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피드백

"기다림"(요21:1-14) 이재현목사(25.08.24)

이재현목사 2025. 8. 24. 16:02

기다림

 

 

하나님말씀 : 요한복음 21:1-14 2025.08.24. 主日禮拜

 

 

1. 다음 <갈릴리에서 삼년 전과 삼년 후>를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예수님은 예언하신 데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참고/16:21-28,

17:22-23,20:17-19;8:31-9:1,30-32,10:32-34;9:22-27,43-45,18:31-34). 주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자신을 보이시고, 사명을 감당할 것을 명하셨습니다(참고/28:10;16:9-15;24:48;20:17-29).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 증인을 뒤로한 체 갈릴리로 향했습니다. 베드로, 도마, 나다니엘, 요한과 야고보,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두 명까지 포함 모두 7명입니다. 가룟 유다를 빼고 11명 중 4명을 제외하고, 절반을 훌쩍 넘는 일곱 명이 다시 갈릴리로 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요? 언제나 그랬듯이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앞장섰습니다(21:3). 베드로는 삼 년 전 주님의 부름을 받은 후, 삼년 내내 공생애 동안 함께했고,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잡혀 가실 때, 곤경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으로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뒤따라 가다가, 대제사장 집의 여종에게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하고 맹세하는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십자가 현장은 갈 엄두조차 못하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숨어있던 그에게 친히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이전의 어부로 돌아가서 갈릴리에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려면 혼자 가지, 다른 여섯 명에게 동요動搖를 일으키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며 다르지 않은 결정을 했습니다(21:2). 아마도 그들은 베드로를 핑계 삼아 제자의 사명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았을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를 포함 네 명이었는데, 삼년 후에는 7명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던 안드레를 제외하면, 네 명이 늘어난 것입니다. 그릇된 일에는 전염성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까?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21:2). 베드로는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삼 년 전입니다. 그날도 밤새 수고를 하였지만, 거둔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을 상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경각하지 못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밤새 그물질을 할 때, 그 모든 모습을 예수님은 보시고 계셨습니다. 깊은 밤이 지나고, 이른 새벽 동틀 무렵까지, 모든 행동을 주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21:4). 이어진 상황도 삼년 전과 똑같이 예수님은 빈손인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히리라고 하셨고, 그 말씀대로 하였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21:5-6). 그러나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명하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뒤늦게나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한이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알렸습니다(21:7). 이때도 역시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바다로 뛰어 내려주님께 뛰어갔습니다(21:7). 다른 제자들은 오십 칸’, 91m 해변과 거리를 두고, 작은 배로 갈아타고, 물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오릅니다(21:8).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침묵을 깨시고 예수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십니다(21:12). 제자들은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하였습니다(21:12). 당시 상황에서 예수님 앞에선 제들이 얼마나 송구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21:9).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 오기 전에 이미 와 계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21:1,4).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다시 갈릴리 호수로 오실 것을 아신 것입니다. 사람은 힘을 다해 일하고 손에 든 것이 없으면 배가 더 고픕니다. 이를 모르실리 없는 주님이 조반을 준비하셨습니다. 이것도 극진한데 숯불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자들이 빈손으로 육지에 올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셨습니다. 떡과 함께 따듯한 아침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이토록 자상하게 정성을 다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준비한 조반을 제자들이 허기에 지쳐 허겁지겁 먹었을까요? 아마도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조반을 먹으며, 울음을 터드렸을 것입니다. 닭 울기 전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을지 모릅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를 발하지도 않으시고,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무안하지도 않게 하시고, 편안한 얼굴로 맞이하고, 친히 아침을 준비하여, 나누어 주셨습니다.

 

 

 

 

 

2. 다음 <기다림의 영적 의미>를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제자들은 지난 삼 년 전에도, 지금 삼 년 후에도,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같은 장소에서 제자들과 만나셨다는 같음이 있지만, 다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삼 년 전에는 주님이 제자들이 있는 갈릴리 호수로 찾아가셨지만, 삼 년 후에는 갈릴리 호수에 먼저 가서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찾자고 합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셨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답했고,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16:15-17).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이성이 이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일하신 분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시지 않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말씀을 전하는 목사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기다리시는 주님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을 기다리신 것과 같이 예수님은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모습을 보고도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그물을 던진 빈손인 제자들에게, 화를 발하지도 않으시고,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무안하지도 않게 하시고, 기다리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님의 기쁨이 되도록, 기다리시는 주님을 우리는 마음에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얼마나 힘을 다하고 계세요.” 이 질문에 작아지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나요. 아니면 ! 주님의 뜻을 이루고 나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결의를 같게 되세요. 모두가 후자이기를 축복합니다.

