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 19 이재현목사 "한결 같은 삶"(행 20:1-38)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2. 10. 30. 19:51

한결 같은 삶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사도행전 20:1-38. 2022.10.30. 主日禮拜


“1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4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13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17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20:1-38)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 말씀 첫 번째 가르침은 만남의 축복입니다. 바울이 본격적인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기 전 아볼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18:23-24). 세례 요한의 제자로 물 세례 만을 알고 있던 그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고, 온전한 복음으로 무장한 아볼로는 아가야교회에 은혜로 많은 유익을 주었으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유대인의 말을 물리치는 능력의 전도자가 되었고, 훗날 고린도교회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도자로 세워졌습니다(18:25-28.참고/고전1:12,3:4-6). 아볼로가 이렇게 쓰임 받은데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만남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만남 가운데 보아스와 룻이 있습니다. 보아스는 유력자였고, 룻은 그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이었습니다(2:1-6). 그럼에도 보아스는 룻의 신앙과 효성을 알고 있었고, 그녀에게 하나님이 보답과 보호와 온전한 상을 주실 것을 예견했습니다(2:11-12). 보아스는 수혼법’嫂婚法에 따라, 친척인 죽은 엘리멜렉의 자부 룻과 결혼하면서, 자신의 소유는 엘리메렉의 아들로 역시 죽음을 당한 말론과 기론의 것이 되었고, 룻의 시모 나오미까지 부양을 해야 했습니다(참고/4:6-8). 이것을 알면서도,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하는 것은, 룻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난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입니다(4:17). 이 계보에서 메시아 예수님이 오십니다(참고/1:5,16). 이같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만남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아볼로 만남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외모를 보고 만나 사이도 아니요, 무슨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만난 사이도 아닙니다. 전도는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인도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는 너무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그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람의 만남으로서, 말씀으로 세워주고, 능력 있는 전도자로 쓰임 받는 우리의 만남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다시 만남의 축복입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첫 번째 도시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성령의 계심도모르고, ‘요한의 세례만을 알자, 예수님의 성령과 불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했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하는 거룩한 역사가열 두 사람에게 나타났고, ‘회당에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 강론하였습니다(19:4-10.참고/3:11). 바울은 이를 방해하는 자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을 임대해서 두 해 동안 날마다 강론하였습니다(19:9-10). 이때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시니,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나갔습니다(19:11-12). 바울의 증거한 복음을 듣고 회심한 마술사들은 점괘 책을 모두 불살랐는데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19:19).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19:20).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에서 에베소에 들려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더 있기를 요청하였으나,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하였고, 3차 전도 여행에서 다시 만남을 통해 이러한 일을 행한 것입니다(참고/18:19). 우리 교회는 짧은 역사이지만, 여러 사정으로 함께 할 수 없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다시 돌아와 함께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이루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 다른 만남의 축복입니다. 바울의 전도 사역으로 에베소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섬기던 여신 아데미 신전의 발길을 끊었습니다. 우상 물품을 납품하는 데메드리오를 중심으로 직공들과 영업자들이 세례를 규합하여, 바울로 말미암아 신전도 무시당하고, 여신도 위신이 떨어졌다며, 시내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의 동역자이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25,000여 명을 수용하는 연극장에 모여들었습니다(19:23-29). 그런데 이 자리에 왜 모였는지 모르는 혼란이 일어났고, 이에 에베소 서기장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않고, 여신을 도둑질하지도 않았는데, 이유 없이 끌고 온 불법을 지적하고, 오히려 이 소요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며, 모임을 해산시켜 버렸습니다(19:30-41.참고/왕상18:26-28). 예수의 도道, 복음을 막고자 했던 행위는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19:23). 연극장에 모인 자들은 주의 제자들을 핍박한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대적자들로 모임 자체가 와해하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실 때, 반대자를 통해서도, 성도를 보호하며,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주님을 증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 개인, 우리 가정,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만을 붙잡고 있다면 어떤 사람, 단체, 권력에 위축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개입하지 않더라도, 다른 자들을 통해서, 그 적대자들을 무너뜨립니다. 이것이 다른 만남도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말씀으로 정진하고, 여건이 좋은 때를 기다리지 말고 기도로 정진하며, 주변이 바뀔 것을 바라지 말고 헌신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면 방해자들이 나타나도, 그 방해자들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까지 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드로아에서 유두고를 살리다


