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천국 문으로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7:6 2024.11.03. 主日禮拜
“비판하지 말라(눅6:37-38,41-42)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눅11:9-13)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좁은 문(눅13:24)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눅6:43-44,47-49;13:25-27)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무리들이 가르치심에 놀라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1-29)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열매:마음에 영혼을 품으라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16-20.참고/눅6:43-44,47-49;13:25-27)
산상수훈 일곱 번째 말씀은 열매입니다. ‘열매’Fruit에 맺는 과실수果實樹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인데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유익하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16). 이스라엘은 땅도 척박하고 석회질이 많아 지하수를 바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 식수로 사용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1년에 두 번 열매를 맺는데 다른 과목果木이 많지 않은 이스라엘 땅에서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서민들이 쉽게 섭취할 수 있는 과일이자 식량입니다(참고/민13:23). 대조적으로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등장합니다(16). ‘가시나무’Thorn,האטד,하-아타드는 키가 1m에서 크게는 3m까지 자랍니다. 이 가지에서 나는 길이 1-2cm 정도의 짧은 가시들은 바늘처럼 예리하고 단단합니다. ‘엉겅퀴’Thistle,חוחן הקנרס,호한 하킨레스는 국화과에 속하기에 국화 모습과 흡사합니다. 다년생인데요. 키가 1.5-2.5m까지 곧게 자랍니다. 경작과 곡물이 자라는데 방해를 합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유해식물有害植物이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유실수有實樹입니다. 영적으로는 나쁨과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그러나 누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인지, 나쁜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17).
예수님은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20)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열매를 맺고 사는 가를 보면, 그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에 배경에 대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셨습니다(15). ‘거짓 선지자’가 ‘양의 옷을 입고’, 선한선지자로 위장을 해서, 결국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나무 아름다운 열매와 못된 나무 나쁜 열매를 구분하는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노략’擄掠,Carry Off입니다(참고/삿5:30;17:3). 사기꾼이 외모가 더 말끔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야 사기를 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그와 같습니다. 제 것이 아닌데, 남의 것을 제 것으로 갈취하는 행위입니다. ‘노략’의 원조는 마귀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나니’라는 것은 노략을 뜻합니다(벧전5:8.). 거짓선지자 못된 나무는 그 아비 마귀와 같이 노략이 목적입니다(요8:44). 즉 처음에는 선한선지자 좋은 나무로 좋은 것처럼, 가장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1-23.참고/눅6:43-44,47-49;13:25-27)
거짓선지자도 ‘주여 주여’ 예수 이름을 불렀지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21). ‘주여 주여’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 ‘그때’에 마지막 때에 예수님은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22-23).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법’을 했기 때문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이름으로 수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했지만, 양들을 노략해서 자기 것으로 강탈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양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둑이요,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삯군입니다(요10:10-13). 그러면 누가 선한선지자입니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1).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40).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아들을 믿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어야 천국에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선한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요10:11). 예수를 믿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였습니다(갈3:19). 선한선지자는 ‘해산’입니다. 거짓선지자는 빼앗는 노략이지만, 선한선지자는 해산입니다. 새생명을 잉태하고 태중에서 모든 것을 아이에게 주고 가장 큰 기쁨인 출산을 얻는 것입니다. 영적인 해산입니다. 한 영혼이 예수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정성을 다해야 합니까? 좋은 나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선한 선지자입니다.
거짓선지자는 다른 생명을 해치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못된나무이지만, 선한선지자는 다른 생명을 살리는 포도와 무화과를 내는 좋은나무입니다. 거짓선지자는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등장한 것입니다. 한국교회 140년 역사 가운데도 문선명, 박태선, 안상홍, 장길자, 이만희 등 수많은 노략하는 거짓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못된나무도 교회 안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편안하게 예배할 때, 오늘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리고, 희생, 헌신, 섬김, 봉사, 찬양, 애찬, 차량으로 수고한 분들에게 마음으로라도, 감사하는 것이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나는 애씀 없이 다른 분의 노고를 누리는 것은, 어쩌면 해를 가하지 않는 노략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희생하시는 분들은 결코 자신의 노력을 다른 이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할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희생으로 다른 성도가 유익을 얻는 것을 보면 기뻐할 것입니다. 한 영혼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희생은 결국 내가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선한선지자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봉사 없이 타인의 섬김만을 받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섬김을 받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냥 대접을 받다가 받기만 하고, 내어 줄줄 모로는 못된 나무가 될까하는 것이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도 섬길 수 있는 것이 성숙해가는 성도의 모습이고, 그것이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자신은 주지 못하고 받기만 하다가는 자칫 있지 말아야 할 곳인 거짓선지자들이 있는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 선한선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모두 그런 은혜안에 있는 줄 압니다.
