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한 나무"(출 15:22-27) 이재현목사(23.08.06)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3. 8. 6. 17:30

한 나 무

하나님말씀 : 출애굽기 15:2227 2023.08.06. 主日禮拜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God is Love’. 하나님이 사랑의 기원이고 본질이며 자체입니다. 이 하나님 사랑의 첫 번째는 예수님입니다(3:17;1:11,9:7;3:22,20:13;3:35,벧후1: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15:9). 순서를 볼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그리고 우리에게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관계였는가요?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입니다(1:27;5:17,10:30,11:41-42,31,17:4-5).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응답되는 사랑이었고, 상호 사랑의 관계 안에 충만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서 더욱 극대화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요일4:10).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표현이고 외현이고 실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으로 인간의 몸을 입은 성육신, 십자가에 죽으심이, 가장 완전한 사랑이며, 인류 최대의 사건인 것입니다(1:14;2:8). 예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자기의 의를 드러낸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가슴을 치며 큰 죄인이라고 회개하고 통회하며 자복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18:9-14). 이렇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원하셨지,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는 자들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납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용납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참고/2:17). 그렇지 않다면 이 자리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합니다(5:8).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사랑 할 수 없는 자들도 사랑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희들이 아주 죄인으로 취급하는 세리와 이방인들도 한다고 하셨습니다(5:46-48). 정말 미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부수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로 미운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 밉다고 나와 함께 살던 가족과 내 정성을 다해 꾸민 가정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그렇습니다. 억울할 때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데 그것을 예사로 여기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인일 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랑이 없다. 사랑이 고갈되었다라는 것은 일반적인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자라도 사랑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사랑 즉 아무나 할 수 있는 사랑은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그저 둘만의 그저 친구끼리, 조금 더 나아가야 그저 관계 맺고 있는 사람 정도입니다. 이것이 무슨 사회에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도 잘 챙기는 너무 잘 챙기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후자의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을 실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 성도가 앞장서야 하는데 먼저 우리 성도 안에 이 사랑이 충만히 이루어져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법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이셨습니다. 한 영혼의 생명을 구원하시며, 사랑을 행하신 것입니다(참고/12:9-12;3:1-6;6:6-11).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3:10). 사랑은 율법을 이긴 것이고,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이란? 사람들에게서 가장 고귀한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그 사람을 어떤 선입견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안의 생명을 보는 것이며, 그 생명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생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한 영혼을 대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결국 자신을 내어버리는 것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요. 그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란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내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친절)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사랑의 송가인 이 말씀은 곧 자신을 내어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항상 촉촉한 흡족한 넘치는 사랑 안에 거하고, 베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도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내가 한 것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요. ‘허다한 죄를 덮는다’. 내가 그에게 내던졌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원수 같은 사람도 예수로 보이는 것입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나를 속일 줄 모르나, 나는 그를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그의 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아주 흠뻑 젖어야 하겠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의 가치관이 변하고, 그것이 의식화되어, 내 생활화되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원망과 욕심과 시험 거리가 없기를 바란다면, 정말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안에서부터 원하시는 말씀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흠뻑 젖고, 그 사랑으로 험악한 이 세상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승리함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떠난 자들의 특징 스스로 살기 위해 몸부림침

 

舊, 소련의 대문호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1918-2008은 자신의 어린 시절 볼세비키 혁명이 후, 70여 년 동안 공산주의로 전 세계에서 6천 만 명이 죽임을 당한 현실에서, “왜 이런 비극이 찾아왔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야라는 어른 들의 말을 회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곳이 지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는 자들에게 네 가지 중한 벌, ‘전쟁과 기근자연재해와 전염병온역으로 해를 당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사나운 짐승입니다. 우리 주변에 야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현역 나동을 보면서, 미국 등 여러 나라의 총기 난사를 보면서,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테러를 보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사나운 짐승이 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떠난 곳이 지옥이고, 하나님을 떠난 자가 악마인 것입니다. 지구촌 어느 곳도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우상과 죄악이 사라지고 주를 경외하는 대한민국, 배교와 타협하지 않는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앞서도 기도했습니다만 2023 새만금 세계 스카우트 제25회 잼버리 대회가 진행 중인데요. 위생, 보건, 환경, 음식 등으로 여러 나라가 중단을 결정했고, 우리나라에서도 한 지부가 불미스러운 일로 퇴영을 하기로 했습니다. 국격이 심한 손상을 받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속히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특별히 많은 청소년이 참가하고 있는데요. 한 명의 해함도 없기를 중보해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면서 너무나도 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싸우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앞에서 인도하던 구름 기둥이 뒤쪽으로 옮겨지자 이스라엘 무리 뒤쪽은 흑암 속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강대한 애굽 병거의 바퀴들이 빠지고, 애굽 병사들이 끼리 엉키고 뒤섞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범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수효의 바로의 군대가 모두 바다에 빠져 몰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새 노래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습니다. 모세, 미리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 높여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였습니다. 출애굽기 151-21절은 온통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찬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

