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비범Paul Extraordinary
이재현목사
이스라엘 가이사랴에 있는 헤롯 궁에서, 2년여 동안 감금되어 있던 바울은 재판정에서 변론 후, 로마 시민권자로 가이사에게 상소하였고, 로마로 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참고/행23:33,35,24:10-21,27,25:11,26장). 베스도 총독은 로마 황제의 근위대 ‘백부장 율리오’를 책임자로 세우고, 바울을 로마까지 배로 이송하도록 하였고,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배가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곳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고, 접대 받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행27:1-3). 아마도 바울이 죄수임에도 의사 누가와 수발자 아리스다고의 도움을 받는 것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행27:1,2.참고/행16:10-17,20:5-21,20:5-6,21:1-18,27:1-28:16;골4:14). 무엇보다도 지난 2년여 동안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결박당하고, 천부장에게 넘겨졌지만, 로마 군대 영내와 산헤드린 공회에서(행22:1,6-9,21,30-23:1,11,26), 총독과 왕과 왕비가 앉아 있는 재판정에서(행24:24,26-27,25:13-17,26:1-23,29), 죄수의 신분임에도 위축되지 않고 복음을 증거했던 것을 전해 들었습니다. 비범extraordinary,非凡한 사람으로 본 것이지요.
기도의 사람
이스라엘 가이사랴에서 ‘아드라뭇데노’호號를 타고, 항해를 시작하여, 오늘날 레바논 지역인 시돈 항구를 들리고, 터키의 무라 항구에서, 이탈리아 로마로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환승을 합니다(행27:3-6). 역풍으로 고전하다가, 어려움 속에 지중해의 그레데 섬 해안을 바람 막이로 간신히 연안을 지나, ‘미항’Fair Havens에 도착했습니다(행27:7-8). 그 후 많은 시일 지났지만, 행해 하기에는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행27:9). 이때 바울이 지금 항해를 시작하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며, 중단할 것을 승선한 사람들에게 권면을 합니다(행27:10). 그러나 죄수들 이송 책임자인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하였습니다(행27:11). 시기적으로는 겨울이었는데요. 지금 배가 정박해 있는 곳은 추운 곳임으로 따듯한 ‘뵈닉스’ 항구로 가자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행27:11). 그렇게 결정을 하지 마침 항해하기에 ‘좋은 남풍이 순하게 불매’ 배의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항해를 다시 시작합니다(행27:12). 바울만 반대한 것인데요. 바울이 반대를 한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은 것을 전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말보다, 항해 경험이 풍부한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습니다. 다수인가 소수인가가 기준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민주적 절차이니 말하기 전, 다수가 되었던, 소수가 되었던, 기도하는 모든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쁘고 피곤한 삶에서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 교회는 우리가 모두 함께 승선한 공동체이기에 교회를 위한 기도는 나의 가정과 기업 위에도, 아름답고, 거룩하며, 역사하는 힘이 큰 응답으로 임할 줄 믿습니다. 비범의 출발은 기도입니다.
선포의 사람
‘알렉산드리아’ 호는 출항과 함께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유라굴로’Euraquilo,Northeaster라는 광풍을 맞게 됩니다(행27:14). 배는 폭풍에 휘말렸고, 모두가 체념한 체, 바람에 내가 맡기고,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선원들은 임시방편으로 구명뗏목인 거룻배를 갑판 위에다가 끌어올리고, 밧줄로 선체를 동여 매, 배가 요동하지 않도록 애써 보았습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배가 리비아 근해의 모래톱에 가까웠습니다. 이곳에 빠지면 배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파선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돛을 내리고, 그냥 떠밀려 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버티어보려고 심히 애썼지만, 하루가 지난 뒤 사공들은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들마저 버려야 했습니다(행27:15-19). 이런 위태로운 상황이 ‘여러 날 동안’이었다고 하였습니다(행27:20).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배에 올랐던 사람들의 심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행27:20).
그런데 이 순간 바울이 의연한 모습으로 일어섰습니다. 그의 신분은 죄수였습니다. 지난 2년 여 동안 감옥에서 구금당했던, 그의 외모와 풍채가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히 선포합니다. 바울은 지금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전한 것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 즉 천사가 전해 준 말이라고 하였습니다(행27:21-22). 자신이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배에 승선한 사람들이 살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바울이 가이사, 로마 황제죠.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가야 하겠기에 지금 광풍 속에서도, 이 배가 안전하게 지켜지리라는 것입니다(행27:23-24).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가, 그 뜻입니다(행27:24). 바울의 이러한 확신에는 일주일 전에도, 하나님께서 항해를 계속하면, 위험을 당할 것이라고 가르쳐주셨기에,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항해를 강행하면, 어려움은 겪게 될지 모르나, 지켜주실 것 또한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나님이 한 섬으로 인도하여,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행27:25-26).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믿게 되었고, 바울의 명에 따라, 음식을 만들고, 바울은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를 하였고요, 배에 있는 사람이 음식을 먹고, 힘을 얻은 후, 다른 밀 식량은 바다에 모두 버리고 배를 가볍게 하였습니다(행27:27-38). 그리고 한 항만에 도착 항구 부근에 배를 고정시킨 후, 어떤 이는 헤엄을 치고, 어떤 이들은 널조각과 배 물건을 붙들고, 멜리데라라는 섬에서 구조됩니다(행27:39-44). 승선인 이백 칠십육 명 중 한 명도 생명의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행27:37). 광풍을 만난 후, 열 나흘만입니다(행27:27). 누구의 말대로 된 것에요. 바울의 말대로 된 것입니다. 비범의 두 번째 선포의 사람입니다. 입을 열어 전하라 할 때,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참고/행2:4).
