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으로 惡을 이기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로마서 12:14~21 2023.02.05. 主日禮拜
“14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4-21)
하나님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위로를 받을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고 하셨습니다(사63:13). 이 말씀은 ‘교회에서 위로 받으리니’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새 예루살렘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로하심을 내리어 주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란,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사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즉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임으로 우리가 교회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더욱 풍성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참고/행20:28). 교회 사랑은 성도 사랑과 같습니다. 예수님 구주로 고백한 성도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성도님을 사랑해야 합니다(잠27:23). 성도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 목사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더욱 믿음의 가정들 즉 성도들을 사랑해야 된다고 말씀입니다(갈6:10). 하나님이 자기 피 값을 주고, 살만큼 사랑하는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오늘도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풍성히 임하기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교회와 함께 기뻐하라.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사66:10). ‘성읍’은 예루살렘이고, 오늘날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귀신을 내어 쫓을 만큼 큰 능력을 기뻐하기보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눅10:20). 생명책에 녹명錄名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동역자들이 충성된 일꾼이었다는 점보다.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빌4:3). 그것이 가장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구원받지 않았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천국에 들어갈 자에 대하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계21:27).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말씀합니다(계20:15). 우리는 무엇보다도,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며, 녹명해주신 하나님만을 즐거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뻐할 때 시너지 백배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더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와 함께 슬퍼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사66:10). 성은 예루살렘을 지칭하고, 오늘날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와 함께 슬퍼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함께 슬퍼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크신 위로하심을 내리어 주시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로함은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이 위로를 받을 곳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전도 여행 중 큰 고초를 겪었을 때, 디도가 찾아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위로를 전했습니다(고후7:5-6). 예전에 바울이 개척한 교회 성도들이 이제 성장해서, 이제는 바울을 위하여 사모하고 애통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어요(고후7:7). 서로 위로한 자리에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함께 슬퍼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가득 넘치게 하십니다.
교회와 함께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슬퍼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은 충족하게 됩니다. 젖을 빠는 아이가 젖을 마음껏 섭취한 후, “꺼억”소리를 내듯이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충족한 성도’가 됩니다(사66:11). 마음에 평강이 강 같이 흐르는 ‘평강한 성도’가 됩니다(사66:12). 영육 간에 강건해지는 ‘강건한 성도’가 됩니다(사66:14). 요즘 무료 동영상를 통해 신앙적인 부분에서 많은 정보를 제공 받고 있습니다. 자칫 주제별로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여, 내가 만든 교회를 찾고 있지 않나 우려됩니다. 교회 구성원으로 교회를 함께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온전한 성도로 세워져 갈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를 선대하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하십니다(롬12:20).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친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구체적으로 삶의 지침들도 내리어 주셨습니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40),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5:41) 이러한 귀한 말씀 앞에서, 우리 모두는 아멘이면서도, 왠지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함께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도 부담을 주시는 걸까”라는 인간적인 생각도 가져보게 됩니다. 너무나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높게 잡고 계신 것이 아닌가하는 따르기에 버거움과 야속함도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5),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그렇게 높게 지향 점을 잡은 이유를 설명해주십니다.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하십니다(마5:46-47). “너희는 이방인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들도 온전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본문 전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방인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와 같은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자녀인 저와 여러분이 온전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저와 여러분은 아멘! 해야 합니다. 동의하기가 힘들더라도 동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정 안에 본문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말씀을 보면,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되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을 줄 압니다(롬12:20). 원수를 선대하라입니다.
