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겸손의 왕"(마21:6-9) 종려주일 이재현목사(24.04.13)

이재현목사 2025. 4. 13. 16:43

겸손의 왕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21:6-9 25.02.16. 주일예배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21:6-9.참고/막11:1-11;눅19:28-38;요12:12-19)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겸손하신 왕
 

예수님께서는 2천 여 년 전 오늘인 교회력으로 고난주간의 시작인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벳바게에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1,2). 병행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나귀에 대하여,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어린 나귀라고 말씀합니다(11:2;19:30;12:14).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데리고 올 때,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3).

 
나귀 새끼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소유였지만, 제자들이 찾아와 주께 쓰시겠다고 하자. 아무런 이의 없이 즉시 보내었습니다. 이로 볼 때, 나귀 새끼의 주인은 주님을 알았고, 믿었고,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언젠가는 주님을 섬기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었는데, 갈릴리 주변 동네에 보내시던, 주님을 직접 뵐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벳바게에 오셨고, 자기가 기르던 나귀 새끼를 쓰신다고 하니, 기꺼이 내어드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은 갈망은,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에 대하여, “4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4-5). 이 말씀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를 인용한 것입니다(9:9.참고/62:11).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 왕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황제들이 근엄하게 화려하게 위용있게 오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왕이시지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알려 주십니다. 2천 년 전 이 세상 오신 예수님이 황제와 같이 오셨다면, 그분은 우리의 왕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오셨습니까? 2천 년 전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구원자요. 고난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시는데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셔야 했기에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오신 것입니다. 겸손의 왕입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42:2).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5일 후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 죽음을 향해 묵묵히 길을 가고 계신 것입니다. 겸손하신 왕입니다.
 

겸손은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시면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20:2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도 그와 같이 영의정 좌의정의 권세를 갖고 백성을 강포하려 드느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라고 하십니다(20:26). 예수님은 이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십니다(20:26-27). 너희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어느 정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종으로까지 낮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바라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크게 기뻐할지어다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셨습니다(9:9).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20:28).

 
북한의 김정은도 그렇고, 왕들이 백마 타는 것을 즐겨할까요? 심지어는 엘리야복음선교원에서 십계석국총회로 이름을 바꾼 박명호나,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 이만희 등 이단사이비 종교집단 교주들도 백마 탄 장면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9:11).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실 때는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세상의 황제들은 에수님을 흉내는 것입니다. 백마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지난 역사에 오늘 역사에 장차 역사에 세상 군왕이 평화를 상징하는 백마를 타고 온다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세상에 평화는 다시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는 구원자와 고난자로 오셨기에 겸손함으로 나귀 새끼를 타셨지만, 종말에 다시 오실 예수님은 승리자 심판자, 만왕의 왕으로 백마를 타시는 것입니다. 주 재림 때 백마를 타시고 승리자와 심판자로 오실 그날이 이르기 전까지, 겸손하신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대속의 은혜는 계속되는 줄 믿습니다. 그 은혜 안에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중보하는 이들 위에 함께하기를 원합니다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겸손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른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겸손의 왕이십니다.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신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귀 새끼의 주인과 같이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기꺼이 내어드리는 겸손의 섬김을 축복합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19:31). 제자들은 주인에게 한 마디말도 없이 예수님 말씀만 듣고 나귀 새끼 고삐를 푼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고 하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렇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하나님은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정하신 때 종말에, 백마를 타고 승리자와 심판자, 만왕의 왕으로 임하게 하십니다. 우리도 겸손하게 주를 섬기면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높여 주실 줄 믿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실 때, 겸손은 드리는 것입니다.

 
겸손은 사랑을 얻는다

 
6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6-11참고/11:1-11;19:28-38;12:12-19)

 
제자들이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지금 밧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 1.5km 거리에는 주님을 맞이하러 무리의 대다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놓았습니다(6-8). 대통령과 국빈 등이 전용기 트랩’Trap에서 내려 붉은색 양탄자 위를 걸으며, 좌우에 도열한 이들의 환영 인사를 받는 것과 다르지만, 무리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깔아놓은 길은 겸손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과 조화를 이룬다 하겠습니다(12:13).

