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 12 이재현목사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8)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4. 12. 10. 15:34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12:8 2024.12.08. 主日禮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막2:23-28;눅6:1-5) 1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막3:1-6;눅6:6-11) 9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와 바알세불(막3:20-30;눅6:43-45;11:14-23;12:10) 22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성령의 모독 30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3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막8:11-12;눅11:24-26,29-32) 38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막3:31-35;눅8:19-21) 46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1-50)

 

 

국가와 민족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해야겠습니다. 특별히 대통령을 위해 깊은 기도를 바랍니다. 대통령 주변에 법사, 선인, 도사라는 이름으로 미신을 조장하는 자들과 주역, 사주, 팔자로 길흉화복과 운명과 미래를 점치는 점쟁이, 역술인, 명리학자들이 물러가게 하옵소서. 대통령이 무속에 휘둘려 그릇된 판단과 인식과 행동을 갖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의 미혹입니다. 대통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옵시고, 귀신의 영에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나아오게 하옵소서. 남은 임기에 하나님의 선한 통치가 있게 하옵소서. 기도바랍니다.

 

 

안식의 주인, 예수

 

“1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1-2.참고/2:23-28;6:1-5).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을 사이로 지나다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어찌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냐며,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윗의 이야기를 근거로 깨우쳐 주셨습니다(참고/삼상21: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3). ‘읽지 못했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오해를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초점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외적 모습이 아니라,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다윗의 이야기를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정작 그 사건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4).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피 중 너무 시장한 나머지, 하나님 전에 들어가서, ‘아비아달 대제사장에게 부탁하여,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고,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에게도 주었습니다(참고/24:5-9;2:26). 다윗이 먹을 것을 찾으러 간 곳은 하나님의 집, 곧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안식일에 제사장들을 위해 준비해둔 열두 개의 떡이 있었습니다(참고/40:23;24:5-9). 다윗과 일행은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된 규례를 안식일에 침범했습니다. 다윗과 일행이 안식일에 진설병을 먹은 사건이 어떤 점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에서 찾아야 합니다(8).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규례로 구속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태로움에도 손을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κύριος으로서 안식일 규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일행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배가 고팠고, 다윗은 안식일 규례가, 배고픔의 문제에는 탄력성 있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장차 왕이자, 선지자인 다윗은 율법의 해석자로 배고픔과 안식일의 관계를 해석했습니다(참고/13:22).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다윗보다 훨씬 높은 권위로 안식일을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윗 일행처럼 허기진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장을 면하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어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5).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예배와 의식 집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쉴 수 없습니다. 일을 해야만 합니다(28:9-10). 그러므로 직무상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자유치유의 날이므로, 안식일에 배고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안식의 의미에 부합합니다(“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3:4.참고/6:9).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13: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14:3)). 이미 구약에서도 이미 배고픔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안식일 규례도 유연성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모든 종을 해방하는 희년의 복음이 안식일에도 실행되고 있습니다(4:18). 안식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굶으면서, 고통 가운데 보내는 날이 아닙니다. 병행 본문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2:27). 희년의 복음이 실현되는 날이라는 관점에서 안식일은 사람을 속박하는 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날, 사람을 살리는 날입니다(참고/4:18-19,21).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안식을 누린 것이라고 변호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6). 예수님은 모세 율법이 제정한 성전법을 넘어서서 성전의 정신을 말씀하시고, 자신이 결정적인 메시아 권위를 표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보이는 구약의 성전보다도 크신 자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7.참고/참고/6:6). 성전의 제사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살리는 안식이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8). 안식일의 총 주관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 논쟁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논쟁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논쟁에 대해서는 간단히 기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언제 처음에 등장합니까? 창조의 가장 마지막 날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2:2) 하나님이 이렛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하나님이 여섯째 날까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셨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좀 다르게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2:3). 하나님의 창조 일은 일곱째 날까지 계속하시고, 창조를 마쳤다고 이해합니다. 엿새 동안 보이는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또 하나의 창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안식입니다. 엿새 동안 천지가 창조된 뒤에 우주에는 무엇이 없을까요? 바로 안식이 없었습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안식을 창조함으로 바로 우주가 완성되었다고 유대인인 해석을 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해석을 따를나도 할지라도, 천지 창조 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바로 거기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선재성先在性,pre-existence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님과 하나님과 성령님과 같이 삼위일체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도 창조하신 것입니다(1:26;1:1-3). 그래서 안식일의 시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주일날을 우리는 성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안식일인 주일은 복 받는 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충만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안식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천국과 전파하신 복음과 병자와 귀신을 물리치신 치유를 보고도,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안식에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2:27).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생명이 진정한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려움과 눈물과 고통보다 규례를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그것은 안식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궁핍을 긍휼의 마음으로 이해하셨고,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을 유대교의 전통이 막을 수 없다고 해석하셨습니다. 이것이 안식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안식의 날, 오늘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안식일 논쟁 이후, “9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9-10). 병행 본문에는 이 안식일손 마른 사람에 대하여, “6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라고 하였습니다(6:6-7). 이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을 변호한 행위에 더해서, 안식일에 금지한 병 고침을 증거로 예수님을 고발하여 종교 재판에 넘기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모르실 리 없습니다.

