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사랑으로 만난 사람"(룻기 2:8-16) 이재현목사(23.07.16)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3. 7. 16. 17:11

사랑으로 만난 사람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룻기 2:8-16 2023.07.16. 主日禮拜

 

“8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외에 한 가지 사랑을 더 하셨습니다(참고/20:1-17,22:21-24;19:9-10,18;6:4-5,16:11.14;22:37-38;12:2,30;10:37).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love one another하라’(13:34). 이 말씀은 가룟 유다가 스승을 팔기 위해 나간 후에 하셨습니다(13:31). 서로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한 명령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우리를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니다(13:35). 이를 행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유대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고 미움을 받아야 했고, 출교를 당하여 생업과 지위를 잃었으며, 핍박을 넘어 목숨까지 위협을 당했습니다(참고/21:12,16;7:1,25,8:57-59,12:36-43,15:19,20). 이러한 현실에서 믿는 이들은 한 공동체를 만들어서 모여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생명과 같이 여긴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 안에서 서로 사랑으로 이겨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무상통으로 기업을 잃은 형제들이 상실되지 않도록 했습니다(4:44-45).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15:9). 서로 사랑은 예수의 사랑에 기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요일4:10.참고/27:33;15:22;19:17).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4:10).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無條件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4:10).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주신 사랑입니다. 전적으로 남을 위한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사’(요일4:10). 이것은 최대의 희생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희생적’犧牲的인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내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전부를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에 거한 자만이 진정한 사랑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까지 말씀합니다(요일4:7-10). 서로 사랑 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과 일맥하는 말씀입니다(참고/3:9,7:50,19:39). 서로 사랑은 예수님 당시는 유대인들과 제자들 오늘날에는 세상과 제자를 구별하는 기점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과 그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제직이 되고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신앙의 훈련을 받는 것 무엇 때문이에요 구원받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14). ‘나의 명한 것은 곧 서로 사랑 하라입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듯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뚜렷한 특색이 있는데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만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사명 중 하나는 디아스포라적 기능’mission of diaspora(διασπορά)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빛과 소금의 사명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변화시키는 것입니다(5:13-26,10:16;9:50;10:3,14:34).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또 다른 사명은 에클레시아적 기능’Mission of Ecclesia(ἐκκλησία)입니다(18:19;3:2;1:22-23;2:12). 그 뜻은 세상에서 구별되어 부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말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세상의 삶과 다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확실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이용하고 필요에 따라 상대를 바꾸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기관과 소그룹 그리고 여러 모임들이 이러한 관계의 형성은 되지 못한 체 다른 일들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 그것으로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실천해 가고 있다고 한다고 생각한다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가 열려 있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외형의 모습은 어떠할지 모르나 안으로 서로 용서하고 감싸주는 모습이 부족함으로 바로 여기에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일 때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사이가 좋고, 항상 웃고, 무슨 일만 일어나면 내일 같이 찾아가고, 친하게 교제를 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일까 부러움과 기대의 눈으로 보여야 합니다. ? 우리는 복음 생명을 함께한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의 전형적인 모습을 초대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2:42). 유무상통하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2:43-47). 서로 사랑의 실행으로 예수님의 새 계명을 그대로 실천한 곳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들과 함께 서로 사랑으로 본을 보여야 할 집사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제직들이 서로 사랑하라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참고/2:43-47;6:3-6).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13:5,15). 사도 바울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6:2)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3) ‘서로 용납하고’(4:2) ‘서로 돌아보아 사라과 선행을 격려’(10:24)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예수 믿고 난 후 두 번째의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성도의 가장 중심적인 삶 중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분열과 상처와 혼란을 조장하는 사람이 헌신과 봉사 활동에 열심이라고 해서,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들 분열과 상처와 혼란을 우리 안에서 과감히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전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조건적 이타적 희생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서로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하여, 우리 가정, 교회 공동체에서 행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만남과 이별

 