 

“1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2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4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5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6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7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8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9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10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11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2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6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17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15:1-18)

 

미리암의 노래

 

“19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을 그들 위에 되돌려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지나간지라 20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21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15:19-21)

 

그런데 이와 같은 대역사를 통해 구원받고 감격에 겨워 찬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과 사흘 만에 또다시 옛날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15:22-24)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스스로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잠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믿음과 인내심은 동나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치료되어야 할 부분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도 쉽게 의심하고 불순종하는 이 마음이 치료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것은 육체의 질병이나 사회적인 억압보다 더 심각한 질병입니다. 광야에서 사는 동안 물을 만나지 못해서 목말라 죽어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병이 바로 불순종과 패역함과 완악함의 병입니다.

 

하나님의 시험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인 불신앙의 본성은 여전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로 이끄시는 가운데,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15:25).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그전에도 시험이 있었습니다, 홍해 앞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을 붙들고 있는가입니다. 이번 시험은 광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물 없이 사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흘 동안 물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중간에 함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15:23). 이스라엘이 중간에 만나게 되는 마라’ ‘쓴 물입니다. 이 쓴 물은 마실 수 없는 물입니다. 누구든지 이 물을 마시면 배탈이 나서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믿고 계속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수르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15:22). 이 광야는 홍해 바다 앞에서 시내 산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곳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물이 없는 사흘 길은 무척 힘든 길이었습니다. 마치 죽음의 길과도 같았습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이런 길로 인도하시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홍해의 대역사를 체험했던 터라, 믿음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접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웬만큼 참으면 하나님께서 또 어떤 일을 하시겠지라는 기대하고 걸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틀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흘이 지났을 때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는 마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필요한 것은 이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물입니다. 이제 물만 있으면 되었지, 하나님의 말씀 같은 것은 더 필요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실 것도 있고, 그늘도 있는 곳에서 필요한 것이지, 이처럼 물 없이 사흘을 갈증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 필요하겠습니까? 드디어 중간에 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은 먹어서는 안 되는 물이었습니다. 그 물은 무서운 복통을 일으키는 쓴 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이 물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이 물만 마시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것을 마시는 자마다 배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앓아야만 했습니다. 본문에 그 물을 마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이미 마시지 말아야 할 물을 마셔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중간에 시험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목표는 마라가 아니었습니다.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엘림입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까지 거의 다 간 지점에서, 무시무시한 원망불평을 하나님께 쏟아 놓고야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홍해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병은 너무나도 깊었습니다.

 

