿐, 하나님이 말씀하는 교회 구성원으로서 교회를 망각해가고 있지 않나 우려스럽습니다. 교회의 구성원으로 함께 교회를 사랑하고, 함께 교회와 기뻐하고, 함께 교회와 슬퍼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온전한 성도로 세워져 갈 수 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심과 같이 세상에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위로하심을 부어주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기 위해 세 가지를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곳이 교회이기에 그 교회를 사랑하는 즉 성도를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부어주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는 교회와 함께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기쁨은 생명책에 녹명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생명책에 내 이름을 기록해주신 하나님만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즉 찬송해야 합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의 성도들이 서로 기뻐할 때 그 교회 공동체는 더욱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넘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셋째는 교회와 함께 슬퍼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현대인들은 누구나 위로함을 바랍니다. 아무 이해관계 없이 이 위로를 전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교회위에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되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모두가 몰라줘도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께 사랑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은 충족하게 됩니다. 젖을 빠는 아이가 젖을 마음껏 섭취한 후 “꺼억”소리를 내듯이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충족한 성도가 됩니다. 마음에 평강이 강 같이 흐르는 평강한 성도가 됩니다. 영육 간에 강건해지는 강건한 성도가 됩니다. 우리 교회에 오는 모든 이들이 이러한 은총이 있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때, 하나님의 크신 위로하심이 함께 하여 충족한 성도 평강한 성도 강건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성도님들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다시 한번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로를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풍성히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와 함께 기뻐할 때, 위로하심을 더 해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와 함께 슬퍼할 때, 위로하심을 가득 넘치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교회를 사랑하라, 교회와 함께 기뻐하고, 교회와 함께 슬퍼하라. 행했을 때, 하나님께 위로를 받는 자는 충족한 성도로 세워집니다. 평강한 성도로 세워집니다. 강건한 성도로 세워집니다.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교회 구성원으로, 함께 교회를 사랑하고, 함께 교회와 기뻐하고, 함께 교회와 슬퍼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온전한 성도로 세워져 갈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와 우리가 중보하는 분들이 이렇게 세워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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