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축복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사도행전 18:23-19:41. 2022.10.23. 主日禮拜
“18:23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24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19:1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8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21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23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35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41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행18:23-19:41)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를 방해하는 자들에게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며 떠났습니다(18:6.참고/마10:14;막6:11;눅9:5,10:11;행13:14,50). 이제 믿지 않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이고 나는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비난 거부 반발하는 자들과 충돌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자들에게서도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은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일러서, 악한 길에게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겔3:18.참고/겔3:20). 그들의 사망을 바라보고, 죽음 이후 심판에 떨어지는 영혼이 되지 않도록 간절과 긍휼과 애탐으로 전해야 합니다. 천국은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천국은 허구가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지옥은 공상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성경은 실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참고/살후1:7-9;벧후2:4;계20:15). 대적자들에게도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입니다.
바울은 방해자들에게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 집’을 예배 처서로 전도를 계속했고요(18:7).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18:8).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18:9-10). 바울은 ‘일 년 육 개월 말씀을 가르치’기를 계속했습니다(18:11). 두 번째 가르침 복음을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하는 사건도 있었지만, 갈리오 총독이 종교적 문제는 재판을 거부하겠다는 방침으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18:12-15).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를 순종하는 자를 이방 총독을 통해서도 지키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1, 2차 전도 여행 8,000여 km 장정에서 영육간에 소진될 수 있었을 시점에 특별한 헌신을 다짐하는 ‘나실인’ 서원을 드립니다(18:18.참고/민6:1-21,30:2;삿13:5;삼상1:28;렘35:6;눅 1:15). 복음을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이 어떤 것인 가를 보여 줍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데살로니가교회에 어려움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때 편지를 통해 답을 주었습니다. 어떤 방법이라도 복음을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당대에 예수님이 오실 것을 생각하였는데 한 두 사람 씩 죽음을 맞이하자,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바울은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생전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하는 영광을, 누구보다 사모했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 ‘속히 오신다’고 하신 것은(계1:3,22:20). 어느 시대를 사는 성도이건 신부로서, 신랑을 맞이할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참고/마25:1-13). 더디 온다고 생각하고, 세상일에 전념하고 분주하지 말고, 항상 경성하여 기도하며, 성결한 생활, 열매 맺는 신앙을 강조한 것입니다(참고/마25:13,21,23,26). 마지막 때 배교의 물결이 휘몰아칠 것이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참고/눅21:8-19;살전5:3;살후2:1-3). 이 세 가지는 당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재림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이면서, 오늘까지 예수님이 다시 오시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중단하지 말고 말하라에는 전도 대상자의 고민을 알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만남의 축복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18:23) 사도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이 시작됩니다. 본문은 본격적인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을 기록하기 전 한 가지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볼로’가 등장하는데요(18:24). 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율법에 정통한 유대인 학자입니다(고전3:6). 고린도 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로 고린도 교회 내에서 그를 추종하는 한 분파가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고전1:12,3:4-6). 그러나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주의 도를 배워’ 언변과 구약에 능통하여,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습니다(18:25). 복음을 완전하게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아볼로는 ‘에베소 회당에서 담대히’ 말씀을 전하던 중 바울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게 됩니다(18:24,2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의 전함을 ‘듣고’, 예수를 바로 알려 주고자,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쳐 주었습니다(18:26). 온전한 복음으로 무장한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 말씀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18:27). 에베소의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아가야에 있는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아볼로를 ‘영접하라’고 부탁을 했습니다(18:27). 아볼로가 아가야에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18:27).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18:28). 말씀으로 유대 사람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아볼로가 이렇게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데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만남이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를 만나기 전, 바울을 만나 훌륭한 헌신자가 되었습니다(18:2.참고/롬16:3).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만남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름다운 만남 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도 그러합니다. 장소는 지금 가을 같이 곡식이 무르익은 넓은 들녘이었고, 때는 추수할 시기였습니다(룻2:2). 보아스의 눈에 띈 한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룻’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둘은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밭의 주인으로 룻은 남편과 시부와 시숙이 죽고,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처지로, 그 밭의 떨어진 이삭을 줍는 비천한 여인이었습니다(룻1:3-5,2:3-6). 그러면 보아스가 룻을 보고 첫눈에 반했기 때문일까요? 그렇기에 식사할 때 불러 가까이 앉히고 직접 떡을 건네주었고, 종들이 길러온 물을 먹으라고 하였고, 종들에게 명하여 시비하거나 해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삭을 많이 주을 수 있도록 일부러 단에서 이삭을 뽑아 버리고 한 것이 아니냐고 말을 합니다(룻2:7-9,14-16). 