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 천년설

예비처와 휴거(2) | 개혁주의 전 천년설 핵심주제(8-2) | 이재현목사 | 파루시아 아카데미 | 개혁주의 전 천년설(30)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4. 4. 1. 21:26

예비처와 휴거(2)

 

2. 예비처는 왜 필요한가?

 

(1) 핵전쟁에서의 보호

 

서론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세대주의와 같이 7년 환난 전 휴거를 주장하거나, 그 외 전 3년 반이 끝나는 시점인 중간 휴거기를 주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비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서 중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세 전쟁유브라데전쟁에서 논한바와 같이 무시무시한 핵전쟁과 그로 인한 파괴와 오염으로 이 세상은 사지가 된다. 이 황폐해진 지구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환난 전 혹은 중간 휴거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엄청난 재앙을 부를 핵전쟁에 성도들도 참여하게 되는가? 결론을 먼저 답한다면, ‘아니다하나님이 그 참혹한 땅에서 자신의 백성을 내버려 두실 리 없다.

 

앞서 살펴본 봐와 같이 요한계시록 126‘1260’, 14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기록되었는데, 7년 환난 중 후 3년 반에 해당한다. 3년 반이 끝나는 시점에 발발하게 될 핵전쟁(유브라데전쟁)에서부터, 예수님 재림까지 이 세상에서 보호받는 기간으로 성경에는 그 장소에 대해 예비처라고 말씀하고 있다(9:13-21,12:6).

 

하나님의 역사는 구속사이다. 어떤 순간에도 성도를 구원하시는 것이 최우선이시다. 노아의 대홍수 때에는 방주에서 소돔과 고모라 심판에서는 소알성에서 애굽의 대재앙 때에는 고센에서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셨다(6:17-22;24:38;11:7;벧전3:20;19:19-23;47:27;

50:8;8:22;9:26;10:23)

 

초대교회 때에는 카타콤베1), 갑바도기아2), 데린쿠유3)에서 신앙을 지킨 성도들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을 지키시되, 그 보살핌에는 끝이 없다. 재림이후 천년왕국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신앙을 지킨 성도들을 인도하셨다. 예비처는 이런 성경적 역사적 근거와 배경을 갖고 있다.

 

(2) 적그리스도의 통치에서의 보호

 

핵전쟁과 함께 예비처가 있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후 3년 반 짐승의 통치기간에서의 보호이다. 성경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를 못 하고, 죽임을 당하는 시대가 온다고 말씀하고 있다(13:16-17).

 

짐승 곧 적그리스도는 위로부터는 용으로 상징된 사탄에게 엄청난 능력을 위임받고, 아래로는 종말에 세계를 지배할 열강을 상징하는 열 왕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거짓선지자는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사람들이 숭배하도록 한다(13:4-5;14-15;17:12-13).

 

그러한 적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세상은 지옥 그 자체이다. 특히 핵전쟁 후 황폐해진 지구에서, 곡식을 재배하고 추수할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고, 그러한 지경에 식량을 구한다는 것은 극심한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짐승표를 받는 자만 매매 즉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데 짐승표는 부여된 자는 곧 영원한 죽음이다(14:11).

 

그렇다면 이런 멸망의 자리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곳이 바로 예비처이다. 그러면 그런 증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가? 저자는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바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이다.

 

3. 예비처의 예증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에게 수 년 동안 비가오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했다(왕상17:1). 저주가 아닐 수 없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통해서만 경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격분한 아합은 엘리야를 죽이려했고 하나님은 그의 낯을 피해 그릿 시냇가로 숨어 지낼 것을 명하신다(왕상17:3). 그동안 아합은 엘리야 수색에 나서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다’(왕상18:10). 그런데 때가 되어 스스로 나타날 때까지 찾을 수 없었다(왕상18:15-18).

