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앞에 서서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27:57-61 25.03.30. 주일예배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기다(막15:1;눅23:1-2;요18:28-32)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유다가 목매어 죽다(행1:18-19) 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예수를 넘기다(막15:2-15;눅23:3-5,13-25;요18:33-19:16) 11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군병들이 예수를 희롱하다(막15:16-20;요19:2-3) 27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막15:21-32;눅23:26-43;요19:17-27) 32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거기 앉아 지키더라 37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영혼이 떠나시다(막15:33-41;눅23:44-49;요19:28-30) 45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넣어 두다(막15:42-47;눅23:50-56;요19:38-42)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경비병이 무덤을 지키다 62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마27:1-66)
지난 주일 발생한 대형 산불이 진화가 되었다가, 잔 불씨로 다시 재 발생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는데요. 더 이상의 사상과 주택, 농지, 가축, 산림의 피해가 없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교회력으로 고난주간 목요일 저녁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마친 제자들이 ‘찬미(찬송)하고 감람 산 (겟세마네동산)으로 나아’가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마26:30-32.참고/슥13:7;막14:12-26;눅22:7-23;요13:21-30;고전11:23-25). 그러자 베드로를 비롯하여 다른 제자들이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마26:33-35.참고/눅22:50;요18:10). 그러나 주님은 잡히시는 것 또한 성경을 이루는 것이라 하시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칼과 몽치’로 무장한 ‘큰 무리’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스스로 잡히시자,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마26:47,52-56.참고/막14:43-50;눅22:47-53;요18:3-12).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마26:57). 종교 심문이 시작된 것입니다(참고/마16:21,17:22-23,20:17-19;막8:31-9:1,30-32,10:32-34;눅9:22-27,43하-45,18:31-34). 가야바는 신성모독을 선고했고, 모인 자들이 사형에 처하라며, 주님을 능욕하고 폭력을 가했습니다(마26:57,60-65.참고/시110:1;단7:13,14;마9:2,26:28;막2:5,14:53-59;눅5:20,22:54-55,63-71;요2:18-13-14,19-24;행5:31).
가룟 유다의 죽음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1-2.참고/막15:1;눅23:1-2;요18:28-32). 예수님은 지금의 교회력으로 목요일 저녁에 잡히셔서, 종교심문을 받으시고, 대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은 사형을 선고했지만, ‘죽이는 권한은 없는지라’, 집행을 위해서는 로마 황제가 임명한 유대 지역 총독의 법정 재판을 받아야 했기에 지금의 교회력으로 고난주간 금요일 새벽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긴 것입니다(참고/요18:31).
이러한 일들이 있던 ‘그때에’ 가롯 유다는 스승인 예수께서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하자, 절망한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고 하였습니다(3-5).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의논한 후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6-10.참고/슥11:12,13;행1:18-19). 유다에 죽음에 대한 다른 증언은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고하였습니다(행1:18-19). ‘아겔다마’Akeldama는 아람어 ‘하칼데마’Chaqaldema의 헬라어 음역인데요. 그 뜻은 ‘피밭’Field of Blood입니다. 그 위치는 예루살렘 남쪽에 온갖 쓰레기와 오물을 소각하는 흰놈의 골짜기the Valley of Ben Hinnom에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곳에서 자살하여 피를 흘렸습니다. ‘아겔다마’는 핏값, 곧 피 흘린 돈으로 매입했다는 데서 붙여진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 베드로는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라고 구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행1:20.참고/시69:25,109:8). 가룟 유다는 인류의 구원자를 소 한 마리 값에 불과한 은 삼십을 팔고, 자책하여 그 돈을 성소에 넣었지만, 자신과 함께 예수님 죽이기를 공모한 대제사장들 조차도 불의한 핏값이라며, 토기장이 소유의 밭을 사서, 이름 모를 나그네 묘지로 삼았습니다. 영적 의미로 주님이 알지 못하는 자, 생명책에 녹명 되지 못한 자입니다(참고/마7:23,25:12;계20:15). 가룟 유다의 최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게 예수를 넘기다
‘예수께서 (빌라도)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그 외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11-12).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며, 변론할 것을 주문했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였습니다(13-14). 주님은 자신의 가는 길,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여러 말을 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자기의 가야 하실 길을 가신 것입니다.