축복하라
원수를 선대하라 첫 번째는 ‘축복하라’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4). 나를 ‘박해하는 자’ 또한 원수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6:5-7). 이 말씀에는 ‘종’이 등장하고 ‘상전’이 등장합니다. 이 둘의 관계는 흔히 주종主從의 관계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사용자와 근로자의 사이가 아닙니다. 성경 당시의 종은 상전의 노비奴婢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했습니다. 노비, 종은 자신의 권한이 없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밥을 먹는 것 빼고는, 모든 자격은 주인에게 위임 당한 것입니다. 상전인 주인이 돈을 주고 종을 샀기에 종의 소유는 상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종은 상전으로부터 엄청난 노역과 인격의 침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제대로 된 대우는 받을 수 없었고, 임금이라고 하기에 민망한 동전 몇 잎만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착취를 당하던 종들 가운데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된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그 힘들고 지친 노비의 삶에서 위로를 받고, 다시금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 가운데 말씀을 배우던 종들은 갈등 아닌 갈등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앞서 당시 종과 상전의 관계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 둘 사이는 마치 지배자와 피지배자처럼 한쪽은 일방적으로 압제와 착취를 한쪽은 고역과 희생을 강요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한데 어떻게 종들이 상전을 성실히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예수님을 섬기듯 상전을 섬기라고 하니,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어떻게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저 악덕 상전이 싫은데 그가 부를 얻을 수 있는 일에 어떻게 열심히 일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으면 요령만 피우려고 하지요. 더욱이 기쁨 마음으로 주를 섬기듯 하라는 것은, 상전에게 폭압당하고 있는 종들의 처지를 몰라서 하는 말로 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종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듣고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종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종의 신분이었지만, 자신들의 처한 형편에 감사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임을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힘든 고역에도 기쁨으로 감당하며, 입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예전에는 상전 얼굴을 보는 것조차도 몸서리쳐져 회피했었는데, 이제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사랑으로 상전을 대했습니다. 본문처럼 자신들을 박해한자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들의 변화보다 더욱 큰 일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새부터인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한 종들을 보고, 상전들이 놀라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종들이 이렇게 변했는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종들이 교회에 나가면서, 이렇게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복한 상전들도 교회가 나아가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상전들이 변화되었습니다.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6:8-9).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종이나 상전인 자유인이나 다 주께로부터 받은 그대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종들만 그리스도를 섬기듯 상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상전들도 종들에게 위협을 그치고 압제하지 말고 선대하라는 것입니다. 종이던 자유이던 같은 하나님을 섬김으로 둘 사이에 상하上下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구원 받기를 원하시고 종이건 상전이건 모두를 위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들도 변화 받아 종들을 선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박해하는 저주하지 말고 축복했을 때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초대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초대교회 때만이 아닙니다. 한국 초대교회에서도 성경 말씀과 유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1900년대 초반 전북 김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자익(1879-1958)은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김제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최고 부자였던 조덕삼(1867-1919)의 집을 찾아가 머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자익은 주인 조덕삼의 마방馬房의 마부馬夫가되어 성심성의껏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테이트Lewis Boyd Tate,1862-1929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주인과 머슴이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주인 조덕삼은 아들이 다니는 서당 곁을 지나다니는 머슴 이자익이 천자문을 줄줄 외우는 것을 보고 그의 재능을 알아 공부를 시켰습니다. 이에 감사한 이자익은 주인 조덕삼을 더 정성껏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조덕삼과 이자익은 함께 집사로 영수로 임명받아 섬기게 되었고, 또 1년 후에 교회가 부흥하여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조덕삼은 그 지역의 최고 부자일 뿐 아니라, 금산교회의 설립자요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도 흠이 없고 존경받는 자였습니다. 