소요가 그치매라고 말씀합니다(1). 이것은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전 우상업자들이 바울의 전도로 생계에 위협을 받자, 난동을 일으키고,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의 동역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연극장에 집결하여, 예수의 ’道 복음을 말살하려고 하였지만, 자중지란으로 흩어져진 사건을 말합니다(19:23-41). 이후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1). 마가도냐는 오늘날 그리스 지역을 말합니다.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요(2). 네압볼리,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까지, 이전 2차 전도여행지를 두루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 석 달 동안 있었다고 하였는데요(3). 아마 이때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참고/16:1-2,23;딤후4:20). 그리고 배 타고 수리아(안디옥 다시 아시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3).


바울과 “4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바울을) 기다리더라고 하였습니다(4-5). 그리고 “(일행은) 무교절 후에 (유럽)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아시아 터키)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일주일을)를 머무니라고 하였습니다(6).


바울은 드로아에 있는 동안 그 주간의 첫날’, 지금의 주일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습니다(7). 주일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전도 여행 일정상 드로아에 오래 있을 수 없었던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좀 더 많은 말씀을 전하고자)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였습니다(7). 바울의 설교를 듣고자 ‘(일행은) 윗다락에 까지, ‘등불을 많이 켰, 그곳에서 청종하였습니다(8). 그런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깊은 밤까지)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9). 아마도 바울은 윗다락에서 말씀을 전했고, 유두고는 아래 다락 창에 걸터앉아서 말씀을 듣던 중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은혜를 받고자 준비한 집회에 사람이 죽은 큰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모두가 경황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바울() (아무일도 없다는 듯) 내려가서 (죽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는 것입니다(10). 회중들이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는데요. 바울은 태연하게 위층으로 (다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많은 사람들과) 오래 담론하고 (드로아)를 떠나갔습니다(11).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12). 하나님의 역사에 모두 감사하며 영광을 올려 드린 것입니다.


성경에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선지가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왕상17:17-24;왕하4:32-35).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 베다니의 나사로 를 살렸습니다(9:23-25;5:35-43;7:11-15;11:43-44).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도르가를 바울이 유두고를 살렸습니다(9:36-40,20:9-12). 이를 통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은 오늘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많은 선지자 가운데 엘리야와 엘리사, 신약의 많은 사도 가운데 베드로와 바울 네 명을 통해서만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모든 주의 종이 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편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 하심이 있을 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그때 그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반박할 수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와 같이 필요한 상황이 온다면, 죽은 자도 살리는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2천 여 년 교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러한 이유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릴 수 있다”. 생사이탈권을 가졌다고 떠벌리는 자들에게 미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외에 엘리사, 엘리야, 베드로, 바울은 자신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 그 기적이 필요했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16:19-31). 나사로는 죽은 후 낙원에 들어가 아브라함 품에 안겼지만,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 불꽃 가운데 괴로워하였습니다(16:22-24). 부자는 자신의 다섯 형제 만이라도, 이러한 고통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아,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고하였지만,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16:30-31). 이 말씀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이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와 성도의 전도를 통해 믿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난 기적을 보아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은자가 살아는 것은 큰 기적이지만, 그 여부와 관계 없이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등장할 짐승, 적그리스도는 암살 같은 공격에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적그리스도)를 따르고’, 인류가 그를 경배하며, ‘누가 이 짐승(적그리스도)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라고 하였습니다(13:3-4). 성경은 장차 지구 역사 가운데 예수님 부활을 흉내 낼 자가 등장할 것이며, 평화의 왕으로 위장, 사람들을 미혹해서, 사망, 지옥, 영멸에 떨어지게 할 것이니, 절대 그자를 따르지 말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참고/9:6;9:27;24:15;살후:2:3-4;6:8).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것은, 그것도 영생을 주실 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한 분 뿐이며, 그분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을 조성하시어,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신 후, 흰 보좌 심판에서, 모든 성도, 의인은 생명의 부활을 입게 될 것입니다(28:1-10;16:1-8;24:1-12;5:29,20:1-10;고전15:23,51-53). 죽은 자가 살아난 것에 대한 성경적 교훈과 정립을 바로 해야 합니다.