 

당시 유대교 전통에서 안식일에는 응급 처치만 가능했고, 실제적인 치료는 안식일이 지나야 가능했습니다. 이런 전통에서 한 손 마른 장애인은 안식일에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응급 처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치유는 안식일에도 일어나야 하고, 생명이 살아나는 것은, 안식일의 본래 의미입니다. “1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11-12). 사람을 살리는 것이 선이며, 선을 행해야 하는데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악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타인에게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장애인이 회복하는 것을 돕지 않고, 예수님을 잡아넣을 도구로 악용했습니다. 사회에서 약한 사람을 이용하는 행위 자체가 악입니다. 또한, 염탐꾼처럼 덫을 설치하고 엿보는 모습은 랍비 선생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라고 하셨니다(13). 일반적으로는 병든 손을 숨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을 보면서, 손 마른 사람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 손 마른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치유의 출발입니다. ‘그가말씀에 순종해 손을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고 하였습니다(13). 나에게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고 드러내고 싶지 않는 상처가 있을 때, 주님에게는 내어 놓기를 바랍니다. 치유의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가 아닌 경우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의 판단에는 손 마른 사람의 치유가, 안식일 법보다 우선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문제를 해결 받는 날에서, 안식일이 제외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갇히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빈궁한 인생을 풍성한 안식을 갖게하는 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사람을 살리고 회복하는 일을 내일로 미룰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의 혜택을 누리는 오늘에서 안식일이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4:21). 예수님의 치유는 모든 억압에서 자유를 얻는 복음이 실현된 사건입니다(4:18-19). 현장을 목격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분노하면서,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합니다(14).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실현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상황을 보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오해가 유발하는 자기도취적 분노는 선의의 피해자를 만드는 비극으로 귀결됩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켰으나, 이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긍휼은 반드시 희생을 동반합니다. 희생 없는 긍휼은 진정한 회복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 고통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사망과 사탄에 매인 우리에게 오늘, 지금, 여기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오셨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는 안식의 공동체입니다. 안식을 누리는 공동체입니다. 안식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이 이를 지켜보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합당함을 강조하시며,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해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자기가 오신 이유에 합당하게 그의 길을 가셨습니다.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17-21.참고/3:1-6;6:6-11.참고/42:1-3). 구약의 예언 그대로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안 미치는 날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날이 안식일입니다. 예수 이름 앞에 나오는 자에게, 주님의 일하심이 오늘도, 이후 매일 매일도, 우리 삶에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안식일인 것입니다.

 

안식의 증거, 성령

 

예수님은 안식에 과한 말씀이후, 성령의 모독 죄에 관해 말씀하셨스비다. 이 말씀을 하신 전후 맥락을 보면, 앞에서는 바리새인과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22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22-23).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에 무리가 다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며 공격했습니다(24).

 

“25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고 하셨습니다(25-29.참고/3:20-30;6:43-45;11:14-23;12:10).

