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사도행전 18:1-22. 2022.10.16. 主日禮拜
“1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12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18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행18:1-22)
하박국 선지자는 1-2장에서 왜! 의인이 고통당하고 악인은 득세하는가 의문에 대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듣고, 3장에서는 하나님께 찬양시이자 기도문을 올려 드렸습니다. 그 첫 문장은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입니다(3:2). 이 부흥 속에 담긴 회복은 영적 회복입니다. 하박국 기록 당시 남 유대가 애굽의 침략을 받고, 바벨론의 위협 속에서, 살길은 군대를 정비하고, 무력을 증강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2:4). 영적 회복을 우선해야 함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증언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요단강에서 여호수아가 언약궤를 맨 레위가 강을 먼저 건너라, 그리고 자신을 먼저 성결하게 하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즉 영적 회복을 통해 요단강의 물줄기가 끊기는 대역사를 체험했습니다(수3:3-17). 제2의 홍해 기적을 본 것입니다. 오늘도 영적 회복의 자리에, 자연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주변의 모든 환경과 조건을,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사무엘은 나라의 위기와 대적의 참략에서도, 미스바에서 제사와 회개를 통해, 즉 영적 회복을 통해, 나라의 위기와 대적의 침략을 이겨냈습니다(삼상4:17,7:3-12). 오늘도 영적 회복의 자리에, 우리의 대적은 침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적 회복된 자들에게 주어진 능력입니다.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베드로가 주 예수를 증거 할 때. 듣는 자들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 할꼬’ 애통하자, 베드로는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하였고, 이 영적 회복을 통해, 이 하루에만 삼천이 더하는 위대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행2:21-24,32-33,36-42). 오늘도 영적 회복 자리에, 거룩한 부흥을 이룰 줄 믿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예배당에서 수년이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거룩한 부흥이 임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 할꼬와 같은 통회 자복이, 새벽에서부터 늦은 밤까지 계속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시간 중 한 시간을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꼭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하였습니다(행2:42).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의 결과 또한 거룩한 부흥의 열매로 오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사도 바울을 만난 간수의 회심 즉 영적 회복은 온 가족이 인가귀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수를 지키지 못했다는 처벌받지도 않았고, 자신의 신분 또한 지킬 수 있었습니다. 생업을 잃지 않았습니다(행16:24-35). 영적 회복되면 우리의 모든 가정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같이, 인가귀도 되기를 바랍니다. 기업과 자녀들의 길도 보장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벧엘로 올라가 예배 드리겠다는 서원을 잊었던 야곱, 그리고 딸 디나가 이방 추장에게 욕보임을 당하는 비극, 그러나 다시 벧엘을 찾아 언약을 지킨 야곱, 즉 영적 회복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자녀 생산과 물질의 복과 땅의 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메시아 조상이 되는 더함의 복을 받았습니다(창27:46,28:5-18,34:1-2,25:35:1-12). 영적 회복되면 이러한 생산과 번성의 복 그리고 물질과 사람의 복을 함께 받게 됩니다. 지난 수년간 우리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억, 기대, 기적을 믿고 나가기를 축복합니다. 부흥을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부흥 속에 담긴 영적 회복을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
바울은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Athens,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격분하였습니다(행17:15-16). 당대 최고의 철학인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와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쟁론했습니다(행17:18-20). 비록 아덴에서 결신자가 가장 적었지만, 그 땅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 중요합니다(행17:34). ‘그 후에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게 됩니다(1).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2). 바울은 고린도에서 평생의 동역자인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됩니다(2.참고/롬16:3). 부부는 원래 로마에 거주하였는데요. 로마의 제4대 황제인 ‘글라우디오’Claudius,AD41-54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에게 예배를 허용하는 등 관용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로마에서 ‘크레스토스그리스도 소동’ 곧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잦은 분쟁이 발생하자,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고린도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바울을 만나 합력하게 된 것입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3). 바울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숨돌릴 틈 없는 선교 가운데도 천막을 만드는 업을 통해 선교 사역에 헌신을 함께 했습니다.