집중 호우로 많은 인명이 사상했습니다. 아직 실종된 분들이 속히 구조되고, 사태가 속히 복구되며, 더 이상의 피해가 없도록 기도해애 겠습니다. 21세기 최고의 문명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이 자연 재해 앞에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대통령실과 관저 정부청사에 이교, 무속, 미신의 행위가 사라지고, 이 나라에 우상, 이단, 배교의 잔재가 소멸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행정부 수반부터 모든 국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민의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 삼 년간 방역이라는 명분으로 생명과 같은 예배를 사수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신앙과 진리와 헌신을 그 어떤 이유로도 대체하지 않는 한국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룻기서는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유대인 집안에 이방 모압 여인들을 자부로 맞이하는 만남입니다.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의 사람이었으나 흉년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땅에 이르러 살게 됩니다(1:1-2). 이방 땅에서 10년을 살면서 어느 정도 정착을 하게 되었습니다(1:4).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이 죽어 사별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착하고 어여쁜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맞이하게 됩니다(1:3-4). 이별로 슬픔에 잠긴 집안에 두 자부로 인하여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제 얼마 있으면 할머니가 되는 손자까지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변고인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1:5). 성경에 그 죽음의 원인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결혼한지 얼마 안된 것으로 보아 사고로 인한 참사이거나,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죽은 듯 합니다. 그러므로 그 비통함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그것도 두 아들 모두를 잃었으니 말입니다.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1:5).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의 비통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별과 만남 그리고 다시 이별 그것도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사별이 나오미 집안을 휩쓸었습니다. 손자라도 있다면 그가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새로운 손자며느리를 맞는 만남으로 집안이 다시 번성할 것을 기대라도 해보련만, 후손 하나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나오미는 젊은 자부 둘의 인생이라도 열어 주기 위하여 입맞춤을 하고 이별을 고합니다(1:8). 성경에는 이 이별의 순간에 세 여인이 소리 높여 울었다라고 두 번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1:9,14). 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 애간장이 녹고, 타는 듯한, 이별의 고통이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살아서 헤어지나 죽음과 같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이별을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고하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런 상황이었다면 시모된 입장서야 두 자부들이 떠나면 이제 정말 적 붙일 데 없는 처량하고 박복薄福한 신세이지만, 그 젊디젊은 자부들의 앞날을 위하여 그랬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8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11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1:8-9,11-13).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 남편 될 아들이 이제 내게 없고 내가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도 너희가 그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네 고향 네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내 아들들과 홀로된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새 남편을 얻게 하여 평안함을 얻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흐르는 눈물,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참아가며, 두 자부를 권면하는 나오미의 모습과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1;10). 오열을 토하며 호소하는 두 자부의 모습은 이별이라고 하는 자리에서 연출되는 비극의 드라마와 같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나오미의 권유에 큰 자부 오르바는 시모에게 입맞추며 이별을 하였고 룻은 나오미를 붙좇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14). 오르바는 자신의 고향 부모에게로 갔지만 룻은 꼭 붙어 떠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관념觀念이 아닌 체험體驗으로 알아야 합니다

! 나오미의 두 자부 오르바와 룻 사이에 이런 결과의 차이가 있었을까요?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16-17)

 

룻의 이러한 철저한 신앙과 효성이 이 동서 오르바는 떠났지만 룻은 떠나지 않은 것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 상고해 볼 것은 룻도 이방 모압의 여인이요. 그의 동서 오르바도 이방 모압의 여인입니다. 그러면 이 두 여인은 누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았겠어요. 시모 나오미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알고 믿었을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방금 우리가 합독한 말씀에 기록된 룻의 신앙 고백은 그의 동서 오르바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룻은 남고 오르바는 떠났을까요?

