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사랑에 흠뻑 젖은 사람"(벧전 4:8) 이재현목사(23.07.30)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3. 8. 1. 16:47

사랑에 흠뻑 젖은 사람

하나님말씀 : 벧전 4:8 2023. 7.30. 主日禮拜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맡기시는 하나님. 호세아 선지자는 음란한 고멜을 아내를 맞이해야 했고, 누구 자녀인지도 모르는 사생아를 키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1:2). 어떤 경우 원하지 않은 사람이나 일을 맡기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면 근심이 될 것이 될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맞는 근심은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고후7:10).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진 일이 근심스러운 것이라도. 정말 맡고 싶지 않은 사람 또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맡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죄인을 찾아가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을 경고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호세아에게 육적으로 간음한 여인을 아내로 취할 것을 명했습니다. 호세아는 수많은 비웃음과 멸시를 감내 해며 감당해야 했습니다. 호세아 밖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돌아보면 고멜은 어디론가 떠나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되었습니다(3:1). 집을 나기를 몇 번, 돌아온 고멜은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음란한 자식을 배어 돌아오게 됩니다(1:2,2:4). 이러한 행위를 반복 할 때마다 호세아는 고멜 돌보기에 정성을 다합니다. 계속되는 음행으로 나중에는 돈에 팔려 다니는 노예로 전락한 고멜을 호세아는 당시 노예 한 사람 값에 해당하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포주에게 주고 사 왔습니다(3:2.참고/21:32;27:4). 그런데도 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회복할 것을 권면하며 최상의 인격적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3:3). 율법에 정한 바에 따라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었지만, 율법을 넘어서 아내를 맞이한 것입니다(참고/24:1-4;3:1). ‘죄인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입니다. 고멜을 통해 이스라엘을 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을 찾아가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과 내가 찾는 사람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죄인이라도 찾아갔다면 나도 찾아가야 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찾아가라고 한 고멜을 찾아가 대가를 주면서까지 찾아 왔습니다.

 

배반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은 통념을 넘어서고, 법과 규례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크기로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법보다 강합니다. 노예로까지 전락한 고멜을 사온 호세아를 통하여 사랑은 배반한 자까지 찾아 나선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헌신하여 잃은 자들을 얻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하였습니다. ‘배반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라시는 하나님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배반자까지 사랑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 부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성도의 과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깨닫게 될 만큼 응답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풀어주신 사랑을 깨닫지 아니하면, 그 사랑을 다 알 수도 없고, 그 사랑에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참고/1:2).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해야 할 사람이 감사 대신 불평하게 됩니다. 응답이 요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허락하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 본질적인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고 나면, 한순간 그가 베풀어주신 일상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감사한다고 하여도, 곧 다시 원망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은혜와 사랑 이것을 자신이 받은 사랑으로 깨닫게 될 때, 그 분량만큼 응답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자. 자녀들은 끝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만 자기가 자식을 낳아보기까지는 그 사랑을 다 깨닫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만이 받은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오신 자체가 노력입니다. 목사의 설교가 지금 눈으로 보기에는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듣고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비정상입니다. 그 비정상이라는 말은 신앙의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들은 허공에 대고 떠든 것 같이 실성해 보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매어 달려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자(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 배반자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자’, ‘배반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참고/요일4:20).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부된 아내를 데려다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배반자인 우리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반자에게 입을 열어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형제를 사랑합니까? 우리의 형제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은 예전에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달아난 종 오네시모가 회심을 하고, 나의 동역자가 되었으니,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맞이할 때,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하였습니다(1;16). 이웃을 사랑합니까?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이웃이 원수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5:44-47). 그 원수에 배반자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배반자에까지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는 성도님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90SCE 청소년 여름 수련회와 어린이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를 은례 가운데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기도와 후원으로 섬겨주신 선생님과 성도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후로 아이들이 믿음으로 자라고 헌신자로 세워지며 사명자로 결단하기를 위해 많은 기도를 바랍니다. 서로 인사힙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사랑한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언제 들어도 우리 가슴을 촉촉하게 흡족하게 넘쳐나게 해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이 사랑 안에 거하고 계십니까? 오늘 주일 예배에 이 사랑에 관하여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들으시는 여러분도 전하는 저에게도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그 사랑 안에 흠뻑 젖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이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일까 부터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기원이며 본질이며 자체임을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여러 속성’The Divine Attributes들이 있습니다. 자존성, 영원성, 불멸성, 무한성, 전지, 전능, 무소, 부재 등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 앞에 앞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 그렇다고 먼저고 다음이고 순서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는 동시에 있지만, 모든 속성 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 제가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모두에게 임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 우리가 참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없음을 또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첫 번째는 누구일까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사랑하는 첫 번째가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7.참고/1:11;3:22).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입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9:7.참고/벧후1:17).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변화하셨을 때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3:35.참고/20:13).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입니다. 즉 하나님의 첫 번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15:9). 순서를 볼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그리고 우리에게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과 예수님은 상호 응답하는 상호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14:31).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을 항상 행하였던 예수님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나사로의 사건을 통하여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사랑을 나누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11:41-42). 그리고 예수님이 모든 사역을 마치고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17:4-5).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응답되는 사랑이었고, 상호 사랑의 관계 안에 충만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 실현인 십자가