이전에 베뢰아에서 급히 피신하느라 바울 혼자만 나오고, 실라와 디모데는 그곳에 있었는데요(행17:14). 바울이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왔을 때, 실라와 디모데도 고린도에 도착을 했습니다(5).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까지, 합세하여 고린도에서 전도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4-5). 그러나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6). 사도 바울은 예전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행13:14),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었습니다(행13:50).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데로 하였습니다.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10:12-14). 그 가르침 같이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서 전도 여행을 계속하게 됩니다(행13:51.참고/막6:11;눅9:5,10:11). 본문에 고린도에서도 대적자들이 비방하자, 바울은 자신의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고 한 것도, 그 맥락에서 이해를 하시면됩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복음은 생명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고 하셨습니다(딤후1:10). 그러나 복음은 심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생명의 소식이지만, 생명의 소식인 복음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에는 죽음, 심판인 것입니다.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7-18).
우리는 세상에 복음을 전합니다. 이를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자들이 있고, 비방을 하고, 대적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과 우리는 필요치 않은 논쟁을 해서는 안됩니다.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는 것은, 저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생명을 얻고 또는 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옷을 털면서’ 즉 생명과 심판의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너희 피가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여러분이 멸망을 받으면, 그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는 깨끗하니라’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비난 거부 반발하는 자들과 충돌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증거를 원하시지, 결과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자들에게서도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그렇다고 전도하는데 시늉만을 내는 전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전도하는 것으로 되었다고 면피용으로 삼아서도 안됩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3:18.참고/겔3:20). 하나님은 악인은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아는 저와 여러분은 불신자를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에게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증거를 원하시지, 결과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고, 설렁 설렁 전도하는 것으로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사망을 바라보고, 죽음 이후 심판에 떨어지는 영혼이 되지 않도록 간절과 긍휼과 애탐으로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입니다.
성도의 신분은 하늘입니다(빌3:20-21.참고/슥9:16;요10:35;갈4:6-7;빌3:20-21;벧전2:9.참고/시82:6). 그러므로 성도는 하늘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을 밟고 있지만,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날마다 발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입성하지 못하는 자는 지옥에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불신자의 죽음 이후 심판은 영멸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25:4.참고/마5:22,10:28;막9:48;눅16:24-27;계20:10,14:14,21:8). 영원히 자기 죄 값을 치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 떨어져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곳은 지옥입니다. 천국은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천국은 허구가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지옥은 공상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성경은 실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참고/살후1:7-9;벧후2:4;계20:15). 그러므로 천국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사람들이 예고 없이 투하한 것이 아닙니다. 미리미리 경고문을 뿌렸습니다. “광도 시민 여러분, 1945년 8월 6일에 원자탄을 투하할 터인데 20km 밖으로 도망가십시오. 원자탄이 투하하면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믿지 않았습니다. “미국 놈들이 지게 되어서 공갈친다.” “30만 명을 죽이는 폭탄이 어디 있어?” 하면서, 대부분이 그 경고를 안 믿었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도망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경고문을 보고, “갈가 말까” 망설이다가, “에이, 두고 보자”하고 미루었다가 원자탄에 죽고 말았습니다. 거짓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당일이 되자, 서쪽에서 비행기가 나타나 원자탄을 투하했는데, “쾅! 번쩍!”하는 굉음과 함께 3초 동안에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간곡한 경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 증거를 원하시지, 결과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설렁 설렁이 아니라. 이와 같은 마음을 갖고,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 망설이지 말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참혹한 형벌과 심판에서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대적자들이 있을지라도,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입니다.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바울은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있는 “7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7-8). ‘디도 유스도’Titius Justus는 고린도에 사는 로마 시민 출신의 성도. 바울이 고린도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쫓겨나자 자기 집을 집회처로 제공하여 바울의 복음 사역에 큰 도움을 제공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 지도자인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어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 나타났습니다.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9-10). 바울은 이 말씀을 붙들고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를 계속했습니다(11).