임종의 순간에 함께 하고 싶은 사람 - 인생의 절정에서 마지막을 바라보며

바울의 ‘(일행은) (바울보다)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앗소로) 가니그것은 바울이 (드로아에서) 걸어서 (앗소에)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었습니다(13). ‘14바울이 앗소에서 (일행을) 만나니 (일행이) (바울을)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렀습니다(14-15). ‘바울이 (이런 행로를 취한 것은)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들리지 않고)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었습니다(16).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고자 서두른 이유는 예루살렘에 갔다가, 최종 선교지인 로마도 보기 위함입니다(19:21). 이제 그의 사역이 마지막이 다다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만약 지금 내 인생의 마지막 죽음에 가까이 와있다면 여러분은 누구와 함께 하고 싶습니까?”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라고 하였습니다(17).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들린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급히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23-23).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25). 사도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에 가게 되는데 거기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여러분이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22-23,25). 의미심장한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그 인생의 마지막이 될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예언은 앞서, 에베소에 있는 회당과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에도 이미 증거한바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9:21). 그러나 사도 바울의 진정한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하였습니다(19:21). 사도 바울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을 통해 로마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마가 자신의 마지막 선교지이고, 그곳에서 순교를 당할 것임을 성령을 통해 예견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6).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하고 환난을 당할 것을 알았으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히고 있습니다(24). 그런데 이러한 중대한 순간을, 인생의 마지막 앞에서, 안디옥, 빌립보, 고린도, 데살로니가 등 수 많은 도시들에 직접 개척했거나, 초청을 받아 목회한 교회들 가운데, 유독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목회자의 입장에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지만, 에베소에서는 가히 폭발적인, 절정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라고 전하고 있습니다(19:11).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하였습니다(19:12). 이를 본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19:13).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사도 바울과 같이 흉내 내다가, 오히려 악귀에 씌워 고통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19:14-15). 또한 에베소에는 점괘를 보는 마술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우리로 말하면 토정비결과 같은 책들을 다 모아 불살랐습니다. 그 값이 자그마치 은 오만에 달했습니다(19:19).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진 복음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는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19:20). 경이적인 부흥이 일어났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는데 이 우상으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사도 바울로 인해 신전에 사람들이 발길이 끊기자 생업에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에 다른 직공들과 신전 수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세를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들이고, 연극장에 에베소 사람들을 모아 큰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물론 이러한 그들의 발악은 에베소 사람들에 의해 스스로 와해되어 버렸습니다(19:23-41).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의 자리와 같은 로마로 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사역의 최고점에 있었던 에베소에서 함께 동역했던 장로들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역사의 자리에 악한 자들의 방해도 거셌기 때문입니다. “28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마귀의 계략과 술수를 알 수 있습니다(28-30).


이러한 거룩한 역사와 커다란 고난을 함께 한 에베소 장로들과 바울은 최종 사역지로 떠나기 전 함께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36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는 애절한 말씀 속에서, 에베소에서 3년이 얼마나 사도 바울과 장로들에게 귀중한 시간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사도행전 20장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를 회고하는 고별담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에베소 한 교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전 생애를 통한 사역, 나아가 오늘 모든 교회에서 사역의 표본이 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별 담화에 나타난 다섯가지 삶


사도 바울은 고별담화를 통해 먼저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8). 그러면 사도 바울이 무엇을 행했다고 합니까?


겸손

가장 먼저 모든 겸손이라고 말씀합니다(19). 앞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는 지금까지 그의 사역 중 절정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역사하셨는지, 그의 손수건만 가져다가, 병자의 환부에 갖다 대면, 씻은 듯이 낳았고, 악령 들려 고통 하는 자의 몸에 덮으면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이러한 능력이 나타날 때, “내가 재림 예수다고 한마디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며 떠받들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신격화하려고 했겠습니까? 한국교회사 시작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보아도, 그런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도관의 박태선, 통일교의 문선명에서부터, JMS의 정명석, 하나님의교회의 안상홍과 장길자,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의 이만희까지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것에 겸손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언된 대로 사도 바울이 마지막 사역지 로마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구금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옥중에서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썻습니다. 이 편지에서 그가 마지막까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7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3:7-8). 사도 바울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 죽임이 마땅하다며, 증인을 섰던 사람입니다(7:58).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옥에 가두고 교회를 잔멸했던 자이었습니다(8:3). 그러한 자신을 친히 만나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통해 아무리 큰 기적이 행해져도, “나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인데 하나님이 붙잡아 사용하셨다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그 결과에 도취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겸손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에베소에서 행한 사역의 회고이자, 죽음의 자리에서 장로들에게 전한 고별담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뿐 아니라, 시대를 건너 오늘의 교회에까지 모든 성도의 섬김의 표본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모든 겸손으로 교회를 섬깁시다. 교회를 섬기면서 하나님께 드린 헌신이 사람들 앞에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변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래도 나정도 인품과 성격과 신앙이 되니까 섬기지라는 교만은 올무에 걸려 넘어져,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말씀과 같이 패망의 선봉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16:18).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지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더 작은 나에게 교회를 섬길 수 있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


