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호 3:1-5) 이재현목사(23.07.23)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3. 7. 24. 02:01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호세아 3:1-5 2023.07.23. 主日禮拜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4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룻기는 만남과 이별로 시작됩니다.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가족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주하였습니다(1:1-2). 그 땅에서 10년 엘리멜렉은 죽고 아내 나오미는 크게 슬퍼하였지만, 아들 말론과 기룐이 오르바와 룻과 결혼 자부를 맞는 기쁨을 가졌습니다(1:3-4). 그러나 그도 잠시 두 아들을 잃어야 했습니다(1:5). 이별과 만남 그리고 다시 만나지 못하는 사별이 집안을 휩쓸었습니다. 손자도 얻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나오미는 젊은 두 며느리의 인생을 열어주기 위해 친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합니다(1:8). 입맞춤을 하고 이별의 순간에 세 여인이 소리 높여 울었다라고 두 번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1:9,14). 나오미는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 남편 될 아들이 이제 내게 없고, 내가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도 너희가 그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느냐. 이제 네 고향 어미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내 아들들과 홀로된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너희로 새 남편을 얻게 하여 평안함 얻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1:8-9,11-13). 두 자부는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며 오열 했습니다(1;10).

 

나오미의 계속되는 권유에 큰 자부 오르바는 시모에게 입 맞추며 이별을 하였고 룻은 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1:14).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16-17). 룻의 신앙과 효성을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롯도 오르바도 모압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둘은 시모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둘의 다른 선택을 한 것은, 오르바가 떠났음을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지 않고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라고 하였습니다(1:15). 오르바는 집안의 몰락으로 섬기던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예전에 섬기던 자신의 모압 땅 이방 신에게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고 책임지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지금이 끝이 아니다이것이 룻의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르바가 떠난 것은 율법으로나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과부가 되고, 집안에 대 이을 아들도 없고 또 죽은 남편의 형제가 없기에 결혼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재혼을 하는 것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율법과 관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관념觀念이 아닌 체험體驗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이 성경학교와 여름 캠프에서 하나님을 관념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만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위해 많은 기도를 바랍니다.

 

보아스가 룻을 만난 만남은 외모도 아니고 열심히 일한 모습도 아닙니다. 보아스는 사환을 통해 모압에서 온 나오미의 며느리 룻인 것을 확인했습니다(2:5-6). 그리고 그녀에게 직접 다가가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2:11). 이 말은 룻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녀의 신앙과 효성을 보아스가 깊이 새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 보아스가 룻에게 하나님의 보답과 보호와 보상이 있을 것을 예견했습니다(2:12). 이 말은 보아스 이미 아내로 맞이할 결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2:12). 보아스와 룻의 만남을 통하여 성도와 성도, 목사와 성도가 어떤 만남이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외모나 열심히 일함을 보고 만나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우리는 외모를 보고 만나 사이도 아니요. 무슨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만난 사이도 아닙니다.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소중한 것과 같이, 내 옆에 있는 성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 우리 성도와 성도들의 만남이요. 목사와 성도들의 만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옆에 성도를 볼 때 외모와 환경과 재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안 하고를 따져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구원받았으니,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만남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만남이 사랑으로 만남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기에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그 형제가 죽은 형을 대신하여 형수에게 장가를 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수혼법’嫂婚法(또는 계대결혼’繼代結婚,levirate marriage)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없거나 형제가 있더라도 원치 않는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그 법이 적용됩니다. 오늘 룻도 그와 같은 경우인데 보아스도 룻의 시부 엘리멜렉의 친족이었지만, 보아스 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습니다. 즉 그가 양보하지 않으면 룻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룻의 기업 무를 자를 만나 담판을 짖게 됩니다.

 