본문에는 또 ‘갈리오’Gallio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요(12). 철학자이자 정치가 이었던 그는 아가야 지방의 총독이었습니다(12). 당시 로마 제국은 그리스를 두 주州로 분활하고 그 가운데 남쪽에 있는 주가 아가야입니다(참고/고전16:15). 주요 도시로 아덴, 고린도, 겐그레아 등이 있습니다(‘아가야와 마게도냐’.참고/행19:21;롬15:26;살전1:7-8). 이 아가야 지방의 주요 도시 중에 하나인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바울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고발하였습니다(12-13). ‘바울이 입을 열고’ 변론하려고, ‘할 때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14-15). 갈리오 총독은 범법에 해당하는 사안이면 처벌하겠지만, 유대인의 법 즉 종교적인 문제라면 재판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갈리오는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었고, 결과적으로 바울도 무죄로 석방이 될 수 있었습니다(행18:16). 그 후로도 ‘바울은 더 여러 날(을) (고린도에)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였습니다(18).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총독을 들어 바울을 지키시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누구 앞에서도 복음을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오늘 말씀의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도착하게 되는데요(19).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습니다(19). “20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파송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선교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전도 여행을 마치게 됩니다. 제2차 전도 여행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잠시 지난 2차 전도 여행을 돌아 보겠습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바울은 실라를 새로운 동역자로 택하여 2차 전도 여행을 시작했습니다(행15:36-41). 더베와 루스드라를 재방문하여 바울의 인생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청년 디모데를 만나게 됩니다(행16:1). 그리고 유대인의 정도를 위해 할례를 행한 후, 선교팀에 합류시켜, 여정을 함께 하게 됩니다. 바울 일행은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예루살렘 교회에서 작성한 지침을 제시하여, 그들의 믿음이 더욱 굳건하게 하였습니다(행16:1-5).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지나 다시 아시아로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아 드로아에 가게 됩니다(행16:6). 바울은 이곳에서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라는 꿈을 꾸었고 그쪽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행16:7-8). 아시아에서 유럽 전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다음날 신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네압볼리에 도착을 했습니다(행16:11). 네압볼리 항에서 내려 도보로 빌립보까지 이동을 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옷감장수 루디아를 만났고,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로 인해 매 맞고 감옥에 갇혔다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풀려나고, 간수의 그의 집을 전도합니다(행16:12-40). 그리고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마케도니아 지방의 주도인 데살로니가에 도착합니다. 이곳 회당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들이 개종을 하였지만, 이에 분노한 강경파 유대인들 때문에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행17:1-9). 바울 일행은 베뢰아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역시 복음을 전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그 어느 지역보다 열정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바울 일행을 쫓던 강경파 유대인들 때문에 결국 이곳에서도 피신을 해야 했습니다. 이때 바울만 아덴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게 됩니다(행17:10-15).
아덴은 그리스의 가장 유명한 도시 아테네입니다. 그리스 신들로 도배가 되었던 이곳에서의 체류 기간이 길어질수록 바울은 큰 분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행17:16). 역시나 바울은 회당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심지어 날마다 거리에 나가서 많은 지식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행17:17).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람들은 바울에게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을 요청합니다(행17:18). 이에 바울은 응하였으며, 이곳에서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행17:19-33). 결과적으로 복음 또한 새로운 한 지식으로 알려고 했던 아덴 사람들 가운데 소수의 결신자만을 얻게 됩니다(행17:34). 바울은 아덴에서 고린도로 이동을 합니다(행18:1). 그리고 이때 로마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들에 대한 로마 추방령으로 인해 고린도로 이동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행18:2). 또한 이곳에서 베뢰아에서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를 만나게 됩니다(행:18:5). 바울은 이곳에서도 안식일마다 회당에 나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18:4). 처음엔 쉽지 않았으나, 회당장 그리스보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면서, 전도에 탄력이 붙게 됩니다(행18:5-10). 이렇게 ‘일 년 육개월’ 18개월 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18:11).