사도바울이 두 번째 행한 것은 눈물이라고 했습니다(19). 스포츠에서 선수들이 경기를 마치고 우는 장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눈물은 두 가지였는데요. 승자와 패자의 눈물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두 선수 모두 울기도 합니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승리와 패배의 순간에 똑같이 눈물샘을 터지게 하나 봅니다. 그러나 승자가 흘리는 기쁨의 눈물은 그 안에서, 그동안의 혹독한 훈련의 고통이 담겨있다 하더라도, 진정한 눈물의 의미를 담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눈물은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놓치고, 혹은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선마저 통과하지 못한 선수들의 복받쳐 흐르는 눈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패배의 눈물 고통의 눈물 아픔의 눈물을 싫어합니다. 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눈물을 잊어버렸다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섬기면서 얼마나 울었는가를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설혹 울었다고 할지라도, 내 눈물은 어떤 눈물인지, 또한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눈물에 대한 편견부터 버려야 합니다. 눈물이 그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눈물의 소중함을 다 경험하지 않습니까? 눈물은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와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리 웃음이 우리에게 매력적이고,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웃음이 눈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의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만일 우는 것은 무조건 저주요, 슬픔은 무조건 부정해야 될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인생은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 버린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랍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햇빛만 쏟아지는 곳은 사막이 된다.” 중동지역은 비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사방을 둘러 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막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속담이 생긴 것 같습니다. “모든 햇살은 사막을 만든다.”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도 진리입니다. 비가 와야 합니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비가 쏟아질 때, 생명의 환희가 일어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이 없는 인생은 사막과 같습니다. 눈물이 없으면, 웃음 그 자체도 하나의 광대 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인생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눈물과 애통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지 아니한 신앙은 하나의 값싼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예수 믿고 나서 웃기만 했습니까? 예수 믿는데 왜 울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까? 어쩌면 아직 값싼 신앙일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울어 보셨습니까? 그 사람은 차원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왜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내가 할 수 없기에 우는 것입니다. 애통이 우리의 신앙을 본질로 향하게 만듭니다. 눈물이 우리의 믿음을 본질로 인도합니다. 눈물이 고인 눈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보입니다. 젖은 눈에 부활의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애통하는 심령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랍니다. 우리의 인격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성숙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눈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애통을 무조건 싫은 것으로,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5:4).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면서, 큰 능력이 나타났어도, ‘눈물로 사역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눈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 시간을 통해 꼭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밑바닥에는 눈물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울며불며 매달리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나 이것은 마귀가 주는 소리입니다. 애통을 모르는 신앙은 천박한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눈물이며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울어야 할 때 함께 울 수 있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경외


사도바울이 세 번째 행한 것은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이라고 했습니다(19). “경외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시험 가운데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같은 동족인 유대인 그중에서도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들을 통한 시험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뿐만 아니라, 고린도 등 다른 지역에서도 목회를 하면서, 한 믿음의 형제들에게 모함을 당하였습니다(참고/고전9:1-2,29:30). 사도 바울이 너무나 출중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가자 이에 대해 시기를 한 것입니다. “29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말씀하며, 이단의 계략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험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밝히고자하는 노력보다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입니다(19). 시험은 누구나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청아비전교회가 천상교회가 아니고 지상교회인 이상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연약한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의인이 되었어도, 성숙의 과정 동안 허물을 벗듯 숱한 부족함이 드러납니다. 그로 인해 다른 성도에게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그러므로 어떤 간계의 시험에도 참고 주를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경외입니다. 경외라는 말은 쉽게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성도 여러분! 이러한 각오로 교회를 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정