 
예수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여 소리 치며 환영했습니다(9.참고/12:13).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금세) 온 성이 소동하여 이는 누구냐며 여기 저기서 묻자, ‘무리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답했습니다(10-11.참고/11:1-11;19:28-38;12:12-19). ‘나사렛이라는 말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라신 동네에 관해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이라고 하였습니다(2:23).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이 구절에는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랄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한 가지는 히브리어 네쩨르וְנֵ֖צֶר,branch로 가지, , 자손을 뜻합니다. 이 네쩨르와 ‘‘네짜레트는 한 어원인데 네짜레트나쩨렛에 거주하는 사람" 나사렛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할아버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 그 뿌리에서 한 가지’. 바로 다윗의 족보에서 나사렛 사람으로, 예수님이 자랄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예수님을 호칭할 때 나사렛 사람 예수여라고 부르고, 본문에는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자라신 동네 나사렛의 뜻 , , 가지는 연약하고 보잘것없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사렛은 당시에도 빈촌이었고, 이방 땅과 가까운 갈릴리 지역의 아주 작은 마을이라는 점에서 유대인들은 나사렛을 이방 땅으로 간주했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나사렛 사람을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1:46;7:41,52;24:5). 이렇게 예수님의 가장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 탄생지나, 내세울 것 없는 동네 성장지나, 특별히 자랑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말들이 먹이통인 구유에 누이셨습니다(2:7). 이것은 위용있는 왕궁에서 태어나는 세상의 왕들과 다른 점입니다. 전혀 그런 곳에서 인류의 구원자, 만왕의 왕이 탄생하실 수 있어?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겸손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대입할 때,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전1:26-29). 여러분에게 어떤 열등의식이 있습니까? 출신, 학벌, 이력, 외모, 능력 내세울 게 없나요. 자존감이 약하신가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나요?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도, 자존감이 약할 필요도,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을뿐더러, 내세울 게 없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3:22.참고/3:17,17:5;1:11,9:7).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빈천한 삶을 사시고, 태어나고 자란 곳도, 자랑할 만한 것 없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십자가까지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여러 성읍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고을입니다. 예수님이 자라신 나사렛의 뜻 , , 가지는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곳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누이신 곳도 말 먹이통인 구유입니다(2:7). 그리고 마지막은 해골을 뜻하는 갈보리’Calvary,:Calvaria,:Κρανίον,:גֻּלְגֹּלֶתָא에서 십자가입니다(27:33;15:22;23:33;19:17). 겸손으로 태어나 겸손으로 마치신 분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겸손을 옷 입으라고 하였습니다(3:12). 겸손함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들 예수님처럼 겸손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십자가의 길이라도 당당합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디에서도 겸손한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함을 확신하는 은총을 축복합니다. 겸손은 사랑을 입습니다.

 
겸손은 거룩을 입는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병행 본문에는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로 나가셨습니다(11:11). 아마도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남매의 집에 유하시면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참고/11:1).

 
그리고 다음 날 지금 교회력으로 고난주간 월요일 이른 아침’ ‘베다니에서 나와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18-19.참고/11:12).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다음과 같이 행하셨습니다.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12-17.참고/11:15-19;19:45-48;2:13-22)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시자 마자) 성전 안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의 규례에 따라, 멀리에서 사는 사람이나, 해외에 거주하는 이들이 예루살렘에까지 와서, 제물로 드릴 우양은 다른 것들보다 성별해야 한다며,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폭리를 취하던)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며’, (하나님은 로마 화폐는 안 받으시니, 유대 화폐로 환전해야 한다며, 많은 수수료를 받던)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호통을 치시며, 물리적으로 대하셨습니다(12-13).

 
그 앞의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다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하신 격한 언사도 그렇고, 매매하는 자들과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신 것도 그렇고,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의 왕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19.참고/11:13). 더욱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때가 무화과가 열매 맺을 때가 아님이라고 하였습니다(11:13). 예수님이 하루 만에 달라진 것인가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무화과나무에 잎사귀만 무성한 것과 같이,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성전을 찾는 신앙의 모양은 있으나,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은 성전을 장삿속으로 삼는 자들로 신앙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집으로 명한 성전을 사리사욕으로 꽉 차서, 강도의 소굴이 되게 했습니다. 주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처럼,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몰아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을 쫓아 내버리시는 분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겸손이 폭력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전을 더럽힌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성전을 더럽힌 것은 하나님께 겸손하지 못한, 불손不遜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고전3:16). 오늘날 성전은 성도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고전3:17). 성전인 성도를 더럽히면 안됩니다. 본문에서 성전에서 매매하고 돈 바꾸던 자들은 성전을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 오늘날 성전인 성도를 수단으로 삼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에게 불손은 주님이 멸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한 성도는 성도에게도 겸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성전인 성도에게 불손을 하지 않고, 겸손히 행하는 것, 겸손의 거룩입니다. 우리의 겸손은 거룩한 것입니다. 겸손은 거룩을 입습니다.

