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사함의 권세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9:1-8 2024.11.17. 主日禮拜
“중풍병자를 고치시다(막2:1-12;눅5:17-26)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태를 부르시다(막2:13-17;눅5:27-32) 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금식 논쟁(막2:18-22;눅5:33-39)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한 관리의 딸과 예수의 옷을 만진 여자(막5:21-43;눅8:40-56) 1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시다 27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다 32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다 35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9:1-38)
죄 사함의 권세
중풍병자를 고치심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7.참고/막2:1-12;눅5:17-26).
‘예수께서 (가다라에서 두 사람을 옭아맨 군대 귀신을 쫓아내시고)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셨습니다(1.참고/막5:15;눅8:30). 여기서 ‘본 동네’Own City는 가버나움을 일컫습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 동안 가버나움은 사역의 중심지 역할을 한 도시였습니다. 예수께서 집중적으로 천국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곳입니다. 또한 12제자 가운데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가 이곳 출신입니다(마4;13-22,8;5-22,9:1-34;막1:21-34,2;1-17;눅7:1-10). 이런 점등으로 보았을 때, 가버나움은 예수님 선교 센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다시 오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2), 이 상황에 대하여, 병행 본문 누가복음에 보면, 당시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각 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였고,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였습니다(눅5:17). 그 안으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었습니다(눅5:18-19). 우리나라 지붕처럼 콘크리트로 마감하는 것과 달리 이스라엘은 천막이나 넓적한 돌로 덮기에 쉽게 들어 올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2). 중풍병자의 친구 혹은 지인들이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지붕까지 올라가 침상째 메어 내리는 수고를 했고, 주님도 그들의 믿음을 인정했다면, 병이 고침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맞지 않는 말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종교지도자인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고 하였습니다(3). 죄 사함이라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세인데, 예수님이 죄사함을 말씀하시자, 하나님을 망령되이 여겼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참고/출10:7;신5:11).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하나님이시기에 죄가 없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3:18). 그러므로 죽으셨지만 살아나셨습니다. 죄가 없는 의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말씀하신 것은, 이제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하였다며, 분노한 것입니다(눅5:17).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하셨습니다(4-5). 사람들이 눈으로 보기에는 병고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죄사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6).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사람들은 병이 인간의 죄로 인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요9:1-3). 그러므로 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사함 받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주님을 통해 고침을 받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라고 하였습니다(7-8). 예수님이 신성모독했다고 여겼던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무리는 주님의 행하신 기적을 보고,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능으로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믿지 않았지만, 무리,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 주 말씀에 예수님이 큰 광풍을 일으키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자 배에 있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마8:26) ‘놀랍게 여겨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8:27).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구원자이시고 전능자이시며 인도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점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거부했습니다.
관리의 딸을 살리심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는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께 한 관리가 (찾아)와서 절하’였습니다(18). 이 ‘관리’는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로 이었습니다(막5:22). 회당장會堂長,ruler of synagogue은 유대인들이 랍비들로부터 말씀을 배우는 회당의 책임자로 공공 예배를 주관하여 성경을 낭독하거나 기도하고, 설교할 사람을 지명하며, 회당 건물과 가구와 두루마리 성경을 관리하는 자들을 감독하였습니다(참고/눅4:16-17,20;행13:15). 당시 회당에는 10명의 회당 관리자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3명의 원로 장로들이 회당장 역할을 하면서, 7명의 회당 관리자들을 지도하였습니다(참고/막5:22;행13:15,18:8,17;고전1:14). 이렇게 회당장도 종교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다급했던지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었습니다(막5:22). 그 이유는 바로 자기 딸, 그것도 ‘외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눅8:42). 야이로는 주님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며(18), 예수님에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죽음이 왜 찾아 왔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아담의 범죄 후 모든 인간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에 따라,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창3:19).