바울은 앞서 에베소로 떠나기 위해 겐그레아 항구로 이동을 합니다(18). 이때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고 하였습니다(18). “서원”은 헬라어로 “유케”εὐχη,euche 영어로 “vow”인데, “하나님께 기도하다, 원하다, 바라다”를 뜻하는 “유코마이”εύχομαι,euchomai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님께 “기도, 맹세, 서약”을 말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조건부를 걸고, 하나님께 맹세, 서약, 서원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깨드리지 말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민30:2). 바울이 무슨 서원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 다만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나실인”Nazirite의 서원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나실인이란 ‘구분(구별)된 자’란 뜻으로, 일평생 혹은 특별한 헌신을 위해 한시적으로 세상과 단절하고 스스로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한 자를 말합니다(참고/민6:1-21;삿13:5;삼상1:28;렘35:6;눅 1:15). 바울이 왜 이 시점에 서원을 하였을까요? 아마도 1, 2차 전도 여행을 거치면서, 육적 영적으로 소진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자신을 보며, 다시금 서원을 통해 주의 사명을 다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복음을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신 말씀을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함께 떠나게 됩니다(행18:18). 바울 일행은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행18:19). 그는 오래 머물고 싶어 했으나 어떤 사정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2차 전도 여행의 주된 타깃 지역인 에베소에는 정작 얼마 머물지 못하고 떠나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게 됩니다(행18:20-21). 이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곳에 남게 됩니다(행18:19-21). 바울 일행은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 상륙한 후 예루살렘으로 가서, 2차 전도 여행에 대한 안부를 물은 후, 파송교회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가서 선교 보고를 합니다(행18:22). 이렇게 해서 2차 전도 여행을 마치게 됩니다.
바울 제1차 전도 여행, 안디옥(수리아)에서 출발→ 실루기아(시리아 항구)→ 구브로의 섬 (키프러스) 살라미→ 바보 → 밤빌리아의 버가 → 안디옥(비시디아)→ 이고니온 루가오니아의 성 루스드라→ 데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비시디아)→ 밤빌리아의 버가→ 잇달리아→ 안디옥(수리아)까지, AD 47-49년, 약 2년 간, 무려 2,240여㎞을 순회하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행13:1-14:28).
그리고 곧바로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안디옥(수리아)→ 길리기아→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갈리디아→ 무시아→ 비두니아→ 드로아→ 사모드라게→ 네압볼리→ 빌립(마게도냐)→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수리아→ 에베소→ 가이사랴→ 안디옥(수리아)까지, AD 49-52년, 약 3년 간 4,500-5,600여㎞를 순회하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행15:36-18:22). 복음을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한 그 위대한 발걸음을 보게 됩니다.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
1, 2차 도합 최대 8,000여 km를 달렸습니다. 이렇게 초인적인 바울의 전도 여행에서, 각 지역에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졌기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첫 번째로 편지를 써 보낸 교회가 데살로니가교회입니다. 지금 성경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직접 교회를 방문할 수 없었을 때, 편지를 통해서라도, 복음 증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복음 증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서신을 통해서, 교회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해결책을 주었습니다.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은, 무턱대고 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 대상자의 고민을 알고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가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에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문제
데살로니가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데살로니가는 바울이 유럽에서 복음을 전한 두 번째 도시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세 안식일’,즉 3주에 걸쳐 데살로니가교회를 설립했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행17:2). 어느 곳에 가던지 주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보내시지 않습니까? 데살로니가에서도 믿음의 사람 ‘야손’Jason의 집을 예배 처소로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행17:1,4-5). 그러나 데살로니가교회에 3주 밖에 머물 수 없었던 것은 유대인들이 위협이 앞서, 복음을 전했던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떠난 뒤, 베뢰아, 아덴을 걸쳐,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소식을 알고 싶었습니다. 삼 주 밖에 있을 수 없었던 그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나, 염려와 걱정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제일 신뢰하는 제자 중 하나인,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고전4:17)를 데살로니가교회로 파송하였고, 귀환한 디모데로부터 보고를 받은 뒤, 편지를 쓴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쓴 시기는 대략 AD 51년경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에 있었을 때, 야손은 바울을 도와 교회를 섬긴 일로 유대인들에 의해 읍장에게 끌려갔다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행17:5-9). 그리고 바울이 떠난 후에도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많은 고초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박해 가운데서, 훌륭히 믿음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1:6-7)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님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환난 가운데도, 주를 본 받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등 다른 많은 교회 성도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핍박 중에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켰음을, 사도 바울은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오시는가?
그리고 칭찬과 함께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에 대해 답변해야 했습니다. 당시는 예수님의 승천하신 지, 2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이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예수께서 당장 재림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신앙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자꾸 죽어가자, 예수님은 언제 오시는가에 대한 궁금 반 의문 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들에게 분명한 교훈을 해주어야 했던 것이죠.
