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역린과 제자"(눅 9:57-62) 이재현목사(25.09.14)

이재현목사 2025. 9. 14. 19:11

역린과 제자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누가복음 9:57-62 2025.09.14. 主日禮拜

 

“57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9:57-62)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부자 청년

 

예수님에게 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다(19:16). 이에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19:17). ‘어느 계명이오니이까고 재차 묻자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9:18-19). 그러자 이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다고 자신있게 대답하였습니다(19:20).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10:20;18:21). 아마 이 사람은 부모에게 어릴 때부터, 율법, 성경을 잘 배우고, 그 가르침대로 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다고 자신한 이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끝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하였습니다(19:20).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까라는 말은 제가 더 이상 더 지켜야 할 것이 없는거죠.”라는 자신의 의로움을 확인하려는 말인지, 다 지켰음에도 전부가 아닌 것은 아닌가라고 드는 생각이 기우杞憂이기를 바라는 것인지, 이 사람은 다 지켰다고 말하고 나서도, “무엇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말끝을 흐리며 세 번째 질문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말하고 나서도, “뭐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라며, 영생을 얻기에 무엇인가 불안과 초조해하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고 하셨습니다(19:21).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의 몸은 얼음처럼 굳어졌습니다. 얼굴은 파랗게 질렸습니다. 머리는 쭈뼛해졌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19:22). 이 사람은 성경에 모든 가르침을 다 지켰다고 자부 아닌 자부했지만, 자신에게 있어 가장 큰 자랑이자, 약점이기도 한, 재물을 예수님이 터치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 재물은 어느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되는 영역이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마태복음 1922절에는 재물이 많은 청년으로, 마가복음 1022절에는 재물이 많은 고로’, 누가복음 1823절에는 관리이자, ‘큰 부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은 청년으로 젊은 나이에 큰 부와 관리라는 높은 신분, 뭐 하나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소유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간섭받지 않으려고 하는 영역인 재물을 핸들링’Handling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재물에 관해서 만큼은 누구의 컨트롤’Controll도 불허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에,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을 등진 것입니다. ‘온전즉 영생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수가성의 한 여인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과 달리, 예수님이 직접 찾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사마리아 수가라하는 동네에 한 여인이었습니다(4:5). 예수님은 이 여인을 동네 우물에서 만났는데요(4:7).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4:14).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신이 너희가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아임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요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이야기의 소재를 바꾸십니다. 어떻게 보면 뜬금없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싶을 질문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십니다(4:16). 순간 당황한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얼버무리고는 대화를 전환하려했지만,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하였습니다(4:17-18).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이 여인은 지금 여섯 번째 남편과 동거 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삼혼 사혼이 드문 경우인데, 당시에 여섯 번 결혼이라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동네 아낙네들은 이른 아침이나, 저녁 준비 전인 늦은 오후에 우물물을 길으러 오는데, 이 여인은 유대인 시간 여섯 시’, 우리 시간으로 가장 더운 정오 12시에 우물물을 길으러왔습니다(4:6). 그만큼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여섯 번의 결혼은 숨기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있어서, 여섯 번의 결혼은 어느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되는 영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간섭받지 않으려고 하는 영역인 여섯 번의 결혼을 핸들링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결혼에 관해서만큼은 누구의 컨트롤도 불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앞서 부자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주여라고 호칭하며,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고백했습니다(4:19). 즉 이 여인은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는 중, 예수님이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을 주시는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임을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이전에 자신과는 만난 적도 없고, 사마리아에는 유대인들이 출입하지 않는 곳이기에, 육신으로는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이 자기의 과거를 알 수 없는데, 자신의 여섯 번의 결혼을 언급하시자, 이분은 보통 분이 아니구나, 정말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향해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계속이어 졌습니다. 모든 말씀을 들은 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4:28-30).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들은 여인은 자신의 숨기고 싶은 과거까지도 터치한 분이지만, 그 분은 자신은 수치스럽게 하려고 함이 아니요, 자신 같은 자를 위해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우물물을 길으러온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 숨어 숨어 지내며, 만나지 않던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 소리쳤습니다.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외침을 들은 사마리아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께 나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여인은 구원과 치유를 받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이지요.

