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니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14:25 2024.12.25. 主日禮拜
“세례 요한의 죽음(막6:14-29;눅9:7-9) 1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3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6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8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2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오천 명을 먹이시다(막6:30-44;눅9:10-17;요6:1-14) 13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물 위로 걸으시다(막6:45-52;요6:15-21) 22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게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막6:53-56) 34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마14:1-36)
성탄의 은총이 가득한 대강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돌아오는 12월 25일은 성탄축하예배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에서부터 중보하는 모든 분들이 참예하여 이 세상에 오신 주의 은혜에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
세례 요한은 2천 년 년 전 오직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한 자입니다(마3:3;눅3:4). 세례 요한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며,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습니다(눅3:16). 예수님이 오시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며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요3:30). 이렇게 주님 앞에는 한없는 겸손한 자였지만, 변질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며, 강한 경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마3:7.참고/눅3:7). 세례 요한은 정치지도자들의 불의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3). 당시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이 제수弟嫂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자, 이를 공개적으로 책망 하였습니다(참고/마14:4;막6:18;눅3:19). 이에 분개한 헤롯은 없애고자 하였으나, 많은 사람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고 그를 추종함으로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사형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정치인들은 항상 민심 여론을 무시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례 요한을 투옥시켰습니다(5.참고/막6:17;눅3:10).
그런데 이러한 헤롯보다 세례 요한을 더욱 경멸한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가시같이 여겼습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막6:9). 헤롯의 제수였다가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는 헤롯보다 더 세례 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세례 요한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그를 없앨 생각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헤로디아에게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때는 헤롯의 생일날이었습니다. 왕의 생일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겠습니까? 헤롯이 다스리는 갈릴리 지역의 고관 대적들이 다 모였습니다. 헤롯 생일축하연에 ‘대신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을 벌였습니다(막6:21). 성대한 연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술잔이 오고 가면서 거해진 헤롯이 딸 살로메에게 춤을 출 것을 명했습니다. 헤롯의 딸이지만 실상은 동생의 딸로 조카이지요. 헤로디아가 딸을 일찍부터 춤을 배우게 했는지, 아니면 살로메가 어릴 때부터 춤에 소질이 있었는지, 전설에 따르면 이날 살로메가 춘 춤이 ‘일곱 베일의 춤’Dance of the seven veils 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오늘날 스트립 바Strip Bar에서 댄서들이 춤을 추면서 베일을 한 장씩 벗는 춤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6),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고관 대작들을 기쁘게 한지라’(막6:22), 연회에 모인 사람들이 살로메의 춤에 대단히 만족한 모양입니다. 여기 저기 사방에서 살로메를 칭찬하는 탄성이 터져 나오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헤롯은 자신과 연회 참석자들의 흥을 돋운 살로메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7.참고/막6:22). 여기서 다가 아니었습니다. 헤롯은 왕이지 않습니까? 맹세까지 하면서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고 했습니다(막6:23). 연회에 모인 자들 앞에서, 과감하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나 봅니다.
이러한 헤롯의 말을 들은 살로메는 잠시 생각하다가 엄마에게 달려갑니다. “8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8-11.참고/막6:14-29;눅9:7-9). 헤로디아는 자신을 찾아온 딸에게 미리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는 듯 주저 없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8.막6:24). 자신의 치부를 천하에 공개한 세례 요한을 원수로 여겼던 헤로디아는 그에게 앙심을 품고 죽이고자 했었는데요. 참 끔찍한 소원임에도 딸과 작을 해서 끔찍한 일을 벌인 것입니다.