 

룻은 자신이 신앙을 고백한 그 하나님께서 그의 앞날도 책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동서 오르바가 떠났음을 성경은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지 않고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라고 하였습니다(1:15). 오르바의 ’神 즉 모압의 이방의 신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오르바는 집안의 몰락으로 섬기던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예전에 섬기던 자신의 에게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지가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은 역으로 말한다면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고 책임지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이 끝이 아니다. 이것이 룻의 믿음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온전한 믿음, 절대적인 의지에서 룻과 오르바의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오르바가 떠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율법으로나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과부가 되고, 집안에 대 이을 아들도 없고 또 죽은 남편의 형제가 없기에 결혼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재혼을 하는 것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율법과 관습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관념觀念이 아닌 체험體驗으로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부터 여름 성회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이 성경학교와 여름 캠프에서 하나님을 관념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만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위해 많은 기도를 바랍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의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예비입니다

 

그렇게 모압을 떠난 나오미와 룻은 모두 이별하고, 두 과부가 도착한 베들레헴에서 드센 여인들로 소문나고 따돌림받을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사랑, 기쁨이라는 뜻의 나오미라는 자신의 이름 대신, 괴로움이라는 뜻의 마라라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말합니다(1:20).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1:21). 내가 모압에 풍족히 갔다가 베들레헴에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어찌 얼굴을 들 면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과부 여인들에게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고 집안이 놀라운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 만남이란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고 만남이란 노래를 부른 가수 노사연 그래서 이무송과 결혼한 만남이 아니라, 보아스와 룻의 만남입니다. 장소는 곡식이 무르익은 넓은 들녘이었고, 때는 추수할 시기였으며, 보아스는 그 밭의 주인으로 룻은 떨어진 이삭을 줍는 가난한 여인으로의 만남입니다(1:22,2:1-8). 벌써 부터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가 전개될 것 같아 가슴이 설레이지 않습니까? 보아스는 성경을 통하여 볼 때 신앙이 참으로 훌륭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밭에서 수학을 하는 종들에게도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음을 찾아 볼 때, 종들에게도 하나님의 복을 비는 신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2:4). 그러자 종들도 보아스에게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화답을 합니다(2:4). 종들에게 먼저 신앙의 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종들에게도 잘 가르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대화 중에 보아스의 눈에 띤 한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입니다(2:5). 혹자는 말합니다. 아마 보아스가 룻을 보고 첫눈에 반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식사할 때 불러 가까이 앉히고 직접 떡을 건네주었고, 종들이 길러온 물을 먹어라 하였고, 종들에게 명하여 시비하거나 해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삭을 많이 줍을 수 있도록 일부러 단에서 이삭을 뽑아 버리고 한 것이 아니냐고 말을 합니다(2:8-9,14-15). 그러나 보아스는 당시 베들레헴에서 아주 유력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1). 이 말은 부호라는 뜻으로 경제적인 면이나 인격적인 면이나 신앙적인 면이나 으뜸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보아스라는 이름 자체가 유복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를 볼 때 아쉬울 것 없는 실력자, 어디로 보아도 흠잡을 때 없는 보아스가. 이방 모압의 여인 그것도 사별한 과부이고, 또 집안이 궁핍하여 잘 꾸미지도 못하며 남의 밭 이삭이나 주어 연명하는 나오미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그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혹자는 아마 룻이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데 매우 열심히 일했기에 보아스의 눈에 띠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도 아침부터 잠시 쉰 외에는 계속해서 일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7). 그러나 당시 가난한자와 고아와 과부들이 추수하는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은 율법이 정한 바입니다(참고/19:9-10). 이것은 곧 추수하는 보아스의 밭에 나오미만이 아닌 다른 가난한 사람들도 함께 이삭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가난한 사람들은 룻보다 형편이 나았기에 천천히 적게 줍고 룻은 열심히 쉬지도 않고 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나 외국 사람들이나 공짜 싫어할 이유 없고, 그것 가지고 가는데 열심을 안낼 사람 없습니다.

 