 

역린

 

이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명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사람은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듭 관리에 부자이었습니다. 반면 한 사람은 남편을 여섯 번이나 맞아야 하는 마지못해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이들을 만난 주님은 그들에게 차별하지 않고,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들이 누구의 간섭도 받고 싶지 않은 영역을 터치했습니다. 그것은 이들의 곤경에 빠르게 함이 아닙니다. 그 부분까지 예수님은 핸들링하시면서, 컨트롤을 안에 있게 하시어서, 진정한 구원과 치유를 함께 받게 하시었고,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뒤돌아 예수님을 등지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있는 누구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영역까지 터치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것까지 주님께 맡기고 치유받고, 진정한 진리의 자유를 누리고,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시는 예수님, 내가 건들지 말았으면 하는 것도, 예수님은 개입하실 때가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천하통일을 꿈꾸고 있던 ’秦나라는 주변 여섯 개 나라 가운데, 우선 가장 힘이 약한 ’韓 나라부터 공격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한나라 왕인 ’安은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허영에 가득한 인물들만 등용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싶었던 사상가 한비자’韓非子는 왕에게 여러 차례 부국강병을 위한 모략을 건의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한비자의 주장을 묵살한 한나라 왕은 진나라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되자,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내게 되는데요. 마침 한비자의 저작을 읽고, 그의 예리한 통치술에 감탄하고 있었던 진나라의 황제 진시황秦始皇, 그를 자기 사람으로 들이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진시황은 한비자를 진나라에 억류시키고, 한나라를 공격해 정복해 버렸습니다.

 

한비자는 자신의 고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한나라 왕이 진나라에게 패망하는 것을 보면서, 그 설움과 안타까움에서, 달랠 ’說, 어려울 ’難, <세난〉說難 편을 저술했는데요. 이 책의 마지막 구절에 한비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이라는 동물은 유순하여 길들이면 올라 탈 수 있다. 그러나 그 목 아래 한 자 길이의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 경우 그 용을 길들인 사람일지라도, 그 비늘을 건드리면 반드시 죽는다. 군주에게도 거스를 '逆, 비늘 '鱗, ‘역린'逆鱗이 있다. 설득하려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야 설득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온 역린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등 권력을 가진 자의 분노를 건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절대 권력자가 노여워하는 약점 또는 노여움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역린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린은 대통령과 같은 힘을 가진 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자신이 감추어하고 싶은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들추면 노여움을 갖게 됩니다. 화를 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격한 언사를 쏟아냅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금 성경 속에 두 사람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역린을 건드립니다.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과 함께 그 약점까지도 치유해주시고, 진정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손길을 거부하고, 부자 청년같이 뒤돌아서 가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 같이 그 약점까지도 ,주님께 맡기고 처방받고, 주님을 증거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역린은 무엇입니까? 신앙을 가진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예수님께 맡기지 못한 역린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로인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도, 그 가르침에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혹시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완전히 치유함과 자유함을 얻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는 못 맡길 나의 약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약점을 들추어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는 분이 아니라, 그 약점을 깨끗하여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본문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 맡기고, 깨끗함을 얻어야 할 역린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9:57-62).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요. 이들의 면면을 보면, 직간접적으로 내가 주님께 맡기고, 치유 받아야 할 역린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출세

 

