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신론Paul Theology
이재현목사
살아계신 하나님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성전 미문에 올라가는 길에 만난 ‘나면서 못 걷게된 이’를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명하자,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심히 놀랍게 여기며’ 예루살렘 대부흥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행3:1-10).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도,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두 사도가 루스드라에 도착해서 나면서 한 번도 걸어 본적이 없는 이를 만났습니다(행14:8). 바울은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 명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고 하였습니다(행14:10). 하나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해 루스드라에 복음화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기적을 본 무리가 바울을 향해,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며, 루가니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쳤습니다(행14:11). 루스드라는 그곳 지방의 원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당시 로마제국 치하에서 통용되었던 헬라어로 말하는 것을 알아 들을 수는 있었지만, 루스드라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말할 때는, 그들 고유의 언어인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과 바나바는 그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하려 하는 것을, 처음에는 잘 알아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나바를 가리켜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12). ‘제우스’Zeus는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 ‘주신’主神으로 그 많은 신 중에서도 우두머리에 해당하였습니다. ‘헤르메스'Hermes는 제우스와 거인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 사이에 태어난 제우스의 아들입니다. 사자使者의 역할을 하는 자로, 신들의 대변인 혹은 전령을 담당하는 신이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나바를 보고 ‘제우스’라고 한 것은, 바나바의 외모와 풍채가 바울보다는 더 위엄스럽고 멋있게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두고 ‘헤르메스’라고 한 것은, 대중 앞에 나서서, 설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 두 신들이 자기네 마을에 친히 방문했다고, 여기고 그 지방에 있던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은 제물로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하였습니다(행14:13).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신들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마자, 당장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그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갔습니다(행14:14). 그리고 자기 자신들은 오직 그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 즉 외모뿐 아니라, 모든 면에 있어서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행14:15). 그리고 곧바로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그들에게 증거했습니다.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창조주 하나님, 우상과 같이 실존하지 않는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그들 앞에서 선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행14:16). 바울의 신론 첫 번째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도 막아설 수 없는 나를 지키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참고/사43:1-2;시121:6).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전파한 메시지가, 이전의 도시 사람들에게 전했던 복음과는 특성과 각도가 다릅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전도했던 주 대상은 헬라화된 유대인들이었고, 전도의 장소도 회당 등 유대인들이 모인 곳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구약 성경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그들에게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만을 선포하면 되었습니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예수를)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예수를)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3,38-39). 이것이 다른 도시에서 전했던 바울 주요 메시지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전혀 상이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의 앞에는 온통 이방인들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구약 성경이나, 유일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도 못한 생짜 배기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앞에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나, 그 성취 등에 대해서, 말해 보아도, 알아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 자명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은 여기서, 새로운 방법으로, 유일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려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반 은총'Common Grace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행14:16). ’방임‘ 그들이 다른 우상 신을 믿는 것을 허용해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참 하나님이 완전히 계시 될 때까지 기다리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한 계시가 있기 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라고, 일깨워 주었는데, 바로 자연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행14:17).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으로서, ‘기쁨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베풀어 주시는 ‘선한 일’ 즉 ‘일반 은총'입니다(행14:17). 그런 일반 은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나 불신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기쁨으로 만족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연 계시’Natural Revelation야 말로, 유일신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해 주는 가장 ‘일반적인 계시'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자도 모르는 루스드라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가장 기초적이고도, 학문과 관계없이 누구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반 은총'을 상기시켜 준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믿어야 할 신은 제우스도 헤르메스도 아닌, 하나님임을 알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베풀어 주시는 이 온갖 ‘일반적인 은총'에 대해 오늘날에도, 불신자들은 나름대로 감사할 줄 아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들의 육신을 위하여, 주어진 음식, 옷, 집 등을 두고, 혹은 자기에 인생에 생긴, 어떤 복스러운 일들을 두고, 어떤 뚜렷한 대상도 없이, 그저 막연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도, 당신의 선하심을 ‘계시'해 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에 필요한 해, 공기, 물 등이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언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을 갖게하시고, 다음에는 그 감사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드시고,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하여, 그 모든 것을 선하게 베풀어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는 자가 생기도록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존을 위해 자연계를 통해 공급되고 있는 이런 것들이, 이처럼 좀 양식 있는 불신자들의 마음속에서도, 절로 감사가 솟아 나오게 한다면, 성도인 우리야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용할 양식, 행복한 가정, 학교나 직장, 좋은 친구들, 우리는 이런 것들만 두고도, 적어도 불신자들이 드리는 감사보다는 훨씬 더 크고 뜨거운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마땅합니다. 