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 15 이재현목사 "부스러기라도 주소서"(마15:27-28)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5. 1. 11. 11:09

부스러기라도 주소서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15:27-28 2024.12.29. 送年感謝主日禮拜

 

“장로들의 전통(막7:1-23) 1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2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15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가나안 여자의 믿음(막7:24-30)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다 2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사천 명을 먹이시다(막 8:1-10) 32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15:1-39)

 

 

2024년 마지막 주일인 송년감사주일에 참예하신 성도 여러분에게 소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볼 때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었음을 고백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주 안에서 아름다운 연말연시를 맞는 한 주간 되시기를 다시 한 번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장로의 전통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전에 밀밭을 사이로 지나다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자,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어찌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며, 따지듯이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참고/12:1-2;2:23-28;6:1-5). 이에 예수님은 구약 시대 다윗이 자신과 일행들이 배고픔으로 안식일에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은 이야기를 통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셨었습니다(삼상21:1-6.참고/40:23;24:5-9;2:26). 다윗과 일행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배가 고팠고, 다윗은 안식일 규례가, 배고픔의 문제에는 탄력성 있게 적용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참고/13:22).

 

안식일은 자유치유의 날이므로, 안식일에 배고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안식의 의미에 부합합니다(참고/3:4;6:9,13:16,14:3). 이미 구약에서도 이미 배고픔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안식일 규례를 유연하게 적용하였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굶으면서, 고통 가운데 보내는 날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2:27). 안식일은 사람을 속박하는 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날, 사람을 살리는 날입니다(참고/4:18-19,21).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안식을 누린 것이라고 변호하고 계십니다(12:8).

 

예수님과 안식일 논쟁에서 일 패를 당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번에는 장로의 전통’傳統, Tradition of the Elders을 가지고 시비를 했습니다. “1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1-2).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계명을 기록된 말씀으로 성문 율법’成文律法,written law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구약 성경은 성문 율법이고, 나머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은 입으로 전해진 율법으로 구전 율법’口傳律法, oral law이라고 합니다. ‘미쉬나’Mishina로도 부르는 구전 율법에는 에스라 이후 주후 5세기까지 약 천년 간에 걸쳐 집성된 현인들의 문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문 율법을 학자들이 해석한 것이 구전 율법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일반적으로 유대교에서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상 다섯 권 모세 오경을 연구 분석 정리해서 사람이 지켜야 할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중 365가지는 하지 말라는 소극적 명령인데 그 수가 태양력에 의한 한 해의 날수와 같고,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은 248가지인데 이는 사람의 몸 안에 있는 지체의 수에 해당한다고 탈무드’Talmud에서 전해집니다. 613가지 계명이 장로의 전통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여,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여왔습니다. 그 결과로서 율법에 딸린 방대한 문헌을 전해온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대립은 바로 이러한 문제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온 구전 율법을 세분화한 613가지 계명, ‘장로의 전통을 철저히 준수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기록된 말씀을 가감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신 것입니다.

 

장로의 전통이라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더욱더 잘 지켜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취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위적이고도 제도적인 요인들을 개입하면서 그것은 점차로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사람의 계명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로 나아오고자 하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속박하는 굴레의 역할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문제를 삼는 것입니다.장로의 전통은 유전遺傳, 관습慣習과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실은 종교지도자를 위해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장로의 전통명목은 율법,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이었지만, 내용은 자신들의 만든 전통, 유전, 관습으로 백성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기록된 말씀보다, 기록된 말씀을 해석한 장로의 전통을 우선하여 하나님의 명하신 본래 의미와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받은기록된 말씀성문 율법과 함께 동일한 권위로 여기는 구전 율법장로의 전통을 통해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는 것에 대하여 책망을 한 것입니다. 정결 예식은 구약 제사장이 물두멍에 손을 씻는 것을 근거로, 식사하기 전 반드시 손부터 팔꿈치까지 물로 씻고, 시장에 다녀오면 온몸을 물로 씻었습니다(참고/30:19-21). 평소에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예수님이었는데,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때다 싶어 예수님을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르반의 위선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이 자랑처럼 내세우는 장로의 전통가운데 대표적인 고르반이란 제도를 꼬집어 그 안에 숨겨진 위선과 극단적인 이기심을 폭로합니다. “3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3-6).