본질상의 문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들의 본질상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하였습니다(3:10-11). 이 말씀은 인간은 전적 타락’, ‘전적 무능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서 구원을 받는 데는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너무도 타락했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6:44).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야만,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이끌어서 예수 믿도록 하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는 결코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고 무능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지 못하는 이유는 믿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안 믿는다고 안타까워하는 주부들이 있습니다. 옆집에 사는 소도둑같이 생긴 아저씨는 믿는데 장동건 현빈 박보겸 같은 당신은 왜 못 믿느냐고,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없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로 믿을 수가 없는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6:36).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여 주신 분이셨는데도 믿지 못했습니다(참고/요일1:1). 이와 같은 비극은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부패했기에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요? 이것은 본질상의 문제입니다. 이런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인간 조상이 원숭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일컬어 진화론자라고 합니다. 진화론을 신처럼 떠받들고 믿는 사람들이 오늘날 많이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학자들은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라면, 어떤 분명한 가시적인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자 두 사람이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삐끼라고 이름 붙인 침팬지를 아이처럼 입양해서 6년 동안 말을 가르쳤습니다. 원숭이 중에서 제일 지능이 높다고 하는 침팬지가, 6년 후에 하는 말이라고는 ’mom, ‘파파’papa, ‘’cup, ‘’up 이 네 마디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세히 귀를 기울여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학자들은 원숭이가 정말로 사람의 조상이라면, 학습에 기울인 노력에 비례해 최소한의 기대 수준은 만족시켜 줘야 할 텐데, 전혀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을 보니,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침팬지의 구강 구조를 조사하였습니다. 어느 언어에서나 말을 하려면 세 가지 모음인 ’, ‘’, ‘는 발음할 수 있어야 니다. 그러나 침팬지는 ’, ‘’, ‘를 발음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침팬지에게 ’, ‘’, ‘를 발음할 수 있는 목구멍 ’咽, 머리 ’頭, ‘인두’咽頭”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상의 문제입니다. 본질상 문제가 있으므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무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손으로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하고 부르짖지 못하는 이유도, 고백할 수 있는 영적 인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전적 타락, 전적 무능이라고 합니다. 혹시나 여러분 가운데서 내가 믿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전적 타락이요 전적 무능인 것입니다.

 

치유되어야 할 본성 – 불순종, 패역함, 완악함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치료받아야 할 병은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불순종 본성, 패역한 본성, 완악한 본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서도, 성령의 체험을 하고서도, 좀처럼 치료되지 않는 무서운 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깨닫게 하려고, 수르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보고서도,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서도,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쓴 물을 마셔서 심한 복통으로 뒹굴면서도, 배가 아픈 것만 원망했지, 자기들의 불신앙이 이 복통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목격하고 감격의 찬양을 드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주 청소년 여름 수련회를 다녀와서, 이후 자녀들의 믿음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 않습니까? 캠프 기간 얼마나 많은 기쁨의 찬양과 눈물의 기도를 올려 드렸습니까? 오히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깊은 악한 본성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통의 길을 주셨습니다. 사흘간 물 없는 사막의 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시험이 길이었습니다.

 

제가 학창시절 공부할 때 어른들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좋은 여건과 뒷받침에서 공부 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짜 공부를 잘하는 것은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공부하고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이에 비유할 수 있어요. 편안하고 모든 것이 뜻대로 잘되는데 누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다고 말 못 합니까? 고통이 와야 우리의 믿음이 시험test됩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물 없는 사흘간의 사막 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기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말랐을 때 율례와 법도는 전혀 소용없습니다. 모두 쓴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웅덩이로 달려가고 말았습니다.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알면서도 달려갔습니다. 왜냐구요? 하나님에 대한 미움 때문입니다. 빨리빨리 내 말을 들어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증오심입니다. 반항심입니다. 그러나 그 물은 더욱더 고통스럽게 했고, 죽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생기는 어려움은 자신의 본성을 보게 하는 시험의 고난일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에 처하면 우리는 말씀을 붙들기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살 길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마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독으로 퉁퉁 부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세의 부르짖는 기도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독에 부은 상태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내 살 길을 찾는 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무엇인가 비밀스럽게 나름대로 다 살길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내 안에 변하지 않은 본성을 감추고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본성의 치료가 시급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와서 하나님 저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강퍅한 마음을 치료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솔직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눈에 보이는 어려움만 보지 마십시오. 내 안에 있는 불순종 마음을 보시기 바라빈다. 패역한 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완악한 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비슷비슷합니다. 이 부패한 마음이 치료되지 않은 한 무엇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려움의 실상은 내 안에 부패한 본성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불순종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사막의 사흘 길은 불가능한 시험인 것 같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루만 걸어도 죽을지 모를 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견딜 만한 최대의 거리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430년 동안 노예 노동으로 연단된 자들이었고, 원래 애굽 땅에서 시작도 고센 땅에서 목축업이었습니다.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은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양과 소 떼들을 이끌고 항상 좋은 초지와 수원을 찾아 이동했었기 때문입니다. 걷는 데는 나름대로 이골이 난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의 시험은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통과하기에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사흘 길을 걸어갔고 이제 조금만 더 가면, 2, 3백만의 풍부히 먹을 수 있는 12개의 우물과 시원한 그늘이 있는 제공하는 무성한 종려나무 70그루가 있는 오아시스 엘림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셨던 것입니다. 사흘 길은 테스트 시험입니다. 그 길만 이기고 지나가면 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12). 그러나 마라에서 큰 시험에 빠져 다 죽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기대로 끔찍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원래 내 계획은 너희가 엘림까지 가서 쉬는 것이다. 중간에 실패한 자는 전부 버리고, 나머지라도 일어서서 계속 걷도록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진노하시면서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조치하셨습니다. 한 나무를 정하시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진 순간 물이 달아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병 든 자들도 다 치료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15:26). 마치 하나님께서 의사이신 것처럼 치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원하시는 곳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다 쓰러져 버리고 말았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멸망 받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급하게 찾아오셔서 쓴 물을 단물로 만드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불순종한 자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15: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려고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물 없는 사막에서도 절대 죽지 않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죽지 않고 삽니다. 이스라엘이 죽게 된 것은 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고 애굽을 떠났으면 끝까지 신뢰해야 했는데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붙잡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물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사흘 길이 아니라, 사십 일을 걸어도 죽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반석에서도 물을 내시지 않습니까?(20:11)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한 나라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훗날에 가나안을 정복하게 국가에를 세우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일을 한다면 죽을 것입니다. 물이 없어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치 않는 것이 죽게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마라를 생수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병 든 자들을 다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10가지 재앙으로 종류별로 질병을 겪었지만,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한 이 무서운 질병 중 어느 것 하나도, 백성들을 해롭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대비한다고 해서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것이 대비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병을 치료하시는 분이요, 애굽의 모든 병도 다스릴 수 있는 의사이십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일수록 그 곤경보다는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실패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곤두박질하게 됩니다.

