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처와 휴거(1)
Ⅰ 서론
시한부 종말론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세대주의자들이 환난 전 교회 휴거를 주장하는 것은 예비처를 발견하지 못한데 기인하기도 한다. ‘유브라데 전쟁과 적그리스도의 지배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라는 논리이다. 그래서 그들은 공중과 지상의 이중 재림과 그 사이 7년 혼인잔치라는 성경에도 없는 참으로도 묘하고 이상한 종말론을 펼치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예비처를 지금 찾아 나선 이들도 있다. 모 교회의 담임목사가 신도 감금 및 집단 폭행 혐의로 공항에서 긴급 체포되었다. 주요 교단으로부터 이단 및 교류 금지 상태인 이 집단은 남태평양의 피지 섬에 지상 낙원이라는 미명하에 ‘그레이스로드 팜'을 설립했다. “이곳이 낙원이다. 살아서 영생하자"며, 신도들 400여명을 이주시켰다. 그 과정에서 범죄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와 비슷한 사건이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는 제하로 한 지상파 시사교양프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방송은 한반도전쟁을 피해 피난 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모 전도사가 ‘몇 년도 몇월에 전쟁이 날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오게 되었다고 한다. ‘깨끗한 어린 아이 목소리 같은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며, ‘주님이 종로와 청와대를 파괴할 것’이고, ‘북한군이 땅굴을 통해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북한군은 어린이들을 납치해 인육으로 잡아먹고 여성들을 제2의 정신대로 만들 것이다’는 등 황당한 말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이 주장을 믿고 따라간 교회의 목사와 신도들이 있다. 미국과 태국까지 피난간 이들도 있다. 또 다른 사이비집단 교주는 ‘승천을 위해서 타락한 세상과 단절된 그들만의 신앙촌 건설’ 목적을 내세우며, 브라질로 약 1,000명이 넘는 신도를 대거 이주시켜 노동 착취와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 요르단 수도 암만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 페트라Petra는 예비처의 고전과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장소에 얼마의 사람이 거주할 수 있겠으며, 그렇다면 그러한 특성을 가진 곳이 지구상에 얼마나 더 있어야 할 것이며, 이미 노출된 장소에서 적그리스도의 공격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등 성경적으로 합당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한 가지도 없다.
이처럼 세대주의자들의 환난 전 휴거는 예비처라는 종말의 피난처를 덮게 했고, 반면 아직 이르지 아니한 마지막 때 가게 될 예비처를 지금 찾아 떠나는 일들도 발생하면서, 특정한 지역을 단정 지어 많은 사람을 혼란케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교회의 실정이다. 그러면서도 예비처라는 용어만 나오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천시해버린다. 그러나 성경은 인류의 마지막 7년이 오면,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큰 환난’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마24:21;계7:14). 그러므로 이 시기에서 예수님 재림 전까지 성도들이 보호받을 예비처를 고찰함은 마땅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예비처 연구가 되면서, 그 관련성 상 언급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휴거이다. 성경은 휴거를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이를 주제로 논하는 것을 금기禁忌시피하고있다. 그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세대주의의 발상은 7년 환난 전 교회는 공중에서 들림 받는다는 이설異說 때문이다. 이 주장은 시한부 종말론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언제인지 모르고 갑자기 휴거된다고 하니, 사람들은 그날에 관심을 끌게 된다. 이를 악용한 이단 사이비들이 사회적 위기나 국가적 대란 등을 틈타 성도들을 미혹하여, 재림 일자를 선포하고 자신들 세력이 되어야만 들림. 받을 수 있다고 선동하였다. 이것은 성경의 무지에서 온 것이다. ‘그날이 도둑같이 오리니’라는 말씀만 알았지, 예수님께서 ‘곳곳에 기근과 지진과 전염병 등의 징조’를 보고 그 날이 가까이 옴을 알게 하시고, 준비하게 하신 경성을 갖지 못한 것이다(눅21:11;벧후3:10). 또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말라 먼저 배교가 있고’라고 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살후2:1-3). 도둑같이 온다는 말도 예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경성하여 각성한 성도들에게는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이 책임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다. 휴거를 설교하지도 준비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주의 영향으로 인한 시한부 종말론자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낭설로 물의를 빚자 아예 휴거의 메시지를 덮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다를 바 없는 책임을 묻게 될지 모른다. 휴거는 유행처럼 한 번 번졌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휴거는 지금도 주변에서 독버섯처럼 돋아났다. 감추었다. 반복될 뿐이다.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 추종자들은 지금도 휴거를 연기에 연기를 더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론 정립 부재에서 온 것이다.