“57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9:57-58).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한 사람이 쫓아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고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들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본문의 문맥을 볼 때, 예수님 제자의 길을 포기하고,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말씀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고 아뢰었습니다(10:35). 예수님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10:36)고 하셨고, 야고보와 요한은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청합니다(10:36-37). 야고보와 요한이 말한 우편과 좌편은 병행본문에 보면, ‘주의 나라에서의 우편과 좌편으로,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의 왕처럼 세상을 다스리면, 자신들이 우의정 좌의정, 지금의 내각 수반인 국무총리와 청와대 비서실장을 하고 싶다는 청탁을 한 것입니다(20:21).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임에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상 왕처럼 군림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지요. 이러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의 요청을 무시하시고,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10:38).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즉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내각 수반의 국무총리도 아니고, 청와대의 비서실장도 아니고, 십자가의 희생이요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 차지 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고 한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변변한 거처도 마련하지 못하는 생활을 거치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지금 호기롭게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고 한, 사람의 어떤 약점을 알고 계신 거예요.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면, ‘출세하여 고대광실高臺廣室에 거닐며,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고 하신 것은, 이 사람의 역린을 건드린 것입니다. 그러한 출세를 지향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지금 처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면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볼 때, 자신의 지금 처한 어려운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말로하면 신분 상승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장정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고, 병든자를 고치시고, 사탄을 물리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을 보면서, 예수님은 따르면 정말 출세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서 자신의 미천한 신분으로 서러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오직 출세가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역린이었고, 주님은 그의 역린을 터치하면서, “너는 너의 낮은 신분보다도 더 낮아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러 온 종이다. 나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10:39).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이 사람은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맡은 직분은 직위가 아닙니다. 세상의 직위는 등급입니다. 그 등급의 직위에 따라 출세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교회는 직분입니다. 오히려 직분이 높을수록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합니다.

 

인사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 사람입니다. “59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9:59-60).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만, 그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자기 아버지가 운명하셨으니 가서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들로서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가 되려면, 부모, 형제 관계를 다 끊으라고 말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의미로 말씀하실 리가 없습니다. 먼저 시대적 배경을 볼 때, 이 사람이 고향 근처에 살지 않고 먼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면, 지금처럼 SNS나 유선이 없던 당시 부고를 전해 들었을 때, 이 삼 사일이 지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장례를 끝날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또 하나 영적인 관점에서 포인트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라는 것은 아버지가 죽어도 장례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일, 어두움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어두운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빛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소임을 할 자입니다. 예수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1:9). 그런데 육신적인 일,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인. 사람 ’人, ’事, ‘인사’人事가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사람의 도리라고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응당 지켜야할 것이나, 이것이 신앙과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 가운데 자녀 결혼식을 주일에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제가 모 교회에서 청년부를 지도할 때입니다. 교회 출석도 잘 하지 않고, 연락도 한번 없던 한 청년이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몇 월 몇 일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하드립니다.”라고 했더니, 그 날이 주일인데, 교회에서 결혼식 광고를 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제가 부목사로 시무하던 교회 담임목사님이 아주 보수적인 분이셔서, 성도들이 주일에 혼인이나 연회를 하는 것을 금하시고, 이를 어길 경우 교회 광고도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할 수 없다고 청년에게 말했더니, 이 청년이 나중에는 담임목사님에게까지 전화를 했습니다. 이 청년의 어머니는 교회에 신실한 권사님이셨는데요. 그 분은 아들의 결혼으로 좌불안석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결혼식이 어떠했는지, 그 청년의 어머니인 권사임이 어떻게 했는지, 당시 교우들은 어떻게 했는지 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생각하시고,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분 더 예화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분은 목사님이십니다. 38년 전에 전도사 때 개척을 했습니다. 당시 1980년 후반 이었고요, 지금의 교회와 여러 부분에서 많이 다를 때입니다. 평신도들의 충성 헌신과 목회자들의 목양 일념이 대단했던 때입니다. 이 목사님이 목사 되시기도 전인 전도사 때, 그것도 신학생시절 교회를 개척한 것입니다. 상가를 임대해서 예배드리며, 얼마 안되는 성도가 모였지만, 성도님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해, 개척교회로서는 무리를 해가면서, 외부 강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집회 중 친형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동생이니 당연히 가보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 당시 이미 선친은 돌아가셨고, 홀어머니가 계시고, 고인 된 형은 결혼을 안 하셔서 후손이 없으니, 차남인 전도사님이 상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은 형의 장례식에 가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 사유인즉 자신이 장례식에 가게 되면, 교회에서 진행 중인 개척후 첫 번째 부흥회에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같으면 한 밤에 차를 타고 잠시라고 갔다 올 수 있는데요. 38년 전 그 때는 자가용도 없었고, 교회에 전화도 없었을 때입니다. 그러니 시골 장례식장 갈 수 없었던 것이지요. 아니 안가기로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하신 것이지요. 교회 집회를 마치고 시골집에 가보니, 홀어머니는 거의 혼절한 상태로 누워계셨고요. 누이들과 남동생들 그리고 일가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잘했다 잘못했다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38년 전의 신앙과 오늘의 신앙을 동일한 환경에서 볼 수 없습니다. 또 목회자와 평신도를 같은 연장선에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라는 말씀과 부합하지 않습니까? 왜 형이 죽었는데도 장례식에 못 갔습니까? 자신이 그 자리를 비우면, 교회 집회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 할 목회자의 소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수용과 결단도 성도 여러분 각 각이 하나님에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한 사람에게는, 지극히 사람의 일,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인 인사가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인사가 역린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터치하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 그것까지도 주님께 맡기고,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되는 인사라도, 주님 앞에서는 맡기고, 해결 받으라는 것입니다.

