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시편 42:1-11) 이재현목사(23.08.13)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3. 8. 15. 11:52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말씀 : 시편 42:1~11 2023.08.13. 主日禮拜

 

“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1-11)

 

 

이스라엘은 홍해의 대역사를 통해 구원받고 감격에 겨워 찬양했지만, 불과 사흘 만에 또다시 옛날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15:22-2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본성은 여전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시험하셨습니다(15:25). 광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물 없이 사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중간에 마라라는 함정이 하나 있었습니다(15:23). 이 물은 마실 수 없는 쓴 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믿고 계속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간에 시험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목표는 엘림입니다. 마라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다 간 지점에서 무시무시한 원망불평을 하나님께 쏟아 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목격하고 감격의 찬양을 드렸다고, 모든 것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악한 본성인 불순종과 패역함과 완악함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물 없는 고통의 사흘 길을 주셨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생기는 어려움은 본성을 보게 하는 시험의 고난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에 처하면 말씀을 붙들기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살길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마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무엇인가 비밀스럽게 나름대로 다 살길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내 안에 변하지 않은 본성을 감추고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까지 이스라엘이 가지 못하고, 중간에 다 쓰러져 버리고 말았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 나무를 정하시고 물에 던져 순간 단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되었고, 병 든 자들도 다 치료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15: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죽게 된 것은 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인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미리 대비한다고 해서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대비가 되어야 합이다. 어려움을 당할 때일수록 그 곤경보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어려운 가운데서도 거짓 된 곳으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마라를 단물이 되게 한 한 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합니다(참고/3:13;벧전2:24). 마라에 한 나무를 던지니 물이 달아졌다는 것은 영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가리켜 쓴 잔이라고 합니다. ‘고난의 잔이라고 합니다. 인류의 더럽고 추악한 모든 죄가 녹아 있는 것이 쓴잔, 십자가입니다. 내 더러움을 내가 마시면, 온몸이 욱씬 욱씬 쑤시고, 열병이 나고 견딜 수 없는 그 고통을 하나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더러움을 예수님이 마신 잔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나음을 주셨습니다. 구원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음모로 체포되어 희롱과 능욕과 채찍질을 당할 것이며,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까지,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말씀을 따라 이루신 것입니다.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참고/22:15,69:21;26:24,53-54;18:31;19:28,30).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에 절대복종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의 대속을 위함이 첫째입니다. 대속의 값이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또한 인간의 정욕과 탐심도 못 박은 것입니다(5:24).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인간의 본성 더러움 반역도 죄와 함께 십자가에서 없애 버리신 것입니다(참고/6:14).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십자가에서 죄 사함과 함께 우리 불신앙의 본성을 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종 목적지는 열두 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 엘림입니다. 엘림은 영적으로 천국입니다.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 나라에 가기까지 하나님 말씀을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십니다. 일으켜 주십니다. 건져 주십니다. 그 예수님 붙잡으면 우리는 승리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곳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능력과 복과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인생

 

인생을 산다는 것을 망망대해茫茫大海를 항해하는 한 척의 배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항해 중 순풍을 만나 힘들이지 않고 편히 갈 때도 있지만, 거친 파도와 사나운 비바람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목사로서 그러한 중에 있는 성도를 바라볼 때,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애간장이 녹는듯하고, 너무나 안타까워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과 같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로 아뢰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도 너무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와 같이 어려운 형편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삶의 절망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모르는 불안을 안고 잠을 설칠 때도 자주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고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이렇게 마음에 절망과 불안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오늘 이 시간 전하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귀를 열어 주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의 심정을 보면 저는 물론 성도 여러분의 마음을 참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이유

 

시편 42편과 43편은 한 편으로 이루어진 말씀인데, 편리상 두 편으로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저자를 고라 자손이라고 보지만 일부 설교자나 성경학자들은 다윗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저자가 몹시 낙망하고 있으며 마음이 상해 있고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5, 11, 그리고 같은 저자의 기록인 435절을 보면 연속해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4절 끝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마음에 쌓인 고통이 너무 커서 주체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가 이와 같은 낙망을 체험하고 있을까요? 본문에는 구체적인 설명이 나와 있지 않지만 대충 짐작이 갈 만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우선 저자는 자기 눈앞에 있는 암담한 현실을 놓고 낙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간 상태이거나 혹은 억류를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었던 예루살렘에서의 행복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외로이 살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볼 때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며 빈정거리고 야유합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의 원수, 나의 대적, 믿음의 원수, 믿음의 대적이라는 저주가 자기 입에서 서슴없이 튀어나올 정도로 괴롭힘을 당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자기가 이런 환경을 벗어나서 빨리 고국으로 돌아갈 소망이 별로 안 보입니다. 이렇게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답답하겠습니까? 이런 상황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꾸 절망이 돼 불안해지지 않겠습니까?