“1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1-2). 세례 요한을 참수한 헤롯에게 어느 날부터 심상치 않은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능력자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 광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은 헤롯은 자신이 목을 벤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요 예수님이 유대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에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을 그 이전에 세례 요한도 하였기 때문입니다(마3:7,12:34).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2). 이에 대해 병행 본문에는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막6: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그리고 가르침과 전파가 유대 전 지역에 퍼졌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헤롯의 반응은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 났다’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저렇게 큰 능력을 행할 분이 또 나타나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가리켜 ‘저 여우’라고 하였습니다(눅13:23). 여우의 속성을 바탕으로 예수님은 헤롯 왕을 여우로 묘사한 것입니다.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불안 가운데 눈치를 보는 헤롯의 정체성을 여우에 빗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라는 말씀은 주님이 공생애를 하시면서 거처조차 없으신 삶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삶을 표현하신 것이면서, 여유로 묘사된 헤롯이 거처인 왕궁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눅9:58). 화려한 헤롯 궁을 여우 굴도 묘사하신 것이지요. 이렇게 헤롯에 대한 공격도 그 이전의 세례 요한과 같으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났나 보다. 이제 예수님이 자신에게 복수하려나 보라며 지레 겁을 먹은 것입니다.
헤롯은 자기에게 갈릴리 분봉 왕이라는 자리를 물려준 아버지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영웅의 아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마2:1). 헤롯 대왕은 2천 년 전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찾는다는 말을 듣고 크게 동요하였습니다(마2:3). 헤롯은 가뜩이나 에돔 이방 출신으로 항상 권좌에 불안이 있던 터라, 위기로 판단하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마2:16). 헤롯은 아버지 헤롯 대왕과 같이 자기의 자리에만 급급했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5). ‘완악’에 헤롯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능력이 나타났음에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그리스도로 영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을 영접하는 것보다 더 먼저인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인지를 알게 됩니다. 2천 년 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믿어진 다는 것, 이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의 복입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큰 보화 천국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의 복 가운데 천국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다른 사람의 전답田畓을 맡에 일하던 농부가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농부는 너무 몰라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밭 주인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농부는 돌아가서 집을 포함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서, 시중보다 더 많은 값을 지불하고 그 밭을 샀습니다. 이로써 농부는 보물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은행이 없던 고대 사회에서는 귀중한 보물들을 땅속에 감추어 두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전쟁과 난리가 많았던 혼란한 시기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 법은 찾는 사람이 임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밭에 보물이 있다는 것을 숨기고 밭을 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보물을 차지한 것입니다.
엄청난 보화가 있는데 감추어져 있습니다. 누가 찾는가가 문제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화를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화는 말 그대로 보물이기 때문에 어쩌다가 하나를 발견하면 큰 부자가 되고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화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썩은 풀이나 나뭇가지, 썩을 양식을 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화를 발견하셨습니까? 참된 보화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나 찾지 못합니다. 가장 귀한 보화인 ‘천국’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에게는 천국이 보화가 아닌 것입니다.
농부가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밭에 가서 일하다가, 보화를 발견한 것으로 보아야 맡습니다. 밭에서 쟁기를 잡고 밭을 갈고, 땅을 파고 일하던 농부가 보화를 발견한 것입니다. 밭을 객토하고, 씨를 뿌리고, 땀을 흘리며 일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일하는 농부에게 보화는 어느 날 갑자기 발견된 것입니다. 뜻밖에 보화를 만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일합니다. 그 목적은 살기 위해서 아이들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서 좋은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 등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고 천국을 알게 된 이후, 그 어떤 일보다 천국이 가장 귀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신체 일부를 내어 주어야 한다고 하여도, 잠시 고민은 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내 생명까지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의 자녀, 동료의 자녀, 옆집의 자녀를 위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둘도 없는 아들,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엡5:25). 천국이 어떤 곳이기에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게 하시기까지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시면서까지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4:10). 이 세상의 모든 수고를 마치고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곳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예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 다는 것은 이제 이 세상의 슬픔이 없고, 아픔도, 애통도, 죽음도 더 이상 없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겪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면서 증언한 하나님의 ‘보좌’ 그 ‘우편’에 계신 그토록 보고 싶은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계22:3-4.참고/행7:55;엡1:20). 사랑하는 주님과 우리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는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계22:1-2). 이 천국을 주시고자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보화인지를 알게 됩니다.