 

그러면 그렇게 사랑을 한 예수님을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어 왜 우리에게 보내셨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서 더욱 극대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첫 번째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알고 살아가세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표현이고 외현이고 실현입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있었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만 하는 사랑도 사랑이 아닙니다. 머리로만 알 수 있는 사랑도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표출이고 행위이고 실천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으로 인간의 몸을 입은 성육신, 십자가에 죽으심이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며 인류 최대의 사건인 것입니다.

 

대변인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분의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을 전하러 왔다면, 예수님은 대변자는 되지만,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상호 사랑에 있었던 곧 하나님이기에 우리의 구원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사랑이 곧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잉태되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사랑의 계획을 세우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구원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적용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막연하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각색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해방시키는 활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1:39-40.참고/4:23-25;6:17-19).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심정을 대변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과 악한 귀신과 질병과 고통에서 허덕이는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소리 불쌍히 여기심이것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알지 못합니다. 왜 세상에 죽음과 악한 귀신과 질병과 고통이 찾아 왔습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악한 귀신과 질병과 고통에 있는 자들에게 행한 이적과 기사를 보고 이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느니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참고/2:12,3:11;5:25,19:3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2:44). 예수님이 곧 하나님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신 또 다른 이유는 의인이라고 자만하고 착각하고 위선을 떠는 자들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회개하고 통회하며 자복하는 자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려고 하셨다면, 하나님 기준에 맞는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구원하셨다는 것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전혀 가까이할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사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유로 교훈하신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욕심이 많지 않고 불의하거나 간음하지도 않고, 또 세리와 같이 남들 돈이나 빼앗는 사람도 아닙니다. 일주일이면 두 번씩 금식하고, 내가 얻은 것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와 반대로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머리를 하늘로 향하여 들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18:9-13). 이 비유 후 예수님은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18:14). 이렇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원하셨지,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는 자들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기에 세리와 함께 식사하시기도 꺼리지 않으셨고, 이에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며 되받아 말씀하셨는데요(2:17). 이것은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용납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2:17). 그렇지 않다면 이 자리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순종에 대하여 슬퍼하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19:41).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듣지 않아 멸망 당할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19:42). 평화의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 그러므로 멸망을 면할 수 있는 길인데, 이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한탄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계속하여 슬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난 치유 활동 죄인을 용납하시고,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슬픔은 바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예수를 죄인으로 만드시면서까지,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은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받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고 계신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무방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걸어야 할 길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그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행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5:8).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라는 것을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인식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사랑 할 수 없는 자들도 사랑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희들이 아주 죄인으로 취급하는 세리와 이방인들도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5:46-48)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힘이 이 세상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원인 중의 하나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랑의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정말 미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부수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로 미운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 밉다고 나와 함께 살던 가족과 내 정성을 다해 꾸민 가정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 미워하니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탁 막히고 심장은 요동합니다. 이게 무슨 내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가정입니까? 그러나 그 미워하는 사람 하나 때문에 그 많은 것을 잃는다는 것은 더 더욱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누구를요.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도 억울할 때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데 그것을 예사로 여기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인일 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사랑이 없다. 사랑이 고갈되었다라는 것은 일반적인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자기 좋아하는 것 좋아하고, 조금 심한 표현으로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것을 볼 때 세상에 사랑이 없나요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전자의 사랑 즉 아무나 할 수 있는 사랑은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그저 둘만의 그저 친구끼리, 조금 더 나아가야 그저 가족 혹은 아는 사람 정도입니다. 이것이 무슨 사회에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도 잘 챙기는 너무 잘 챙기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후자의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을 실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로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며, 귀감이 되고, 전파가 되고 이 사회에 ''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성도가 앞장서야 하는데 먼저 우리 성도 안에 이 사랑이 충만히 이루어져야 함을 명심합니다.