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죄 사함의 권세가 분명함을 알게 하는 것이고, 그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회당장에게 어떻게 이런 믿음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 들리셨을 때,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회당장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눅4:16-19). 예수님은 지금처럼 장절이 구분되어 있고, 종이로 한 장씩 되어 있는 성경이 아니라, 양피 등 짐승 가죽에 쓴 후, 두루마리에 둘둘 말려있는 이사야서 말씀 중, 오실 메시아가 행하실 예언을 정확히 펴셔 읽으신 것입니다(사61:1-3). 예수님이 읽으신 후,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인 회당장)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4:20-21). 바로 자신이 너희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구원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나사렛 회당장은 같은 동료인 회당장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을 것이고, 그렇다면 가버나움 회당장도 알게 되었을 것이며, 또한 예수님이 여러 동네에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를 행하신 것을 보면서, 정말 메시아가 맞는구나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아가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지금 죽은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대척 관계에 있는 종교지도자 중 하나인 회당장이었지만, 그의 믿음을 보시고, 간청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회장당 야이로의 ‘집’에 찾아가셔서, 그의 딸이 죽었다며 장례 의식을 행하고 있는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었습니다(23-24). 예수님은 비소하는 ‘무리를 내보낸 후에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25).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고 하였습니다(26.참고/막5:21-43;눅8:40-56). 예수님이 아담의 범죄이후, 온 인류에게 찾아온 죽음까지도,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곧 하나님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죄 사함의 권세를 만방에 알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 뿐 아니라,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습니다(막5:35-43,눅7:11-17),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요11:1-44)).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메시아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하였습니다(요11:47-48,53). 종교지도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하나님이심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음에도,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받는 존경을 빼앗길까 두려워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그런데 표현은 같지만, 그 의미를 달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WEA,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속한 총회의 한 교회가 2025년 10월에 WEA 총회 유치 확정을 발표했습니다. WEA의 “신앙선언”Statement of Faith 7가지 중 2번을 보면, “성부, 성자, 성령, 세 인격들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혀 잘못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과 사람의 인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고, 죄가 있거나, 인간화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취하신 신인양성神人兩性,Christology입니다. 그러나 WEA는 신인합일神人合一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중 성경을 읽고, 깨닫고, 따른 모범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교사인 것입니다. 예수님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말씀을 준행했다는 상징이지,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천지 이만희가 주장하는 것이 신인합일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임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볼 수 없다는 단성론單性論,Monophysitism과 단의론単意論,Monothelitism등 많은 기독론 이단들과 자유주의자들을 표용하는 종교다원주의의 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의의전가’ 종교개혁의 핵심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WEA가 주도한 것이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 로잔대회Lausanne Congress이고, 배교 집단인 세계교회협의회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에 종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로마 가톨릭과 종교통합을 위해 많은 대화와 모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2013년 WCC 제10차 부산총회를 기점으로 2014년 교황 방한, 10년 후인 2023년 종교다원주의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 2024년 빌리 그레이엄과 WEA 신학을 정립한 존 스토트John Stott가 창립한 로잔대회Lausanne Congress 50주년 제4차 서울-인천대회 그리고 2025년 WEA 총회까지 한국교회가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 대회들을 선도한 명망있는 신학자와 목회자들께서 그들 안으로 들어가서, 바른 성경, 신학, 신앙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산입니다. 당신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WCC, Lausanne, WEA가 총회 유치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이미 몰락한 서구교회가 더 이상 자금력이 없기에 한국교회에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앞으로 WCC WEA 로마 가톨릭 3대 배교 집단의 연합대회가 한국에서 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못된 나무 나쁜 열매, 주의 이름을 부르지만 양들을 노략하는 거짓선지자.(마7:15-23),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광명의 천사)으로 가장 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5).