머슴들에게도 쌀밥을 주는 당시로서 생각지도 못하던 일을 했던 조덕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자익을 키워준 사람이나 다름이 없고, 나이도 15살이나 더 많았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양반보다 여인이나 천민들이 더 많았기에 아마 머슴인 이자익에게 더 표를 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당시 장로는 교회를 총책임질 뿐 아니라, 설교도 하는 자였기에, 집사인 조덕삼은 장로인 이자익에게 함부로 하대할 수도 없고, 또 그의 설교도 들어야 하며, 집에서는 자기 머슴인 이작익 장로님을 도와 교회 일을 해야 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결과를 받아든 선교사님은 물론 조덕삼에게 표를 주지 않은 성도들까지도, 이제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했을 것입니다. 선교사를 통하여 당선결과가 발표되자, 장내는 웅성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 조덕삼 집사는 선교사님께 발언권을 얻어,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덕삼 집사는 자신의 머슴 이자익 집사가 먼저 장로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스토리에서 주인이었던 조덕삼 집사가 더 높이 보여요. 머슴이었던 이작익 집사가 더 높이 보여요. 머슴이었던 이작익이 장로가 되었다고 주인인 조덕삼 집사를 무시했겠어요. 그럴 리 없지요. 집에서는 더욱 깍듯이 머슴으로서 주인을 모시지 않았겠습니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훗날 장로가 된 조덕삼은 선임인 이자익 장로를 평양으로 유학 보내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하여 목사가 되게 하고, 1915년 금산교회로 청빙하여 자신의 담임목사로 깍듯이 섬겼습니다. 예전에 마부가 목사가 되고 주인이 성도가 된 것이지요. 이 일은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자익은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놀랍게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장로교 역사상 총회장을 재임한 역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자익 목사는 총회장을 3번씩이나 역임하면서 장로교의 개혁헌법을 기초하는 등 장로교회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를 키워낸 인물이 바로 자기 집 머슴을 자기보다 먼저 장로로 받들며 교회를 섬겼던 조덕삼 장로입니다.
이렇게 빛나는 신앙생활을 했던 조덕삼 장로의 손자가 3선 국회의원이며, 주일대사를 역임한 고 조세형 장로입니다. 훗날, 이자익 목사가 설립한 대전신학교에서 "이자익 목사 기념관 헌판식"이 있었습니다. 그 행사에 조덕삼 장로의 손자 고 조세형 장로(금산교회, 금산교회 제9대 장로, 3선 국회의원, 주일대사)와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 장로(대전제일교회, 고분자화학 박사, 연변과기대 교수)가 만났습니다. 이규완 장로가 조세형 장로에게 허리를 굽히며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으면 우리도 없고,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성경 당시 초대교회 때에도 교회 성도의 70%가 노예 혹은 노예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노예제도가 사회악이라고 주장하며,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 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권면대로 자신의 상전 섬기기를 주님을 섬기듯이 성실한 마음으로 섬겼습니다(골3:22-23;엡6:5-8). 감동을 받은 상전들은 자신들의 종이 믿는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더 이상 형제를 노예로 부릴 수 없다고 하여, 해방을 선포해주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왜 지켜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훗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일을 행한다고 하여도 그들을 축복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해드립니다.
화목하라
원수를 선대하라 첫 번째는 ‘축복하라’이고요. 두 번째는 ‘화목하라’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여기 ‘모든 사람’안에 원수가 포함된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의 피 예수님의 십자가로 멀리있던 너희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너희’와 ‘둘’이라는 관계에 대하여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엡2:16), ‘너희’, ‘둘’은 원수였습니다. 여기서 이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이 둘 사이는 서로 함께하려야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 원수인 유대인과 이방인이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엡2:18). 하나님 앞에 함께 나아가는데, 원수였던 둘 사이가 예수님 십자가로 화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문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에서, ‘모든 사람’은 이렇게 원수까지도 화목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실행하는 일이 만만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어떤 것 같아요. 강제성 같아요. 하려면 하고 말라면 말라 같아요. 웬만하면 하라 같아요. 좋은 말로 할 때 하라 같아요. 나는 너희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맨 마지막이죠. 그렇습니다. ‘할 수 있거든’은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원수와 화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원수와 화목하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둘 사이 원수된 것을 하나되게 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안에 계신 큰 이모님이 여든 여덟 미수米壽 자리에 초대를 받았을 때일입니다. 저의 어머님 형제 1남 3녀 중 큰 이모님이 가장 연배이신데, 동생들이 먼저 떠나고 혼자 남으셨어요. 기쁜 마음으로 참석을 했습니다. 큰 이모님의 장남이 장로임인데, 저에게 설교를 부탁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이종 외종 사촌가운데, 한 명만 빼고는 다 저보다 연장자인데요. 친지 가운데 유일한 목사이니, 설교를 부탁한다는 큰 형님의 말을 듣고 설교를 했습니다. 큰 이모님은 6남매를 두셨는데요. 손주 며느리 사위에 증손자까지 있어, 그 자손들이 다 모이면 47명입니다. 대가족이지요.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지요. 잔치 자리여서 설교를 길게 할 수 없어, 요약해서 세 가지만 전했습니다.
