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나님말씀 : 로마서 12:14-21
하나님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고 하셨습니다(사63:13). 이 말씀은 ‘교회에서 위로 받으리니’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새 예루살렘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로하심을 내리어 주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란,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사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즉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임으로 우리가 교회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더욱 풍성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참고/행20:28). 교회 사랑은 성도 사랑과 같습니다. 예수님 구주로 고백한 성도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성도님을 사랑해야 합니다(잠27:23). 성도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 목사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더욱 믿음의 가정들’ 즉 성도들을 사랑해야 된다고 말씀입니다(갈6:10). 하나님이 자기 피 값을 주고, 살만큼 사랑하는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오늘도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풍성히 임하기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교회와 함께 기뻐하라.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사66:10). ‘성읍’은 예루살렘이고, 오늘날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귀신을 내어 쫓을 만큼 큰 능력을 기뻐하기보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눅10:20). 생명책에 녹명錄名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동역자들이 충성된 일꾼이었다는 점보다.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빌4:3). 그것이 가장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구원받지 않았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천국에 들어갈 자에 대하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계21:27.참고/계20:15). 생명책에 기록된 한 가지만 갖고도 기뻐하며, 녹명해주신 하나님만을 즐거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뻐할 때, 시너지 백배,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더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와 함께 슬퍼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사66:10). 성은 예루살렘을 지칭하고, 오늘날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와 함께 슬퍼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함께 슬퍼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크신 위로하심을 내리어 주시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로함은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이 위로를 받을 곳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전도 여행 중 큰 고초를 겪었을 때, 디도가 찾아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위로를 전했습니다(고후7:5-6). 예전에 바울이 개척한 교회 성도들이 이제 성장해서, 이제는 바울을 위하여 사모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어요(고후7:7). 서로 위로한 자리에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함께 슬퍼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가득 넘치게 하십니다.
교회와 함께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슬퍼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은 충족하게 됩니다. 젖을 빠는 아이가 젖을 마음껏 섭취한 후, “꺼억”소리를 내듯이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충족한 성도’가 됩니다(사66:11). 마음에 평강이 강 같이 흐르는 ‘평강한 성도’가 됩니다(사66:12). 영육 간에 강건해지는 ‘강건한 성도’가 됩니다(사66:14). 요즘 무료 동영상를 통해 신앙적인 부분에서 많은 정보를 제공 받고 있습니다. 자칫 주제별로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여 내가 만든 교회를 찾고 있지 않나 우려됩니다. 교회 구성원으로 교회를 함께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온전한 성도로 세워져 갈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1. 바울만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롬 12:20), 예수님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 셨습니다(마5:44.참고/마539-41). 그 이유에 대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 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시며, 높은 지향점을 명하셨습니다(마5:48). 우리는 하 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참고/마5:46-47;롬12:2,20). 다음 원수를 선대하라 첫 번 째 “축복하라”에 대한 글입니다.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4). ‘종들아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사람 기쁘게 하는 자처럼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엡6:5-7). 당시의 종과 주인은 상전과 노비로 주종主從 관계입니다. 엄청난 노역과 인격의 침해가 다반사인 종들이 주께 하듯 상전에게 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종들 가운데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지면서, 고역도 기쁨으로 감당하며, 찬송을 드렸고, 상전을 주께하듯 대했습니다.
그러자 의아하던 상전들은 종들이 교회에 나가면서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상전들도 교회가 나아가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상전들도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는 말씀에 따라 행했습니다(엡6:8-9). 상전들은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알고 종들에게 위협을 그치고 압제하지 않았습니다. 박해하는 저주하지 말고 축복했을 때 놀라운 일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박해하는 자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릅니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 축복하기를 소망합니다.
2.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1900년대 초반 전북 김제 금산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자익(1879-1958)은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김제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최고 부자였던 조덕삼(1867-1919)의 집을 찾아가, 그가 운영하는 마방의 마부로 머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주인 조덕삼은 아들이 다니는 서당 곁을 지나다니는 이자익이 천자문을 줄줄 외우는 것을 보고 그의 재능을 알아 공부를 시켰습니다. 훗날에는 결혼까지 주선해 주었습니다. 이에 감사한 이자익은 주인 조덕삼을 더 정성껏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테이트Lewis Boyd Tate,1862-1929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주인과 머슴이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조덕삼과 이자익은 함께 집사로 임명받아 섬기게 되었고, 또 1년 후에 교회가 부흥하여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조덕삼은 그 지역의 최고부자일 뿐 아니라, 금산교회의 설립자요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도 흠이 없고 존경받는 자였습니다. 머슴들에게도 쌀밥을 주는 당시로서 생각지도 못하던 일을 했던 조덕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자익을 키워준 사람이나 다름이 없고, 나이도 15살이나 더 많았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양반보다 여인이나 천민들이 더 많았기에 아마 머슴인 이자익에게 더 표를 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당시 장로는 교회를 총책임질 뿐 아니라, 설교도 하는 자였기에, 집사인 조덕삼은 장로인 이자익에게 함부로 하대할 수도 없고, 또 그의 설교도 들어야 하며, 집에서는 자기 머슴인 이자익 장로님을 도와 교회 일을 해야 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결과를 받아든 선교사님은 물론 조덕삼에게 표를 주지 않은 성도들까지도, 이제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때 조덕삼 집사는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덕삼 집사는 자신의 머슴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스토리에서 주인이었던 조덕삼 집사가 더 높이 보여요. 머슴이었던 이자익 집사가 더 높이 보여요. 머슴이었던 이작익이 장로가 되었다고 주인인 조덕삼 집사를 무시했겠어요. 그럴 리 없지요. 집에서는 더욱 깍듯이 머슴으로서 주인을 모시지 않았겠습니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훗날 장로가 된 조덕삼은 선임인 이자익 장로를 평양으로 유학 보내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하여 목사가 되게 하고, 1915년 금산교회로 청빙하여 자신의 담임목사로 깍듯이 섬겼습니다. 예전에 마부가 목사가 되고 주인이 성도가 된 것이지요. 이것은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자익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는데 놀랍게도, 장로교 역사상 총회장을 재임한 역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3번씩이나 역임하면서 장로교의 개혁헌법을 기초하는 등 장로교회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를 키워낸 인물이 바로 자기 집 머슴을 자기보다 먼저 장로로 받들며 교회를 섬겼던 조덕삼 장로입니다.