 

여러분, 자기 마음대로 마라로 달려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살길을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곳은 결국 마라일 뿐입니다. 독이 올라 온몸이 쑤시고 퉁퉁 붓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모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치료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래 원하셨던 그 길을 우리로 하여금 다시 걸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겪는 어려움으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 병으로도 죽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병이나 어려움을 통하여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달아 보시는 분입니다. 형편이 좋아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누가 못하겠습니까? 믿음이란 어려운 가운데서도 거짓 된 곳으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한 나무 십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신 마라의 쓴 물은 바로 자기 자신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떠나 자기들이 살길을 찾는 그 불순종 패역함 완악함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바로 마라입니다. 마라를 마신 것은 바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 패역함을 마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어요. 온몸이 쑤시고 퉁퉁 부었습니다. 하나님 떠난 인간의 모습이 그렇게 추악하고 더러운 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라를 단물이 되게 한 한 나무는 무엇입니까? 한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성경은 한 나무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라는 것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자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란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참고/벧전2:24). 그러므로 마라에 한 나무를 던지니 물이 달아졌다는 것은, 영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가리켜 쓴 잔이라고 합니다. ‘고난의 잔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 쓴잔을 마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그 더럽고 추악한 모든 죄가 녹아 있는 것이 쓴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내 더러움을 마시면, 온몸이 욱씬 욱씬 쑤시고, 열병이 나고 견딜 수 없는 그 더러움을, 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그 불순종이 그 패역함이 그 완악함이 다 녹아 있는 그 잔을 마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방울도 남기지도 않고, 다 마셔버린 것이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음이 있게 했습니다. 갈증을 해갈시켜 주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구원을 주셨습니다.

 