 

다음으로 그가 절망하는 이유는 바로 현실 앞에서 무능한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학자가 분석하기를 42, 43편에서 이 저자가 ’, ‘나를하는 등의 1인칭 대명사를 무려 51번이나 쓰고 있는 반면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겨우 21번밖에 쓰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라는 말을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에게 갇혀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만 쳐다보면서 자기에게 매여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매일수록, 자기 눈이 가려질수록 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능한 자신을 볼 때마다 낙망하지 아니할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그가 절망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42:4). 과거와 현재를 자꾸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소에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은혜를 받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비방을 듣고 있고,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비참한 신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한심한 것입니다. 예전보다도 지금이 낫고 지금보다도 내일이 더 좋아질 거라는 소망이 있어야 살맛이 나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까? 한때는 화려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초라한 신세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마음에 낙망이 생기고 절망이 오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의 낙망

 

여러분 이 저자가 마치 국화빵처럼 우리를 꼭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사람이 절망하고 낙망하는 것은 그 뿌리가 다 똑같습니다. 지금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를 보세요. 현실이 참 암담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시대 속에서 무능한 자아, 그리고 예전과 비교해서 현재의 초라한 모습, 이런 것들이 우리가 기를 못 펴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도 목사지만 낙망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불안에 떨 때도 있습니다. 저는 지난 목회를 하면서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성도들, 중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 가정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성도들 도대체 무슨 맛으로 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걸어가는 이런 성도들을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지고 낙망 되고 불안에 떨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아마도 평신도보다는 교회 지도자이기 때문에 눈을 좀 더 크게 떠서 오늘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세상이 이런 꼴로 계속 더러워지고, 거짓이 판을 치고, 우상과 이교와 무속이 깊숙이 자리 잡고, 사람들이 자기만 알게 된다면, 10, 20년 후에는 도대체 어떤 세상이 될까? 청소년들이 이 모양으로 자라간다면, 나중에 어떤 모습들을 하고 있을까? 가정이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깨져 간다면, 앞으로 이 사회에서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위정자들이 저렇게 해서 이 나라가 바르게 번영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떠오를 때면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옵니다. 모두가 자기만 알고 쾌락을 즐기기에 정신이 없는 세상이니 도대체 여기에 무슨 희망이 있고, 도덕이 있고, 정의가 있겠습니까? 서현역 난동 사건과 같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으로 점점 변해 가는 것을 볼 때, 목사라도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세상을 구원하고 치료해야 할 사명을 받은 교회가 이 세상을 감당하지도 못할뿐더러, 거꾸로 세상을 점점 더 닮아가고, 민주, 평등, 인권 존중이라는 이성적 사고로 동성애 등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지지하고, 나아가 일치와 화해와 평화라는 명분 아래 배교에 휩싸이는 것을 볼 때마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불안에 떨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편의점보다 더 많은 교회라는 뉴스를 가끔 보게 됩니다. 전국에 약 55천여 교회가 있고 약 4만여 개의 편의점이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많다고 나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것이 많으면 더 좋은 것이죠. 그러나 편의점보다 더 많은 교회라고 말하는 이들은 본문에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빈정거리는 것과 같이 교회를 불필요한 곳으로 보기에 그런 말을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지나가다가 상가의 1층 전체 혹은 절반을 임대해 있는 교회를 보면 가슴이 저며옵니다. 그 작은 공간에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 목회자는 적은 수의 성도님이지만, 어쩌면 그분들의 믿음을 위해 자신의 젊음과 시간과 물질을 다 드리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볼 때 아무런 순기능이 없는 것과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 몇 사람의 영혼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는 목사님과 사모님의 삶을 교회 숫자로 비교해서 의미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내에 영업 중인 담배 가게 총 151300곳입니다. 국세청에 등록된 10년 전 유흥업소 24295개입니다. 교회 숫자보다 작습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가 GDP27%로 추정합니다. 그중 40~50% 유흥업에 발생합니다. 2022년 우리나라의 GDP21506천억 원입니다. 지하경제 규모를 20%로만 잡아도 연간 450조입니다. 그렇다면 유흥업에 사용되는 돈이 최대 215조가 된다는 것입니다. 감추고 싶은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숫자가 많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위기의식을 갖습니다. 교회가 힘을 잃어 가면, 앞으로 30년 후에는 한국교회는 설 자리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낙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런저런 생각에 얼굴이 어두워지고 얼굴이 굳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낙망할 때

