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위해 주신 세 가지
Three things given for salvation
이재현목사
저주받은 최악의 형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자로서 무엇을 해주셨을까요? 첫째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우리의 모든 죄를전부 다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아십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법으로 재판하고 유대인들 스스로 예수님을 죽일 권한이 없으니까 로마제국의 통치자, 총독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참고/마26:57-68,27:1-2,26;막14:53-65;눅22:54-55,63-71;요18:1-3,19-24). 그리고 그를 끌고 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왜! 이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는가?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같은 죽음을 당해도 특히 저주를 받은 죽음이 있는데,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나무에 매달려 죽은 죽음을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누구의 저주를 대신한 것입니까? 나의 죄에 저주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마음대로 죄를 지은 우리의 죄에 대한 저주, 지옥에 가서 내가 받게 될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통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죄인 취급을 당한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돼지우리에서 하룻밤을 자야 한다고 하면 그것만큼 기분 나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돼지 취급을 받는 것 아닙니까? 군에서 구타로 인한 모욕감으로 자살한 사병에 대해서도 유공자로 대우하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예전 같으면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아닙니까? 그런데 죄가 없는 사람이 죄인 취급을 당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홧병이 나서 사형을 당하기도 전에 지레 죽어버릴 것입니다. 가장 괴로운 일을 예수님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다 보니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에게 내리려고 하던 심판과 저주를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자마자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마27:46). 우리 인간의 죄를 그분이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니까 정오 12시부터 오후3시 예수님이 죽으실 때까지 하늘의 해가 어두워져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려버릴 정도였습니다(마27:45;막15:33;눅23:44). 그러니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지옥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옥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곳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그곳이 지옥입니다. 마치 태양이 없어진 지구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떠나버린 곳이 바로 지옥인데, 그 지옥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에수님이 홀로 당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지옥에서 “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돌보지 않습니까?” 하고 영원토록 부르짖을 그 부르짖음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혼자 다 부르짖은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인간의 죄를 전가한 짐승을 끌고 와야 했습니다. 이것이 보통 일이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완전한 방법을 주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와서 “저의 죄를 예수님에게 다 맡깁니다.”하고 고백하면, 일평생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없는 자기 아들을 염소와 양 대신에 내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 이름으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이 예수님께 다 맡깁니다. 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주여, 이제 나를 용서해주십시옵소서.”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시고 내 죄가 어떤 죄였든지 다 용서해주십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한 일이 뭡니까? 내 죄를 예수님의 머리에 뒤집어씌운 것밖에는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른 어떤 일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 한 가지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롬6:23). 그 사망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당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지옥의 축소판입니다. 여섯 시간 동안 달려 있다가 운명하셨지만, 그 여섯 시간은 지옥의 영원한 삶을 축소한 순간입니다. 우리 모두의 죄를 그분이 다 담당하셨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히9:22).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공식입니다. 구약에서 피는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생명을 받쳐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소나 어린양의 피로 생명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히9:28).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단번에 인류의 죄를 완전히 씻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이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아닌데 십자가에 매달려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고통받았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쇼를 해서 사람들을 속였다는 이야기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에수님이 사람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은 이단 중의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 몸과 똑같은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했을 때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전부다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진실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마음속에 회의가 일어나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2000년 전의 이야기인데 내가 무슨 관계가 있냐?”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5:15). 아담이 온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는데 그가 죄를 지었으므로 나도 같이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도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지만, 인류를 대표해서 죽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가 인류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면 그것은 나의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죽으신 죽음이지만 그것은 나를 위한 죽음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믿어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우리의 가슴을 뭉쿨하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찔림은 나 자신이 잘못한 허물을 인함이요” 이 말씀에서 ‘우리’라는 말 대신에 ‘나’라는 말로 바꾸어서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실감이 안 나는 것이지 믿음이 있어서 받아들이기만 하면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내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의 아들이 내 대신 죽는다는 말입니까? 나같은 존재, 이 하루살이 같은 존재가 무슨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신다는 것입니까?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에게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지 않은 한 여인이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도 오지 못하고 뒤로 와서, 그 발 곁에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옆에 있는 바리새인 시몬은 마음으로 예수는 선지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선지자이었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어떤 죄인지 모르지만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을 향하여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함께 앉아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눅7:36-49). 예수님에게는 죄사함의 권세입니다.
