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사람
이재현 목사
하나님말씀 : 누가복음 2:22-38 2023.02.12. 主日禮拜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2:22-38)
바울만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롬12:20), 예수님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5:44.참고/마539-41).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높은 지향점을 명하셨습니다(마5:46-48.참고/롬12:2,20).
원수를 선대하라 첫 번째 “축복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4). ‘종들아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사람 기쁘게 하는 자처럼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엡6:5-7). 당시의 종과 주인은 상전과 노비로 주종主從 관계입니다. 엄청난 노역과 인격의 침해가 다반사인 종들이 주께 하듯 상전에게 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종들 가운데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지면서, 고역도 기쁨으로 감당하며, 찬송을 드렸고, 상전을 주께하듯 대했습니다. 그러자 상전들도 교회가 나가기 시작했고,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종들에게 위협을 그치고 압제하지 안혹, 형제처럼 대우하였습니다(엡6:8-9). 박해하는 저주하지 말고 축복했을 때 놀라운 일이 나타났습니다.
원수를 선대하라 두 번째 “화목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 ‘모든 사람’ 안에 원수도 포함됩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십자가로 소멸’했다고 했습니다(엡2:14,16), 여기서 둘은 원수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이 둘 하나 되게 한 것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큰 이모님 미수米壽 설교를 하게되었는데요. 지난 50여 년간 적을 두지 않으신 것을 전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분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천국 가신 저의 장모님도 누구에게도 섬겼다고 합니다. 식사 대접은 물론이고, 곡간에 곡식들 퍼주셨다고 해요. 그러니 사람들이 집에 끊이지를 않죠. 화목한 것이지요. 그로 인해 자녀들이 화목해요. 형제가 화목한 것이지요.
원수를 선대하라 세 번째 “갚지말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롬12:19). 원수를 갚지 말고 선대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집안의 토지 경계 싸움으로 한 집안의 어머니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조사도 상응하는 처벌도 없이 석방되자, 원한에 사무친 아들이 23년 지난 어느날 상대방 가족 세 명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이를 보고 “그렇게 했으니까 당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심정적으로 원수를 갚는 행위에 동조일 수 있습니다. 사법부의 불평등한 판결에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도, 원수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자식인 우리의 손뿐 아니라, 마음도 피를 묻히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원수을 선대하하기 위해서는 ‘서로 마음을 같이해야’(롬12:16).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라’(롬12:16). ‘나는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12:16). ‘나는 다 안다’는 식은 상대방에게 반감을 사고, 자칫하면 자신의 만든 결박에 자신이 걸려들게 됩니다. 그래야 원수를 축복, 화목, 복수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십니다(롬12:21).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높은 지향점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태어나신 지, 40일 째 날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눅2:22). 본문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정결 예식의 날’은 출산한 여인에게 정해진 법인데요. 유대의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지나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녀를 해산한 산모는 부정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는 부정하게 된 산모와 아이들을 위해서 정결케 될 수 있는 제도를 정했는데요. 정결케 되는 기간을 남자 아이를 출생한 경우에는 ‘이레’, 칠일 동안은 ‘부정하리니’, ‘삼십삼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할 수 있습니다(레12:2-4). 그리고 여자 아이를 출생한 경우에는 남자 아이 보다 배가 되는데요. ‘두 이레’ 즉 14일 동안 ‘부정하리니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 일을 지내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레12:5)
그래서 남자 아이를 출산한 여인은 40일, 여자 아이인 경우는 80일에 최종 정결 예식으로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립니다(레12:1-5). 본문의 ‘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은 바로 그 뜻으로 누가 이 규례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에요. 맞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안고 성전으로 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신 지 40일 째 되는 날 있었던 이야기가 본문입니다.
출산한 여인들은 정결예식 때 두 가지 제사를 드리는데요. 첫 번째 ‘번제’燔祭,Burnt Offering:제물을 불에 태워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제사.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두 번째 ‘속죄제’贖罪祭,Sin Offering:죄를 속하기 위해 하느님께 드린 동물희생의 제사.는 출산에 따른 부정不淨을 제거하는 뜻에서 드립니다. 이때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를 드리는 것이 통례이지만, 가난한 경우에는 번제로 양 대신 신 비둘기나 집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 드릴 수 있었습니다(레12:6-8).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도 성전에 올라가서,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2:24).