룻은 기업 무를 자에게 당신은 엘리멜렉의 친척이다. 이제 그가 죽었고 그의 아내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소유하던 밭을 팔려고 하니, 그 밭을 사라고 말합니다. 이에 기업을 무를 자가 사겠다고 쾌히 승낙을 합니다(4;3-4). 그러면 그 밭을 산다고 하는 것은 남편과 아들이 없이 홀로된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야 하고, 나오미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보아스가 말하자 이 기업 무를 자가 고민이 생깁니다(4:5). 내가 밭을 사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 죽은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과 기룐의 유산으로 남게 되는 것이요, 자신의 재산은 앞으로 결혼하여 룻에게서 난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요. 룻과 나오미를 부양하여야 하니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어 포기를 해버립니다(4:6). 기업 무를 자가 자신의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벗어 준었습니다(4:8). 이 행위는 포기를 나타내는 표의 전례로 그 자리에 모인 장로들과 백성들은 이 일에 증인 되는 것입니다(4:8). 이러한 과정 후에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보아스와 룻이 낳은 오벳의 양육자 계대 결혼법에 따라 나오미입니다(4:16-17). 앞으로 보아스의 재산은 죽은 말론과 기룐의 이름으로 됩니다. 이것을 보아스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하는 것은 룻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와 룻 둘 사이에 난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입니다(4:18).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고 헌신 할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이러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룻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안 보아스, 이 사랑으로 만난 사람에게 이러한 깊은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약속의 메시아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를 잊는 아들 오벳을 룻을 통하여 얻는 것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희생 후에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 두 사람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승리하고 다른 사람도 승리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어야 복된 것입니다.

 

 

호세아와 고멜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의 3대 왕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즉위한 뒤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반란으로 남유대와 북이스라엘로 나뉘게 됩니다. 남유대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유대와 베냐민 두 지파만이 남았지만, 영토 안에 예루살렘이 있어 성전을 갖게 되었고, 예배 중심으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으로 정통성을 이어 갔습니다. 반면 북이스라엘은 반역자 여로보암이 속한 에브라임 지파를 필두로 10지파가 가세하였고, 경제적으로도 강대했지만, 남유대가 갖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영적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자,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로 숭배하게 하고, 월급을 주고 세운 어용 제사장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등 북이스라엘 전역은 우상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이 사상 최고의 황금기에 수도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예언 활동을 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외적으로 화려하고 풍요로웠던 사회적 분위기와는 다르게 지도층의 도덕적 타락상,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외면하는 백성들의 사회적 무관심, 무엇보다 우상 숭배와 불신앙이 만연했습니다. 이에 호세아는 신랄한 꾸지람과 심판을 선언하며, 회개치 않을 경우 당할 멸망을 경고하였습니다(4:15,5:8,10:5,8.참고/3:14,5:5-6,7:10-13). 특히 호세아는 금송아지 신상이 있던 벧엘의 원래 뜻인 하나님의 집을 벧아웬사악한 집, 우상 숭배의 집인 벧아웬이라 고쳐 불러 그 죄악상을 엄중하게 고발하기도 했습니다(4:15).

 

그런데 이러한 중차대한 선지자 사명을 감당해야 했던 호세아는 음란한 고벨을 아내로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이였지만 그러한 가정사를 가진 호세아의 회개 외침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안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다고 비소했습니다. 이상 호세아서 전체 줄거리를 살펴보았고요. 이제 말씀에서 가르침을 하나씩 찾아가고자 합니다.

 

원하지 않은 사람()을 맡기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선지자 호세아와 고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였던 선지자 호세아를 통하여서,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등지는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하셨습니다. 호세아가 정부를 찾아간 아내 고멜을 위해 물질적인 대가는 물론 애타는 심정을 표현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아픔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암시하는 놀라운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활동할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B.C.793-753 말기에서 마지막 왕인 호세아B.C.732-722까지 입니다(참고/호모1:1,B.C.753-722). 그러나 본서에는 북이스라엘 멸망B.C.722에 관한 예언은 있으나, 실제 멸망 기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남유다에서는 웃시야B.C.791-739, 요담B.C.750-731, 아하스B.C.735-716, 스기야B.C.728-687 왕이 계속해서 통치하였습니다(겹쳐지는 연대는 섭정). 이렇게 호세아서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 호세아가 선지자 활동 말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 치하의 북이스라엘은 번성하여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적으로는 빈곤하고, 혼탁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호세아의 가정이나 개인사 삶이라도 평탄하여야 하는데 호세아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음란한 아내를 맞이해야 했고,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자녀를 낳아 키워야 했습니다. 그것도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하였습니다(1:2). 호세아가 원해서 고멜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랐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오늘 첫 번째 상고할 것은 원하지 않은 사람이나 일을 맡기시는 하나님입니다.