 

혈육

 

이제 세 번째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61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9:61-62). 세 번째 사람은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이 말씀을 보면서, 이 사람의 역린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사람에게 역린은 혈육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피붙이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특히 한국 엄마들의 자식에 대한 애정은 해외에서도 인정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경험적으로도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한, 이 사람의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다짐을 했어도, 그 길을 가기 전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뒤 돌아서는 순간 심경에 변화가 일기 시작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가족들과 나누었던 정들었던 시간들이 뇌리 속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그리고 어렵게 어렵게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을 뒷바라지 했던, 이제 연로하여 보살펴 드려야 할 부모님이 생각납니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한참 돌보아야 할 자식들이 눈에 아른 거립니다.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한 이 사람에게는 혈육이 역린인 것입니다. 이를 아신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가족들에게 인사하려고 뒤돌아서 집으로 행하는 순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다짐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어부였던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그들의 동업자였던 세배대의 두 아들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물을 버려두고, 배를 버려두고, 그리고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씀합니다(4:18-22). 그들에게 혈육은 소중하지 않아서 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은 가족을 떠나게 되었지만 나의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돌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도다’. 말씀합니다(127:1).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후로 자신이 자란 나사렛에 있는 집에 들리 실 수 없었습니다. 이 사정은 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젖동생들이 채비를 하고, 걸어 걸어 예수님이 계신 곳에 들렀습니다. 이 일행을 알아 본 무리들이 예수님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고 전했습니다(3:32).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33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3-35).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이 말씀이 지금 밖에 있는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에게 들렸겠어요. 안 들렸겠어요. 들렸을 것입니다. 얼마나 무안했을 까요? 그러면 예수님은 부모도 몰라보는 분인 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보고 애통해하는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맡길 정도로 효심이 깊으셨던 분입니다(19:20). 예수님은 “34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4-35).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전과 달라야 하는 것이 있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혈육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에는 나와 피를 나눈 부모와 자식만 가족이었지만, 예수 믿고 난 이후에는 예수 믿는 모든 성도가 나의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혈육을 확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가족만을 혈육으로 아는 성도는 틈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애찬을 나눌 때, 한 분이 가장 먼저 식당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자리에 자신의 가족 수 데로 세팅을 하고, 밥상을 차립니다. 가족애는 남다르나, 전 성도가 나의 혈육인 것을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그 애찬의 시간 새가족에게 다가가 형제님 자매님 부르며, 식사를 준비해 놓는다면 참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혈육으로 인해 아직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발걸음이 있습니까? “나는 자식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위해서는 모르겠어요.”라는 마음을 갖고 계세요. 그것을 아셔야 해요. 여러분이 자식을 위해 죽어도 자식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즉 자식을 위해 죽으면 지금 자식의 육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나, 생명, 영생을 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죄를 위해, 내 자식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나와 자식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을 가지면, 자식은 주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혈육의 역린까지 주님께 맡기고 해결 받아야 합니다.