그렇기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예수님 재림에 관한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데살로니가전서의 주제는 재림이라고 말해도 과언입니다. 재림 신앙, 즉 살아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갈망하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1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2:19).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3:1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이렇게 데살로니가전서 전체가 강림 즉 예수의 재림에 관한 주제로 가득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림 주제 중의 핵심 구절이,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아멘! 바울은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생전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하는 영광을, 누구보다 사모했던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편지로 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기록 시기가 AD 51년 경입니다. 그러면 지금 2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으니, 예수님이 정말 오시는 것이 맞는가? 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살아서, 주를 맞이한다고 하고도, 그들은 맞이하지 못했는데,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까? 이런 의문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짜를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오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계22:20).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셨습니다(계1:3). 그런데 이렇게 2천 년 전에 오신다고 하신 예수님은 아직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시는 것도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속히 오신다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른 분도 아닌, 예수님께서도 2천 년 전, 재림의 날에 대하여서, ‘그날과 그때’는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마24:36,막13:32).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씀의 세 가지 가르침
여기에는 세 가지 가르침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기를 모르는데도, 매우 가깝다고하셨기 때문에, 어느 시대이건 재림 이전까지, 모든 성도들은,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근거를 열 처녀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마25:1-13). 미련한 다섯처녀도 안 믿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입니다. 그러나 졸며 자다가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하였는데, 영접하지 못한 것은 세속화된 신앙입니다.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재림의 신앙에 소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마25:6).
그러므로 두 번째는 가르침은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25:13). 바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열 처녀 비유 후,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이어서 해주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자는 그대로 묻어 두었다가, 악하고 게으론 종이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마25:26). 그러나 다섯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각 각 다섯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이들은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칭찬을 받았습니다(마25:21,23). 열 처년 비유와 달란트 비유는 우리에게 항상 경성하여 기도하며, 성결한 생활과, 열매 맺는 신앙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세상일에 전념하고 분주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마24:48). 우리는 항상 경성하여, 신앙의 열매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 가르침은 배교에 빠지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편지한 후,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잘못된 곳에 빠진 이들이 있었습니다(살전4:17).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을, 주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오해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살전5:3).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성도들을 악용하는 자들이 등장 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느니, 바울로부터 또 다른 편지를 받았다느니 하면서, 혼란을 부채질한 이들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을 듣고 성도들 가운데, 일상 생활을 포기하고, 기도로 재림을 준비한다는 미명 하에, 성도들끼리 어울려 다니며, 불필요한 말들을 만들어 퍼뜨리며, 자신들의 생활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등 무질서하고, 무책임하게 생활하는 자들이, 속출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다시 편지를 써야 하는 필요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2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 두 번째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바로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시기는 AD. 51년 말-52년 초순으로 보입니다.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살후2: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은 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하는 것이고요.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맞이할 그 날까지 생존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재림 때까지, 살아있는 성도들이 있을 것은 분명한 것인데요.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심에 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영으로’, ‘내가 꿈에 환상으로 받았다’ 그런 소리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로라’ 산에서 기도 많이 한, 어떤 목회자의 설교에서 들었다 해도, 따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편지로’ 성경 외에 또 다른 편지가 있다는 거짓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살후2:3). 현혹되거나, 마음이 흔들릴 이유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은 알 수 없지만, 그날의 가까이 옴을 알 수 있는 징후들을 알도록 해 주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2:3)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가까이 올수록,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배교’背敎,Apostasy는 신앙에서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배교는 안 믿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안 믿는 자들은 아예 믿지 않는 것이기에 불신자인 것이고요. 배교는 신자 가운데 믿음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란 하나님을 믿었던 신자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히6:4-5). 