 

우리는 모두 고민합니다. 목사가 낙망하고 불안해한다고 이상하게 보입니까? 낙망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요? 진정한 믿음에는 낙망이란 없는 것입니까? 불안은 전혀 발붙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치고 낙망을 경험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 야곱, 다윗, 엘리야, 베드로 그리고 바울도 내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하였습니다(고전2:3). 이와 같이 믿음 선조들 가운데 불안으로 떨지 아니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말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떱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위대한 사람들도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26:38) 사람은 누구나 다 낙망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1 Dø den, 1849을 쓴 키에르케골’Soren Aabye Kierkegaard,1813-1855이 말한 것처럼 불안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브레이스’John K. Garbraith,1908-2006“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에서 이상idea과 결과의 현실이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낙망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낙망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일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도 낙망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낙망하면 그 속에 그냥 주저앉아 버리지만, 그리스도인은 낙망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낙망 때문에 하나님을 더 집요하게 부른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할수록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가 존 뉴튼’John Newton,1725-1807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음의 사전에는 낙망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 눈에는 낙망할 만한 일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면 그것이 낙망일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이며 목사인 에머슨’Ralph W. Emerson,1803-1882도 좋은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 낙망이 됩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여야 합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낙망이 되고 불안하기에 5절과 11절에서 이런 말을 반복하지 않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낙망이 되는가?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찾아라. 불안한가?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찾아라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라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시편 저자는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42:1). 팔레스타인은 건기가 되면 비가 오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장마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유대광야에 저도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바라본 광경은 파란색 잡초 하나 없는 거칠고 메마른 땅이 장장 100km에 걸쳐 끝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광야에서 건기에는 물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이 저자는 그처럼 가뭄이 심할 때 사슴 한 마리가 목이 말라 물을 찾느라고 온 사방을 누비며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이 언덕 저 언덕, 골짜기마다 다니면서 물을 찾는 사슴을 연상한 것입니다. “내가 낙망이 될 때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떤 식으로 찾을까? 바로 저 사슴이 물을 찾는 것처럼 해야겠다.” 성도 여러분! 사슴의 입장이 되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물 아니면 죽음입니다. 물을 찾으면 사는 것이고, 물을 못 찾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간절합니까? 얼마나 절박합니까? 얼마나 집요합니까?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물을 찾을 때까지 쉬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물을 찾아 사방으로 뛰어다닐 것입니다. “,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이 낙망을 벗어 버리고 일어설 수가 있겠다.” 저자가 그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낙망을 자주 합니다. 불안해 떨 때 자주 있습니다. 마음이 상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사는 길은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즉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하나님을 바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죽음이다.” 하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간절함으로 매일 매일을 살 수 있는 은혜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신약에는 한 아름다운 여성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원래부터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과거는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것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새사람이 되었고 새 인생을 찾았습니다. 그 여인의 모든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기만 하면 살아갈 소망이 있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시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내려앉았고 온몸이 물처럼 쏟아졌습니다. 모든 소망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한 뒤 이틀 동안 아마 한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이틀 밤을 꼬박 새면서도 무덤을 찾지 못한 이유는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끝난 다음날 새벽, 어둠을 뚫고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유해라도 한번 보아야겠다는 절실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시체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같이 갔던 여자들은 다 실망을 하고 먼저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나누는 주님의 유해라도 보아야 해. 도저히 이대로는 떠날 수 없어.” 무덤 밖에서 바위를 끌어안고 흐느끼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의 심정이 바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는 자의 심정입니다. 이러한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얼마나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까? 사망과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으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이, 내로라하는 제자들과 수많은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제치고, 그 당시에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초라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찾아와서 마리아야하고 불러 부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같이 이런 심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야 낙망을 이깁니다. 염려를 이깁니다. 불안을 이깁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정이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42:2)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얼마나 깊은 신뢰가 담긴 표현입니까? 절망하는 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는 그것은 실존적 갈망입니다. 영혼의 갈망입니다. 하나님 아니면 죽음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를 일컬어서 하나님을 바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함

 