병행 본문에는 ‘빌라도가’ 예수 심문 후,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고 하자,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 (예루살렘)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눅23:4-5). 이 말을 듣던 ‘빌라도가’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고는,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었는데 ‘그때’ 마침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던 터라, ‘헤롯’이 자신 앞에 끌려온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라고 하였습니다(눅23:6-8). 예전에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걸으시자, 헤롯은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인 다시 살아났나보다,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도다’며, 떨었었지 않습니까?(마14:2) 그랬던 예수님이 죄인의 신분으로 자신 앞에 선 것을 보고 헤롯은 기뻐하면서, 혹시 자기 눈앞에 어떤 표적이라도 보여 줄 것이 있나 하며,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지켜 보았던 것입니다. 헤롯이 이런 저런 ‘여러 말로 물으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주변에 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빨리 판결을 할 것을) 고발하’였습니다(눅23:9-10). 그런데도 주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자, 기사와 이적은커녕 자기 몸 하나도 보존 못 한 것은 본 ‘헤롯이 (수하의)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고 하였습니다(눅23:11-12.참고/사53:7).
핑퐁 게임을 하듯이 다시 총독 재판정에 서게 된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었던 ‘빌라도’는 무리에게 ‘세 번째 (반복하여)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고 하였습니다(눅23:22). 그러나 ‘유대인들이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고 하자, ‘빌라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하였습니다(요19:7-9).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저들이 너를 고발하는 신성모독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철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풀어줄 수 있는 권한이 자기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라, 빌라도 네가 나를 죽게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한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이 스스로 죽으시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네게는 나를 죽이고 살릴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며,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유대인들에게 큰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19:10-11). 이 말은 빌라도 너는 유대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들어라
유월절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었는데, ‘그 때에 (무력으로 로마의 압제서 독립해야 한다는 열심 당원 소속으로 ’민란과 살인‘을 일삼던)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물었는데 ‘이는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고 하였습니다(15-18.참고/눅23:25). 빌라도가 모든 상황을 볼 때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예수를 유대인들이 시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대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자리를 뺏길까 봐 불안했던 것을 간파했으며, 이것은 유대인의 종교적인 문제이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20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20-26.참고/막15:2-20;눅23:3-5,13-25;요18:33-19:16). 결국 빌라도는 대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를 알면서도, 그들의 요구에 응한 것입니다.
첫 번째 무죄 판결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두 번째 무죄 판결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세 번째 무죄 판결 ‘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눅23:4,14,22).
빌라도는 자기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사형을 언도했습니다(눅23:24).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빌라도는 아내의 당부에도 예수님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19). 주님은 ‘유대인의 왕이냐’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아들임을 듣고도, 예수님으로부터 유대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암시를 듣고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습니다(11,26;요19:7,11).
지각의 울림을 들어라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를 속이고, 배우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이 세 가지가 모두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사형을 언도했습니다(눅23:24). 우리는 각 자가 ‘지각’이 있습니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우리말 ‘지각’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이스데테리온’αἰσθητήριον은 모든 지각 기관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성뿐만 아니라, 이성, 지성, 감성 그리고 기쁨, 노여움, 욕심, 두려움, 근심 다섯 가지 성정인 오성五性도 하나님이 주신 영역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16:7). 우리의 영성은 물론 이성, 지성, 감성, 오성인 ‘지각’이 아니라고 할 때, 우리는 내가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지각의 울림을 들어야 합니다.