헤롯과 같이 완악하여서, 주님의 능력을 보고 영접하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천국이 얼마나 큰 보화인지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사고 보화를 차지한 농부와 같이 천국을 위해서라면 그 천국을 주신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라는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데 주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병이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헤롯에게 와서 세례 요한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예수(님께 모든 사실을) 아뢰’었고요(12).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었습니다(13). 자신을 위해 일생을 살았던 세례 요한의 죽음의 애도의 시간을 갖고도 싶으셨겠지만, 주님의 그 마음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예수님이 빈들에 계신 것을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고 하였습니다(13).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14),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분입니다.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막3:10), “32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막3:32-34). 예수님은 식사할 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하시고, 늦은 저녁까지 자신을 따라오는 무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영생을 얻고 치유를 받고 강건을 얻게 된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34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34-36). 무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5). 제자들은 석양이 시작되고, 아무것도 없는 빈 들에 땅거미가 드리우자, 주님에게 고치심을 중단하시고, 무리를 집으로 돌려보내 각 각 식사를 해결하게 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16). 주님의 긍휼하심은 영생을 주시고, 치유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생계까지도 세심하게 살피시는 분입니다.
‘17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17-21.참고/.막6:30-44;눅9:10-17;요6:1-14).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나눠주시니, 남자만 오천 명,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하면 2만 여 명이 베풀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남았습니다.
병행분문에는 이후, 무리는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하고,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계속해서 요구하며,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요6:15,31.참고/출16:4,15;시78:24;105:40;느9:15). 이에 “3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요6:32-36). 무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출애굽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매일 주시는 만나와 같이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실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서 양식을 주신 그것은 너희들이 참된 양식을 얻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님이 ‘생명의 떡’으로 영원히 주리지 아니하고,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리는 그 예수님이 ‘생명의 떡’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알지 못한 것이지요.
예수님의 긍휼하심은 영생을 주시고, 치유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생계까지도 세심하게 살피시는 분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있어야 할 것을 더하신다고 하셨으니. 우리의 생계를 허락하시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적인 은혜와 육적인 은혜 모든 것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도 육적인 생활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얻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일터와 건강과 환경을 주관해주시지 않으면 육적인 삶의 공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구원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요 육적인 생활도 주님이 주시는 것을 믿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교회에서 육적인 필요를 찾고 난 후 떠나거나, 육적인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분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 기적 후, 주님의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6:60).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자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며 주님을 따랐습니다(요6:67-68).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영적인 구원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요 육적인 생활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이를 알게하신 것입니다.
헤롯과 같이 완악하여서, 주님의 능력을 보고도, 영접하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해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무리에게도 주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헤롯도 무리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천국이 얼마나 큰 보화인지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사서 감추인 보화를 차지한 농부와 같이 천국을 위해서라면 그 천국을 주신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라는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데 주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합니까? 영적인 구원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요 육적인 생활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으로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물 위로 걸으시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22).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에 참된 의미를 모르는 여전히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만을 찾는 무리를 헤쳐 보내고,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서, 가버나움을 떠나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도록 하셨습니다(참고/막6:45;요6:1).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과 독대의 시간을 갖고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고, 깊은 기도 후,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었습니다(23). 