이러한 시대 우리는 신앙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죄가 없으시되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대속을 이루신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죄인을 부르심
마태를 부르심
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참고/막2:13-17;눅5:27-32)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자들을 찾는데에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는 주님의 제자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9.참고/눅19:1-10).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부름을 받은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의 직업이 ‘세리’稅吏,tax collector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입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 정부는 세리에게 도급제로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일정액의 세금만 바친 후, 너머지는 세리가 멋대로 금액을 정해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도 묵인했습니다. 그렇기에 착복을 일삼던 세리는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고, 범죄자로 낙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부르셨고, 마태는 ‘일어나 (즉시) 따르니라’고 하였습니다(9). 사람들에게 범죄자로 불린 자신을 제자로 삼아주신 마태는 감사함으로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고 하였습니다(10). 예수님에 대해 나쁜 선입견과 색안경을 쓰고 보던 ‘바리새인들이 보고 (주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힐난했습니다(11). 이를 들으신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며,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구약은 인용하셨습니다(12-13.참고/호6:6). 죄 사함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얻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믿음 생활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그 의가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를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요, 교회에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믿음 생활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인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인간의 자유의지로 거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을 통해 구원을 이룬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믿음 생활의 종국이 천국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천국까지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참고/시14:1). ‘전적타락’全的墮落,Total Depravity, 인간은 죄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천국까지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외에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노력을 개입하려는 것이 WEA의 신학입니다. 성경의 구원과 상이합니다.
인간의 노력을 안정하면, 그 사람의 믿음 생활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냥 믿음 생활하다가 끝나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학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신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13.참고/호6:6).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지, 인간의 제사,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 예배는 죄사 함을 받는 성도가 감사함으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 종교지도자들이 오만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 같이 올라온 세리와 ‘서서 따로 기도하여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며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고, 자기들의 온전한 제사를 드린 자들로 스스로 의를 높였습니다(눅18:12-13). 바리새인들은 저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같지 않다는 오만함으로 가득찼습니다. 심지어는 병자들을 보면서도, 저들은 지은 죄가 크니까 저렇게 고통을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그 일면에는 나는 죄가 없으니 건강하고 무병장수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성전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하였습니다(눅18:13).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눅18:14).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경멸했던 바리새인들은 제사를 드려도 용서받지 못했지만, 자신과 같은 범죄자까지 만나주신 것에 감사한 세리와 죄인들은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13.참고/막2:13-17;눅5:27-32).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죄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아는 자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 그래도 남들보다 조금은 낫다는 의를 가진 사람들은 주님의 깊은 은혜를 받기 어렵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시몬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눅7:36,40). 그가 어떤 마음에 들었는지, ‘예수께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였고, 주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 ‘37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찾아 왔습니다(눅7:36-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기록된 것을 볼 때, 어떤 죄인 지는 알 수 없지만, 동네 사람들이 죄를 다 아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피해 은둔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서지도 못하고)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보고 마음에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눅7:38-39). 동네 사람도 다 아는 죄인을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심하다고 여긴 것입니다다.
이를 모르실 일 없는 ‘예수께서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 하나는 오백 나리온을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는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7:41-46).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에게 유대인이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풍습인 발을 씻을 물을 내주지도,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도, 입맞춤도 않았지만, 여인은 내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고, 입 맞추었다며,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식사를 대접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 많은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탕감을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느니라고 하시며,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평안히 가라’ 하셨습니다(눅7:47-48,50).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에게 너는 종교지도자라는 자만을 갖고 나에게 선심 쓰듯이 음식을 대접했지만, 죄 많은 여인은 용서를 구하는 행위로 자신의 전부를 담은 향유을 부었기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내가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에게 주님은 만나주시고 큰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예수님은 모든 죄를 사하신 자신을 만난 것을 신랑을 축하하기 위한 손님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랑을 맞이한 신부가 잔치에 참여하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해서, 의문 가진 이들이 있었는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14). 세례 요한은 결혼하지 않고, 검소와 절식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금욕주의와 예배와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는 에세네파Essenes일 것으로 추측합니다(참고/마3:1,4;눅1:80).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그와 같이 하였는데 자신들과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예수께 나아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고, 여쭈운 것입니다(14).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15). 지금은 먹고 마시고 기뻐할 때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예수님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 즉 이후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하시면서,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뻐할 때가 언제이고 슬퍼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게 하였습니다. 다음 주일 추수감사주일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 거듭난 감사, 존귀한 감사를 드리는 기쁜 날입니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분이 함께 오셔서 예배드리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이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6-17/막2:18-22;눅5:33-39).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는 구약의 율법을 상징합니다. 생베 조각, 새 포도주는 신약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대속입니다. 생명,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롬14:8). 주를 위해서라면 순교의 자리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참고/요21:18). 성경의 선교는 대속, 생명, 순교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사회 정의를 부르짖으며, 인간의 주도로 평화, 일치, 화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은, 대속, 생명, 순교가 없는 배교입니다. WEA, 로잔, WCC에 대원, 생명, 순교가 있는지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제사의 마지막 차례인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고 하였습니다(딤후4:6). 그런데도 후회도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딤후4:17). 오히려 죽음을 기뻐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딤후4:18). 순교자에게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순교의 자리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새 포도주를 담은 새 부대, 바로 복음, 십자가를 믿는 성도인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기쁜 일 감사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다음 주일 추수 감사 주일을 드려야겠습니다.