3. 원수를 선대하라 두 번째 “화목하라”에 대한 글입니다. 서로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 ‘모든 사람’안에 원수도 포함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3-14) ‘너희’ ‘둘’에 대해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했다고 했습니다(엡2:16), 여기서 둘은 서로 원수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은 하나님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와 화목하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둘 사이 원수된 것을 하나되게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천안에 계신 큰 이모님이 여든 여덟 미수米壽 자리에 초대를 받았을 때일입니다. 그 가족은 한 명만 빼고 모두가 저보다 연장자이신데 친지 가운데 유일한 목사이니, 설교를 부탁한다는 장로님인 큰 형님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큰 이모님이 6남매를 두셨는데요. 손주 며느리 사위에 증손자까지 합하면 47명 대가족입니다. 설교 세 번째 대지가 적을 두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큰 이모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천국 가신 저의 장모님도 누구에게도 섬겼다고 합니다. 동기간이건 동네 사람들이 되었던 집에 오면, 식사 대접은 물론이고, 곡간에 곡식들 다 퍼주셨다고 해요. 그러니 사람들이 집에 끊이지를 않죠. 화목한 것이지요. 그로 인해 자녀들이 화목해요. 이 또한 하나님의 복이지요.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원수라도 화목하라는 곧 내 가족과 내 형제들이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원수를 선대하라 세 번째 “갚지말라”에 대한 글입니다. 서로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원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하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지 말고 선대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제春節에 난정현에서 왕씨 부자 세 명이 장커우커우에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장커우커우 집안과 왕씨 집안은 토지 경계를 놓고 싸움이 잦았습니다. 한 날은 싸움이 커지면서, 왕씨의 삼남이 던진 의자에 머리를 맞고, 장커우커우 모친은 즉사했습니다. 당시 장커우커우는 12세에 이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법원 왕씨 삼남 웡정쥔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러 징역 7년을 선고 했고, 이 마저도 돈을 써서 3년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이에 한이 맺힌 장커우커우가 특수부대원으로 복무 후 제대한, 23년간 원한을 품고 있다가, 성묘를 다녀오던 원정진과 그의 아버지와 동생을 무참히 살해한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 당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심정적으로 원수를 갚는 행위에 동조일 수 있습니다.
사법부의 불평등한 판결에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도, 원수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칭하시면서,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이 말은 ‘내 사랑하는 아들아’와 똑같은 말씀 아닙니까? 왜 아버지가 자식의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하시겠어요. 또한 그렇게 해서 원수를 갚는다 치더라고, 복수는 복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적으로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손뿐 아니라, 마음도 피를 묻히지 말라는 자식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5.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원수을 선대하라 세 가지 ‘축복하라’, ‘화목하라’, ‘갚지말라’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서로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다(롬12:16).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라’고 하십니다(롬12:16). 높은 데 마음을 둔다는 것은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낮은데 처하라’ 즉 ‘나도 틀릴 수 있다’고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겸손 가운데 한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롬12:16). ‘나는 다 안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반감을 사고, 자칫하면 자신의 만든 결박에 자신이 걸려들게 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원수를 선대하는 축복, 화목, 복수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원수를 선대하라는 말씀 가운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십니다(롬16:15). 원수의 즐거움이라도 함께 즐거워하고, 슬픔을 당했을 때도 진심으로 함께 울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십니다(롬12:21) 원수에게까지 선대하는 우리의 선이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이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는 수준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높은 지향점을 가져야 합니다.
6. 다음 제목으로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① 원수를 축복하라. 종들은 예수님을 믿고, 주께 하듯 상전을 대했고, 이에 감복받은 상전도 종들에게 위협을 그치고 형제로 대했습니다. 박해한 자까지 축복한 이 변화가 우리의 변화게 되게 하옵소서.
② 원수를 화목하라. 내가 적을 두지 않으면 사람이 따르고, 내 형제들과 자손들까지도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주옵소서.
③ 원수를 갚지 말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의 손은 물론 마음도 동조하므로 피를 묻히기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에게 보응해 주심을 믿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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