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 천년설

개혁주의 전 천년설과 타 천년설의 대비(2) | 이재현목사 | 파루시아 아카데미 | 개혁주의 전 천년설(04)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4. 3. 26. 19:10

3. 개혁주의 전 천년설과 타 천년설의 대비(2)

 

2) 개혁주의 전 천년설과 역사적 전 천년설의 구별점

 

개혁주의 전 천년설은 포괄적 의미에서 역사적 전 천년설을 취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왜 다른 술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해석의 다양성 때문이다. 각 각의 많은 해석으로 세분되어 역사적 전 천년설이 무엇인가를 말하기에 어려운 맹점이 있다. 또 역사적 전 천년주의자 가운데는 천년왕국이 이 세상에 도래한다는 사실이외에 다른 종말 계시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무천년설 관점인 상징과 과거주의로 해석하는 경우가 다수이다.1) 무천년설의 주해를 구별 없이 받아들이다 보면, 사실적 계시들을 무위로 돌리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 역사적 전 천년설이 세대주의와 혼합된 것에 관해서는 비판을 하지만, 무천년설과 병행해가고 있음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긍정적의미로 무천년설도 합당한 것이면 받아들인다는 자세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세대주의의 해석 가운데도 성경적인 것이 있다고 할 때는 관용을 가져야 맞는 논리일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종말의 예언들을 주석함에 있어서, 역사적 문자적 실제적 해석을 우선하고, 미래주의 입장에 있음을 분명히 하며, 예수님 재림 직전과 직후에 있을 사건임을 중점하고, 선명한 구분을 위해 개혁주의 전 천년설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휴거된 성도들이 변화하여 천년왕국에서 후대를 생산하고 번성한다는 주장으로 어떻게 영생체를 입은 성도들이 생육할 수 있는가라는 난제와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점들은 부활론에 대한 혼선 때문에 온 것들이다. 역사적 전 천년설에서는 예수님이 재림하면 생존한 성도들은 휴거되어 변화를 입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천년왕국에서 그 이전에 성도들은 부활의 몸을 입고 함께 거주한다는 것이다. 변화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썩지 않을 몸을 입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부활은 죽음 이후 다시 죽지 않는 신령한 몸을 입는 것을 말한다. 변화체나 부활체나 내용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영생체들이 천년왕국에서 자손을 생산한다는 논증을 갖게 된다. 어떤 해석에서는 천년왕국에서 의인과 악인이 공존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렇지만 이는 성경적인 답변이 될 수 없다.

 

휴거시 성도들은 변화 받는 것이 아니고, 육체 그대로 들림 받는 것이며, 그들이 천년왕국에서 살아갈 백성들이 된다. 재림이전 천상의 성도들은 천년이 지난 후, 흰보좌 심판에서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되고-불신자들도 이 자리에서 심판의 부활을 입게 된다.-천년왕국 성도들도 이때 변화하여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함께 입성하게 된다. 이렇게 부활론을 성경적으로 입증한 것이 개혁주의 전 천년설이다. 이로써 어떻게 영생체를 입은 성도들이 생육할 수 있는가라는 역사적 전 천년설의 난제와 비판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하게 되었다.

 

3) 개혁주의 전 천년설과 무 천년설의 구별점

무천년설에서는 현재 영적으로 천년왕국시대로써, 예수님 재림하면 산자와 죽은자 모두 일시에 부활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풀이하면 앞서 세대주의와 역사적 전 천년설이 갖는 문제들을 피할 수는 있다. 그러나 천년이라는 기간과 같은 수가 언급된 구절을 대부분 영적 해석한다는데 논쟁을 피할 수 없다. 영적인 것을 너무나 강조하고 있는 나머지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만큼은 동력적영감설2)이 주장하는 진보적성경관의 해석과 함께하고 있다. 한국교회와 신학교는 대다수가 축자영감설3)을 따르는 보수주의임에도 종말론에서는 자유적성경관4)과도 공유하는 경우도 상당수이다.5)

 

다음은 이흥선 목사6)의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관점이다.

그동안 교회사적으로 볼 때 기존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종말론을 연구하면서, 마태복음 24장이나 요한계시록을 모두 종말 때 사건으로만 가져간 것은 엄청난 실수이다. 24장은 100% 십자가 사건이고, 계시록도 207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만 종말 때(재림,장차될 일) 사건이고, 그 이전 41절부터 206절까지는 십자가때 사건(지금있는 일)으로 계시록의 핵심은 삼위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한 심판과 구원의 일이다.7)

 

이 목사의 논지는 무천년주의 입각한 해석의 정형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마태복음 24장과 요한계시록을 종말 때 사건으로 본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목사의 논지에 동조하는 목회자들이 다수이다. 이 목사는 요한계시록을 41절부터 206절까지를 십자가 때 사건’, 즉 초림에서부터 초대교회를 거쳐 오늘까지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06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7천 년이 차매사이를 교회시대의 시작과 끝으로 보는 것이다. 이 역시 무천년설에서 핵심적으로 주창하는 것이다.

 

이 목사는 계시록 해석은 십자가의 의미와 역할을 알지 못하면 절대 해석이 불가능하다", “십자가를 알면 계시록의 모든 구절이 명쾌하게 해석된다"고 말했다. ‘십자가의 중대성에 대한 그의 의견은 맞다. 하나 십자가는 초림에서 교회시대를 거쳐 재림시 완성된다. 구원의 최종이 재림이요. 이날이 바로 십자가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목사와 같이 십자가라고 하면, 초림과 교회시대의 영역 안으로만 이해하고 있다.8) 저자가 볼 때 그의 논지는 사변思辨이다. 그러나 상당수가 이에 찬동함으로 사실상 공론이 된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것이 본 글에 이 목사의 주장을 실은 이유이다.