그 여자가 돌아갈 때 어떤 표정을 하고 돌아갔을까요? 그 여자가 얼마나 마음이 벅차서 돌아갔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용서해준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주님,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돌아가신 것을 제가 믿습니다. 내 죄를 주께서 다 짊어지셨으니 이제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오냐, 내가 네 믿음을 보고 다 용서해 주마”하십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믿을 때 가슴에 환한 빛이 들어옵니다. 지금까지 남편 모르게 범했던 죄, 부인 모르게 범했던 죄, 사람들 모르게 범했던 죄, 마음 속의 갖가지 더러운 생각들, 이것 때문에 은근히 가책받고 고통받던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십자가를 발견하면 벅찬 감격이 밀려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그 십자가 때문에 나를 용서해주신다고 선언하는 음성을 듣게 되면 모든 죄의 가책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린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악, 속박, 굴레에서 벗어나는 이 평화를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사람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남편이 나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손가락 하나 짤라주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에수님은 나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끔찍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진실로 믿으신다면 그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감격의 눈물을 안 흘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 같은 것을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너무나 그 사실이 감격스럽게 가슴에 와닿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야기만 하면 눈물이 납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을 내가 받아서 만족했을 때 드디어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전화점 새로운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공백이 있고 욕구불만이 있는 사람은 남을 진실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을 듬뿍 받았을 때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 때, 그리고 그 포근한 사랑에 마음껏 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남편이나 아내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 나를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조건적인 사랑, 이기주의적인 사랑, 본성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뿐 무조건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은 못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이 강수처럼 쏟아져 들어옵니다. 지금까지 구멍이 나 있던 내 마음에 시원한 하늘의 강수가 가득 찹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의 태양의 빛이 은빛처럼 반짝이면서 내 가슴속에 놀라운 하늘의 찬송이 울려퍼집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덮어줄 수 있고 그를 대신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어 갑니다.
예수님에게는 무덤이 없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자로서 무엇을 해주셨을까요? 첫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둘째는 부활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그냥 무덤만 하나 남겨놓고 가셨다면, 그분이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던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참사람이시지만 또 참하나님이기 때문에 비록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셨지만, 죽음이 하나님의 아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은 죄인만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3:15).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여러분이 크리스천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여기에서 판가름이 납니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도 예수라는 분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분명하니까 믿습니다. 그것마저 부인한다면 그건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으로 갈라지는가 하면, 크리스천은 예수님이 삼 일 만에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만,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이 삼 일 만에 살아나셨다는 것을 마음에 확증할 수만 있다면 이제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설득시킬 자신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설득시킬 수 있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성령님입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시면 ‘아, 그럴 수 있구나.’하고 믿게 됩니다. 지난주 성령강림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요14:26)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는 Helper, Counselor, Comforter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모든 것이란 십자가와 부활을 포함한 성경을 말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또한 부활하신 구원자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과학적인 설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과학적인 증거만 주셨습니다. 아무리 거짓말 같은 일이라도 세 사람 내지 네 사람이 직접 보았다고 하면 그것은 과학적인 증명이 필요 없는 일이라고 믿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과학적으로 잘 증거되어 있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열 명, 백 명도 아니고 오백 명입니다(고전15:6). 이런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성경에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부활하신 것을 부인하지 못해서 나중에는 예수님을 죽게했던 데제사장과 장로들이 무덤을 지켰던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입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8:11-15).