모든 연구는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성경의 증언에서 찾아야 한다. 종말 시대 피난처인 예비처는 요한계시록 12장 5-6절과 13-14절에 분명한 말씀의 근거가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양육하기 위해 예비하신 곳’이 있으며, 그 기간에 대하여는 ‘천이백육십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그 시점은 7년 환난 중 후 3년 반이 될 것임을 밝혀주고 있다. 휴거에 관해서도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다. 이제 본론에서 예비처와 휴거의 진상을 성경을 통해 입증하고, 그에 대한 준비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Ⅱ 본론
Ⅱ-ⅰ. 예비처
1. 예비처의 예표
(1) 열 처녀
성도들이 예비처와 세상으로 나뉘게 되는 과정을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25장 1-13절의 혼인잔치 비유1) 잘 살펴보아야 한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모두 등을 가지고 있다면 성도임이 분명하다.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슬기 있는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때까지 지금 등에 있는 기름으로는 부족한 것을 알았다. 예비한 것이다.
등과 기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말씀과 성령으로 해석했다. 이것을 틀린 해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저자는 이들에게 들려온 소리의 시점이 ‘밤중’이라는 점을 주목한다(6). 이것은 종말을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가진 기름은 종말을 맞이할 준비에 필요한 것이다.
현재 보다 신앙을 더욱 선명하게 지켜야하는 마지막 때 닥칠 일들에 대한 준비이다. 그것은 바로 7년 환난 전과 7년 환난 중 전 3년 반 동안 두 증인의 예언 사역을 믿고 따르는 것을 말한다(계11:3).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지금 등에 있는 기름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믿음 생활을 잘 이어오다가, 역사의 종점에 다다라서, 준비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등에 있는 기름이 떨어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말세의 징조인 재난, 전쟁, 테러, 민족분쟁, 전염병 등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임박한 종말에 경성하지도 못했다. 재림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역사 무대에 등장한 적그리스도 정체를 바로 분별하지 못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성경의 증거를 직시하지 못한 것이다. 최종에 있을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무장을 하지 않았다. 성도에게 가장 큰 영예인 죽임을 당하지 않고, 생전에 재림하시는 예수를 신랑으로 맞이할 흠 없는 신부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등에 있는 기름으로는 종말 이전까지 사용할 수 있지만,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가진 기름은 종말에 벌어질 대 배교에 맞서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살후2:3). 바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이 때 필요한 것이다(눅21:19).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약1:4).
① 교회가 종말에 당할 환난 - 첫째화
성도가 믿음을 인내로 지키지 않으면 영혼을 얻을 수 없을 정도의 혹독한 시험은 ‘첫째화’로 명명된 황충이 화이다. 교회가 종말에 당할 환난가운데 가장 큰 환난으로 요한계시록 9장 1-12절에 기록되어 있다.
7년 환난 중에는 지상에 세 가지 화의 재앙이 임하게 된다. 그 첫째 화로 등장하는 황충이 환난은 적그리스도의 영적 군사가 된 음녀의 무리로부터, 7년 환난 가운데 전 3년 반 끝에서 역으로 5개월 동안 교회가 받을 환난을 말한다. 이 첫째 화 사건의 계시는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무저갱을 열 때, 그 무저갱 속에서 올라오는 악령들이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 속에 들어가, 인간 황충이 떼를 이루므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때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황충이로 상징된 악한 영이 들어간 거짓 형제들의 핍박과 유혹을 받게 되며, 그리스도를 배신하도록 갖가지 시련을 받게 된다. 이런 시련들은 또한 우리들 부모나 형제들로부터도 올 것으로 예언되어 있기도 하다(마24:10-12;눅21:17-19).
그러나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라는 것처럼 이들의 활동 기간은 한정되어 있다(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한 것과 같이 성도들을 괴롭힐 수는 있지만 죽이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셨다(5). 이때 성도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이미 7년 환난 속에 들어간 성도들은 전 3년 반 동안 믿음을 지켜 죽지 않고, 후 3년 반 예비처에서 보호함을 받다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며, 그 분과 함께 천년왕국의 새로운 세계에서 지복의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황충이 화를 불신자들이 받는 환난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기는 이유는 이 황충이 떼들이 해치는 상대가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는 명령이 그것을 말해 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황충이로 상징된 악한 영들이 왜 불신자를 공격하겠는가? 실상은 ‘이마에 인 맞은 사람들’은 일반 성도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친 무리로 이들은 종말에 예언 전달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을 가리킨다(계7:3-4).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은 불신자들인 것이 아니라, 십사만사천의 하나님 종들을 제외한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 맞은 종들은 이 기간 동안 불사신의 권능을 받아 전 세계적으로 영원한 복음을 증거할 것이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무리가 이들을 해 칠 수 없다(계11:5-6).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성령이 인치셨다고 하였다(엡1:13). 예수님도 인치심을 받았다(요6:27). 그렇다면 예수님이 구원받기 위해 인치심을 받았겠는가? 구원의 인과 사명의 인을 구분해야 한다.