 

법이 필요치 않은 사랑

 

사랑에는 법이 필요 없습니다. 즉 사랑은 재판의 결과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에 무슨 단서를 달고, 이때는 하고 저 때는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재판대에 판결로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그런데 내가 재판대를 놓고는 이 사람 구원받을 사람 저 사람 구원받지 못할 사람, 이 사람 축복 사람 저 사람 저주받을 사람, 이 사람 사랑할 사람 저 사람 미워할 사람하고 있다면 무서운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시비하는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개의치 않고 치유하셨습니다(12:9-13;3:1-6;6:6-11).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어겼다면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12:14). 그러나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12:15).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이였습니다. 한 영혼의 생명을 구원하시며, 사랑을 행하였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3:10). 사랑은 율법을 이긴 것이고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여기는 많은 분들이 다 부모가 되셨는데 아이를 키울 때 잠을 재워 놓고 다른 일을 하다가 아이가 울면 어떻게 합니까? “! 이 녀석아 지금은 빨래하는 중이야!, 아이고 지금 손님이 오신다고 해서 음식을 준비 중이야!” 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 어떤 것보다 어머니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에는 어떤 법이나, 단서나 우선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신데렐라나 콩쥐의 새엄마와 같이 사랑이 없는 계모일 것입니다. 내가 내 배 아파 낳고, 밤잠 못 자고 젖먹이고, 기저귀 갈고, 즉 진짜 사랑을 모르는 엄마일 것입니다. 여자분들이 아이를 나면 얼마나 몸을 버립니까? 아이를 가지면 그 곱디곱던 얼굴에 기미가 끼지요, 배가 불러오면서 이리저리 고랑 같은 흉터 아닌 흉터가 나지요. 아이 낳고 기르면서 몸 여기저기는 힘이 없어지죠.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아이를 더 사랑하는 것이지죠. 그러니 그 어머니 앞에 아이 사랑 보다 앞서는 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 어머니의 등에서 입을 헤 벌리고 마음을 놓고 자면서 모든 것을 맡기고 자란 것입니다. 사랑 없는 계모는 그냥 친 엄마가 하는 것 보고,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의무에만 충실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 계모에게 아이는 자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율법은 몽학선생입니다(3:24). 몽학선생이란 아침에 아이를 학교까지 바래다주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마음의 특징 중 한가지를 말한다면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메말라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고 이 못되 먹은 세상하고 욕을 하는데 세상이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이지요. 나도 그 안에서 똑같이 살면서 강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 퍅을 흐물흐물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천하장사도 못 버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다 녹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이성 사랑도 아니고, 친구 간의 사랑도 아니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가장 고상한 사랑이며, 사랑하는 그 대상에게서 아주 고귀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성도의 사랑이란? 사람들에게서 가장 고귀한 무엇을 발견하게 되어야 하지요. 그것은 생명입니다. 그 사람을 강퍅하게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안의 생명을 보는 것이며, 그 생명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생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한 영혼을 대하는 사랑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 세상의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이니 당연히 강 퍅하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안에 무엇이 없기 때문이에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강퍅함을 보지 말고, 그 안에 생명, 예수 십자가,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 영생을 불어넣을 대상자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에서 사람들을 다 평가해 버리고, 심지어는 구원받을 사람 그렇지 못할 사람으로 나누어 버릴 수 있습니다.