어떻게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는지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면 아주 기본적인 공식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마치 초등학교 때 배우는 구구단과 똑같습니다. 즉 교회를 어느 정도 다녔다면 수없이 들었을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너무나 기본적이기 때문에 잘 알면서도 실천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낙망할 때 잘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알면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반복하여 이를 강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법칙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당히 성경을 들추고서 한두 장 읽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펴는 것입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주에도 몇 번씩 설교를 들을 수 있기에 그 귀함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갑작스러운 사고로 병원에 2, 3개월 입원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병상에 있을 때 섬기는 교회에서 주일 예배드리고 목사님 설교 듣는 것이 얼마나 그리운가를 경험한 분들 있을 것입니다. 치료받으러 온몸보다 영혼이 더 상함을 느껴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를 줍니다. 천지는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에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다귀들이 생명을 얻어 일어납니다.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절박한 심정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법칙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이와 같은 절박성이 있습니까? “오늘 은혜를 받아야만 한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나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도 설교를 좀 더 잘 듣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앞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습니다. “주일에 누구에게서 전화 오기로 했는데 예배 중에 오지 않나!”, “예배 마치면 빨리 일 보러 가야지!”, “내일이 명절인데 오늘 같은 날은 설교를 짧게 해야 하는데 왜 이재현 목사님은 센스가 없지!”. 뒷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신경 쓰느라 분주해 하거나, 초조하거나, 안절부절못하는 마음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분주하고 힘들게 수고를 하는지 주일 예배와 애찬 1시간 반도 드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것은 벗어 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은혜를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또 내가 은혜받고 살아야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받지 않은 은혜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읽어서, 잘 모르면 어떻게 하든지, 이 말씀의 뜻을 알기 위해 요약문에 메모도 하고, 나눔 시간에 의견을 제시하고, 목사님에게 물어보고, 애를 쓰면서 배우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물을 찾는 사슴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태도입니다. 낙심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사모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덜 급한 사람입니다.

 

응답이 올 때까지 간절히 기도함

 

두 번째 공식이 있습니다.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의 주먹을 가지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한두 번 적당히 기도하고서,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더라 그냥 내 판단대로 해야지.”하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어린 아들이 죽어갈 때 다윗이 그 옆에서 어떻게 기도했는가? 상경을 한 번 펼쳐 보십시오. 죽어가는 아들을 옆에 놓고 일주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범해서 이 씨앗을 얻었지만, 이 생명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가 잘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자식을 낳지 못해 오랫동안 이런저런 상처를 받아 오면서 가슴에 한이 맺힌 여인 한나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일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여호와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얼마나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았던지,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몇 시간이고 중얼거리며 기도했습니다. 이를 본 엘리 제사장이 술에 취했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시면서, 그분이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우리 모두 알지 않습니까?(22:42)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2:44).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이런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이런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덜 급한 것입니다. “25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3:25-26). 기도는 인내하는 것입니다. 자기 기분대로 금방 무슨 응답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조급함을 가지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공동체에 의탁함

 

하나님을 갈망하는 세 번째 공식이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에다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공동체입니다. 가장 중요한 공동체는 주일날 원근 각지에서 성도들이 모여 함께 예배드리는 모임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이 자리가 청아비전교회 공동체입니다. 또 우리 청아비전교회가 주일 3부 예배에 소그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함께 둘러앉는 것 또한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곳곳에서 흩어져 모이는 모든 성도의 모임이 공동체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몇 사람 성도들의 모임, 이것이 공동체입니다.

낙심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갈급하며 찾기를 원합니까? 이 교회 공동체에다 자기를 맡기십시오. 솔직히 가슴이 무너지는 일을 만나면 무슨 말로 기도해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혼자서는 기도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을 펴도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클수록,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야겠다는 갈증이 클수록 그 사람은 공동체에다가 자기를 맡겨야 합니다. 형제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자매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그들의 간증을 듣는 중에, 또는 그들이 함께 자기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고 소그룹 모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등한히 하거나 교회 공동체 모임을 우습게 여긴다면 아직도 급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로 바닥으로 내려가는 어려움을 당해 보면 이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삶에 지치고 일에 지치고 남편 내조에 자녀 양육에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주부들이 그 바쁜 와중에도 예배에 참여하고, 성도들이 여러모로 도와주고, 계속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열심히 기도할 때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가 중요한데, 그렇지 못하고 나 피곤하고 지치니 제발 내버려 두시오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세상에 녹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내가 낙망이 될 때마다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나를 맡기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사람 만나기 싫지만, 자꾸 믿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기 문제를 이야기하고 기도를 부탁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마귀는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사람 만나기 싫어하도록 만듭니다. 입을 열지 않도록 합니다. 사람을 피하게 합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있게 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기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이러다 보면 나중에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생깁니다. 자기도 모르게 귀신에게 사로잡혀 버립니다. 치유될 소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악화하여 버립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그런 사람은 마귀에게 끌려가는 사람입니다.