성도의 권면을 들어라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빌라도는 아내의 당부에도 예수님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19). 가까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가족, 성도, 친구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의 말이 인간의 말인지, 주님의 말인지에 대해서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내게 가까운 사람의 말이 인간의 말인지, 주님의 말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라고 하십니다(말3:18). 그러나 누가 의인인지 악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과 선행을 잣대로 의인 악인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불신자 가운데도 착하게 사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또한 인간의 의는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라고 하십니다(말3:18).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인간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인지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하여도, 그것은 인간이라는 시각으로 보는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가까운 이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성도의 권면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세 번째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왕이냐’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듣고도,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유대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암시를 듣고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습니다(11,26;요19:7,11).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글자로 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습니다(계1:3). 성도 여러분 말씀 묵상, 설교 듣기, 성경공부를 사모하시나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이렇게 사모하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다고 하였습니다(시109:103,105). 말씀을 사모하는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자기에게 말하는 지각의 울림을 듣지 않았습니다. 배우자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요19:6).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 사람을 없이하소서’(눅23:18).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24). ‘그들이 요구하는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눅23:25).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19:12). 빌라도는 거짓 선지자인 대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듣고, 무리, 군중의 말을 듣고, 가이사 로마 황제의 말을 들었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종교, 군중, 권력입니다.
요사이 종교, 군중, 권력 이 세 가지를 신앙으로 교묘하게 둔갑시켜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도 여러분의 영성, 이성, 지성, 감성, 오성인 ‘지각’ 무엇이라고 합니까? 성도 여러분 가장 가까이 있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음성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종교와 군중과 권력은 절대 합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합하려고 하는 것은 신앙으로 보기에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각의 울림과 성도의 권면과 주님의 음성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세 가지를 배우라
구레네 시몬 – 억지의 은혜
“27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27-31). 예수님은 로마 병사에 끌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32).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채찍과 폭행으로 빈사瀕死 상태이셨기에 십자가를 제대로 질 수 없는 상황이셨습니다.
성경에는 동명 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출생지 또는 거주지를 표기합니다. 시몬 앞에 ‘구레네’Cyrene라는 지역이 기록된 것입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한 도시입니다. 시몬은 리비아 구레네라는 곳에서 살던 유대인으로 규례대로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다가 얼떨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참고/출23:14-17). 그에 대해 ‘억지’로 십자가를 지었다고 말씀합니다(32).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대신 지면서, 채찍과 폭행으로 찢긴 예수님의 혈과 육이 자신의 몸에 묻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진 만큼 예수님의 혈과 육이 묻는다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도중 무리가 예수님에게 내뱉는 가래침과 돌도 맞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 또한 원치 않는 것이니 화가 치솟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에는 그것이 구레네 시몬에게 육체적인 영적인 예수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변화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병행 분문에는 구레네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15:21). 사도 바울은 로마서 말미에 자신의 동역자를 소개하면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하였습니다(롬16:13).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은 나중에 회심했고, 30년이 지난 후, 자신만 아니라, 아내와 자녀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제자로서, 초대교회를 세우는 거룩한 도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구레네 시몬은 희롱과 멸시와 물리적 가격을 받으면서도, 십자가를 끝까지 지셨던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교회를 섬기면서 이러한 역사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교회를 섬길 때 어떤 경우는 억지 동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원해서 참여하여 하는 것이 맞는데 말입니다. 누구 던 처음 종이 될 때는 억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스스로 종 된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주인이 너무나도 자기를 귀하게 대해 주었기에 스스로 종이 된 것입니다(참고/출21:6;롬1:1;약1:1;벧후1:1;유1:1). 어떤 성도이던 예수 믿는 것은 자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을 점잖은 표현으로 인도이고, 직설적 표현으로는 강권입니다. 이러함에도 처음부터 그 강권에 감격과 감사하는 성도가 있지만, 어떤 성도는 “왜 나를 예수 믿게 하는지 나는 신앙이 체질이 아닌데”라며 투덜거리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권하심에 순종하다 보면 나중에는 억지에서 자원하며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억지로 믿게 되었지만, 믿고 난 이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원되지 않더라도, 구레네 시몬가 같이 억지 동참하다가 깨달아가면서 자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레네 시몬 같이 억지 동참이지만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을 보면서, 자기의 십자가 길을 알게 됩니다. 구레네 시몬의 억지 동참이 예수님의 마지막을 가까이서 보았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를 어떤 시각과 태도로 섬겨야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어떤 경우는 하고 싶지 않아도,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시간을 정해서 예배드리고, 시간을 정해서 전도를 하고, 시간을 정해서 봉사를 하게 되면, 억지 동참에서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3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거기 앉아 지키더라 37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33-44.참고/막15:21-32;눅23:26-43;요19:17-27)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고 모욕과 조롱과 힐난을 당하시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에서 주님 오른편에 달린 강도는 구원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두 강도가 있었지만, 동일한 환경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눅23:39-43). 우리 모두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이라는 동일한 환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도 어떤 신앙을 갖는가에 따라, 열매는 다를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을 통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 억지 동참이지만, 그래도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받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청아비전교회를 섬긴다면, 이 제단에서 주시고자 하는 은혜와 소명을 누리고 감당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억지 동참으로 여겨질 때도, 함께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다짐하고 결단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자가에 있던 첫 번째 사람 구레네 시몬, 억지의 은혜입니다.