육체를 지탱하게 하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심장의 고동, 이런 평범하게 보이는 것들조차, 사실상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임을 생각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감사는 결코 평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어떤 특별한 축복이나, 기적만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과 비가 때를 따라 내리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구체적인 은총’이며, 단 하루라도 없으면 살 수 없는 ‘생존 필수조건’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신 것 등, 저와 여러분의 생명 유지를 위하여, 지난 한 해 동안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신 온갖 ‘일반 은총'들에 대하여, ‘당연히 바쳐야 할 감사'를 절대로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신처럼 받들려는 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면서, 나면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이가 걷게 되고,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버리려 함인데, 나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는 것은 절대 허용될 수 없다면서,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도 돌아오라입니다. 하나님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들도, 일반 은총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셨는데, 하물며 저와 여러분 일반 은총만 아니라,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인 성경을 믿게 하고, ‘특별 은총’Special Grace, 하나님의 택함 받아,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특별은총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씀 앞에 아멘!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나의 판단, 의지, 신념 버려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의의, 하나님의 계획으로 돌아오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돌아가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반 은총(자연)으로도 특별 은총(성경)으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참고/마5:45;딤후3:15-17). 바울의 두 번째 신론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바울이 그리스 ‘아덴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습니다(행17:15-16). ‘아테네’Athens라는 이름 자체가, 수호 여신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도시 전체가 우상이 가득한 곳입니다. 또한 아덴은 헬라의 철학과 예술 및 과학의 중심지요, 민주주의의 발상지로서, 특히 고대 세계에 가장 유명한 대학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곳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습니다(행17:17).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하였습니다(행17:18). ‘에피쿠로스’ 학파는 ‘에피쿠로스’Epikuros,BC341-270년가 창시했습니다. 빵과 물만 있다면, 신도 부럽지 않다고 말하며, 필수적인 욕망만 추구한다면, 고통 없는 상태인 정신적 평정, ‘아타락시아’Ataraxia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죠. ‘스토아’Stoics 학파는 BC 300년경 치티움의 ‘제논’Zenon,BC335-263년경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모든 근본을 물질로 보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취했습니다. 인간의 육체나 영혼 그리고 신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마주치는 사물의 성질이나, 인간의 덕과 정욕마저도 물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신앙, 절대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덴의 철학자들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하면서, ‘이방 신들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행17:18). 바울이 ‘예수와 부활를 전하기 때문이’었습니다(행17:18). 이들은 철학자들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 답게,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향했습니다(행17:19). ‘아레오바고’Areopagus,‘아레스(Ares)의 언덕’이란 뜻는 재판이 열리던 곳이었는데요. 로마 시대에는 도시에 다른 사상을 전하는 자들을 데려다가, 조사를 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였던 것입니다. 아레오바고 광장에 모인 자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무엇인지,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습니다(행17:19-20). 그곳에 있는 아덴 사람이던 ‘나그네’ 외국인이던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행17:21). 이 사람들의 흥미와 욕구와 관심은 새로운 것을 듣고 알고 논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종교심이 많다고 하였습니다(행17:22). 새로운 것을 갈망하던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우상과 신화를 만들어, 자신들이 알지 못하고 풀지 못하는 지식을 대체하고자 한 것입니다.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 도’있었습니다(행17:23).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실례가 되지 않도록,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명칭으로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행17:23). 창조자 하나님은 천지에 주재하시기에 사람의 손으로 지은 단에 계시지 않고, 또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것도 없으니,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행17:24-25.참고/엡4:6). 바울의 세 번째 신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분으로 그 어떤 것도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참고/롬8:32).
결론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우상과 같이 실존하지 않는 신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하시고, 지키시고, 복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도, 의의, 계획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반 은총(자연)으로도 특별 은총(성경)으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에 주재하십니다. 사람 손으로 만든 제단에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나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신 분으로 나를 위해 그 어떤 것도 능치 못함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은 한 분이 계실 뿐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고전8:6).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잠언3:5-6). 이 은혜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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