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능력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고린도전서 4:18-20 2025.09.07. 主日禮拜
“18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18-20)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고린도교회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고린도는 현재 그리스 남부의 반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그리스도의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Peloponnesos Pen.를 연결하는 해협에 위치한 무역과 상업 중심 도시입니다. 지금도 고린도에는 당시 화려하고 거대하고 위엄있는 유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유럽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바울은 오늘날 그리스인 빌립보를 시작으로 데살로니가, 베뢰아 그리고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입니다.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본도 출신의 신실한 전도자요, 천막 제조업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도움을 받으며,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또 마게도냐로부터 온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고,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으로 교회사역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게 됩니다(행18:1-8). 고린도에서 교회를 개척한 사도 바울은 18개월을 체류하며 사역하였습니다(행18:11).
그러나 어느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린도에서도, 유대인들의 대적으로 법정에까지 서야 하는 핍박을 받게 됩니다. 더 많은 이방에 복음을 전해야 했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야 했고요. 사도 바울의 3차 선교 여행시 에베소 체류 때,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게 됩니다(고전16:8). 그것은 고린도교회의 많은 문제를 전해 듣고, 이에 대한 ‘솔루션’Solution을 편지로 보낸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18개월, 1년 6개월 동안 목회를 하였다고 했는데요. 그 이후로도 큰 성장이 계속되었고, 바울이 전도하고 개척한 교회 중 가장 큰 교회에 속하고, 가장 많은 은혜를 받은 교회였지만, 또 가장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롬5:20). 고린도교회도 그러했던 것이지요.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고린도 교회의 많은 문제에 대한 대처와 방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오늘 우리의 교회 생활에 좋은 답안을 제시하는 모델이 됩니다.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 가운데, 오늘 우리가 봉독한 고린도전서 4장에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부정입니다. 앞서 설명한데로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은 핍박을 피해 더 이상 복음을 전하기 어렵게 되자, 다른 도시들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린도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는데요. 다시 고린도를 찾고자 하였으나, 사정의 여의치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교회를 개척한 사도 바울이 재방문이 어렵게 되자, 바울의 사도직을 격하하며,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인 냥 행세를 하는 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교회에서 구축하고자,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라는 주장까지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낭설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증거하던 바울에게도 들려지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책망과 반론 그리고 권면과 교훈을 기록한 것이 고린도전서 4장입니다.
교만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4:6).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들며, 고린도교회에 본을 보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본을 따라, 교만하지 말라고 합니다. ‘기록된 말씀’ 즉 성경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 자세히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서,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자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된 자들이며, 교회를 화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란하게 하는 것이요, 이는 교만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자존
고린도교회의 교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들의 교만은 ‘자존’自尊입니다. ‘셀프 리스펙트’Self-Respect 자존은 나쁜 말이 아닙니다. “자기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높여 잘난 체하는 것”는 바르지 않은 자존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고린도교회에서 스스로 자기가 잘나서 된 것처럼, 떠벌이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별다르게 보아 줍니까?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인데,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서론에 소개한데로 크게 성장을 거듭하여, 거룩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결과에 도치된 자들 가운데는 처음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던 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가 교회에 쏟아지고, 수많은 영혼이 교회로 몰려 들어오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노력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자신들의 수고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신의 헌신으로 이만큼 세워질 수 있었다는 바르지 않은 자존이 싹이 트고 자라서, 교만한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라는 ‘이데올로기’Ideology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임한 거룩한 부흥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은 명색일 뿐 실상은 자신들의 노력과 수고와 헌신이었음을 자랑하는 바르지 않은 자존이라는 교만이 거목으로 자라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그릇된 자존은 자신들을 위해 견고한 성을 쌓는 ‘주도권’ 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말합니다. “11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11-13). 바로 이 시각까지, 고린도교회가 바르지 않은 자존으로 교만이 사로 잡혀있을 때, 바울과 그 일행은 지금도 여전히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도시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희생과 고초를 겪었지만, 그 다함을 쉬지 않고, 지금도 희생과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욕을 먹을 때 저주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하고, 박해를 받으면 대응하지 않고 인애하고, 비방을 받으면 선한 말로 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은 세상의 쓰레기처럼 취급받고, 만민의 찌꺼기 같은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희생과 고초 겪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말씀합니다(고전15:10).