만지심
열두 해 혈루증을 앓는 여자를 고치시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그의 죽은 딸을 살리기 위해 가실 때, 한 여인이 다가왔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血漏症,Bleeding으로 앓는 여자’(20). 무려 12년 동안이나, 이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한번 하혈하면, 멈추지 않고, 출혈이 지속되는 병입니다.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중병입니다. 더욱이 율법에서는 이 병을 가진 여인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사람들과 접촉이 금지되었습니다(참고/레15:25-30). 그러함에도 이 여인은 자신의 병을 감추고, 무리 속에 끼어들어 예수님이 계신 곳을 향했습니다. 그러한 이유에 대하여,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 왔다고 하였습니다(막5:25-27). 이 여인은 지난 12년 동안 명의들을 다 찾아다녀 보았습니다. 그러나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도, 병이 낫지 않고, 깊어만 갔습니다. 이제는 갖고 있던 재산마저, 치료비로 모두 탕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가족들도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이렇게 삶을 포기하기 직전까지 다다랐을 때, 자신이 사는 동네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녀 또한 여느 사람들이 듣고 있던 것과 같이 능력의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불편한 몸이지만 채비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을 쫓아 나섰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먼 발취이지만,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잠시 갈등을 했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20). 이 여인이 고침 받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자신의 부정한 병을 알고 있었기에, 차마 예수님 정면으로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뒤편에 서게 된 것입니다. 고쳐 달라고 말도 못 하고, 예수님 뒤에 서서, 가만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21). 순간 여인은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 몸에 깨달’았습니다(막5:28).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고 하였습니다(눅8:44). 그녀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고, 그 즉시 혈루가 그치고, 치유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인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숨기고 싶은 병이 고침. 받았음에도, 그것이 주님께 누가 될까 생각을 했고, 무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여러 사람에게 밀침을 받았는데, 옷에 손을 대었다고, 아실 리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이 손을 대는 순간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아셨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막5:30). 그 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막5:32).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이 여인을 앞에서 보고 싶어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여인은 이제 무리를 피할 필요가 없는 율법의 정결 규례에도 어긋나지 않는 치유 되었음을 확인시켜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22.참고/막5:21-43;눅8:40-56). 여기에서도 주님은 치유하심을 네 믿음으로 죄 사함 얻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주님께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막5:33)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라고 하였습니다(막5:33;눅8:47). 여인이 죄 사함으로 구원받았음을 무리에게 증언하게 한 것입니다. 다니엘 기도회 슬로건과 같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간증의 주인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두 맹인을 보게 하시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가서 그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것입니다(27).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시자,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렸다고 하였습니다(28-31). 이 맹인에게도 주님은 병을 고칠 것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그러하외다 답하자, 내 믿음대로 되라 하셨습니다. 맹인들의 믿음은 말 그대로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그 병 고침은 죄 사함을 얻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맹인들은 육신의 눈만 밝아진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영혼의 눈도 밝아지게 된 것입니다.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다
32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32-34)
예수님으로부터 고침받아 맹인에서 이제 보게 된 두 사람이 ‘32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며, 놀라워했습니다(32-33).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블)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며, 이제는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모욕했습니다(34.참고/눅11:1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11:17-19).