 

엘리야가 아합과 대면했던 사마리아는 그가 도피해있던 요단과 먼 거리가 아니다. 더욱이 엘리야는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시냇가의 물만 마시고 은신해있었던 것만이 아니다(왕상17:6). 시냇물이 마르자 하나님은 그를 사르밧에 있는 과부 집에 보내어 떡을 먹게 하고 그 집의 여러 식구들과 유하며 함께 지내도록 하셨다(왕상17:7-15). 이때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기적을 행했다(왕상17:16). 이뿐 아니라 과부 집 주인의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나타내셨다(왕상17:22). 이러한 사건은 엘리야의 도피 기간에 한두 가지에 불과한 것이다. 그 외 다른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기에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소문들이 그 동네를 넘어 그 지역과 북이스라엘 전체에 펴졌을 것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아합은 끝내 엘리야를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예비처의 근거가 된다고 본다. 한 하늘 아래 한 국경 아래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찾을 수 없었다. 엘리야가 은폐엄폐를 뛰어나게 해서 아합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하나님이 숨긴 것이다. 대적의 손에서 구원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예비처 환경과 성격을 알 수 있게 한다. 적그리스도의 무지비한 탄압 속에서도 해함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12:13-17). 엘리야의 보호 기간은 삼년 육 개월이라는 것을 비가 그쳤던 시기로 알 수 있다(4:25;5:17). 이는 요한계시록 예비처에서 양육 받는 후 3년 반과 일치한다(12:6,14). 이 모든 것을 우연의 일치로 본다면, 그에 대한 변증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종말에 적그리스도의 압제에서 보호받을 성도들의 지구상 예비처의 전면적全面的인 모습을 아합의 통치 아래 엘리야를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국지적局地的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예비처가 어디인가?

 

하나님께서는 예비처가 어딘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시지 않았다. 다만 광야’4)로 기록되어 있다(12:6). 광야의 문자적 의미는 황무지, 거친 땅, 거친들, 불모지, 사막이다. 상징적으로는 지상 교회가 환난과 박해를 받는 현장 곧 광야 같은 험한 세상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광야를 실제로 볼 것인가 상징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갖게 되는데 속단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성경에 사실적이면서 영적으로도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종말의 예비처에 대해서는 전자의 견해를 갖는다.

 

그것은 성경에 실례가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바로 왕을 피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낸다(3:1). 이스라엘은 가나안 입성 전까지 40년 광야 노정을 이어갔다(14:33-34). 이 광야 생활에 대하여 스데반 집사는 교회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7:38). 이것은 앞서 살펴본 예비처에서의 삶을 상징으로 표현한 장막에서의 생활과 일치한다(7:14-17). 예수님께서 공생애 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신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4:1;1:12;4:1). 사도 바울도 회심이후 사역을 시작하기 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의 준비기간을 가졌다(1:17-18).

 

이렇게 광야 예비처에서 3년 반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도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단 그 광야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장소에 관해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어쩌면 순리라고 할 수 있다. 공개된 그것이라면 너도나도 그곳을 매입하려 들것이고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 아니시다.

 

그리고 세상에서 예비처로 옮겨가는 것에 대해서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독수리가 두 날 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인도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12:14). 그러나 이 방법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한 실례가 많이 있다.

 

세상에서 예비처로 옮기는 것에 가장 부합하는 용어가 헬라어 하르파조’ἁρπρζω5)이다. 그 뜻은 빼앗다’to seze, ‘잡아 올리다, 꽉 움켜 잡다’catch up, ‘잡아채다, 강탈하다’snatch away인데 가장 근접한 한글 번역은 낚아채다이다. 순식간에 사람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성경에 하르파조용례를 보면.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23:10),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2),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6) 이 말씀에서 빼앗아’, ‘이끌려등에 하르파조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다. 모두가 인간의 수학으로 계산할 수 없는 삽시간에 벌어진 사건들이다.

 

보다 더 확연하게 뜻을 나타낸 말씀은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에서 찾을 수 있다(3:39). 여기서 이끌어하르파조는 이 땅의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나타낸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1662-1714의 주석Matthew Henry's Commentary에 의하면 가사에서 아소도(아스돗)까지는 약 30마일의 거리라고 한다(40km). 그러므로 빌립은 순간적으로 가사에서 아소도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장소 이동한 것이다. 빌립이 장소 이동시 그 몸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몸 그대로 옮겨진 것과 같이, 3년 반 동안을 보낼 예비처로 인도함 받는 것도 이와 같은 방법일 것으로 본다.