 

전도를 한 시간에도 할 수 있지만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타인 보다 가족인 경우가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고 난 후 전도되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서지 못하면 구원받은 성도라도 온전히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로 자라나지 못하면 마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 또한 알아야 합니다. 그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사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이 분리하는 종교 카테고리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교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어떤 종교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신앙인이 되어 간는 것입니다. 그렇기 이 시간에도 그 사랑을 배우는 것이요, 행하고자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완악과 강퍅함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인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버리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하여 볼 때 사랑은 결국 자신을 내어버리는 것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요. 그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되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질 수 있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란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내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친절)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사랑의 송가인 이 말씀은 곧 자신을 내어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항상 촉촉하고 흡족하며 넘치는 사랑 안에 거하고, 베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도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5:11). 요약하면 네 어려운 형제와 이웃을 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는다 즉 이 땅에서는 모두가 부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그 형제들에게 돈, 금전만을 도우라는 이야기일까요? 이 말씀을 영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이 세상에는 항상 사랑이 부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지요.그 사랑에 돈은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간증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요. 스무 살 무렵 살아온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경북 경주에 살 때인데 경주시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경주군이 있습니다. 지금은 경주시로 편입이 되었습니다. 당시 경주군의 작은 신당리라는 마을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천국에 가 계신 저의 어머니가 아프셨을 때, 무녀독남이고 해서 대신 아버님 밥을 해드리고 회사에 가실 수 있게 하고, 어머니를 간호하는데요. 이웃 집사님의 안내로 주일이면 경주 시내에 있는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시내버스로 한 열 정거장 떨어진 곳이었는데요. 갈 때는 교회에서 봉고차가 와서 타고 가면 되었는데 올 때는 운행을 안 해요. 그때 우리 집이 몹시 나쁜 형편은 아니지만 좀 여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어떻게 집에 갈 시내버스 비도 없는 겁니다. 살다 보니까 저와 어머니 두 사람 차비 천 원도 없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도 있더라고요. 주변머리가 그렇게 없느냐 그거 꾸면 된다고 할지 몰라도, 완전히 객지인데 그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나의 입장에 보았을 때는 이해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편견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걸어왔습니다. 저야 젊기에 괜찮지만, 어머니가 걱정되기는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걸었죠.

 