그런데 이렇게 제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날 아이도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눅2:23). 율법에서는 첫 태생 즉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연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간의 종살이를 마치고 나오게 될 때, 하나님이 완악한 애굽 왕 바로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애굽의 가축이건 사람이건 모든 장자를 죽이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무사히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건 것은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출13:15).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것을 기억하게 하시고자, 유대인들은 첫 태생인 가축과 장자인 큰 아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첫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림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는 언약의 표시인 것입니다(출13:1-22.참고/출22:29,34:19;민3:11-13;40-51,8:16-18;신 15:19).
그런데 모든 장자를 제물로 드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첫 아기를 제물로 드리는 일을 대치시키기 위해 레위 지파를 성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가운데 레위 지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전과 제사 등에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 성별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스라엘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숫자의 비율에 맞지 않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 수만큼, 즉 한 사람당, 다섯 세겔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습니다(민3:46-47). 그러므로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눅2:23).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가, 다섯 세겔을 드림으로 장자인 예수님을 율법에 정한대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정결예식과 율법이 정한 규례를 통해 드려진 예수님은 사실 그렇게 드려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죄인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 정결예식과 율법이 정한 규례는 죄인인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은 지키지 않으셔도 되지만, 모든 것을 다 지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심으로 율법을 통해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을 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태어나시면서 사실상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사람
예수님이 태어나신 지, 40일 때 되는 날, 정결예식과 율법의 규례를 지키기 위해 성전을 찾았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전혀 생각지 않은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을 알아본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처음에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목자들과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 등 몇 몃 사람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 외는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예수님을 알아본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성전에서 오래전부터 메시아 구원자를 기다라고 있던 두 사람이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시므온’Simeon,‘(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입니다. 이 시므온이 어느 출신인지 그 배경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현재 신앙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2:25).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란, 이스라엘의 메시아 구원자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입니다.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눅2:26-27). 아멘! 거기까지만 읽겠습니다. 성령의 임함을 받은 시므온은 ‘주의 그리스도’ 즉 메시아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날도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성령을 지시를 받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올라간 시므온은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눅2:26-27).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성령을 지시를 받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올라간 시므온은 ‘마침’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 데리고 온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비록 태어난 지, 사십 일 밖에 되지 않은 아기였지만, 성령충만함을 받은 시므온은 한 눈에 아기 예수가 메시아 구원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았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이에요. 구원자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니 말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먼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시므온이 드린 찬송의 내용을 함께 읽겠습니다.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2:29-32). 이 시므온의 찬송을 들은 요셉과 마리아는 ‘놀랍게 여겼다’고 하였습니다(눅2:33).
왜! 예수님의 부모가 놀랐습니다. 시모온의 찬송은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도 전, 마리아의 배 안에 잉태될 때부터 천사에게서 듣고, 마음에 간직해두었던 말들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0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0-33). 예수님의 잉태를 고지해준, 천사를 통해 들은 메시지와 본문의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께 찬송한 내용이 동일함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시므온의 찬송을 듣고, 요셉과 마리아가 놀랄 수밖에요.
