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6:30 2024.10.27. 主日禮拜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눅11:2-4)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외식으로 금식하지 말라 16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눅11:34-36;12:22-34;16:13)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1-34)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회 부설 파루시아 글로벌 미니스트리 센터 제8차 공개세미나가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목사님 성도님들이 오셔서 종말의 사명을 나누고,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아름다운 교제를 가졌습니다. 중보와 헌신과 수고로 함께 해주신 성도 여러분에게 감사를 전했습니다.
산상수훈 첫 번째 가르침 팔복은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전부입니다. 중심입니다. 왕입니다. 예수님으로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물적 외적 현실의 복도 백 배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의 두 번째 가르침은 온전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온전은 마음을 위 두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세 번째 가르침은 빛과 소금입니다. 소금의 맛은 향기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을 하나님에게 올려드린 제물의 향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빛이시고 그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 찬송, 영광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마음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 역사, 응답, 능력, 복이 나타날 것이고, 그것이 세상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빛과 소금은 마음에 영광을 가지는 것입니다.
영성:마음에 임재를 가져라
산상수훈 네 번째 말씀은 구제와 금식과 기도입니다. 이 세 가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영성으로 통칭할 수 있습니다.
구제를 은밀하게 하라
영성 1. 구제에 대하여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였습니다(1-4).
구제에 대하여
도르가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제자로 하나님께서 명하셨고, 예수님도 불쌍히 여기셨으며, 초대교회도 행하였던 것과 같이 어려운 과부들을 돕는 데 힘썼습니다(행9:39.참고/출22:22;신10:18;눅7:13;행6:1;갈2:10;엡2:10;딤전5:3). 힘썻는데 선행과 구제를 보통 정도가 아니고, 심히 많이 한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한 일을 많이 한 도르가가 그만 중한 병에 죽게 되었고, 이미 그의 유해는 장례절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행9:37). 도르가가 이미 죽었음에도, 그녀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던 제자들은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행9:38). 너무나도 도르가를 사랑했고 존경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욥바로 와 줄 것을 간청하게 됩니다(행9:38). 룻다에서 욥바까지의 거리는 18km가량으로 멀지 않은 길입니다. 찾아온 두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알게 된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룻다에서 욥바로 올라가게 됩니다(행9:39).
베드로를 맞이한 제자들은 죽은 도르가를 누인 다락방으로 안내하였고, 많은 과부가 도르가 곁을 떠나지 않고, 그녀가 생전에 만들어준 자신들의 속옷과 겉옷을 내보이면서, 애통해했습니다(행9:39). 베드로는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행9:40). 그리고는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소리쳤습니다(행9:40).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도르가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 것입니다. 도르가에게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고 하였습니다(행9:41-42).
도르가의 구제는 결과적으로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많은 선행과 구제 앞에 ‘하나님을 섬기는 여제자’라고 하였습니다(행9:30). 이는 도르가가 신실한 주님의 자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한 그녀의 구제는, 본문의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에 합한 여인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베다니 동네에 사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말씀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고, 주님은 이 가정에 종종 들려 고된 사역에 쉼을 가지시고 지극한 정성으로 준비해준 별미를 시고 귀한 말씀을 전하시기도 하셨습니다(요11:3;눅10:30).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이르시니’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12:1-3). 이때 발끈하며 일어선 자가 있었는데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로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며, 마리아에게 호통을 쳤습니다(요11:4-5).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부은 향유는 처녀가 결혼 첫날밤 신랑을 맞이할 때, 몸에 봇는 것으로 신혼 용품과 같은 것이었는데 그 가격이 장정 3000명 하루 품삯인 ‘삼백데나리온’으로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그 향유를 부은 것은 앞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었는데, 이를 모른 가룟 유다는 그것을 팔면 많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참고/막14:8). 그러나 그자의 말은 본문에 기록된 ‘외식’ 즉 위선일 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하였습니다(요11:6). 만약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지 않고, 회계인 자신에게 맡겼다면, 향유를 팔아 10/1이던 3/1이던 착복을 할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 구제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는 자입니다(1).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1). 마치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하신 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2).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선행과 구제를 홍보하여 그것으로 상장을 받고 이력에 남겨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그자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기에 하나님 앞에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지칭된 안상홍 증인회에서 이름을 바꾼 세계복음화협의회 하나님의 교회나, 신천지로 약칭하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선행으로 영국의 국왕과 미국 대통령의 상을 받았다고 홍보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선행을 한다고 그 집단이 진리일 수 없고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엡2:8-9).