 

예수님은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지면 망하고, 어느 도시나 가정도 서로 갈라지면, 버티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갈라진 것이다. 그러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내가 귀신 왕 바알세불’Beelzebul, 구약 당시 블레셋에서 섬기던 히브리어 바알-제부브(בעל זבוב), ‘바알세붑’Baal-Zebub의 헬라어 음역으로 파리의 주’(lord of flies), ‘오물의 주’, ‘귀신의 왕이란 뜻이다.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 바리새인 너희 아들들도 귀신을 쫓아낸다는데, 그들도 바알세불을 힘입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너희의 아들들이 아버지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심판하는 재판관이 되어 아버지를 정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왔다고 하시면서, 사람이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 어떻게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있느냐?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해치는 사람이다고 하신 후, 성령 모독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악령의 힘으로 돌리며, 모욕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성령 모독 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31).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다 용서를 받을 것이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2).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겠으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분명한 역사와 증거를 보고도, 지속해서 왜곡하고, 오욕하고, 거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일시적인 의심이나 실수가 아닌, 고의적이고, 완고하고, 악의적인 불신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이 땅에서 이루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구원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 모독 죄는 우리에게는 두려움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경각심을 일깨우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 모독 죄는 실수나 의심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님의 행하신 기사와 이적을 보고도, 성령님의 역사를 명백히 보면서도, 이를 비판하고 힐난하고 모욕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심지어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 성령님의 사역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기도하는 분들 모두 그러한 은혜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좋은 나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33) 당연히 우리는 좋은 나무 좋은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데 예수님에게 나타난 성령의 능력을 알고,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왜곡하고 거부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하셨습니다(34). 그자들은 나쁜 나무 나쁜 열매를 맺는 자들입니다. “35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35-37).

 

 

예수님은 대적자들에게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고 하셨습니다(10:32). 안식일에 주인이신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하는 선한 목자입니다(10:11).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성도입니다. 그러면 좋은 나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 증거가 선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4:29). 선한 말, 선을 쌓고, 우리가 증거한 선한 말로, 의롭다 함을 받는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선한 말은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으면 정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입에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시인하여야 합니다. 시인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이름이 있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을 시인하는 성도는 성령을 모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입니다(요일5:5-8.참고/3:13-17;1:9-11;3:21-22;15:26). 예수 이름이 계신 곳이 성령님이 계십니다. 선한 말, 모든 말에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드러내고,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귀신 왕 바알세불까지 물리치게 될 것입니다. 선한 말, 모든 말에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드러내고, 주님을 인정하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성령의 감화로 바리새인과 같이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고도 고의로 거부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이 나의 삶에 개입하심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선한 말, 모든 말에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드러내고, 주님을 인정하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성령의 열매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가득 맺는 좋은 나무 좋은 열매가 될 것입니다(5:22-23). 선한 말, 모든 말에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높이고, 드러내고, 인정할 때,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성령의 역사, 성령의 감화, 성령의 열매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믿는 우리의 안식의 증거입니다. 이 안식의 증거가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안식의 통로, 십자가

 

예수님과 안식일 논쟁을 벌이고, 안식일에 병을 고시자, 죽이고까지 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38).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기로 유명한 자들입니다(참고/고전1:22). 그리고 유대 랍비들은 장차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면 그가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표적을 보여 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중 몇 사람들이 예수께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이 구한 표적은 앞서 행하셨던 것들보다 능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 중 몇 사람들은 평범한 기적이 아닌 그들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는 신비한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마음 문을 열고 있었다면, 그동안 예수님의 능력 있는 가르침이나, 많은 병자를 고치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자 광풍이 잔잔케되고, 죽은 자까지 살리시는 기사와 이적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자 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표적 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기 위해 표적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모세, 기드온을 사역자로 세울 때 표적을 주셨습니다(3:1-4:17;6:11-23,6:36-40). 그러나 표적이 주어졌다고 해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엘리야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에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왕상18:18-40).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39).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40).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있었습니다(참고/1:17).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삼일 후 부활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인류 대속을 위한 표적이 될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임은 “41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41-42). 이 말씀은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의 완악을 보시면서, 니느웨가 요나의 메시를 듣고 회개하고, 솔로몬의 지혜를 통해 말씀을 받아들인 남방 여왕을 대조하면서, 교훈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요나와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주셨는데도 믿지 않고 표적만 구하기에 더욱 죄가 큰 것입니다.

 

이렇게 완악한 바리새인들에게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43-45.참고/8:11-12;11:24-26,29-32).

