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오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11:28-30 2024.12.01. 主日禮拜
“1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세례 요한(눅7:18-35)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회개하지 아니하는 도시들(눅10:13-15)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눅10:21-22)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1-30)
실족하지 않는 자의 복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마10:1,6-8). 이렇게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신 이후,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1). 세례 요한은 일생을 오직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한 자입니다(마3:3;눅3:4). 세례 요한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며 자신을 한 없이 낮추었습니다(눅3:16). 예수님이 오시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며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요3:30).
이렇게 주님 앞에는 한없는 겸손한 자였지만, 변질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며, 강한 경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마3:7). 정치지도자들의 불의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의 본봉왕이었던 헤롯이 제수弟嫂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자,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였습니다. 이에 분개한 헤롯은 세례 요한을 투옥시켰습니다(마14:3;막6:17;눅3:10).
옥중에 있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2).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 합니다(3). 앞서 말씀 드린 데로 세례 요한은 일생을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드린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자, 자신은 소멸해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앞세웠습니다. 그랬던 그가 옥중에서, 내가 오실 길을 예비해 드린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가 맞는가하는 의구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불신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세례 요한이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그도 한 인간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다 각각 흠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영어의 몸이었던 세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 죽음 당할 것을 예견하고, 자신이 오실 길을 예비한 예수님이 정말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을 듣기만 들었지, 직접 볼 수는 없지 않았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답변하십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4-5). 이 말씀은 구약 인용하신 것입니다(사61:1).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시면 이와 같은 일을 하실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 일을 누가 하고 계신 거예요. 맞습니다. 예수님이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세례 요한에게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들은 세례 요한이 자신이 오실 길을 예비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증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 “7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칭찬하신 후, “13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하시며, 이제 구약시대가 마쳐지고 신약시대가 개막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7-11,13-14.참고/눅7:18-35).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은 광야야에서 외치는 자로 메시아인신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한 자이며, 이미 이사야와 말라기에 예언된 선지자이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온전히 사명을 마쳤다고 하시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고 칭찬을 아까지 않으셨습니다(마1:1-3.참고/왕상18:19-40;사40:3;말3:1,4:5-6;눅1:17,80,3:4-6).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높이시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6). 앞서 헤롯에 일로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했지 않습니까?(3) 주님이 극진히 치하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메시인가 의심하여 실족했다는 말이 아니고요. 세례 요한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옥중에서, 직접 예수님 행하신 일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잠시 나마 메시아인지 의구심을 가졌다고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분명히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었습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실족하지 않는 복’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게 해주시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는 말을 들었어도, 세례 요한이 마지막까지 주님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하고, 실족했다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예수님, 예수님 믿음, 예수님 이름, 예수님 권능에 관해서는 의심으로 실족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하신 후,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11).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는 말인데요. 이 말씀은 모든 성도가 세례 요한 보다 크다는 말이 아니라,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의 복’이라는 말씀과 연결해 볼 때,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 믿음을 의심, 실족 당하지 말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인도하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에 입성해야 함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요14:6). 그 무엇과도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것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12). ‘침노’란 ‘Force’ “폭행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 때부터 오늘까지 천국은 폭행을 당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천국을 약탈한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라면 주먹을 앞세우는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폭행이라는 강력한 물리적 행위를 상징으로 천국을 얻는 데 앞장서라는 것입니다. 앞뒤 보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같이 천국에 가는 길이라면 물러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믿음으로 실족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가장 불쌍한 자라는 역설逆說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
예수님은 실족하지 않는 자의 복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15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하셨습니다(15-17).
이 ‘세대’generation는 헬라어 ‘게네아’γενεά는 뿌리가 같은 한 족속, 동시대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라고 하셨습니다(16). 이는 유대 랍비들이 사람들을 교육할 때 흔히 사용하던 말로, 원어는 ‘호모이오소’ὅμοιος로 “무엇을 닮게 하다, 비교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랍비들의 교육 방식을 사용하여 영적인 지혜를 일상생활의 모습에 비교하여,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16)에서 ‘장터’의 헬라어 ‘아고라’Αγορά는 원래 ‘회합’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점차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는 ‘시장’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대화하는 공적인 장소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장터는 상거래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특히 바쁜 사람들의 모습보다는 무관심 속에 놓여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이에 비유하셨습니다.