시므온은 자기의 말을 놀랍게 여기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2:34-35). 시므온은 자기의 말을 놀랍게 여기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를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의 이 말 또한 놀라운 말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못함으로써,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메시아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서기관과 바리새인 등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기와 배척을 당하고 대역죄인으로 몰리게 되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위한 모의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이 당할 십자가의 모진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일로,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시므온은 끝으로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과 그에게 적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분명한 구별이 드러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으로 나아갈 자, 사이를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과 마리아가 시므온으로부터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그 감격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을 때, 성전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안나’Anna,‘은총’, ‘은혜’입니다.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눅2:36-37). 아멘! 앞에 시므온은 출신에 대하여 설명이 없는 반면, 안나에 관해서는 ‘아셀 지파 바누에의 딸’이고, ‘선지자’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로 볼 때, 안나 또한 시므온 못지않게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그의 신실함을 알 수 있습니까?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는데요.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에는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고 하지만, 원문은 그녀가 아기 예수를 만난 때가, 팔십사 세 때라는 것인지 아니면, 혼자 된지 팔십사 년이 된 해라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때가 84세라면, 그 당시 여자들이 조혼했던 것으로 볼 때, 보통 열네 살 정도에 결혼하는 했을 것으로 보이고요, 칠 년을 남편과 살고, 과부가 되었다면, 73년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는 것이고요. 과부 된 후 혼자 팔십사 년을 살았다고 한다면, 그녀의 나이는 백오 세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려 84년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전자가 되었던 후자가 되었건, 이 고령의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는 이 안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73년 혹은 84년 간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한 여 선지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금식이, 하루 세 끼 모두, 73년간 혹은 84년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루 한 끼 혹은 정한 기간 금식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므온이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그리고 이 날도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다’것과는 다르게, 이 여인에 관해서는 그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관해서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 어떻게 일생 동안 성전에서 날마다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본문에 많은 구절을 할애해서, 시모온의 찬양과 예언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아기 예수를 만난 안나의 대언은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2:38).
안나 또한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이란 예루살렘의 구원을 말합니다. 안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루살렘의 속량’으로 말씀하고 있고,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나 역시 시모온과 같이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구원자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나는 일평생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기도하며, 이스라엘의 죄와 그로 인해 겪고 있던 민족적 고난의 삶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회복의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하며,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기 예수를 본 그녀는 오랜 기간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이라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말하는 것이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란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 용서와 그들의 고난과 절망의 삶으로부터, 구원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회복을 바라는 것입니다. 안나는 아기 예수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이심을 확신하며, 사람들에게 그를 통해 드디어 민족의 염원이 이루어질 것임을, 성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시므온과 안나가 얼마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품에 안겨 태어 난지, 40일째 되는 아기 예수님을 메시아 구원자로 알고,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이 우리가 기다리던 구원자임을 사람들에게 전했으니 말입니다. 세례요한을 가리켜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한자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본 세례 요한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하였습니다(요1:36).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세례 요한보다 30년 전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증거한 이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시므온과 안나가 어떻게 이런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것을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적용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은혜의 사람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고 항상 생각해야 한다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은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첫째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고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모두 성전에 있었습니다. 안나는 일생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눅2:36). 시므온은 성전에 있은 지, 그 기간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라’, ‘성령의 감동으로’으로 라는 말씀을 볼 때, 하루아침에 우연히 성전에 들렸다가, 예수님을 만나 것이 아니라, 안나 못지않게 오랜 시간 성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눅2:25-27). 우리가 경험적으로 볼 때, 성령님께서 인도하실 때, 한 순간에도 인도도 하시지만, 오래 시간 이렇게 저렇게 훈련을 시키신 후, 이제 인도해도 되겠다고 할 때, 인도해 주시지 않습니까? 시므온과 안나 둘 다, 그 오랜 동안 주님의 뜻을 기다린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성전은 어디입니까? 성경은 성전에 대하여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저와 여러분이 성전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전인 여러분의 가정도 성전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성전임을 알고 있으시죠. 오늘 본문에 성전에서 시므온과 안나를 통해 가리켜주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각 각 자기 성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내해야 합니다. 가정이 여러분의 성전임을 믿는다면, 여러분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에 오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일생 동안 성전에서 인내하게 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에요.