그러나 고린도교회 내에서 바르지 않은 자존을 가진 자들은 교회의 거룩한 부흥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는 명색일 뿐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었다는 바르지 않은 자존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도권을 쌓은 것이지요.
행세
고린도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 직을 부정하는 자들의 첫 번째 교만은 바르지 않은 자존, 주도권이고요. 두 번째는 ‘행세’行世입니다. 행세는 좋은 의미에서 “세상에서 사람의 도리를 행하거나 또는 그런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해당되지 아니하는 사람이 어떤 당사자인 것처럼 처신하여 행동하거나 또는 그런 짓”의 바르지 않은 행세의 뜻도 있습니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전4:8). 사도 바울은 행세를 하려는 자들에게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놓고 왕이라도 된 듯이 다스리려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다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처럼 다스리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으로 교회의 부흥을 이룬 줄 아는 자존의 교만을 가진 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 나아가 왕처럼 다스리려고 했습니다. 바르지 않은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득권’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시무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피택 후 교육 과정을 지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강의를 하면서, 이 자리에 선배 장로와 안수집사와 권사들이 오셔서, 기도도 담당하고 조언을 전하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매주 과정 때마다, 한분 씩을 초청해서 기도와 조언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참 잘들 하셨습니다. 제직으로 중진으로 그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겪었던 체험을 이야기하며, 좋은 일은 물론 어려울 때 담임목사님을 어떻게 뒷받침해야 하고, 성도들이 동요되지 않도록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하여, 선배들로서 귀한 조언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강의 한 시간 보다, 선배들의 짧은 십 분 동안이지만, 그분들의 진솔한 소회가 신임 제직에게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분은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즉 앞서 다른 분들과 같이 중진으로서 교회를 섬기면서, 겪었던 어려움에도 담임목사님을 보필하고, 성도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했다는 이야기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오늘까지 교회를 지켰으니,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중진이 될 수 있는 것도, 자기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니, 여러분들이 나를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선배인 나의 말을 후배들은 따라야 한다는 뉘앙스Nuance를 풍겼습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들면서, 당시 피교육생이 그렇게 듣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세운 제가 민망하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당신들이 교회에서 왕 노릇을 하려고 하느냐, 그러면 내가 다시 찾아가, 왕처럼 너희들을 다스리면 좋겠느냐고 말입니다. 당시 기득권을 갖고자 하는 이들에게 바르지 않은 행세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라는 말씀이 있는데요(고전4:12). 이 말씀은 당시 사도 바울이 여러 도시에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희생과 고초를 겪었음에도,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를 받지 않고, 천막업을 통해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했다는 뜻입니다(참고/행18:3). 참 귀감이 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요 고린도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고히 하고자,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 직을 부정한 자들은 “바울이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은 스스로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도라면 교회에서 당당히 사례비를 받아야 하는 마땅하다.” 심지어는 “겉으로만 안 받는다고 말할 뿐, 교회의 재정을 횡령한다”고 까지 비방을 하였습니다. 요즘이나 예전이니 이렇게 말 지어내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있었나 봅니다. 사례비를 받지 않아도 비난하니 말입니다.
바울의 사도직을 흠집 내려고 그 책잡을 건수를 생각하다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목회하는 그것까지 비방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사례비를 받지 않아도 문제로 삼는 것이지요. 자기가 진짜 목사라면 사례비를 받아야지, 안 받는 것을 보니 뒤에서 챙기는 것 아닌가 하는 소문을 퍼트리는 것입니다.
“4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전9:4-9).