사도 바울이 네 번째 행한 것에 대하여, “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이 말씀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열정입니다. 20절의 유익한 것이란, 21절 후반 믿음을 증언한 것즉 즉 복음을 일컫습니다. 우리에게 복음만큼 유익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공중 앞에서나많은 사람들 앞에서든, ‘각 집에서나집 집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동족이던 외인이던 신분고하 남녀노소 식자무식자 부한자빈한자 누구에게든지 가리지 않고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26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너희들에게 최선을 다해 쉬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으니, 이제 너희들이 설혹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 받는다고 하여도, 나의 책임이 아니다 나는 꺼리길 것 없이, 에베소에 행할 내 사명을 다했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만의 소리가 아니라, 충성을 다한 후회 없는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지역에 그리고 내 이웃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를 통해 복음을 들은 자들이 주 앞에 서는 날 핑계치 못할 터라는 당당함을 갖기까지 전해야 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씀합니다(22). 그곳에서 어떤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성령이 내게 증거한다고 하였습니다(23). 사도 바울이 마지막 순교의 자리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다면, 그가 이방에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가르칠 때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했으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복음 증거, ”열정으로 사도행전의 역사를 써나가는 청아비전교회가 되시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제


사도바울이 다섯 번째 행한 것은 “33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라고 하였습니다(33). 이것은 절제입니다. 교회는 받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입니다. 다른 성도에게 대접 받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입니다.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드리는 곳입니다. 나의 입지를 다지는 곳이 아니라, 남을 세우는 곳입니다. 사람은 이해득실에 민감합니다. 나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는 절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날 같았으면 응당 내 것으로 취해야할 순간 아니지! 주님의 기뻐하시는 것으로 드려야지라며, 타인에게 기꺼이 베풀 수 있는 것. 그 순간이 바로 아름다운 절제입니다. 내 유익을 타인의 유익으로 바꾸는 크리스천의 고귀한 절제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35). 주님이 주는 것이 복이 있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6:38).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5:1.참고/6:2).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의 소유를 전해 줄 때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아까워도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로서, 주인의 명령에 따라, 당연히 준다는 정신으로 하여야 합니다.


한결같이:첫날부터 지금까지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자신의 일생의 절정의 순간에 함께 했던 에베소 장로들과,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전한, 사도 바울의 고별 담화에서 담긴 보화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교회에서 감당해야 할 표본이 됩니다. 그 첫째는 겸손입니다. 둘째는 눈물이었습니다. 셋째는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기는 경외였습니다. 넷째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열정입니다. 다섯째는 지난날 내 이익을 앞세우던 것을 타인에도 돌리는 절제였습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를 살펴보면, 이 정도는 아무나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신앙이면 할 수 있는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 이 다섯 가지가 더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18). ‘첫날부터 지금까지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초지일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끝까지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 성산 장기려聖山 張起呂, 1911-1995 박사님은 한국의 슈바이처’, ‘사랑의 의사’, ‘무소유의 삶을 산 분으로 불리는 신실한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안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최고 학부인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평양 연합기독병원 원장,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병원 원장, 부산아동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부산대, 가톨릭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1943) 및 대량절제술(1959)에 성공한 의술에 있어도, 당대 세계 최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화려한 직함보다도,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인 일이 있습니다.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 병원, 간질 환자들의 모임인 장미회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협동조합 청십자의료보험창설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월급을 받아 본적이 없습니다. 돈이 없어 수술을 못하는 환자들의 비용을 다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돈 없는 환자가 밤에 몰래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병원 문을 열어놓은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병원 옥상에 마련된 초라한 숙소에서 살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침대 머리맡에는 항상 두 장의 사진을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한 장은 30대의 어여쁜 아내의 사진이고, 또 한 장은 죽기 3년 전 미국에 사는 조카가 평양을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80세가 된 꼬부랑 할머니 아내의 사진입니다. 그는 625전쟁 중 월남할 때, 데리고 온 둘째 아들 하나를 키우며, 북에 남겨둔 아내와 다섯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재혼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 국민훈장 무궁화장,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그가 소천하던 날, 그가 일생을 봉사했던 병원들과 수십 년간 가르쳐온 수 많은 제자들 그리고 한국교회는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를 기리는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1909년 평북 옹천에서 태어나고
1995년 서울에서 승천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 모란공원에 잠들다