좋은 나무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좋은 것이고, 못된 나무로 나쁜 열매를 맺으면 유감 정도의 사안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에서 ‘불’이 어디인지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19). 그것은 영멸입니다.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지옥이라니 말입니다. 이것은 열매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히6:8.참고/눅13:6-9). 거짓선지자의 마지막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진다고 하였습니다(계19:20). 주님의 양을 해치는 자의 최후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못된나무 나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쁜 열매와 같은 ‘가라지’와 ‘쭉정이’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3:12,13:30). 나쁜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으면 거지선지자가 가는 똑같은 지옥 형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는 사람에게는 귀한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매는 마음에 영혼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첫 번째 열매는 영혼입니다. 영혼의 열매만큼 귀한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못된 나무 거짓 선지자는 양을 해치고 노략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나무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자입니다. 선한선지자로 영혼을 품고 전도를 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 바로 영적 해산을 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일곱 번째 가르침 열매는 마음에 영혼을 품는 것입니다.
간청:마음에 선의를 가져라
산상수훈 여덟 번째 말씀은 간청입니다.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8)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반복은 간청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각 각 다른 것이 아니라, 간청의 중요성을 각도와 강조를 달리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간청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후, “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10-11.참고/눅7:9-13).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간청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행 본문에 간청의 또 다른 비유를 해주셨습니다(눅11:5-8). 멀리 사는 벗이 여행 중에 예고 없이 그것도 한밤중에 찾아왔습니다(눅11:5).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이 풍습 가운데 비슷한 것들이 있는데요. 그중의 하나가 손님 대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단 손님이 찾아오면, 자리를 내어드리고, 다과를 대접하지 않습니까? 요즘이야 외식도 자주 하고, 외식하기도 쉽지만, 예전에는 손수 쌀을 씻어 안치고, 급히 장을 보아서, 정성껏 찬을 만들어 대접했지요. 이스라엘도 그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먼 길에서 여행 중 찾아온 벗에게 음식으로 줄 떡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한동네에 사는 절친 집에 찾아가, 잠든 절친을 불러 깨우고는 ‘떡 세 덩이만 꾸어주게’라며 사정을 하는 것입니다(눅11:5-6). 그러나 이 절친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며 단번에 거절을 합니다(눅11:7). 이 말을 들으면 체면을 무릅쓰고 찾아온 친구에게 너무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만, 이렇게 단호히 거절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문은 목재와 철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천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천막을 걷어 올려서 지붕위에 올리고는 내려지지 않도록 돌로 궤여 놓습니다. 그리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를 들기 전 지붕위에 올려져있는 돌덩어리들을 치우고, 천막을 내린 다음 쉽게 열려지지 않도록 돌덩어리들로 눌러놓습니다. 또 방 하나에 모든 식구가 함께 잠을 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보니 식구가 많은 집은 가족들이 서로 어깨가 끼일 정도로 붙어 잠을 자야 합니다. 지금 본문은 이런 상황입니다. 그러니 한 밤중엔 밖에서 누가 찾아오면 여간 번잡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아빠가 일어나면 아이들까지 온 식구가 깨어나야 하고, 천막으로 닫혀 있는 문을 열기 위해서는 눌려 있는 돌덩어리들을 치워야 하고, 천막을 둘둘 말아 지붕 위로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지금 떡 세 덩이를 꾸기 위해 왔는데요. 한 사람이면 한 덩어리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한 덩이도 아니고 두 덩이도 아니고, 세 덩이를 꾸러 온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같이 빵을 부풀릴 때, 사용하는 이스트 효소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루 전에 떡을 세 덩이 정도 만들어 묵혀 둡니다. 밑 떡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하루를 지나면서 발효가 됩니다. 그러면 다음날 아침에 밀가루 반죽을 할 때, 이 밑 떡을 떼어 넣으면, 그것이 떡을 부풀리고 부드럽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집이든 항상 떡 세 덩이 정도는 밑 떡으로 쓰려고 남겨둡니다. 그런데 본문에 절친을 찾아와 떡 세 덩이를 꾸러 왔다는 것은 그 밑 떡도 준비하지 않는 예비성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무람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한 밤중에 떡 세 덩이를 꾸러 온 이 사람을 거절한 절친은 결코 야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된다고 하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계속 달라고 하니 어떻게 합니까? 온 식구가 깨어야 하고, 천막을 말아서 지붕에 올려야하고, 내일 쓸 밑 떡을 내주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결국에는 원하는 떡 세 덩이를 주고 맙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말씀합니다(눅11:8). ‘안된다’고 ‘안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눈치가 없는지, 뻔뻔한지, 철면피인지, 조르듯 떡 세 덩이를 꾸어 달라고 하는 그 성화에 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벗됨으로 인하여 주지 아니할지라도 간청함을 인하여 요구대로 주리라’, ‘간청함’입니다.