예언의 성취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대속의 은혜를 주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한번 따라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기 직전,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고 하셨습니다(18:31). ‘선지자들로 기록됨 모든 것즉 구약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바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체포당하기 전 최후 만찬에서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말씀하심으로, ‘기록된 대로예언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심을 재차 강조 하셨습니다(26:24).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십 수 시간 전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이 보낸 하속들과 검과 몽치로 무장한 자들에게 결박당하게 됩니다. 이때 격분한 베드로가 칼을 빼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립니다. 이것을 보시 예수님께서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26:53-54) 자신이 대적들에 잡혀 끌려가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말씀 앞에 절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하시고,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19:28,30). 십자가 죽음에서 성경을 응하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신 후, ‘다 이루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입니까? 이미 성경에 예언된 대로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고 하셨습니다(22:15).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쓸개 탄 포도주도,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대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는 말씀대로 응한 것입니다(69:21)).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음모로 체포되어 희롱과 능욕과 채찍질을 당할 것이며,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까지,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말씀을 따라 이루신 것입니다.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절대 복종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에 절대복종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의 대속을 위함이 첫째입니다. 대속의 값이 구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느니라”(5:24). 십자가는 죄에 대한 구속과 함께 인간이 가진 정욕과 탐심도 못 박은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인간의 본성 불순종과 패역함과 완악함도 죄와 함께 십자가에서 없애 버리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6:14). 십자가는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며, 또한 세상에 대하여 내가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십자가에서 죄 사함과 함께 우리의 불순종과 패역함과 완악함의 본성을 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종 목적지는 열두 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 엘림입니다. 엘림은 영적으로 천국입니다.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 나라에 가기까지 하나님 말씀을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십니다. 일으켜 주십니다. 건져 주십니다. 그 예수님 붙잡으면 우리는 승리합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비밀스럽게 자기 살길 가는 사람이 얻을 것은 마라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불신앙이 녹아 있는 추악한 곳입니다. 찾은 것 같으나 얻은 것 같으나, 온몸이 퉁퉁 붓고 쑤시고 병들 뿐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는 자는 엘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끝까지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오늘도 아무리 하늘의 높고 큰 비밀을 안 것처럼 떠벌여도, 하나님이 그를 보시기에 아직도 인간의 더러운 불순종이 본성이 남아 있다면 광야를 걷도록 하십니다. 시험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낮아지게 하십니다.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서 그것은 바로 네 안에 있는 불순종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철저히 회개하고 붙드는 자에게 엘림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따랐던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12:2).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했다라고 했습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영광입니다.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는 승리입니다(2:10-11). 하나님 말씀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어요. 십자가의 모욕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어요. 반드시 이기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길로 가는 길에서까지, 하나님 말씀을 따랐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예수님이야 말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이 말씀을 알고 쫓고 자신들의 삶으로 성경 말씀을 성취하려 하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말씀이시오. 그 말씀으로 창조된 것이 이 세상이요.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1-3,14). 그러므로 말씀을 알지 못하고서는 말씀의 절대성을 믿지 않고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유명 인사인 달라이 라마’Dalai Lama,1935-는 중국의 압제하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 수반이자 종교지도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몇 차례 방한하려 했지만, 강대국인 중국을 고려해야 하는 정부의 거부로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의 조국인 티베트에는 불교의 한 종파인 라마교’Tibetan Buddhism, lama敎가 발달해있습니다. 한 때는 티벳 전 인구의 1/3이 수도승이었다니 그 나라가 왜 패망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라마교에서는 마니퇴’manidui堆라는 것이 있습니다. 경전을 넣은 크고 작은 통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전을 찾은 사람들이 마니퇴를 한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 번 읽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니 수없이 돌아가면서 돌리고 또 돌리고를 계속 반복합니다. 얼마나 경전을 읽지 않으면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방편이겠습니까? 마니퇴를 돌린다고 경전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는 결코 참된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마니퇴를 보면서 웃고 넘겨버리기보다는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절대성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꾸 내 불순종, 패역한, 완악한 본성대로 내 스스로 살길을 찾으려 한다면, 내가 성경을 들고 교회에 한 번 올 때마다, 어쩌면 마니퇴를 한번 돌리는 것과 같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성경을 들고 읽고만 있지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을 인용하면서(15:11). “이 구절은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영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이 세상에는 항상 사랑이 부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돈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에 돈은 따라가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광고 시간에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 찬양제에 우리 교회가 대상을 받았는데, 아예 순위권에도 오르지 못한 한 교회에 대해 전했습니다. 대부분 중학생 아이들이었고, 가사를 숙지 못해 악보를 보면서도, 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고, 목사님과 사모님이 함께 찬양을 드린 교회입니다. 저는 그 아이들을 보면서, 많은 은혜와 눈물을 삼켰습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이라도 사드실 수 있도록 우리 교회가 사용하고 남은 수련회 비용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이를 받으시고 정말 감사하다며, 사실 수련회 가기 전부터 몹시 힘든 일의 연속이었고, 수련회 가서도 밤에 응급실을 두 번이나 갔다 와야 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보내주신 예물에 큰 위로와 기쁨을 얻었다고 감사의 답신을 했습니다.