 

고르반’Corban는 드리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하여 따로 떼어 둔 헌물을 뜻하는 히브리어 코르반קָרְבָּן의 헬라어κορβάν의 음역입니다(참고/1:2-3;2:1;3:1;7:12-17). 원래는 이렇게 하나님께 바친 헌물이라는 개념이었는데, 구약 시대 후기로 오면서 무엇이든 하나님께 드려지면, 사람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의 금지를 위한 맹세의 문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신약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고르반이라는 맹세를 악용하여, 그 맹세한 것이 부모를 부양하는 데 필요한 것일지라도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고르반을 선언한 사람은 재물을 모두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율법에 명시된 부모 공경의 법에서 제외됩니다. 그것도 재물을 실제로 드리지도 않고, 앞으로 드리겠다고 말로만 해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 받은 기록된 말씀인 성문 율법을 따른 것이 아니라, 구전 율법, 장로의 전통에서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이렇게 고르반이라고 말만 하고, 언제 하나님께 재물을 드린다는 것은 명시하지 않습니다. 결국, 평생 재산을 자기를 위해서는 써도, 부모 공경에는 한 푼도 쓰지 않겠다는 극단적 이기심과 욕심을, 장로의 전통이란 제도로 덮어주는 꼼수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록된 말씀인 율법을 어기면서도 장로의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고르반 같은 전통은 겉으로는 율법을 더욱 잘 지키고 보호하기 위함이라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앞에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수를 쓰는 편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6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라며 위선자라고, 크게 꾸짖으신 것입니다(6-9.참고/7:11).

 

그리고 “10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10-1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장로의 전통을 내세우며,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비판하며 청결을 강조하였지만, 그렇게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집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즉 예수님은 장로의 전통을 빗대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권세와 자리와 유익을 탐하는 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야말로 더러운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12), 그때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님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라고 여쭙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분개할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13).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심지 않으신 식물은 모두 뽑아 버리실 것이라는 것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씀을 따른다고 하나, 말씀을 주신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들로 뽑힘을 당할 것이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성문 율법인 모세의 율법을 내세우나, 실제적으로는 구전 율법인 장로의 전통이 모세의 율법의 권위와 동등하다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장로의 전통을 앞세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악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영악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멘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황의 전통

 

오늘날도 장로의 전통과 같은 것을 믿는 종교가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의 전통을 우위에 두는 로마 가톨릭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황의 말을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듭니다. 그렇기에 교황이 마리아가 무죄하다면 무죄한 것으로 승천했다면 승천했다고 믿습니다. 교황이 죽은 사람을 성인으로 선포하면 그가 성인이 되어 교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성경 무오이지만, 천주교는 교황 무오입니다. 교황은 아무 흠도 죄도 없다는 뜻입니다. 영적 암흑기인 중세시대 교황은 여러 국가를 지배하고, 황제를 임명하고, 반하는 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을 처했습니다.

 

교황은 지금도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졌다고 여깁니다. 베드로가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밭을 판 값을 속인 아나니아에게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하자,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즉 죽임을 당했습니다(5:3,5). 그런가 하면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향하여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일어나 앉는지라즉 살아났습니다(9:40). 이렇게 사람을 죽고 살게 한 베드로가 1대 교황이고 그 뒤를 이은 교황들에게도 이러한 생사여탈권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권 승계와 사도성 승계의 구분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 가운데 예수님이 친히 택하신 열두 제자들이 사도입니다(6:13.참고/10:5;3:14). 예수님은 이들에게 성령충만을 받고 초대교회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참고/24:49;1:13-15,2:1-4). 베드로 등 사도들에게는 인간의 생사까지 영역으로 두게 하신 것은, 교회가 처음 태생할 때이기에 주님이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그대로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권입니다. 그러나 사도권은 단회적입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13:5). 사도의 아들이 사도가 될 수 없고, 사도의 제자가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증언한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참고/2:20;벧후3:2). 성경이 가장 큰 능력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권은 계승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성 승계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거한 복음을 우리도 동일하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위대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사도권을 승계한 교황의 생사여탈권까지 주장하며, 성경과 교황의 권위가 동등하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적으로는 교황의 권위를 성경보다 더 높게 하는 성경과 관계 없는 교황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 외 많은 이교와 이단들이 자신들만의 전통을 만들어 교주를 신격화합니다.

