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강론Paul discoursed
이재현목사
바울이 감옥에 구금된지 ‘수일 후에 벨릭스 (총독이)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행24:24). ‘바울이’ 총독과 그의 아내 앞에서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였습니다(행24:25).
의Righteousness,義
바울의 강론 첫 번째는 “의”입니다. 하나님이 “의”이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율법”Law,律法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처음 주신 “의”입니.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고 하였습니다(롬7:12).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선이 무엇이 알게 하는 것입니다.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그러나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의인은 하나도 없고,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참고/롬3:10). 이렇게 모든 인간의 숙명은 죄인으로 심판이라는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갈3:10.참고/신27:26). ‘나무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습니다(갈3:13.참고/신21:23).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저주입니다. 그 죽임을 당하신 분이 누구 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나무에 달리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하였습니다(갈3:10).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율법 아래 죄인인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신 것입니다(마5:17). 그러므로 이제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하였습니다(빌3:9.참고/롬5:1;갈2:16). 이렇게 하나님의 의인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는. 예수님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롬3:21).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3:11.참고/합2:4;롬3:17).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3:22). 예수 믿은 의인에게는 차별이 없습니다.
절제Self-Control,節制
바울의 강론 두 번째는 “절제”입니다. 절제의 정의는 “정도에 넘지 아니하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절제는 그 의미가 전부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초청하여,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며, 고별담화를 하면서, 자신이 떠난 후,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으니, 지난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들)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행20:17,28-31). 바울이 본을 보인 것 가운데 “33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라고 하였습니다(행20:33-34). 저는 이것을 “절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받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입니다. 다른 성도에게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입니다.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드리는 곳입니다. 나의 입지를 다지는 곳이 아니라, 남을 세우는 곳입니다. 사람은 이해득실에 민감합니다. 나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는 절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날 같았으면 당연히 내 것으로 취해야 할 순간 “아니지! 주님의 기뻐하시는 것으로 드려야지”라며, 타인에게 기꺼이 베풀 수 있는 것. 그 순간이 바로 아름다운 절제입니다. 내 유익을 타인의 유익으로 바꾸는 크리스천의 고귀한 절제입니다.
그리고 이 절제가, 더욱 빛을 발하는 절제가 되기 위해서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절제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다른 사도들과 (베드로)와 같이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율법도’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다)’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사도들도) (가진) 권리를 (내가) 쓰지 아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 하였습니다(고전9:4,5,8,9,11,12). 바울은 윤리적 개념으로 절제만이 아니라, 응당 받을 수 있는 대가까지도, 한 영혼의 전도와 인도와 정착에 쓰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절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고 하였습니다(막8:36).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보다 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드려지는 헌신이라면,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는 가난한 자일 수 있으나, 영혼을 위해서는 부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1차 전도 여행 2년간, 2,240여㎞, 2차 전도 여행 약 3년간 4,500-5,600여㎞, 3차 전도 여행 5년 동안 4,500-5,600여㎞, 도합 13,440km 그리고 훗날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서, 풀려난 후, 전승에 의하면 스페인 등까지 최대 15,000km까지, 이르는 지역을 순회하며, 쉼 없이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 전도 여행 동안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습니다(고후11:23-27). 얼마나 고되고 중하며, 핍박과 환난과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까? 그런데도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11:28-29).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염려하였습니다. 한 영혼이 약해지지 않을까 실족하지 않을까? 애가 탔다고 하였습니다. 모직 박해에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한 영혼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심판Judgment,審判
바울의 세 번째 강론은 “심판”입니다. 악인은 득세하고 의인은 고통받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이 불의를 방관하며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계18:5).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악이 하늘을 찔렀다는 것입니다(참고/창6:5). 인간들의 죄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지막 심판 때까지 쌓이는 것입니다.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고 하였습니다(롬2:5).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1:28).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겔22:31). 그들이 지은 죄는 하늘에까지 사무쳤습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이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벧후3:9).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면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득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죄가 하나님이 정한 죄에까지 차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 재림 주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의인의 고난에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순교자의 피, 헌신, 희생이 차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 재림 주께서 보응하시는 것입니다(계6:10-11,17,18:18,24,19:11-21).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의인을 보응하고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지금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참고/요3:18;고후5:10;살후2:12;히9:27).
교훈
바울의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한 강론을 듣고, 벨릭스 총독과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행24:25).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가질 것 다 가져보고, 누릴 것 다 누려 보고, 하고 싶은 것 다 해 본 사람들입니다. 그러한데 “의”, 로마 황제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야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 되고, “절제”, 총독의 자리에서 치부致富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수많은 종을 거느렸습니다. 그에게 한 영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는 절제를 해야 하고, “심판”, 유대 지역 모든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에게, 당신이 구주를 믿지 않으면 살아서도 심판이요, 죽어서도 지옥 형벌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는 바울의 강론을 듣고 두려워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바울의 강론 듣고 진리를 알게 된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벨릭스는 바울에게는 석방해줄 수 있는 것을 은연중 비치며, 금품을 바라고, 또한 자리를 보존 받기 위해 고발자인 유대인들 환심을 사야 하기에 바울의 송사를 2년 동안 미루며 가두었습니다(행24:25-27). 이것은 의와 절제와 심판의 강론을 듣고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의 강론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진리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요16:8).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죄와 의와 심판은 곧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성령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요15:26). 그러므로 바울의 강론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9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십자가의 대속을 완성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감)이요 11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하였습니다(요16:9-11). 이렇게 주님의 말씀인 죄와 의와 심판은 바울이 강론한 의와 절제와 심판과 동일한 메시지입니다.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을 놓아주지 않았지만, 말년에 가이사랴 유대인들의 고소로 로마로 압송되었습니다. 사람의 처세로 인생이 보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드루실라의 마지막이 어떠했을까요? 신분 상승을 위해 권력가들과 수차례 결혼하기를 반복했지만, 폼페이Pompei 멸망으로 잘 알려진 AD. 79년 베수비오Vesuvius, 이탈리아 나폴리 만에 있는 활화산 화산 폭발 때, 아들 아그립바와 함께 죽은 것으로 전해집니다(Josephus). 사람의 수단으로 인생이 보존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해야 보존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의와 절제와 심판의 메시지를 받지 않은 자의 모습입니다.
결론
그렇다면 우리는 감사를 먼저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와 같이 세상에서, 가질 것 다 가져보고, 누릴 것 다 누려 보고, 하고 싶은 것 다 해 본 사람들도, 믿지 못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눅2:11;행13:23;벧후1:11). 세상 모든 것을 다 주고도 살 수 없는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요10:28).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요1:21).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롬3:22;딛3:7).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늘 시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빌3:20).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자, 바울의 강론인 “의” 주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의를 얻고, “절제” 한 영혼,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판” 예수를 영접하여 살아서도 죽어서도 심판받지 않는, 진리를 깨닫고, 믿고, 전하게 된 것 또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바울의 강론 “의”, 주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의를 얻고, “절제”, 한 영혼,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판”, 예수를 영접하여 살아서도 죽어서도 심판받지 않는, 진리를 깨닫고, 믿고, 전하게 된 것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상을 다 주고도 살 수 없는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고,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상속자가 되고, 하늘 시민이 된 것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합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를 보면서 인간의 방법과 처세와 수단이 허망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내 노력으로 인생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내 인생의 주인되신 예수님, 내 길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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