그 후에 왔다 갔다 하기도 그렇고 해서, 아예 교회에서 자기로 하고, 교회 골방에서 기도하다가 어머니하고 잤는데, 다음날 새벽기도회가 끝난 뒤였어요. 아주 노 목사님이셨는데, “이재현 선생부르시면서 제 손에 뭔가를 집어 주셔요. 보니까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어떻게 아셨는지 교통비 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 후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신학교에 입학해서 찾아뵈어야겠다고 갔는데 부산으로 부임을 하셨더라고요. 얼마나 섭섭한지요. 30년 전 목사님이 저에게 쥐여준 그 적은 금액은 그 돈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것이지요.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15:7-8).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목사님이 생각이 났는데 이 말씀은 결국 금전이 돈이기 전에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이라는 복음송도 있듯이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자신을 내어버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다시 말하면 이 땅에는 항상 사랑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완성하러 예수 님이 오셨고, 그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나를 이 세상에 내던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내가 한 것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요. ‘허다한 죄를 덮는다’. 내가 그에게 내던졌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원수 같은 사람이 예수로 보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내 앞에 나타난 저 원수 같은 또는 불이익을 주는 어떤 경우는 비루하게 찾아온 사람이 예수일지 모른다고요. ‘허다한 죄를 덮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나를 속일 줄 모르나 나는 그를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그의 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설교의 제목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아주 흠뻑 젖어야 하겠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의 가치관이 변하고, 그것이 의식화되어, 내 생활화가 되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원망과 욕심과 시험 거리가 없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올해 장마가 유난히 길지 않았습니까? 매일 같이 억수로 쏟아붓는 장대비에 흠뻑 젖고 나면, 하늘은 맑게 드높아지고, 공해로 찌든 대기를 씻어 내고, 호흡도 가쁜 하게 되고, 대지는 더욱 생동 있는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랑 안에 흠뻑 젖어야 우리가 새로운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는 것입니다. 저는 올해 슬로건을 반복하고 반복하여 말씀드립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13:35).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4:7). 그리고 본문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벧후4:8). 자신을 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안에서부터 원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흠뻑 젖고, 그 사랑으로 이 험악한 세상을 기쁨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승리함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정리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God is Love’. 하나님이 사랑의 기원이고 본질이며 자체입니다. 이 사랑을 알 때 사람은 참다운 인생을 살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의 첫 번째는 누구일까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7.참고/1:11;3:22).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입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은 여러 번 예수님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직접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9:7;20:13;3:35.벧후1: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15:9). 순서를 볼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그리고 우리에게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관계였는가요?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입니다(1:27;5:17,10:30).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14:31).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을 항상 행하였던 예수님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나사로의 사건을 통하여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감사하옵나니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 내가 알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11:41-42).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17:4-5).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응답되는 사랑이었고, 상호 사랑의 관계 안에 충만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 실현인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서 더욱 극대화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요일4:10).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표현이고 외현이고 실현입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있었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표출이고 행위이고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으로 인간의 몸을 입은 성육신, 십자가에 죽으심이,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며 인류 최대의 사건인 것입니다(1:14;2:8).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사랑이 곧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막연하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 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고치셨다고 하셨습니다(1:41.참고/4:23-25;1:39-40;6:17-19).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심정을 대변하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 세상에 악한 귀신과 질병과 고통이 찾아 왔습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보고 이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느니라고 한 것입니다(참고/2:12,3:11;5:25,19:3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2:44). 예수님이 곧 하나님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신 또 다른 이유는 의인이라고 자만하고 착각하고 위선을 떠는 자들이 아니라,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통회하며 자복하는 자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은 서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욕심도 많이 않다는 등 자신의 선을 열거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머리를 하늘로 향하여 들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18:9-13). 예수님은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18:14). 이렇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원하셨지,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는 자들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납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용납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참고.2:17). 그렇지 않다면 이 자리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예수를 죄인으로 만드시면서까지,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행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를 죽게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사랑 할 수 없는 자들도 사랑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희들이 아주 죄인으로 취급하는 세리와 이방인들도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5:46-48)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힘이 이 세상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원인 중의 하나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랑의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구분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보다 못한 집단으로 비난을 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정말 미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부수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로 미운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 밉다고 나와 함께 살던 가족과 내 정성을 다해 꾸민 가정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 미워하니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탁 막히고 심장은 요동합니다. 이게 무슨 내 아름다운 가족 있는 가정입니까? 그러나 그 미워하는 사람 하나 때문에 그 많은 것을 잃는다는 것은 더 더욱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억울할 때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데 그것을 예사로 여기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인일 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사랑이 없다. 사랑이 고갈되었다라는 것은 일반적인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원수라도 사랑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자기 좋아하는 것 좋아하고, 조금 심한 표현으로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것을 볼 때 세상에 사랑이 없나요.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전자의 사랑 즉 아무나 할 수 있는 사랑은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그저 둘만의 그저 친구끼리, 조금 더 나아가야 그저 가족 혹은 친척 정도입니다. 이것이 무슨 사회에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도 잘 챙기는 너무 잘 챙기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후자의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을 실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의 가정으로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며, 귀감이 되고 이 사회에 ''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성도가 앞장서야 하는데 먼저 우리 성도 안에 이 사랑이 충만히 이루어져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법이 필요치 않은 사랑

 

사랑에는 법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은 재판의 결과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이때는 하고 저 때는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재판대에 판결로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재판대를 놓고 이 사람 사랑할 사람 저 사람 미워할 사람하고 있다면 무서운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어긴다면 죽이려 드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개의지 않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참고/12:9-12;3:1-6;6:6-11). 한 영혼의 생명을 구원하시며, 사랑을 행하였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3:10). 사랑은 율법을 어긴 것이고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 없는 계모는 그냥 친 엄마가 하는 것 보고,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의무에만 충실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 계모에게 아이는 자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3:24). 율법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마음의 특징 중 한가지를 말한다면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메말라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다 녹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이성 사랑도 아니고, 친구 간의 사랑도 아니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가장 고상한 사랑이며, 사랑하는 그 대상에게서 아주 고귀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성도의 사랑이란? 사람들에게서 가장 고귀한 무엇을 발견하게 되어야 하지요. 그것은 생명입니다. 그 사람을 강퍅하게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안의 생명을 보는 것이며, 그 생명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생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한 영혼을 대하는 사랑입니다.