 

 

 

 

3. 다음 <나를 기다리는 이가 있는 행복>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이라고 할 때, 무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요. 그러나 사람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물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이들이라면, 그 기다림이 큰 짐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책임이 버거울 수 있지만, 내 삶의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세상 어떤 즐거운 곳도 내 가정 내 집에 견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이 정말 마냥 즐거운 곳만인가요? 부모에게는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고, 혼사 시켜야 하는 큰 짐이 없습니까? 자식은 연로한 아버지 어머니를 봉양하고, 염려 없게 하고,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 큰 짐이 없습니까? 따지고 보면 가정만큼 나에게 큰 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큰 짐이 아닌 소중함을 가정에서 얻습니다. 나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키워준 부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에게는 들을 수 없는 엄마, 아빠로 부르는 자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세워가야 하는 큰 짐을 나의 부모 나의 자녀의 기다림이 이기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의 한 주범이 교도소에서 회심한 후, 목사님에게 어릴 때 엄마가 저와 동생들을 모두 버리고 집을 나가버리셨어요. 저를 기다려주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정말 엄마를 사랑했어요라는 말을 했습니다. 기다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알게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큰 짐으로 느끼지만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지금도 두 팔 벌려 저 영원한 나라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종국이 하늘나라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주신, 예수님이 기다리심을 아는 성도는, 삶의 가치를 알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삶의 가치입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말입니다.

 

 

 

 

 

 

 

4. 다음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를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우리 모두 천국에서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은 동일하나, 강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장막 집인 육는 기한이 있어 무너지면죽음을 맞이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느리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천국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고후5:1). 이어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는 지금 세상에서 고통스러워서 한숨을 쉬면서 원망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는 역설적 표현입니다(고후5:2.참고/11:16). 그런데 이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인 천국을 사모하는데, ‘간절히 사모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5:2). 사모함과 간절히 사모함은 강도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사모는 그렇지 못한 성도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사모하는데, 그냥 사모하는 자가 되지 말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결론임을 안다면, 그 주님을 뵙기를 사모하는데,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고자, 힘을 다하고, 물러섬 없고, 끝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를 주님도 간절히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농사를 지을 때, 해 질 무렵 집에 돌아오는 부모를 맞아도, 뭐 먹을 거라도 사오나 하고, 엄마 손만 쳐다보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하루 종일 일한 부모를 위해 저녁상까지 다 차려 놓는 자식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자식이 더 엄마를 간절히 사모하는지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엄마도 어느 자식이 더 사랑스러운지 자명합니다. 내 배 아파 난 자식도 기대가 더 되는 자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도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를 주님도 간절히 뵙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5. 다음 글을 읽고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주님의 뜻과 주님의 기쁨과 주님의 영광에 반하는 일에 몰두할 때도, 여전히 주님은 우리를 지켜보며 기다리심을 알았습니다. 다시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빈손인 제자들의 모든 모습을 예수님은 깊은 밤에서 동틀까지 주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뒤늦게 자신을 알아본 제자들에게 화를 발하지도 않으시고,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무안하지도 않게 하시고, 편안한 얼굴로 맞이하고, 친히 아침을 준비하여,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예수님은 당장에 화를 발하시거나, 나무라시거나, 무안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기다리십니다. 여전히 기다리십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우리의 안도와 위안과 안심으로 삼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끝까지 내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영광이 되어, 우리 인생의 종국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만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성도입니다.

 

① 베드로와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사명을 받고 난 후에도, 삼 년전 부름 받기 전에 있었던 갈릴리로 가서 그물을 내렸지만, 삼 년 전과 똑같이 빈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지금 자신들 앞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소명(召命)을 망각하고, 주님의 현현(顯現)을 보지 못하는 어두운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② 예수님은 보지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화를 발하지도 않으시고,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무안하지도 않게 하시고, 편안한 얼굴로 맞이하고, 친히 아침을 준비하여, 나누어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주님만을 붙들게 하옵소서.

③ 예수님은 삼 년 전에 제자들이 있는 갈릴리 호수로 찾아가셨지만, 삼 년 후에는 먼저 가서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기다림에 작아지지 않고, 가까이 나가게 하옵소서.

④ 부모로 책임을 감당하고 자녀로 공경하는 것은 큰 짐이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들을 수 없는 엄마, 아빠로 부르는 자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키워준 부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가정을 세워가야 하는 큰 짐을, 나의 부모와 자녀의 기다림이 이깁니다. 주님이 뜻을 이루고, 기쁨이 되어, 영광되기 원하는 기다림이 큰 짐이 아니라, 주님이 지금도 두 팔 벌려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림이 이기게 하옵소서. 영원한 나라의 소망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알게 하옵소서.

⑤ 천국에서 나를 기다시는 주님을 뵙기를 사모를 넘어, 간절히 사모할 수 있게 하옵소서. 지금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지금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여, 주님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