 

최근 한 유튜버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영상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운영자는 입원한 아이의 어머니라며 오늘 유튜브에서 소아중환자실 담당 교수님의 브이로그를 보고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고서는 이 글을 쓴다"라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딸은 작년 11월 간이식 수술을 하고 소아 중환자실로 옮겨진 후, 쾌유 소식을 기다리는 제 마음은 애가 탄다.’라는 표현으론 턱없이 부족했다"라면서, "코로나로 인해 면회가 불가능해져, 소아집중치료실Pica 입원 한 달이 되어야만 짧은 면회가 가능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카톡이 깔려 있는 휴대폰 공기계를 전달해 드리면 아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한 보호자들을 위해 담당 간호사 선생님들께서 페이스톡을 해주셨다"고 알렸습니다. “처음에 의식이 흐릿할 때는 괜찮았는데 나중에 화면 속 엄마를 보고 너무 우는 탓에 그냥 사진과 영상만 보내달라고 부탁드렸다"고 합니다.

 

수술 후 사흘이 지난 날, 어머니는 우연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아이가 수술전 병동에 있을 때, 유용하게 쓰던 베이비캠 앱에서 온 알람을 보게 됬다고 합니다. 화면 속에는 그토록 보고 싶던 아이가 있었는데, 얼떨떨한 와중에 아이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 화면 녹화 기능을 키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어플을 종료시킨 뒤 휴대전화를 전달했는데 아마 간호사가 휴대전화를 조작하던 중 실수로 어플이 켜진 것 같다고 어머니는 예상했습니다. 그러니까 간호사는 자신이 촬영되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지요.

 

녹화 영상에는 당시 간호사가 아이를 지키며 이거 기억나?", “이거 너가 병동에 있었을 때인데", “아빠 알아?"라며, 수술 전 사진과 가족들 사진을 보여주며, 아이가 가족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주는 장면이 담겼있었습니다. 특히 영상 속 간호사는 아빠랑 엄마가 네가 빨리 나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대", “너무 예쁘다 너무 귀엽다 진짜 사랑해 사랑해요" 등 끊임없이 아이에게 예쁘다', ‘사랑한다' 등의 말을 했습니다. 아까 테이핑하는데 너무 힘들어했어. 미안해"라고 말하는 등 치료로 인해 힘들었을 아이에게 사과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날 밤, 몇 분짜리 녹화된 영상을 수도 없이 돌려보며 참 많이도 울었다"대다수의 존경스러운 의료진들께, 고통받는 작은 생명들을 위해 굳건한 사명감으로 제 몸 같이 같이 여겨주며 일해주시는 아주 귀하고 훌륭한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었다"라고 인사를 남겼습니다. 이 사연을 본 많은 네티즌들도 간호사님이 자기 일에 사명감 가지고 하는 모습이 존경스럽고 눈물 난다며, 아이가 반드시 꼭 완쾌하길 소망하는 댓글도 남겼습니다. 그리고 해당 간호사도 최근 여러 이유로 얼마나 더 여기서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찰나에 어머니의 글을 보고 위로와 격려를 받은 것만 같아서 감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댓글을 단다. 아이가 더없이 건강하고 밝게 자라기를 항상 바란다"며 감사함을 전했습니다.

 

소아 중환자실 간호사는 원해서 아이를 맡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상과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직업적을 아이를 돌본 것이 아니라, 사랑 진정 관심으로 돌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Heart to Heart’ 마음과 마음이 전달된 것이죠. 그렇기에 아이의 엄마도 이를 본 많은 분도 공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와 우리 주변에도 그와 같은 분들이 많이 있을 줄로 압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알아도 이러한데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면 근심이 될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진 일이 근심스러운 것이라도, 그렇기에 정말 맡고 싶지 않은 사람 또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맡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죄인을 찾아가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음란한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을 경고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호세아를 세우시고, 호세아에게 육적으로 간음한 여인을 아내로 취할 것을 명했습니다. 호세아는 육적으로 간음한 아내를 옆에 두고, 언제 또 다른 정부에게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우상 숭배의 영적 간음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회복의 길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자기 아내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게라면서, 수많은 비웃음과 멸시를 감내하면서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호세아가 밖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돌아보면 고멜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습니다.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1). 집을 나기를 몇 번, 돌아온 고멜은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음란한 자식을 배어 돌아왔습니다(1:2,2:4). 해산하고 몸조리를 푼 후, 호세아가 선지자 활동하게 되면 고멜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다시 아이를 배어 오는 일을 계속합니다. 그때마다 호세아는 고멜 돌보기에 정성을 다합니다.