본문에 기록된 게바는 반석을 뜻하는 베드로의 아람어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성도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예수님 열 두 제자 가운데 수제자이고, 예수님 승천이 후, 어머니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초대교회를 이끈 대 사도입니다.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이었다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둘 위치는 높고 낮음이 아니라, 같은 사도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처럼 먹고 마실 권리가 없어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고, 아내를 둘 권리가 없어서 독처한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울도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고자 하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군 복무 중인 군인은 자비량이 아니라 국가에서 그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고, 포도를 가꾸면 그 열매를 먹는 것이며, 양 떼를 기르면 그 양의 젖을 얻는 것은 당연하여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단 이러한 인간사의 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보아도 일하는 소에게 입 마게를 씌우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25:4)). 그러므로 바울이 사례비를 받을 권한이 없어 안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9:10-12). 하나님 말씀인 율법에 일하는 소에 입마개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비유하여 우리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밭 가는 사람은 추수의 희망을 품고 농사를 짓는 것이고, 타작하는 사람은 자기 몫의 희망을 갖고 도리깨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바울과 자신의 일행이 희생과 고초의 헌신으로 교회에 영적인 일을 심고, 교회에서 육적인 사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받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 즉 우리가 사례를 받음으로 그것이 육적인 것을 취하기 위한 것으로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면, 아예 그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일 뿐, 사례비를 받을 권리가 없어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저의 목회의 한 부분정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순서를 정할 때 교회의 일에서 제 사례비는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그도 아닌 맨 마지막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권리를 행세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은 반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가지려고,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행세할 권리가 없음에도, 마치 자신들이 사도로서 교회를 세운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진짜 행세를 할 자는 겸손함으로 행세하지 않고, 행세를 하지 말아야 할 교만한 자가 행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르지 않은 행세라는 교만에 빠진 자들입니다. 기득권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영악
고린도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고히 하고자,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직을 부정했는데요. 이들의 첫 번째 교만은 바르지 않은 자존, 주도권이고요. 두 번째는 교만은 바르지 않은 행세, 기득권이고요. 세 번째는 ‘영악’靈惡입니다. 영악은 이해가 밝고 약다는 뜻인데요. 이 또한 본래 의미는 좋으나, 이것이 지나치면 덕이 되기 어렵습니다. 어떤 면에서 주님의 일은 참 미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이익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기에 약게 하려고 해서는 교회 일과 조화되기에 적합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고전4:10).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약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또한 바울과 그의 일행은 약하나 대적 자들은 강하고, 바울과 그의 일행은 비천, 천대를 받고 있으나, 대적자들은 존귀, 영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명 ‘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것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바르지 않은 영악한 성도가 되지 말고, 어리석게 보이나 신실한 주님의 일꾼이 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청아비전교회를 섬기면서 후자에 속한 분들이 임을 보고 항상 마음에 흡족해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동의하시죠.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일행들을 세계와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루 하루 형 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 같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 만드신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사역 가운데도 교만하지 않도록 사도 바울을 낮추셨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대적자들에게 너희들이 바르지 않은 영악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 가운데,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고린도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자들의 첫 번째 교만은 바르지 않은 자존, 주도권. 두 번째는 교만은 바르지 않은 행세, 기득권. 세 번째는 바르지 않은 영악, 소유권에 대해서 책망과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 주도권, 기득권, 소유권은 성도가 주장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하나 하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르지 않은 자존과 행세와 영악의 교만을 갖게 된 원인과 해결에 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고전4:18). 무슨 말씀입니까? 고린도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자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시간이 오랜 기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아! 이제 바울은 영 영 고린도교회에 오지 않는구나”.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설립자가 사라졌으니, 자신들이 주도권, 기득권, 소유권을 가지려고, 바르지 않은 자존과 행세와 영악의 교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고전4:19). 바울은 자신이 지금은 고린도에 갈 수 없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즉 “만약 주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주께서 원하시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게 되면, 꼭 확인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으니’. 즉 교만한자들이 정말 자기들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으로 교회가 부흥했다면, 그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확인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능력이 대단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그래서 교회의 주도권을 갖고, 기득권을 갖고, 소유권을 가지려고 하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면서, 떠벌이는 말쟁이 인지 확인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능력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능력입니다.