오늘 본문에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예수님을 만났다 말씀합니다(눅2:27). 안나도 이 날 ‘마침’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2:38). 시므온도 ‘마침’, 안나도 ‘마침’입니다. 무엇을 알게 합니까? 다른 날 내내 잘 나오다가, 이 날 오지 않았다면, 그동안 기다렸던 예수님을 못 만난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태어 난지, 40일 째 되는 이 날, 성전을 찾으신 후, ‘열두 살’이 된 던 해 ‘유월절’ ‘절기의 관례’를 따라, 성전에 올라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2:41-42). 그러므로 시므온과 안나가 일생동안 성전을 찾았다가, 본문의 이 날 성전에 있지 않았다면, 12년을 더 기다려야 예수님을 만났을 줄 모를 일입니다. 그것도 가정일 뿐이고요. 시므온과 안나가 그 후까지 생존해 있을 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삶을 주셨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이 성전인바 인내하세요. ‘마침’ 여러분에게 응답의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내가 성전임으로 내 가정이 성전이고, 내가 섬기는 청아비전교회가, 나에게 성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도 공히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인내하세요. 우리 교회 예배당 문턱이 닳기까지 오세요. ‘마침’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가를 바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사람인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은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둘째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사람인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성도의 가정이 성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섬기는 교회가 성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성전인 가정과 교회에 내가 있어야 할 사람인가를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우리 집안사람이 맡는 사람인가 회의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참 본인도 다른 가족들에게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가 계시고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가 계신데, 정말 내 부모인가? 나는 저 부모에게 합당한 자식인가를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한 데는 “나는 우리 집에서 안 맞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충돌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날 때, 갈등을 갖게 될 때, 그러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맞아서 사는 가족이 얼마나 되던 가요? 그저 내 부모니 하고, 내 자식이니 하고, 내 배우자니 하고 사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시고 맞이하게 하신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토기장이라는 찬양 아시지요. 그 가사에서 김정석 목사님은 이러한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너를 다 빚은 그날에 누구에게 널 맡길지 한참을 돌아본 후에 너를 보낼 수 있었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는데요.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후, 우리에게 가장 좋은 부모가 누구일까 한참을 돌아본 후, 하나님이 정하신 가장 좋은 부모에게 우리를 맡겼다는 하나님의 심정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단 부모에게만 이겠어요. 우리의 자녀도 우리의 배우자도 마찬가지일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교회가 가정이며, 성전인바, 이 역시 동일한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이 교회에서 성도로 제직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나님이 예배자로 세우신 것이 맞는가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시므온을 이끄셨던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끄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고, 하나님에게 산 제물로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이 교회에서 예배자로 세우신 것을 확신해야, 그 중심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시므온과 안나에게 임한 주의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저는 개인 기도 시간에 2-3시간 정도를 기도하는데요. 그 중 가정 첫 번째 기도제목이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들이 되게 하옵소서!”입니다. “주일 1, 2, 3부 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그리고 전도 봉사 섬김 세미나 등 모든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배에 참여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병든 자들이 고침 받고, 연약한 자들이 강건해지고, 상함 받은 자들이 치유 받고, 잃었던 신앙을 회복하게 하옵소서!”라고 이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예배에 내가 이 교회에 예배자로 세워졌다는 확신을 갖고 드릴 때, 그 중심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나의 성전인 나의 가정과 나의 교회에 있어야 할 사람이라는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오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어야 할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은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셋째는 “내게 있어야 할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내게 소중한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한 분들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여깁니다.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난 데에서, 내 인생의 고통의 원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을 만나요. 내가 ○○은 아닌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상고해보세요.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요. 부모님 없이 지금 여러분들이 존재할 수 있나요? 지금 여러분이 있기까지, 부모님의 영향이 없나요. 그런데 내 부모에 대해 존중하지 못하는 것은 비교하기 때문이에요. 내 집 보다 다른 집 아이들 부모들은 잘해주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학업 뒷바라지부터,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모든 면에서, 내 부모보다, ‘Better'인 거예요. 이 비교 때문에 정말 소중한 부모를 소중하게 보지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저의 집은 부유하지 못했습니다. 도지賭地를 받아 농사를 지었고, 친척집 밭을 빌어 작물을 심었습니다. 여러분이 저의 이미지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는데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리어카를 끌었습니다. 중학교 때 똥통을 메었습니다. 똥통이 무엇인지 아세요. 예전에는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했기에 다 차면, 퍼서 재에 묻고 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똥통을 멘 것이지요. 우리 바로 앞집에 제 동창이었었는데요. 우리 동네에서 가장먼저 TV를 놓았습니다. 옛날에는 TV 한 대를 설치하려면, 방송을 잡기 위해 3M짜리 안테나를 가정마다 설치해야 했습니다. 그 TV안테나 있는 집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저의 어머니는 많이 아프셨습니다. 제가 기억으로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니 어쩌면, 어머니는 그 이전부터, 아프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13살부터, 제 나이 스물두 살, 어머니가 돌아가신 까지, 거의 10년 동안, 어머니가 해준 밥보다, 제가 밥을 해서 어머니를 드려야 한 날이 더 많습니다. 어머니 아프신 것 고치기 위해 시골에서 서울로 그리고 여러 지방을 어릴 때부터 많이 다녔습니다. 중학교 때 제 몸무게가 37Kg이었습니다. 손바닥에 꺼풀이 자꾸 벗겨져요. 무슨 허물을 벗 듯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영양실조 이었더군요.