 

계속되는 음행으로 나중에는 돈에 팔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한 고멜을 호세아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포주에게 주고 사 오기까지 해야 했습니다(3:2). 당시 노예 한 명의 값이 은 30 세겔이었습니다(21:32;27:4). 호세아는 고멜을 사 오기 위해 은 15 세겔과 나머지 반은 곡식으로 그 값을 지급하였습니다. 이것은 호세아의 궁핍함을 말합니다. 30 세겔이 없어서 절반은 곡식으로 대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먹고살 것도 여의치 않은데 음행하다가 팔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한 아내를 다시 찾아오기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또한, 고멜의 값이 노예 한 사람의 값이었다는 것은 고멜의 낮아진 신분과 하인과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찾아오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

 

그리고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호세아는 고멜을 데리고 온 후,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3:3). 이 말은 고멜 당신은 이제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격리되어 지내면서, 조용히 몸과 마음을 정리하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은 날 동안이라고 표현된 시간을 넉넉히 주었습니다. 이 기간에는 자신도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최상의 인격 대우를 해주는 것입니다. 아내이고, 더욱이 돈으로 사 오기까지 하였기에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식모 같은 일꾼으로 허드렛일을 부릴 수 있었지만, 그러한 일말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1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24:1-4)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

 

율법은 이미 남편을 버리고 떠난 여인을 다시 맞아들이는 것 자체를 아예 금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이렇게 정한 바인데, 일반 백성도 아닌 선지자가 그 율법을 넘어서 아내 고멜을 이렇게 대우하였다고 하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도 결단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본문을 통해 두 번째 상고할 것은 죄인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입니다. 고멜을 통해 이스라엘을 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을 찾아가십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은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결혼을 다섯 번이나 한 부끄러운 경력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지금 있는 여섯 번째 남자와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건달 같은 자와 동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여인으로서 최하류의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몇십 가구에 불과한 손바닥만 한 동네에서 그 여인이 받은 수모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 하나 찾아갈 사람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 집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꺼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여인들이 우물을 찾는 아침, 저녁은 되도록 피하고 아무도 잘 나오지 않는 뜨거운 대낮을 이용하여 얼굴을 푹 숙인 채 먼 길을 걸어 도둑질하듯 물 길으러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여인이 그 시간 물을 길으러 오실 것을 아시고,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한낮의 시간 유대에서 사마리아까지 비지땀을 흘리시며 걸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여러 부류의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독특한 개성을 가진 분들로 놀라기도 합니다. 정상적인 것을 기대하기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가정 출신은 그래도 양호한 편입니다. 다른 교회 집사로 있었다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싸움질을 해서 경찰서에 붙들려 가는가 하면, 여자 청년이 실연했다고 음독자살을 기도하기도 합니다. 또 아들이 귀신 들렸으니 고쳐 달라고 데려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회가 아내를 꼬여서 돈을 빼앗아 간다고 불을 지르겠다며 소리 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은 얼마나 잘하는지 거짓에 거짓을 더해 목사를 속이고 성도를 속이고, 자기 한 말을 손바닥 뒤집듯이 금세 뒤집고 덮어씌우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철저히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죄들을 커버하기 위해 남들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잘못을 부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내가 좀 났다. 너나 나나 똑같지 않냐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로 많습니다.

 

어쩌다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부부라도 만나게 되면, 마치 보배라도 찾은 양 반갑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은 일이 생기면 금방 교회를 버릴 뿐 아니라, 떠날 때도 곱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를 들쑤셔 놓고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실 하루가 영적 전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로 인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사랑으로 돌보아 주며, 말씀을 가르쳐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우리 자신이 먼저 은혜를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난 성격의 소유자들을 감당할 수 있는 인격적 성숙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마치 회복 중인 중환자를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며,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야 합니다.

 

수가성 여인을 만나기 위해 뜨거운 햇살을 받으면서 걸음을 재촉하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 명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찾아간 사람이면 우리도 찾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천하고 손가락질 당하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찾아가는 사람이면 우리도 찾아가야 합니다. 나 자신도 더러운데도 불구하고 내 모습 이대로 만나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그의 제자 된 우리가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음란한 고멜을 통해 우상에 빠진 이스라엘을 보게 하시고, 그런데도 찾아가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과 내가 찾는 사람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죄인이라도 찾아갔다면 나도 찾아가야 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찾아가라고 한 고멜을 찾아가 대가를 주면서까지 찾아 왔습니다.