제자들이 탄 ‘배(는)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 수 리’가 정확히 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어 성경에 ‘long way’로 번역한 것을 볼 때, 육지에서 이 멀리 떨어져 항해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24). 그런데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고 하였습니다(24). 이때 시간은 대략 ‘밤 사경’으로 우리 시간으로 새벽 4시경입니다. 산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신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풍랑에 어려움을 당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25).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26)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유령’으로 보고,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렀습니다(26). 제자들은 적어도 1년 이상 주님을 따라다녔음에도, 바다 위를 걸으실 것으로는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예수님께서 광풍의 배 위에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분이십니다(마8:23-27;막4:35-41;눅8:22-25). 그렇다면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은 주님에게는 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성령님과 함께 천지를 만드신 창조자이십니다(창1:26;요1:1-3).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참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으로 신성을 가지신 분입니다(요1:14,18,10:30). 그러므로 바다 위를 걸으시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신 자연을 통치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즉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27). 이때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며 간구했습니다(28). 우리가 베드로 그러면 성격이 급한 것이 흠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급한 성격이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발상을 하기도 하나 봅니다. 자신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는 베드로의 요청에 예수님은 “Come on!" ‘오라’ 단답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29). 이 명료한 말씀에 용기를 낸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게 되었습니다(29).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바다에 발을 내디디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다에 발을 내디뎠다는 자체가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주님이 계신 곳에 거의 다다랐을 때, 큰 ‘바람’이 불어 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을 갖게 되자, 몸이 바다로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30).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31-33.참고/막6:45-52;요6:15-21)
자신도 바다 위를 걷게다고 한 베드로의 용기는 결코 객기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으로 걷던 베드로에게 큰 바람이 불어 닥쳤습니다. 그 순간 자신을 걷게 한 주님을 의지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바다를 걷게하신 예수님이 바람을 몰아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미 예전에 주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광풍이 잔잔케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주님이 큰 바람을 물리치실 것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이 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가는 길에서 ‘바람’ 이 상징하는 두려움은 항상 엄습해 옵니다. 우리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내가 이대로 잘 살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잘 부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또한 두려움입니다. 직장에서 끝까지 남아 퇴직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사업이 막히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영적으로도 이 패악한 시대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대통령께서는 12·3 비상계엄이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여러 사실들을 볼 때 본인이 여러 통로를 통해 위협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권좌에 두려움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때 어떤 선택을 하고 누구를 의지하여 하는가요? 금번 사태의 막후 설계자로 노상원 씨가 지목되고 있습니다. 그는 6년 전 전역한 민간인입니다. 그런데 민간인 신분으로 국방장관과 보안사 등 주요부대, 국방부조사단, 군사경찰, HID 북파부대까지 사실상 지휘하며, 1500여 명의 병력과 장갑차와 전차를 운용하는 기갑부대를 동원 국회와 선관위 등 헌법 기관을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했습니다. 참으로 비정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반 국가적 반역을 모의하는데 한 페스트푸드점이 장소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해장 지점은 계엄 맛집, 계엄 본점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고, 내란 버거 등 출시 등 보사까지 불똥이 튀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더욱 기이한 일은 계엄을 꿰하고 햄버거 회동을 한 그 페스트 푸드점에서 1.4km 떨어진 곳에 지역에서 유명한 점집이 있는데, ㅇㅇ시 모범 무속인 보존위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중이던 한 보살이 금번 비상계엄을 주도한 노상원 씨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한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일에 무속인이 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말 해괴駭怪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께서 ‘비상계엄’을 선포한 ‘12월 3일 밤 10시 30분’을 한자로 풀면, ‘왕’王자가 세 개가 된다는 말이 나돌았었습니다. 十ニ월(王), 三일 十시(王), 三十분(王), 저는 그저 말을 잘 만드는 네티즌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속인이 점괘로 정해진 것이라면, 대통령 후보 시절 손에 왕자를 그리고 나와 논란이 되었는데요. 이러다 왕자로 시작해서 왕자로 망하는 것이 아닌지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구를 대표하는 팔공산 동화사에 전체 높이가 33m에 달하는 세계최대 석조불상인 통일약사대불이 있습니다. 45년 전 군사반란 주역 중 한 인물이 이 불상을 세우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그렇게 센 귀신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가 성공했나 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은 빌라 지하에 모신 약한 귀신이어서 쿠데타가 불발되었나 봅니다.