하나님을 섬기는 여제자 도르가는 하나님 은혜 안에서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고,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제자들이 롯다에 있는 베드로를 욥바까지 청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나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또한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행9:41-42)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상’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1).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입니다(4). 하나님 은혜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아름다운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될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0:42).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히11:6).
그러나 가룟 유다 같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께 드린 예물을 담당한 회계를 맡으면서, 그중에 구제할 때 마치 자신이 베푸는 것처럼 떠벌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둑’이라고 지칭되었듯이 구제비 가운데 착복을 일삼다가, 결국에는 스승까지 은 삼십에 파는 자가 되었습니다(마26:15). 구제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행하는 의는 자칫 악으로 변질 되고, ‘자기 상’을 받는데 집착하다간 자칫 ‘자기 화’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신 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선행과 구제를 행할 때, 죽었던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와 같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구제는 선행임으로 구제 하나만 아니라, 여러분의 은사, 재능, 봉사 등 모든 것이 선행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 재능, 봉사 등 또한 은밀히 행할 때 은밀히 보시고,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금식을 은밀하게 하라
영성 2. 금식에 대하여. “16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16-17).
예수님은 금식도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의 금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슬픈 기색을 보이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위로를 받습니다.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이 씻으면, 사람들에게는 금식하는 자로 보이지 않지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은밀한 금식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보게 하는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금식할 때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는데요. 금식하면 마음의 얼굴인 영혼이 맑아집니다.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묻자,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막2:18-20).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신랑이 있을 동안이란 문자적 의미는 당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때는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육체로 함께하시지 못하지만,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주님의 증인으로 주님 전파할 수 있도록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잊지 않도록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우리는 그 무엇보다 주님을 빼앗기지 않게 주님이 떠나지 않게, 주님의 버림을 받지 않는 자가 되도록 금식해야 합니다. 금식과 같은 절박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은밀한 금식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이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셨습니다(사58:6). 은밀한 기도로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자는 “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14-15). 은밀히 금식하고도 금식과 같은 절박한 신앙을 가지고도, 사람과 풀지 못하면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심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풀어지는 것이 은밀한 기도이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님이 항상 거하고, 일하고, 이끄심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은밀한 금식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은밀하게 하라
영성 2. 기도에 대하여,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5-5).