 

성령에게 끌려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 믿음의 형제들에게 자기를 의탁합니다. 성도들이 모이는 거룩한 예배에 더 열심히 참석합니다. 이것이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성령에게 자기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청아비전교회가 위치한 청라국제도시와 서구 나아가 인천광역시에 이르기까지 마귀에게 끌려다니는 사람들의 결박을 풀어 주시고, 우리 청아비전교회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교회로 달려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가장 기뻐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낙망한 자에게 주시는 약속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급함으로 찾는 자에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5절과 끝과 11절 끝에 참 아름다운 말씀이 나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로 사모하고, 공동체에 자기를 맡기며 사모했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는 예전 개역 한글에는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낙망이 되고 눈앞이 캄캄해지면 고개가 자꾸 숙여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땅만 쳐다보게 되고 그것도 지치면 눈을 감아 버리게 됩니다. 한 마디로 소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 얼굴을 들게 만듭니다. 하늘을 보게합니다. 소망을 갖게 하시고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저자가 그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얼굴을 들게 하실 뿐만 아니라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나를 낙망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신 하나님, 내 현실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찬송이 터지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반드시 따라옵니다.

 

솔직히 이야기해 봅시다. 밥맛도 없어지고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고민하고 낙망하고 있을 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물론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라 해도, 그것은 어쨌든 나중 일이 아닙니까?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어려운 상황을 놓고 날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런 하나님을 왜 믿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거짓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이 말씀이 천국에 가서 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찾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우리 예수님이 안식과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낙망 중에 이런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면 도대체 예수 믿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또 약속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50:15). 그렇다면 그와 같은 약속이 나의 삶을 통해서 현실로 나타나는 증거가 있어야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낙망할 때 믿음이 아무 소용 없더라. 예수를 아무리 불러봐도 소용이 없더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자기를 깊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과연 어려울 때 사슴이 시냇물을 찻듯이 하나님을 찾았는가? 내가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가? 어떻게 기도했나? 어떻게 교회공동체에 내 자신을 맡겼는가?”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과연 그대로 했습니까? 혹시 적당히 하다가 그만두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무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어떤 변화가 있어야 신앙 생활을 하는 재미가 있을 텐데 아무 변화가 없으니 예수 믿는 것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랜 기다림 후에 온 기도응답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와 여러분은 응답된 기도의 제목들이 참 많습니다. 무슨 기도 응답이냐고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응답을 받고도 잊어버려 감사하지 않았던 성도는 자기가 무슨 기도를 했는가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 하나하나라도 체크하면서 기도하신 분들은 2023년 새해를 맞아 8월이 되는데요. 이미 이루어진 놀라운 기도의 응답을 보실 것입니다. 신비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도하는 자들은 얻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공동체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응답이 금방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잠잠하다거나 무능한 것이 아닙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습니다. 여러분, 어린애가 무엇을 달라 할 때 금방 주는 부모가 있습니까? 앞뒤를 다 생각하고 주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가만히 생각하시고 나에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시는 때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일년 오년 십년이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십년이 가기도 합니다.

 

한 믿음의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기다 다 자식 가지신 부모님들이 계시는데 자식을 키우다 보면 가끔 가슴이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 가정에도 아들 둘, 딸 하나가 있었는데 생활이 그렇게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큰아들이 그래도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곧잘 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도 잘 안 가려고 하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손님이 와도 인사를 할 줄 모르는 등 이상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냥 사춘기 때니까 그렇겠지!” 할 수 있지만, 그 부모들이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부모님은 믿음이 좋은 분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를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보러 갔다가 그만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점점 더 악화하였습니다. 날마다 할 일 없이 스마트폰만 보고 방안에 처박혀서 꼼짝달싹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다 되었는데 전혀 제구실하지 못하는 폐인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 부모는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밤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십수 년 동안이나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은데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불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만 매달렸습니다. 다은데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막노동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직장에도 나가게 되었고 중매로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좋지 않은 병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인 줄 알면서도, 기가 막히게 믿음이 좋은 자매가 시집을 온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혼한 지 삼 년 정도 되었는데 그 아이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지금 예전에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짓말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치유 받아서 정상적으로 잘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믿음 생활까지 잘하고 있습니다. 그 가정에 보배 같은 며느리가 들어와서 날마다 웃음꽃이 핍니다. 생활도 어려운데 천국입니다.

