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예언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창세기9:18~27 2023.05.28. 主日禮拜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9:18-27)
셋과 그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아들들과 가인과 그의 후손들인 사람의 딸들이 통혼으로 죄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창6:2). 사람들의 모든 생각이 악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지으신 것을 한탄 하셨습니다(창6:5-6). 그리고 이들 모두를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심판을 결단 하셨습니다(창6:7,12-13). 무려 사십일 밤낮으로 하늘의 창문이 열려 하늘의 강들이 쏟아져 내리고, 땅의 깊음 샘인 지하수들이 터져, 땅위로 솟구치고, 150일 동안 온 세상에 물이 창일했습니다(창7:12,24). 사람과 가축과 기는것과 공중의 새들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창7:22).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악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있었습니다(창7:8)). 그는 노아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창7:9). 그러나 그 순서를 볼 때, 노아가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의인이고 당대와 완전한자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홍수의 심판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택함 받은 자입니다. 저와 여러분 또한 노아 시대보다, 더 패악한 시대에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택함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택함 받음에 대하여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고 하였습니다(창7:23). ‘남았더라’ 이는 ‘남은 자’를 말합니다. 렘넌트, 남은 자 말입니다. 남은 자는 소수의 구원 받은 자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소수의 의로운 자를 구원에 목적이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 의로운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려는 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창세기 대홍수 당시 노아가 가졌던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말입니다.
남은 자는 의인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의인입니다(롬1:17). 목회자와 평신도가 어떤 물의를 일으켰을 때, 우리는 그것이 회개하면 용서받을 죄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기에 윤리가 먼저 보이고, 도덕이 먼저 보이지만, 진리보다 윤리가 앞서면 안 되고, 믿음보다 도덕이 앞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외에 구원자가 있다고, 말하는 종교다원주의 자들 가운데, 인격이 고매한 분들 있습니다. 거기에 빠지면 안 됩니다. 교회가 이 문제 저 문제로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성품이 훌륭한 목회자와 평신도가 있는 곳으로 발길이 향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따르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바른 분별로 신앙을 시켜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는 당대에 완전한 자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완전을 지향할 수는 있으나,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을 전할 때, 각 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확신하고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것입니다(민13:30). 그리할 때, 하나님의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대에 쓰는 완전한 자입니다. 하님께서 응답하신 것 있으세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 있으세요. 그대로 확신하고 고백으로 시인하세요. 120년 전과 후 변함없었던 노아와 같이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도, 지금 드리지 않을 것이라도, 이루어짐을 확신하고, 드릴 것을 확신하고, 고백으로 시인하는 자가, 각 시대마다 쓰시는 당대의 완전한 자입니다(창6:22,7:5).
남은 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어떤 하나님과 동행입니까? 하나님과만 동행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소유욕의 유혹입니다(요일2:16). 안목의 정욕 쾌락욕의 유혹입니다. 이생의 자랑 과시욕의 유혹입니다. 이러한 유혹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단호히 배척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과만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요일2:17).
베드로 사도는 노아 시대의 대홍수 ‘물 심판’에 대하여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라고 말씀하였습니다(벧후3:6). 그리고 이어 마지막 ‘불 심판’에 대하여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벧후3:7). 우리는 이 마지막 불 심판에서도, 오늘 본문에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고 한 남은 자에 반드시 속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저와 여러분이 렘넌트, 남은 자가 되어, 창세기 대홍수 당시 노아가 가졌던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말입니다. 다같이 자신의 이름과 가족을 본문에 대입하여 읽겠습니다. “이재현과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가족들만 남았더라” 아멘! 다시 한번요. “이재현과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가족들만 남았더라” 아멘! 그리고 재 대입해서 다신 한 번 더요. “이재현과 그와 함께 청아비전교회 공동체에 있던 가족들 그리고 중보하는 영혼들만 남았더라” 이 남은 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들과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분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특별히 부부의 날 우리 성도님 모든 가정의 부부에게 이 은혜를 축복합니다.