기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은밀하게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외식으로 기도하는 자란 바리새인 등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백성의 존경은 받는 바리새인도, 백성의 멸시를 받는 세리도 성전에 올라갔습니다(눅18:10). ’세리는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며 통회 자복 회개하였습니다(눅18:13). 그러나 ‘바리새인은 서서 (세리와) 따로 기도하여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며 기도했습니다(눅18:11).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 믿’는 자로서, 자기 같은 의로운 자의 기도만을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눅18:9). 그러나 예수님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18:14). 바리새인은 자기같이 의로운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신다며, 자랑하듯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바로 외식으로 기도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거룩하다고, 찬사를 받으며,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 같이 성전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통회 자복 회개가 은밀히 기도하는 자요. 그 기도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7-8)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들이 같은 내용의 기도를 계속, 중언부언 되풀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으셨다는 믿음이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기도의 상대가 자신의 기도를 확실히 들었다고 생각하면 중언부언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목석이나 쇠붙이 우상을 놓고 기도하기에 계속 동일한 내용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기도를 들었다는 표시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의 기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심의 토대 위에서 기도한 것입니다. 중언부언의 기도는 소망을 날마다 기도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증언부언이란 하나님께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반복하여 아뢰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정을 모르실 것이라는 의심입니다. 그러나 소망을 날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듣고 계심과 하나님의 정한 때 응답을 믿음입니다. 아무리 중언부언해도 의심의 토대 위에서 드려지는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과 무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7).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는 것이 아니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기도 이것이 은밀한 기도이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8). 그 은밀한 기도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님의기도입니다.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9-13.참고/눅11:2-4)
주님의기도는 우리말로 번역하다보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이지만, 헬라어 원문의 순서로는 ‘아버지’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9).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제자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다가온 것은 박해와 가난과 굶주림이었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원형극장에서 사자 밥으로 던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기도를 드리며, 하늘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는 감동적인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니며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했습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그 핍박과 고난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실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진 핍박 속에 살던 사도 바울이, 당신의 죽음을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때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돌아온 탕자’를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절반이나 탕진한 탕자가 다시 만난 아버지에게 던진 첫마디가 ‘아버지여’였습니다(눅15:21). 그 다음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버지란 호칭 앞에서 아버지를 버리고 가출했던 아들의 존재가 회복되었고, 단절되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란 호칭이 갖는 위력이요 감동입니다. 우리가 주님의기도를 드리면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마다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은밀한 기도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만 불러도, 내 안에 계시고 안아주시고 세워주시고 이기게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밀한 기도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영성 1. 은밀히 구제, 은사, 재능, 봉사 등을 행할 때,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와 같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영성 2. 은밀한 금식, 무엇보다도 주님을 빼앗기지 않게 금식하는 것, 금식과 같은 절박함을 갖는 자에게 주님이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삶이 되도록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영성 3. 은밀한 기도, 바리새인은 자기가 같이 의로운 자만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였지만, 주님은 세리 같이 통회 자복 회개의 기도, 증언부언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기도,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만 불러도, 감격에 사로잡히는 기도, 이 은밀한 기도하는 자에게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안아주시고 세워주시고 이기게 하도록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이 은밀은 하나님 임재를 믿는 것입니다. 구제와 금식과 기도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졌기에 하나님의 알아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네 번째 말씀 구제, 금식, 기도 이 세 가지 영성은 마음에 임재를 갖는 것입니다.
보물:마음에 주인을 모셔라
상수훈 네 번째 말씀은 보물입니다. 주님은 보물에 관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9-20.참고/눅11:34-36;12:22-34;16:13)). 여기서 보물은 문자적으로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예수님은 보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에게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필요합니까? 그럴리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바라보는 보물이 금은보화, 물질, 경제라는 것입니다. 돈이 된다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21). 자기가 보물 같이 여기는 금은보화와 물질과 경제를 땅에 쌓아두는 자는 마음에 땅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예수님이 비유하신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아마도 부자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아서 이 사람은 원래 재산을 많이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농작물을 통하여 부를 측정하지 않았습니까? 물려받은 많은 전답에 곡식들이 영글고 영글어서 해마다 추수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눅12:16). 이렇게 원래 재산도 많은 부자가 해마다 농사도 잘되어 소출이 넘쳐나니까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습니까? 