예수님은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또 가정도 서로 싸우면 무너진다.”고 하시면서,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했다. 바리새인 너희 아들들도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데, 너희 아들들이 마찬가지로 바알세불을 힘입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너희의 아들들이 아버지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심판하는 재판관이 되어 아버지를 정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눅11:17-19). 결국 바리새인들은 앞뒤 맞지 않는 주장으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고 하셨습니다(눅11:20). 예수님은 악한 마귀를 물리침으로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간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사망이 왕 노릇’합니다(롬5:14).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귀를 물리치셨다는 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신 것입니다(히2:14). 귀신들려 말 못 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입을 열게 하신 것, 또한 사람에게 왕 노릇하는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 또한 죄 사함의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정리
죄 사함의 권세
중풍병자를 고치심. 예수님께서 가다라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배를 타시고 다시 가버나움에 오시니, 무리가 모여들었고, 그로 인해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째 침상에 메고 중풍병자로 인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자, 사람들이 지붕에 올라가 기와들 벗기고 침상째 중풍병자를 주님 앞에 달아 내리었습니다(1-2.참고/눅5:17-19).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2). 이것은 네 병이 고침받았는 말을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서기관 등 종교지도자들은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고 하였습니다(3).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세인데, 하나님을 망령되이 여겼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참고/출10:7;신5:11).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말씀하신 것은, 이제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교사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하였다며, 분노한 것입니다(눅5:17).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하시면서,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4-6). 당시는 병이 인간의 죄라고 생각했습니다(요9:1-3). 그러므로 고침을 받은 것은 죄가 사함 받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이 보는 앞에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주님을 통해 고침을 받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라고 하였습니다(7-8). 예수님이 신성모독했다고 여겼던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무리는 주님의 행하신 기적을 보고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능으로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믿지 않았지만, 무리,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믿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관리의 딸을 살리심.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는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께 한 관리가 (찾아)와서 절하’였습니다(18). 이 ‘관리’는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로 이었습니다(막5:22). 회당장은 유대인들이 랍비들로부터 말씀을 배우는 회당의 책임자로 공공 예배를 주관하여 성경을 낭독하거나 기도하고 설교할 사람을 지명하는 일등을 하는 종교지도자에 포함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다급했던지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었습니다(막5:22). 자기의 ‘외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눅8:42). 그런데 야이로는 주님께서 내 딸의 몸에 손을 얹으면 살겠나이다며(18), 예수님에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 아담 범죄 이후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참고/창3:19).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죄사함의 권세가 분명함을 알게 하는 것이고, 그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회당장은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여러 동네에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를 행하신 것을 보면서, 정말 메시아가 맞구나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참고/사61:1-3;눅4:16-21). 그렇다면 메시아가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지금 죽은 자기 딸 그것도 ‘외딸’을 살려달라고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믿음을 보시고 직접 ‘집’에 찾아가셔서, 그의 딸이 죽었다며 장례 의식을 행하고 있는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에게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었습니다(23-24). 예수님은 비소하는 ‘무리를 내보낸 후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25).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하였습니다(26.참고/막5:21-43;눅8:40-56). 예수님이 아담의 범죄로 온 인류에게 찾아온 죽음까지도,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곡 하나님이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죄 사함의 권세를 만방에 알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 뿐 아니라,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막5:35-43,눅7:11-17;요11:1-44)). 그러나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니’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하였습니다(요11:47-48,53). 종교지도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하나님이심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음에도,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받는 존경을 빼앗길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심