셋과 그의 후손에서 노아와 그의 자녀까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지난 4주 동안 가인과 그의 후손 그리고 셋과 그의 후손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셋과 그의 후손에 대해서는 노아와 그의 자녀들까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세속 문화’를 발전시켜 ‘세상의 성공’을 거두어습니다. 그러나 셋과 그의 후손들은 ‘예배 문화’를 승화시켜 ‘신앙의 승리’을 이루었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성공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셋과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세상의 성공이 신앙인에게는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의 성공에서도, 하나님이 첫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신과 가치를 가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자기하고 싶은 데로 하고 살던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정신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성공을 자신들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오늘도 사는 곳이 ‘에덴의 동쪽’입니다. 우리는 에덴의 동쪽에 있는 사람들을 속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되도록 인도하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창세기 5장 아담의 계보에는 4장과 달리 세속문화를 발전시켜 세상의 성공을 거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셋과 그의 후손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계보는 생명책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유와 명예와 권좌를 누렸다고 할지라도, 종국에 생명책에 이름이 누락되면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생명책에 녹명되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천국에 입성해야 합니다. 셋과 그의 후손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6장에 와서 가인과 그의 후손들과 셋과 그의 후손들이 재등장하는데요. 셋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사람의 딸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살아가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가인의 정신과 가치로 ‘에덴의 동쪽’에 사는 사람의 딸들 육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통혼을 했습니다. 이것은 부단 결혼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로 인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던지, 죄가 가득하였습니다.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은 그것들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단하셨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쓸러버리시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자들이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노아입니다. 대홍수의 심판에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남았더라’ ‘남은 자’라는 뜻입니다. 남은 자는 소수의 구원 받은 자를 뜻하면서, 궁극적으로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구속 역사를 이루십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한 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노아 때보다 더 악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의인이어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로 인해 북이스라엘이 바알과 우상으로 가득 찼을 때, 끝까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7천명이었습니다. 그들이 남은 자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는다고, 도덕과 윤리가 앞서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진리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마지막 때, 분명히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버린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아무리 성품과 인격이 고매해도, 그들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리를 따르는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노아의 ‘의로움’은 믿음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 남은 자로서, 우리는 당대의 완전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열 두 명의 정탐꾼은 10:2로 갈리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이 주신 땅임으로 대적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대로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열 명의 정탐꾼은 악평을 했습니다. 결국 모두 죽음을 당하고, 두 명의 남은 자,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갈렙은 가나안에 입성 85세에 거인 아낙 자손을 무찌르는 믿음의 용사로 남았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을 때도, 방주를 완성한 후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노아는 완전한신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하고, 120년 전후 동일하게 준행했고, 그를 하나님은 대홍수에서, 남은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지만, 노아, 갈렙, 여호수아처럼, 내가 응답받고, 명령받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당대의 완전한 자입니다.
셋째 남은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과도 함께 동행하려고 합니다. 노아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과만 동행한 것이 옳은 것이었음을 방주에서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과만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사주 간의 설교를 요약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별한 셋과 그의 후손에서부터, 노아와 그의 자녀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중시조中始祖 노아가 받은 축복
대홍수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자녀들은 가장 먼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을 취하여, 불로 태워드리는 번제를 올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향기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 이 말씀을 보면, 마치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주신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처음 아담에게 주신 복과 노아에게 주신 복이 모두가 동일한데,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이 노아에게는 없습니다.
“2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3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9:2-3) 이 말씀을 보면, 모든 생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하며, 무서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생물을 인간의 손에 붙였기 때문입니다. 즉 이제 산 동물들을 인간이 채소같이 음식으로 취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수렵이 시작되니. 자연히 짐승들이 인간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환경을 파괴하고 짐승들은 계속 쫓겨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짐승들 사이에도 육식동물이 초식동물들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되었고요.