세상말로 하면, 저는 부모 복이 참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병환 중에도,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제가 부모에게 받은 몇 가지 안 되는 유산 중 하나이지만, 저에게는 평생에 있을 수 없는 믿음의 유산인 것이지요. 그것을 알 때,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 부모를 만나게 하셨는지를 아는 것이지요. 내 부모가 소중한 것을 아는 것이지요.
나의 가정이 성전이고, 나의 교회가 성전인바, 이에 대한 적용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 목사님과 성도님들에 대해서 소중함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입술이 부르트도록 기도하고, 여러분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하고 싶은 말 다하지 못하고 애태우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분이 누구세요? 저에게 무능하다고 말해도, 저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어요. 실제 무능하니까요.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그런 말하지요. “돌아보니 그때 나와 있던 사람이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다”고요. 그렇다면 지금 나와 있는 교회 공동체 가족들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인내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따랐을 때, 그곳에서 가장 소중한 분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나의 성전인 나의 가정과 나의 교회에서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믿어야합니다. 작은 예수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 보낸 작은 예수인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오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도움이 된다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은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넷째는 “내가 있어야 도움이 된다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는 것은, 반복해서 말씀을 드렸고요.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하는데요. 우리는 연약하고 또한 이기적인 인간인지라, 내가 도움을 받을 곳을 찾는 곳이 우선입니다.
본문에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며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칭송을 받았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도움으로 섬겼던가를 알게 합니다. 안나 또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며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였다고 하였는데요. 안나의 이러한 경건함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경건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정성껏, 물질로 기도로 사랑으로 섬기는 것을 우리는 신앙적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므온과 안나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분, ‘이스라엘의 위로’, ‘예루살렘의 속량’ 즉 이스라엘에 구원을 주실 메시아를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을 떠나지 않은 것은, 개인적인 은혜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민족에게 구원이라는 복된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성전인 가정과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결단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함과 이기가 내재하고 있기에 나에게 도움을 우선 찾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기억하세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요15:13). 자신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예수님 자신이 아니요 우리를 위한 이타적인 사랑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어야 도움이 된다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능력이 나타나는 일입니다. 거룩한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성전인 나의 가정과 나의 교회에서 내가 있어야 도움이 된다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오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있는 곳이다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은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섯째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있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반추한 말씀 가운데,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입니다. 교육전도사 때, 한 달 사례비가 노동일 이틀 치 일당도 안 되었습니다. 집을 고바우에 있는 빌라 지하에 얻었는데요. 침침한 곳이기에 바퀴벌레가 많았습니다. 외출했다고 들어오면, 방 입구에 바퀴벌레가 환영해요. 한두 마리가 아니고, 바글바글하게 말이죠, 불을 켜면 황급히 흩어집니다. 제가 그것을 발로 발 밭았어요. 그런데 큰아이가 두 살 때인데요. 아빠의 그 모습을 보고는 집에 들어오면, 발로 바퀴벌레를 밟는 거예요.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이요. 그런 집인데 가고 싶겠어요. 그러나 온종일 밖에서 일하고 발길을 집으로 향할 때, 그래도 내 가족과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니,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찬송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곳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있는 곳이 여러분이 있어야 할 곳이에요.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함을 받고, 안나는 여 선지자로서, 일생동안 성전에 있었던 것이 쉬운 일이었겠어요. 그 시간 동안 변개하고 싶고, 시험에 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왜 없었겠어요. 그들도 인간인데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전에 있으라고 하신 말씀, 지금 있어야 할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알았기에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성전인 나의 가정과 나의 교회가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오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리
예수님 태어나신 지, 40일 째 날
‘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눅2:22). 유대의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지나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습니다. 남자 아이를 출생한 경우에는 40일 여자 아이는 80에 최종 정결 예식으로서, 번제와 속되제를 드립니다(레12:1-5). 예수님이 태어나신 지 40일 째 되는 날 있었던 이야기가 본문입니다. 이 때 두 가지 제사를 드리는데요. 첫 번째 ‘번제’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두 번째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을 제거하는 뜻에서 드립니다. 이때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를 드리는 것이 통례이지만, 가난한 경우에는 번제로 양 대신 신 비둘기나 집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 드릴 수 있었습니다(레12:6-8).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도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고 하였습니다(눅2:24).