‘부활’이라는 주제로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 사복음서를 대조하여 보면 마태복음에는 천사가 한 사람만 나타났다고 했는데 마가복음에는 천사가 두 사람이 나온다고 하고, 누가복음에는 돌이 굴러졌다고 했는데 또 다른 곳에 보면 돌이 굴려내린 것을 보았다고도 하고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을 봅니다(참고/마28:2;막16:5;눅24:2,4;요20:1,12). 어떤 사람들은 이 일관성이 없는 것을 어떻게 부활의 증거로 볼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범죄를 심문하는 판사라고 한다면 범죄 현장을 봤다는 증인 네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범인이 파란 옷을 입었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그가 윗도리는 파란색이었지만 바지는 까만색이었다고 대답을 하고, 조금씩 맞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한 가지 일치하는 것은 그 사람이 틀림없이 범죄 현장을 목격하였다고 한다면 네 사람 증인으로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까? 당연히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범해의 현장을 목격했다고 한다면 증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조금의 차이도 없이 네 사람이 다 똑같이 진술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사전에 모의한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만약 거짓말로 쓰여진 것이라면 사복음서를 동일하게 만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실을 기록한 것은 목격한 사람에 따라 그 각도가 다를 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괜히 성경 한 장도 안 일고서 막연히 생각만으로 “아, 그건 말도 안 돼. 믿을 수가 없어.”하지 말고, 아예 좀 관심이 있으면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벤허’Ben-Hurs라는 영화를 본 분이 있습니까? 1959년에 개봉된 영화인데요. 저는 다섯번 보았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도 재개봉을 했었는데요. 당시 제가 살고있는 촌구석에도 예산 읍네 극장에서 상영하는 포스터가 붙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복수를 하려고 칼을 들고 날뛰던 사람이 에수 그리스도를 만나자마자 그 손에서 칼이 떠나고 원수를 사랑으로 받아 주었다는 것이 그 주제입니다.
이 영화 대본을 써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사람이 월리스Lew Wallace,1827-1905입니다. 그가 1880년 소설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Ben-Hur: A Tale of the Christ를 영화로 만든것입니다. 윌리스는 처음에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군이고,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 아니꼽기 짝이 없습니다. 거짓말 같은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이 저렇게 속고 있는데 내가 연구를 좀 해서 예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증거해보여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이자, 유명한 무신론자였던 잉거솔Robert Ingersoll과 둘이서 유럽과 미국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다니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전부 모아가지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대한 반박 논문을 쓰려면 무엇을 가장 많이 읽어야 합니까? 성경을 제일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진실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 내가 도무지 이 진실을 거짓말이라고 할 자신이 없구나”하고 펜대를 집어던지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주여, 예수님은 나의 구주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습니다. 에수님은 나의 구원자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크리스천이 되어 쓴 작품이 바로 ‘벤허’입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선물을 받읍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자로서 무엇을 해주셨을까요? 첫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둘째는 부활하셨습니다. 셋째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행2:36). 여기서 ‘주’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이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살아나심으로써 이제는 전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님,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하고 고백만 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또 있습니다. 첫째로, 내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 미래가 없습니다. 항상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는 미래까지 용서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과 우리가 과거에는 원수 관계였는데, 그 원수 관계가 완전히 종식되고 하나님을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아들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밤중에도 좋고, 새벽에도 좋고 아무 데나 가서 “하나님 아버지, 좀 도와주세요.”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해도 한참 자고 있는데 밤중에 깨우면 짜증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벽에 찾아오든 밤중에 찾아오든 “아버지!”하고 부르면 누구나 다 받아들이고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또 얻은 것은 영원한 나라입니다. 영생입니다. 장차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만약에 지금 당장이라도 이 세상을 떠난다면 천사가 와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갈 때, 나를 반기며 “아, 누구누구 왔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소개해줄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생각만 해도 춤을 추도록 좋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가난해도 좋고 어떤 때는 남에게 욕을 먹어도 좋고 죽게 되어도 웃으면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아주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참 기가 막힌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4:6). 예수님으로 말미암이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행4:12). 예수 외에는 하나님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전혀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대단히 독단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도대체 기독교의 그 독단적인 이야기 때문에 늘 비위가 상해”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가 다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고상한 것 같고 인격자 같고 좋아보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의사가 죽을 환자를 앞에 놓고 의사들끼리 의논하면서 한 사람이 “배를 절개합니다” 하면 다른 의사들이 “그것도 좋지요”하고, 또 한 사람이 “주사만 줍시다” 하면 다들 “아, 그것도 좋지요”한다면, 그 의사들은 사람 죽이는 의사입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는데, 불교도 좋고 마호메트교도 좋다고 하면, 이게 어디 정신나간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기독교는 굉장히 독단적입니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하나만 열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는 굉장히 편협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참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절대 타협하지 않습니다. 예수 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그분을 여러분이 마음에 영접하고 사망의 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를 바랍니다. 가장 큰 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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