백부장 – 영접의 은혜
“45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45-5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는 막달라 마리아 등 주님을 따랐던 이들과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54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54-56.참고/막15:33-41;눅23:44-49;요19:28-30).
백부장은 로마 군대 지휘관으로 예수님 십자가형을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한 자신의 상관인 빌라도 총독의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과 다를바가 없기 때문입니다(참고/27). 백부장은 그로인해 어떤 불이익이 돌아온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어떻게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예수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3-34).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에서 백부장의 지휘하에 군인들이 예수님의 사지를 십자가에 못 밖았습니다(33).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백부장과 군인들을 향해 ‘너희들 왜 이렇게 강포하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한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못 박는 군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로마제국의 백부장이라면 전쟁터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죽이는 사람이, 도리어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그 신비스러운 용서의 체험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그 용서 앞에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백부장의 고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백은 영접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요1:12).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있던 두 번째 사람 로마 군대의 백부장, 영접의 은혜입니다.
아리마대 요셉 – 결단의 은혜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57-60.참고/막15:42-47;눅23:50-56;요19:38-42).
아리마대 출신 요셉은 부자이었습니다(57). ‘예수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57).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 요구한 뒤, 예수님의 시신에 최고급 ‘세마포’ 수의를 입혀 드렸습니다(58-59). 그리고 ‘바위 속에 판’, 자기 사후에 안장하려고, 준비해 두었던,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에 모시고, ‘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습니다(60). 유대인들은 바위에 판 동굴을 무덤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동굴 무덤 안에는 벽 쪽으로 긴 의자가 놓여 있는데, 죽은 사람의 몸에 향품을 바르고, 수의를 입혀 그 의자에 눕힙니다. 시간이 지나 유해가 다 부패하면 유골을 수습하여, 상자나 도자기 속에 넣고, 무덤의 벽에 설치한 선반에 얹어 둡니다. 따라서 한 무덤 속에 여러 세대에 걸친 가족들의 유골이 안치되게 됩니다. 부자들 가운데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무덤에 장사되기 싫은 사람들은, 생전에 자신을 위하여 바위 속에 새 동굴 무덤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아리매대 요셉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새 무덤을 돌아가신 예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본문에는 아리마대 요셉을 예수님의 제자로 기록하고 있기에 이처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는데요. 병행 분문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라고 하였습니다(요19:38).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은 분명하나. 당시 예수님을 배척하던 유대 사회에서 드러내 놓고 그분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 사회의 지도층에 있던 부자로서, 자칫 자신이 쌓아 올린 부와 명예를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백성들이 주님을 따르자, 자신의 위치를 잃을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아리마대 요셉도 종교지도자들과 밀첩한 관계를 같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멀리서 보면서, 제자라면서도 공개적으로는 아닌 척 숨겼던 자신을 비난하시지 않으셨던 주님이 떠올랐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요셉의 사정을 백분 이해하시고, 다른 제자와 똑같은 사랑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그동안 유대 사회의 같은 지도층이라고 하면서도 대제사장 종교지도자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요셉으로서는 결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은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귀한 새 무덤을 내어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따르지 못한 데 대해 회개하고, 이제 주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그 이후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로서 자신의 소유를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 드리는 제자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있던 세 번째 사람 아리마대 요셉, 결단의 은혜입니다. 억지의 은혜 구레네 시몬, 고백 영접의 은혜 로마 군대의 백부장, 결단의 은혜 아리마대 요셉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반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정리