 

결국 바리새인과 같이 불신으로 가득찬 사람들은 어떤 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표적을 구하는 그들은 귀신 일곱이 들어가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는 말씀처럼, 더욱 흉악해질 뿐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표적의 문제가 아닙니다. 니느웨는 큰 성이었습니다(1:1). 얼마나 큰 성이었느냐면요. 성벽의 너비는 9.6m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인구가 12만 명이 넘었습니다(4:11). 그 성을 돌려면 사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3:3). 이렇게 큰 성을 자랑하는 강력한 제국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1:2). 그러나 니느웨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왕부터 모든 백성이 강력한 제국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3:5-6).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던 남방의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찾아와 지혜를 듣고, 제국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왕상10:1-12).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바리새인 같이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와 같이 메시지를, 남방 여왕 같이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메시지와 지혜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요나의 표적이 예표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자신들도 유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도 주변에서, “하나님 믿으면 돈도 많이 주신다며, 그럼 잘 살겠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 만사가 평탄하다며, 그럼 애들 다 좋은 대학 취직 결혼했겠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면 복 받는다며, 그럼 나 좀 도와줘봐!”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 표적을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22-23).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18). 세상의 표적을 구할 때, 우리는 요나의 표적, 십자가를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안식을 얻게하는 통로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심에 십자가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것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2:2).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면, 그분의 안식이 여러분에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자 계신 주님의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만큼 큰 안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안식의 통로입니다.

 

안식의 나눔, 동참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육신의 아버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들이 (모처럼) 예수께 (찾아와) 말하려고 밖에서서 기다렸습니다(46). 이를 본 한 사람이 예수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고 아뢰었습니다(47).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하시면서,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습니다(48-49). 주님은 참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들이 찾아 왔는데 이렇게 매정한 말을 하신 것은 가족을 무시해서일까요? 그러실 리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50.참고/3:31-35;8:19-21).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혈육의 가족만이 가족이 아니라, 믿음의 성도도 가족입니다. 교회는 또 하나의 가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형제 자매입니다. 이 관계를 주님은 가족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가족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도 요한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1:9). 형제는 가족을 말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성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가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동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참입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 여러분 주님의 몸인 교회를 함께 세워가기를 축복합니다. 동참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가족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2:22). 동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함께 주님의 안식을 누리는 자로서, 동참해야 합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20:35). 내가 받은 주님의 안식을 형제에게 자매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하게 됩니다. 동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 받은 안식이 무엇이고, 그것을 나누라고 하신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맏은 안식의 첫 번째는 구원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나눠야 합니다. 사랑을 받았으면 사랑을 나누고, 위로를 받았으면 위로를 나누고, 감사를 받았으면 감사를 나누고, 섬김을 받았으면 섬김을 나누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리

 