원래 에덴동산에서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가 사람의 양식이 되었고, ‘푸른 풀’은 모든 생물들의 먹을거리였습니다. 개풀 뜯어 먹는 소리가 아니고요. 에덴동산에서는 사자도, 호랑이도, 개도,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홍수이후, 처음 창조의 자연이 파괴 되면서, 인간의 수명은 급속도록 줄어들었고, 약해진 체질에 육식을 공급해야 되었습니다. 그래서 짐승을 사냥하게 되었고, 짐승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시대가 되었으며, 자연을 개발하는 등 투쟁을 해야 생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땅의 정복자로서 위치를 상실하고, 땅을 파괴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아담과 노아 모두에게 주었지만,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이 노아에게는 없습니다.
이렇게 원래의 창조에서 파괴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창9:18-19). 이제 인류는 노아부터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를 아담에 이은 두 번째 시조始祖, 중시조中始祖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언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농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포도나무를 재배했는데요(창9:20). 첫 해부터 작황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포도를 소출하여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당시레는 음료로 사용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이 포도에는 별도의 알콜을 넣지 않아도, 자체 발효하면서 알콜 성분을 갖게 됩니다. 노아는 아마도 포도주가 잘 숙성했는지, 처음에는 맛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음미를 하다가, 과하게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해도 갈만한 것이 노아가 그동안 방주에 있던 기간이 1년이 넘는 371일입니다. 그 기간 동안 신선한 음식 등을 접할 수 없었지 않습니까? 그러던 중에 갓 수확한 포도로 숙성한 포도주 맛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결국 성경에는 노아가 ‘포도주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고 하였습니다(창9:21).
둘째 아들인 함이 노아의 침소에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하체를 보게 됩니다. 함은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아버지의 상황을 전합니다(창9:22).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으로 아버지 방에 들어갑니다. 조용히 잠든 아버지의 하체를 덮은 후, 얼굴을 돌이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9:23). 이러한 일련의 일은 가정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묻히지 않는 사건이 되었죠. 포도주에 취했던 노아는 술이 깬 후 함이 한 행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아는 함에게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9:25), 아버지가 자식에게 이러실 수 있을 까 싶을 정도의 말을 합니다. 그리고 셈에게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창9:26). 야벳에게는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창9:27). 함과 달리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노아의 말에 대하여, 수긍하기 어려운 의문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함이 노아의 하체를 보았다고, 그렇게까지 저주할 수 있을까 말입니다. 반면 셈과 야벳에게는 마치 편애하듯 축복할 수 있는가도 궁금합니다. 노아가 술이 덜 깨어서, 주정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아의 세 아들과 그의 자손들은 노아가 말한 그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노아가 한 말이 술이 덜 깨어서 내뱉은 실언일까, 아니면 예언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본문을 좀 더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만취된 것은 분명히 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술에 취한 노아가 집 밖으로 나갔나요. 집 안에 그냥 머물렀나요. 집안에 그냥 머물렀습니다. 술에 취한 노아가 고성방가를 했나요. 조용히 내실에 있었나요. 조용히 내실에 있었습니다. 술에 취한 노아가 자녀들 집에 들이닥쳤나요. 자기 방에 있었나요. 자기 방에 있었습니다. 술에 취한 노아가 가족들에게 주사酒邪를 부렸나요. 가족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했나요. 가족들 보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노아가 술에 취한 것이 잘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한 후 노아의 행동에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노아가 벌거벗었다고 하였는데요. 나체로 밖에서 소란을 피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방에서, 옷을 벗고 자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실이면 부부가 쓰는 방인데요. 그 사이에 속옷을 갈아입는다고 흉이 되는가요? 제가 에둘러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본 둘째 아들의 태도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형들에게 알렸습니다. 고의가 아닌 부득이하게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버지의 하체를 가리고, 다른 사람이 알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함은 그렇게 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그 ‘알렸다’는 말이 형제들이 아버지의 하체를 가리도록 해 달라는 알림이었는지, 벗은 아버지의 허물을 들추는 알림이었는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후의 모든 상황을 볼 때, 후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함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어머니에게 말하거나, 아내들에게 말하기보다, 벗은 아버지를 옷으로 가리며 수습을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 행동들을 나중에 안 노아는 함에게는 저주를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드렸던 질문 이러한 노아의 저주와 축복이 실언이었을까요. 예언이었을까요. 노아는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자신의 하체를 보고, 알린 함이 미워서, 저주한 것이 아닙니다. 함이 취한 행동을 보고, 함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들임을 알고 예언한 것입니다. 노아가 함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에게 징계를 내린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노아가 예언을 한 것입니다. 반면 셈과 야벳이 취한 행동을 보고, 노아가 축복한 것도 예언입니다. 노아가 셈과 야벳이 자신의 하체를 보고도, 알리지 않고, 수습을 해서, 기분이 좋아 축복한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고자하시는 복을 알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셈과 야벳에게 노아가 축복한 것입니다. 노아는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 아들들의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봅시다. 어떻게 되었을 까요?
