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에서 다윗 성까지
하나님말씀 : 사무엘상 4:1~11 2018.01.21. 主日禮拜
이재현목사
“1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2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3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5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6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4:1-11)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실로에서 에벤에셀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라는 말씀이 본문 사무엘상 4장 3절에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우리가 흔히 ‘법궤’로 부르는 것입니다(“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레16:2)). 조각목으로 만든 장방형의 상자로 그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 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를 넣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 ‘법궤’ 말고도 ‘증거의 궤’(출25:21-22),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삼상5:7), ‘주 여호와의 궤’(왕상 2:26)등으로도 불렸습니다.
지성소에 있었던 언약궤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언약궤 위에 양의 피를 붇습니다. 모든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지요. 이곳 언약궤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출25:22). 또한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광야 40년 간 항상 법궤 위에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솟아올랐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을 인도했습니다. 가나안에 입성할 때 요단강을 건널 때도 언약궤를 앞세우고 갔습니다(수3:1-17). 가나안 첫 성인이 여리고를 함락시킬 때에도 언약궤를 앞세웠습니다(수6:4,8). 가나안 정복 후 사사시대에는 실로에 모셔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의 상징이었던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대적 블레셋이 있었는데요. 이들과 많은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한 번은 에벤에셀에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가 아벡에 주둔한 블레셋과 싸우다가 패하게 됩니다. 무려 4천 명이라는 많은 전사자가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대책 회의를 가지게 되는데요. 패전 원인을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중陣中에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급히 사람들을 보내어 실로에 모셔져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에벤에셀까지 가져오게 됩니다. 대제사장인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실로에서부터 에벤에셀까지 언약궤 이동과 함께 했고요. 이를 본 이스라엘 진영의 백성들은 땅이 진동할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사기충천士氣衝天했습니다.
반대 진영에 있던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의 큰 소리를 듣고 순간 당황합니다. 전쟁에서 이긴 것도 아니고 패한 자들이 저렇게 의기양양할 수 있을까 생각한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가지고 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블레셋은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어떤 것인 가하는 것은 이방 블레셋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4장 7-8절을 읽겠습니다. “7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이렇게 블레셋도 지난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지나가는 곳마다, 대적들을 물리친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이러한 상황에서 후퇴한 것이 아니라 진격하기로 합니다. 죽느니 차라리 싸워보자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 9절입니다.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우리가 히브리 사람의 종 이스라엘의 종이 될 수 없다. 대장부가 되자’며 전의를 다진 것이지요.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본문 사무엘상 4장 10절을 읽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대패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진영에 모시고 싸웠는데요. 언약궤 없이 싸울 때 전사했던 4천 명보다 7배가 넘는 삼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더 비극적인 것은 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보시던 ‘하나님의 궤’를 이방 블레셋에게 강탈당하고요.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합니다. 이 비보를 전해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지’는 사고로 생명을 잃게 되고요. 비느하스의 아내는 만삭 중에 남편과 시부가 죽고, 하나님의 궤마저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는 충격으로 갑자가 출산을 하게 되었고요. 난산으로 죽어가면서 아들을 낳았음에도 기뻐하지 못하고,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삼상4:19-21). 이는 ‘어디에 영광이 있는가?’라는 그 뜻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한스러우면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겠어요.
이렇게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의 믿음을 수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법궤마저도 이방의 손에 빼앗기게 하였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법궤가 이방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의 영광을 가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아름다운 주일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소망하기는 이 예배를 드리는 청아비전교회공동체 가족 여러분에게 예배에 참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일 동안 3부 예배에서 제직세미나를 하였습니다. 그 시간 어떤 헌신과 충성보다, 먼저 예배자로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자는 가르침을 먼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이 첫째 일인데요. 그것은 예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심을 다하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도 정신도 육체도 말입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만 앉아있지 세상의 염려와 근심 그리고 나의 계획과 안위가 마음에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렸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 혹은 안도하려는 태도는 자칫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마치 ‘법궤만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던,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시간을 구별하여 교회에 왔으니 정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말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얻어야 할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에벤에셀에서 에그론까지
한편 ‘여호와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있음에도, 전쟁에서 이긴 블레셋은 승리에 도취되어있었습니다. 자신들도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있을 때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 정복에서 승승장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를 진중에 두고 있던 이스라엘을 이기었으니, 더 더욱 승리의 기쁨은 배가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만한해진 블레셋은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리품으로 탈취한 ‘여호와의 언약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두었습니다. 다곤은 풍요와 생산의 신으로 바알신의 아버지로 알려진 신입니다.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물고기의 모습을 한 블레셋이 섬기는 이방신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이렇게 이방 신당에 진열하듯 놓아둔 것이지요.