내가 지난 50여 년 동안 보아온 큰 이모님 권사님은 첫 번째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골 겨울에 논둑길 걷노라면 얼마나 추워요. 사방에 바람막이 하나도 없는 방죽 길, 그것도 캄캄한 겨울 새벽에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이기고 새벽기도회를 다니셨습니다. 오늘 이 가정의 47명의 후손들이 무탈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도의 힘입니다. 두 번째는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나는 어릴 때 어떻게 하다가 큰 이모님 속옷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옷이 다 헤어져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큰 이모님은 그것을 입으셨습니다. 자녀들 6남매를 돌보려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목사님 대접 그리고 형제들을 전도하신 후 제일 좋은 성경을 선물 하셨습니다. 그 성경을 제가 보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섬김을 다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적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누구에게도 험한 말이나, 등을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큰 이모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런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큰 이모님 미수 축하예배 설교 세 번째가 이렇게 “적을 두지 않았다”입니다. 이것은 큰 이모님 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의 신앙 덕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로 천국 가신지 25주년이 되는 장모님을 저는 많은 시간을 같이하지 못했지만, 함께 가족들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구에게도 섬겼다고 합니다. 어렵게 시작해서, 그 지역에 유지 같은 부를 소유하게 되셨는데요. 동기간이 되었건 동네 사람들이 되었던 집에 오면, 식사 대접은 물론이고, 곡간에 곡식들 다 퍼주셨다고 해요. 그러니 사람들이 집에 끊이지를 않죠. 사람들과 화목한 것이지요. 그렇게 하시니까요. 그분의 자녀들이 화목해요. 형제간에 불화한 집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이 또한 하나님의 복이지요. 할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원수라도 화목하라는 곧 내 가족과 내 형제들이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갚지말라
원수를 선대하라 첫 번째는 ‘축복하라’이고요. 두 번째는 ‘화목하라’이고요. 세 번째는 ‘갚지말라’입니다. 복수를 하지 말라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롬12:19) 아멘! 거기까지만 봅니다. 우리가 갚을 것이 있고 갚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요.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왜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까?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원수 갚는 것은 누구에게 있어요. 하나님에게 있으니, 원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다 잘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지 말고 선대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친히 갚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식이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우리나라 설날에 해당하는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제春節에 중국 난정현에서 왕씨 부자 세 명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원인인 충동적이 아니라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살인자인 장커우커우 집안과 왕씨 집안은 20년 전 토지 경계를 놓고 싸움이 잦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싸움이 커지면서, 왕씨 일가가 장커우커우 모친을 폭행했고, 왕씨의 삼남이 던진 의자에 머리를 맞고, 장커우커우 모친은 즉사했습니다. 당시 장커우커우는 12세였고, 누나와 함께 살인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겠어요. 그 후 법원은 왕씨의 삼남 웡정쥔은 미성년자인점을 내세워 징역 7년을 선고 했고, 이 마저도 돈을 써서 왕정쥔은 3년 복역 후 풀려났습니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사건 조사부터 판결까지 제대로 이뤄진 게 없었습니다. 이에 한이 맺힌 장커우커우가 특수부대원으로 복무 후 제대하였고요. 23년간 원한을 품고 있다가 춘제를 맞아, 성묘를 다녀오던 원정진과 그의 아버지와 동생을 무참히 살해한 것입니다. 상대방은 한 명을 죽였는데 세 명을 불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 가운데는 “법은 이미 죽었지만, 아들은 아직 살이있다”, “가난한 사람은 목숨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짠하다” “법은 늘 서민에게 불공평하다” 등 살인범을 두둔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를 종종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으니까 당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심정적으로 원수를 갚는 행위에 동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법부의 불평등한 판결에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도, 원수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자기 자녀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칭하시면서,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이 말은 ‘내 사랑하는 아들아’와 똑같은 말씀 아닙니까? 왜 아버지가 자식의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하시겠어요.