안식의 주인, 예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을 사이로 지나다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어찌 안식에 하지 못할 일을 하냐며,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윗의 이야기를 근거로 깨우쳐 주셨습니다(1-4.참고/삼상21:1-6;2:23-28;6:1-5).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피 중 너무 시장한 나머지, 하나님 전에 들어가서, ‘아비아달 대제사장에게 부탁하여,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고,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에게도 주었습니다(참고/24:5-9;2:26). 성막에는 안식일에 제사장들을 위해 준비해둔 열두 개의 떡이 있었습니다(참고/40:23;24:5-9). 다윗과 일행은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된 규례를 안식일에 침범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8).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 규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다윗은 장차 왕이자, 선지자로서, 다윗과 일행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배가 고팠고, 다윗은 안식일 규례가, 배고픔의 문제에는 탄력성 있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참고/13:22).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다윗보다 훨씬 높은 권위로 안식일을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윗 일행처럼 허기진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장을 면하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어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예배와 의식 집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쉴 수 없습니다(5.참고/28:9-10). 그러므로 직무상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자유치유의 날이므로, 안식일에 배고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안식의 의미에 부합합니다(참고/6:9,13:16,14:3). 이미 구약에서 배고픔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안식일 규례도 유연성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희년의 복음이 안식일에도 실행되고 있습니다(4:18). 안식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굶으면서, 고통 가운데 보내는 날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2:27). 안식일은 인간을 속박하는 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날, 인간을 살리는 날입니다(참고/4:18-19,21).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6). 예수님은 모세 율법이 제정한 성전법을 넘어서서 성전의 정신을 말씀하시면서, 보이는 구약의 성전보다도 크신 자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7.참고/참고/6:6). 성전의 제사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살리는 안식이 있는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는 것입니다(8). 안식일의 창조자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언제 처음 등장합니? 창조의 가장 마지막 날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날에도 무엇인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하시니라’, 안식이라는 것입니다(2:2). 우리는 여섯째 날까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셨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육일 동안 보이는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창조했다고 해석합니다. 엿새 동안 천지가 창조된 뒤에 우주에는 안식이 없었습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안식을 창조함으로 바로 우주가 완성되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렇다면 천지 창조 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바로 거기 계셨습니다(예수님의 선재성先在性,pre-existence).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과 하나님과 성령님과 같이 삼위일체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도 창조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의 시조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주일날을 우리는 성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안식일인 주일은 복 받는 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충만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안식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천국과 전파하신 복음과 병자와 귀신을 물리치신 치유를 보고도,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안식에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2:27).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생명이 진정한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규정되고 추가되는 규례와 전통은 안식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항상 해석돼야 하고 복음의 관점에서 점검받아야 합니다. 인생의 어려움과 눈물보다 규례를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그것은 안식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궁핍을 긍휼의 마음으로 이해하셨고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을 유대교의 전통이 막을 수 없다고 해석하셨습니다. 이것이 안식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의 날, 오늘.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안식일 논쟁 이후, 같은 사건이 또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오른손 마른 사람을 놓고, 안식일에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고, 만약 그렇다 말하면, 이것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로 고발할 증거를 찾고자 했습니다(9-10.참고/6:6-7). 그들의 의도를 모르실리 없는 예수님은 ‘11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11-12).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치유는 안식일에도 일어나야 하고 생명이 살리는 선이 본래 의미며, 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입니다. 타인에게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장애인을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악입니다. 또한 염탐꾼처럼 덫을 설치하고 엿보는 모습은 선생의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라 하시고 그가 손을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게 되었습니다(1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가 아닌 경우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의 판단에는 손 마른 사람의 치유가 안식일 법보다 우선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신체의 문제를 해결 받는 날에서 안식일이 제외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갇히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빈궁한 인생에게 치유로 안식을 선사하는 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생명을 살리고 회복하는 일을 내일로 미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분노하면서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합니다(14).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공동체에 실현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로막는 도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자기가 오신 이유에 합당하게 그의 길을 가셨습니다.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17-21.참고/3:1-6;6:6-11.참고/42:1-3). 구약의 예언 그대로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안 미치는 날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날이 안식일입니다. 예수 이름 앞에 나오는 자에게 주님의 일하심이 오늘도, 이후 매일 매일도 우리 삶에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안식의 증거, 성령. 성령의 모독 죄에 관해 말씀 하시 전, 바리새인과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 왕 바알세불의 힘으로 돌리며 왜곡했습니다(22-29.참고/3:20-30;6:43-45;11:14-23;12:10). 이때 주님은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다 용서를 받을 것이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며,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겠으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0-31). 이것은 성령님의 분명한 역사와 증거를 보고도 지속해서 왜곡하고 거부하는 불신앙의 태도를 말합니다. 일시적인 의심이나 실수가 아닌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패악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바리새인과 같이 악한 말을 하는 나쁜 나무 나쁜 열매가 아니라, 좋은 나무 좋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 증거가 선한 말이라고 하셨습니다(33-35.참고/4:29). 선한 말, 선을 쌓고, 우리가 증거한 선한 말로 의롭다 함을 받는고 하였습니다(37). 그렇다면 선한 말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으면 정죄.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36). 시인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이름이 있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을 시인하는 성도는 성령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성령님이 계십니다(참고/요일5:5-8.참고/3:13-17;1:9-11;3:21-22;15:26).

 

선한 말, 모든 말에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드러내고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 귀신 왕 바알세불까지 물리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 바리새인과 같이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고도 고의로 거부하는 자들이 주님이 나타나심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가득 맺는 좋은 나무 좋은 열매가 될 것입니다(5:22-23). 선한 말, 모든 말에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높이고 드러내고 인정할 때,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성령의 역사, 성령의 감화, 성령의 열매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믿는 안식의 증거입니다.