한창 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 부모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며 주변에서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믿음이 좋아도 별수가 없네. 기도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집안 꼴은 저 모양이니 별수가 없구나.” 그런데 그렇게 빈정거리던 사람들이 지금은 무엇이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역시 기도하니까 다르네, 기도하는 사람은 다르긴 달라.” 여러분 이러한 일이 쉽게 된 것이 아닙니다. 무려 십 오 년 이상 기다려서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126:6).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이 말씀대로 하는 자에게 주시는 응답입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 여러분 현실 때문에 우리는 자주 낙망합니다. 무력한 내 자아 때문에 주저앉아 버립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마다 점점 더 내 모습이 초라해져 가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상처를 받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예외 없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바라고 찾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그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 속에서 은혜받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망이 됩니까? 불안 때문에 잠을 설칩니까? 마음에 상처가 남아서 고통을 자주 느낍니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 매달리십시오. 기도에 매달리십시오. 교회공동체에 매달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가난도 하나님이 때가 되면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질병도 하나님이 천국으로 데려가실 작정이 아니시면 반드시 고쳐 주십니다. 여러분의 자녀 문제도 하나님이 때가 되면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실하신 하나님이시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를 통해서 체험하고 문제를 통해서 만나고 문제를 통해서 그분의 은혜 속에 흠뻑 젖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을 알지 못하고 낙망하며 불안해 가며 살아가는 내 가족 친척 이웃 친구 동료들에게 주의 복음 증거하고 교회로 초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리

 

절망 속에 있는 인생

 

인생을 산다는 것을 망망대해茫茫大海를 항해하는 한 척의 배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항해 중 순풍을 만나 힘들이지 않고 편히 갈 때도 있지만, 거친 파도와 사나운 비바람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려운 형편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삶의 절망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모르는 불안을 안고 잠을 설칠 때도 자주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고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참 잘 대변해 주고 있고,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절망의 이유. 본문 가운데 연속해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42:5,11,43:5).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42:4). 이렇게 낙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자기 눈앞에 있는 암담한 현실을 놓고 낙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간 상태이거나 혹은 억류를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볼 때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며 빈정거리고 야유합니다. 그런데 소망이 별로 안 보입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꾸 절망이 돼 불안해지지 않겠습니까?

 

둘째 현실 앞에서 무능한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학자가 동일 저자의 시편 42, 43편에서 ’ 1인칭 대명사를 51번이나 쓰고 있는 반면에 하나님은 겨우 21번밖에 쓰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갇혀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무능한 자신을 볼 때마다 낙망하지 아니할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셋째 과거와 현재를 자꾸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소에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은혜를 받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비방을 듣고 있고,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비참한 신세를 하는 것입니다(42:4). 한때는 화려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초라한 신세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마음에 낙망이 생기고 절망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저자가 마치 국화빵처럼 우리를 꼭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사람이 절망하고 낙망하는 것은 그 뿌리가 다 똑같습니다.

 