 

디모데의 할례

 

우리 개신교에서도 천주교 정도는 아니지만, 간혹 전통을 앞세우다가, 본질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교회마다 전통이 있습니다. 전통은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름답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보존되되 시대에 맞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전통은 그릇입니다. 본질은 성경입니다. 본질인 성경을 담는 그릇의 모양이 다르다고, 성경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아주 어릴 때 놋그릇을 식기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두껍고 탄탄한 질그릇을 쓰다가, 스테인리스 용기에 밥을 담았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사기를 쓰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전이나 지금이나 그 안에 담긴 밥은 동일합니다. 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은 그릇입니다. 본질은 성경입니다. 성경을 해하는 것이 아니면, 얼마든지 유도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릇인 전통이 성경인 본질을 뒤바꿔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 (디모데)를 데리고 (루스드라)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고 하였습니다(16:1-3). 그런데 이것은 이전과 상반된 것처럼 보입니다(15:1,20,31). 수리아 안디옥교회 성도 가운데 이방인들은, 유대에서 내려온 자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 문제로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교회에 보내 공식적인 답변을 듣도록 하였고, 회의 결과를 기록한 편지로, 할례와 관계없이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세우고, 전도지로 나가면서,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이, 디모데가 헬라인인 것을 아는 고로, 할례를 받도록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유대인들의 눈치를 본 것입니까? 예루살렘 총회 결의와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합니까?

 

답변을 드리기 전에 성도님들에게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선교사님은,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장식하고, 의복을 입었습니다. 얼굴과 온몸에는 그들의 전통 문양을 그렸습니다. 그러면 선교사님이 그 부족의 미신을 따르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그들의 문화를 따라 한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10:16). 할례의 본질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무엇입니까? 신약시대 교회시대인 오늘날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물려받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인, 이방인이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하였습니다(2:28-29). 무할례자인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하나님의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3:29-30;3:7,29,6:16). 마음의 할례는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았다 안 받았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헬라인인 디모데를 유대인으로 만들고자 함아니라, 할례의 전통을 고수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안에 전통과 본질을 구분해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은, 디모데에게 예수를 믿어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전통과 같이 할례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과 할례는 별개입니다. 구원이 본질이요. 할례는 전통으로 유대인의 문화를 따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하였습니다(고전9:20). 우리는 전통과 본질의 관계에서 항상 본질이 첫 번째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통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은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전통을 주장하다가 본질인 성경과 관계 없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디모데는 헬라인으로 이방인입니다. 자기의 전통으로는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위해 자기 전통을 버리고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데모데가 예수 믿는 것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전통으로 본질을 잃어버리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큰 노를 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그냥 두라시며,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그들과 상대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계십니다(14)

본성이 죄인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베드로()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달라며 더 자세하는 풀이를 요청했습니다(15). 이에 ‘16예수께서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고 하시며,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16-17). 쉽게 풀면 손을 깨끗이 씻고 음식을 먹건 조금 청결하지 못한 손으로 음식을 먹건 입을 통해 배로 들어가서 뒤로 버려질 뿐입니다. 그러나 “18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8-20.참고/7:1-23).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10-17.참고/5:9,10:7,14:1,53:1,140:3;59:7). 이 말씀은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새기고 들어야 합니다. 인간은 실존이 죄인입니다. 죄인의 본성에서 선이 나올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말씀을 적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담은 통인 경문의 띠를 일부러 넓게 하며’, 근엄하게 보이고자 치렁치렁하게 끌릴 정도로 옷 술을 길게하고, 다른 사람들이 듣도록 성전에 올라가 서서 기도하며, 자신들의 선생을 떠벌였고,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 문안 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23:5;11:43,18:10-11). 그러나 그렇게 외식을 해보았자, 죄인의 본성으로 타인을 비판하고 경멸하고 격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인인 실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길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 순간 주님의 의를 입고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3:22-26). 그때 비로서 우리 안에 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사천 명을 먹이시다