장기려 박사님은 실력이면 실력, 영성이면 영성, 삶이면 삶,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이 겸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더 고귀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을 변함없이 사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장기려 장로님은 우리에게 크나큰 도전을 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신 이 다섯 가지를 일생 동안 한결같은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끝까지 변함없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생의 항해에는 순풍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몰아치는 광풍에 맞서야 하고, 수많은 암초를 건너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힘에 지친 인간은 타협하기 일쑤이고, 안주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믿음과 신념과 결단이 없이는 건너기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이 겸손, 눈물, 경외, 열정, 절제 이 다섯 가지가,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첫날부터 지금까지한결같은 삶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 여러분!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을 도구로 일하셨던 성령이 계십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시작에서 끝까지, 소임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초지일관 사명을 다한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 그러면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35). 오늘 우리에게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리

드로아에서 유두고를 살리다


애베소에서 우상 업자들이 예수의 ’道 복음을 말살하려던 집회는 자중지란으로 무너지게 되었습니다(19:23-412). 소요가 그치매바울은 오늘날 그리스 지역인 마가도냐로 가, ‘그 지방네압볼리,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까지, 이전 2차 전도여행지를 다녀가며 제자를 권하고 헬라에 이르렀습니다(1-2). 바울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서 아시아 드로아에 도착하여 먼저 기다리던 일행들과 합류하게 됩니다(3-5). 드로아에서 이레일주일을 머물렀는데요(6). 지금의 주일예배인 그 주간의 첫날 떡을 떼려 모였,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좀 더 많이 말씀을 전하려고, ‘강론을 밤중까지 계속하였습니다(7). 그런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9). 모두가 경황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바울() (아무일도 없다는 듯) 내려가서 그(죽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10). 그리고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오래 담론하고 (드로아)를 떠나갔습니다(11).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12). 하나님의 역사에 모두 감사하며 영광을 올려 드린 것입니다.


성경에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도, 엘리사와 엘리야, 베드로, 바울입니다(왕상17:17-24;왕하4:32-35;9:23-25;5:35-43;7:11-15;11:43-44;9:36-40,20:9-12).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은 오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선지자와 사도 가운데도 4명 밖에 없었다는 것은, 모든 주의 종이 행하는 것으로 보편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히 개입하여 절대적 능력을 보일 필요가 있을 때, 한한 것입니다. 지난 2천 여 년 교회사 없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을 행한 자들은 자신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일 뿐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후 낙원에 들어가, 아브라함 품에 안겼지만,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 ‘불꽃 가운데 괴로워하였습니다(16:19-24). 부자는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나사로가 찾아가 그들에게 보이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16:27-28).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16:30-31). 목사와 성도의 전도를 통해 믿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난 기적을 보아도 믿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는 것은 큰 기적이지만, 그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확신을 갖고,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말에 등장할 짐승, 적그리스도는 암살 같은 공격에 죽게 된 것 같다가 살아나, 인류가 그를 경배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3:3-4). 장차 지구 역사 가운데 예수님 부활을 흉내 낼 자가 등장할 것이며, 평화의 왕으로 위장,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 음부, 지옥에 떨어지게 할 것이니, 절대 그자를 따르지 말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참고/9:6;9:27;24:15;살후:2:3-4;6:8).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것은, 그것도 영생을 주실 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한분 뿐이며, 그분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을 조성하시어,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신 후, 흰 보좌 심판에서, 의인은 생명의 부활을 입게 될 것입니다(28:1-10;16:1-8;24:1-12;5:29,20:1-10;고전15:23,51-53). 죽은 자가 살아난 것에 대한 성경적 교훈과 정립을 바로 해야 합니다.


임종의 순간에 함께 하고 싶은 사람 - 인생의 절정에서 마지막을 바라보며

바울은 일행과 함께 드로아에서 출발하여, 여정을 재촉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었습니다(14-16).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고자 서두른 이유는 예루살렘에 갔다가 후에 최종 선교지인 로마도 보기 위함입니다(19:21). 이제 그의 사역이 마지막이 다다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만약 지금 내 인생의 마지막 죽음에 가까이 와있다면 여러분은 누구와 함께 하고 싶습니까?”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에 가게 되는데 거기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23-24). 의미심장한 이 말에는 로마가 인생의 마지막이 될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중대한 순간 말레도에서 그 많은 도시에 세워진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했습니다(17).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지만, 에베소에서는 가히 폭발적인, 절정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라고 전하고 있습니다(19:11).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하였습니다(19:12). 마술사들이 회심하여 점괘 책들을 다 모아 불살랐습니다. 그 값이 자그마치 은 오만에 달했습니다(19:19).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19:20). 이러한 경이적인 역사와 함께 에베소 아데미 신전 우상 공급자들이 바울로 생계가 끊기자, 시내에 소요를 일으키고, 무를 선동하여 바울의 동역자들을 잡아 연극장에 모여서, 예수의 도, 복음 말살하려는 일 또한 있었습니다(19:23-41).