이럴 때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심중에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눅12:17). 부자에다가 막히는 것 없이 해마다 소출이 늘고, 부에 부를 더하자, 소문이 자자해지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낸 부자인가 봐” 소리까지 들으며, 부러움을 받자,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마음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부자는 어떤 생각에 도달하였습니까?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눅12:18). 먼저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짖자는 것입니다. 나중에 소출이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하니 더 크게 지어서 쌓아 놓고 쌓아 놓고 쌓아 놓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무엇 이라고 합니까?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12:19). 부자의 생각은 한마디로 “쌓고 쌓고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것입니다. 이 부자의 생각은 본문에 보물을 땅에 쌓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예수 안 믿는 대부분 사람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 다니지만, 아직 믿음이 여리거나, 신앙생활의 영적 깊이를 모르는 성도들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자는 어떤 생각까지 합니까?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눅12:19). 이제 부자는 생명의 주인이 자기인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자의 생각을 깨우쳐주시면서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눅12:20).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란’ 본문의 보물을 땅에 쌓는 자입니다(참고/눅12:21).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밤이라도 내 영혼이 갈곳이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하늘에 쌓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쌓으면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는 제대로 쓰지 않으면서, 하늘에 쌓는 자에 대하여 주님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라고 하셨습니다(계2:9). 그러나 땅에 쌓는 자는 하나님께 가난한 자인 것입니다. 좀 재난이, 동록 사고가, 도둑 질병이 찾아와 다 소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재물이라고도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24). 보물, 재물은 단지 돈이 아닙니다. 맘몬니즘입니다 신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감사예물, 주일헌금 등 물질을 뛰어 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어렵습니다.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물질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고 하셨습니다(24). 우리의 주인은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물질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물질이 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이 여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장자 권을 ‘가볍게’ 경이 여겨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에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 권을 사모하여 형에게 사기까지 한 야곱은 인간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히 여겼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창25:33-34). 산상수훈의 다섯 번째 말씀 보물은 마음에 주인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물질을 중히 여겨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부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통칭하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22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22-23),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게 됩니다. 그러나 눈이 나쁘면 어두울 수 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이 어두우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의 어둠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주인이면 하나님이 보일 수 없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주인이면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은보화, 물질 경제인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도 여러분의 금은보화, 물질, 경제인 보물을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먼저:마음에 신뢰를 가져라
상수훈 여섯 번째 말씀은 먼저입니다. 주님은 25-34절까지 무엇이 먼저인가에 관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 ‘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9)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그러므로 염려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고 말씀하십니다.
한 구절구절 읽어 내려갈 때마다 주님이 우리의 심정을 얼마나 잘 알고 계시는지,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것이지만, 각도를 달리할 때 우리의 염려까지도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 세상 어떤 피조물보다 우리를 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공주의 새도 먹이시고 길쌈하지 않아도 백합화를 자라게 하셔서 솔로몬의 영광보다 아름답게 하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것입니다(26-3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4:9)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너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25,31), 그것은 이방인이 하는 것이요. 너희가 믿는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는 것입니다(32).
그러면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33).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먼저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28:12)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신 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여섯 번째 말씀 먼저는 마음에 신뢰를 가지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더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피조물보다 우리를 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것으로 주어가 ‘내일’입니다(34). 즉 ‘내일이 되면 너희에게 내일을 주신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책임져 주실 터인데, 왜 피조물인 네가 걱정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괴로움이 없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괴로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있어야 우리가 세상의 유혹을 끊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연약함을 내가 확인할 때에만 그분의 강함을 더 신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괴로움이 영원히 존속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날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괴로움을 주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로 끝입니다. 그 다음 날은 내일을 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염려를 버리고 마음에 신뢰를 가지는 것입니다.
정리
영성:마음에 임재를 가져라
산상수훈 네 번째 말씀은 구제와 금식과 기도입니다. 이 세 가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영성으로 통칭할 수 있습니다.