바울이 부름받은 후, 성령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성령과 함께 한 바울에게 어떤 능력이 나타났습니까? 빌립보 간수의 회심에서 보듯이 바울을 결박하고 감금하였던 자들, 불신자들이 그의 설교를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행16:33). 얼마나 그의 능력이 대단했던지,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자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귀신들린 자에게 얹으면 악귀도 나갔습니다(행19:12). 그뿐 아니죠. 창에 걸터앉아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깊이 졸던 유두고가 그만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 층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습니다(행20:9). 바울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의 몸을 안고, 회중들에게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선포하였습니다(행20:10).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큰 위로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행19:12). 바울의 이러한 능력 말입니다. 바울과 같이 성령이 함께 함으로 행한, 이러한 능력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능력이 대적자들에게도 현현顯現된다면, 바울은 대적자들을 인정하겠다는 말입니다.
능력은 이뿐 아닙니다.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이 말씀의 바울과 같이, 대적자들이 희생과 고초를 당하고도, 복음을 계속 전했다면,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감당하는 것도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 지금까지 당한 환난보다 더 큰 환난이 이 후로 있지만, 바울은 자신을 염려가 아니라, 그 안에서도 교회를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적자들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그것을 능력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입니다.
최종 정리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하여 18개월 동안 섬겼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핍박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없게 되자, 다른 도시들에 전도를 하기 위해 떠나야 했습니다. 이 전도여행 중 고린도교회가 큰 부흥을 이루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많은 문제 휩싸였다는 소식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편지로 쓴 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그 중 고린도전서 4장은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과 권면입니다.
이 대적자들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올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바울을 비방했습니다. 그의 사도직을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명색일 뿐 교회가 큰 부흥을 이룬 것은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대적자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른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자들의 교만, 바르지 않은 자존을 주도권이라고 했고요, 바르지 않은 행세를 기득권이라고 했고요. 바르지 않은 영악을 소유권이라고 했는데요. 비슷한 것 같지만, 세밀하게 분류를 한다면, 자존, 주도권은 ‘프리미엄’Premium에 가깝고, 행세, 기득권은 ‘인센티브’Incentive에 가깝고, 영악, 소유권은 ‘리베이트’Rebate에 가깝습니다. 세 가지 공히 자기 것이 아닌데 갖거나, 덤으로 받거나, 얻을 것 이상으로 얻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브로커’Brok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열심히 일을 하다보면,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이와 같은 것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성경적인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에게 자신들이 지금까지도, 스스로 높이지 않고, 희생과 고초를 겪고 있으며, 행세할 수 있으나 행세하지 않으며, 약지 않고 어리석을 정도로 주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며, 하나님이 기뻐함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만의 바르지 않은 자존과 행세와 영악을 버릴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 권면도 대적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함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전4:14). 아멘!
그리고 오늘 바울은 대적자들에게 말쟁이가 아니라 능력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대적자들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으로 교회가 거룩하게 부흥했다면, 바울과 같이 수많은 영혼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병들자들이 고침받고 악귀가 떠나가고, 죽은자가 살아는 능력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능력은 이러한 역사와 이적들과 함께, 바울과 같이 수많은 감금과 매질과 죽음의 위협과 헐벗고 굶주림에도,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희생과 고초에도 자신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염려하는 모습 또한 능력이니 그것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본문에 바울의 대적자들과 같이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한 분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른 것과 같이 교만한 자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또한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자들의 교만, 바르지 않은 자존 주도권 프리미엄, 행세 기득권 인센티브, 영악 소유권 리베이트. 