마태를 부르심.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자들을 찾고, 제자 삼는데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9.참고/눅19:1-10). 당시 로마 정부는 세리에게 도급제로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일정액의 세금만 바친 후, 너머지는 세리가 멋대로 금액을 정해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도 묵인했습니다. 그렇기에 착복을 일삼던 세리는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고, 범죄자로 낙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부르셨고, 마태는 감사함으로 식사를 대접했는데, 그 자리에 다른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앉았습니다(9-10). 가뜩이나 책을 잡으려던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왜 저런 자들과 잡수시느냐며 힐난했습니다(11). 에에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며,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12-13.참고/호6:6). 죄 사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사, 예배는 죄사 함받는 성도가 감사함으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 같이 올라온 세리와 ‘서서 따로 기도하여 하나님이여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며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고, 자기들의 온전한 제사를 드린 자들로 스스로 의를 높였습니다(눅18:12-13).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저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같지 않다는 오만함으로 가득찼습니다. 심지어는 병자들을 보면서도, 저들은 지은 죄가 많으니까 저렇게 고통을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그 일면에는 나는 죄가 없으니 건강하고 무병장수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성전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하였습니다(눅18:13). 주님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눅18:14). 이어 주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13.참고/막2:13-17;눅5:27-32).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죄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아는 자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 그래도 남들보다 조금은 낫다는 의를 가진 사람들은 주님의 깊은 은혜를 받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에게 유대인이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풍습인 발을 씻을 물을 내주지도, 머리에 감람유를 붓지도, 입맞춤도 하지 않았지만, 죄 많은 여인은 내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고, 입 맞추었다며 자신을 영접한 것은 식사를 대접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 많은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눅7:41-46). 많은 탕감을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느니라고 하시며,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평안히 가라’ 하셨습니다(눅7:47-48,50).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에게 너는 종교지도자로서 나에게 선심 쓰듯이 음식을 대접했지만, 죄 많은 여인은 용서를 구하는 행위로 자신의 전부를 담은 향을 부었기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내가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에게 주님은 만나주시고 큰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세례 요한이 검소와 절식, 금식을 했던 것을 따랐던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주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여쭈웠습니다(14). 이에 예수님은 혼인지에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며, 지금은 먹고 마시고 기뻐할 때라는 것입니다(15).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예수님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 즉 이후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하시면서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5). 주님은 우리에게 기뻐할 때가 언제이고 슬퍼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게 하였습니다. 다음 주일 추수감사주일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 거듭난 감사, 존귀한 감사를 드리는 기쁜 날입니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분이 함께 오셔서 예배드리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이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7/막2:18-22;눅5:33-39). 낡은 가죽 부대는 구약의 율법을 상징합니다. 새 포도주는 신약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대속입니다. 생명,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롬14:8). 주를 위해서라는 순교의 자리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참고/요21:18). 사도 바울과 같이 죽음의 순간에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순교자에게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딤후4:16-18). 이렇게 순교의 자리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새 포도주를 담은 새 부대, 바로 복음, 십자가를 믿는 성도인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보다 기쁜 일 감사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다음 주일 추수감사주일을 드려야 겠습니다.
누구든지 만나주심
열두 해 혈루증을 앓는 여자를 고치시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그의 죽은 딸을 살리기 위해 가실 때, 하혈을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출혈이 지속되는 혈루증血漏症,Bleeding을 열두 해 동안 앓는 여자가 찾아 왔습니다가자’(20). 율법에는 이 병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사람들과 접촉을 금지했습니다(참고/레15:25-30). 그러함에도 이 여인이 자신의 병을 감추고, 예수님에게 향한 것은, 지난 12년 동안 명의들을 찾아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보았지만 병은 오히려 깊어만 갔기 때문입다(막5:25-27). 이제는 재산도 탕진하고, 삶을 포기하기 직전까지 다다랐을 때,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조심스레 예수님 뒤로 다가가 고쳐달라고 말도 봇하고 겉옷을 만졌습니다(20). 자신 같은 여인이 차마 예수님 정면으로는 나아갈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21). 순간 여인은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 몸에 깨달’았습니다(막5:28;눅8:44). 치유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인은 고침받았음에도 주님께 누가 될 까 염려하여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이 손을 대는 순간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아셨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고, 그 이유는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라고 하였습니다(막5:30,32).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이 여인이 이제 사람들을 피할 필요가 없이 치유되었음을 무리에게 확인시켜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22.참고/막5:21-43;눅8:40-56). 여기에서도 주님은 치유하심을 네 믿음으로 죄사함 얻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주님께 ‘와서 엎드려’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였습니다(막5:33;눅8:47). 여인이 죄 사함과 구원받음을 무리에게 증언하게 한 것입니다. 다니엘 기도회 슬로건과 같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간증의 주인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간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두 맹인을 보게 하시다