말씀 속에서 ‘아이들은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16). 어떤 놀이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먼저 피리를 불어 흥겨운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피리와 춤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 로마인들도 결혼식과 같은 잔치집에서, 흥겨움을 북돋우기 위해 즐겼던 놀이입니다. 하지만 동무들은 이 놀이 제안에 응하지 않아 춤을 추지 않습니다. 반대로 슬피 울면서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동무들은 이 놀이에도 응하지 않아 가슴을 치는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철저한 외면과 무관심과 불일치를 의미합니다.
어른들의 바쁜 일과에서 방치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하나되지 못하고 모순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떤 놀이를 할지 일치되지 않고, 한 가지 놀이로 결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 모습 속에서 이 세대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이들이 제 동무에게 하듯이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해 피리를 불고 춤을 추어도 반응하지 않고, 슬픔에 대해 애곡하여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다음에 “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18-19).
세례 요한은 ‘빈들’에 서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으로 검소와 절식하며, 주의 오심을 증거하였습니다(참고/마3:4;막1:6;눅1:80;3:2). 그러나 사람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을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18). 그런데 이제는 세례 요한이 예언한 예수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매’ 사람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라고 비판하고, 예수님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기도 마다하지 않으시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며, 힐난의 화살을 쏟아부었습니다(19.참고/마9:13;막2:16-17;눅5:30-32).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외칠 때,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저렇게 광야에서 소리치는 것을 보니, 귀신들렸다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마3:2). 그러면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느니라’고 선포하실 때는 들었습니까? 이번에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들과도 먹는다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마4:17). 불신에 매여 있는 자들은 이래도 저래도 주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패악한 세대를 가리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19). 여기서 ‘행한 일’의 원문의 뜻은 ‘자녀들로’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불신으로 가득차 패악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저 많은 자녀를 통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도 빨리 그 불신의 패악을 벗고 진리,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실족하여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것을 빼앗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리 소리가 나면 춤출 줄 알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내가 보기에 못마땅해도 언짢아도 당황스러워도, 그 입에서 환희에 가득차서 주님을 만나고 동행한 간증을 하면, 우리는 손뼉을 치며, 환영을 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반대로 이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도 고단한 삶에 아파하며 눈물로 호소를 하면, 우리는 안아주고 울어주며 격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사람의 모습이 내게 보여도 실족하지 않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저 사람은 저렇게 이 사람은 이렇게 믿음을 갖는구나 이해를 하고 수용을 하고 관대하게 됩니다. 함께 울고 웃을 때 실족하지 않게 됩니다. 공동체 가족들과 함께 웃고 울 때, 실족하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볼 때, 금욕과 절식과 검소한 세례 요한의 말씀을 대할 때, 나도 청빈한 삶을 살며, 주님을 위해 드리기를 힘쓰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며,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과 먹고 마시며,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 나도 세상이 찾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기를 힘쓰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어떤 구절이라도 성경 66권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행할 때, 실족하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와 회개하는 자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20-24.참고/눅10:12-16)
이 말씀에 여러 지명이 등장하는데요. 우리가 마태복음을 1장부터 공부하면서 배웠습니다만,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은 예수님은 사역 중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갈릴리의) 고을’들이었습니다(마4:13,8:5;막1:21,2:1,9;33;눅4:23,31,7:1;요2:12,4:46,6:17). 그에 비하여 ‘두로’와 ‘시돈’은 예로부터 우상숭배로 악명 높은 곳이었고, ‘소돔’은 여러분들도 잘 아는 대로 만연된 동성애로 심판의 시금석과 같은 도시였습니다(참고/창18:20,19:4,24;왕상16:31). 하지만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복음을 듣고도, 병자와 귀신의 치유하심을 보고고, 회개할 줄 몰랐던 갈릴리의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음 세 동네들은,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오히려 그 악명 높은 두로와 시돈과 소돔보다도, 더 악했으면 악했지, 조금도 나은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 재림의 날에 누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최악의 심판을 받게 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흰보좌 심판대’ 앞에서(게20:11), 기독교 아닌 다른 종교들, 불교나 이슬람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살인이나 간음 따위의 중죄를 저질렀던 악인들이 가장 중한 벌을 받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너희’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구원의 권능, 교회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온갖 큰 복, 아무 핍박도, 박해도 없는 이 은혜의 시대, 권능, 큰 복, 은혜 이런 것들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전혀 자복할 줄은 모르는 완고하고, 교만한 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심판 날에는 무당 앞에서 잘되기를 바라던 사람보다. 십자가 복음을 듣고도, 통회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울 줄 모릅니다. 심판 날에는 세상에서 마음대로 방탕하고 살았던 악질 인생보다.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웠으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의 영혼을 두고, 애통해 볼 줄 몰랐던 사람이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울 줄 모릅니다. 