저주와 축복
함의 후손
함Ham은 ‘검다’, ‘뜨겁다’(덥다)는 그 이름 뜻 그대로 유색 인종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의 아버지로서, 아프리카 애굽, 이디오피아, 리비아에 거주하게 됩니다(창10:6-20). 함의 후손들은 노아로부터 저주 받은 문자 그대로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입성할 때, 이를 가로막은 자들이 바로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자손들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족속은 셈족인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비천한 종의 형태로 전락하였습니다(수9:23). 그리고 솔로몬 시대에 완전히 정복당하게 됩니다(왕상9:20,21). 오늘날까지도 팔레스타인으로 불리는 함의 자손들은 셈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에게 참혹하게 지배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노아의 말 그대로 이루어 진 것이지요.
야벳의 후손
야벳Japheth은 ‘하나님이 넓게 하신다’, ‘그를 넓히신다’, ‘확장’擴張이란 이름 뜻 그대로 큰 복을 받았습니다. 야벳은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 일곱의 일곱 아들을 두었고(창10:2), 그 자손들은 주로 섬과 해안 지역에 흩어져 번성하게 됩니다(창10:5). 코카서스Caucasus, 백인종으로 유럽인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앵글로색슨’Anglo-Saxon으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이 야벳의 자손들은 헬라의 입법, 사법, 행정 삼권분립 정치 그리고 문화와 철학, 근대 과학,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에서, 현재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의 초대강대국까지, 오늘까지 사실상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셈을 통해 성경과 구주가 전해졌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전 세계에 복음을 증거한 것이 야벳의 자손들입니다. 한국교회도 야벳의 자손들의 선교사들을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함의 자손들인 아프리카인들이 야벳의 후손인 서구인들에게 오랫동안 노예로 있지 않습니까? 이 역시 노아의 예언 그대로입니다.
셈의 후손
셈Shem은 ‘이름 있는’, ‘유명한’이란 이름 뜻입니다. 세상적인 유명이 아니라, 종교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셈은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창10:22), 이들이 종교적인 복을 받았다고 말씀 드린 것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셈의 자손들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두고, 아브라함의 육적아들 이스마엘을 장자로 믿고, 따르는 자들은 이슬람교도들이고요. 아브라함의 약속아들 이삭을 언약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은 유대교들이고요. 아브라함의 약속아들 이삭을 언약으로 믿고,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이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기독교입니다(갈6:16). 물론 이 종교 가운데 어떤 것을 믿느냐는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어디서 오셨어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족보를 따르신 혈통은 셈족이십니다.
이렇게 노아가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한 것은 노아가 취중 실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이었음을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노아의 저주와 축복의 교훈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노아의 예언으로 이루어진 그의 자손들의 저주와 축복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가져오게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전해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노아와 같은 선지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예언이 이제 성경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노아와 그 자녀들에 대한 예언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노아의 그 자녀들에 대한 예언을 보면서도, 우리가 성경보다 다른 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왜! 나에게는 응답이 없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매주일 강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세상의 달콤한 말들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을 설교와 공부를 통해 듣고 배운 데로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에 중요한 기점이 됩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가족들은 하나님 말씀을 인생의 기점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점에서 말씀으로 출발한 인생 기차가, 정차하는 역마다, 응답이 역사가 임할 것입니다. 마지막 종착역 천국까지 말입니다.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성경 66권은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절대적입니다.