그런데 이 간청함에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닌 벗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을 위한 강청입니다. 이것을 타인을 위한 중보로만 적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참고/딤전2:1;엡6:18). 선의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간청이 선의이기를 축복합니다. 선의는 하나님의 뜻과도 직결됩니다. 우리는 내가 간청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선의인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 이미 하룻밤을 꼬박 새우면서, 공회 종교 심문과 법정 총독의 재판을 받고 매질과 채찍으로 빈사瀕死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치고 상하고 깨어진 상태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한 말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입니다(눅23:34). 거반 죽은것과 같은 몸으로 입을 열어 말할 힘도 없는데도,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간청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인 선의를 죽음의 자리에사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산상수훈 여덟째 가르침 간청은 마음에 선의를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청을 비유 하신 후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눅11:9-10). 마음에 하나님의 뜻인 선의를 품은 자의 간청에 반드시 응답해 주실 줄 빋습니다.
비판:마음에 긍휼을 가져라
산상수훈 아홉 번째 말씀은 비판입니다.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눅6:37-38,41-42).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 비판이란 상대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의 폭력을 말합니다. 자신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재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을 금하셨다 해도 책망까지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잘못할 때면 어김없이 책망합니다. 다만 주님의 말씀은 ‘형제의’ 교회 안에서 형제끼리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하지 못해 말로 상처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3). 이것이 비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외식하는 자 대표 격인 바리새인들은 남을 비판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십일조를 자랑하기 위해 드리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공격했습니다(눅18:11-12.참고/마23:23;눅11:42).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의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마5:20). 주님은 우리에게 그들보다 더 나은 의, 곧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의, 나를 죽이고 형제를 높이는 의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의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가 아니라, 세상을 영적으로 분별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본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6) ‘거룩한 것’이라는 말은 ‘목걸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목걸이를 개에게 던지지 말라.’에서 개는 애완견이 아니라 사납고 더러운 들개를 말합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개나에게 값비산 목걸이나 귀한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Cast Pearls Before Swine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도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거룩한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말씀이요, 영생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함부로 던지듯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이름을 마구 모욕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을 영적으로 잘 분별하고 판단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전도하실 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4:23). 천국의 가치를 모르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개와 돼지처럼 물어뜯거나 짓밟고 변을 놓고 뭉개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거룩한 복음, 거룩한 말씀, 거룩한 예수의 이름을 함부로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비판받아야 할 사람이 없으며, 비판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비판을 싫어합니다. 그렇기 예수님께서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이라고 하십니다(1). 건전한 비판이라도 사람들은 비판한 사람의 표정과 음성이 자신의 마음에 박히게 됩니다. 비판을 환영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선행되어야 합니다(1-2). 황금률로 불리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와 일맥상통합니다(12).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3-5)
비판하는 사람은 이미 그 자신이 지독한 모순에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 ‘티’는 헬라어 ‘칼포스’’κἀρφος인데 아주 작은 먼지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의 눈에 충분히 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깔끔하게 살아도 농위나 밑에 어떻습니까? 씨꺼먼 모습으로 잔뜩 쌓여 있습니다. 반면에 ‘들보’는 헬라어로 ‘도콘’δοκὀς인데 집을 지을 때 쓰는 굵고 큰 목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극과 극의 비교인데 하찮은 티와 같은 것을 보는 사람은 들보와 같은 죄는 죄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죄는 죄가 아니다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 일에 자기가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이고 그 다음이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티’ 먼지가 눈에 잘 들어가듯이 눈에 잘 보이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 간음, 살인 등 누구나 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보’란 너무 커서 아예 죄로 생각되지도 않는 너무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있는 죄입니다. 교만이요, 불신앙이며, 외식이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죄요, ‘라가’ 이 돌대가리야 비하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살인까지 이를 수 있는 죄악인 것을 모르는 성경으로 말하면 바리새인과 같은 죄인 것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23).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7). 우리는 남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평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형제간의 관계는 비판하는 관계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이상 남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 아홉 번째 말씀 비판은 마음에 긍휼을 품는 것입니다.
