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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의 신앙"Ⅰ(이사야 6:13) 이재현목사(25.10.05)

이재현목사 2025. 10. 5. 15:36

남은 자의 신앙Ⅰ

Remnant Faith

 

하나님말씀 : 이사야 6:13 2025.10.05. 主日禮拜

 

하나님이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는 말씀에, 이사야는 어느 때 까지니이까여쭙자,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고 하셨습니다(6:9-12). 그리고 설사 그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6:13). 이 말씀은 마치 이스라엘이 구원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보입니다.

신약에도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구원을) 얻었고’, 그 외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11:7). 남은 자들이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택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십니다(11:8). 이사야와 같은 말씀입니다(6:9).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우둔한 본성 그대로입니다. 영적인 것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귀가 안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감각이 전혀 없는 살갗처럼 신령한 일에 반응하지 못하는 굳은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1.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구원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자들. 우리는 여기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구원받고 싶었는데도 못 받았다는 말입니다(11:7). 얻고 싶어서 구하는데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은혜를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둔하도록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둔해진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실은 우둔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인간 본능의 부패한 성품으로만, 다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우둔함 배후에는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셨고’, ‘보지 못할 눈을 주셨고’,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8). 본문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같은 말씀입니다(6:9). 복음에 대해 인간은 본성적인 우둔이 있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는 의도적인 우둔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정말 불가사의한 말씀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마음이 열려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은혜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메시지를 듣는 귀가 열렸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마음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풍성한 밥상이 올무와 덫이 되는 자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은혜를 주시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받지 못하도록 귀를 막아 버리고 눈도 막아 버립니다. 그렇게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면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밥상은 올무와 덫이 됩니다(11:9.참고/69:22). ‘밥상이란,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육적인 관심사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말입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바라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에 빠져서 즐기다가. 죽음의 길로 빠지게 하는 덫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부유한 환경이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는 불행의 덫이 되고, 올무가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평생 돈의 노예가 되어 정신없이 돈을 끌어모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평생 그런 식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돈을 벌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린 그의 밥상이 복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 안에서 번영 복음, 기복 신앙, 형통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잘 벌고 건강해서 장수하면, 그것이 예수 잘 믿는 자들이 받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가르침이 다 틀린 말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11:10).

 

 

 

2.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잘사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복음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좋은 소리에 익숙해 있습니다. ‘웃음이 있어야 복음이고 눈물은 복음이 아니다.’는 말이 교회 안에서 진리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이런 세대에 쓴소리를 듣고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좋은 것만 말했던 길 예언자를 따랐던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하였지만, 쓴소리를 했던 흉 예언자들은 인기가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실을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참고/왕상22:18). 지금 쓴소리가 달갑지 않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회개하고 돌아온 이들에게, 다시 회복의 은혜를 준비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러므로 쓴소리를 듣고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훌륭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기로 택함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잘사는 것 자체가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 즉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중의 하나가 잘사는 것,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벌고 잘 먹는 형통이 올무가 되어 교회를 다녀도 평생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다, 세상을 떠나는 자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이렇듯 교회를 다니는 자에게도 올무가 될 수 있는 밥상이라면,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진수성찬이 올무가 안 되겠습니까? 차라리 초라한 밥상을 가지고 살았다면, 복이 되었을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막대한 돈 때문에 예수를 못 믿었다면, 그 돈이 밥상올무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로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교회에서 예배 중에도, 돈 벌고 투기할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세상 적으로 성공하는 예가 종종 있다고해서,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셔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그것은 감사할 문제가 아닙니다. 밥상의 올무요 덫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버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과 형통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세가 되면, 밥상이 올무가 되어 망할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경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영적 암흑기가 찾아 올 것인데,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간다고 하였습니다(24:38-39).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쏟아 부을 것은 아닙니다.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가 아니라,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아니한 사람의 생활이요, 우둔한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3. 다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책임인가?” 글을 읽고,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그렇다면 세상 논리로 말할 때, 하나님이 우둔하게 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우둔해서 믿지 아니한 그 사람 책임입니다. 예를 들어서요. 어떤 사람이 친구의 꼬임에 유흥업소에서, 밤늦도록 술을 퍼마셨습니다. 그러다가 음주운전으로 인사가 발생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면 경찰에게 자기 잘못이 아니라, 친구 때문이라는 말이 통할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이러니저러니 하고 변명을 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자기가 져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고의로 누구를 버리고, 믿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유식하다는 분들 중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는 믿을 필요가 없어하고 항변하고 싶은 분이 있나요? 그렇다면 스스로 논리적 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의 마음을 우둔하게 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에 불쾌감을 느낀다며,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 사랑하셔서 창세전부터 선택하시고 마음을 열어 믿게 하셨다는 말씀에도,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지 않는 것은 결국 자기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 선택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성립될 수 있는 말입니다. 내가 만약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 대신 분명히 어떤 사람은 우둔한 자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를 구원하느라, 하나님의 관심권 밖에 있게 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아니한 것은 나 때문인지 누가 압니까? 이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 중 어차피 하나만 택해야 했다면, 야곱이 하나님께 왜 형을 버렸느냐고 따릴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자기가 선택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고의로 버렸다는 데 대해서 반발을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나를 예수 믿도록 하기 위해서 버림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들을 귀를 주지 아니하신 것도 논리적으로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선택받았음을 믿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버린 자도 있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나를 하나님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복음을 듣게 하셨다고 믿습니까? 그러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으신 사람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아니하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왜! 누구는 택하지 않으셨습니까? 라는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창조자, 절대자,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인합니다(1:4-6). 우리는 내가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어거스틴Augustine,354-430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 대상자를 위해 하나님의 선택받을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열 명 중에서 한 명은 뜨거운 감격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참고/17:17).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비웃거나 싫어합니다. 이 현상을 단지 마음이 악해서라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결국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뜻에 따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듣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듣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4. 다음 남은 자의 신앙글을 읽고,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그렇다면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구원 받지 못하도록 한 책임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책임인 것입니다(6:9-10).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하셨습니다(6:13). 전자 남아 있는 자는 멸망당할 자로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될 때 십분의 일이 남아 있을 지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 후자에 남아 있는 자는 구원받을 택한 자로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잇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남은 자란 멸망의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위해 택하신 남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는 남은 자가 되어야지, 그 안에 들지 못하는 은혜 받지 못한 멸망받을 남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악한 아합의 왕 시대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 신상으로 가득한 그 땅에 자신만이 혼자 남아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우상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은 남겨 주었다고 하십니다(11:3-4.참고/왕상19:10). 그 악한 시대에도 하나님이 택하신 남은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노아의 시대보다, 더 악한 시대라는 것에 공감할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나라 전역에 세웠던 아합 왕의 시대보다, 더 악한 시대라는 것에도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마지막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남은 자가 있습니다(11:5).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마지막 시대에 남은 자의 우리들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어야 하겠습니까? 한 목사님이 설교 중에 동성애 같은 문제에는 난리를 치면서 성경에서 동성애보다 10배는 더 나오는 탐욕에 대해서 시위하고 분노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죄들도 많은데, 그것에 관해서는 그렇게 반대하지 않으면서, 왜 동성애 죄악에 관해서만, 그렇게 난리를 피우는 것이냐는 말로 들릴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시대 해석을 도치(倒置), 뒤바뀌고, 우선순위를 세상 언론뉴스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또한 동성애는 한 죄가 아닌, 임박한 심판, 멸망의 잣대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 그리고 퀴어문화축제가 종교다원주의로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배경과 궁극적 지향점에 대한 지식도 일천한 것입니다.