그러나 이러한 신령한 체험을 하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히6:6). 아무리 큰 하늘의 능력을 체험하고서도, 타락하면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편에서 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신앙에서 돌아선 이들을 바로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믿음을 저버린 자들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라고 한 것은, 그만큼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배교 위험성을 말합니다. 배교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엄중한 표현을 쓰면서까지, 배교에 대하여 성경은 경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가까이 올수록, ‘배교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살후2:3).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여기저기 재림주가 있다거나, ‘영으로’, ‘내가 꿈에 환상으로 받았다’, ‘말로라’ 산에서 기도 많이 한 어떤 목회자의 설교에서 들었다, ‘편지로’ 성경 외에 또 다른 편지가 있다는 거짓에 현혹되지 말고, 교회에 배교가 성행함을 경계하고, 믿음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지막까지, 배교에 빠지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라고 하셨습니다(눅21:8,12). 마지막 때가 이르면, 이를수록,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회당’으로 말씀한 종교, ‘옥’으로 말씀한 권력,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 공격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만을 진리로 믿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이 말을 싫어합니다. 왜! 너희들만 구원 받느냐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임금들과 집권자들’ 권력가들도 싫어합니다. 정치가들은 종교를 하나로 묶어야 자신들에게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사수하는 교회는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으니, 정치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21:17). 우리를 미워하는 대상이 타인만이 아니라,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라고 하였습니다(눅21:16). 믿음 때문에 가정의 갈등을 넘어, 한 집안의 식구들이, 믿음을 가진 가족을, 당국에 넘겨, 목숨까지도, 해함 받는 일도, 벌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때에 믿음을 마지막까지 보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눅21:15). 오히려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을 독려하고 계십니다(눅21:1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배교의 노도에 휩싸이지 않는 성도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도록 지키실 것이며, 끝까지 믿음을 보존한 자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눅21:18-19).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지막까지 배교에 빠지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택한 자는 끝까지 믿음을 보존할 것이며, 예수님이 지키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살전5:23). 이렇게 배교를 배척하고, 믿음을 보존하는 신앙을 견지하면, 그날, 주님이 오시는 날, 재림의 예수님을 맞이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언제인지,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 ‘다시 오신다’, ‘속히 오신다 것은. 첫째는 어느 시대를 사는 성도이건, 모든 성도들은 신부로서, 신랑을 맞이할,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더디 온다고 생각하고, 세상일에 전념하고 분주하지 말고, 항상 경성하여 기도하며, 성결한 생활, 열매 맺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신앙을 저버리는 일, 배교의 물결이 교회에 휘몰아칠 것이고, 이러한 때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언제인지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 오신다고 약속하신, 그것도 속히 오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당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재림에 대한 의문, 혼란,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이면서, 오늘까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 것에 대한 우리에게 적용되는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는 교회 성도들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해결책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
바울은 ‘고린도에 이르’러 전도를 시작합니다(1). 이곳에서 평생의 동역자인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이전에 베뢰아에서 급히 피신하느라 같이 오지 못했던, 실라와 디모데도 만나게 됩니다(2,5.참고/행17:14;롬16:3). 바울은 이들과 함께 고린도에서 전도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4-5). 그렇지만 복음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서는 ‘바울이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며, 떠났습니다(6). 이것은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행한 것입니다(마10:14.참고/막6:11;눅9:5,10:11;행13:14,50). 이전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대적자들에게서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서, 전도 여행을 계속했습니다(행13:50-51).
우리가 증거하는 복음은 생명입니다. “예수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고 하셨습니다(딤후1:10). 그러나 복음은 심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받지 아니하는 자들에는 죽음, 심판인 것입니다(요3:17-18). 우리는 세상에 복음을 전합니다. 이를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자들이 있고, 비방을 하고, 대적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과 우리는 필요치 않은 논쟁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옷을 털면서’ 즉 생명과 심판의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너희 피가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여러분이 멸망을 받으면, 그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는 깨끗하니라’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비난 거부 반발하는 자들과 충돌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자들에게서도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그렇다고 전도하는데 시늉만을 내는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도하는 것으로 되었다고 면피용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악인은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아는 저와 여러분은 불신자를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에게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겔3:18.참고/겔3:20). 이로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증거를 원하시지, 결과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고, 설령 설령 전도하는 것으로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사망을 바라보고, 죽음 이후 심판에 떨어지는 영혼이 되지 않도록 간절과 긍휼과 애탐으로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입니다.