그리고 말씀 한 곳을 더 찾아봅니다. “11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이 말씀에 등장하는 사도, 선지자, 복은 전하는 자는 오늘날 목사의 직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목사와 교사’는 ‘Pastors and Teachers'를 말합니다. 목사는 가리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목사가 성도를 가리켜,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앞서 성경을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 무엇이에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사를 주신 목적이 뭐에요. ‘성도를 온전하게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에게, 성경과 목사를 주신 목적이 똑같아요. 그것은 목사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말씀이기에 목사이지, 다른 것을 들면 목사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그 목사가 깊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정성껏 작문하고, 간절히 선포하는 설교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예배드리고 나가서, “인천의 랜드 마크 씨티타워 착공, 전철 7호선 확정, 스타필드 돔 구장 확정 그 중심에 위치한 ○○○○○오피스텔에 투자하십시오. 인생 보장합니다.” 그런 말에만 귀 기울이려고 하면 안 된다고요. 그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 진지하게 경청하고, 심령에 반추하여, 향함으로 옮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에 인내해야 한다
노아의 예언으로 이루어진 그의 자손들의 저주와 축복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전해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인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 노아가 함에게 저주를 했는데요. 그 저주가 곧바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의 자손으로 대표되는 가나안족속은 그냥 앉아서,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습니다. 가나안 땅을 거저 얻었으니까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오게 되고요. 이를 알아본 요셉은 자기를 노예로 판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아버지 야곱과 가족 친지를 모두 애굽으로 이주시킵니다. 이 후로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져오던 가나안은 임자 없는 땅이 되었고요. 그 땅을 무상으로 점령한 시돈, 헷, 여부스, 아무리, 기르가스, 히위, 알가, 신, 아르왓, 스말, 하맛 족속이 모두 가나안의 자손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나안 족속들은 430년 간 무상으로 가나안 땅에서 자기들 이득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필두로 가나안을 정복, 가나안 족속들을 차례로 물리쳤습니다. “10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신6:10-11)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를 끝내고, 약속의 땅에 입성하면,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고, 체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고,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고, 심지 아니한 과목을 얻어 배불리 먹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누구 것이었어요. 가나안 족속들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 족속들 것을 찬탈한 것인 가요? 아닙니다. 430년 동안 가나안 족속들이 무상으로 가졌던 것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함을 저주했는데요. 그 저주가 이른 때가 함의 후손 때입니다. 대략 1000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합니다. 그 시작이 70년 전인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부터입니다. 이것만을 볼 때,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독립으로 땅을 잃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만 아는 내용입니다. AD 136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117-138(재위)는 제2차 유대독립전쟁을 진압하면서, 유대아라는 지명을 팔레스타인 시리아로 바꾸고, 유대인들을 세계 각지로 이산시켰습니다. 그로인해 유대인들이 살던 땅은 비었고, 그곳에서 주변 아랍인들이 무단의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그들을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 독립하면서 대립이 된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원래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독립 전 2천 여 년 동안 팔레스타인 땅에 살면서 건국을 했다면, 팔레스타인의 땅이 되지만, 2천 여 년 동안 그냥 살기만 했지, 국가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무정부였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다시 와서 땅을 차지했어도, 실효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을 저주하고, 셈의 종이 되도록 한 것은 오늘 까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내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우리 편인 것입니다. 결론이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는데, 악인들이 지금도 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다 누리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노아가 함에게 저주를 한 후, 함의 자손 때, 그들의 죄가 찼을 때, 멸절되었던 것같이, 불의의 번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때가 이르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열심히 쌓아 놓으라고 하세요. 다 하나님의 백성의 것이 될 터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인내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말씀에 은혜를 알아야 한다
노아의 예언으로 이루어진 그의 자손들의 저주와 축복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전해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인내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말씀에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똑같은 노아의 아들들인데 함은 저주 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 받았는가?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 아닌가 말입니다. 더욱이 현대에 와서까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무려 4,400여 년 전 노아의 함에 대한 저주가, 아무리 하나님의 예언이라고 하여도, 지금까지 함의 자손들이 너무나도 큰 고통을 당하는 것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똑같은 부모에게서 난 쌍둥인데요. 하나님이 작은 아들 야곱은 사랑하고, 장자 에서는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나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3). 우리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9:14) 한 사람은 사랑하고 한 사람은 미워하고, 이러한 하나님에게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9:18). 하나님은 자신의 원하심에 따라, 어떤 이는 긍휼히 여기시고, 어떤 이는 인간 본성 그대로 완악하게 내버려 주신 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애굽왕 바로이지요. 끝까지 이스라엘을 놓지 않지 않습니까? 그 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모세를 보내서 이루신 것이지요.