 

사실 수련회 비용이 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식사와 간식을 사셨고, 지급된 교통비도 반납하셨기에 남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보낸 물질이 25만 원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여기저기 필요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입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한 분께서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을 때 고마웠다며 사용하라며 1백만 원을 보내왔습니다. 몇 배인가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6:38), 단순한 예이지만 말씀대로 했을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여러분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쓰라고 보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그대로 드렸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말씀의 사람들이 됩시다. 그때 우리의 패역하고 완악한 본성, 아직도 내 살길로 달려가려는 불신앙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응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생명의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우리의 삶이 교회와 가정 나아가,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때마다 일마다 곳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능력과 복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증거나 날마다 더하는 모든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리

 

하나님 떠난 자들의 특징 스스로 살기 위해 몸부림침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면서 너무나도 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싸우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자기들을 인도하던 구름 기둥이 뒤쪽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 무리 뒤쪽은 흑암 속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처럼 강대한 애굽 병거의 바퀴들이 빠지고 애굽 병사들이 끼리 엉키고 뒤섞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범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수효의 바로의 군대가 모두 바다에 빠져 몰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새 노래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습니다(15:1-21).

 

그런데 이와 같은 대역사를 통해 구원받고 감격에 겨워 찬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과 사흘 만에 또다시 옛날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15:22-24).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스스로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잠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믿음과 인내심은 동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나도 쉽게 의심하고 불순종하는 이 마음이 치료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것은 육체의 질병이나 사회적인 억압보다 더 심각한 질병입니다. 광야에서 사는 동안 물을 만나지 못해서 목말라 죽어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병이 바로 불순종과 패역함의 병입니다.

 

하나님의 시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찬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인 패역의 본성은 여전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시험하셨습니다(15:25). 광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물 없이 사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중간에 마라라는 함정이 하나 있었습니다(15:23). 이 물은 마실 수 없는 쓴 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믿고 계속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물이 없는 수르 광야에서 사흘 길은 무척 힘든 길이었습니다(15:22). 마치 죽음의 길과도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홍해의 대역사를 체험했던 터라 믿음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웬만큼 참으면 하나님께서 또 어떤 일을 하시겠지라는 기대하고 걸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 이틀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흘이 지났을 때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는 마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필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물입니다. 사흘 길을 갈증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 필요하겠습니까? 드디어 중간에 물을 발견했지만 먹어서는 안돼는 물입니다. 마시면 무서운 복통을 앓아야만 했습니다. 마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들의 불순종은 이미 마시지 말아야 할 물을 마셔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중간에 시험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목표는 마라가 아니었습니다. ‘엘림이라는 곳이 가야 할 최종 목적지였습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까지 거의 다 간 지점에서 무시무시한 원망불평을 하나님께 쏟아 놓고야 말았습니다. 홍해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병은 너무나도 깊었습니다.

 

치유되어야 할 패역한 본성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들의 본질상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너무도 타락했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6:44).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야만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고 무능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지 못하는 이유는 믿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자들이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라면, 어떤 분명한 가시적인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삐끼라고 이름 붙인 침팬지를 아이처럼 자기 집에 입양해서, 6년 동안 말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6년 후에 하는 말이라고는 ‘mom’, ‘papa’, ‘cup’, ‘up’ 이 네 마디뿐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침팬지의 구강 구조를 조사했는데, 언어의 기본 세가지 모음인 ’, ‘’, ‘를 발음할 수 있는 인두’咽頭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본질상의 문지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무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손으로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하고 고백을 못하는 이유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영적 인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전적 타락, 전적 무능이라고 합니다. 혹시나 여러분 가운데서 내가 믿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치료받아야 할 병은 우리의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패역한 본성, 완악한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깨닫게 하려고 이스라엘 백성을 수르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 홍해의 기적을 보고서도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쓴 물을 마셔서 심한 복통만 원망했지, 불신앙이 더 무서운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목격하고 감격의 찬양을 드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깊은 악한 본성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물 없는 고통의 사흘 길을 주셨습니다. 불신앙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시험인 것입니다.