 

예수(님은) 거기서 떠나사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셨습니다(29.참고/7:31). ‘데가볼리는 헬라어 데카폴리스Δεκάπολις, Dekápolis, 'Ten Cities' 음역한 것으로 숫자 10을 뜻하는 데카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를 합쳐진 단어로 열 개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데가볼리는 헬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식민지화된 갈릴리 바다 동편에 위치한 도시들로, 예수님 당시엔 주로 이방인들이 거하며 헬라와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땅이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헬라와 로마의 신들 다시 말해, 귀신을 섬기는 땅이었기에 군대 귀신이 여기에서 거주하고 싶어할 정도이었습니다. 이렇게 데가볼리는 우상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우상의 도시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자 하는 “30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하였습니다(30-31.참고/7:24-30)

 

또한 데가볼이에서 오병이어와 같은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32-39.참고/8:1-10). 표적을 베푼 음식이 보리 떡 다섯 덩어리와 일곱 덩어리로 차이가 있고, 먹은 사람들도 남자만 5000명과 4000명으로 차이가 있고, 먹고 남은 빵도 하나는 열두 광주리, 일곱 광주리로 차이가 있지만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베푸셨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다만 표적의 대상이 오병이어 사건은 유대인들이고, 칠병이어 사건은 우상도시입니다. 표적의 장소도 오병이어는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 벳새다 들판에서 일어났고, 칠병이어는 갈릴리 호수 남동쪽에 있는 우상의 도시 데가볼리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장로의 전통을 중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데가볼리와 같은 우상의 도시 사람들은 개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장로의 전통을 붙잡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처럼 한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 도시라도 주님을 믿고자 하는 곳에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참고/18:4;1:16). 주님을 믿고자 하는 자에게 성은이 임합니다. 이것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장로의 전통은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자기 전통 자기 기준 자기 주장을 앞세우면 하나님의 능력이 없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믿음

 

뿐만 아니, 바리새인이 비판하고 경멸하고 격하하는 부류 가운데 하나인 가나안 여인이 등장합니다. 가나안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이방 도시입니다(21). 과거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 정략 결혼한 이사벨의 고향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시돈을 통치하는 왕이자, 이름이 엣바알로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습니다(왕상16:31). 이러한 이방의 도시인 가나안에 예수께서 (친히) 들어가시었습니다(21). 자신이 사는 마을에 주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고쳐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22). 그러나 예수님은 무시하시며,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23). 애절하게 소리 지르며 딸을 고쳐달라는 여인을 외면하는 듯 보이는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여쭈었습니다(23).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며 매몰차게 거절하셨습니다(24).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러 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의 땅인 가나안 여인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예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재차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했습니다(25). 그러나 이번에도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26). 이 말은 선민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자녀요. 가나안 여인과 같은 이방 출신을 개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예수님은 여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없이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인은 딸을 살리고자하는 일념으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27). 여인은 저를 개라고 해도 상관없으니,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와 같이, 조금이라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8). 아멘!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이방 가나안 여인을 개로 취급하며 모욕하신 것입니까? 가나안 여인의 도움을 외면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자리에 모인 이방인들은 물론 유대인들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과 같은 믿음이 진정한 믿음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자신들의 만든 장로의 전통을 가지고, 겉으로만 근엄과 경건과 선행을 한다는 자들이 의인으로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두로와 시돈에 사는 이방 도시의 가나안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죄인의 본성에서 구원받은 의인이 되게 하시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큰 깨우침을 주십니다. 우리가 장로의 전통을 버리고 기록된 말씀을 가르친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부스러기라도 주소서라고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장로의 전통을 중시하는 자들에게 부스러기란 어림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손을 깨끗하게 씻은 다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누고, 정결한 짐승으로 요리한 음식을 깨끗한 식기에 담아 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이방의 땅 가나안 여인이나, 우상의 도시 데가볼리나, 세리와 죄인들을 묶어서 비판하며, 자신들의 우위를 드러내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만 깨끗할 뿐 안에서 나오는 다른 이들을 비방하고 조소하며 역겨워하는 것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 따라 부스러기라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나의 전통, 유전, 관습은 버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체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 살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본질보다 앞서는 모든 전통을 뒤로하여, 부스러기라도 구하는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으로부터 소원인 딸도 고침 받고, 네 믿음이 크도다 칭함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리