또한 그렇게 해서 원수를 갚는다 치더라고, 자신의 손에 묻힌 피는 지워지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옮겨지게 됩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 당하고 너는 싸다 싸”라는 심정적으로도 원수 갚는 복수에 동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 손 뿐 아니라, 마음에도 피를 묻히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되었습니다. 벌써 70년 전이 일입니다. 그럼에도 지금도 논쟁이 되는 이유는 김구에게 흉탄을 쏜 암살범 안두희가 사건 발생 후 수 분만에 군복 차림의 괴청년들에 의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군인이었던 그는 625전쟁에 참전하면서 형 집행 정지로 제대로 된 실형도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안두희씨는 잠적해 버렸는데요. 나중에는 기업체를 운영하며 1960년대에 골프를 치며 여가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1965년 12월 22일 당시 29살로 독립운동가 집안의 청년 곽태영이 무려 16년간의 추적 끝에 안두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살해를 하였는데요. 죽은 줄 알았던 안두희는 두 차례의 큰 수술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남은 안두희는 그것이 좋은 일이었을 까요? 그동안 가명으로 신분을 감추며 살았던 안두희는 정체가 알려진 후 수 없는 죽음의 위협과 테러를 당합니다.
결국 1996년 10월 23일 안두희는 박기서에게 피살당합니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지 47년 만입니다. 그 47년 동안 안두희씨는 숨어 지내면서, 얼마나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겠어요. 그 안두희를 처단하는데 사용해던 흉기는 시장에 가서 산, 40cm 크기의 홍두깨 비슷한 몽둥이였습니다. 박기서는 이 몽동이 머리 부분에 매직으로 ‘정의봉'이라고 써서 거사에 사용했습니다. 피는 피를 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씨가 몽둥이에 정의봉이라고 셨다고 정의가 실현되었습니까? 아닌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라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께 있다. 이 말은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희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는 자식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를 선대하려면
오늘 저와 여러분 원수를 선대하라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축복하라’, ‘화목하라’, ‘갚지말라’ 복수하지 말라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롬12:16).
우리가 원수에게 선대하는 세 가지 ‘축복하라’, ‘화목하라’, ‘갚지말라’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서로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똑 같은 사안이라도 서로 입장이 다릅니다. 그렇기 각 각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야 원수를 선대하는 축복, 화목, 복수 갚지 않을 수 있는 시작이 됩니다.
두 번째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라’고 하십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둔다는 것은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낮은데 처하라’ 즉 ‘나도 틀릴 수 있다’고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겸손 가운데 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선대하는 축복, 화목, 복수 갚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는 다 안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반감을 사고, 자칫하면 자신의 만든 결박에 자신이 걸려들게 됩니다.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하고 처신을 해 놓았으니, 그게 잘못되게 되면 자신이 독박을 쓰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원수를 선대하는 축복, 화목, 복수를 갚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정리
원수를 선대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롬12:20). 사도 바울만 아니라, 예수님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5:44.참고/마539-41). 당연히 아멘해야 함에도, 부담이라는 인간적인 생각도 가져보게 됩니다. 우리의 지향점을 높게 잡고 계신 것이 아닌가, 솔직히 버거움과 야속함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5),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시며, 높게 지향점을 잡은 이유에 대해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하십니다(마5:46-47). “너희는 이방인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들도 온전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롬12:2). 예수님께서 ‘이방인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와 같은 말씀을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임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자녀인 우리도 온전해야 합니다(롬12:2). 이 말씀에 대하여 저와 여러분은 아멘! 해야 합니다. 동의하기가 힘들더라도 동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인정 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말씀을 보면,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되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을 줄 압니다(롬12:20). 원수를 선대하라입니다.