다음 날 아침 다곤 신전을 찾은 블레셋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있는 것입니다. 황급히 다곤을 원래자리 세워놓았는데요. 다음 날 아침에는 더 기가 막힌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번에는 다곤이 여호와 궤 앞에 엎드러져 있는 것 만 아니라,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뚱이만 덩그러니 나뒹굴고 있습니다. 이를 본 블레셋은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삼상5:3-5). 그뿐 아니라요. 이번에는 다곤 신전이 있는 아스돗 사람들을 ‘여호와의 손이’ 치니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동네 전체가 ‘망하게’되었습니다(삼상5:6).
블레셋은 아스돗에 있는 ‘여호와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어 재앙을 모면해 볼까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에그론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아스돗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을 안 에그론 사람들이 ‘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며 반발을 했습니다(삼상5:10). 아니다 다를까요. 이번에는 에그론 사람들이 ‘사망이 환난’을 당했습니다.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지요. 겨우 살아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고 사무엘상 5장 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지게 되면 이러한 비극이 찾아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과 인간의 욕심으로 받은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요즘 적폐청산으로 나라가 혼란스럽습니다. 지지하는 분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가서 깨끗이 털어버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하고요. 반대쪽에서는 이렇게 계속되면 정치보복이니 어느 선까지만 하자고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기에 누가 옳다고 할 수 는 없고요. 지금 정황상 의심되는 일들 말고요. 분명하게 펙트로 드러난 사건들을 보고 말할 때요. 탐욕이 원인인 일이 대부분입니다. 누구를 지목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요. 나라에서 국록國祿을 받던 이이 자기의 료料에 만족하지 못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3장 14절에 당시 이스라엘을 권력으로 압제하던 로마 군병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족한 줄 모르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은 신년을 맞아 물질적인 부분을 놓고도 많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요. 인간의 욕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탐욕으로 채우는 것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잘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으로 챙긴 것은 갖고도 제 것으로 쓸 수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우리의 가정과 기업 그리고 교회 이것이 본문을 통해 얻어야 할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에그론에서 기럇여림까지
다급해진 블레셋은 모든 방백들을 모으고 ‘이스라엘 신의 궤’를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의견을 모으고도 무언가 켕기는게 있었던지, 자기들 나름대로 ‘속건제’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야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고 생각한 것이지요(삼상6:3).
블레셋의 속건제 방법이 얼마나 코미디 같고 유치하냐면요. 먼저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 모양을 만듭니다(삼상6:4). 이렇게 한 이유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과 블레셋의 신들’을 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삼상6:5). 그리고 새 수레를 만들에 한 번도 멍에를 베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에다 법궤를 싣고, 그 곁에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을 담은 상자를 두어,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돌려 보내도록 하였습니다(삼상6:7-8).
그렇게 한 후 수레가 벧세메스로 곧장 가면 자신들이 당한 큰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린 것이 맞고, 만약 수레가 벧세메스로 곧장 가지 않으면 블레셋에 내린 재앙은 우연히 당한 것으로 여기려 했습니다(삼상6:9).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이렇게 지시를 한 것이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같이 사무엘상 6장 12절을 읽겠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법궤를 모신 수레를 끈 두 소는 사람의 인도함 없이도 곧바로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같습니다. 누가 인도하신 거에요.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지요.
수레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자 동네 사람들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이방의 블레셋이 보낸 수레는 번제의 장작으로 암소 두 마리는 번제물로 된 것이지요. 그러면 금으로 만든 독종모양과 쥐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당시 블레셋에 ‘여호와의 궤’가 있었던 지가 ‘일곱 달’이었거든요(삼상6:1). 독종 모양과 쥐 모양의 금붙이는 일곱 달 동안 무단으로 차지하고 있던 블레셋이 세금을 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다시 돌아온 법궤를 처음 맞이한 것이 벧세메스고 그 동네 사람들이 감사의 번제를 올려 드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 중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부정하게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자들이 있었는데요. 사무엘상 6장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오만) 칠 십 명을 죽이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뜻은 500,070명이라는 뜻이 아니고요. ‘오십 가정 중에서 칠십 인을 죽이셨다’는 뜻입니다. 그 작은 동네에서는 엄청 난 비극이지요.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고 사무엘상 6장 19절에 말씀합니다. 자신들이 이 거룩한 여호와의 궤를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한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웃 동네인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궤’를 맡아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를 받아들인 기럇여림은 동네 사란들 가운데 아비나답의 집에 ‘여호와의 궤’를 모시기로 결정합니다. 아니나답은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합니다(삼상7:1).