심판 날에는 육백만의 유태인을 학살시킨 나치의 독재자나, 2천만의 인민을 굶주림에 몰아넣었던 북한 공산 독재자보다. 신앙생활에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저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내내 살았던 사람이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울 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항상 주님 앞에서 서기를 기도해야합니다(눅21:36).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심령이 무뎌져 자복도, 애통도, 경각도, 간절한 기도도 드리지 못하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실족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자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들이야말로 심판 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경고하고 계십니다(22-23). 그들의 교만에 대하여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하십니다(23). 세계에서 인구 비례 예배당이 가장 많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복음을 들고 전함에도, 무반응인 사람들이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복음을 듣지 못하여서,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듣지 않는 그들을 찾고, 또 찾아 전해야하는 우리의 사명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또한 몸은 교회에 나오고, 겉보기에는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자신의 심령으로 진정 애통하며, 통회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교만한 자들이 되지 않도록 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돌이켜 보며, 회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다른 성도의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멸망 받지 않는 영생을 얻은 성도, 심판받지 않는 구원을 얻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합니다(롬8:1).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결론으로 말씀합니다(롬8:39). 이렇게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완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회개의 메시지를 들을 때, 우리가 받은 구원이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긴 것임을 더욱 상기하게 됩니다(요3:16).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개를 모르면,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한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이 회개치 않고,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교만으로 ‘음부에까지 낮아’짐과 같은 종국을 맞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WEA를 홍보하는 한 교회의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강단에서 WEA는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시고 구원을 주신 ‘구원자’救援者,savior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했던 ‘구도자’求道者,seeker of truth로 사람 가운데 하나도 본다.” “로잔, WCC, 로마 가톨릭, GCF 등과 연대하는 종교다원주의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있다 하면서도, 오류를 인정하는 성경 무류(불오)를 주장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홍보 영상에는 “WEA는 유일한 구원자를 믿으며, 성경 무오를 믿으며,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슬며시 다른 종교와 사회 정의를 위해 낮은 단계의 연합을 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사실들까지 전면 부인하였습니다. 과연 그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심의 신앙이 있는 것일까? 그날이 가까이 옴을 대비하고 있는 것일까? 재림 주께서 ‘큰 성 바벨론’인 지구를 완멸하시는 이유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 배교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라는 심판을 경각하고 있는 것일까?(계18:1-2) WEA에는 최후의 심판, 종말, 재림이 없습니다. 교리적으로 말할 뿐 역사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중요성 가운데 하나는 최후의 심판 날이 가까이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3:18). 그렇다면 심판은 이미 시작 된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자는 천국이지만, 믿지 않는 자는 지옥입니다. 심판은 이렇게 현재 진행이면서, 마지막 심판 최종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그 날이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은 같은 말입니다. 재림과 종말 그리고 구원의 완성과 최종 심판도 같은 말입니다. 구원의 완성과 최종 심판은 예수님 재림 때 동시에 있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날이 가깝기에 성도들은 회개의 메시지를 듣기 싫어하거나, 피하려 하면 안 됩니다. 나는 물론이요, 내가 기도하는 모든 이들이 이 심판에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설교를 귀 담아 듣고,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종말, 심판의 날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제56회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가 10월 22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내빈을 소개하면서, “국민의 힘 한동훈 대표는 천주교 신자이고, 주호영 국회부의장은 국회불자회장입니다. 국가를 위해서는 종교를 떠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내년 국가조찬기도회에는 스님도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히 국가를 위한 발언으로로 보기에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승려도 초대하겠다는 것은 자칫 조찬기도회가 종교통합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종교 통합 다원 혼합에는 어떤 여지를 주어서도 안됩니다. 그 사회자는 신실한 분입니다. 국민일보 미션 라이프에 간증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섬기는 교회는 강남의 유명한 교입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초대형교회 원로목사님의 사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리에 섰다면, 타종교인들이 참석했다고 해도, “여러분 모두 예수님 믿고 구원받기를 원합니다.”고 복음을 전파하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그 장로님이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담임목사님도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때, 회개의 메시지를 들어야 실족하지 않게 됩니다.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으려면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5-26.참고/눅10:21-22)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예수님이 천국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시는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벳세다, 고라신, 가버나움 동네와 같이 교만한 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성경을 부정합니다.
