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개혁주의 전 천년설Reformism Pre-millenarianism1)이라는 신학용어가 생소한 독자들이 많을 것으로 사료思料 된다. 이 연구에 동의하는 이들만이 개혁주의자이냐는 의문도 가질 수 있다고 고량考量한다. 그렇기에 본서를 한국교회에 내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의 용기이며 신앙의 결단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고는 할 수 없고 시대적 사명이기에 가능했다.
저자가 주창하고 있는 개혁주의 전 천년설에서는 무천년설이나 역사적 전 천년설 모두 개혁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인정한다. 이 중 포괄적 의미에서 역사적 전 천년설을 취하고 있음을 먼저 밝힌다. 그러나 역사적이라는 개념이 광의하다 보니 세대주의 전 천년설도 뜻으로만 상정想定했을 경우 포함되는 용어상의 불분명 성이 대두되고 있다.
개념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역사적 전 천년설 해석에서도 세대주의 전 천년설과 상동相同하게 보는 경우가 있다. 목회자들의 종말론 설교에서 두 설이 구분 점을 찾을 수 없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무천년주의 입장에서 요한계시록을 연구 전파하고 있는 이필찬 박사는 “문제는 목회현장에서 신앙생활의 현장에 가면 역사적 전 천년설하고 세대주의 전 천년설하고 구분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목회현장에서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이 판을 치게끔 오히려 장로교회에서 신학적인 모호성을 탈피하지 못했다 하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거룩한 분별력으로 자신이 변화되고 성도들을 바르게 인도하여야 할 것이다.”2)고까지 날이 선 비판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역사적 전 천년주의라고 말은 하지만 세대주의 해석을 수용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또 역사적 전 천년설을 주장하면 신학 부재로 평가되는 세대주의와 유사한 취급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7년 환난 전 휴거설을 주장하는 세대주의나, 환난 중간 혹은 후 휴거를 말하는 역사적 전 천년주의나, 동일한 전 천년설이기에 무천년설이 합당한 종말론임을 부각하려는 의도를 내포한 평론으로도 보인다.
또한 “요한계시록을 지나치게 현재 일어날 사건과 관련해서 해석하는 작금의 전 천년설과 연루되는 세대주의적 경향”이라고도 지적한다.3) 자연재해 등을 종말 징조로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눅21:11).
개혁주의 신학자 중에는 무천년설이 정석인 양 설파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무천년주의와 역사적 전 천년주의 모두를 존중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개혁파의 선구자이신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의 종말론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둘 중 어떤 설을 취하느냐에 따라 각각 나누일 뿐,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가 무천년설 만을 지지한다고 한다면, 이런 사고는 개혁주의의 바른 정의가 아니다. 적어도 개혁주의를 연구했다면 역사적 전 천년설도 그 신학과 신앙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용어만을 전제한 경우 역사적 전 천년설이 성경적인 천년설이라는 사실을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바탕아래 문장적해석4)으로 체계화한 것이 개혁주의 전 천년설이다.
尾注>
1) 개혁주의 전 천년설에 대한 부연 연구는 다음 저서를 참조 하라. 이재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개혁주의 전 천년설의 가이드 1 <종말계시의 주요 주제>, 2 <요한계시록의 목적과 구조>, 3 <다니엘서의 목적과 구조>, 도서출판 PBI, 2020. 8. 1. pp.9-62.
2) 2007년에 한국교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사랑의 교회에 열린 구약과 신약 심포지엄(Symposium 학술 토론회)에서 ‘1907년 대부흥 운동과 해석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이필찬 박사가 연구 발표한 것을 요약한 것이다(“세대주의적 전 천년설 비판적 이해”. 이석봉. 2014.9.11. www.newsnjoy.or.kr.).
3) Gregory K. Beale, 오광만역 『NIGTC 요한계시록주석』, 도서출판:새물결플러스, 2016.12.8. p.10
4) 문장적해석:요한계시록에는 중복해서 계시해 주신 사건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건들이 짧은 7년 환난 중에 일어나기 때문에 이 기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진열장에 전시된 상품처럼 질서정연하게 진열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에 흐르고 있는 문장을 잘 파악해야 한다. 어느 한 가지 계시만 보고 그 사건에 대한 결론을 쉽게 내리지 말고 여러 곳에 다른 모습으로 계시된 동일한 사건을 찾아내 어 서로 연결시켜 하나의 완전한 문장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러한 해석 방법을 문장적 해석(文章的解釋, Sentential Interpretation)이라 칭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런 해석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한 사건이 이중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게 되고 동일 사건인데도 다른 사건으로 해석하게 되는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 부연하면 요한계시록은 한 사건에 대한 상징과 실제가 한 모습으로 한 곳에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 사건인 계시들이 다른 형태로 장절(章節)을 뛰어 넘기도 하고 성경 각 권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한 사건이지만 여러 곳에 다르게 기록된 상징과 실제 계시의 단면들을 입체적으로 완성시켜야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이것을 문 장적 해석이라 부르며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에 중점을 두고 조화 있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징적 영적 해석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 이 해석들로 요한계시록 전체를 주석하려는 무천년설의 견해에 는 동의하지 않는다(이재현, 『징조는 픽션보다 참혹했다』, 「영적해석과 상징적 해석의 폐해(문장적해석)」, 도서출판 좋은땅, 2013.2.8.pp218-253. 이재현, 『이어쓰는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문장적해석」도서출판 헤이스, 2017.8.1. pp.127-147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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