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사도행전 교재

사도행전 교재 21 이재현목사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1:37-23:11)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2. 11. 13. 15:48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나님말씀 : 사도행전 21:37-23:11

지난 주일 첫 번째 가르침 주를 향한 의지입니다. 바울은 두로의 제자들과 아가보 선지자와 동료들까지도,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결박하여, 이방인 손에 넘겨줄 것이니, 가질 말 것을 요청했지만, 바울은 어찌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21:4,10-13.참고/11:27-30,20:24).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이 만류할 때, 인간의 의지이면 꺾일 수 있지만, 주를 향한 의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근린공원 벤치에서 개척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선 월세를 주고 공실을 그대로 예배만 드리는 조건으로 임시처소를 얻었을 때, 쓰다 버린 파라솔 테이블과 의자를 어떤 분이 갔다가 주어서, 강단으로 꾸미고 비품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존속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외형적인 큰 부흥은 이루지 못했지만, 여전히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신 것은, 주를 향한 의지를 하나님께서 주신 줄로 믿습니다. 주를 향한 의지를 분명히 합시다. 결단, 실행, 헌신할 수 있는 주의 도움이 있을 줄 믿습니다.

두 번째 가르침 주를 향한 중심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도착한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으며, 그동안 전도 여행에 하나님의 행하신 크신 일을 보고하였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21:15-20). 그런데 장로들은 유대인 중 믿는 자 수만 명이 있는데,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로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배교자라고 본다고 하였습니다(20:20-22.참고/9:20,13:5,14,39,43,14:1,15:5,17:1,17,18:13,19,26,19:8). 그래서 바울이 나실인 서원한 이들의 비용을 부담하여, 율법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21:22-23,26.참고/10:16;2:29;16:3;5:2-4). 아프리카 오지 선교사님이 원주민 의복을 입고, 그들의 절기에 참여한다고 동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의 매개이지, 주를 향한 중심은 흔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한 영혼이 구원 받는 일이라면, 절대적 진리, 복음, 예수 이외의 것은 필요와 요청과 협력에 부응해야 합니다(참고/23:1). 흔들리지 않는 주를 향한 중심을 축복합니다.

세 번째 가르침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아시아로 부터 온 유대인들이 오순절(맥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바울을 발견했습니다. 이전에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있던 헬라인 드로비모가 시내에 있는 것을 보고,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도 들어가 더럽혔다며, 무리를 선동하고 바울을 잡았습니다. 이 소요를 보고 받은 천부장은 현장에 도착하여, 바울을 결박하고, 진상을 알기 위해 영내로 압송했습니다. 무리는 그 자리에서 바울을 없애지 못한 분을 삯이지 못하고, “그를 없이하자 소리치며 따라갔습니다(21:26-36.참고/44:9;13:45,14:5,19,17:5,13,18:6,19:23,20:4;딤후4:20). 성난 군중의 외침은 27여 년 전 인근 빌라도 관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하라고 소리쳤던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27:23;15:13;23:18;19:13,15). 예수님은 인자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져 능욕하고 죽일 것이며, 너희도 내 이름으로 인하여 박해당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9:22,18:31-33,21:12.참고/4:27). 이 예언이 바울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21:12-13.참고/20:24). 그럼에도 주를 향한 일념에 중단은 없습니다. 모든 잃어도 믿음은 잃지 않는 자에게 주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1. ‘바울은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 나는 유대인이라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변론할 수 있기를) 허락하라고 요청하고, ‘허락을 받아 안토니아 요새 Antonia Fortress 층대 위에 서서’, 바울을 죽이고자 모여 있는 백성에게 회심 이전 신 분과 이후 이방의 사도가 된 경위를 설명했습니다(21:39-22:20.참고/9:1-19,26:12-18). 변론을 들은 유대 무리의 반응을 써보시오(22:21-22). 