 

이 목사는 계시록의 핵심은 삼위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한 심판과 구원의 일이라고 하였다.9) 이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도 바른 분별을 가져야 한다. 무천년설에서는 요한복음 318절 등의 말씀은 인용한다(“(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 세상에서 예수 믿으면 구원이요. 안 믿으면 멸망이기에 이미 심판은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렇기에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완멸하시는 심판은 인정하지 않는다. 엔드End가 아닌 리셋Reset이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정도로 이해하고 있다(25:32). 그 최후가 그들(악인)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는 구절에 대한 분명한 해석을 어렵게 하고 있다(25:46).10)

 

무천년주의자 가운데는 무천년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도 있다. 천년 기간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를 말하기 때문에 현천년설Present Millennialism11)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세상에 건설될 지상적 천년왕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 천년왕국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영적으로 천년왕국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논지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무천년설이 말하는 천상에서 성도들이 영적으로 왕노릇하다고 있다는 것과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무천년설의 논리는 이천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의해 모든 것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이 땅에 천년왕국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몸으로 죽으셨는가? 인간의 영혼만 아니라 육체까지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이 세상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저주받은 곳이 되어 버렸다. 이대로 역사의 종점을 맞이한다면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무천년주의는 영적인 것이다고 할 뿐 분명한 답변을 하고 있지 못하다. 하나님의 본래 창조 목적을 받들어 드리는 것이 재림 후 이 땅에 조성될 천년왕국 에덴의 회복이다. 교회사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온전히 이루어 드린 적이 있었던가? 영적인 회복만이 아니라 물적인 회복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전 천년설은 이렇게 다양한 학설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가장 올바른 종말론을 잉태하여 영적산고를 겪은 후 출산한 것이다. 그렇다고 타 천년설들이 다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소중한 자산들이다. 다만 각 각에 해결할 수 없는 모순들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벗어나서는 안 되지만, 안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바른 자세이다. 어느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토대로 했다. 이것만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 가장 성경적인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 결정체가 개혁주의 전 천년설이다.12)

 

尾注>

 

1) 이한수 박사는 무천년주의자이었으나 최근 역사적 전 천년설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그 이유에 대하여, “적어도 요한계시록 17-21장의 논지의 흐름이 연대기적 흐름을 보면, 19장의 재림과 그 후 20장의 천년왕국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저서 목적을 후현대주의(Post-Modernism)와 세속주의(Secularism)의 물결 속에서 재림에 대한 기대가 희미해져 가는 시대에 주님이 속히 오기를 고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소망을 격려하고 밝히는 안전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론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교회로 해석하는 무천년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 박사와 같은 입장이 저자가 말하는 역사적 전 천년설에서의 상징적 해석이다(이한수, 「요한계시록」, 솔로몬, 2018.8.25, p.9. 이재현,「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 PIB, 2020.8.1, p.98.).

 

2) 동력적영감설(Dynamic Inspiration=진보주의진보적성경관) 성경을 기록하고 편집하는 데에 인간의 의도가 개입되었다고 본다.

 

3)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성서무류설(聖書無謬說, Biblical Infallibility)): 성경이 일점일획도 틀림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성경이 한 자 한자 기록되었으며, 표현 방식과 표현에 동원된 소재는 말씀을 기록한 사람과 그 시대의 범주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시되 성경기자들의 인격과 지성 그리고 삶의 경륜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래서 유기적영감설(有機的靈感說, Organic Inspiration)이라고도 한다(이와 극 대비를 이루는 성경관을 기계적영감설(Mechanical Inspiration)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에게 내용의 토씨 하나까지 일일이 불러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다는 입장을 취한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기계로 기록하는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인간은 단순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기계적 영감설과 축자영감설을 근본주의로 공격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상기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성경 저자에 대한 견해가 전혀 다르다.).

 

4) 자유적성경관(=성서비평학(Bible Criticism)) 성경을 아예 처음부터 인간이 만든 허구로 본다.

 

5) 이에 대한 자세한 종말론 연구는 이재현. 『이어쓰는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김명영 박사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대한 변증」, 도서출판 헤이스, 2017.8.1. pp.149-166.를 참조하라.

 

6) 이흥선목사는 총신대학교 전문교육아카데미 실천목회연구 주임교수이며 인천제일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7) “계시록 해석은 십자가의 의미와 역할을 알지 못하면 불가능”. 양희준, 2018.2.22. http://www.christiantoday.

 

8) Ibid.

 

9) Ibid.

 

10) 심판과 재림에 대한 연구는 이재현. 『이어쓰는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재림」, 도서출판 헤이스,2017.8.1,pp.199-209.를 참조하라.

 

11) 현천년설은 무천년설의 또 다른 표현으로 문자적 천년 왕국은 존재하지 않고,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 영적 천 년 왕국이 이미 임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는 실현된 천년 왕국(Realized Millennialism) 또는 현림 천년 왕 국설, 현천년설(Present Millennialism) 이라고도 한다(http://www.thegloriatimes.org=253).

 

12) 개혁주의 전 천년설의 방대한 분량을 사전에 간단하고 쉽게 배울 수 있는 지침서『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개혁주의 전 천년설 가이드」, 파루시아 바이블 인스티튜트, 2018.8.1.,pp.13-24를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