 

편안하고 모든 것이 뜻대로 잘되는데 누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다고 말 못 합니까? 고통이 와야 우리의 믿음이 시험test됩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말랐을 때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는 전혀 소용없습니다. 모두 쓴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웅덩이로 달려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미움 때문입니다. 빨리빨리 내 말을 들어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증오심입니다. 그러나 그 물은 더욱더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생기는 어려움은 우리의 본성을 보게 하는 시험의 고난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고난에 처하면 말씀을 붙들기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마라를 찾습니다. 그래서 그 독으로 퉁퉁 부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독에 부은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무엇인가 비밀스럽게 나름대로 다 살길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내 안에 변하지 않은 짐승 같은 본성을 감추고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 우리의 본성의 치료가 시급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와서 하나님 저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강퍅한 마음을 치료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솔직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어려움의 실상은 내 안에 부패한 본성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불순종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사흘 길은 사막 길은 불가능한 시험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430년 동안 노예 노동으로 연단된 자들이었고, 애굽 고센에서 목축업으로 양과 소 떼들을 이끌고 항상 이동했었기에 충분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의 시험은 절대 쉽지 않지만 통과하기에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12개의 우물과 무성한 종려나무 70그루가 있는 엘림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12). 그러나 마라에서 큰 시험에 빠져 다 죽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기대로 끔찍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다 쓰러져 버리고 말았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망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 나무를 정하시고 물에 던져 순간 단 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되었고 병 든 자들도 다 치료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15: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죽게 된 것은 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인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라를 생수로 만드셨습니다. 병 든 자들을 다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10가지 재앙으로 종류별로 질병을 겪었지만, 이스라엘이 말씀에 순종하는 한 이 무서운 질병은 하나도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미리 대비한다고 해서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대비가 되어야 합이다. 어려움을 당할 때일수록 그 곤경보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실패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곤두박질하게 됩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살길을 만들어보았자, 그곳은 결국 마라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치료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래 원하셨던 그 길을 우리로 하여금 다시 걸어가게 하십니다. 리가 겪는 어려움으로 망하지 않습니다. 시험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달아 보시는 분입니다. 형편이 좋아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누가 못하겠습니까? 믿음이란 어려운 가운데서도 거짓 된 곳으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한 나무 십자가

 

이스라엘이 마신 마라의 쓴 물은 바로 자기 자신들입니다. 자기 살길을 찾는 불신앙과 패역함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 마라입니다. 이 물을 마시면 온몸이 쑤시고 퉁퉁 부었습니다. 하나님 떠난 인간이 추악하고 더러운 독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라를 단물이 되게 한 한 나무는 무엇입니까? 한 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자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란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참고/벧전2:24). 마라에 한 나무를 던지니 물이 달아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가리켜 쓴 잔이라고 합니다. ‘고난의 잔이라고 합니다. 인류의 더럽고 추악한 모든 죄가 녹아 있는 것이 쓴잔, 십자가입니다. 나 자신이 내 더러움을 마시면, 온몸이 욱씬 욱씬 쑤시고, 열병이 나고 견딜 수 없는 그 고통을, 하나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더러움을 예수님이 마신 잔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나음이 있게 했습니다. 구원을 주셨습니다.

 

예언의 성취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18:31), 예루살렘에 입성 후 체포 당하기 전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26:24),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박 당했을 때 격분한 베드로가 칼을 빼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지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26:53-54),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하시고,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19:28,30).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음모로 체포되어 희롱과 능욕과 채찍질을 당할 것이며,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까지,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말씀을 따라 이루신 것입니다.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22:15,69:21).