순종:마음에 생명을 가져라
산상수훈 열 번째 말씀은 순종입니다.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4-27.참고/눅6:46-49)
우리는 그동안 산상수훈의 주옥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듣고 끝이 아니고,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24).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모든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잡으러 무리 가운데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린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시면서, 내가 저들을 멸하고자 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나무라신 후,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셨고(마25:52-54), 포박하려는 자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막14:48-49).
예수님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1:23.참고/사7:14).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탄생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잡히시기까지 성경의 예언을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도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 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요19:30). 예수님은 이렇게 친히 말씀의 순종에 본을 보이시고, 우리에게 ‘누구든지 이 말 (산상수훈)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하시며,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24-25). 순종을 반석이라고 하십니다. ‘주추’柱礎의 문자적 뜻은 기둥 밑에 괴는 돌입니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어떤 일의 바탕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석 즉 순종에서 세워져 가야 합니다. 그래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문제가 쏟아지고 사고가 나고 환난이 불어와도, 신앙이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내리는데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하였습니다(26-27). 이 사람은 순종이 아닌 방종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말을 듣고 자기에게 맞춰주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오듯이, 문제가 쏟아지고, 사고가 나고, 환난이 불어오면, 순종의 자세가 아닌 멋대로 해버리는 방종의 태도를 보입니다. 말씀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이 일찍이 놋으로 대를 만들었으니 그가 그 위에 서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대하6:13). 여기서 ‘무릎을 꿇고’는 히브리어 ‘바라크’로 복을 뜻합니다. 복은 매 순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한 주간 살아가면서 얼마만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 쳤던가를 자성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무릎 꿇고 간절히 아뢰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난 11월 1일부터 다니엘 기도회를 드리고 있는데요. 다니엘은 바벨론왕 느부갓네살 앞에서도 ‘뜻을 정하여’ 왕궁에서 주는 우상 신전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며 ‘뜻을 정’하였습니다(단1:8). 바사의 다리오가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여, 앞으로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단6:7-10). 이렇게 뜻을 정하여 하나님 말씀 순종한 다니엘이 사자굴에서도 상함받지 않고, 바벨론에 이어 바사 제국에서도 총리 중에 총로 세움 받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하는 일이 너무나도 바빠서 무릎을 꿇을 시간도 없다면, 자기 생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순종이 아닌 방종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께 더욱 무릎을 꿇게 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찬양하며, 엎드리는 것입니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13-14.참고/눅13:24).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선 좁은 길을 걷는 자입니다(13).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14). 좁은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하셨습니다(14). 세상의 대중이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의 택자가 가는 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13). 좁은 문은 생명이고 넓은 문은 멸망입니다. 세상의 대중이 찾는 넓은 문이 아니라, 주님의 택자 앞에 놓인 좁은 문으로 걸어가려면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넓은 문의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왜 너만 어려운 길을 가느냐며 본능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본때 나게 살아봐야 할 것 아니냐는 충동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의 유혹과 본능과 충동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리면 말씀의 순종이 마음을 덮고, 좁은 문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산상수훈 열 번째 말씀 순종은 마음에 생명을 갖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은 우리를 좁은 문으로 이끌고, 생명, 구원, 영생에 안착하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방종은 넓은 문으로 이끌고, 멸망, 음부, 영멸에 떨어지게 합니다. 모든 것을 이루고 가지고 세워도 종국이 멸망이면 안타깝고 불쌍하고 비참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종국이 생명, 구원, 영생이면 가장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첫 마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심령에 새겨야 합니다(3). 천국은 생명, 구원, 영생을 가진 자가 입성하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천국이 가장 큰 복입니다. 말씀의 순종은 마지막까지 간질해야 할 생명을 잃지 않게 합니다. 생명, 구원, 영생을 가진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28-29). 주님의 말씀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의 열 번째 말씀, 순종은 마음에 생명을 갖는 것입니다.