축복하라. 원수를 선대하라 첫 번째는 ‘축복하라’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4). 나를 ‘박해하는 자’ 또한 원수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들아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사람 기쁘게 하는 자처럼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라고 합니다(엡6:5-7). 이 당시의 종과 주인이 상전과 노비로 주종主從 관계입니다. 노비는 자기 손으로 밥을 먹는 것 빼고는, 모든 자격은 주인에게 위임 당한 것입니다. 엄청난 노역과 인격의 침해가, 다반사인 종들이 주께 하듯 상전에게 하라는 말씀이 앞에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종들 가운데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된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예배에서 지친 삶에 위로를 받고, 다시금 살수 있는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 가운데 이 말씀은 상전에게 폭압당하고 있는 종들의 처지를 몰라서 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듣고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종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신 것입니다. 힘든 고역에도 기쁨으로 감당하며, 입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예전에는 상전 얼굴을 보는 것조차도 몸서리쳐져 회피했었는데, 이제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사랑으로 상전을 대했습니다. 박해한자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들의 변화보다 더욱 큰 일이 나타났습니다. 상전들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종들이 이렇게 변했는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종들이 교회에 나가면서, 이렇게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복한 상전들도 교회가 나아가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상전들이 변화되었습니다.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6:8-9). 둘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종들만 그리스도를 섬기듯 상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상전들도 종들에게 위협을 그치고 압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구원 받기를 원하시고 모두를 위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들도 변화 받아 종들을 선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박해하는 저주하지 말고 축복했을 때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초대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1900년대 초반 전북 김제 금산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자익(1879-1958)은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김제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최고 부자였던 조덕삼(1867-1919)의 집을 찾아가, 그가 운영하는 마방馬房의 마부馬夫로 머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주인 조덕삼은 아들이 다니는 서당 곁을 지나다니는 머슴 이자익이 천자문을 줄줄 외우는 것을 보고 그의 재능을 알아 공부를 시켰습니다. 훗날에는 결혼까지 주선해 주었습니다. 이에 감사한 이자익은 주인 조덕삼을 더 정성껏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테이트Lewis Boyd Tate,1862-1929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주인과 머슴이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조덕삼과 이자익은 함께 집사로 임명받아 섬기게 되었고, 또 1년 후에 교회가 부흥하여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조덕삼은 그 지역의 최고부자일 뿐 아니라, 금산교회의 설립자요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도 흠이 없고 존경받는 자였습니다. 머슴들에게도 쌀밥을 주는 당시로서 생각지도 못하던 일을 했던 조덕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자익을 키워준 사람이나 다름이 없고, 나이도 15살이나 더 많았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양반보다 여인이나 천민들이 더 많았기에 아마 머슴인 이자익에게 더 표를 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당시 장로는 교회를 총책임질 뿐 아니라, 설교도 하는 자였기에, 집사인 조덕삼은 장로인 이자익에게 함부로 하대할 수도 없고, 또 그의 설교도 들어야 하며, 집에서는 자기 머슴인 이작익 장로님을 도와 교회 일을 해야 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결과를 받아든 선교사님은 물론 조덕삼에게 표를 주지 않은 성도들까지도, 이제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했을 것입니다. 선교사를 통하여 당선결과가 발표되자, 장내는 웅성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 조덕삼 집사는 선교사님께 발언권을 얻어,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덕삼 집사는 자신의 머슴 이자익 집사가 먼저 장로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스토리에서 주인이었던 조덕삼 집사가 더 높이 보여요. 머슴이었던 이작익 집사가 더 높이 보여요. 머슴이었던 이작익이 장로가 되었다고 주인인 조덕삼 집사를 무시했겠어요. 그럴리 없지요. 집에서는 더욱 깍듯이 머슴으로서 주인을 모시지 않았겠습니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훗날 장로가 된 조덕삼은 선임인 이자익 장로를 평양으로 유학 보내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하여 목사가 되게 하고, 1915년 금산교회로 청빙하여 자신의 담임목사로 깍듯이 섬겼습니다. 예전에 마부가 목사가 되고 주인이 성도가 된 것이지요. 이 일은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자익은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놀랍게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장로교 역사상 총회장을 재임한 역사가 없다. 그런데 이자익 목사는 총회장을 3번씩이나 역임하면서 장로교의 개혁헌법을 기초하는 등 장로교회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를 키워낸 인물이 바로 자기 집 머슴을 자기보다 먼저 장로로 받들며 교회를 섬겼던 조덕삼 장로입니다.