사도 바울은 죽음의 자리와 같은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사역의 절정에 있었던 에베소에서 함께 동역했던 장로들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큰 부흥이 있는 자리에 악한 자들의 방해도 거셌기 때문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리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사탄의 계략을 알 수 있습니다(28-30). 이러한 위대한 역사와 커다란 고난을 함께 한 에베소 장로들과 바울은 마지막을 보내고 싶었던 것입니다(36-38). 사도행전 20장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한를 회고하는 고별 담화이면서, 그의 전 생애를 통한 사역, 나아가 오늘 모든 교회에서 사역의 표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별 담화에 나타난 다섯가지 삶


사도 바울은 고별 담화를 통해 먼저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8). 그러면 사도 바울이 무엇을 행했다고 합니까?


겸손
가장 먼저 모든 겸손이라고 말씀합니다(19).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는 지금까지 그의 사역 중 절정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내가 재림 예수다고 한마디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것에 겸손했습니다.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사역지 로마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구금을 당했을 때, 나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인데 하나님이 붙잡아 사용하셨다고 하였습니다(3:7-8). 사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믿는 성도를 잡아 옥에 가두고, 교회를 잔멸했던 자이었습니다(:8:3). 그러한 자신을 친히 만나주신 주님 은혜에 항상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통해 아무리 큰 기적이 행해져도, 결과에 도취 되지 않고, 모든 겸손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모든 겸손으로 교회를 섬깁시다. 교회를 섬기면서 하나님께 드린 헌신이 사람들 앞에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16:18).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지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더 작은 나에게 교회를 섬길 수 있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
사도 바울이 두 번째 행한 것은 눈물이라고 했습니다(19). 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눈물을 잊어버렸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섬기면서 얼마나 울었는가를 한번 쯤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설혹 울었다고 할지라도, 내 눈물은 어떤 눈물인지, 또한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눈물의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만일 우는 것은 무조건 저주요, 슬픔은 무조건 부정해야 될 것으로만 알고 있다면,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 버린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랍 속담에 햇빛만 쏟아지는 곳은 사막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도 진리입니다. 비가 와야 합니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비가 쏟아질 때, 생명의 환희가 일어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이 없는 인생은 사막과 같습니다. 눈물이 없으면, 웃음 그 자체도 하나의 광대 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인생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눈물과 애통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통이 우리의 신앙을 본질로 향하게 만듭니다. 눈물이 우리의 믿음을 본질로 인도합니다. 눈물이 고인 눈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보입니다. 젖은 눈에 부활의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애통하는 심령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랍니다. 우리의 인격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성숙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5:4).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면서, 큰 능력이 나타났어도, ‘눈물로 사역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울며불며 매달리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나, 이것은 마귀가 주는 소리입니다. 정말 울어야 할 때, 함께 울 수 있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경외
사도바울이 세 번째 행한 것은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이라고 했습니다(19.참고/고전9:1-2). “경외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시험 가운데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같은 동족인 유대인 그중에서도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들을 통한 시험이었습니다. “29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말씀하며, 이단의 계략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험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밝히고자하는 노력보다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입니다(19). 시험은 누구나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교회는 연약한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의인이 되었어도, 성숙의 과정 동안 허물을 벗듯 숱한 부족함이 드러납니다. 그로 인해 다른 성도에게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그러므로 어떤 간계의 시험에도 참고 주를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경외입니다. 경외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열정
사도 바울이 네 번째 행한 것에 대하여, ‘유익한 것이란(20), ‘믿음을 증언한 것’(21) 즉 즉 복음을 일컫습니다. 우리에게 복음만큼 유익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공중 앞에서나많은 사람들 앞에서든, ‘각 집에서나집 집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동족이던 외인이던 신분고하 남녀노소 식자무식자 부한자빈한자 누구에게든지 가리지 않고 전했다는 것입니다(20-21). 이것은 열정입니다. 그렇기에 “26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만의 소리가 아니라 충성을 다한 후회 없는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역에 그리고 내 이웃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를 통해 복음을 들은 자들이 주 앞에 서는 날 핑계치 못할 터라는 당당함을 갖기까지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했으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참고/22-23). 이러한 사도 바울의 복음 증거 열정으로 사도행전의 역사를 써나가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제
사도바울이 다섯 번째 행한 것은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하였습니다(33). 이것은 절제입니다. 교회는 받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입니다. 지난날 같았으면 응당 내 것으로 취해야 할 순간 아니지! 주님의 기뻐하시는 것으로 드려야지라며, 타인에게 기꺼이 베풀 수 있는 것. 내 유익을 타인의 유익으로 바꾸는 크리스천의 고귀한 절제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셨기 때문입니다(35).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6:38).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5:1/참고/6:2).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의 소유를 전해 줄 때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아까워도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로서, 주인의 명령에 따라, 당연히 준다는 정신으로 하여야 합니다.