성도님 중에는 도토리묵을 좋아하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참나무에서 열리는 상수리로 만든 묵 보다 한결 맛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토리도 흔히 산에서 열리는 산 도토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무키도 작달막하고 옆으로 퍼져 있는 형태이고 도토리의 모양이 작고 둥근 편입니다. 그런데 쌀 도토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무가 쭉 뻗고 큽니다. 생김새도 산 도토리에 비해 훨씬 크고 길쭉합니다. 이것을 어릴 때 이웃 동네 산에서 처음 보았는데 그 때가 가을이었어요. 산 도토리만 보다가 쌀 도토리를 보니 얼마나 신기하고 욕심이 나던지 정신없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릇을 안 가지고 와서 바지 주머니에 도토리를 담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줍느라고 허리를 굽히면 주머니에 있는 도토리가 다 떨어져 버린 것이지요. 그것도 모르고 공자니까 줍는데 만 정신이 팔려있으니 도로 아미타불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쌀 도토리나무에 주인이 계시더라고요. 한참 재미있게 줍고 있는데 야 이놈들아 그거 우리가 키우는 거여얼마나 겁이 내 줄행랑을 쳤는지 공짜인 줄 알았다가, 삼십육계를 한 것이지요. 공짜이니 정신없이 주었는데요. 오늘 보아스의 밭에서 많은 가난한 사람 중 룻만 열심히 주었기에 보아스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서로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결국 보아스가 룻을 만난 만남은 외모도 아니고 열심히 일한 모습도 아닙니다. 해답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아스가 사환에게 묻습니다.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2:5). 사환이 대답을 합니다.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입니다(2:6). 이를 확인한 보아스가 룻에게 직접 다가가 말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2:11). 이 말은 룻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녀의 효성과 신앙을 보아스가 깊이 새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보아스가 룻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2:12).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시모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 그러한 룻의 효성과 신앙을 보고 하나님의 보답과 보호와 보상이 있을 것을 예견했던 보아스 이미 아내로 맞이할 결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보아스와 룻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 교회의 성도와 성도, 목사와 성도의 만남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보아스가 룻의 외모나 열심히 일함을 보고 만나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우리는 외모를 보고 만나 사이도 아니요. 무슨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만난 사이도 아닙니다.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소중한 것과 같이, 내 옆에 있는 성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 우리 성도와 성도들의 만남이요. 목사와 성도들의 만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옆에 성도를 볼 때 외모와 환경과 재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안 하고를 따져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구원받았으니,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만남이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시모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보답과 보호와 보상이 있을 것을 알았던 보아스와의 만남과 같은 것입니다. 외모도 아니요, 일을 잘함을 본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사랑이요, 이러한 사람의 만남이 오늘 설교 제목과 같이 사랑으로 만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가족을 아무리 사랑해도 이 관계 위에 잊지 못하고는 갈등이 반복 되이 증폭될 수밖에 없음을 성도 여러분들의 체험으로 알고 계신 바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청아비전교회 성도와 성도 그리고 목사와 성도와의 만남은 이 사랑과 이 사랑으로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의 정의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삽십 여년 동안 가족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은 후, 목수 일로 어머니 마리아와 젖동생들을 보살피는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집을 떠나셨고, 바쁘신 사역으로 다시 들리실 수 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안 마리아와 남동생과 여동생들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참으로 모처럼 해후를 기대했습니다. 이들을 알아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고 하자,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며 다소 충격적인 답변을 하신 후,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셨습니다(12:46-50;3:31-35;8:19-21).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머니와 동생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분이라는 것입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리가 알고 있는 혈육이라는 가족의 관계를 넘어 믿음이라는 가족의 확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드린 것처럼 믿음은 생명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생명같이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로 보면서 그들에게 나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았음의 동질성을 발견하여야 하고, 서로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만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 각 전도 대상자가 있습니다. 한 영을 놓고 전도한다고 하는 것은 그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인도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초신자가 변화되고, 나약한 자가 당당한 자가 되는 그 벅찬 감격과 기쁨은 너무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면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뜻이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면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뜻이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오늘 우리 성도들의 사랑의 만남을 찬양하는 복음송입니다.