 

 

 

 

 

2. 유대인들이 분노가 이렇게 하늘을 찌른 이유가 무엇입니까?(22:18)

 

 

 

 

 

3. 바울은 주님께 자기 정체가 드러났을 때, 그분의 명령을 받고 따랐습니다(22:6-21). 그 러나 무리는 분노했습니다(22:22-23).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우리는 예수님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주님이 바울을 부름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9:15).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부르신 것은, 주신 은사와 복을 따라, 가장 귀한 그릇으로 만들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계획을 모르는 자는, 무리와 같이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벌거벗음에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과 같이 진리를 대적하()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되어서는 안됩니다(딤후3:8). 우리는 나를 알고 계신 주님의 뜻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울같이 주님의 인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향하신 주님의 계획대로 나를 가장 귀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말씀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4.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안 천부장은 이튿날 정식으로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를 열어 유무죄를 알고자, 먼저 바울에게 발언을 하도록 하고, 공회의 반론을 듣고자 하였 습니다(22:24-30).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바울의 일성에 대제 사장 아나니아의 명령과 바울의 반론은 무엇입니까?(23:2-3)

 

 

 

 

 

5. 바울은 대제사장이 부당하지만, ‘율법에 백성의 관원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였기에 존중 한다고 하였습니다(23:5.참고/22:28).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양춘길 목사님은 미주의 대표적 한인교회인 필그림선교교회Pilgrim Mission Church를 담임자입니다. 이 교회는 2017 12월 소속 총회인 미국장로교PCUSA을 탈퇴했습니다. 그 사유는 이 교단이 동성애 옹호 정책을 시행, 동성애자 결혼과 목사 안수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총회가 세상 법정에 소송, 탈퇴 시 예배당 건물과 은행 계좌, 교회 이름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맞대응을 위해서는 교회도 소송을 통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양 목사님은 세상 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말씀을 따랐습니다(고전6:1-11). 이에 안건이 공동의회에 서 교인 98%가 찬성을 했습니다. 예배당 건물만 미화 12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30억원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의 예배당보다 더 좋은 공간에 마련된 예배당을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양 목사님은 총회가 성경에 어긋난 불의를 행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존중한 것입니다. ! 그렇게 했을까요? 양 목사님과 필그림선교교회 성도들이 말씀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고, 총회 너희도 불의에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입니다. 오늘 말씀의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6. 하나님은 바울에게 혜안을 주셔서, 대립 관계에 있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있는 것을 간파하게 하셨습니다(23:6). 두 종파는 어떤 교리에 차이가 있었습니까?(23:8)

 

 

 

 

 

7. 6을 인지한 사도 바울은 자신은 바리새인으로 그 교리를 증거했습니다(23:6,8). 바리새 파는 동의했으나, 사두개파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두 종파가 의견 충돌로 갈리었습니다 (23:7). 바리새파 편에 있던 서기관들은 바울을 어떻게 평가 했습니까?(23:9)

 

 

 

 

 

8.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자중지란으로 공회가 해산되어 버렸습니다(23:10.참고/ 19:23-41). 이것은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하신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23:11). 바울의 최종 목적지는 로마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죽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 결박 된 것은, 로마 시민인 바울이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도록하여,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바울의 전도 여행을 완성하시고자 하는 주님 섭리에 기인합니다. 사도 바울은 최종 목적지인 로마로 가기 위해 지금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자신이 채운다고 하였습니다(1:24). 오늘 말씀의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김마라나타 선교사님은 지난 발자취 가운데 종전 1년밖에 되지 않는 이라크에 선교를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7:4). 인간의 이성으로는 반대가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하셨습니다(고전1:21.참고/고전3:18-21). 우리의 가정과 생업과 교회를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초상집 같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고난이라도,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며, 주님의 고난의 순종하는 자는 지혜자 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보존하는 이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최종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마지막도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고난 가운데 위로가 얼마나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의 위로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연약합니다. 위로해 주던 사람도 지칠 수 있고, 원치 않게 변할 수 있고,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고난 가운데 찾아오시는 주님의 위로는 처음 그대로입니다. 달라지지 않습니다. 계속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1:5.참고/벧전4:13).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고난에 순종할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은혜와 복과 위로는 넘칠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한 해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볼 때, 다사다난한 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고난에 순종하여, 지금, 이 예배자리에까지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공동체 가족들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복과 위로가 넘칠 것입니다. 모두 받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9. 다음 제목으로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①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복을 따라, 좋은 그릇으로 만들어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손길을 내밀 때 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가장 귀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②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우리에게 부당하게 하는 자에게 세상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말씀을 따르는 우리를 보고 너희도 불의에서 돌아오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게 되게 하옵소서. 

③ 주님의 고난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목적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정, 기업, 교회가 고난이라도, 주님의 고난을 내게 채우는 것을 믿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복과 위로를 넘치게 받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