 

세상과 예비처로 나뉘게 되는 대상은 성도들 가운데이다. 안 믿는 자들은 이미 세상에 내던져진 자들이다. 성도들 중 핵전쟁의 무시무시한 재난에 아비규환을 부르짖을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 비극을 당하지 않고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후 3년 반을 보낼 예비처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구별의 기준은 무엇인가? 끝까지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을 믿고 이 진리를 수호하고 전하는 해를 옷 입은 교회는 예비처 인도함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음녀교회는 세상에 남을 수밖에 없다(12:1;17:1,6). 당연한 것 아닌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반문할 이들이 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교회를 보라! 어떠한 순간에 직면해 있는지? WCC 부산총회이후 배교이 게센 물결이 휩쓸고 있다. 재차 삼차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1장에 종말에 있을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19절에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셨겠는가? 믿음은 구원으로 받는데 인내를 사용하신 것은 그만큼 마지막 때 인내하지 못하면, 믿음을 지킬 수가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413절에는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가복음 1313절에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 기록되어 있다.

 

5. 예비처에서 받을 혜택은 무엇인가?

 

양육을 받는다고 했다(12:6). 양육이란 말은 부양하여 기른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어느 일정한 기간 동안의 보호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환난 날의 하나님의 예비처란 환난 날에 있을 하나님의 양육원이란 의미가 된다. 예비처에서 양육을 받는 생활은 피동적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혜택을 받아 대 환난의 기간을 유월하는 장소로 하나님께서 이 예비처를 마련한 것이다.

 

예비처의 생활에 대해서 알려면 요한계시록 714-17절까지의 세심한 연구가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천국의 삶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천상에서의 삶을 장막에서 다시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으며, 해의 뜨거움에 상함 받지 않는정도로 표현했겠는가? 요한계시록 213-5절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 중 요한계시록 714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는 이들이 예비처에 들어갈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다. 15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는 첫째 화를 당할 즈음, 교회가 하나님 앞에 모여 밤낮으로 기도하며 헌신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교회가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 간구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고 말씀하셨다(15). 장막은 결코 천국이 아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장막을 천국과 동일시하는 엉뚱한 해석으로 환난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약된 예비처에 대하여 비밀 속에 숨겨 두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은 대 환난의 날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약속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망 대신에 두려움을 주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 이 장막이 곧 환난 날의 하나님의 예비처임을 16-17절 말씀에서 명백해 진다.

 

(1)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라고 했다(16).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66절에서 말씀해 주신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말씀과 일치된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간 농사를 짓지 아니했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의 만나로 배불리 먹이셨다(16:35). 이 날에 장막에 들어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식탁이 예비 되었을 것이다.

 

(2) ‘다시는 목마르지도 아니하고라고 했다(16).

 

목마른 이유는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3년 반에 두 증인의 기도로 하늘 문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아니한다고 하셨다(11:6). 3년 반에는 더욱 심한 가뭄으로 모든 인류가 목말라 할 것이다.

 

(3)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고 했다(16).

 

넷째 대접 심판 시에는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운다고 했다(16:8). 3년 반 전반에 일어나는 유브라데 전쟁은 핵전쟁으로 뜨거운 불기운에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피해에서 보호해 주신다. 적그리스도가 예비처를 공격하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보호로 해를 받지 아니한다(12:15-16).

 

(4)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라고 했다(17).

 

마지막 대환난 중에 보호하심을 받을 하나님의 장막은 어린 양이 목자가 되사, 이 모든 재앙에서 친히 그의 백성들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다(4:14). 갈증이 나지 않는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

 

(5)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고 했다(17).7)

 

3년 반 동안 말미 다섯 달 동안 괴롭힘을 당하는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이긴자들을 위로하시는 말씀이다(9:10). 교회의 거짓 형제들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들로부터도 배교하도록 핍박과 유혹을 받았지만 승리한 이들을 안아주신 것이다(고후11:4;2:4;24:10-12). 대환난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혜택에 모두 안착하기를 축복한다.

 

 

尾註>

 

1) 카타콤베(Catacomb, 로마)는 초대교회 성도들 만남의 장소이자 지하 묘지로 사용되었다. 로마에는 카타콤베가 여러 개 있는데, 가장 큰 카타콤베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있는 것들로 산 칼리스토의 카타콤베등이 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같이 아마천에 덮여 돌을 파서 만든 관에 매장되기를 원했는데 신자들 대부분은 빈민층이나 노예 신분이었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드는 지상의 영묘에 묻힐 상황이 아니어서 지하에 묘지를 쓰게 된 것이다. 지하 10-15m 정도에 계단을 만들어 지하 5-6층을 이루게 되었는데 로마법에 의하면 묘지는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에 마련된 공동묘지의 미로로 피신할 수 있었다. 지하 묘소 양쪽 벽면에 시신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장방형의 공간들을 만들고 조금 넓은 공간 에서는 예배 의식을 행했다. 여기 남겨진 많은 벽화들은 고대와 중세 기독교 미술을 보여 주는 사료가 된다.