정리
열매:마음에 영혼을 가져라
산상수훈 일곱 번째 말씀은 열매입니다. 이스라엘은 부족한 식수를 포도나무의 포도주로 많지 않은 과목에서 무화과나무는 요긴한 식량으로 대체하는 유식수입니다(16.참고/민13:23). 그러나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경작과 곡물이 자라는 것을 어렵게하는 유해식물입니다(16). 영적으로는 나쁨과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그러나 누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인지, 나쁜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17).
예수님은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16,20). 어떤 열매를 맺고 사는 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매의 배경에 대해 ‘거짓 선지자’가 ‘양의 옷을 입고’, 선한선지자로 위장을 해서, ‘노략질 하는 이리’처럼 본색을 드러낸다고 하였습니다(15).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와 나쁜 열매를 구분하는 단서가 ‘노략’擄掠,Carry Off입니다(참고/삿5:30;17:3). 제 것이 아닌데, 남의 것을 제 것으로 갈취하는 행위입니다. 노략의 원조는 마귀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는 것은 노략을 뜻합니다(벧전5:8.). 못된나무는 그 아비 마귀와 같이 노략이 목적입니다(요8:44). 처음에는 좋은나무로 선을 가장을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거짓선지자가 ‘주여 주여’하였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선지자 노릇 하며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 ‘그때’, 마지막 때 예수님은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하셨습니다(21-23). ‘불법’을 행했기 때문입니다(23). 이들의 목적은 노략으로 양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둑이요,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삯군입니다(요10:10-13).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1;요6:40.참고/요10:11). 이 둘은 별개가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선한선지자는 예수를 믿게 하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갈3:19). 거짓선지자는 빼앗는 노략이지만, 선한선지자는 해산입니다. 새생명을 잉태하고 태중에서 모든 것을 아이에게 주고 가장 큰 기쁨인 출산을 얻는 것입니다. 영적인 해산입니다. 한 영혼이 예수 믿고 영생을 얻고 천국 가도록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정성을 다해야 합니까? 이것이 선한 선지자입니다.
거짓선지자는 다른 생명을 해치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못된나무이지만, 선한선지자는 다른 생명을 살리는 포도와 무화과를 내는 좋은나무입니다. 거짓선지자는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등장했습니다. 문선명, 박태선, 안상홍, 장길자, 이만희 등 수많은 노략하는 거짓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못된나무도 교회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마냥 대접만 받고, 내어 줄줄 모로는 못된 나무가 될까하는 것이 염려스럽습니다. 자칫 있지 말아야 할 곳인 거짓선지자들이 있는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 선한선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에서, 희생하시는 분들은 결코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할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희생으로 다른 성도가 유익을 얻는 것을 보면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희생은 결국 내가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선한선지자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19) ‘불’은 열명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지옥이라니 너무 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6:8.참고/눅13:6-9). 주님의 양을 해치고 노략한 거짓선지자의 최후는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진다고 하였습니다(계19:20). 나쁜 열매와 같은 ‘가라지’와 ‘쭉정이’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셨습니다(마3:12,13:30). 거지선지자가 가는 똑같은 지옥 형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는 사람에게는 귀한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께 드릴 열매 가운데 첫 번째가 영혼입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못된 나무, 거짓선지자는 양을 해치고 노략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나무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선한선지자로 영혼을 품고 전도하고 구원받고 영생얻고 천국 가게 하는 것, 바로 영적 해산을 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일곱 번째 가르침 열매는 마음에 영혼을 품는 것입니다.
간청:마음에 선의를 가져라
산상수훈 여덟 번째 말씀은 간청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7-8) 이 반복은 간청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각 각 다른 것이 아니라, 강청의 당위성을 각도와 강조를 달리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청의 중요성 후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10-11). 간청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청의 비유로 멀리 사는 벗이 여행 중 예고 없이 한밤중에 찾아온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눅11:5).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이 풍습 가운데 비슷한 것 가운데 손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벗에게 내어 줄 떡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네 절친 집에 찾아가, 불러 깨우고는 ‘떡 세 덩이만 꾸어주게’라며 사정을 합니다(눅11:5-6). 그러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며 거절을 합니다(눅11:7). 절친이 단호히 거절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문은 목재가 아닌 천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침이면 천막을 걷어 지붕 위에 올리고 돌로 궤여 놓습니다. 그리고 잠자리를 들기 전 돌들을 치우고, 천막을 내린 다음 쉽게 열려지지 않도록 돌덩어리로 눌러놓습니다. 또 방 하나에 모든 식구가 함께 잠을 자다보니 가족들 어깨가 끼일 정도로 붙어 잠을 자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밤중에 누가 찾아와 아빠가 일어나면 온 식구가 깨어나야 하고, 천막으로 닫혀 있는 문을 열기 위해 다시 수고를 해야 합니다.