성경 당시 초대교회 때에도 교회 성도의 70%가 노예 혹은 노예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상전을 주님께 하듯 성실한 마음으로 섬겼습니다(골3:22-23;엡6:5-8). 감동을 받은 상전들은 자신들의 종이 믿는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더 이상 형제를 노예로 부릴 수 없다고 하여, 해방을 선포해주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는 말씀을 왜 지켜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훗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하여도 축복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화목하라. 원수를 선대하라 두 번째는 ‘화목하라’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 ‘모든 사람’안에 원수도 포함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3-14) ‘‘그리스도의 피 예수님의 십자가로 멀리있던 너희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너희’ ‘둘’에 대해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했다고 했습니다(엡2:16), 여기서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이 둘 사이는 서로 함께하려야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원수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엡2:18). ‘모든 사람’은 이렇게 원수까지도 화목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실행하는 일이 만만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나는 너희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은 하나님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원수와 화목하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둘 사이 원수된 것을 하나되게 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안에 계신 큰 이모님이 여든 여덟 미수米壽 자리에 초대를 받았을 때일입니다. 그 가족은 한 명만 빼고 모두가 저보다 연장자이신데 친지 가운데 유일한 목사이니, 설교를 부탁한다는 장로님이신 큰 형님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큰 이모님가 6남매를 두셨는데요. 손주 며느리 사위에 증손자까지 합하면, 47명 대가족입니다. 잔치 자리여서 설교를 길게 할 수 없어, 요약해서 세 가지만 전했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이 세 번째가, 제가 지난 50여 년 동안 보아온 큰 이모님 권사님은 세 번째는 적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누구에게도 험한 말이나, 등을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큰 이모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런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큰 이모님 미수 축하예배 설교 세 번째가 이렇게 “적을 두지 않았다”입니다. 이것은 큰 이모님 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의 신앙 덕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로 천국 가신지 25주년이 되는 장모님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구에게도 섬겼다고 합니다. 동기간이 되었건 동네 사람들이 되었던 집에 오면, 식사 대접은 물론이고, 곡간에 곡식들 다 퍼주셨다고 해요. 그러니 사람들이 집에 끊이지를 않죠. 사람들과 화목한 것이지요. 그렇게 하시니까요. 그분의 자녀들이 화목해요. 형제간에 불화한 집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이 또한 하나님의 복이지요.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원수라도 화목하라는 곧 내 가족과 내 형제들이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갚지말라. 원수를 선대하라 세 번째는 ‘갚지말라’입니다. 복수를 하지 말라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원수 갚는 것은 누구에게 있어요. 하나님에게 있으니, 원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하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지 말고 선대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제春節에 난정현에서 왕씨 부자 세 명이 장커우커우에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장커우커우 집안과 왕씨 집안은 토지 경계를 놓고 싸움이 잦았습니다. 한 날은 싸움이 커지면서, 왕씨의 삼남이 던진 의자에 머리를 맞고, 장커우커우 모친은 즉사했습니다. 당시 장커우커우는 12세에 이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베 법원 왕씨 삼남 웡정쥔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러 징역 7년을 선고 했고, 이 마저도 돈을 써서 3년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이에 한이 맺힌 장커우커우가 특수부대원으로 복무 후 제대한, 23년간 원한을 품고 있다가, 성묘를 다녀오던 원정진과 그의 아버지와 동생을 무참히 살해한 것입니다. 