 

배반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라시는 하나님

 

이름도 모르는 남의 자식을 잉태하여 돌아오고, 낳은 후 다시 나아가 만삭이 되어 돌아오기를 여러 번 이제는 돈에 팔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처지가 되었으니, 우리 같으면 이제 돌아올 수 없구나! 할 수 없는 인생하고 체념하고, 잊고 살아갈 수 있는데 호세아는 기어코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내서 자신의 돈을 지급하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 대한 사랑이요 바로 나에 대한 사랑입니다. 지난날 수없이 말로 해서도 안 되고 홍수의 심판으로도, 홍해를 가르는 기적으로도, 선지자들을 보내도 안돼자, 하나님은 결국은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그 피 값을 주고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시간이 이 사랑을 다시 한번 체험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아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훈련하심으로서, 사악한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 앞에서, 당당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실천할 선지자로 호세아를 세웠는데, 그 호세아에게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아픔과 사랑을 아내 고멜을 통해 절감하게 했다는 것, 그것은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 들에 대한 응답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있나요? 아니면 나의 아픔만을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여러분 고난 앞에서 상처받는 것은 인간이지만 성도는 다릅니다. 그 고난을 없애시고 회복을 시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선지자인 남편의 거룩함에 따분해하던 고멜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생아를 낳고 돈에 팔려 다니면서까지 잊지 못한 사랑하는 자로 기록된 정부’情夫는 과연 어떤 존재이기에 고멜을 그토록 죄악의 그늘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연애’戀愛라는 뜻은 남녀가 사랑하는 일로 사모할 ’戀, 사랑 ’愛입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는 것으로 여기에 빠지면 마냥 좋고 마냥 신납니다. 항상 사랑하는 사람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고멜이 사랑하는 자로 표현된 정부,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2:5). 육적인 정부가 처음에는 이런 물질적인 풍요로도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겉에 나타나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요.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2:7). 마치 속은 텅비고 포장만 그럴듯하게 해놓은 빈 상자와 같이 부푼 기대하고 찾아왔지만, 허무와 배신만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자’ ‘정부를 따라갔던 고멜의 모습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2:3).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부에게 버림을 당한다는 것이요. 나중에는 아무런 방어를 할 수 없는 적들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광야같이 되게 하며, 마른땅 같이 되게 하며, 결국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정부를 따라간 결과로 모든 것을 소비하고 기력이 쇠하고 만 것입니다. 이제 후회하여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고 해보지만, 남편과 자녀를 버리고 떠난 길을 뒤 돌아보면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2:6-7). 가정으로 돌아갈 그 길을 찾을 수도, 갈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정부에 빠졌던 고멜은 온몸과 정신적 영적으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멜을 호세아는 찾아간 것을 넘어 사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사랑이에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마틴 부버’M. Buber, Der Glaube der Propheten1950, p.162도대체 사랑을 강요할 수 있는가?”Kann man denn Liebe gebieten?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이미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만 사랑이 가능하다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반적인 사랑론을 대변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 고멜을 사랑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일컫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와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나니’(3:1). 자신이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에 대한 표현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통념을 넘어서고, 법과 규례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크기로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법보다 강합니다. 노예로까지 전락한 고멜을 사오는 호세아를 통하여 사랑은 배반한 자까지 찾아 나선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여 기도합니다. 자기를 헌신하여 잃은 자들을 얻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의 오늘을 있게 하였습니다. 본문을 통해 세 번째 상고할 것은 배반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떠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배반자까지 사랑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에 응답하는 성도가 데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성도의 과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재현 목사가 다시 증거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이유는 누구든지 자신이 받은 사랑을 깨닫게 될 만큼 응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응답받기 원하는 소원의 제목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깨닫게 될 만큼 응답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풀어주신 사랑을 깨닫기 위하여 노력하지, 아니하면, 그 사랑을 다 알 수도 없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응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모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1:2).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백성이었음에도, 이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말하기를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그들의 생각이 이러한데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응답이 임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해야 할 사람이 감사 대신 불평을, 찬양 대신 원망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응답을 원하는 자세는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신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 본질적인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고 나면, 한순간 그가 베풀어주신 일상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감사한다고 하여도 곧 다시 원망과 불평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은혜와 사랑 이것을 자신이 받은 사랑으로 깨닫게 될 때 그 분량만큼 응답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자