또 하나 지금 떡 세 덩이를 꾸기 위해 왔는데요. 그도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는 빵을 부풀릴 때 사용하는 이스트가 발달하지 않아 하루 전에 떡을 세 덩이 정도 만들어 묵혀 둡니다. 이 밑 떡을 다음 날 밀가루에 넣어 반죽을 하면 떡을 부풀리고 부드럽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떡 세 덩이 정도는 남겨둡니다. 그런데 절친을 찾아와 떡 세 덩이를 꾸러 왔다는 것은 그 밑 떡도 준비하지 않는 준비성이 없는 사람으로 나무람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절친이 결코 야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고, 계속 달라고 하니, 식구가 깨어야 하고, 천막을 말아서 지붕에 올려야하고, 내일 쓸 밑 떡을 내주어야 하지만, 결국 떡 세 덩이를 주고 맙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11:8). ‘간청함’입니다.
이 간청함은 벗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을 위한 강청입니다. 선의입니다. 벗의 필요에 합당한 간청입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간청이 선의이어야 함을 알게합니다. 선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간청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선의인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 밤새 심문과 매질과 채찍으로 빈사瀕死 상태였습니다. 그 상태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한 말씀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입니다(눅23:34). 거반 죽은 것과 같은 몸으로 입을 열어 말할 힘도 없는데도,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간청했습니다. ‘예수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주님은 끝까지 선의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산상수훈 여덟째 가르침 간청은 마음에 선의를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청을 비유 하신 후,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눅11:10). 마음에 하남의 뜻인 선의를 품은 자의 간청에 반드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비판:마음에 긍휼을 가져라
산상수훈 아홉 번째 말씀은 비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 비판을 금하셨다 해도 책망까지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잘못할 때면 어김없이 책망합니다. 다만 ‘형제의’ 교회 안에서, 형제끼리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하지 못해 말로 상처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3). 이것이 비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외식하는 자 대표 격인 바리새인들은 남을 비판하는 데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십일조를 자랑하기 위해 드리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공격했습니다(눅18:11-12.참고/마23:23;눅11:42).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의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주님은 우리에게 그들보다 더 나은 의, 나를 죽이고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의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가 아니라, 세상을 영적으로 분별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본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이라는 말은 ‘목걸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6). ‘목걸이를 개에게 던지지 말라.’에서 개는 애완견이 아니라 사납고 더러운 들개를 말합니다(6). 그 가치를 모르는 개나에게 값비산 목걸이나 귀한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Cast Pearls Before Swine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도 같은 의미입니다(6).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말씀, 영생의 복음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함부로 던지듯이 주어서는 안 됩니다(참고/막4:23). 천국의 가치를 모르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개와 돼지처럼 물어뜯거나 짓밟고 변을 놓고 뭉개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거룩한 복음, 거룩한 예수, 거룩한 말씀을 전할 때 분별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비판받아야 할 사람이 없으며, 비판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싫어하는 비판을 싫어합니다. 그렇기 예수님께서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이라고 하십니다(1). 비판하면 그 비판으로 비판을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2). 그러므로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않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황금률로 불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와 일맥상통합니다(12).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독한 모순에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티’는 헬라어 ‘칼포스’κἀρφος 인데 아주 작은 먼지라는 뜻입니다(3).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의 눈에 충분히 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깔끔하게 살아도 농위나 밑에 어떻습니까? 씨꺼먼 모습으로 잔뜩 쌓여 있습니다. 반면에 ‘들보’는 ‘도코스’δοκὀς로 굵고 큰 목재인 대들보를 말합니다(3). 그러므로 이 둘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극과 극입니다. 티와 같은 죄를 보는 사람은 들보와 같은 죄는 죄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죄는 죄가 아니다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 일에 자기가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이고 그 다음이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먼지가 눈에 잘 들어가듯이 눈에 잘 보이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 간음, 살인 등 누구나 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보란 너무 커서 아예 죄로 생각되지도 않는 너무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있는 죄입니다. 교만이요, 불신앙이며, 외식이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죄요, 성경으로 말하면 바리새인과 같은 죄인 것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엡4:23). 예수님께서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7). 우리는 남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평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형제간의 관계는 비판하는 관계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이상 남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 아홉 번째 말씀 비판은 마음에 긍휼을 품는 것입니다.