WEA는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자부합니다.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며, 자신들을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라고 얘기하지만, 우리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경을 이성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분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세상에 나간다고 하지만, 성경 내용 중 세상도 믿을 수 있는 것이면, 교회도 맞다 해야 하고, 성경 내용 중 세상이 믿지 않는 것이면, 교회도 틀리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도 만나 주셨습니다. 또 죄 많은 한 여인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용납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 어떤 죄를 범한 분이라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고, 함께 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분이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게 죄를 죄로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WEA는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상, 무속, 미신행위라고 정죄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WEA가 성경의 진리를 진리로 성경의 죄악을 죄악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성경, 하나님 말씀과 무관한 곳입니다. 복음일 수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에는 마리아와 사람을 복자 성인으로 추대해서 숭배하는 우상 행위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WCC 개막식에는 초혼제와 같은 무속 행위가 공연됩니다. 로잔대회 2024에서 숫자 “0”의 가운데 점이 찍혀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뱀 눈으로 로잔 오리지널original 로고logo를 보면, 뱀이 자기의 꼬리를 삼키는 동그란 모양으로 사탄을 상징하는 ‘우로보로스’ουροβóρος,ouroboros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우로보르스는 양성, 생명 탄생의 원칙을 거부하고, 스스로 태어나고, 자신과 결혼하고, 혼자 임신하고, 자신을 죽인다는 시작과 끝의 윤회 사상, 불사와 무사의 영원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지요. WEA의 엠블럼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우상, 무속, 미신 행위라도 정죄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정죄함이 없는 것이지, 그리스도 예수 밖에는 정죄함을 받는 것입니다. WEA와 같이 포용과 혼합과 다원은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같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반대하고 성경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란? 예수 믿음 붙들고, 말씀을 믿고 행하고, 기도하며, 회개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경각하고, 형제 자매와 함께 기뻐고 슬퍼하는 자입니다.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2-3). ‘어린 아이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 낮은 자가 되어 전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자입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실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낮은 자가 죄어 전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28). 여러분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 실족하였나요. 실족하려 하나요,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지므로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맡아주시고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마11:29-30). 예수님 그렇게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맡기라고 하시고, 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우라고 하시나요, 멍에는 결박하는 것이고, 짐은 무거운 것인데, 왜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시나요.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주님의 주권을 말씀합니다. 진정한 쉼을 얻고 싶으면, 예수님의 주권을 모시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주님에게로 ‘오라’가 곧 주님께 맡기어라, 주님 주권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쉼은 예수님의 온전한 주권 아래 거하는 삶에서만 얻어집니다. 힘들 때 주님께 찾아와 맡긴다고 하고, 한숨 돌리면 여전히 나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다시 수고와 무거운 짐은 되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수고와 무거운 짐이 온다 해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주님이 이기게 하실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멍에와 짐을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전적으로 낮아져서,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실족하지 않고,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진정한 쉼을 얻고 싶으면, 예수님의 주권에 모셔야 합니다. 이 은혜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리
실족하지 않는 복. 세례 요한은 일생을 오직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한 자입니다(마3:3;눅3:4,16;요3:30). 헤롯에 의해 투옥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질문합니다(2-3.참고/마14:3;막6:17;눅3:10). 이것은 의구심으로 보기보다 예수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인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시며, 선지자 이사야가 예어한 메시아임을 알게 하셨습니다(4-5.참고/사61:1).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칭찬하시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6,13). 세례 요한도 잠시나마 메시아인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실족하지 않는 복’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세례 요한)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11). 이 말씀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 믿음을 의심, 실족 당하지 말고, 예수님이 인도하실 하나 아버지가 계신 천국에 입성해야 함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요14:6). 그리고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12). ‘침노’‘Force “폭행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폭행이라는 강력한 물리적 행위를 상징으로 천국을 얻는 데 앞장서라는 것입니다. 