사랑으로 만난 사람은 고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기에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그 형제가 죽은 형을 대신하여 형수에게 장가를 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수혼법’嫂婚法 이라고도 하고 계대결혼’繼代結婚,levirate marriage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없거나 형제가 있더라도 원치 않는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그 법이 적용됩니다. 오늘 룻도 그와 같은 경우인데 보아스도 룻의 시부 엘리멜렉의 친족이었지만, 보아스 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습니다. 즉 그가 양보하지 않으면 룻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룻의 기업 무를 자를 만나 담판을 짖게 됩니다. “3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4:3-4). 룻은 기업 무를 자에게 당신은 엘리멜렉의 친척이다. 이제 그가 죽었고 그의 아내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소유하던 밭을 팔려고 하니, 그 밭을 사라고 말합니다. 이에 기업을 무를 자가 사겠다고 쾌히 승낙을 합니다.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4:5). 그러면 그 밭을 산다고 하는 것은 남편과 아들이 없이 홀로된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야 하고, 나오미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보아스가 말하자 이 기업 무를 자가 고민이 생깁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4:6). 내가 밭을 사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 죽은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과 기룐의 유산으로 남게 되는 것이요, 자신의 재산은 앞으로 결혼하여 룻에게서 난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요. 룻과 나오미를 부양하여야 하니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어 포기를 해버립니다.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4:8). 기업 무를 자가 자신의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벗어 준다고 하는 것은 나는 포기하겠다 라는 표의 전례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장로들과 백성들은 이 일에 증인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후에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말씀을 이어보면 오벳의 양육자는 보아스와 룻이 아닌 나오미입니다(4:16). 계대 결혼 법에 의하여 나오미가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일고 하였습니다(4:17). 앞으로 보아스의 재산은 죽은 말론과 기룐의 이름으로 됩니다. 이것을 보아스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하는 것은 룻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고 헌신 할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이러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통하여 난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입니다(4:18). 룻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안 보아스, 이 사랑으로 만난 사람에게 이러한 깊은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약속의 메시아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를 잊는 아들 오벳을 룻을 통하여 얻는 것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희생 후에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 두 사람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나도 승리하고 다른 사람도 승리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어야 복된 것입니다. 남은 안되고 나만 잘 되었다고 바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 속에 빠져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이방 땅에서 만남과 계속되는 이별, 영원한 이별, 사별과 사별 그리고 이별 고향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새로운 만남, 사랑으로 만난 사람의 생생한 말씀 룻기입니다.

 

 

하나님을 만남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난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어찌 되었건 룻은 복이 참 많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방 여인이로 과부로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어 생계를 꾸려가는 비천한 신세에서, 베들레헴의 유력자를 만나 세상 말로 하면 신분 상승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룻기를 다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16-17). 룻은 떠나라는 나오미의 강권에 어머니께서 가르쳐준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룻은 배운 하나님이 아니라 만난 하나님임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1:18). 나오미도 룻의 결심, 믿음의 결단에 더 이상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결심으로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걸음을 내 걸었을 때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는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는 외모로 만나는 곳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 모두가 구원받았기에 서로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하는 만남입니다. 어떤 일에 얽매여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매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우리가 만난 만남이 사랑의 만남인 것입니다. 사랑으로 만난 사람은 고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성도들 위에 충만히, 우리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에게, 부모와 자녀에게, 형제에게, 친지에게, 이웃과 친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이루지는, 사랑으로 만난 사람의 만남 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리

 

만남과 이별

 

룻기는 만남과 이별로 시작됩니다.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가족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주하였습니다(1:1-2). 그 땅에서 정착한지 10년 엘리멜렉은 죽고 아내 나오미는 크게 슬퍼하였지만, 아들 말론과 기룐이 오르바와 룻과 결혼을 자부를 맞는 기쁨을 가졌습니다(1:3-4). 그러나 그도 잠시 두 아들을 잃어야 했습니다(1:5). 이별과 만남 그리고 다시 이별 그것도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사별이 나오미 집안을 휩쓸었습니다. 손자도 얻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나오미는 젊은 두 며느리의 인생을 열어주기 위해 친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합니다(1:8). 입맞춤을 하고 이별의 순간에 세 여인이 소리 높여 울었다라고 두 번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1:9,14). 나오미는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 남편 될 아들이 이제 내게 없고, 내가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도 너희가 그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느냐. 이제 네 고향 어미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내 아들들과 홀로된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너희로 새 남편을 얻게 하여 평안함 얻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1:8-9,11-13). 두 자부는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며 오열 했습니다(1;10). 그러나 계속되는 나오미의 권유에 큰 자부 오르바는 시모에게 입 맞추며 이별을 하였고 룻은 나오미를 붙좇았더라고 말씀합니다(1:14).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관념觀念이 아닌 체험體驗으로 알아야 합니다