이에 한 한 신학자는 오늘날 동성애 퀴어축제는 자유의 이름으로 전정한 자유를 파괴하는 인본주의 운동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남녀 양성의 결혼과 가정을 부정하고 해체시키는 제2의 반역The Second Revolt"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동성애는 대세가 이미 넘어갔다는 것은 스스로 포기와 항복 선언을 했다는 점"이라며, 이는 설교자인 그 목사 한 개인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도 반동성애 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는 분들이 있다. 이는 스스로 포기요 항복 선언이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눈을 뗀데서 오는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 탈동성애 운동에서 세상 풍조와 타협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 서야 한다", “오늘날 글로벌 성 혁명으로 진행되고 있는 동성애 퀴어운동은 성 자유의 이름으로 진정한 성의 존엄과 자유를 오해하여 개인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동성애의 하나님 거역과 사회적 해악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신학자는 결론으로 한국교회는 오늘날 1930년대 일제시대 신사참배 강요로 다가온 시대적 흐름에 대하여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극복했듯이, 그루터기의 남은 자 신앙으로 이겨 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남은 자 신앙’, 이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죽으면 죽으리라의 신앙, 일사각오입니다. 어떤 것에 앞에 우리의 생명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까? 죄악은 끝까지 죄악이요. 진리는 끝까지 진리입니다. 동성애에는 지금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죄악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로 대표되는 죄악은 죄이지, 절대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일사각오입니다. 즉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지 못하면, 항복하거나 타협하게 됩니다. 일사각오를 갖지 못하면, 교회 강단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어떤 믿음을 가질 위험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사각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 이것이, ‘거룩한 씨’, ‘이 땅의 그루터기’, ‘Remnant Faith’, ‘남은 자 신앙바로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입니다. 노아의 시대, 아합의 시대보다, 더 악한 시대인 지금 하나님이 은혜주시고자 위해 택한 남은자입니다.

 

5. 다음 제목으로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① 죄인인 인간의 본성적인 우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는 의도적인 우둔이 있습니다. 그들은 육적인 관심사를 상징하는 잘 먹고 잘 사는 밥상이 올무가 되어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아니한 사람의 생활이요, 우둔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와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여기에 속하지 않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이 우둔하도록 내버려 두어 구원 받지 못했다고, 책임을 떠넘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죄악 된 인간 본성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 멸망 받은 것을 인정한다면, 창세 전 택하셔서, 구원받게 되는 은총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후자가 되게 하옵소서.

③ 우리가 선택 받았다는 것은 누군가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관심 밖에 있게 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권한은 창조자, 절대자,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햐 합니다. 우리의 중보하는 이들을 하나님의 선택받을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④ 남은 자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대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남은 자,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남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남은 자입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장망성, 멸망의 세상에서도, 택한 받은 남은 자가 되게 하옵소서.

⑤ 죄악은 끝까지 죄악이요. 진리는 끝까지 진립니다. ‘거룩한 씨’, ‘이 땅의 그루터기, 바로 끝까지 진리를 수호하는 일사각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 남은 자 신앙을 우리와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의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