금번 계엄 이후, 명백하게 드러난 증거와 증인들이 있는데도, 대통령께서 저렇게 말을 바꾸시고, 본인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하실까? 이번 사태로 떨어진 별이 몇 개고, 무궁화가 몇 개고, 자리에서 쫓겨나야 할 이들이 수도 없는데 그 수하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 넘기도, 자신은 떳떳하다고 하실까? 의아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살고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일들을 볼 때, 미신에 영혼이 상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대통령께서 취임하신 이후, 기도하면서, 무엇보다도 주변에 있는 법사, 도술인, 보살, 명리학자, 역술인들을 물리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천공스승, 건진법사. 무정스님이라고 불리는 자들 모두 귀신 아닙니까? 이제도 기도해야 합니다. 대통령과 여사께서 모든 사슬에서 벗어나, 예수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어둠의 권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도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서 남은 임기 국정을 정상적으로 세우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자신이 받고 있는 위협,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무속의 힘을 빌리고자 했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을 가지게 되면 주변이 온통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로 보입니다. 악한 영의 계략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아람 왕이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이스라엘의 이러이러한 곳을 공격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사람을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어 아람 군대가 이러이러한 곳에 진을 치니 그곳을 지나가는 것을 삼가라고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전갈을 받은 이스라엘 왕은 부하들을 그곳에 보내어 엄하게 경고하도로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자, 아람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신하들을 불러, 우리가 가운데 이스라엘과 왕과 내통하는 자가 없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며, 추궁하였습니다. 그때 한 신하가 왕이시여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왕께서 침실에서 은밀히 하시는 말씀까지도 다 알아서, 일일이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줍니다라고 고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엘리사의 시종이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강한 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엘리사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 걱정하였다. 그런데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하였습니다(왕하6:16). 그러나 시종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우리를 지켜주는 군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에 엘리사가 ‘기도하여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하였습니다(왕하6:17). 하나님께서는 수 많은 천사들을 명하여 불말과 불병거를 이끌고 엘리사를 지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미신에 빠지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변에 모두 대적자로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담대함으로 얻고 대적자를 압도하는 천군천사를 보게 됩니다.
헤롯과 같이 완악하여서, 주님의 능력을 보고도, 영접하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해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무리에게도 주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헤롯도 무리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천국이 얼마나 큰 보화인지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소유를 팡라 밭을 사서, 감추인 보화를 차지한 농부와 같이 천국을 위해서라면 그 천국을 주신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라는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데 주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합니까? 영적인 구원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요 육적인 생활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으로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 자는 ‘바람’이 상징하는 두려움이 오더라도, 그 두려움을 압도하는 천군천사를 보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사탄의 영을 보면서, 사탄의 영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으로 바라보고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을 축복합니다. 성탄절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2천 년 예수님은 사망권세에 두려워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위해 오신 줄 믿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이기게하시기 위해 지금도 바다 위를 걸어서, 헌산준령을 넘어서 오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길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정리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
세례 요한 제수를 아내로 맞이한 것을 책망하자, 분개한 헤롯은 그를 투옥시켰습니다(참고/마14:3-4;막6:17-18;눅3:10,19). 그런데 헤롯보다 세례 요한을 더욱 경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헤롯의 제수였다가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입니다(막6:9). 앙심을 품던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헤롯의 생일 날이 되어 딸 살로메에게 춤을 추도록 하였습니다(6.참고/막6:21). 크게 만족한 헤롯은 이전에는 조카이었지만, 이제는 딸이 된 살로메에게 무엇이던지 구하라, 나라의 절반까지도 주리라고 했습니다(7.참고/막6:22-23). 아마도 연회에 모인 자들 앞에서, 과감하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나 봅니다. 살로메는 잠시 생각하다가 엄마에게 달려갔고, 헤로디아는 주저없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8.참고/막6:14-29;눅9:7-9).
세례 요한을 참수한 헤롯에게 어느 날부터 심상치 않은 소문이 들려왔습니다(1). 능력자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2).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 광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은 헤롯은 자신이 목을 벤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요 예수님이 유대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에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을 그 이전에 세례 요한도 하였기 때문입니다(마3:7,12:34).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났나 보다. 이제 예수님이 자신에게 복수하려나 보라며 지레 겁을 먹은 것입니다.
헤롯은 아버지 헤롯 대왕과 같이 자기의 자리에만 급급했습니다(참고/마2:1,3,16).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5). ‘완악’에 헤롯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능력이 나타났음에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그리스도로 영접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을 영접하는 것보다 더 먼저인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인지를 알게 됩니다.