나오미의 두 자부 오르바와 룻 사이에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요?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16-17). 룻의 신앙과 효성을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롯도 오르바도 모압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둘은 시모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둘의 다른 선택을 한 것은, 오르바가 떠났음을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지 않고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라고 하였습니다(1:15). 오르바는 집안의 몰락으로 섬기던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예전에 섬기던 자신의 모압 땅 이방 신에게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고 책임지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르바가 떠난 것은 율법으로나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과부가 되고, 집안에 대 이을 아들도 없고 또 죽은 남편의 형제가 없기에 결혼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재혼을 하는 것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율법과 관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관념觀念이 아닌 체험體驗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이 성경학교와 여름 캠프에서 하나님을 관념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만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위해 많은 기도를 바랍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의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예비입니다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에 온 나오미는 이름의 뜻인 기쁨을 바꾸어 괴로움을 의미하는 마라로 불러달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1:20-21). 이 두 과부 여인들에게 새로운 만남과 놀라운 축복이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황금 물결이 넘실대는 넓은 들녘에서 보아스는 주인으로 룻은 이삭을 줍는 여인으로의 만남입니다(1:22,2:1-8). 보아스는 집에 하인에게까지 신앙을 가르치고 본을 보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2:4). 보아스는 추수하는 밭을 찾았다가 룻을 발견하게 됩니다(2:5). 첫눈에 반했을까요? 그러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자이었습니다(2:1). 경제적 인격적 신앙적으로 으뜸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보아스라는 이름 자체가 유복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를 볼 때 아쉬울 것 없는 실력자, 어디로 보아도 흠잡을 때 없는 보아스가. 이방 모압의 여인 그것도 사별한 과부이고, 또 집안이 궁핍하여 잘 꾸미지도 못하며 남의 밭 이삭이나 주어 연명하는 여인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그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열심히 일해서 이었을까요? 그러나 룻 말고도 당시 당시 가난한자와 고아와 과부들이 추수하는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은 율법이 정한 바입니다(2:7.참고/19:9-10). 보아스의 밭에서 많은 가난한 사람 중 룻만 열심히 주었기에 보아스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서로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만난 만남은 외모도 아니고 열심히 일한 모습도 아닙니다. 보아스는 사환을 통해 모압에서 온 나오미의 며느리 룻인 것을 확인했습니다(2:5-6). 그리고 그녀에게 직접 다가가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2:11). 이 말은 룻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녀의 효성과 신앙을 보아스가 깊이 새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 보아스가 룻에게 하나님의 보답과 보호와 보상이 있을 것을 예견했습니다(2:12). 이 말은 보아스 이미 아내로 맞이할 결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2:12). 보아스와 룻의 만남을 통하여 성도와 성도, 목사와 성도가 어떤 만남이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외모나 열심히 일함을 보고 만나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우리는 외모를 보고 만나 사이도 아니요. 무슨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만난 사이도 아닙니다.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소중한 것과 같이, 내 옆에 있는 성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 우리 성도와 성도들의 만남이요. 교역자와 성도들의 만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옆에 성도를 볼 때 외모와 환경과 재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안 하고를 따져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구원받았으니,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만남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만남이 사랑으로 만남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삽십 여년 동안 가족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은 후, 목수 일로 어머니 마리아와 젖동생들을 보살피는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집을 떠나셨고, 바쁘신 사역으로 다시 들리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안 마리아와 남동생과 여동생들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참으로 모처럼 난의 해후를 기대했습니다. 이들을 알아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고 하자,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며 다소 충격적인 답변을 하신 후,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셨습니다(12:46-50;3:31-35;8:19-21).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머니와 동생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분이라는 것입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혈육이라는 가족의 관계를 넘어 믿음이라는 가족의 확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드린 것처럼 믿음은 생명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생명같이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로 보면서 그들에게 나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았음의 동질성을 발견하여야 하고, 서로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만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 각 전도 대상자가 있습니다. 한 영을 놓고 전도한다고 하는 것은 그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인도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초신자가 변화되고, 나약한 자가 당당한 자가 되는 그 벅찬 감격과 기쁨은 너무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사랑으로 만난 사람은 고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기에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그 형제가 죽은 형을 대신하여 형수에게 장가를 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수혼법’嫂婚法 이라고도 하고 계대결혼’繼代結婚,levirate marriage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없거나 형제가 있더라도 원치 않는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그 법이 적용됩니다. 오늘 룻도 그와 같은 경우인데 보아스도 룻의 시부 엘리멜렉의 친족이었지만, 보아스 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습니다. 즉 그가 양보하지 않으면 룻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룻의 기업 무를 자를 만나 담판을 짖게 됩니다.