순종:마음에 생명을 가져라
산상수훈 열 번째 말씀은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마1:23.참고/사7:14),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잡히시기까지 성경의 예언을 이루신 분입니다(마25:52-54;막14:48-49). 십자가에서도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 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요19:30). 예수님은 이렇게 친히 말씀의 순종에 본을 보이시고, 우리에게 ‘누구든지 이 말 (산상수훈)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하시며,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24-25). 순종을 반석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반석 즉 순종에서 세워져 가야 합니다. 그래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문제가 쏟아지고 사고가 나고 환난이 불어와도,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순종이 아닌 방종한 것입니다(26).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말을 듣고 자기에게 맞춰주기를 바라는 방종의 사람입니다. 그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오듯이(26-27), 문제가 쏟아지고, 사고가 나고, 환난이 불어오면, 순종의 자세가 아닌 멋대로 해버리는 방종의 태도를 보입니다.
‘솔로몬이 일찍이 놋으로 대를 만들었으니 그 위에 서서 이스라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대하6:13). ‘무릎을 꿇고’는 히브리어 ‘바라크’로 복을 뜻합니다. 복은 매 순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한 주간 살아가면서 얼마만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 쳤던가를 자성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하는 일이 너무나도 바빠서 무릎을 꿇을 시간도 없다면, 자기 생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순종이 아닌 방종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무릎을 꿇고, 주님 말씀하시면 나아가리라 찬양하며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인도하는 문’ ‘좁은 문’으로 들어섰습니다(13-14). 좁은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14). 주님의 택자가 가는 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다(13). 세상의 대중이 찾는 넓은 문을 향해서는 안됩니다. 좁은 문은 생명이고 넓은 문은 멸망입니다. 좁은 문으로 걸어가려면,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넓은 문의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왜 너만 어려운 길을 가느냐며 본능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본때 나게 살아봐야 할 것 아니냐는 충동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길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리면 말씀의 순종이 마음을 덮고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산상수훈 열 번째 말씀 순종은 마음에 생명을 갖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은 우리를 좁은 문으로 이끌고, 생명, 구원, 영생에 안착하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루고도 넓은 문에 들어섰다면 멸망, 음부, 영멸이면 가장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종국이 생명, 구원, 영생이면 가장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첫 마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심령에 새겨야 합니다(3). 천국은 생명, 구원, 영생을 가진 자가 입성하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천국이 가장 큰 복입니다. 순종은 마음에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천국가는 생명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28-29). 주님의 말씀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산상수훈 일곱 번째 가르침 열매는 마음에 영혼을 품는 것입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못된 나무로 양을 해치고 노략하는 거짓선지자를 물리치게 하옵소서. 좋은 나무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양을 살리는 선한선지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드릴 가장 첫 번째 열매는 영혼입니다. 마음에 영혼을 품고 전도하여 구원받고 영생 얻게 하는 영적 해산을 감당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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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가르침 간청은 마음에 선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 한밤중 절친을 찾아가 떡 세 덩이를 구했습니다. 선의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날마다 몸부림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인 선의를 갖고 간청하여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약속을 받게 하옵소서.
아홉 번째 가르침 비판은 마음에 긍휼을 가지는 것입니다. 함께 거룩한 자녀된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심 같이 하여, 형제와 함께 세워가게 하옵소서.
열 번째 가르침 순종은 마음에 생명을 가지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주옥 같은 말씀에 듣고 날마다 무릎을 꿇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말씀 순종으로 넓은 문의 유혹을 이기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천국으로 이르게 하옵소서. 인생의 종국이 천국인 가장 복이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랑하고 중보하는 모든 이들도 말씀에 순종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 마음에 천국가는 생명을 가지게 하옵소서.
다니엘은 황제 앞에서도, 우상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며, ‘뜻을 정’하였고, ‘삼십일 동안에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금령’을 알고도, 집에 돌아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뜻을 정하여 하나님 말씀 순종한 다니엘은, 사자굴에서도 상함받지 않고, 바벨론에 이어 바사 제국에서도 총리 중에 총리로 세움 받았습니다.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하고 역사를 체험하는 다니엘 21일 기도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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