자기 것이 아닌데 갖거나, 덤으로 받거나, 얻을 것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는 이들이 없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이와 같은 것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성경적인 자세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바울과 같이 스스로 높이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 희생과 고초를 겪고 있으며, 행세할 수 있으나 행세하지 않으며, 약지 않고 어리석을 정도로 주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함을 위해서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지금도 이후로도 더욱 말이 아닌 능력,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말씀이 실현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바울과 함께 함으로 나타났던 능력, 수많은 영혼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병들자들이 고침받고 악귀가 떠나가고, 죽은자가 살아는 능력, 그리고 이러한 이적과 함께 바울과 같이 수많은 감금과 매질과 죽음의 위협과 헐벗고 굶주림에도,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모습의 능력이 역사하는 청아비전교회가 될 수 있기를 이재현목사가 될 수 있기를 공동체 가족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리
고린도교회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신실한 전도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리고 동역자이자 제자인 실라와 디모데까지 합류, 복음을 전파하면서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하는 등 큰 부흥을 이루고, 18개월을 체류하며 사역하였습니다(행18:1-11). 그러나 대적자들로 인해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야 했고, 3차 선교 여행 중 에베소 체류할 때, 고린교회의 많은 문제를 듣고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고전16:8). 바울이 전도하고 개척한 교회 중 가장 큰 교회에 속하고, 가장 많은 은혜를 받은 교회였지만, 또 가장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교회이기도 했습니다(참고/롬5:20). 바울이 고린도교회 문제에 대한 대처와 방법은 우리들의 교회 생활에 좋은 답안이 됩니다. 본문 여러 문제 가운데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부정입니다. 바울의 사도직을 격하하며, 교회의 주인인 냥 행세를 하는 자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교만
바울이 ‘본’을 따르지 않고,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자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된 자들이며, 교회를 화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란하게 하는 것이요, 이는 ‘교만’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고전4:6).
자존. 고린도교회 교만의 첫 번째는 ‘자존’自尊,Self-Respect입니다. “자기를 높여 잘난 체하는 것”는 바르지 않은 자존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잘나서 된 것처럼, 떠벌이는 자들에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별다르게 보아 줍니까?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인데,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라고 책망하였습니다(고전4:7). 고린도교회가 크게 성장을 거듭하면서 성취에 도취하여 처음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백하던 자들이, 많은 영혼이 교회로 몰려 들어오자, 자신들의 노력을 드러내고, 수고를 알아주고, 헌신을 내세우며, 바르지 않은 자존이 싹이 트고 자라서, 거만한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교만하여 바르지 않은 자존에 사로잡혀있을 때도, 자신은 여전히 수많은 도시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희생과 고초를 겪었지만, 그 다함을 쉬지 않고, 지금도 희생과 고초를 당하고 있다면서, 그러에도 욕을 먹을 때 저주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하고, 박해를 받으면 대응하지 않고 인애하고, 비방을 받으면 선한 말로 답했다는 하였습니다(고전4:11-13). 그렇게 하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은 세상의 쓰레기처럼 취급받고, 만민의 찌꺼기 같은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고전4:14). 그럼에도 바울이 그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0).
그러나 고린도교회 내에서 바르지 않은 자존을 가진 자들은 교회의 거룩한 부흥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는 명색일 뿐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었다는 바르지 않은 자존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도권’을 쌓은 것이지요.
행세. 고린도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 직을 부정하는 자들의 두 번째 교만은 ‘행세’行世입니다. 여기서 행세는 “해당되지 아니하는 사람이 어떤 당사자인 것처럼 처신하여 행동하거나 또는 그런 짓”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행세를 하려는 자들에게 “벌써 배가 불렀다. 벌써 부자가 되었다. 우리를 제쳐 놓고 왕이라도 된 듯이 다스리려 한다. 나는 너희가 진정 왕처럼 다스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도 너희와 함께 왕처럼 다스리면 좋겠다.”라고 하였습니다(고전4:8). 이제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 나아가 왕처럼 다스리려고 했습니다. 바르지 않은 행세입니다.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무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피택 후 교육 과정을 지도할 때, 선임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은혜로왔습니다. 그런데 한 분은 오늘까지 교회를 지켜온 것을 말하며, 여러분이 중진이 될 수 있는 것도, 자기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니, 여러분들이 나를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뉘앙스Nuance를 풍겼습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들면서, 당시 피교육생이 그렇게 듣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세운 제가 민망하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당신들이 교회에서 왕 노릇을 하려고 하느냐, 그러면 내가 다시 찾아가, 왕처럼 너희들을 다스리면 좋겠느냐고 말입니다. 바르지 않은 행세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었을 때, 사례비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천막업을 통해 스스로 생활비를 마련하는 귀감을 보였습니다(고전4:12.참고/행18:3). 