 

룻은 기업 무를 자에게 당신은 엘리멜렉의 친척이다. 이제 그가 죽었고 그의 아내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소유하던 밭을 팔려고 하니, 그 밭을 사라고 말합니다. 이에 기업을 무를 자가 사겠다고 쾌히 승낙을 합니다(4;3-4). 그러면 그 밭을 산다고 하는 것은 남편과 아들이 없이 홀로된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야 하고, 나오미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보아스가 말하자 이 기업 무를 자가 고민이 생깁니다(4:5). 내가 밭을 사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 죽은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과 기룐의 유산으로 남게 되는 것이요, 자신의 재산은 앞으로 결혼하여 룻에게서 난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요. 룻과 나오미를 부양하여야 하니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어 포기를 해버립니다(4:6). 기업 무를 자가 자신의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벗어 준었습니다(4:8). 이 행위는 포기를 나타내는 표의 전례로 그 자리에 모인 장로들과 백성들은 이 일에 증인 되는 것입니다(4:8). 이러한 과정 후에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를 통하여 난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입니다(4:18).

말씀을 이어보면 오벳의 양육자는 보아스와 룻이 아닌 나오미입니다(4:16-17). 계대 결혼 법에 의하여 나오미가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앞으로 보아스의 재산은 죽은 말론과 기룐의 이름으로 됩니다. 이것을 보아스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하는 것은 룻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고 헌신 할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이러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룻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안 보아스, 이 사랑으로 만난 사람에게 이러한 깊은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약속의 메시아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를 잊는 아들 오벳을 룻을 통하여 얻는 것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희생 후에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 두 사람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나도 승리하고 다른 사람도 승리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어야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남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난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어찌 되었건 룻은 복이 참 많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방 여인이로 과부로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어 생계를 꾸려가는 비천한 신세에서, 베들레헴의 유력자를 만나 세상 말로 하면 신분 상승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말씀을 다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16-17). 룻은 떠나라는 나오미의 강권에 어머니께서 가르쳐준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룻은 배운 하나님이 아니라 만난 하나님임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1:18). 나오미도 룻의 결심, 믿음의 결단에 더 이상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결심으로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걸음을 내 걸었을 때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는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관념, 지식으로만 아는데서 머물지 않고, 체험, 인격으로 만날 수 있게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지키시고 책임지신다는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우리 자녀들이 여름 성회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갖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외모를 보고 만나 사이도, 무슨 일을 많이 해서 만난 사이도 아닙니다.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소중한 것과 같이, 내 옆에 있는 성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사랑, 사랑으로 만난 사람입니다. 성도를 볼 때 외모와 환경과 재력을 보지 말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죽은 엘리멜렉의 밭을 사고, 그의 아내 나오미를 봉양하고, 아들은 말로과 기룐의 족보에 올려야 되는 등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와 룻은 예수 족보를 잇는 오벳을 얻게 되었고, 둘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 사랑으로 만난 사람으로 귀한 희생을 쌓을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보아스 같은 유력자를 만나서 룻이 신분 상승할 수 있었다는 세상 논리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룻이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모든 성도들과 중보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는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혈육으로 맺어진 부모와 형제만이 가족이 아니요. 믿음을 생명으로 여기는 공동체 또한 가족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확대 시켜준 가족 범위에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주님을 믿고 속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