 
겸손은 용서를 이룬다

 
예수님은 제물에 쓰일 우양을 비싸게 파는 자들과 터무니없는 수수료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을 몰아낸 것과 달리, 성전에 있던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셨습니다(14). 지금까지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성전에서 소란한 행위와 떠드는 아이들을 잠잠하게하라고 하자, ‘예수께서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주님을 아이들도 알아본다는 예언이 이루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5-16.참고/8:2;11:15-19;19:45-48;2:13-22). 어린애들도 메시아의 오심을 믿고 찬양하는데 종교지도자들이 모른다는 훈계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떠나예루살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며, 고난주간 월요일을 마치셨습니다(17).

 
병행 본문에는 다음날 고난주간 화요일에 제자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고 하였습니다(11:20-21). 어제 월요일 아침에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하신데로,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19). 그런데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고 여쭈었습니다(20). 답은 당연한 합니다. 주님이 명한데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대답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시며, 믿음의 기도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셨습니다(21-22.참고/11:12-14,20-24).

 
그리고 병행 본문에는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11:25). 믿음의 기도에는 용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의 왕 주님은 십자가에서도 자신을 못 밖은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며 용서하셨습니다(23:34). 지금 예배하는 성도가 다른 사람과 막히지 않게 풀고 기도할 때 하늘에서 응답이 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성도에게는 겸손하신 주님의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겸손은 용서를 이룹니다.

 
겸손의 긍휼을 구한다
 

지금 교회력으로 고난주간 둘째날 화요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고 묻자, ‘예수께서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고 하시며,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고 하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서로 의논하여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이렇게 저렇게 답해도 곤란에 빠질 것 같으니, ‘예수께 대답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하자, ‘예수께서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두 아들 비유로 답하셨습니다(23-27).

 
‘28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28-31.참고/11:27-33;20:1-8)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고 하시며,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28-31). 이에 둘째 아들이니이다고 답하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31).

 
대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앉은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힐난했습니다(9:10-11). 이를 들으신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구약은 인용하셨습니다(9:12-13.참고/6:6). 죄 사함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얻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유월절과 같은 유대인 명절에 성전에서 제사를 온전히 드리라고, 백성들에게 명을 하면서, 뒤에서는 성전에서 제물을 매매하는 자들과 돈을 바꾸는 자들과 결탁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죄인들과 세리는 (성전에)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탄식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18:13). 이에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죄인과 세리 같은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18:14). 본문에서도 두 아들 비유 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시며, 세례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31-32).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이 답답하신가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겸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는 것을 버려 버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겸손은 긍휼 구합니다.

 
 
결론
 

예수님은 2천 년 전 구원자와 고난자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기에,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하신 왕입니다. 우리도 나귀 새끼 주인과 같이 주가 쓰시겠다고 하실 때, 겸손으로 내어드릴 수 있세 하옵소서. 재림 주는 승리자와 심판자로 만왕의 왕으로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높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태어나고 자란 곳도, 자랑할 만한 것 없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십자가까지 가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들 예수님처럼, 겸손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의 길에서도 당당하게 하옵소서. 날마다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장사꾼과 환전상들을 몰아냈습니다. 하나님 임재 상징인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 겸손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전인 성도를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을 물리쳐 주옵소서. 거룩한 하나님께 겸손하게 하옵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에게 겸손히 행하는 겸손의 거룩으로 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믿음의 기도를 교훈하시며, 용서하며 구해야. 하나님도 너희 허물을 사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의 용서를 간구함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다른 사람과 막히지 않게 풀고 기도하여, 하늘 응답의 임함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의 중보에 겸손하신 주님의 용서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두 아들 비유로 둘째와 같이 잘못을 뉘우친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겸손하지 않은 것을 버려 버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