성도의 신분은 하늘입니다(빌3:20-21.참고/슥9:16;요10:35;갈4:6-7;빌3:20-21;벧전2:9.참고/시82:6). 천국에 입성하지 못하는 자는 지옥에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자의 죽음 이후 심판은 영멸입니다. 영원히 자기 죄 값을 지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 떨어져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마25:4.참고/마5:22,10:28;막9:48;눅16:24-27;계20:10,14:14,21:8). 천국은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천국은 허구가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지옥은 공상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성경은 실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참고/살후1:7-9;벧후2:4;계20:15). 그러므로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 전 미국은 경고문을 뿌렸습니다. “광도 시민 여러분, 1945년 8월 6일에 원자탄을 투하할 터인데 20km 밖으로 도망가십시오. 원자탄이 투하하면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공갈친다. 30만 명을 죽이는 폭탄이 어디 있어?” 하면서, 대부분이 믿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갈가 말까” 망설이다가, “에이, 두고 보자”하고 미루었다가, 핵폭탄이 폭발 후 3초 동안에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경고문을 보고 도피한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 증거를 원하시지, 결과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설렁 설렁이 아니라, “여러분, 망설이지 말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참혹한 형벌과 심판에서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대적자들이 있을지라도,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입니다.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바울은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있는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 집에 들어’갔습니다(7). 그의 집 옆에 있는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8). 하나님께서는 ‘9밤에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하셨습니다(9-10). 바울은 이 말씀을 붙들고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를 계속했습니다(11). 오늘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복음을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입니다.
‘갈리오’Gallio는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아가야 지방의 총독이었습니다(12).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이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고발하였습니다(12-13). 이에 갈리오는 범법에 해당하는 사안이면 처벌하겠지만, 유대인의 법 즉 종교적인 문제라면 재판을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14-15). 결과적으로 바울은 무죄로 석방이 될 수 있었습니다(16).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총독을 통해서도 보호하십니다. 복음을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를 따르는 자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후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하게 되는데요(19).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습니다(19). ‘20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파송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선교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전도 여행을 마치게 됩니다. 제2차 전도 여행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 앞서 에베소로 떠나기 위해 겐그레아 항구로 이동을 합니다(행18:18). 이때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때 “나실인”Nazirite의 서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평생 혹은 특별한 헌신을 위해 한시적으로 세상과 단절하고 스스로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한 자를 말합니다(참고/민6:1-21,30:2;삿13:5;삼상1:28;렘35:6;눅 1:15). 바울이 왜 이 시점에 서원을 하였을까요? 아마도 1, 2차 전도 여행을 거치면서, 육적 영적으로 소진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자신을 보며, 다시금 서원을 통해 주의 사명을 다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일 것입니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에서, AD 47~49년, 약 2년간, 무려 2,240여㎞를 순회하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행13:1-14:28). 그리고 곧바로 2차 전도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안디옥(수리아)→ 길리기아→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갈리디아→ 무시아→ 비두니아→ 드로아→ 사모드라게→ 네압볼리→ 빌립(마게도냐)→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수리아→ 에베소→ 가이사랴→ 안디옥(수리아)까지, AD 49~52년, 약 3년간 4,500-5,600여㎞를 순회하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행15:36-18:22). 복음을 침묵하지 말고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합니다.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
1, 2차 도합 최대 8,000여 km를 달렸습니다. 이렇게 초인적인 바울의 전도 여행에서, 각 지역에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졌기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첫 번째로 편지를 써 보낸 교회가 데살로니가교회입니다. 바울은 서신을 통해서 교회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해결책을 주었습니다.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은 무턱대고 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 대상자의 고민을 알고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가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에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많은 환난 가운데도, 주를 본 받아 마게도냐와 아가야 등 다른 많은 교회 성도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살전1:6-7).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당시는 예수님의 승천하신 지, 2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이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예수께서 당장 재림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신앙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자꾸 죽어가자, 예수님은 언제 오시는가에 대한 궁금 반 의문 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들에게 분명한 교훈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바울은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생전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하는 영광을, 누구보다 사모했던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편지로 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살아서, 주를 맞이한다고 하고도, 그들은 맞이하지 못했는데,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까? 이런 의문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짜를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오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셨습니다(계1:3,22:20).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씀의 세 가지 가르침
여기에는 세 가지 가르침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기를 모르는데도, 매우 가깝다고 하셨기 때문에, 어느 시대이건 재림 이전까지, 모든 성도는,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근거를 열 처녀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마25:1-13). 미련한 다섯처녀도 안 믿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입니다. 그러나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에 영접하지 못했습니다(마25:6). 세속화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은 재림의 신앙에 소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는 가르침은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25:13). 바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열 처녀 비유 후,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이어서 해주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자는 그대로 묻어 두었다가, 악하고 게으론 종이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마25:26). 그러나 다섯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각 각 다섯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이들은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칭찬을 받았습니다(마25:21,23). 열 처년 비유와 달란트 비유는 우리에게 항상 경성하여 기도하며, 성결한 생활과, 열매 맺는 신앙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세상일에 전념하고 분주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마24:48). 우리는 항상 경성하여, 신앙의 열매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 가르침은 배교에 빠지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주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오해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살전5:3).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성도들을 악용하는 자들이 등장 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느니, 바울로부터 또 다른 편지를 받았다느니 하면서, 혼란을 부채질한 이들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2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데세살로니가교회를 향해 두 번째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바로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은 예수님의 재림을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그 날까지 생존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 주 재림에 관하여 ‘영으로’, ‘내가 꿈에 환상으로 받았다’ 그런 소리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로라’ 산에서 기도 많이 한, 어떤 목회자의 설교에서 들었다 해도, 따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편지로’ 성경 외에 또 다른 편지가 있다는 거짓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살후2:1-2). 그러한 것들에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살후2:3).