은밀히 구제 하라
욥바에 사는 드로가의 구제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 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많은 선행과 구제 앞에 하나님을 섬기는 여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도르가가 신실한 주님의 자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한 그녀의 구제는 본문의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에 합한 여인이었음을 알게 합니다(4.참고/행9:30-42).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앞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었는데, 이를 모른 가룟 유다는 그것을 팔면 많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자의 말은 본문에 기록된 ‘외식’ 즉 위선일 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하였습니다(2.참고/요11:1-5). 만약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지 않고, 회계인 자신에게 맡겼다면 향유를 팔아 10/1이던 3/1이던 착복을 할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는 자입니다(1). 자신의 선행과 구제를 홍보하여 그것으로 상장을 받고 이력에 남겨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자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기에 하나님 앞에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지칭된 안상홍 증인회에서 이름을 바꾼 세계복음화협의회 하나님의 교회나, 신천지로 약칭하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선행으로 영국의 국왕과 미국 대통령의 상을 받았다고 홍보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선행을 한다고 그 집단이 진리일 수 없고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엡2:8-9).
하나님을 섬기는 여제자 도르가는 하나님 은혜 안에서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고,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제자들이 베드로를 청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나는 역사를 체험했고,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되었습니다(행9:41-42).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상’을 받은 것이요.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입니다(4). 하나님 은혜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아름다운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될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그러나 가룟 유다 같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께 드린 예물을 담당한 회계를 맡으면서, 구제할 때 마치 자신이 베푸는 것처럼 떠벌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둑’이라고 지칭되었듯이 구제비 가운데 착복을 일삼다가, 결국에는 스승까지 은 삼십에 파는 자가 되었습니다(마26:15).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행하는 의는 자칫 악으로 변질 되고, ‘자기 상’을 받는데 집착하다간 자칫 ‘자기 화’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신 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선행과 구제를 행할 때, 죽었던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와 같은 하나님의 상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구제는 선행임으로 구제만 하나가 아니라, 여러분의 은사, 재능, 봉사 등 모든 것이 선행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 재능, 봉사 등 또한 은밀히 행할 때 은밀히 보시고,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금식을 은밀히 하라
예수님은 금식도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의 금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슬픈 기색을 보이고, 얼굴을 흉하게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위로를 받습니다.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16). 그러나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이 씻으면, 사람들에게는 금식하는 자로 보이지 않지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였습니다(17).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보게 하는 눈을 뜨게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금식할 때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는데요. 금식하면 영혼이 맑아집니다.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묻자,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막2:18-20). 신랑은 예수님을 비유합니다. 신랑이 있을 동안이란 당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때는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육체로 함께하시지 못하지만, 보내 주신 성령을 통해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주님의 증인으로 주님을 전파하고, 주님이 함께 하심을 잊지 않도록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용할 때 우리는 그 무엇보다 주님을 빼앗기지 않게 주님이 떠나지 않게 주님의 버림을 받지 않는 자가 되도록 금식해야 합니다. 금식과 같은 절박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은밀한 금식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이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58:6). 은밀한 기도로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자는 “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14-15). 은밀히 금식하고도 금식과 같은 절박한 신앙을 가지고도, 사람과 풀지 못하면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심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풀어지는 것이 은밀한 기도이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님이 항상 거하고 일하고 이끄심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은밀한 기도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은밀히 하라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 같이 의로운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신다며, 자랑하듯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바로 외식으로 기도하는 자입니다(5.참고/눅18:11). 그들은 사람들에게 거룩하다고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이미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 같이 성전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통회 자복 회개가, 은밀히 기도하는 자요(6.참고/눅18:13). 그 기도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갓난아이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살아 있는 것은 갓난아기에게 필요한 것을 엄마가 다 알고, 아이가 구하지 않아도 때를 맞추어 아이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어머니도 이렇거늘, 어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구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모르신다는 전제하에서 기도하였음으로 중언부언하기 마련이었고, 아무리 중언부언해도 의심의 토대 위에서 드려지는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과 무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7). 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중언부언 같이 말일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는 것이 아니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기도 이것이 은밀한 기도이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8).