자녀들은 끝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만, 그들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길러보기까지는 부모님의 사랑을 다 깨닫지 못한다고 말을 합니다. 저도 이 진리를 알게 됩니다. 아버지 되기가 가면 갈수록 어렵습니다. 이 말은 철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해서 베풀어주신 그 사랑을 다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만 그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노력이라는 말이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아들을 죽게 하신 본질적인 사랑과 함께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일상적인 사랑도 깨닫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깨닫기 위하여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눈을 밝히사 깨닫는 은혜를 주십니다. 이 말은 받은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면 시각이 좁아집니다. 시각이 좁아진다는 말은 영적인 일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영적인 일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계획 자신의 생각 자신의 좋은 것으로 울타리를 쳐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욕심이고 이기주의며 곧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렇게 엄청난 데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노력이 없을 때는 우리의 눈이 어두워짐으로써 받은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일예배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께서는 이 자리에 온 그 자체가 노력입니다. 그 노력 결과는 우리의 마음을 더 넓게 해줍니다. 우리의 소망을 높게 해줍니다. 우리의 가치를 깊게 해줍니다.

여러분 각자의 지금 현실을 제가 보아도 이 자리에 앉아서 은혜받겠다고 할 분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복장 터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들이 한 둘입니까? 그런데 목사의 설교가 지금 눈으로 보기에는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듣고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여러분 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으로 보아서는 비정상입니다. 그 비정상이라는 말은 신앙의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산다 성도는 말씀으로 산다 성도는 하늘 은혜로 산다”. 고난 중에도 기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들은 허공에 대고 떠든 것 같이 실성해 보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매어 달려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고백하는 자.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

 

배반자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자요’, ‘하나님 사랑을 고백하는 자’. 배반자에게 입을 열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의 다른 측면에 불과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 안에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 훼퍼는 이어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그 사랑이 형제 사랑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모든 것은 서로 공유, 나누도록 하신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사랑은 무엇을 가지고 채우려는 소유 지향적인 삶으로부터 내가 이 땅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 존재 지향적인 삶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있는 사람에게서 이와 같은 삶의 변화가 나타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3:1).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부된 아내를 데려다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멜에게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사랑한다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팔려갔더라도 포주에게 대가를 주고 사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세아 너를 이 땅에 보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요, 이 땅에 내가 있을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배반자인 우리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반자에게 입을 열어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형제를 사랑합니까? 우리의 형제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은 예전에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달아난 종 오네시모가 회심을 하고, 나의 동역자가 되었으니,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맞이할 때,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하였습니다(1;16). 이웃을 사랑합니까?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4-48). 우리의 이웃이 원수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원수에 배반자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배반자에까지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는 성도님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정리

 

원하지 않은 사람()을 맡기시는 하나님

 

호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던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B.C.793-753 치하에서 번성하였고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적으로는 빈곤하고 혼탁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호세아 가정이나 삶이라도 평탄하여야 하는데 음란한 고멜을 아내를 맞이해야 했고, 누구 자녀인지도 모르는 사생아를 키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1:2). 어떤 경우 원하지 않은 사람이나 일을 맡기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간이식 수술을 한 아이를 소아 중환자실로 옮겨진 후, 딸을 간호사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수술 전 아이가 부모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려고, 엄마 아빠의 사진을 보여주고, 수술 후에는 빨리 나아서 엄마 아빠에게 가야지’ ‘너무 예쁘다', ‘사랑한다' 등의 말을 수없이 반복하고, 치료로 인해 힘들었을 사과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날 밤, 몇 분짜리 녹화된 영상을 수도 없이 돌려보며 참 많이도 울었다", “대다수의 존경스러운 의료진들께, 고통받는 작은 생명을 위해 굳건한 사명감으로 제 몸같이 같이 여겨주며 일해주시는 아주 귀하고 훌륭한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었다"라고 인사를 남겼습니다. 간호사는 원해서 아이를 맡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순히 직업적으로 돌본 것이 아니죠. ‘Heart to Heart’ 마음과 마음이 전달된 것이죠. 그렇기에 아이의 엄마도 이를 본 많은 분도 공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와 우리 주변에도 그와 같은 분들이 많이 있을 줄로 압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알아도 이러한데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면 근심이 될 것이 될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고, 세상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하였습니다(고후7:10).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진 일이 근심스러운 것이라도. 그렇기에 정말 맡고 싶지 않은 사람 또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맡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죄인을 찾아가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을 경고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호세아에게 육적으로 간음한 여인을 아내로 취할 것을 명했습니다. 호세아는 육적으로 간음한 아내를 옆에 두고 언제 또 다른 정부에게로 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우상 숭배의 영적 간음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회복의 길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비웃음과 멸시를 감내하면서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호세아 밖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돌아보면 고멜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습니다.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1). 집을 나간 달이 지나기를 몇 번, 돌아온 고멜은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음란한 자식을 배어 돌아오게 됩니다(1:2,2:4). 해산하고 몸조리를 한 후 호세아가 활동하게 되면 고멜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다시 아이를 배어 오는 일을 계속합니다. 그때마다 호세아는 고멜 돌보기에 정성을 다합니다.