 

전도를 한 시간에도 할 수 있지만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타인 보다 가족인 경우가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고 난 후 전도되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서지 못하면 구원받은 성도라도 온전히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로 자라나지 못하면 마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 또한 알아야 합니다. 그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사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이 분리하는 종교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신앙인이 되어 간는 것입니다. 그렇기 이 시간에도 그 사랑을 배우는 것이요, 행하고자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완악과 강퍅함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버리는 것

 

모든 것을 통하여 볼 때 사랑은 결국 자신을 내어버리는 것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요. 그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되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질 수 있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란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내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친절)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사랑의 송가인 이 말씀은 곧 자신을 내어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항상 흡족한 사랑 안에 거하고, 베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도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5:11). 요약하면 네 어려운 형제와 이웃을 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는다. 즉 이 땅에서는 모두가 부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영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이 세상에는 항상 사랑이 부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그 사랑에 돈은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스무살 무렵 경북 경주에 살 때인데 경주시에서 조금 떨어진 신당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천국에 가 계신 저의 어머니가 아프셨을 때, 무녀독남이고 해서 대신 아버님 밥을 해드리고 회사에 가실 수 있게 하고, 어머니를 간호하는데요. 이웃 집사님의 안내로 주일이면 경주 시내에 있는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시내버스로 한 열 정거장 떨어진 곳이었는데요. 갈 때는 교회에서 봉고차가 와서 타고 가면 되었는데 올 때는 운행을 안 해요. 그때 우리 집이 몹시 나쁜 형편은 아니지만 좀 여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어떻게 집에 갈 시내버스 비도 없는 겁니다. 살다 보니까 저와 어머니 두 사람 차비 천 원도 없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도 있더라고요. 완전히 객지이기 꾸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걸어왔습니다. 저야 젊기에 괜찮지만, 어머니가 걱정되기는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걸었죠. 그 후에 왔다 갔다 하기도 그렇고 해서, 아예 교회에서 자기로 하고, 교회 골방에서 기도하다가 어머니하고 잤는데, 다음날 새벽기도회가 끝난 뒤였어요. 아주 노 목사님이셨는데, “이재현 선생부르시면서 제 손에 뭔가를 집어 주셔요. 보니까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어떻게 아셨는지 교통비 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 후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신학교에 입학해서 찾아뵈어야겠다고 갔는데 부산으로 부임을 하셨더라고요. 얼마나 섭섭한지요. 30년 전 목사님이 저에게 쥐여준 그 적은 금액은 그 돈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것이지요.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15:7-8).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목사님이 생각이 났는데 이 말씀은 결국 금전이 돈이기 전에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이라는 복음송도 있듯이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자신을 내어버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다시 말하면 이 땅에는 항상 사랑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완성하러 예수 님이 오셨고, 그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나를 이 세상에 내던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내가 한 것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요. ‘허다한 죄를 덮는다’. 내가 그에게 내던졌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원수 같은 사람도 예수로 보이는 것입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나를 속일 줄 모르나 나는 그를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그의 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아주 흠뻑 젖어야 하겠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의 가치관이 변하고, 그것이 의식화되어, 내 생활에 삶이 되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원망과 욕심과 시험 거리가 없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저는 올해 슬로건을 반복하고 반복하여 말씀드립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13:35).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4:7). 자신을 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안에서부터 원하시는 말씀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흠뻑 젖고, 그 사랑으로 이 험악한 세상을 기쁨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승리함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의 기원이고 본질이며 자체이십니다. 그 사랑 첫 번째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상호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 실현인 십자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화목제물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표현이고 외현이고 실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하면 구원하신 것입니다. 자기의 선을 떠벌이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엎드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방과 세리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성을 다해도 예사로 여기는 사람들로 속상해하지 말고 우리가 죄인 때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법이 필요치 않은 사랑. 예수님은 안식일 어긴다며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개의치 않고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우리가 영혼을 볼 때 법이나 단서를 달지 않고, 그 생명을 바라보며, 주님을 영접하여 영생 얻어야 할 사랑으로 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 버리는 것.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는다. 이를 영적으로 재해석할 때 이 세상에는 항상 사랑이 부족합니다. 돈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돈이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버리고 버려도 남을 수 있는 우리를 사랑하사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사랑에 흠뻑 젖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