한결같이:첫날부터 지금까지


첫째는 겸손입니다. 둘째는 눈물이었습니다. 셋째는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기는 경외였습니다. 넷째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열정입니다. 다섯째는 지난날 내 이익을 앞세우던 것을 타인에도 돌리는 절제였습니다. 이 다섯 가지가 더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날부터 지금까지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초지일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18).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끝까지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 성산 장기려聖山 張起呂, 1911-1995 박사님은 한국의 슈바이처’, ‘사랑의 의사’, ‘무소유의 삶을 산 분으로 불리는 신실한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안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최고 학부인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평양 연합기독병원 원장,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병원 원장, 부산아동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부산대, 가톨릭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1943) 및 대량절제술(1959)에 성공한 의술에 있어도, 당대 세계 최고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화려한 직함보다도, 그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 병원, 간질 환자들의 모임인 장미회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협동조합 청십자의료보험창설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월급을 받아 본적이 없습니다. 돈이 없어 수술을 못하는 환자들의 비용을 다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돈 없는 환자가 밤에 몰래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병원 문을 열어놓은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병원 옥상에 마련된 초라한 숙소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625전쟁으로 월남하면서, 데리고 온 둘째 아들 하나를 키우며, 북에 남겨둔 아내와 다섯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재혼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 국민훈장 무궁화장,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그가 소천 하던 날, 그가 평생 동안 봉사했던 병원들과 수십 년간 가르쳐온 수많은 제자들 그리고 한국교회는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를 기리는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1909년 평북 옹천에서 태어나고, 1995년 서울에서 승천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 모란공원에 잠들다.”


장 박사님은 실력이면 실력, 영성이면 영성, 삶이면 삶,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이 겸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더 고귀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을 변함없이 사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장기려 장로님은 우리에게 크나큰 도전을 줍니다.


사도 바울이 겸손, 눈물, 경외, 열정, 절제 이 다섯 가지가,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첫날부터 지금까지한결같은 삶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초지일관 사명을 다한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 그러면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35). 오늘 우리에게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한결같은 삶으로


예수 믿은 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섬겼던 것, 기도한 것, 드린 것이 있나,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지난날 다짐한 사명을 잃어버리고 있었거나, 잊고 있었다면, 찾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깨우쳐주고 계시는 음성을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라면서(32), 자신의 걸어온 길 겸손, 눈물, 경외, 열정, 절제로 한결 같이 살아가기를 간곡히 권면했습니다.


나는 임종의 순간 누구와 함께 하고 싶은가?” 이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청아비전교회 성도님들은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 평생을 섬긴 교회의 목사님, 그리고 헌신한 성도들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일생 동안 겸손, 눈물, 시험에도 주를 섬기는 경외, 항상 최선을 다하는 열정, 이익을 버리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따라 행한 절제의 삶을 초지일관 살았다는 말을, 주의 형제와 가족들에게 남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임종의 자리에서 나를 향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이 말씀대로 삶을 산 사람이라 칭함 받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유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성령에 매여 겸손, 눈물, 경외, 열정, 절제를 첫날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삶을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성령충만함을 주옵소서.


임종의 순간 일생 동안 겸손, 눈물, 시험에도 주를 섬기는 경외, 항상 최선을 다하는 열정, 이익을 버리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따라 행한 절제의 삶을 초지일관 살았다, 주의 형제와 가족들에게 남길 수 있게 하옵소서.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이 말씀대로 삶을 산 사람이라 칭함 받을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광받으시는 일생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