그 은밀한 기도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님의기도입니다. 주님의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9). 원문의 순서로는 ‘아버지’가 앞에 나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제자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다가온 것은 박해와 가난과 굶주림이었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원형극장에서 사자 밥으로 던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기도를 드리며, 하늘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는 감동적인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니며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했습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그 핍박과 고난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실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진 핍박 속에 살던 사도 바울이, 당신의 죽음을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때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마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갖는 의미를 생각할수록 온몸이 전율하는 것과 같은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아버지의 재산을 절반이나 탕진한 탕자가 다시 만난 아버지에게 던진 첫마디가 ‘아버지여’였습니다(눅15:21). 그 다음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버지란 호칭 앞에서 아버지를 버리고 가출했던 아들의 존재가 회복되었고, 단절되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란 호칭이 갖는 위력이요 감동입니다. 우리가 주님의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마다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은밀한 기도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만 불러도, 내 안에 계시고 안아주시고 세워주시고 이기게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밀한 기도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은밀히 구제, 은사, 재능, 봉사 등을 행할 때,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와 같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은밀한 금식, 주님은 제자들과 지금은 함께 있지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함께하지 못할 때는 금식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증인이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빼앗기지 않게 금식하는 것, 금식과 같은 절박함을 갖는 자에게 주님이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삶이 되도록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은밀한 기도, 바리새인은 자기가 같이 의로운 자만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였지만, 주님은 세리 같이 통회 자복 회개의 기도, 증언부언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기도,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만 불러도, 감격에 사로잡히는 기도, 이 은밀한 기도하는 자에게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안아주시고 세워주시고 이기게 하도록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이 은밀은 하나님 임재를 믿는 것입니다. 구제와 금식과 기도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졌기에 하나님의 알아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네 번째 말씀 구제, 금식, 기도 이 세 가지 영성은 마음에 임재를 갖는 것입니다.
보물: 마음에 주인을 모셔라
예수님은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9-20). 여기서 보물은 문자적으로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예수님은 보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에게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필요합니까? 그럴리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바라보는 보물이 금은보화, 물질, 경제라는 것입니다. 돈이 된다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 자기가 보물 같이 여기는 금은보화와 물질과 경제를 땅에 쌓아두는 자는 마음에 땅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하신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이 부자는 원래 재산을 많이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려받은 많은 전답에 곡식들이 영글고 영글어서 해마다 추수가 늘어나는 것입니다(눅12:16).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습니까? 심중에 생각을 했습니다(눅12:17). 부자에다가 막히는 것 없이 해마다 소출이 늘고, 부에 부를 더하자, 소문이 자자해지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낸 부자인가 봐” 소리까지 들으며, 부러움을 받자,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는 어떤 생각에 도달하였습니까? 먼저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짖자는 것입니다. 나중에 소출이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하니 더 크게 지어서 쌓아 놓고 쌓아 놓고 쌓아 놓고 보자는 것입니다(눅12:8). 그리고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평안히 먹고 살고 즐기자는 것입니다(눅12:19). 부자의 생각은 한마디로 “쌓고 쌓고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것입니다.