그런데 이렇게 제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날 아이도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아기를 주께 드리고’(눅2:23).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간의 종살이를 마치고 나오게 될 때, 하나님이 완악한 애굽 왕 바로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애굽의 가축이건 사람이건 모든 장자를 죽이셨습니다(출13:15).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것을 기억하게 하시고자, 유대인들은 첫 태생인 가축과 장자인 큰 아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첫째를 드림은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는 언약의 표시입니다(출13:1-22.참고/출22:29,34:19;민3:11-13;40-51,8:16-18;신 15:19). 그런데 모든 장자를 제물로 드릴 수 없지 않기에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가운데 레위 지파는 성별하여 성전과 제사 등에 관련된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숫자의 비율에 맞지 않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 수만큼, 즉 한 사람당, 다섯 세겔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습니다(민3:46-47).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거룩한 자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눅2:23).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가, 다섯 세겔을 드림으로 장자인 예수님을 율법에 정한대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결예식과 율법이 정한 규례를 통해 드려질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 정결예식과 율법이 정한 규례는 죄인인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은 지키지 않으셔도 되지만, 모든 것을 다 지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심으로 율법을 통해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을 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면서 사실상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사람
정결예식과 율법의 규례를 지키기 위해 성전을 찾았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전혀 생각지 않은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을 알아본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시므온’Simeon,‘(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입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위로’ 메시아 구원자를 ‘기다리는 자’로 ‘성령이 그 위에 계’셨습니다(눅2:25).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시므온은 ‘주의 그리스도’ 즉 메시아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눅2:26-27). 그리고 이 날도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다’고, ‘마침’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 데리고 온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눅2:27). 비록 태어난 지, 사십 일 밖에 되지 않은 아기였지만, 성령충만함을 받은 시므온은 한 눈에 아기 예수가 메시아 구원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먼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눅2:29-32). 이 시므온의 찬송을 들은 요셉과 마리아는 ‘놀랍게 여겼다’고 하였습니다(눅2:33). 시므온의 찬송은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도 전, 그가 마리아의 배 안에 잉태될 때부터 천사에게서 듣고, 마음에 간직해두었던 말들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참고/눅1:30-33). 시므온은 자기의 말을 놀랍게 여기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를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눅2:34-35).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못함으로써,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를 메시아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된다’(눅2:34)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기와 배척을 당하고 대역죄인으로 몰리게 되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위한 모의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2:35).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이 당할 십자가의 모진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일로,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라’(눅2:35). 예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과 그에게 적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분명한 구별이 드러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으로 나아갈 자, 사이를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요셉과 마리아가 시므온으로부터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그 감격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을 때, 성전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안나’Anna,‘은총’, ‘은혜’입니다. ‘아셀 지파 바누에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눅2:36). 안나 또한 시므온 못지않게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 되었더라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눅2:37). 아마도 예수님을 만난 때가 84세로 당시 조혼 풍속을 볼 때, 열네 살 정도에 결혼했을 것이고요. 칠 년을 남편과 살고, 과부가 되었다면, 73년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는 이 안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73년 하루 한끼라고 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 역시 시므온이 같이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 어떻게 일생 동안 성전에서 날마다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안나 역시 먼저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눅2:38). 그리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2:38). ‘예루살렘의 속량’이란 예루살렘의 구원을 말합니다. 안나 또한 시모온과 같이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구원자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나는 일평생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기도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그로 인해 겪고 있던 민족적 고난의 삶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회복의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하며,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기 예수를 본 그녀는 오랜 기간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이심을 확신하며, 사람들에게 그를 통해 드디어 민족의 염원이 이루어질 것임을, 성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은혜의 사람은