앞뒤 보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같이 천국에 가는 길이라면 물러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믿음으로 실족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가장 불쌍한 자라는 역설逆說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 예수님은 실족하지 않는 자의 복에 대하여 말씀하신 후,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며,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자,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18.참고/마3:2-4;막1:6;눅1:80;3:2).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시며, ‘먹고 마시매’ 사람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라고 비판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며, 힐난의 화살을 쏟아부었습니다(19.참고/마4:17,9:13;막2:16-17;눅5:30-32). 불신에 매여 있는 자들은 이래도 저래도 주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패악한 세대를 가리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비유하신 것입니다(15-17).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19). ‘행한 일’의 원문의 뜻은 ‘자녀들’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불신으로 가득차 패악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저 많은 자녀를 통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실족하여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것을 빼앗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리 소리가 나면 춤출 줄 알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내가 보기에 못마땅해도, 그가 환희에 가득차서 주님을 만난 간증을 하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반면 애곡하면 가슴을 쳐야 합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도 고단한 삶을 눈물로 호소를 하면, 우리는 울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사람의 모습이 내게 보여도 실족하지 않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저 사람은 저렇게 이 사람은 이렇게 믿음을 갖는구나 이해를 하고 수용을 하고 관대하게 됩니다. 공동체 가족들과 함께 웃고 울 때, 실족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볼 때, 금욕과 절식과 검소한 세례 요한의 말씀을 대할 때, 나도 청빈한 삶을 살며, 주님을 위해 드리기를 힘쓰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며,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과 먹고 마시며,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 나도 세상이 찾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기를 힘쓰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어떤 구절이라도 성경 66권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행할 때, 실족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중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었습니다(20-21.마4:13,8:5;막1:21,2:1,9;33;눅4:23,31,7:1;요2:12,4:46,6:17). 그에 비하여 ‘두로’와 ‘시돈’은 예로부터 우상숭배로 악명 높은 곳이었고, ‘소돔’은 성도덕 문란으로 심판의 시금석과 같은 도시였습니다(21.참고/창18:20,19:4,24;왕상16:31).. 하지만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복음을 듣고도, 병자와 귀신의 치유하심을 보고고, 회개할 줄 몰랐던 갈릴리의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음 세 동네들은,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오히려 그 악명 높은 두로와 시돈과 소돔보다도, 더 악했으면 악했지, 조금도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22-23).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 재림의 날과 하나님의 ‘흰보좌 심판대’ 앞에서(계20:11), 누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최악의 심판을 받게 될 것 같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습니다(22). 그 ‘너희’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구원의 권능, 교회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온갖 큰 복, 아무 핍박도, 박해도 없는 이 은혜의 시대, 권능, 큰 복, 은혜 이런 것들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전혀 자복할 줄은 모르는 완고하고, 교만한 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항상 주님 앞에서 서기를 기도해야합니다(눅21:36).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심령이 무뎌져 회개도, 애통도, 경각도, 간절한 기도도 드리지 못하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실족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자.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자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들이야말로 심판 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경고하고 계십니다(22-23). 그들의 교만에 대하여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하십니다(23). 세계에서 인구 비례 예배당이 가장 많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복음을 들고 전함에도, 무반응인 사람들이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듣지 않는 그들에게 찾고, 또 찾아 전해야하는 우리의 사명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또한 몸은 교회에 나오고, 겉보기에는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자신의 심령으로 진정 애통하며 자복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교만한 자들이 되지 않도록 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돌이켜 보며, 회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완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회개의 메시지를 들을 때, 우리가 받은 구원이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긴 것임을 더욱 상기하게 됩니다(요3:16).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회개를 모르면,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한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이 회개치 않고,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교만으로 ‘음부에까지 낮아’짐과 같은 종국을 맞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중요성 가운데 하나는 최후의 심판 날이 가까이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3:18).