그래도 이에 불만을 갖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세요.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9:20-21).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도 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토기장이에게 시비할 수 없는 것이지요. 하물며 하나님의 주권에 인간은 대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세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왜 저 사람은 택하고, 이 사람은 택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반문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내가 택함 받았음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지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완악함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를 했습니다. 대 홍수에 왜! 노아와 그이 가족 만 살아남았습니까? 의인 이었습니까 당대의 완전한 자였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했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러면 당시에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 하나님을 믿었나요. 아닙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 아멘!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모두가 심판 당할 때, 남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함은 저주를 받아, 그의 자손 대대로 고통 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아, 그의 자손 대대로 형통하는가에, 우리는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권능자 주권자 창조자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우리는 내가 택함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정리
중시조中始祖 노아가 받은 축복
대홍수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자녀들은 가장 먼저 제사를 올려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향기를 받으셨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였습니다(창8:20-21,9:1).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창9:18-19). 이제 인류는 노아부터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노아는 아담에 이은 두 번째 시조始祖로 중시조中始祖로 부릅니다.
예언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포도나무를 재배했는데요(창9:20). 첫 해부터 작황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포도를 소출하여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음료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갓 수확한 포도로 숙성한 포도주에 노아가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고 하였습니다(창9:21). 둘째 아들인 함이 노아의 침소에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하체를 보게 됩니다. 함은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아버지의 상황을 전합니다(창9:22).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으로 아버지 방에 들어갑니다. 조용히 잠든 아버지의 하체를 덮은 후, 얼굴을 돌이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9:23).
그런데 노아는 술이 깬 후 함이 한 행한 일을 알고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셈에게는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될 것이라, 야벳에게는 ‘하나님이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창9:25-27). 이것이 노아가 술이 덜 깨어 주정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의 말 그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한 것은 바르지 않은 일이지만, 그 후 그의 행동은 사실 비난 받을 일이 없습니다. 내실에 있었고 거기에 옷을 벗었습니다. 그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본 둘째 아들의 태도입니다. 형제에게 ‘알렸다’는 말이 아버지를 가리도록 해 달라는 것인지, 허물을 들추는 알림이었는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후의 모든 상황을 볼 때, 후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함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어머니에게 말하거나, 아내들에게 말하기보다, 벗은 아버지를 옷으로 가리며 수습을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 행동들을 나중에 안 노아는 함에게는 저주를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했습니다. 노아의 실언이었나요. 아닙니다. 함이 취한 행동을 보고, 함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들임을 알고 예언한 것입니다. 노아가 함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에게 징계를 내린 것입니다. 반면 셈과 야벳이 취한 행동을 보고, 노아가 축복한 것도 예언입니다. 두 아들이 기특해서 아니라 둘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축복한 것입니다. 노아는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와 축복
함의 후손. 함은 ‘검다’는 뜻으로 아프라키 애굽 등지에 거주하게 됩니다(창10:6-20). 그의 후손인 가나안 자손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입성할 때 가로막아 섰다가, 여호수아 시대 비천한 종으로 전락하였고, 솔로몬 때 완전히 정복당하게 됩니다(수9:23;왕상9:20,21). 현대 팔레스타인으로 불리는 함의 자손들은 셈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에게 참혹하게 지배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야벳의 후손. 야벳은 ‘하나님이 넓게 하신다’는 뜻대로 큰 복을 받았습니다. 야벳은 고멜 등의 아들을 두었는데요(창10:2.참고/창10:5). 코카서스 인종으로 ‘앵글로색슨’으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 서구 세력들로 오늘까지 사실상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셈을 통해 성경과 구주가 전해졌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전 세계에 복음을 증거한 것이 야벳의 자손들입니다. 셈의 후손. 셈 ‘이름 있는’ 뜻으로 종교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셈의 자손들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창10:22). 예수님도 어디서 오셨어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족보를 따르신 혈통은 셈족이십니다. 이 가운데 어느 길을 따르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습니다. 