 

안식의 통로, 십자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기로 유명한 자들입니다(38.참고/고전1:22). 그리고 유대 랍비들은 장차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면 그가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표적을 보여 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마음 문을 열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예수의 능력 있는 가르침이나, 많은 기사를 보고, 예수가 메시아 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표적 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기 위해 표적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표적이 주어졌다고 해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시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있었다고 하셨습니니다(40.참고/1:17).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삼일 후 부활로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 인류 대속을 위한 표적이 될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니느웨가 요나의 메시를 듣고 회개하고, 솔로몬의 지혜를 통해 말씀을 받아들인 남방 여왕을 대조하면서, 바리새인들의 문제의 심각성은, 요나와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주셨는데도 믿지 않았기에 더욱 죄라고 하셨습니다(41-42).

 

결국 바리새인과 같이 불신으로 가득찬 사람들은 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표적을 구하는 그들은 일곱 귀신이 들어간 자와 같이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처럼, 더욱 흉악해 질 뿐입니다(43-45.참고/8:11-12;11:24-26,29-32).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표적의 문제가 아닙니다. 니느웨는 큰 성이었습니다(1:1). 성벽에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제국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1:2). 그러나 니느웨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왕부터 모든 백성이 강력한 제국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3:5-6).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던 남방의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찾아와 지혜를 듣고는 제국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왕상10:1-12).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바리새인 같이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와 같이 메시지를, 남방 여왕 같이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메시지와 지혜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요나의 표적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자신들도 유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도 주변에서, 하나님 믿으면 돈도 많이 주신다며, 그럼 잘 살겠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표적을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22-23).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18). 세상의 표적을 구할 때, 우리는 요나의 표적, 십자가를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안식을 얻게하는 통로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심에 십자가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것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2:2).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면, 그분의 안식이 여러분에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자 계신 주님의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만큼 큰 안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안식의 나눔, 동참.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육신의 아버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들이 (모처럼) 예수께 (찾아와) 말하려고 밖에서서 기다렸습니다(46). 이를 본 한 사람이 예수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고 아뢰었습니다(47).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하시면서,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습니다(48-49). 주님은 참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들이 찾아 왔는데 이렇게 매정한 말을 하신 것은 가족을 무시해서일까요? 그러실 리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50.참고/3:31-35;8:19-21).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혈육의 가족만이 가족이 아니라, 믿음의 성도도 가족입니다. 교회는 또 하나의 가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형제 자매입니다. 이 관계를 주님은 가족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가족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도 요한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1:9). 형제는 가족을 말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성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가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동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참입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 여러분 주님의 몸인 교회를 함께 세워가기를 축복합니다. 동참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가족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2:22). 동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함께 주님의 안식을 누리는 자로서, 동참해야 합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20:35). 내가 받은 주님의 안식을 형제에게 자매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하게 됩니다. 동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 받은 안식이 무엇이고, 그것을 나누라고 하신 성령님의 인도에 따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안식의 주인, 예수. 예수님을 믿을 때 참된 안식이 찾아옵니다. 안식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주일에 예수님께서 인생의 어려움과 눈물에 있는 영혼들을 회복시켜주시고, 성도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영원한 나라에서도 지금 이 세상에서도. 주님의 구원, 긍휼, 위로를 받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안식의 날, 오늘. 예수 믿는 성도에게 날마다 안실일입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안 믿치 날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날이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이 오늘도 이후 매일 매일도 우리 삶에 나타나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안식의 증거, 성령. 선한 말, 모든 말에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높이고 드러내고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성령의 역사, 성령의 감화, 성령의 열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믿는 안식의 증거가 가득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안식의 통로, 십자가. 나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게 하옵소서.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우편을 보셨던 것과 같이, 십자가를 새기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게 하옵소서. 그곳에서 주시는 안식을 얻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안식의 나눔, 동참. 내가 받은 주님의 안식을 형제에게 자매에게 나누는 동참에 참예하게 하옵소서. 이 시산 성령께서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 받은 안식이 무엇이고, 그것을 나누라고 하신 인도에 따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