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은 같은 말입니다. 구원의 완성과 최종 심판은 종말, 예수님 재림 때 동시에 있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날이 가깝기에 성도들은 회개의 메시지를 듣기 싫어하거나, 피하려 하면 안 됩니다. 나는 물론이요, 내가 기도하는 모든 이들이 이 심판에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설교를 귀 담아 듣고,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종말, 심판의 날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들어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WEA를 홍보하는 한 교회의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강단에서 WEA는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시고 구원을 주신 ‘구원자’救援者,savior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했던 ‘구도자’求道者,seeker of truth로 사람 가운데 하나도 본다.” “로잔, WCC, 로마 가톨릭, GCF 등과 연대하는 종교다원주의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있다 하면서도, 오류를 인정하는 성경 무류(불오)를 주장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상에는 “WEA는 유일한 구원자를 믿으며, 성경 무오를 믿으며,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슬며시 다른 종교와 사회 정의를 위해 낮은 단계의 연합을 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사실들까지 전면 부인하였습니다. 과연 그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심의 신앙이 있는 것일까? 그날이 가까이 옴을 대비하고 있는 것일까? 재림 주께서 ‘큰 성 바벨론’인 지구를 완멸하시는 이유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 배교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라는 심판을 경각하고 있는 것일까?(계18:1-2) WEA에는 최후의 심판, 종말, 재림이 없습니다. 교리적일 뿐 역사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중요성 가운데 하나는 최후의 심판 날이 가까이 오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으려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예수님이 천국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시는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벳세다, 고라신, 가버나움 동네와 같이 교만한 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25).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성경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고 하셨습니다(25). ‘어린아이들’이란? 예수 믿음 붙들고, 말씀을 믿고 행하고, 기도하며, 회개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경각하고, 형제 자매와 함께 기뻐고 슬퍼하는 자입니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 낮은 자가 되어 전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자입니다(참고/마18:2-3). 그 사람은 당연히 실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낮은 자가 죄어 전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28). 그런데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마11:29-30). 예수님 그렇게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맡기라고 하시고, 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우라고 하시나요, 멍에는 결박하는 것이고, 짐은 무거운 것인데, 왜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시나요.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주님의 주권을 말씀합니다. 진정한 쉼을 얻고 싶으면, 예수님의 주권을 모시라는 것입니다. 힘들 때 주님께 찾아와 맡긴다고 하고, 한숨 돌리면 여전히 나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다시 수고와 무거운 짐은 되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수고와 무거운 짐이 온다 해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주님이 이기게 하실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멍에와 짐을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전적으로 낮아져서,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실족하지 않고,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진정한 쉼을 얻고 싶으면, 예수님의 주권에 모셔야 합니다. 이 은혜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세례 요한 같이 위대한 선지자도 잠시나마,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으나 그렇다고 마지막이 실족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믿음에 실족하지 않고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보기에 못마땅한 형제가 주님을 만난 간증을 할 때, 함께 기뻐하게 하옵소서. 내가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자매가 주님을 영접 하고도 슬퍼할 때, 함께 울게 하옵소서. 그래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성경이 검소를 말할 때, 나도 청빈하며 주님을 위해 드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죄인을 맞이하라 하실 때, 나도 세상이 찾지 않는 사람을 찾게 하옵소서, 성령님을 의지하여 말씀을 믿고 행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게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을 가장 많이 받았음에도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가버나움과 같이 심령이 무뎌진 자가 되지 않고, 항상 주님 앞에 서도록 깨어 기도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구원의 완성과 최종 심판이 있습니다. 그 날이 가깝기에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우리가 받은 구원이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긴 것임을 더욱 상기하여, 실족하지 않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실족하지 않고,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으려면, 주님의 멍에와 짐, 주님의 주권을 모셔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져서, 주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주권을 모시오니, 나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이기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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