 

2) 갑바도기아(Cappadocia, 터키)는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로마시대 이래 탄압을 피하여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곳에 몰려와 살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수천 개의 기암에 굴을 뚫어 만든 동굴수도원이 남아 있다. 3백 만년 전 화산폭발과 대규모 지진활동으로 잿빛 응회암이 뒤덮고 있으며, 그 후 오랜 풍화작용을 거쳐 특이한 암석군을 이루고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시대 이래 종교 탄압을 피해 바위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신앙생활을 했던 예비처였다. 전승에 의하면 신앙의 핍박을 피해 성도 들이 벌판을 한없이 갔다. 막다른 산이 있는데, 이 산이 너무나 신기하기만 하다. 이 산의 토질은 바위산인데 손으로 파지게 되어 있었고, 파고 나면 단단해 지는 특징을 가진 토질을 가진 땅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비둘기들이 날아와 배변을 보면 그것이 거룸이 되고 식물을 길렀다고 한다.

 

3) 데린쿠유(Derinkuyu, 터키)는 깊이 85m까지 내려가는 지하 8층 규모의 거대한 지하도시이다. 네브셰히르와 니데 사이에 난 도로상에 있으며 주도인 네브셰히르에서 29km 떨어져 있다. 터키에 많은 지하도시 중에서 가장 큰 곳으로, BC 8-7세기에 프리지아인이 처음으로 세웠으며 당시에는 커다란 돌문으로 안쪽에서 막을 수 있었다. 이후 로마제국의 종교박해를 피해 온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숨어들었으며 7세기부터는 이슬람 교인들로부터의 박해를 피하는 데 사용하는 등 주로 종교적인 이유로 은신하려는 사람들이 살았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거주지 유적은 모두 AD 5-10세기의 중기 비잔틴시대에 속하는 것들이다. 수용규모는 3,000-5만 명이다. 카파도피아의 다른 지하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예배당, 학교 교실, 식당, 침실, 부엌, 마구간, 창고, 와인 식용유 저장고 등 다양한 생활시설이 갖춰져 공동생활에 불편하지 않게 만들어졌다. 각층은 독립적으로 구별되며 긴 터널을 통해 다른 지하 도시들과 연결된다.

 

4) 광야:Wilderness, 曠野, 히브리어 미드바라’(מדבר ), 헬라어 에레모스’(ἔρημος)

 

5) 라틴어 라피오(rapio)=‘들어 올려졌다’(caught 살전 4:17)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 영어 랩츄어(rapture)는 헬라어 하르파조, 라틴어 라페레에 해당 휩쓸려 올라감’, ‘낚아채어 올라감’. 한문 휴거(携擧)=끌 휴(携) + 들 거(擧)의 합성어=‘이끌려 들어 올려진다. 또는 인상(引上)=끌 인(引) + 윗 상(上)의 합성어= ‘위로 들어 올려진다로 사용된다.

 

6) 여기에서 하르파조는 데려가다는 의미에서 들리우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은 자기가 경험한 들림을 이러한 최고도의 무아지경의 체험과 대비시킨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천국으로 여행하는 것이나-그는 이 들림이 그의 몸 안에서 있었는지 몸 밖에서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또는 육체의 승천도 아니었다. 이 들림에 대한 바울의 묘사는 심히 절제된 것이어서 들림이 일어난 방법에 관하여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는 정확히 말하면 베일에 가리운 상태로 남아 있는 들림 과정의 본질적 특색이다’(A. Schlatter). 바울은 여기서 일시적으로 믿음에서 미래의 모습을 보는 상태로 옮겨간 사실, 즉 그가 잠간 동안 낙원을 체험한 사실에만 역점을 두고 있다.

 

7) 이 말씀을 요한계시록 21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와 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 그곳에는 사망이 없다고 했다. 이것은 천년왕국이 끝나고 둘째 사망까지 완전히 불못에 던져지는 흰 보좌심판 이후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천국에서 있을 일이다(20:11,14;21:1-2). 717절은 이 땅에 하나님이 보호처로 준비하신 예비처에 있을 일이다. 이후 천년왕국에서 천년동안의 삶을 허락하신 것이다. 천년왕국에서 사망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