장로의 전통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전에 밀밭을 사이로 지나다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자,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어찌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며, 따지듯이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참고/12:1-2;2:23-28;6:1-5). 이에 예수님은 구약 시대 다윗이 자신과 일행들이 배고픔으로 안식일에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은 이야기를 통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셨었습니다(삼상21:1-6.참고/40:23;24:5-9;2:26). 장차 왕이자, 선지자인 다윗은 율법의 해석자로 배고픔과 안식일의 관계를 해석했던 것입니다(참고/13:22). 안식일은 자유치유의 날이므로, 안식일에 배고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안식의 의미에 부합합니다(참고/3:4;6:9,13:16,14:3). 이미 구약에서도 이미 배고픔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안식일 규례를 유연하게 적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안식일에 누린 것이라고 변호하고 계십니다(12:8).

 

예수님과 안식일 논쟁에서 일 패를 당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번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자, ‘장로의 전통’傳統, Tradition of the Elders을 가지고 시비를 했습니다(1-2).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계명을 기록된 말씀으로 성문 율법’成文律法,written law이고, 나머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은 입으로 전해진 율법으로 구전 율법’口傳律法, oral law(or‘미쉬나’(Mishina))이라고 합니다. 구전 율법에는 에스라 이후 주후 5세기까지 약 천년 간에 걸쳐 집성된 현인들의 문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문 율법을 학자들이 해석한 것이 구전 율법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유대교에서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상 다섯 권 모세 오경을 연구 분석 정리해서 사람이 지켜야 할, ‘하지 말라는 소극적 명령이 365가지, ‘하라는 적극적 명령이 248가지로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613 가지 계명이 장로의 전통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의 대립은 이 문제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613가지 세분화한 장로의 전통을 중시한 데 반하여,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을 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신 것입니다.

 