이 부자의 생각은 본문에 보물을 땅에 쌓는 자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예수 안 믿는 대부분 사람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 다니지만, 아직 믿음이 여리거나, 신앙생활의 영적 깊이를 모르는 성도들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자는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자며, 생명의 주인이 자기인줄 생각했습니다(눅12:19). 그러나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눅12:20).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란’ 본문의 보물을 땅에 쌓는 자입니다(참고/눅12:21).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밤이라도 내 영혼이 갈 곳은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하늘에 쌓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는 제대로 쓰지 않으면서, 하늘에 쌓는 자에 대하여 주님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라고 하셨습니다(계2:9). 그러나 땅헤 쌓는 자는 하나님께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24). 재물은 단지 돈이 아닙니다. 맘몬니즘입니다 신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감사예물, 주일헌금 등 물질을 뛰어 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어렵습니다.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물질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고 하셨습니다(24). 우리의 주인은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물질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물질이 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이 여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다섯 번째 말씀 보물은 마음에 주인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물질을 중히 여겨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부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로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게 됩니다(22). 그러나 눈이 나쁘면 어두울 수 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이 어두우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의 어둠을 더하게 됩니다(23). 마음에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주인이면 하나님이 보일 수 없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주인이면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은보화, 물질 경제인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도 여러분의 금은보화, 물질, 경제인 보물을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먼저:마음에 신뢰를 가져라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 ‘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9)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그러므로 염려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정을 얼마나 잘 알고 계시는지,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것이지만, 각도를 달리할 때 우리의 염려까지도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떤 피조물보다 우리를 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공주의 새도 먹이시고 길쌈하지 않아도 백합화를 자라게 하셔서 솔로몬의 영광보다 앎답게 하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것입니다(26-30).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너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는 것입니다(참고/요일4:9).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구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이 하는 것이요. 너희가 믿는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는 것입니다(25,31-3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먼저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28:12)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신 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여섯 번째 말씀 먼저는 신뢰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더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것은 주어가 ‘내일’입니다(34). ‘내일이 되면 너희에게 내일을 주신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걱정하고 책임져 주실 터인데, 왜 피조물인 네가 걱정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4). 괴로움이 없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괴로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있어야 우리가 세상의 유혹을 끊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연약함을 내가 확인할 때에만 그분의 강함을 더 신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괴로움이 영원히 존속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날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괴로움을 주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로 끝입니다. 그 다음 날은 내일을 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마음에 신뢰를 가지는 것입니다.
결론
산상수훈 네 번째 말씀 영성은 마음에 임재를 가지는 것입니다. 영성 1. 구제, 금식, 기도의 영성은 마음에 임재를 갖는 것입니다. 영성 1, 구제를 은밀하게 하라. 구제, 은사, 재능, 봉사 등 선행을 은밀히 행할 때, 죽었던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와 같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성 2, 금식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금식하는 영혼을 맑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빼앗기지 않게 금식해야 합니다. 금식과 같은 절박함을 갖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영성 3, 기도를 은밀하게 하라. 바리새인은 자기가 같이 의로운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였지만, 주님은 세리 같이 통회 자복 회개의 기도, 중언부언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기도,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만 불러도 온몸이 감격에 사로잡히는 기도, 이 은밀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주시는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안아주시고, 세워주시고, 이기게 하심을 축복합니다.
산상수훈 다섯 번째 말씀 보물은 마음에 주인을 모시는 것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신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땅에 쌓다가 좀, 동록, 도둑 같은 사고 재난 질병으로 지출되지 않고, 성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수입으로 쌓여야 합니다. 눈이 어두우면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주인입니다. 그러나 눈이 밝으면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도 여러분의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다스려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산상수훈 여섯 번째 말씀 먼저는 염려를 버리고 마음에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신 것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영성은 마음에 임재를 갖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영성 1. 구제, 은사, 재능, 봉사 등 선행을 은밀히 행할 때, 죽었던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와 같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게 하옵소서.
영성 2. 금식을 은밀히 행할 때, 영혼이 맑아집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빼앗기지 않게 금식하게 하옵소서. 금식과 같은 절박함을 갖게 하옵소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영성 3. 은밀한 기도. 자기 같이 의로운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 같이 통회 자복 회개의 기도, 중언부언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기도,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만 불러도 온 몸이 감격에 사로잡히는 기도, 이렇게 은밀한 기도를 드리게 하옵소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주시는,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안아주시고, 세워주시고, 이기게 하심을 믿게 하옵소서.
보물은 마음에 주인을 모시는 것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신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땅에 쌓다가 좀, 동록, 도둑 같은 사고 재난 질병으로 지출되지 않고, 성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수입으로 쌓이게 하옵소서. 눈을 밝히사 하나님이 다스는 보물이 되게 하옵소서.
먼저는 마음에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 염려를 버려버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게 되옵소서.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신 것을 내리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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