말씀의 사람
바닷길을 수없이 왕래한 선장과 선주의 행해 지식과 경험을 들을 것인가? 그 바다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인가?입니다. 인간의 경험이 광풍 앞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들을 것을 듣기를 바랍니다. 목사는 당장의 현실 문제의 답을 알려 줄 수 없을지는 모릅니다. 돈 버는 방법을 모르니까요. 그러나 그 현실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 가운데, 될 수 없는 일도 되게 하시고, 막힌 것도 풀어주시고, 돌아가는 길을 바로 가게 하시고, 거역하는 자의 것을 순종하는 성도의 것으로도 되게 하시며, 두 배의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시장을 백배의 이윤을 얻는 시장으로도 만들 수 있는 분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들을 말을 듣기를 권면드립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후에도, 보름 가까이나 여전히 망망대해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 응답을 믿으면 확신해야 합니다. 확신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믿고 선포했으면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요. 인내의 기간 동안 허튼 생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신인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 하신 분이기에 확신하는 것입니다. “26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시102:26-27;히13:8). 영원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5). 비범의 세 번째 말씀의 사람입니다.
희망의 사람
바울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의연한 모습으로 일어섰습니다. 지난 2년간의 구금되었었고, 지금도 죄수의 신분이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일주일 전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항해를 감행한 것에 대하여,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책망을 먼저 했습니다(행27:21). 그리고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희망을 전했습니다(행27:22). 바울은 책망과 희망 두 가지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희망보다 책망을 먼저 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알리기 위해 책망이 먼저 기록된 말씀도 있습니다.
책망의 소리는 크게 들리고, 구원의 소리는 작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라고 하였습니다(딤후3:1-2). 마지막 때 고통당하는 여러 원인 가운데 가장 첫 번째를 ‘자기를 사랑하며’를 들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애, 자기의, 자기만 아는 것인데요. 여러 가지로 그 의미들을 유추할 수 있겠는데요. 그 중 하나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사람들은 진리인가 아닌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이 내가 듣고 싶은 말인가 아닌가가 먼저입니다. 나에게 좋은 말이면 좋은 것이고, 나에게 거슬리는 것이면 싫은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상황에서, 책망을 먼저 말해야 할 때는 책망을 먼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책망이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살릴 수 없음을 깨닫고, 구원자를 만나냐 한다는 희망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바울은 배에 탄 사람들에게, 내 말을 듣지 않았다고, 책망을 먼저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하고자하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리신다는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이니라’고 하였습니다(롬8:6). 내 생각으로 내가 좋은 말을 듣기 만을 원하고, 진리라고 하여도 듣고 싶지 않으면, 듣지 않으려는 자가 되지 말고, 성령의 생각으로 듣고 싶지 않아도, 진리이면 듣고, 생명을 얻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채찍으로 들려올 때도, 그 말 듣고 싶지 않다고 돌아서서, 이어지는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아멘' 하면 반드시 주시고자, 하는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비범의 사람 네 번째 희망의 사람입니다.
사명의 사람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27:24). 배에 승선한 모든 사람이 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은 ‘네가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입니다(행27:24).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죄수의 신분으로라도 로마에 가게 하신 것입니다. 로마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마지막 사역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냉철하게 배에 승선한 사람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바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바울을 살리셔야 했고요. 그 하나님 역사에 다른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있었기에 살게 된 것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깨닫는 은혜가 있을 줄 압니다. 한 사람이라도 바른 사명자가 있으면, 그가 속한 교회와 가정의 성도와 가족은 모두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로 인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나중에 이러한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당연히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 한 사람의 사명자는 곧 다른 사람들이 살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는 사명자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분명한 사명자가 있다면, 다른 성도들이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이 사명자가 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에 분명한 사명자가 있다면, 그 가족 전체가 사명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명자로 교회와 가정에서 부름 받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는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하는 사람의 안전을 다 바울에게 맡기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와 함께 항해하는 성도님들의 안전을 다 ○○○○○에게 주셨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사명자가 ○○ 뿐입니까? 우리는 모두 세상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명자입니다. 하나님이 청아비전교회를 보았을 때, ○○○○○뿐 아니라,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를 보았을 때도, 여러분을 보고 다른 분들의 안전을 여러분에게 맡길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비범의 사람 다섯 번째 사명의 사람입니다.
결론
비범한 사람은 기도의 사람, 선포의 사람, 말씀의 사람, 희망의 사람, 사명의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비범한 사람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지금 우리 인생의 광풍은 나를 비범한 사람으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고자 함입니다. 바울의 비범은 우리의 비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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