시므온과 안나가 얼마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 보다 30 여 년 번에 메시아의 증언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참고/요1:36). 시므온과 안나가 어떻게 이런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것을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적용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고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안나는 일생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시므온도 성령의 지시를 따른 것을 볼 때, 오랜 시간 성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눅2:25-27,36). 성령님께서 이끄실 때, 한 순간에도 인도도 하시지만, 많은 시간을 훈련을 시키신 후, 이제 인도해도 되겠다고 할 때, 인도해 주시지 않습니까? 시므온과 안나 둘 다, 그 오랜 동안 주님의 뜻을 기다린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성경은 성전에 대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고전3:16). 그렇다고 한다면 성전인 우리의 가정도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시므온과 안나를 통해 가리켜주는 것이 있습니다. 각 각 자기 성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내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안나도 이 날 ‘마침’ 예수님을 만났습니다(눅2:27,38). 다른 날 내내 잘 나오다가, 이 날 오지 않았다면, 그동안 기다렸던 예수님을 못 만난 것입니다. 이 날 이후 예수님은 ‘열두 살’이 된 던 해 ‘유월절’ ‘절기의 관례’를 따라,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눅2:41-42). 시므온과 안나가 일생동안 성전을 찾았다가, 오늘 성전에 있지 않았다면, 12년을 기다려야 예수님을 만났을 줄 모를 일입니다. 그것도 가정일 뿐이고요. 시므온과 안나가 그 후까지 생존해 있을 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삶을 주셨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이 성전인바 인내하세요. ‘마침’ 여러분에게 응답의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내가 성전임으로 내 가정이 성전이고, 내가 섬기는 청아비전교회가, 나에게 성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도 공히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인내하세요. 우리 교회 예배당 문턱이 닳기까지 오세요. ‘마침’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가를 바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사람인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가 계시고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가 계신데, 정말 내 부모인가? 나는 저 부모에게 합당한 자식인가를 의문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데는 “나는 우리 집에서 안 맞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충돌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날 때, 더욱 그러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맞아서 사는 가족이 얼마나 되던 가요? 그저 내 부모니 하고, 내 자식이니 하고, 내 배우자니 하고 사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시고 맞이하게 하신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섬기는 교회에도 동일한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이 교회에서 성도로 제직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나님이 예배자로 세우신 것이 맞는가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시므온을 이끄셨던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끄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고, 하나님에게 산 제물로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이 교회에서 예배자로 세우신 것을 확신해야, 그 중심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줄 믿습니다. 저는 개인 기도 시간 가정 첫 번째 기도제목이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들이 되게 하옵소서!”입니다. “주일 1, 2, 3부 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그리고 전도 봉사 섬김 세미나 등 모든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배에 참여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병든 자들이 고침 받고, 연약한 자들이 강건해지고, 상함 받은 자들이 치유 받고, 잃었던 신앙을 회복하게 하옵소서!”라고 이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예배에 내가 이 교회에 예배자로 세워졌다는 확신을 갖고 드릴 때, 그 중심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나의 성전인 나의 가정과 나의 교회에 있어야 할 사람이라는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오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내게 있어야 할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내게 소중한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난 데에서, 내 인생의 고통의 원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요. 부모님 없이 지금 여러분들이 존재할 수 있나요? 지금 여러분이 있기까지, 부모님의 영향이 없나요. 그런데 내 부모에 대해 존중하지 못하는 것은 비교하기 때문이에요. 내 집 보다 다른 집 아이들 부모들은 정말 잘해주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그래서 정말 소중한 부모를 소중하게 보지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저의 집은 부유하지 못했습니다. 도지賭地를 받아 농사를 지었고, 친척집 밭을 빌어 작물을 심었습니다. 여러분이 저의 이미지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는데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리어카를 끌었습니다. 중학교 때 ○통을 메었습니다. 유복했던 동창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TV를 놓았는데 많이 부러웠습니다. 어머니는 많이 아프셨습니다. 제 나이 13살부터, 스물두 살,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가 밥을 해서 드린 날이 더 많습니다. 중학교 때 37Kg였는데 손바닥에 꺼풀이 자꾸 벗겨져 알고 보니, 영양실조 이었더군요. 세상 말로 하면, 저는 부모 복이 참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병환 중에도,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잊을 수 없는 믿음의 유산입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이 왜! 