여기에서는 똑 같은 이스라엘 동네인데요. 벧세메스 사람들은 큰 화를 당하고 기럇여림 사라들은 20년 동안 ‘여호와의 언약궤’를 모시는 큰 복을 받습니다. 기럇여림이라는 크지 않은 동네인데요. 법궤를 모심으로 이스라엘 중심 역할을 20년 동안 하게 되는 것이지요. 같은 성도인데요. 화에 쓰임 받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복에 쓰임 받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화에 쓰임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맡습니다. 그러나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복으로 쓰임 받기를 축복합니다. 화를 쓰임 받는 것은 벧세메스 사람들을 통해 보았듯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절제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자신의 경솔함으로 화를 받는다면, 그것은 자기 책임이지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신의 동네에 법궤가 왔는데도 자신들의 경솔함으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반면교사로 삼은 기럇여림 사람들은 법궤를 20년이나 모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겼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년을 맞아 맡은 일 혹은 교회에서 임명 받은 것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라고 성도 여러분 각자에게 명하신 일이 있다면 충성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이 복을 받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얻어야 할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기럇여림에서 다윗 성까지
이제 시간은 흘러 20년 지났습니다.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다윗이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다윗 성으로 명명합니다. 나라의 수도까지 정비된 다윗 왕은 그동안 항상 마음에 염두에 두었던 ‘하나님의 궤’를 모시기로 결정합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져 있던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을 이동하는 데요. 이 때 다윗 왕은 이스라엘에서 무려 삼 만 명을 선출하여 대동을 합니다. 행진 중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연주를 하며 축제의 장을 연출합니다. 삼 만 명의 무리들이 찬양을 하며, 각 종 악기로 연주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대단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습니까? 사무엘하 6장 2절에 ‘하나님의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귀한 법궤를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왕국을 건설하여, 수도 예루살렘에 모시게 되니,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법궤의 이동 중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 소들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뛰었는데요. 수레를 끌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 중 웃사가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삼하6:7). 이 또한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일지 모르지만, 당시 법궤는 성별된 레위 자손만이 손을 댈 수 있었기에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된 것이지요.
이 사건을 목도한 다윗은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자신의 성으로 모시는 것을 잠시 멈추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임시 모시게 됩니다(삼하6:9). 이 집에 석 달을 있는 동안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사무엘하 6장 11절에 말씀합니다. 다윗 왕은 웃사가 법궤를 함부로 손을 댔다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잠시, 자신의 성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는 것이, 속히 진행할 일인지 두려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시로 오벧에돔의 집에 모시게 되었는데요. 오벧에돔과 그의 집에 큰 복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다윗은 다시 자신과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계획한데로 이동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삼하6:13). 여섯 걸음을 내딛어도 아무 일이 없음으로 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확신한 것이지요.
그리고 다윗이 감사의 춤을 춥니다. 그 장면을 말씀으로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 14-15절입니다. “14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어린 아이 같이 뛰며 춤을 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이 기쁨이 넘쳐 춤을 추는데요. 그가 입던 옷이 ‘베 에봇’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반바지 같은 치마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 춤을 출 때 마다 그 옷이 위로 올라갔을 것이고요. 그 순간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오늘과 같은 속옷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데도 다윗은 창피한 줄 모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은 당시 주변국을 섬멸하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대한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왕이라 할지라도 조각목(아카시아나무)로 만든 장방형 모양의 가로 122cm, 세로 76cm, 높이 76cm 밖에 안되는 법궤는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지요. 법궤는 그 크기나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석 달 동안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하게 앞의 인도함을 구했을 것이고요. 그 법궤를 모시고 있는 오벧에돔과 그 집이 큰 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확신의 증거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다윗 성으로 가도된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굳건히 믿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다윗 성에 도착해서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아이 같이 엉덩이가 보일 정도로 뛰며 즐거워했습니다.
다윗이 왕국을 건설하여 천하를 호령해도 법궤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처럼,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해도, 하나님 앞에는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주변국이 조공을 바칠 정도로 강대해졌지만, 법궤를 자신의 성에 모시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준비를 한 후 ‘하나님의 궤’를 모시자 아이 같이 기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 할 때 얼마나 기쁘세요. 너무나도 예쁜 자부, 능력있는 사위를 맏이 할 때 얼마나 기쁘세요. 사업이 형통해서 물질이 활짝 열릴 때 얼마나 기쁘세요. 가정이 모두 인가귀도 되어 함께 예배하게 될 때 얼마나 기쁘세요. 이러한 모든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기뿐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어린아이처럼 기쁘게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기를 축복합니다. 올해에 이러한 역사가 꼭 잊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것을 다 응답받아 부족함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얻어야 할 네 번째 가르침입니다.