이렇게 노아의 말 그대로 되었다는 것은 노아가 취중 실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이었음을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노아의 저주와 축복의 교훈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노아와 같은 선지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인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고 그분께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응답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까? 설교와 공부를 통해 듣고 배운 성경대로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인생의 기점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점에서 말씀으로 출발한 인생 기차가, 정차하는 역마다, 응답이 역사가 임할 것입니다. 마지막 종착역 천국까지 말입니다. 성경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딤후3:16-17). 목사는 ‘목사와 교사’ ‘Pastors and Teachers'로 목사가 성도를 가리켜,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합니다(엡3:11-12). 하나님께서 성경과 목사를 주신 목적이 동일합니다. 그것은 목사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말씀이기에 목사이지, 다른 것을 들면 목사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그 목사가 깊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정성껏 작문하고, 간절히 선포하는 설교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 진지하게 경청하고, 심령에 반추하여, 행함으로 옮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에 인내해야 한다. 노아가 함에게 저주를 했는데 곧바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의 자손으로 대표되는 가나안족속은 앉아서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아버지 야곱과 일가 친척이 애굽에서 내려오자 그들이 아브라함때부터 살던 가나안은 임자 없는 땅이 되었고, 그 땅에 거저 들어간 시돈, 헷, 여부스, 아무리, 기르가스, 히위, 알가, 신, 아르왓, 스말, 하맛 족속이 모두 가나안의 자손이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430년 간 무상으로 가나안 땅에서 자기들 이득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필두로 가나안을 정복, 가나안 족속들을 차례로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서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고, 체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고,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고, 심지 아니한 과목을 얻어 배불리 먹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6:10-11). 이것은 가나안 족속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것을 찬탈했나요? 아닙니다. 430년 동안 가나안 족속들이 무상으로 가졌던 것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함을 저주했는데요. 그 저주가 이른 때가 함의 후손 때입니다. 대략 1000년이 지난 후입니다.
인내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우리 편인 것입니다. 결론이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는데, 악인들이 지금도 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다 누리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노아가 함에게 저주를 한 후, 함의 자손 때, 그들의 죄가 찼을 때, 멸절되었던 것같이, 불의의 번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때가 이르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열심히 쌓아 놓으라고 하세요. 다 하나님의 백성의 것이 될 터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인내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말씀에 은혜를 알아야 한다. 노아의 아들들인데 함은 저주 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 받았는가?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 아닌가 말입니다. 4,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아의 함에 대한 저주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아무리 하나님 예언이지만 너무 큰 고통을 당하는 것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습니다(롬9:13).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나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 한 사람은 사랑하고 한 사람은 미워했다고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9:14). 하나님 원하심에 따라 어떤 이는 ‘긍휼’로 어떤 이는 인간 본성 그대로 ‘완악’하게 내버려 주신다는 것입니다(롬9:18). 대표적인 인물이 애굽 바로입니다. 끝까지 이스라엘을 놓지 않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자를 통해서 자신의 일을 모세를 보내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도 이에 불만을 느끼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세요.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도 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토기장이에게 시비할 수 없는 것이지요(롬9:20-21). 하물며 하나님의 주권에 인간은 대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저 사람은 택하고, 이 사람은 택하지 않았습니까? 반문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내가 택함 받았음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지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완악함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대 홍수 노아와 그의 가족이 살아남은 것은 의인 당대의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의인 당대의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하여 심판에 남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함은 저주를 받아, 그의 자손 대대로 고통 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아, 그의 자손 대대로 형통하는가에, 우리는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권능자 주권자 창조자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우리는 내가 택함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최종 정리: 결론