내게 이 부모를 주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내 부모가 소중한 것을 아는 것이지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 목사님과 성도님들에 대해서 소중함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입술이 부르트도록 기도하고, 여러분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하고 싶은 말 다하지 못하고 애태우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분이 누구세요? 우리 그런 말하지요. “돌아보니 그때 나와 있던 사람이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다”고요. 그렇다면 지금 나와 있는 교회 공동체 가족들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나의 성전인 나의 가정과 나의 교회에서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믿어야합니다. 그리할 때 오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는 “내가 있어야 도움이 된다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또한 이기적인 인간인지라, 내가 도움을 받을 곳을 찾는 곳이 우선입니다. 시므온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칭송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도움으로 섬겼던가를 알게 합니다. 안나 또한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한 경건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정성껏, 물질로 기도로 섬기는 것을 우리는 신앙적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므온과 안나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분, ‘이스라엘의 위로’, ‘예루살렘의 속량’ 즉 이스라엘에 구원을 주실 메시아를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을 떠나지 않은 것은, 개인적인 은혜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민족에게 구원이라는 복된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성전인 가정과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결단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함과 이기가 내재하고 있기에 나에게 도움을 우선 찾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기억하세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요15:13). 자신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예수님 자신이 아니요 우리를 위한 이타적인 사랑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어야 도움이 된다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능력이 나타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성전인 나의 가정과 나의 교회에서 내가 있어야 도움이 된다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오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있는 곳입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입니다. 교육전도사 때, 한 달 사례비가 노동일 이틀 치 일당도 안 되었습니다. 집을 고바우에 있는 빌라 지하에 얻었는데요. 침침한 곳이기에 바퀴벌레가 많았습니다. 외출했다고 들어오면, 방 입구에 바퀴벌레가 환영해요. 한두 마리가 아니고, 바글바글하게 말이죠, 불을 켜면 황급히 흩어집니다. 제가 그것을 발로 발 밭았더군요. 그런데 큰아이가 두 살 때인데요. 아빠의 그 모습을 보고는 집에 들어오면, 발로 바퀴벌레를 받는 거예요.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이요. 그런 집인데 가고 싶겠어요. 그러나 온종일 밖에서 일하고 발길을 집으로 향할 때, 그래도 내 가족과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니,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찬송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곳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있는 곳이 여러분이 있어야 할 곳이에요.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함을 받고, 안나는 여 선지자로서, 일생동안 성전에 있었던 것이 쉬운 일이었겠어요. 그 시간 동안 변개하고 싶고, 시험에 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왜 없었겠어요. 그들도 인간인데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전에 있으라고 하신 말씀, 지금 있어야 할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알았기에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성전인 나의 가정과 나의 교회가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오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구원자로 선포한 은혜를 입은 데에는, 성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습니다. 안나 또한 같은 은혜를 받은 데에는 끝까지 인내하고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물론 이 또한 성령의 도우심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통해 성령님의 직접적인 개입이던, 아니면 나의 성전 즉 내 가정과 교회에 함께하겠다는 믿음의 신념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되고,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시므온과 안나가, ‘마침’이라는 말씀을 새기에요. 평소에 잘하다가, 이 날 성전에 있지 않았으면,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침’ 즉 여전히 성전에 있을 때, 예수를 만나는 은혜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가족 모두에게 이러한 은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성전에 머물렀던 것과 같이,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성전인 우리가 있는 가정과 교회가 성전입니다. 우리도 성전인 가정과 교회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가를 확신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뜻을 인내할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자신들의 성전에 있어야 할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내 성전인 가정과 교회에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그래야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인내했을 때, 가장 소중한 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내 성전인 가정과 교회에 지금 함께하고 있는 분들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지금 있는 그 사람이 나에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작은 예수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자신들의 은혜만을 위해 성전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는 구원자를 증거 하기 위해 있었습니다. 우리도 내 성전인 가정과 교회에 내가 있어야 도움이 된다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가족과 성도들 모두 내가 있어야 할 가정과 교회에 있다는 은혜를 갖게 하옵소서. 성령님 도와주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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