 

 

정리

 

부자 청년

예수님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19:16). 이에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19:17). ‘어느 계명이오니이까고 재차 묻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9:18-19). 그러자 이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다고 자신있게 대답하였습니다(19:20.참고/10:20;18:21).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말끝을 흐렸습니다(19:20). 영생을 얻기에 무엇인가 불안과 초조해하는 이 사람의 세 번째 질문에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고 하셨습니다(19:21). 순간 이 사람의 몸은 얼음처럼 굳어졌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19:22).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은 청년으로 젊은 나이에 큰 부와 관리라는 높은 신분, 뭐 하나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소유했습니다(19:22;10:22;18:23). 그런 그에게 재물은 어느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되는 영역이었기에 예수님을 등진 것입니다.

수가성의 한 여인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4:5-7). 예수님은 그녀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4:14). 자신 너희들이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아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소재를 바꾸어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4:16). 순간 당황한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얼버무리고는 대화를 전환하려했지만,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하였습니다(4:17-18). 여인에게 여섯 번의 결혼은 어느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되는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 부자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지 않고, ‘주여부르며,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고백했습니다(4:19). 즉 이 여인은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는 중, 예수님이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을 주시는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임을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자기의 과거를 알 수 없는데, 그것을 언급하시자, 이분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소리쳤고, 이 외침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 나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4:28-30). 이 여인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이지요.

 

역린

 

이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명 중 한 사람은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듭 관리에 부자이었습니다. 반면 한 사람은 남편을 여섯 번이나 맞아야 하는 마지못해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이들을 만난 주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들이 누구의 간섭도 받고 싶지 않은 영역을 터치했습니다. 그것은 이들의 곤경에 빠르게 함이 아닙니다. 그 부분까지 예수님은 핸들링하시면서, 그 부분까지 예수님의 컨트롤 안에 있게 하시어서, 진정한 구원과 치유를 함께 받게 하시었고,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뒤돌아 예수님을 등지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있는 누구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영역까지 터치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것까지 주님께 맡기고 치유받고, 진정한 진리의 자유를 누리고,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시는 예수님, 내가 건들지 말았으면 하는 것도, 예수님은 개입하실 때가 있습니다.

역린'逆鱗은 군주를 설득하려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야 설득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한나라의 사상가 한비자’韓非子가 쓴 <세난〉說難에 나온 것입니다. 이 역린은 절대 권력자가 노여워하는 약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데요. 모든 사람에게는 감추어하고 싶은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들추면 화를 발하게 됩니다. 지금 두 사람과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역린을 건드립니다.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과 함께 그 약점까지도 치유해주시고, 진정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증거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역린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지만, 아직도 예수님께 맡기지 못한 역린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시간 완전히 치유함과 자유함을 얻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는 못 맡길 나의 약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약점을 들추어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는 분이 아니라, 그 약점을 깨끗게하여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제자 삼으시는 말씀이 본문입니다(9:57-62).

 

출세.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한 사람이 쫓아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고 하였습니다(9:57). 이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9:58). 문맥을 볼 때, 이 사람은 주님 제자의 길을 포기하고,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와 유사한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고 하자,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되 물으셨고, ‘하나는 주의 우편에,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청합니다(10:35-37.참고/20:21). 아마도 주님이 왕으로 세상을 다스리면, 자신들이 국무총리와 비서실장을 하고 싶다는 청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 세례즉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며, 제자의 희생과 섬김을 가리키셨습니다(10:38).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변변한 거처도 마련하지 못하는 생활을 거치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호기롭게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고 한, 사람의 어떤 약점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면 출세하여 고대광실에 거닐며,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 이 사람의 역린을 건드린 것입니다. 출세 지향을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쩌면 세상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서러움을 겪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오직 출세가 전부였고, 이 역린을 주님이 터치하면서, “너는 너의 낮은 신분보다도 더 낮아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러 온 종이다. 나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10:39). 이 말씀에 그는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는 직위가 아닌 직분입니다. 오히려 직분이 높을수록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합니다.