 

하나님 말씀에 절대 복종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에 절대복종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의 대속을 위함이 첫째입니다. 대속의 값이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또한 인간의 정욕과 탐심도 못 박은 것입니다(5:24).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인간의 본성 더러움 패역 반역도 죄와 함께 십자가에서 없애 버리신 것입니다.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십자가는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며, 또한 세상에 대하여 내가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십자가에서 죄 사함과 함께 우리의 패역의 본성을 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종 목적지는 열두 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 엘림입니다. 엘림은 영적으로 천국입니다.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 나라에 가기까지 하나님 말씀을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십니다. 일으켜 주십니다. 건져 주십니다. 그 예수님 붙잡으면 우리는 승리합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비밀스럽게 자기 살길 가는 사람이 얻을 것은 마라입니다. 예수님처럼 끝까지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오늘도 아무리 하늘의 높고 큰 비밀을 안 것처럼 떠벌여도, 하나님이 그를 보시기에 아직도 인간의 더러운 불순종이 본성이 남아 있다면 광야를 걷도록 하십니다. 시험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낮아지게 하십니다.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서 그것은 바로 네 안에 있는 불순종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철저히 회개하고 붙드는 자에게 엘림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어요. 십자가의 모욕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어요. 반드시 이기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2:10-11;12:2). 죽음의 길로 가는 길에서까지, 하나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알고 쫓고 삶으로 성취하려 하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말씀이시오. 그 말씀 때문에 창조된 것이 이 세상이요.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1-3,14). 그러므로 말씀의 절대성을 믿지 않고서는 참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중국의 지배하에 있는 티벳에는 불교의 한 종파인 라마교’Tibetan Buddhism, lama敎가 발달해있습니다. 한 때 전체 인구의 1/3이 수도승이었습니다. 라마교에서는 마니퇴’manidui堆라는 것이 있습니다. 경전을 넣은 크고 작은 통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전을 찾은 사람들이 마니퇴를 한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 번 읽는 것으로 여깁니다. 경전을 읽지 않자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방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경전을 읽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웃고 넘기고 말것이 아니라, 우리 모습을 비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절대성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꾸 내 패역의 본성대로 스스로 살길을 찾으려 한다면, 내가 성경을 들고 교회에 한 번 올 때마다, 어쩌면 마니퇴를 한번 돌리는 것과 같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을 인용하면서(15:11), 이 구절을 영적으로 재해석 세상에는 항상 사랑이 부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돈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에 돈은 따라가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청소년 여름 수련회 찬양제에서, 대부분 중학생들로 가사를 숙지 못해 악보를 보면서도, 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고, 목사님과 사모님이 함께 찬양을 드린 교회에 적은 액수이지만 맛있는 것이라도 사드실 수 있도록 남은 수련회 비용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수련회 전에도 어려움이 있었고 기간에도 응급실을 두 번이나 갔다 와야 하는 했는데 큰 위로와 기쁨을 얻었다고 감사의 답신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25만 원을 보냈습니다. 사실 수련회 비용이 남은 것은 아니고, 선생님들이 식사와 간식을 사셨고, 지급된 교통비도 반납하셨습니다. 기에 남았던 것입니다. 25만 원은 우리에겐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필요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어떤 분이 사용하라며 1백만 원을 보내왔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6:38), 단순한 예이지만 말씀대로 행했을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눕니다, 개인적으로 쓰라고 보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그대로 드렸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말씀의 사람들이 됩시다. 그때 우리의 패역하고 완악한 본성 아직도 내 살길로 달려가려는 불순종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응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생명의 역사가 있게 도리 것입니다. 그와 같은 우리의 삶만이 교회와 가정 나아가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때마다 일마다 곳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능력과 복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증거나 날마다 더하는 모든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홍해의 대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은 불과 사흘이 지나 물이 없다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불순종, 패역함, 완악함을 나 자신에게서 바로 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불신앙의 본성을 아시고 중간에 마라쓴 물로 시험하셨습니다. 마시면 안됩니다.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빨리 갈증을 해결해 달라고 알면서도 마셨습니다. 이러한 불신앙으로 시험에 넘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은 본성을 보게 하는 시험의 고난입니다. 그때 말씀을 붙들기보다 자기 나름대로 살길을 찾아보았자 마라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다 독에 퉁퉁 부은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말씀 약속을 붙잡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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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무가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었습니다. 한 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가 담아 있는 쓴잔을 한 방울도 남기지도 않고 마셨습니다.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나음을 주시며, 갈증을 해갈시켜 주시고, 치료해 주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죽음까지도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님처럼, 하나님 말씀에 절대 복종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응하신 예수님 같은 우리의 삶이 교회와 가정 나아가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때마다 일마다 곳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능력과 복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