가룟 유다의 죽음
지금의 교회력으로 고난주간 목요일 저녁에 잡히셔서, 종교심문을 받으시고, 대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은 사형을 선고했지만, ‘죽이는 권한은 없는지라’, 집행을 위해서는 로마 항제가 임명한 유재 지역 총독의 법정 재판을 받아야 했기에 고난주간 금요일 새벽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긴 것입니다(1-2.참고/막15:1;눅23:1-2;요18:28-32). 이를 안 가룟 유다는 자책을 하며 은 삼십을 돌려주고자 했지만, 대제사장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는 말을 듣고 절망하여, 돈을 성소에 넣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됩니다(3-5). 종교 지도자들은 이 돈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둠지 옳지 않다며, 토기장이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6-10.참고/슥11:12,13;행1:18-19). 나그네는 이름을 모르는 자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이 알지 못하는 자,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라는 영적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참고/마7:23,25:12;계20:15).
십자가에 못 박히게 예수를 넘기다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이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 말씀하신 후, 그 외 고발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답변도 안하셨습니다(11-14). 주님은 자신의 가는 길,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여러 말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범법한 사실을 찾지 못한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그에게 죄가 없다고 하자, 그들로부터 피소 내용을 듣던 중 갈릴리 출신임을 알고, 그 지역 분봉왕인 헤롯에게 보냅니다. 과거 예수님의 기적과 이사를 보고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며 두려워 하던 헤롯은 자신 앞에 죄인으로 선 예수를 조롱하며, 다시 빌라도에게 보냅니다(눅23:6-11./참고마14:2). 이 둘은 서로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눅23:12.참고/사53:7).
다시 총독 재판정에 서게 된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었던 ‘빌라도’는 무리에게 ‘세 번째 (반복하여)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고 하였습니다(눅23:22). 그러나 ‘유대인들이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고 하자, ‘빌라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저들이 고발하는 신성모독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철회하면, 석방할 수 있는 권한이 자기에게 있다는 말입니다(요19:7-9).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나를 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한일 뿐이며,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내가 스스로 죽으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유대인들에게 큰 화가 있을 것이라며, 너는 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암시하셨습니다(요19:10-11).
세 가지를 들어라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에도, 고발하는 무리 배후에는 있는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인한 종교 문제임을 간파하고, 명절의 관례에 따라 폭도인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15-17.참고/눅23:25). 이렇게 빌라도는 대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를 알면서도,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석방하였습니다(20-26.참고/막15:2-20;눅23:3-5,13-25;요18:33-19:16). 빌라도는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세 번이나 무죄를 판결했지만,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참고/눅23:4,14,22,24). 빌라도는 예수님에 관해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는 아내의 당부에도 예수님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19).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아들임을 듣고도, 예수님으로부터 유대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암시를 듣고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습니다(11,26;요19:7,11).
지각의 울림을 들어라. 빌라도는 자기 스스로를 속였습니다(15-17,20-26.참고/눅23:4,14,22,24).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지각’은 헬라어 ‘아이스데테리온’αἰσθητήριον로 모든 지각 기관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성뿐만 아니라, 이성, 지성, 감성 그리고 기쁨, 노여움, 욕심, 두려움, 근심 다섯 가지 성정인 오성五性도 하나님이 주신 영역입니다. 우리의 ‘지각’이 아니라고 할 때, 우리는 내가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지각의 울림을 들어야 합니다.