 

계속되는 음행으로 나중에는 돈에 팔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한 고멜을 호세아는 당시 노예 한 사람 값에 해당하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포주에게 주고 사 왔습니다(3:2.참고/21:32;27:4). 30 세겔이 없어 절반은 곡식으로 지급한 것입니다. 먹고살 것도 여의치 않은데 음행하다가 노예로 전락한 아내를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요? 나아가 호세아는 고멜에게 이제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격리되어 지내면서, 조용히 몸과 마음을 정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것도 많은 날 동안이라고 표현된 시간을 넉넉히 주었습니다. 이 기간에는 자신도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3:3). 돈으로 사 왔기에 하인처럼 부릴 수도 있지만, 최상의 인격적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당시 율법은 남편을 버리고 떠난 여인을 다시 맞아들이는 것 자체를 아예 금하고 있습니다(참고/24:1-4;3:1). 율법이 이렇게 정한 바인데, 일반 백성도 아닌 선지자가 그 율법을 넘어서 아내를 대우한 것입니다.

 

죄인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입니다. 고멜을 통해 이스라엘을 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을 찾아가십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은 결혼을 다섯 번이나 한 부끄러운 경력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지금 사는 남자와는 정식 혼인도 하지 못 한 채 건달 같은 자와 동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몇십 가구에 불과한 손바닥만 한 동네에서 그 여인이 받은 수모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 하나 찾아갈 사람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여인들이 오지 않는 뜨거운 대낮에 우물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여인이 그 시간 물을 길으러 오실 것을 아시고,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한낮의 시간 유대에서 사마리아까지 비지땀을 흘리시며 걸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여러 부류의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독특한 개성을 가진 분들로 놀라기도 합니다. 정상적인 것을 기대하기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인 경우도 있습니다. 갖가지 문제들을 가득 안고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어쩌다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부부라도 만나게 되면 마치 보배라도 찾은 양 반갑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은 일이 생기면 금방 교회를 버릴 뿐 아니라, 떠날 때도 곱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를 들쑤셔 놓고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실 하루가 영적 전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로 인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사랑으로 돌보아 주며, 말씀을 가르쳐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우리 자신이 먼저 은혜를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난 성격의 소유자들을 감당할 수 있는 인격적 성숙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마치 회복 중인 중환자를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며,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야 합니다.

 

여인을 만나기 위해 뜨거운 햇살을 받으면서 걸음을 재촉하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찾아간 사람이면 우리도 찾아가야 합니다. 나 자신도 더러운데도 불구하고 내 모습 이대로 만나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그의 제자 된 우리가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음란한 고멜을 통해 우상에 빠진 이스라엘을 보게 하시고, 그런데도 찾아가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과 내가 찾는 사람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죄인이라도 찾아갔다면 나도 찾아가야 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찾아가라고 한 고멜을 찾아가 대가를 주면서까지 찾아 왔습니다.

 

배반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실천할 선지자로 호세아를 세웠는데, 그 호세아에게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아픔과 사랑을 아내 고멜을 통해 절감하게 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 들에 대한 응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고난 앞에서 상처받는 것은 인간이지만 성도는 다릅니다. 그 고난을 없애시고 회복을 시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멜이 사생아를 낳고 돈에 팔려 다니면서까지, 잊지 못한 사랑하는 자로 기록된 정부’情夫는 어떤 존재입니까?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2:5). 물질적인 풍요로도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2:7). 마치 속은 텅 비고 포장만 그럴듯하게 해놓은 빈 상자와 같이 부푼 기대를 갖고 찾아온 사람에게 허무와 배신만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버림을 당한다는 것이요. 나중에는 아무런 방어를 할 수 없는 적들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광야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며, 결국 목말라 죽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2:3). 정부를 따라간 결과로 모든 것을 소비하고 기력이 쇠하고 만 것입니다.