종말에 예언 사역을 감당할 십사만사천을 제외한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 이마에 인 맞지 아니한 이들 흰옷 입은 성도들만을 해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죽일 수는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는 인내가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기름으로 상징된 진리, 오직 예수만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신앙으로 예비(무장)했기에 황충이 화에도 믿음을 지켜, 후 3년 반 예비처로 인도함 받게 된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세상에 떨어지게 된다.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지만, 그들은 참혹한 전쟁과 짐승의 잔혹한 통치 아래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짐승의 표를 받고 영멸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계11:13;12:17;14:9-11).
마태복음 25장은 종말장인 24장과 연속 상에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안에는 7년 환난이 시작되기 이전, 이 후 전 3년 반과 후 3년 반 사건, 그리고 재림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문장의 전체 전개를 관찰하여 개관하고 해석해야 한다. 25장 1-13절을 성도들 가운데 예비처로 세상으로 나뉘는 것으로 본 것은 이런 전향적인 자세로 연구한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두 사람
그런 관점으로 마태복음 24장 40-42절을 보면, 예비처로 인도함을 받는 자와 세상으로 떨어질 자에 관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본문을 재림 때에 사건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해석이다. 42절에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재림의 시점에만 해당하는 말씀일까? 40, 41절을 보면 밭에 있던 두 사람과 맷돌질을 하던 두 여자 중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했다. 그런데 버려둠을 당한 사람의 현재 상태를 보라? 그들이 심판 당한 모습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이후에도 생활 현장에 남아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가? 그들은 버려둠을 당하고, 이 세상에 떨어진 후에도, 계속 활동하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다.
이 말씀은 전 3년 반이 끝난 후 성도들 가운데 예비처와 세상으로 나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성도들은 후 3년 반에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이어가야 한다. 물론 이 구절을 세대주의 자들은 7년 환난 전, 세계 전역에서 순식간에 벌어질 대 실종사건인 휴거로 본다. 이 주장을 따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말씀은 예비처와 세상으로 나뉘는 것으로 보아도 전혀 잘못된 해석이 아니다. 휴거시의 상황은 마24장 31절에서 따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상기 본문을 재림 시점으로만 보지 않고, 성도들 가운데 예비처와 세상으로 나뉘는 7년 환난 중 후 3년 반에 있을 사건으로 보는 것에 의문을 갖는다면, 그것은 성경을 너무 편협하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찰해봐야 한다.
김경섭목사는 이에 대하여 “이중 성취 : 가까운 미래의 성취와 보다 먼 미래의 성취”라고 표현했다. 또한 예언을 공부할 때 기억할 것 중 의 하나로 “예언은 사건들 사이의 시간 간격을 항상 명시하지는 않았으며, 예언을 항상 연대순으로 기록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시간적 간격을 두지 암시하지 않고 둘 다를 포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성경 한절에 기록된 말씀은 어느 한 시점 한 사건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단락을 구분하여, 연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구절에는 많은 시차가 있는 사건들을 함축하여, 기록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개혁주의 신앙에 이탈하지 않고 개혁주의 신학에 하자가 없는 가를 보아야지, 이미 해석된 틀 고정관념에 얽매이면 안 된다. 그런 태도는 바른 연구의 태도가 아니며 발전을 가져오기도 어렵다.
尾註>
1) 혼인잔치’란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비유로 예수님이 가끔 인용하셨다. 그러나 혼인잔치라 똑같은 현이라고 해도 의미까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22장 10절의 ‘혼인자리’는 신약 시대의 교회를 뜻하며, 요한계시록 19장 7절의 ‘어린양의 혼인’이란 천년 왕국을 뜻하고, 마태복음 25장 10절의 ‘혼인잔치’는 환난 날의 예비처를 뜻한다. 비유는 어느 한 사건에 대한 해석의 이해력을 돕기 위한 문학적 표현이기 때문에 성경 여러 곳에 비유로 인용되고 있는 ‘혼인’이란 단어를 어느 한가지에만 국한시켜 해석해서 는 안된다. 마태복음 25장 6절의 ‘밤중’이란 말은 음녀의 세력과 적그리스도의 활동으로 인한 영적 흑암 상태 를 의미하는 말로 인류의 종말을 묘사한 것이다. 그 밤중에 난 소리가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내용인데 이 소리는 두 증인이 7년 환난 중, 전3년 반 기간에 외치는 ‘다시 예언’하는 사역을 가리킨다. 이 예언의 사역은 요한계시록 11장의 척량으로 성도들의 회개를 의미한다. 대 환난에서 건짐을 받으려면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희게 씻는’ 회개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계 7:14). 슬기 있는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회개하는 열매를 통하여 등을 예비하였던 자들이지만 미련한 처녀로 비유된 성도들은 세속적인 신앙에서 돌이키지 못한 성도들이다(마24:37-39;눅18:8). 민병석. http://www.bamjoongso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