그러면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은 알 수 없지만, 그날의 가까이 옴을 알 수 있는 징후들을 알도록 해주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2:3)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가까이 올수록,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배교’背敎,Apostasy는 신앙에서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이르면, 이를수록,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회당’으로 말씀한 종교, ‘옥’으로 말씀한 권력,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 공격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눅21:8). 왜냐하면, 우리는 유일한 구원자로 예수님만을 진리로 믿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이 말을 싫어합니다. 왜! 너희들만 구원받느냐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임금들과 집권자들’ 권력가들도 싫어합니다(눅21:12). 정치가들은 종교를 하나로 묶어야 자신들에게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원자 믿는 진리를 사수하는 교회는 정치인들에게 걸림이 될 뿐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21:17). 우리를 미워하는 대상이 타인만이 아니라, 가정의 갈등을 넘어, 한 집안의 식구들이, 믿음을 가진 가족을, 당국에 넘겨, 목숨까지도, 해함 받는 일도, 벌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눅21:16). 이러할 때 믿음을 마지막까지 보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눅21:15). 오히려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을 독려하고 계십니다(눅21:1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배교의 노도에 휩싸이지 않는 성도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도록 지키실 것이며, 끝까지 믿음을 보존한 자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눅21:18-19).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지막까지 배교에 빠지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택한 자는 끝까지 믿음을 보존할 것이며, 예수님이 지키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살전5:23). 이렇게 배교를 배척하고, 믿음을 보존하는 신앙을 견지하면, 그 날, 주님이 오시는 날, 재림의 예수님을 맞이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인지,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 ‘다시 오신다’, ‘속히 오신다 것은. 첫째는 어느 시대를 사는 성도이건, 모든 성도들은 신부로서, 신랑을 맞이할,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더디 온다고 생각하고, 세상일에 전념하고 분주하지 말고, 항상 경성하여 기도하며, 성결한 생활, 열매 맺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신앙을 저버리는 일, 배교의 물결이 교회에 휘몰아칠 것이고, 이런한 때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당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재림에 대한 의문, 혼란,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이면서, 오늘까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 것에 대한 우리에게 적용되는 ‘솔루션’Solution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는 교회 성도들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해결책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재림의 신앙이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오심 재림이 임박한 징조가 무르익은 오늘날 우리들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천 여 년 전 이 세상에 오신 초림의 예수님과 장차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전해야합니다. 전해야 하는데,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 침묵하지 말고 말아라, 중단하지 말고 말아라, 이 세 가지의 자세가 요청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였습니다(5). 우리들의 증언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증언해야 한다고요. 주저하지 말고 전하라, 침묵하지 말고 전하라, 중단하지 말고 전하라입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대적자들이 있습니다. 옷을 털면서,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그들이 비난과 거부와 반발에 충돌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런 자들에게서도 복음을 주저하지 말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할 때 갈리오 총독을 통해, 무죄 석방되도록 하셨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를 회심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순종에 나타난 역사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할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은 무턱대고 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 대상자의 고민을 알고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가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에 있는 것입니다. 전도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고 그 영혼의 문제를 알고, 복음을 중단하지 말고 말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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