 

이제 후회하여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고 해보지만, 남편과 자녀를 버리고 떠난 길을 뒤 돌아보면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2:6-7). 가정으로 돌아갈 그 길을 찾을 수도, 갈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정부에 빠졌던 고멜은 온몸과 정신적 영적으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멜을 호세아는 찾아간 것을 넘어 사랑한 것입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 고멜을 사랑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에 대한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통념을 넘어서고, 법과 규례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크기로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법보다 강합니다. 노예로까지 전락한 고멜을 사온 호세아를 통하여 사랑은 배반한 자까지 찾아 나선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여 기도합니다. 자기를 헌신하여 잃은 자들을 얻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하였습니다. ‘배반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라시는 하나님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배반자까지 사랑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에 응답하는 성도가 데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성도의 과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받은 사랑을 깨닫게 될 만큼 응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응답 받기 원하는 소원의 제목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깨닫게 될 만큼 응답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풀어주신 사랑을 깨닫지 아니하면, 그 사랑을 다 알 수도 없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도 없음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백성이었음에도 이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1:2). 그래서 스스로 말하기를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그들의 생각이 이러한데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 자신에게서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해야 할 사람이 감사 대신 불평을, 찬양 대신 원망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응답은 요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신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 본질적인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고 나면, 한순간 그가 베풀어주신 일상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감사한다고 하여도 곧 다시 원망과 불평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은혜와 사랑 이것을 자신이 받은 사랑으로 깨닫게 될 때, 그 분량만큼 응답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자. 자녀들은 끝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만 자기가 자식을 낳아보기까지는 그 사랑을 다 깨닫지 못합니다. 사실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되기가 가면 갈수록 어렵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해서 베풀어주신 그 사랑을 다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만 그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깨닫기 위하여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눈을 밝히사 깨닫는 은혜를 주십니다. 이 말은 받은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면 시각이 좁아집니다. 시각이 좁아진다는 말은 영적인 일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영적인 일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계획 자기 생각 자신의 좋은 것으로 울타리를 쳐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욕심이고 이기주의며 곧 죕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렇게 엄청난 데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일예배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께서는 이 자리에 온 그 자체가 노력입니다. 그 노력 결과는 우리의 마음을 더 넓게 해줍니다. 우리의 소망을 높게 해줍니다. 우리의 가치를 깊게 해줍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 자리에 앉아서 은혜 받겠다고 할 분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복장 터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들 일한 둘입니까? 그런데 목사의 설교가 지금 눈으로 보기에는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듣고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여러분 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으로 보아서는 비정상입니다. 그 비정상이라는 말은 신앙의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들은 허공에 대고 떠든 것 같이 실성해 보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매어 달려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 배반자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자요’, ‘배반자에게 입을 열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참고/요일4:20).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3:1).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부된 아내를 데려다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호세아 너를 이 땅에 보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요, 이 땅에 내가 있을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배반자인 우리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반자에게 입을 열어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형제를 사랑합니까? 우리의 형제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은 예전에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달아난 종 오네시모가 회심을 하고, 나의 동역자가 되었으니,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맞이할 때,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하였습니다(1;16). 이웃을 사랑합니까?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이웃이 원수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5:44-48). 그 원수에 배반자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배반자에까지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는 성도님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결론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고 하였습니다(3:5).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그 사랑에 대하여 응답해야 합니다. 사실이지 그 사랑에 대하여 바른 응답을 할 수 있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은 시각에서 지금 나의 삶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호세아의 상황에 비추어서, 우리의 삶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해야합니다. 우리의 삶에 이와 같은 전환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은 사랑하시라는 말씀을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바로 전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깨닫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받은 사랑에 대하여 올바른 응답을 할 수 있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기도합니다.

 

원하지 않은 사람()을 맡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아내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 근심스러운 것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짐을 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나중에는 팔려가기까지 한 고멜을 사서 데려오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 수가 성 여인을 비지땀을 홀리시며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과 내가 찾는 사람이 다르지 않게 하옵소서. 대가까지 주고 찾아오라면 찾는 순종을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배반자인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기 위한 첫 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크기만큼 응답한다는 사실을 알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날마다 감사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배반자인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기 위한 두 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항상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자리에서 예배하는 것, 필사적으로 기도한 것, 이 모든 것이 노력입니다. 끝까지 이 신앙의 경주를 계속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배반자인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는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자. 배반자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게 하옵소서. 형제가 피해자까지요. 이웃이 원수까지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배반자에게 마음으로만 아니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 고백하고 실행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