 

인사. 두 번째 사람에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만,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합니다(9:59). 아들로서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십니다(9:60). 예수님이 제자가 되려면 가족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말하실리 없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라는 것은, 죽은 일, 어두움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빛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소임을 할 자입니다(참고/1:9). 주님을 따르는데 육신적인 일,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 ‘인사’人事가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리가 신앙과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 청년부를 지도할 때 출석도 하지 않던 한 형제가 전화가 와서 주일에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교회 광고를 해 줄 수 있냐고 부탁을 했습니다. 당시 담임목사님이 보수적이신 분이셔서, 주일 연회를 금하시고, 이를 어길 경우 광고도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형제의 어머니는 신실한 권사님이셨는데 아들의 결혼으로 좌불안석이었습니다. 그 후 결혼식이 어떻게 했는지 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성도님 각자가 생각하시고,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목사님이신 이분은 38년 전 신학교 공부를 하면서 전도사 때 교회를 개척을 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도님들을 위해 무리를 해가면서, 외부 강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집회 중 결혼도 안한 친형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차남인 전도사님이 상주가 되어야 했지만, 장례식에 가게 되면 개척 후 첫 번째 부흥회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에 안가기로 했습니다. 자가용도 전화기도 없었던 때입니다. 부흥회 후 시골집에 가보니, 홀어머니는 거의 혼절한 상태로 누워계셨고요. 누이들과 남동생 그리고 일가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38년 전과 지금의 신앙을 동일한 환경에서 볼 수 없습니다. 또 목회자와 평신도를 한 조건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라는 말씀과 부합하지 않습니까? 왜 형이 죽었는데도 장례식에 못 갔습니까? 자신이 그 자리를 비우면, 교회 집회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 할 목회자의 소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수용과 결단도 성도 여러분 각 각이 하나님에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아버지를 장사의 일,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 인사가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인사가 역린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터치하신 것입니다. 그것까지도 주님께 맡기고,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되는 인사라도, 주님 앞에서는 맡기고, 해결 받으라는 것입니다.

 

혈육. 세 번째 사람은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9:61). 그에게 역린은 혈육입니다. 이를 아신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9:62). 제자가 되겠다고 다짐을 해도,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뒤 돌아서는 순간 그동안 정들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다짐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물을 버려두고, 배를 버려두고, 그리고 아버지를 버려두고, 따랐다고 말씀합니다(4:18-22). 자신은 가족을 떠나게 되었지만 나의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돌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집을 떠나셨고, 어머니 마리아와 젖동생들이 채비를 하고, 걸어 걸어 예수님이 계신 곳에 들렀을 때, 무리가 주님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고 전하자, “33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2-35). 아마 밖에 있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도 그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예수님이 불효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애통해하는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맡길 정도로 효심이 깊으셨던 분입니다(19:20). 예수님은 “34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전과 달라야 하는 것이 있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혈육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에는 나와 피를 나눈 부모와 자식만 가족이었지만, 예수 믿고 난 이후에는 예수 믿은 모든 성도들이 나의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혈육을 확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만을 혈육으로 아는 성도는 틈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 후 애찬 시간에 식당에 가장 먼저 달려가 제일 좋은 자리에 자신의 가족 수 데로 세팅을 하고, 밥상을 차립니다. 가족애는 남다르나, 전 성도가 나의 혈육인 것을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아직도 혈육으로 인해 아직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발걸음이 있습니까? “나는 자식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위해서는 모르겠어요.”라는 마음을 갖고 계세요. 그런 자식을 위해 죽어도 자식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즉 자식을 위해 죽으면 지금 자식의 육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나, 생명, 영생을 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죄를 위해, 내 자식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나와 자식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을 가지면, 자식은 주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혈육의 역린까지 주님께 맡기고 해결 받아야 합니다.