공동체와 함께하고 동행하라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에 모실 때 이렇게 기뻐한 것과는 달리, 그의 아내 미갈은 다윗을 조소했습니다. 미갈이 다윗을 어떻게 비웃었는지 사무엘하 6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미갈이 다윗의 아내이면 왕비인데요. 왕비인 신분에 있던 미갈은 남편이며 왕인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다윗 성에 들어오는데 나가보지도 않고요. 다윗이 아이 같이 기뻐 춤추는 것을 체통머리 없는 짓으로 여기고 ‘심중에’ 즉 마음속으로 비웃은 것이지요. “‘하나님의 궤’가 들어오면 들어오는 것이지 왕이 되가지고 저렇게 추태를 부릴 수 있나!” 아마도 이런 생각을 미갈은 한 것이지요.
미갈의 다윗을 향한 비아냥거림은 심중으로만 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같이 사무엘하 6장 20절을 읽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다윗은 법궤를 성에 모신 후 다윗은 거처에 들려 가족들을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맞이한 미갈이 이제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며 비난했습니다.
다같이 사무엘하 6장 21-23절을 읽습니다. “21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다윗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신 하나님께 찬양드리며, 기뻐 뛰논 것은 마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를 천시하게 여긴 미갈 당신은 나를 천시여긴 그 천함보다 더 천해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미갈은 평생 동안 자녀를 낳을 수 없게 됩니다. 마땅히 할 바를 하지 못한 미갈은 자신이 비난한 그대로 자신이 비루鄙陋하게 된 것이지요.
미갈은 다윗의 아내요. 왕비입니다. 그녀는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에 오기까지 자기 공로가 하나도 없어요. 집에서 나와 마중하고 함께 즐거워하면 되는데요. 빼 꼼이 창문으로 얼굴만 내밀고는 다윗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런 미갈이 되어서는안 될 줄 압니다.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서 오벧에돔의 집을 거처 다윗 성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함께하지 않았으니, 다윗이 그처럼 어린아이 같이 기뻐 뛰고 춤추는 그 감격을 체감하지 못한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께서는 교회공동체 기도제목에 함께하고 동행할 때 주시는 하늘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얻은 다섯 번 째 가르침입니다.
결론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실로에서 다윗 성까지 ‘여호와의 궤’가 옮겨진 스토리를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로 그 과정 속에서 법궤를 대한 자들이 어떤 일을 겼었는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호와의 궤’는 변함없는 ‘여호와의 궤’인데요. 그것을 맞이한 민족과 개인이 어떤 자세인가에 따라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다윗 성에 모셔지기까지 20년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디 쯤 계시는가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법궤만 있으면 이긴다고 생각했던 이스라엘처럼 실로에서 에벤에셀까지 옮기려하고 있지는 않으세요. 억지로 붙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배자로서, 예배에 참예만을 전부가 아닌,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 하나님이 예배자에게 주시는 은총을 받기를 바랍니다. 블레셋처럼 법궤까지 차지하고는 의기양양해서, 이방신 다곤 신전이 있는 아스돗과 에그론에 있지 않으세요. 하나님 안중에도 없는 것이지요. 성도는 가져야 할 것과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한 해 인간의 탐욕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은혜 받는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같은 이스라엘 동네인데요. 법궤를 다시 찾아 처음 맞이한 벧세메스에 있지 않으세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훔쳐보는 부정함을 가졌지요. 그러나 온전히 모실 줄 알았던 기럇여림과 아비나답에 있으세요. 성도 여러분은 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복으로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라고 성도 여러분 각자에게 명하신 일이 있다면 충성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이 복을 받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얻어야 할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다윗 성으로 가던 중 임시보관 처소이지만 큰 복을 받은 오벧에돔에 있으세요. 다윗은 주변국의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대했지만, 법궤는 자기 마음데로 할 수 없음을 법궤에 손을 대었다가 죽은 웃사를 통해 알았습니다. 그래서 삼개월 동안 오벧에돔의 집에 임시로 모시면서 더욱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함을 구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가운데 최종목적지인 다윗 성에 있으세요. 그렇다면 어린아이 같이 기뻐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다윗은 천하를 다 가져도 법궤를 자신의 서에 모시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년 기도제이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순간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얻고 싶은 것을 가진 후 기뻐하듯 말입니다. 응답되었을 때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실로에서 다윗 성까지 각각을 돌아보며 여러분이 해야 할 것과 벗어버릴 것을 바로 행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기뻐할 때 미갈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법궤 이동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그 감격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치더라고 같이 기뻐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대 행렬이 다윗 성에 도착하여 법궤를 모실 때, 달려 나와 참여만 해도 되는 일입니다. 그도 아니면 다윗이 집에 돌아와 가족들을 축복하려 할 때, 따듯한 말로 화답하면 됩니다. 그러나 미갈은 이마저도 거부한 완악함을 보였습니다. 팔장을 낀 채 빼 꼼이 창문으로 얼굴만 내밀고는 다윗의 흉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기도제목에도 서로 중보로 참여하고, 교회 공동체의 기도제목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은총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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