그리고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현재 이스라엘이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해서 지킴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하는 행위를 보십시오. 못된 짓은 골라서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배척하고, 오늘까지 유대인들은 배도의 시대에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좋은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존하고, 계실 뿐입니다. 마지막 재림의 예수님의 목도하고, 그제야 자신들이 2천 년 전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메시아 임을 깨닫는 순간까지, 그들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임이 있어야하고, 말씀에 인내가 필요한 것이며, 말씀에 은혜를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 유념해야 할 것은, 오늘까지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에요. 야벳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면 메시아가 탄생한 셈의 자손보다, 야벳의 자손이 높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야벳은 창대한 복을 받았지만, 셈의 장막에 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셈족으로부터 성경과 구주를 듣고, 세계 복음화를 이룬 자들이 야벳입니다. 그 표현이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야벳의 창대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쓰이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세계 1위의 선교대국이 미국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미국도 셈의 장막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야벳의 자손도, 함의 후손도, 셈의 후손도, 모두 ‘원 웨이’One Way, 한 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고, 셈의 장막으로 예표되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야벳에게 주신 세상의 창대를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셈에게 주신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가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창대는 여호와를 찬송하는 사명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오버랩’Overlap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저주를 함과 그의 자손들이 받고요, 셋과 그의 후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가, 셈과 그의 자손들이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였고요. 세상의 성공에서, 다른 것이 있다면, 가인와 그의 후손은 세상의 성공을 자신들을 위해서 사용했지만, 야벳과 그의 후손들은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에 물질로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셈과 그의 자손들을 통해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는 신앙을, 야벳과 그의 자손을 통해 ‘창대함’은 헌신으로 드려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셈족의 자손이 아니다 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혈통적인 셈족이라도, 혈통적인 셈족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는 영적인 셈족으로 창대함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는 영적인 야벳의 복 또한 받아야 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371일 동안 방주에 있다고 나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큰 복을 주셨습니다. 내일은 민족 명절인 추석입니다. 우리 가정이 제일 먼저 할 일은 하나님께 예배입니다. 우리 모두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큰 복을 받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오늘 노아의 저자와 축복의 예언을 통해 배운 것을 명시합시다. 그 어느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임이 있어야하고, 시간은 반드시 믿는 자의 편이라는 말씀에 인내가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이 택한 자를 통해 일하시는 말씀에 은혜를 아는 저와 여러분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노아는 셈, 함, 야벳의 아버지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집안 가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알게합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남편이 나의 아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할 때, 그 기준이 세상적이 아니라, 정말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남편이 믿음의 아들이 되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승리의 아버지 승리의 남편 승리의 아들이 되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축복의 아버지 축복의 남편 축복의 아들이 되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달 5월 마지막 주일을 드리면 이 은혜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노아는 함이 취한 행동을 보고, 그와 후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들임을 알고 예언했습니다. 노아는 셈과 야벳을 보고, 그와 후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들임을 알고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인 말씀 온전히 신뢰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노아의 저주와 축복의 교훈.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성경과 목사를 주셨습니다. 말씀에 경청하고 반추하고 행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노아의 저주와 축복의 교훈. 말씀에 인내해야 합니다. 노아의 함 저주는 1000년이 지나서 나타났습니다.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우리의 결론은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때까지 인내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노아의 저주와 축복의 교훈. 말씀에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왜 누구는 택하고 택하지 않았냐고 반문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내가 택함 받았음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지혜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는 영적인 셈족입니다. 노아의 입을 통해 운명이 결정된 세 아들을 보았습니다. 우리 집의 가장이 정말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남편이 믿음의 아들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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