이를 보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으니까 당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심정적으로 원수를 갚는 행위에 동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법부의 불평등한 판결에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도, 원수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칭하시면서,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이 말은 ‘내 사랑하는 아들아’와 똑같은 말씀 아닙니까? 왜 아버지가 자식의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하시겠어요. 또한 그렇게 해서 원수를 갚는다 치더라고, 복수는 복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적으로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손뿐 아니라, 마음도 피 묻히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되었습니다. 벌써 74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인 안두희는 군인으로 625전쟁에 참전하면서, 형 집행 정지로 제대로 된 실형도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안두희씨는 이름을 바꾸고 잠적하면서, 규모있는 사업장을 경여하며, 골프를 피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1965년 12월 22일 당시 29살로 독립운동가 집안의 청년 곽태영이 무려 16년간의 추적 끝에 안두희를 발견 천단을 했지만, 죽은줄 알았던 안두희는 두 차례의 큰 수술로 살아나게 됩니다. 그 후로도 안 씨는 죽음의 위협과 테러를 당합니다. 그런다 1996년 10월 23일 안두희는 박기서에게 피살당합니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지 47년 만입니다. 박기서가 사용한 몽둥이에는 정의봉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의가 실현되었습니까? 아닌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라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께 있다. 이 말은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희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는 자식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를 선대하려면
우리가 원수에게 선대하라 세 가지 ‘축복하라’, ‘화목하라’, ‘갚지말라’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서로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다(롬12:16).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라’고 하십니다(롬12:16). 높은 데 마음을 둔다는 것은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낮은데 처하라’ 즉 ‘나도 틀릴 수 있다’고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겸손 가운데 한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롬12:16). ‘나는 다 안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반감을 사고, 자칫하면 자신의 만든 결박에 자신이 걸려들게 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원수를 선대하는 축복, 화목, 복수를 갚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를 선대하라는 말씀 가운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십니다(롬16:15). 원수의 즐거움이라도 함께 즐거워하고, 슬픔을 당했을 때도 진심으로 함께 울라는 것입니다. 용서하기도 벅찬데 어떻게 원수가 잘되는 것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십니다(롬12:21) 원수에게까지 선대하는 우리의 선이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이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는 수준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당위성 앞에 원수를 선대하는 세 가지 ‘축복하라’, ‘화목하라’, ‘복수를 갚지말라’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것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해야 합니다. ‘나는 옳다’고 생각지 말고 ‘나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다 안다는 식으로는 자칫하면 자신의 만든 결박에 자신이 걸려들 수 있습니다. 이를 기억하고 끝까지 원수를 선대하는 축복하고 화목하고 복수를 갚지 말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응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원수를 선대하라 첫 번째 축복하라. 종들은 엄청난 노역과 인격의 침해를 받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주께 하듯 상전을 했고, 이에 감복받은 상전도 종들에게 위협을 그치고 형제로 대했습니다. 박해한 자까지 축복한 이 변화가 우리의 변화게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원수를 선대하라 두 번빼 화목하라. 내가 적을 두지 않으면 사람이 따르고, 내 형제들과 자손들까지도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원수를 선대하라 세 번째 갚지 말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의 손은 물론 마음도 동조하으로 피를 묻히기 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에게 보응해 주심을 믿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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