가장 큰 보화 천국
다른 사람의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보화를 발견했습니다(마13:44). 농부는 돌아가서 집을 포함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서, 밭을 사고 보물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마13:44). 은행이 없던 고대 사회에서는 귀중한 보물들을 땅속에 감추어 두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유대에서는 찾는 사람이 임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밭에 보물이 있다는 것을 숨기고 밭을 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보물을 차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화를 발견하셨습니까? 참된 보화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나 찾지 못합니다. 가장 귀한 보화인 ‘천국’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에게는 천국이 보화가 아닌 것입니다. 농부가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땀을 흘리며 일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일합니다. 그 목적은 살기 위해서 아이들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서 좋은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 등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고 천국을 알게 된 이후, 그 어떤 일보다 천국이 가장 귀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신체 일부 아니 생명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친구의 자녀를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의 뜻,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엡5:25). 천국이 어떤 곳이기에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게 하시기까지 하셨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수고를 마치고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곳입니다(히4:10). 예수님이 우리의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십니다. 더 이상의 슬픔이 없고, 아픔도, 애통도 죽음도 없다는 뜻입니다(계21:4). 이 땅에서 겪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면서 증언한 하나님의 ‘보좌’ 그 ‘우편’에 계신 그토록 보고 싶은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계22:3-4.참고/행7:55;엡1:20). 사랑하는 주님과 우리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는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계22:1-2). 이 천국을 주시고자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보화인지를 알게 됩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는 것을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헤롯과 같이 완악하여서, 주님의 능력을 보고 영접하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해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보다 먼저인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천국이 얼마나 큰 보화인지 아는 자들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차지한 농부와 같이 천국을 위해서라면 그 천국을 주신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라는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데 주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병이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 애도의 시간을 갖고도 싶었지만 무리는 빈들에 계신 것을 알고 모여 들었습니다(12-13).주님은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14.참고/마9:36). 무리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었습니다(14-15). ‘제자들은 석양이 시작되고, 아무것도 없는 빈 들에 땅거미가 드리우자, 주님에게 고치심을 중단하시고, 무리를 집으로 돌려보내 각 각 식사를 해결하게 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15). 그러나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16).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나눠주시니, 남자만 오천 명,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하면 2만 여 명이 베풀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남았습니다(17-21.참고/.막6:30-44;눅9:10-17;요6:1-14). 주님의 긍휼하심은 영생을 주시고, 치유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생계까지도 세심하게 살피시는 분입니다.
이후, 무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출애굽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매일 주시는 만나와 같이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심을 알았습니다(참고/요6:15,31.참고/출16:4,15;시78:24;105:40;느9:15).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서 양식을 주신 그것은 너희들이 참된 양식을 얻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님이 ‘생명의 떡’으로 영원히 주리지 아니하고,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참고/요6:32-25). 그러나 무리는 그 예수님이 ‘생명의 떡’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알지 못한 것이지요(참고/요6:36). 예수님의 긍휼하심은 영생을 주시고, 치유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생계까지도 세심하게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적인 은혜와 육적인 은혜 모든 것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구원도, 육적인 생활도 주님이 주시는 것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병이어 기적 후, 주님의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6:60).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자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며 주님을 따랐습니다(요6:67-68).