그런데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고히 하고자,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 직을 부정한 자들은 “바울이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은 스스로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도라면 교회에서 당당히 사례비를 받아야 하는 마땅하다.” 심지어는 “겉으로만 안 받는다고 말할 뿐, 교회의 재정을 횡령한다”고 까지 비방을 하였습니다. 바울을 흠집 내려고 그 책잡을 건수를 생각하다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목회하는 그것까지 비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수제자이었던 베드로는 어머니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초대교회를 이끈 대 사도입니다.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이었다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둘 위치는 높고 낮음이 아니라, 같은 사도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처럼 먹고 마실 권리가 없어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고, 아내를 둘 권리가 없어서 독처한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9:4-6). 군 복무 중인 군인은 자비량이 아니라 국가에서 그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고, 포도를 가꾸면 그 열매를 먹는 것이며, 양 떼를 기르면 그 양의 젖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9:7-8). 하나님 말씀인 율법에 일하는 소에 입마개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비유하여 우리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고전9:9-10.참고/신25:4). 밭 가는 사람은 추수의 희망을 품고 농사를 짓는 것이고, 타작하는 사람은 자기 몫의 희망을 갖고 도리깨질을 하는 것처럼, 와 같이 바울과 자신의 일행이 희생과 고초로 교회를 섬긴 영적인 일을 심고, 교회에서 육적인 사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고전9:10-11). 그럼에도 받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지, 사례비를 받을 권리가 없어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고전9:12).
이렇게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권리를 행세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은 반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가지려고,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행세할 권리가 없음에도, 마치 자신들이 사도로서 교회를 세운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진짜 행세를 할 자는 겸손함으로 행세하지 않고, 행세를 하지 말아야 할 교만한 자가 행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르지 않은 행세라는 교만에 빠진 자들입니다.
영악. 고린도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고히 하고자,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직을 부정했는데요. 세 번째는 ‘영악’靈惡입니다. 영악은 이해가 밝고 약다는 뜻인데요. 이 또한 지나치면 덕이 되기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대적자들은 지혜롭고, 즉 약은 사람이 되었으며, 우리는 약하나 대적자들은 강하고, 우리는 비천, 천대를 받고 있으나, 대적자들은 존귀, 영광을 받았다고 했습니다(고전4:10). 일명 ‘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일행들을 세계와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며, 마치 하루 하루 형 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 같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 만드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고전4:9). 하나님이 바울을 낮추셨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대적자들에게 바르지 않은 영악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경종합니다. 이상에서, 교만한 자존의 주도권, 교만한 행세의 기득권, 교만한 영악의 소유권은 성도가 주장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하나 하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
사도 바울의 대적자들이 교만을 갖게 된 원인에 대하여,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자, 이제 영영 오지 않겠구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고전4:18). 교회 설립자가 사라졌으니, 자신들이 주도권, 기득권, 소유권을 가지려고, 바르지 않은 자존과 행세와 영악의 교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 수 없으나, 주게께서 원하시면 방문하여,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하였습니다(고전4:19). 그들이 정말 능력이 대단해서 교회를 부흥시킨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면서 말만 늘어놓는 말쟁이 인지 확인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고전4:20).
바울이 부름 받은 후, 성령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바울을 결박하고 감금하였던 간수 등 불신자들이 그의 설교를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행16:33). 바울의 능력이 얼마나 컸던지 그의 손수건과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자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귀신들린 자에게 얹으면 악귀도 나갔습니다(행19:12). 설교를 듣다 깊이 잠든 유두고를 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행20:8-12). 바울의 이러한 능력이 대적자들에게도 있는가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면 말입니다.
능력은 이뿐 아닙니다.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이 말씀과 같이 대적자들이 희생과 고초를 당하고도, 복음을 계속 전했다면,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 지금까지 당한 환난보다 더 큰 환난이 이후로 있지만, 바울은 자신을 염려가 아니라, 그 안에서도 교회를 염려한다는 것입니다(고후11:28). 그러므로 대적자들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그것을 능력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입니다.