예수님은 두 맹인에게도 병을 고칠 것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27). 그들이 그러하외다 답하자, 내 믿음대로 되라 하셨습니다(28). 맹인들의 믿음은 말 그대로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그 병 고침은 죄 사함을 얻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맹인들은 육신의 눈만 밝아진 것이 아니라(28-301).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영혼의 눈도 밝아지게 된 것입니다.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다. 예수님은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또 가정도 서로 싸우면 무너진다.”고 하시면서,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했다. 바리새인 너희 아들들도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데, 너희 아들들이 마찬가지로 바알세불을 힘입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너희의 아들들이 아버지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심판하는 재판관이 되어 아버지를 정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눅11:17-19). 결국 바리새인들은 앞뒤 맞지 않는 주장으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마귀를 물리침으로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간다는 말씀입니다(눅11:20).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습니다(히2:14.참고/롬5:14). 귀신들려 말 못 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입을 열게 하신 것 또한, 사람에게 왕 노릇하는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 역시 죄 사함의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결론: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35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하셨습니다(35). 예수께서는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자신을 따라오는 무리가 목자 잃은 양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7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37-38). ‘추수할 것은 많되’는 당연히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며 방황하는 영혼들입니다. ‘일꾼이 적으니’란 그 영혼들을 인도할 목자와 같은 심정을 가진 제자가 적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인’ 하나님께 영혼들을 ‘추수할 일꾼’ 즉 목자 이신 예수님과 같은 마음과 행함을 가질 제자를 세워주시고 보내달라는 간청을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추수할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다음 주 추수감사주일에 드릴 ‘추수’에는 영혼을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대상자 인도대상자 사역대상자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천국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영혼들이 죄사함을 얻어야 합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천국을 소유해야 합니다. 다음주일은 우리가 중보하는 모든 이들이 참예하는 추수감사주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인간의 죄로 찾아온 병을 고치시는 것은,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하나님이심을, 중풍병자의 치유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종교지도자가 같지 않고, 치유는 물론 죄 사함의 은혜를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다음 주일 그러한 감사로 추수감사주일을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죄로 찾아온 죽음, 죽은 자까지 살리심으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임을, 부인할 수 없도록하였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입지만 생각하고, 오히려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저런 자가 아닌, 믿는 자가 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다음 주일 그러한 감사로 추수감사주일을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셨기에, 죄인들과 식사도 하시고, 제자로 삼는 것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같이 죄인과 같지 않고, 죄로 병도 없다고 스스로 의를 높이는 자가 되지 않고, 세리와 같이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주님의 깊은 은혜를 받게 됨을 감사합니다, 그러한 감사로 추수감사주일을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자녀 삼아주신 감사합니다. 새 포주 복음을 담는 새 부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고백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런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리는, 다음 주일 추수감사주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자신의 병이 낫겠다는, 여인의 믿음대로 치유하시고, 사람들 앞에, 그 거룩한 역사를 간증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간증의 감사를 가득 담은, 다음 주일 추수감사주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두 시각장애인에게도, 고칠 것을 믿느냐, 물으셨고, 그러하외다 답하자, 내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고, 육신의 눈만 아니라, 구주로 영접하는 영혼의 눈도 밝아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죄 사함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 감사를 담아 다음 주일 추수감사주일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말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이 역시 죄 사함의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음을 삼차 확인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세력도 이겼는데, 그 어떤 대적이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감사를 담아 다음 주일 추수감사주일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무리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을 보시고,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과 행함을 갖고, 영혼을 추수할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 인도, 사역의 대상자들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모시게 하옵소서. 그 모든 영혼이 감사함으로 참여하는 추수감사주일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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