헤롯과 같이 완악하여서, 주님의 능력을 보고도, 영접하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해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무리에게도 주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헤롯도 무리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보다 먼저인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천국이 얼마나 큰 보화인지 아는 자들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차지한 농부와 같이 천국을 위해서라면 그 천국을 주신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라는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데 주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합니까? 영적인 구원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요 육적인 생활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으로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물 위로 걸으시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에 참된 의미를 모르는 여전히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만을 찾는 무리를 헤쳐 보내고,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서, 가버나움을 떠나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도록 하셨습니다(22. 참고/막6:45;요6:1).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과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고, 깊은 기도 후,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었습니다(23). 제자들이 탄 ‘배(는)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육지에서 이 멀리 떨어져 항해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24). 그런데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고 하였습니다(24). 이때가 ‘밤 사경’(새벽 네시)이었는데요.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25).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적어도 1년 이상 주님을 따라다녔음에도, 바다 위를 걸으실 것으로는 생각지 못하고, 유령으로 보며 무서워 소리질렀습니다(26).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분이십니다(마8:23-27;막4:35-41;눅8:22-25). 그렇다면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은 주님에게는 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즉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27). 그 순간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며 간구했고, 예수님은 “Come on!" ‘오라’ 말씀하셨습니다(28-29).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게 되었습니다(29). 바다에 발을 내디뎠다는 자체가 믿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큰 ‘바람’이 불어 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을 갖게 되자, 몸이 바다로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30).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31-33.참고/막6:45-52;요6:15-21)
자신도 바다 위를 걷게다고 한 베드로의 용기는 결코 객기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으로 걷던 베드로에게 큰 바람이 불어 닥쳤습니다. 그 순간 자신을 걷게 한 주님을 의지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바다를 걷게하신 예수님이 바람을 몰아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미 예전에 주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광풍이 잔잔케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주님이 큰 바람을 물리치실 것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이 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가는 길에서 ‘바람’ 이 상징하는 두려움은 항상 엄습해 옵니다. 우리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내가 이대로 잘 살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잘 부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또한 두려움입니다. 직장에서 끝까지 남아 퇴직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사업이 막히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영적으로도 이 패악한 시대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사람의 두려움을 가지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주변이 온통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로 보입니다. 악한 영의 계략입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아람 왕이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이스라엘의 이러이러한 곳을 공격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사람을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어 아람 군대가 이러이러한 곳에 진을 치니 그곳을 지나가는 것을 삼가라고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전갈을 받은 이스라엘 왕은 그곳에 부하들을 그곳에 보내어 엄하게 경고하도로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자, 아람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신하들을 불러, 우리가 가운데 이스라엘과 왕과 내통하는 자가 없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며, 추궁하였습니다. 그때 한 신하가 왕이시여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왕께서 침실에서 은밀히 하시는 말씀까지도 다 알아서, 일일이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줍니다고 고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엘리사의 시종이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강한 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엘리사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 걱정하였다. 그런데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하였습니다(왕하6:16). 그러나 시종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우리를 지켜주는 군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에 엘리사가 ‘기도하여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하였습니다(왕하6:17). 하나님께서는 수 많은 천사들을 명하여 불말과 불병거를 이끌고 엘리사를 지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헤롯과 같이 완악하여서, 주님의 능력을 보고도, 영접하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해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무리에게도 주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헤롯도 무리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보다 먼저인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천국이 얼마나 큰 보화인지 아는 자들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차지한 농부와 같이 천국을 위해서라면 그 천국을 주신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라는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데 주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합니까? 영적인 구원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요 육적인 생활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으로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 자는 ‘바람’이 상징하는 두려움이 오더라도, 그 두려움을 압도하는 천군천사를 보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사탄의 영을 보면서, 사탄의 영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으로 바라보고 두려움을 이기기를 믿음을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이기시기 위해 지금도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길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결론
① 헤롯은 예수님을 통해 능력이 나타났음에도, 구원자로 영접하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해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영접하는 것보다, 먼저인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의 복으로 믿음을 갖게 하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주님의 살아계심을 볼 수 있는 눈과 귀가 되게 하옵소서.
② 항상 주님의 살아계심을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주셔서,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천국이 얼마나 큰 보화인지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모든 소유를 팔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차지한 농부와 같이, 천국을 위해서라면, 그 천국을 주신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데 주저 하지 말게 하옵소서.
③ 주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 드리는데 주저 않는 것은, 예수님의 긍휼하심은 영생을 주시고, 치유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와 같이 생계까지도 세심하게 살피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이후, 육적인 공급만을 보고 떠난 무리와 같지 않게 하옵소서. 영적인 구원도, 육적인 생활도, 주님이 주시는 것을 믿고, 주님께 아뢰고, 주님을 떠나지 않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④ 주님을 떠나지 않는 자로 믿음의 길에 광풍 같은 두려움이 오더라도, 그 두려움의 새력을 압도하는 천군 천사를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을 보고, 두려움을 주는 사탄의 영을 이기게 하옵소서.
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세상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려고,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길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 저를 지켜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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