지도자로서의 낙망. 저는 아마도 평신도보다는 교회 지도자이기 때문에 눈을 좀 더 크게 떠서 오늘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세상이 이런 꼴로 계속 더러워지고, 거짓이 판을 치고, 우상과 이교와 무속이 깊숙이 자리 잡고, 사람들이 자기만 알게 된다면, 10, 20년 후에는 도대체 어떤 세상이 될까? 청소년들이 이 모양으로 자라간다면, 나중에 어떤 모습들을 하고 있을까? 가정이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깨져 간다면, 앞으로 이 사회에서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위정자들이 저렇게 해서 이 나라가 바르게 번영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떠오를 때면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옵니다. 모두가 자기만 알고 쾌락을 즐기기에 정신이 없는 세상이니 도대체 여기에 무슨 희망이 있고, 도덕이 있고, 정의가 있겠습니까? 서현역 난동 사건과 같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으로 점점 변해 가는 것을 볼 때, 목사라도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세상을 구원하고 치료해야 할 사명을 받은 교회가 이 세상을 감당하지도 못할뿐더러, 거꾸로 세상을 점점 더 닮아가고, 나아가 일치와 화해와 평화라는 명분 아래 배교에 휩싸이는 것을 볼 때마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불안에 떨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힘을 잃어 가면, 앞으로 30년 후에는 한국교회는 설 자리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낙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낙망할 때. 우리는 모두 고민합니다. 낙망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요? 성경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치고 낙망을 경험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 야곱, 다윗, 엘리야, 베드로 그리고 바울도 내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하였습니다(고전2:3). 믿음이 있어도 떱니다. 믿음의 선조가운데도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까지도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26:38) 사람은 누구나 다 낙망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1 Dø den, 1849을 쓴 키에르케골’Soren Aabye Kierkegaard,1813-1855이 말한 것처럼 불안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낙망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낙망하면 그 속에 그냥 주저앉아 버리지만, 그리스도인은 낙망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Amazing Grace’를 작사한 뉴튼’John Newton,1725-1807믿음의 사전에는 낙망이라는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 눈에는 낙망할 만한 일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면 그것이 낙망일 수가 없습니다. 낙망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본문 저자도 낙망이 되는가?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찾아라. 불안한가?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찾아라고 강조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42:5,11).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라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42:1). 팔레스타인은 건기가 되면 비가 오지 않습니다. 유대광야는 파란색 잡초 하나 없는 거칠고 메마른 땅이 장장 100km에 걸쳐 끝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물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슴 한 마리가 목이 말라 물을 찾느라고 온 사방을 누비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사슴에게 물을 찾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끝까지 물을 찾아 사방으로 뛰어다닐 것입니다. “,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이 낙망을 벗어 버리고 일어설 수가 있겠다.” 저자가 그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죽음이다.” 하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단순히 감정이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42:2)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얼마나 깊은 신뢰가 담긴 표현입니까? 절망하는 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는 그것은 실존적 갈망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는지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면 아주 기본적인 공식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너무나 잘 알면서도 실천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낙망할 때 잘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알면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복하여 들어야 합니다.

 

첫째로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설교를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주에도 몇 번씩 설교를 들을 수 있기에 그 귀함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지혜를 줍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다귀들이 생명을 얻어 일어납니다.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절박한 심정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법칙입니다. “오늘 은혜를 받아야만 한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나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도 설교를 좀 더 잘 듣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앞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습니다. 얼마나 분주하고 힘들게 수고를 하는지 주일 예배와 애찬 1시간 반도 드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것은 벗어 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은혜를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읽어서, 잘 모르면 어떻게 하든지, 이 말씀의 뜻을 알기 위해 요약문에 메모도 하고, 나눔 시간에 의견을 제시하고, 목사님에게 물어보고, 애를 쓰면서 배우려고 합니다. 이것이 물을 찾는 사슴처럼 절박한 마음입니다. 낙심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사모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덜 급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의 주먹을 가지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한두 번 적당히 기도하고서 내 판단대로라는 생각은 말도 안 됩니다. 어린 아들이 죽어갈 때 다윗은 일주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범해서 이 씨앗을 얻었지만, 이 생명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가 잘못한 것입니다.” 자식을 낳지 못해 오랫동안 상처를 받아 오면서 가슴에 한이 맺힌 한나는 여호와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얼마나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았던지, 제사장 엘리가 술에 취했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2:42).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보이기까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이런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이런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덜 급한 것입니다. 기도는 인내하는 것입니다(3:25-26). 조급함을 가지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세 번째 믿음의 공동체에다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일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이 자리가 청아비전교회 공동체입니다. 3부 예배에 소그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함께 둘러앉는 것 또한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그 외에도 모든 모임이 공동체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몇 사람 성도들의 모임, 이것이 공동체입니다. 낙심되어 하나님을 갈급하며 찾기를 원합니까? 이 교회 공동체에다 자기를 맡기십시오. 가슴이 무너지는 일을 만나면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혼자서는 기도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클수록,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야겠다는 갈증이 클수록 공동체에다가 자기를 맡겨야 합니다. 형제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자매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그들의 간증을 듣는 중에, 또는 그들이 함께 자기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배를 등한히 하거나 교회 공동체 모임을 우습게 여긴다면 아직도 급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내가 낙망이 될 때마다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나를 맡기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사람 만나기 싫지만, 자꾸 믿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기 문제를 이야기하고 기도를 부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 만나기 싫어하도록 만듭니다. 입을 열지 않도록 합니다. 피하게 합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있게 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기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러다 보면 나중에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생깁니다. 자기도 모르게 귀신에게 사로잡혀 버립니다. 치유될 소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악화하여 버립니다. 성령에게 끌려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 믿음의 형제들에게 자기를 의탁합니다. 성도들이 모이는 거룩한 예배에 더 열심히 참석합니다. 이것이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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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망한 자에게 주시는 약속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급함으로 찾는 자에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42:5),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11).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로 사모하고, 공동체에 자기를 맡기며 사모했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는 예전 개역 한글에는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낙망이 되고 눈앞이 캄캄해지면 고개가 자꾸 숙여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땅만 쳐다보게 되고 그것도 지치면 눈을 감아 버리게 됩니다. 한 마디로 소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 얼굴을 들게 만듭니다. 하늘을 보게합니다. 소망을 갖게 하시고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얼굴을 들게 하실 뿐만 아니라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나를 낙망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신 하나님, 내 현실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찬송이 터지는 것입니다.