성도의 권면을 들어라. 빌라도는 아내의 당부에도 예수님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19). 가까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라(말3:18). 그러나 누가 의인인지 악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라고 하십니다(말3:18).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인간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인지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와 가까운 이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성도의 권면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자 주님은 ‘네 말이 옳도다’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아들임을 듣고도, 또한 유대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암시를 듣고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습니다(11,26;요19:7,11). 하나님 말씀을 글자로 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1:3). 말씀 묵상, 설교 듣기, 성경공부를 사모하시나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이렇게 사모하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다고 하였습니다(시109:103,105). 말씀을 사모하는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빌라도는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거짓 선지자인 대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듣고, 무리, 군중의 말을 듣고, 가이사 로마 황제의 말을 들었습니다(24.참고/눅23:25;요19:6,12). 세 가지입니다. 종교, 군중, 권력입니다. 요사이 종교, 군중, 권력을 신앙으로 교묘하게 둔갑시켜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영성, 이성, 지성, 감성, 오성인 ‘지각’ 무엇이라고 합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말씀을 사모하는 우리에게 주님의 음성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종교와 군중과 권력은 절대 합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합하려고 하는 것은 신앙으로 보기에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각의 울림과 성도의 권면과 주님의 음성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세 가지를 배우라
구레네 시몬–억지의 은혜. 예수님은 로마 병사에 끌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27-31).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습니다(27-32). 시몬은 리비아 ‘구레네’Cyrene라는 곳에서 살던 유대인으로 규례대로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다가 얼떨결에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되었습니다(참고/출23:14-17). 채찍과 폭행으로 찢긴 예수님의 혈과 육이 자신의 몸에 묻게 되었습니다. 십자자가를 지고 가는 도중 무리가 예수님에게 내뱉는 가래침과 돌도 맞아야 했을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이 모두 원치 않는 것이니 화가 치솟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에는예수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막15:21). 바울은 동역자 중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하였습니다(롬16:13).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은 나중에 회심했고, 30년이 지난 후, 자신만 아니라, 아내와 자녀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제자로서, 초대교회를 세우는 거룩한 도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희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십자가를 끝까지 지셨던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섬길 때 어떤 경우는 억지 동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던지 예수 믿는 것은 자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강권입니다. 이러함에도 처음부터 그 강권에 감격과 감사하는 성도가 있지만, 어떤 성도는 “왜 나를 예수 믿게 하는지 나는 신앙이 체질이 아닌데”라며 투덜거리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권하심에 순종하다 보면 나중에는 억지에서 자원하며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참고/출21:6;롬1:1;약1:1;벧후1:1;유1:1). 억지로 믿게 되었지만, 믿고 난 이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원되지 않더라도, 구레네 시몬가 같이 억지 동참하다가 깨달아가면서 자원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하고 싶지 않아도,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시간을 정해서 예배드리고, 시간을 정해서 전도를 하고, 시간을 정해서 봉사를 하게 되면, 억지 동참에서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고 모욕과 희롱을 당하시는 말씀을 보면, 주님 오른편에 달린 강도는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33-44.참고/막15:21-32;눅23:26-43;요19:17-27). 십자가에 두 강도가 있었지만, 동일한 환경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눅23:39-43).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이라는 동일한 환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도 어떤 신앙을 갖는가에 따라, 열매는 다를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을 통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 억지 동참이지만, 그래도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받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청아비전교회를 섬긴다면, 이 제단에서 주시고자 하는 은혜와 소명을 누리고 감당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억지 동참으로 여겨질 때도, 함께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다짐하고 결단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자가에 있던 사람 구레네 시몬, 억지의 은혜입니다.