 

최종 정리

 

오늘 설교는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 갔고, 다른 사람은 예수님이 찾아 가셨지만, 공통된 것은 예수님은 둘 다에게 구원을 받고 제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사람 부자 청년은 자신의 역린 재물을 예수님이 터치하자, 근심하며 뒤돌아섰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인 자신의 역린인 여섯 번의 결혼을 예수님 터치하자, 잠시 곤혹스러웠는지는 모르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고,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실 때에 나의 역린까지 핸들링하십니다. 나는 그것을 건들지 말았으면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통해 나를 수치스럽게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함께 치유 받아, 진리의 자유를 얻고, 제자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 믿는 우리의 역린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세 사람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비교해 보았습니다.

 

1. “57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첫 번째 사람을 통해서는 출세의 역린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배움으로 인해, 집안 배경으로 인해, 서러움을 겪은 분들에게, 그 못 배움과 가난은 역린입니다. 이런 분 가운데 이를 악물고 재물을 모아 부를 축척하고, 또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 중진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 자신의 못 배움과 가난의 역린을 주님을 만나고서도 치유 받지 못해, 교회에서 다른 성도들을 자신 회사의 하급 사원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 아무게 집사 커피 좀 한 번 타와 봐, 진하게 말고 좀 연하게간혹 이런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친숙해서가 아니라, 아랫사람 취급하듯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지난날 자신의 못 배움과 가난에서 이제 벗어나 부를 갖고 성공하여, 교회에서 중진된 것을 출세로 아는 것입니다, 이 분은 아직 자신의 못 배움과 가난을 치유 받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은 받은자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성도가 다른 성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맡은 직분은 직위가 아닙니다. 직위는 등급입니다. 그 등급의 직위에 따라 출세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교회는 직분입니다. 오히려 직분이 높을수록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합니다.

 

2. “59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두 번째 사람을 통해서 역린은 인사입니다. 인사는 사람의 일,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뜻합니다. 사람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역린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인사가 역린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터치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되는 인사라도 주님 앞에서는 맡기고 해결 받으라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집회 중에 친형의 부고를 듣고도 참석지 못했습니다. 인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 할 목회자의 소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수용과 결단은 성도 여러분 각 각이 하나님에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3. “61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세 번째 사람을 통해서 역린은 혈육입니다. 우리 모두 가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 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분은 예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자식을 위해 죽으면 지금 자식의 육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나, 구원, 영생, 천국을 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죄를 위해, 내 자식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나와 자식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을 가지면, 자식은 주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혈육의 역린까지 주님께 맡기고 해결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실 때에 나의 역린까지 핸들링하십니다. 나는 그것을 건들지 말았으면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통해 나를 수치스럽게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함께 치유 받아, 진리의 자유를 얻고, 제자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성도와 그 성도들이 섬기는 교회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① 예수님은 부자 청년과 수가성 여인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등지고, 한 사람은 구원과 치유 받았습니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주님을 만났을 때, 택자로 구원과 치유를 받게 하옵소서.

 

② 예수님께서 내가 건들지 말았으면 하는 역린을 개입하실 때는 수치를 주시려함이 아니요. 치유받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제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께 못 맡길 나의 약점이 없습니다. 나를 깨끗게 하시고, 완전한 믿음의 사람 되게 하시며, 주님의 능력을 받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③ 출세出世,success의 역린을 주님이 터치하실 때, 겸허하게 하옵시고, 주님과 같이 높을수록 낮은 자리에서 섬기게 하옵소서.

 

④ 인사人事, 사람의 도리의 역린을 주님이 터치하실 때, 그것까지도 주님께 맡길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이 해결해 주시고, 주님을 우선할 때,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게 하옵소서.

 

⑤ 혈육, 아직도 가족(혈육)으로 인해 나아가지 못하는 역린을 주님이 터치하실 때, 내가 주님을 위해 죽으면, 주님이 나의 가족을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하게 하옵소서. 예수 믿는 모든 성도가 나의 가족임을 알고 교회 공동체 사랑으로 함께 이기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