장로의 전통은 율법을 잘 지켜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취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위적이고도 제도적인 요인들을 개입하면서 그것은 점차로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사람의 계명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로 나아오고자 하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속박하는 굴레의 역할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문제를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장로의 전통명목은 율법,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이었지만, 내용은 자신들의 만든 전통, 유전, 관습으로 백성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기록된 말씀보다, 기록된 말씀을 해석한 장로의 전통을 우선하여 하나님의 명하신 본래 의미와 전혀 다른 규례를 행했습니다. 예수님을 평소에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는 것을 보고, 이때다 싶어 예수님을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합니다(참고/30:19-21). 그 근거가 바로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르반의 위선.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이 자랑처럼 내세우는 장로의 전통가운데 대표적인 고르반이란 제도를 꼬집어 그 안에 숨겨진 위선과 극단적인 이기심을 폭로합니다(3-6). ‘고르반’Corban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하여 따로 떼어 둔 헌물을 뜻합니다(참고/1:2-3;2:1;3:1;7:12-17). 그런데 구약 시대 후기로 오면서 무엇이든 하나님께 드려지면, 사람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의 금지와 억제를 위한 맹세의 문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신약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고르반이라는 맹세를 악용하여, 고르반을 선언한 사람은 재물을 실제로 드리지도 않고, 앞으로 드리겠다고 말로만 해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 것입니다. 고르반 같은 장로의 전통은 겉으로는 율법을 더욱 잘 지키고 보호하기 위함이라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앞에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수를 쓰는 욕심과 이기심의 편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외식하는위선자라고, 크게 꾸짖으시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장로의 전통을 내세우며,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비판하며 정결을 강조하였지만,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즉 예수님은 장로의 전통을 빗대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권세와 자리와 유익을 탐하는 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야말로 더러운 자들이라고 는 말씀입니다(6-11.참고/7:11).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이 분개할 것을 모르시냐고 여쭈었습니다(12).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심지 않으신 식물은 모두 뽑아 버리실 것이라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씀을 따른다고 하나, 말씀을 주신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들로 뽑힘을 당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13). 그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성문 율법인 모세의 율법을 내세우나, 실제적으로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장로의 전통을 앞세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의 전통. 오늘날도 장로의 전통과 같은 것을 믿는 종교가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의 전통을 우위에 두는 로마 가톨릭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황의 말을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듭니다. 그렇기에 교황이 죽은 사람을 성인으로 선포하면 그가 성인이 되어 교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고 합니다. 개신교는 성경 무오이지만, 천주교는 교황 무오입니다. 교황이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까지 가졌다고 여깁니다. 베드로의 말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임을 당하고, 죽은 다비다가 살아났지 않습니까?(5:3,5,9:40). 이 베드로가 1대 교황이니 그 뒤 교황들에게도 이러한 생사여탈권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권 승계와 사도성 승계의 구분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 가운데 친히 택한 자들이 사도입니다(6:13.참고/10:5;3:14). 예수님이 사도들에게는 인간의 생사까지 영역으로 두게 하신 교회가 처음 태생할 때이기에 주님이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그대로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참고/24:49;1:13-15,2:1-4). 이것이 사도권입니다. 그러나 사도권은 단회적입니다. 사도의 아들이 사도가 될 수 없고, 사도의 제자가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참고/13:5). 지금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증언한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참고/2:20;벧후3:2). 성경이 가장 큰 능력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권은 계승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성 승계란 사도들이 주님을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거한 복음을 우리도 동일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사도권을 승계는 성경과 관계 없는 교황의 전통일 뿐입니다.

 

디모데의 할례. 우리 개신교에서도 천주교 정도는 아니지만, 간혹 전통을 앞세우다가, 본질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교회마다 전통이 있습니다. 전통은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름답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보존되되 시대에 맞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전통은 그릇입니다. 본질은 성경입니다. 성경을 담는 그릇의 모양이 다르다고, 성경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해하지 않는 것이라면, 전통은 유도리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회심한 디모데를 만나 동역을 하게 됩니다 (16:1.참고/14:1-18,21).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16:3.참고/15:1,20:31).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물어 보겠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님이 그 부족의 음식을 먹고, 장식을 했다고, 미신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문화를 따라 한 것입니다. 할례의 본질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입니다(10:16). 마음의 할례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3:29-30;3:7,29,6:16).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헬라인 디모데를 유대인으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16:1-3).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20). 바울이 디모데와 동역하여, ‘여러 교회가 믿음이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고 하였습니다(16:5). 이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목적입니다.

 

우리는 전통과 본질의 관계에서 항상 본질이 첫 번째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통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전통을 주장하다가 본질인 성경과 관계 없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큰 노를 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그냥 두라시며,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그들과 상대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계십니다(14).

 

본성이 죄인. 예수님은 비유를 풀어달라는 제자들에게 손을 깨끗이 씻고 음식을 먹건 조금 청결하지 못한 손으로 음식을 먹건 뒤로 버려질 뿐이라며, “18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5-20.참고/7:1-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3:10). 인간은 실존이 죄인입니다. 죄인의 본성에서 선이 나올 수 없습니다(3:10-17.참고/5:9,10:7,14:1,53:1,140:3;59:7).

 

바리새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말씀을 적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담은 통인 경문의 띠를 일부러 넓게 하며’, 근엄하게 보이고자 치렁치렁하게 끌릴 정도로 옷 술을 길게하고, 다른 사람들이 듣도록 성전에 올라가 서서 기도하며, 자신들의 선생을 떠벌였고,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 문안 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23:5;11:43,18:10-11). 그러나 그렇게 외식을 해보았자, 죄인의 본성으로 타인을 비판하고 경멸하고 격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인인 실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길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 순간 주님의 의를 입고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롬3:22-26).