 

솔직히 밥맛도 없어지고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고민하고 낙망하고 있을 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쨌든 나중 일입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어려운 상황을 놓고 아버지부르는 하나님이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왜 믿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이 말씀이 천국에 가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찾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안식과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낙망 중에 이런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면 도대체 예수 믿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50:15). 그렇다면 그 약속이 내 삶에 나타나는 증거가 있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낙망할 때 믿음이 아무 소용 없더라. 예수를 아무리 불러봐도 소용이 없더라고 한다면, “내가 과연 어려울 때 사슴이 시냇물을 찻듯이 하나님을 찾았는가? 내가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가? 어떻게 기도했나? 어떻게 교회공동체에 내 자신을 맡겼는가?” 자성해야 합니다. 적당히 믿으면 신앙에 재미가 없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갈 때 체험되는 것입니다.

 

오랜 기다림 후에 온 기도응답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슨 기도 응답이냐고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바보가 아닙니다.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응답이 금방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능한 것이 아닙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자식이 때를 쓴다고 곧바로 주지 않은 부모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때로 어느 경우 십년이 가기도 하고 그 이상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 때문에 자주 낙망합니다. 무력한 내 자아 때문에 주저앉아 버립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마다 점점 더 내 모습이 초라해져 가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상처를 받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바라고 찾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그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 속에서 은혜 받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우리에게 때가 되면 가난도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질병도 천국으로 데려 가실 작정이 아니시면 반드시 고쳐 주십니다. 자녀 문제도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실하신 하나님이시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를 통해서 체험하고 문제를 통해서 만나고 문제를 통해서 그분의 은혜 속에 흠뻑 젖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한 믿음의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들 둘, 딸 하나가 있었는데 생활이 그렇게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었지만, 큰아들이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곧잘 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도 잘 안 가려고 하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손님이 와도 인사를 할 줄 모르는 등 이상한 행동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를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시험 보다가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후부터는 점점 더 악화하였습니다. 날마다 할 일 없이 스마트폰만 보고 방안에 처박혀서 꼼짝달싹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다 되었는데 전혀 제구실하지 못하는 폐인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 부모는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밤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십수 년 동안이나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은데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불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만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막노동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직장에도 나가게 되었고 중매로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좋지 않은 병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인 줄 알면서도, 기가 막히게 믿음이 좋은 자매가 시집을 온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혼한 지 삼 년 정도 되었는데 그 아이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지금 예전에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짓말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치유 받아서 정상적으로 잘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믿음 생활까지 잘하고 있습니다. 그 가정에 보배 같은 며느리가 들어와서 날마다 웃음꽃이 핍니다. 생활도 어려운데 천국입니다.

한창 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부모가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며 기도할 때 주변에서 믿음이 좋아도 별수 없네. 기도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집안 꼴은 저 모양이니 별수 없구나.” 빈정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역시 기도하니까 다르네, 기도하는 사람은 다르긴 달라.” 이 일은 쉽게 된 것이 아닙니다. 무려 십 오 년 이상 기다려서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126:6).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이 말씀대로 하는 자에게 주시는 응답입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하나님을 바라라. 첫 번째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은혜받아야 산다. 이러한 사모함으로 말씀을 받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두 번째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의 주목을 가지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땀이 핏방울같이 보일 정도로 기도하신 예수님과 같이 간절히 기도하게 하옵소서. 조급함을 버리고 인내로 기도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세 번째 믿음의 공동체에다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시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공동체에 나를 맡기게 만듭니다. 믿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기 문제를 이야기하고 기도를 부탁합니다. 교회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맡기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내가 너를 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낙망한자에게 주시는 이 약속이 내 삶에 나타나는 증거를 갖도록 절박한 심정으로 항상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시간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으오니, 영육간의 가난을 벗게 하여주옵오서. 질병을 고쳐 주시옵소서. 자녀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오히려 문제를 통해서 체험하고 문제를 통해서 만나고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흠뻑 젖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