최종 정리
사도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자들의 교만. 바르지 않은 자존을 주도권, 바르지 않은 행세를 기득권, 바르지 않은 영악을 소유권이라고 했는데요. 이 세 가지 공이 자기 것이 아닌데 갖거나, 덤으로 받거나, 얻을 것 이상으로 얻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행사나 모임에서 ‘프리미엄’Premium, ‘인센티브’Incentive, ‘리베이트’Rebate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하는데요. 교회 안에서서도 그러한 것을 바라는 경우가 있는가 봅니다. 그런한 일 앞장서는 것은 자칫 ‘브로커’Broker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열심히 일을 하다보면,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이와 같은 것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성경적인 자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에게 자신들이 지금까지도, 스스로 높이지 않고, 희생과 고초를 겪고 있으며, 행세할 수 있으나 행세하지 않으며, 약지 않고 어리석을 정도로 주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며, 하나님이 기뻐함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만의 바르지 않은 자존과 행세와 영악을 버릴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 권면도 대적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함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4:14).
우리 교회에는 바울의 대적자들과 같이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한 분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른 것과 같이 교만한 자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또한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자들의 교만, 바르지 않은 자존 주도권, 행세 기득권, 영악 소유권. 자기 것이 아닌데 갖거나, 덤으로 받거나, 얻을 것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는 이들과 같이 심지 않고 거두려는 악함이 없음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께서 바울과 함께 함으로 나타났던 능력, 수많은 영혼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병들자들이 고침받고 악귀가 떠나가고, 죽은자가 살아는 능력, 그리고 이러한 이적과 함께 바울과 같이 수많은 감금과 매질과 죽음의 위협과 헐벗고 굶주림에도,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이 역사하는 청아비전교회가 될 수 있기를 이재현목사가 될 수 있기를 공동체 가족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① 사도 바울을 무시하고 사도직을 부정하는 자들의 교만. 바르지 않은 자존인 주도권, 바르지 않은 행세인 기득권, 바르지 않은 영악인 소유권을 버리게 하옵소서. 자기 것이 아닌데 갖거나, 덤으로 받거나, 얻을 것 이상으로 얻으려는 마음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그런 것을 목적이 아니라, 열심히 주를 섬기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게 하옵소서.
② 사도 바울은 대적자들에게 자신의 것을 취하지 않고, 약지 않고 어리석을 정도로 주의 일을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며, 하나님이 기뻐함을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아무 장애도 없는 중심을 갖게 하옵소서.
③ 사도 바울의 대적자들과 같이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우리 교회에 한 분도 없음을 감사드립니다. 대적자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른 것과 같이 교만한 자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대적자들과 같이 심지 않고 거두려는 악함이 없음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옵소서.
④ 사도 바울과 같이 스스로 높이지 않고, 지금도 이후로도 말이 아닌 능력,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말씀이 우리 교회와 가정과 기업에 실현될 수 있게 하옵소서.
⑤ 사도 바울에 나타난 죽은 자도 살리는 성령의 큰 능력과 함께 수많은 감금과 매질과 죽음의 위협과 헐벗고 굶주림에도,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이 역사하는 청아비전교회가 될 수 있게 하옵소서. 이재현 목사가 되게 하옵소서, 공동체 가족들이 될 수 있게 하옵소서.
'설교 > 주일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구레네 시몬, 억지의 은혜"(막 15:21-32) 이재현목사(25.09.21) (0) | 2025.09.21 |
|---|---|
| "역린과 제자"(눅 9:57-62) 이재현목사(25.09.14) (0) | 2025.09.14 |
| "바벨론을 위해 기도하라"(렘 29:4-10) 이재현목사(25.08.31) (2) | 2025.09.01 |
| "기다림"(요21:1-14) 이재현목사(25.08.24) (4) | 2025.08.24 |
| "교만과 굴복"(단4:28-37) 이재현목사(25.08.17) (2) | 2025.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