백부장–영접의 은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셨습니다(45-57.참고/막15:33-41;눅23:44-49;요19:28-30). 그 자리에는 로마 군대 지휘관으로 십자가형 담당 책임자 백부장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했기 때문입니다(56). 이것은 빌라도 총독의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과 다를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어떤 불이익이 돌아온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해골’이란 뜻의 ‘골고다’에서 백부장의 지휘하에 군인들이 예수님의 사지를 십자가에 못 밖았습니다(33.참고/눅23:33).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백부장과 군인들을 향해 ‘너희들 왜 이렇게 강포하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눅23:34). 로마제국의 백부장이라면 전쟁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죽이는 사람이, 도리어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그 신비스러운 용서의 체험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그 용서 앞에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백부장의 고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백은 영접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요1:12).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있던 두 번째 사람 로마 군대의 백부장, 영접의 은혜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결단의 은혜. ‘아리마대’ 출신 ‘요셉’은 ‘부자’이자. ‘예수의 제자’였습니다(57).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 요구한 뒤, 최고급 ‘세마포’ 수의를 입혀 드리고, ‘바위 속에 판’, 자기를 안장하려고 준비해 두었던, ‘새 무덤’에 모시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습니다(58-60.참고/막15:42-47;눅23:50-56;요19:38-42). 부자들 가운데 생전에 자신을 위해 미리 무덤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아리매대 요셉은 그 새 무덤을 돌아가신 예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예수님 제자이기에 이처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라고 하였습니다(요19:38). 당시 예수님을 배척하던 유대 사회에서 드러내 놓고 그분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자칫 자신이 쌓아 올린 부와 명예를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멀리서 보면서, 제자라면서도 공개적으로는 아닌 척 숨겼던 자신을 비난하시지 않으셨던 주님이 떠올랐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요셉의 사정을 백분 이해하시고, 다른 제자와 똑같은 사랑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귀한 새 무덤을 내놓으면서, 그동안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따르지 못한 데 대해 회개하고, 이제 주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결단을 했습니다. 그 이후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로서 자신의 소유를 주님을 위해 드리는데 아낌없이 내어 드리는 제자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있던 세 번째 사람 아리마대 요셉, 결단의 은혜입니다. 구레네 시몬, 로마 군대의 백부장, 아리마대 요셉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반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결론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인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하시고,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고 하셨습니다(46,50). ‘영혼이 떠나가시다’는 구절을 가지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고, 문제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고, 자신이 준비해 둔 무덤에 모시고, 수의를 입혀드리고, 입관 하관을 절차를 마쳤습니다. 또한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고 하였습니다(61).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죠.
그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그 이튿날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기억하노니’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였고,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고 하였습니다(62-66). 주님의 대적자들까지도, 십자가의 죽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십자가의 죽음을 지금 이시간 강단에서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했고, 구원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항상 그 십자자 앞에 서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서서, 구레네 시몬을 통한 억지의 은혜, 백부장을 통한 영접의 은혜, 아리마대 요셉을 통한 결단의 은혜로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억지의 은혜, 영접의 은혜, 결단의 은혜로 나아가면, 지각의 울림. 우리의 영성, 이성, 지성, 감성, 오성인 ‘지각’이 선악을 바로 분별하여, 내가 네게 진리를 말합니다. 성도 권면.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인지 바로 알고, 성도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주님의 음성. 말씀을 꿀과 같이 사모하는 자의 발에 등으로 길에 빛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① 지각의 울림. 내가 내게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성, 이성, 지성, 감성, 오성인 ‘지각’이 선악을 바로 분별하게 하옵소서.
② 성도의 권면.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바로 알고, 성도의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③ 주님의 음성. 말씀을 꿀과 같이 받는 자의 발은 등이요 길은 빛입니다. 말씀 묵상, 설교 듣기, 성경공부를 사모하는 자로, 그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④ 억지의 은혜. 구레네 시몬 같이 억지 동참으로 여겨질 때도,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내리워 주옵소서.
⑤ 영접의 은혜. 백부장은 예수님이 못 박는 자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듣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우리와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에게 영접의 은혜를 내리워 주옵소서.
⑥ 결단의 은혜. 아리마대 요셉은 십자가의 죽음을 보면서, 부를 잃을까 제자임을 숨겨왔음에도, 품어주신 예수님 사랑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 무덤을 주께 드리면서, 회개하고, 제자로 산 요셉과 같은 결단의 은혜를 내리워 주옵소서. 우리도 이들과 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반열에 오르게 하옵소서.
빌라도는 거짓 선지자인 대제사장 등의 말을 듣고, 무리, 군중의 말을 듣고, 가이사 로마 황제의 말을 들었습니다. 종교, 군중, 권력에 항복했습니다. 종교, 군중, 권력을 신앙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도 가담도 하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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