 

사천 명을 먹이시다

 

예수님은 데가볼리로 가셨습니다(29.참고/7:31). 데가볼리는 헬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식민지화된 갈릴리 바다 동편에 위치한 도시들로, 헬라와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우상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우상의 도시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자 하는 자들의 모든 질병을 고치셨습니다(30-31.참고/7:24-30). 또한 오병이어와 같은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32-39.참고/8:1-10). 표적의 장소가 오병이어는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 벳새다 들판에서 일어났고, 칠병이어는 갈릴리 호수 남동쪽에 있는 우상의 도시 데가볼리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장로의 전통을 중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우상의 도시 사람들은 개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장로의 전통을 붙잡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처럼 한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자 하는 곳에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참고/18:4;1:16). 주님을 믿고자 하는 자에게 성은이 임합니다. 이것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장로의 전통은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의 믿음

 

뿐만 아니, 바리새인이 비판하고 경멸하고 격하하는 부류 가운데 하나인 가나안 여인이 등장합니다. 가나안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이방 도시입니다(21.참고/왕상16:31). 이곳에 주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가나안 여자가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고쳐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22). 그러나 예수님 외면하며, 나는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러 왔지 이방의 땅인 가나안 여인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23-24). 그러나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예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재차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했습니다(25).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그들의 떡을 가나안 여인과 같은 개에게 던져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26). 그럼에도 여인은 개라고 해도 상관없으니,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며, 조금이라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달라고 하셨습니다(27). ‘이에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8). 아멘!

 

예수님은 그 자리에 모인 이방인들은 물론 유대인들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자신들의 만든 장로의 전통을 가지고, 겉으로만 근엄과 경건과 선행을 한다는 자들이 의인으로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이방 도시의 가나안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죄인의 본성에서 구원받은 의인이 되게 하시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장로의 전통을 중시하는 자들에게 부스러기란 어림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손을 깨끗하게 씻은 다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누고, 정결한 짐승으로 요리한 음식을 깨끗한 식기에 담아 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이방의 땅 가나안 여인이나, 우상의 도시 데가볼리나, 세리와 죄인들을 묶어서 하대하며, 자신들의 우위를 드러내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만 깨끗할 뿐 안에서 나오는 다른 이들을 비방하고 조소하며 역겨워하는 것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 따라, 부스러기라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나의 전통, 유전, 관습은 버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체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 살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본질보다 앞서는 모든 전통을 뒤로하여,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으로부터 소원인 딸도 고침 받고, 네 믿음이 크도다 칭함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① 장로의 전통과 같이 나의 전통을 가지고 기록된 말씀을 변개하고, 소멸하고, 자익(自益)하는 자게 되지 않게 하옵소서. 2024년 말씀 앞에서 마무리하고, 2025년 말씀 앞에서 시작하게 하옵소서.

 

② 사도권을 계승했다는 천주교 교황이 전통을 배격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성을 계승합니다. 오늘로 사도들의 증거한 복음을 증거할 때, 겅력한 성령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③ 바리새인과 같이 모든 행위를 자랑하고자 경문의 띠를 넓게 하고, 근엄하게 보이고자 옷 술을 길게 하고, 다른 사람이 듣도록 서서 기도하는 외식을 버려버리게 하옵소서. 죄인인 실존에서 벗어나는 길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 안에 선한 것만 나오게 하옵소서.

 

④ 예수님은 우상의 도시에 거하는 자들도 믿고자 하면,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이 자기의 전통인 자기의 경계를 버리고, 기록된 말씀대로 주님을 믿는 자가 되어 성은을 입게 하옵소서.

 

⑤ 기록된 말씀에 따라 부스러기라도 간절히 구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나의 전통을 버리게 하옵소서.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으로부터 소원도 응답되고, 네 믿음이 크도다. 칭함 받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