그러나 보아스는 당시 베들레헴에서 아주 ‘유력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룻2:1). 이 말은 경제적인 면이나 인격적인 면이나 신앙적인 면이아 으뜸가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보아스’라는 이름 자체가 “유복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를 볼 때 아쉬울 것 없는 실력자, 어디로 보아도 흠잡을 때 없는 보아스가. 이방 모압의 여인, 그것도 사별한 과부, 또 집안이 궁핍하여 잘 꾸미지 못하고, 남의 밭 이삭이나 주어 연명하는 나오미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는 말은 그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도 아니면 룻이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데 매우 열심히 일했기에 보아스의 눈에 띄었을까요? 성경에도 아침부터 잠시 쉰 외에는 계속해서 일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룻2:7). 그러나 당시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들이 추수하는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은 율법이 정한 바입니다(참고/신24:19). 이것은 곧 추수하는 보아스의 밭에 룻만 아닌 다른 가난한 사람들도 함께 이삭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가난한 사람들은 룻 보다 형편이 나았기에 천천히 적게 줍고, 룻은 열심히 쉬지도 않고 주었을 것이다는 것 또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결국 보아스가 룻을 만난 만남은 외모도 아니고, 열심히 일한 모습도 아닙니다. 해답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아스가 ‘사환에게 이는 누구의 소녀냐’고 묻자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라고 답을 합니다(룻2:5-6). 이를 확인한 보아스가 룻에게 직접 다가가,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모압)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베들레헴)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룻2:11). 이 말은 룻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의 효성과 신앙을 보아스가 깊이 새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보아스가 룻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룻2:12).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시모 나오미를 따라, 모암에서 베들레헴에 온 룻의 효성과 신앙을 보고, 하나님의 보답과 보호와 온전한 상이 있을 것을 예견했던 보아스는 이미 아내로 맞이할 결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외모나 열심히 일함을 보고 만나 것이 아닌 것과 같이, 교회공동체 가족들은 외모를 보고 만나 사이도 아니요, 무슨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만난 사이도 아닙니다.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소중한 것과 같이, 내 옆에 있는 성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 우리의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옆에 성도를 볼 때, 외모와 환경, 재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안 하고를 따져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구원받았으니,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만남이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시모 나오미를 따라, 모압에서 베들레헴에 온 룻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보답과 보호와 상이 있을 것을 알았던 보아스와의 만남과 같아야 하겠습니다(참고/룻1:16). 외모도 아니요. 일을 잘함을 봄도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만남입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기에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쉬웠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그 형제가 죽은 형을 대신하여 형수에게 장가를 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수혼법’嫂婚法이라고도 하고, ‘계대결혼’繼代結婚, Revirate Marriage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형제가 없거나, 형제가 있더라도 원치 않는 경우,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그 법이 적용됩니다. 룻도 그와 같은 경우인데요. 보아스도 룻의 시부 엘리멜렉의 친족이었지만,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습니다. 즉 그가 양보하지 않으면 룻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룻의 기업 무를 자를 만나 담판합니다. “당신은 엘리멜렉의 친척이다. 이제 그가 죽었고 그의 아내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소유하던 밭을 팔려고 하니 그 밭을 사라고 말합니다.”(룻4:3-4). 이에 기업을 무를 자가 사겠다고 흔쾌히 승낙합니다. 그러면 그 밭을 산다고 하는 것은 아들이 없이 홀로된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야 하고, 나오미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보아스가 말하자, 이 기업 무를 자가 고민이 생깁니다. 내가 밭을 사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 죽은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과 기룐의 유산으로 남게 되는 것이요, 자신의 재산은 앞으로 결혼하여, 룻에게서 난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요, 룻과 나오미를 부양하여야 하니,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어 포기를 하고, 자신의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줍니다(룻4:6-8). 신을 벗어 준다고 하는 것은 나는 포기하겠다는 표의 전례입니다.
이러한 과정 후에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를 통하여 난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입니다(롯4:17). 이 계보에서 메시아 예수님이 오십니다(참고/마1:5,16). 이후 오벳의 양육자는 보아스와 룻이 아닌 나오미입니다(롯4:16). 계대 결혼 법에 의하여 나오미가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롯4:17). 또 앞으로 보아스의 재산은 죽은 말론과 기룐의 이름으로 됩니다. 이것을 보아스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하는 것은, 룻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고 헌신 할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이러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룻은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어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초라한 신분이었습니다. 어쩌면 룻은 밭에 떨어진 이삭과 같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룻을 보아스는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헌신을 아끼지 않고 아내로 맞이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는 룻의 효성과 신앙을 보고, 하나님의 보답과 보호와 상이 있을 것을 예견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만남입니다. 사도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만남, 그리고 본문의 브리스길라와 아굴아와 아볼로 만남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소중한 것은 이와같이 말씀으로 세워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만남이기에 귀한 것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재현목사님을 만난 것이 너무나 기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12:5). 오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로 보면서, 그들에게 나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았음의 동질성을 발견하여야 하고, 서로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10월은 전도의 달입니다. 전도 대상자를 품고 전도한다고 하는 것은 그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인도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초신자가 변화되고, 나약한 자가 당당한 자가 되는 그 벅찬 감격과 기쁨은 너무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또한 교회를 떠났던 자들이 다시 돌아와 신앙을 회복하는 것 또한 너무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만남의 축복을 소망합니다. 하나님 사람의 만남으로서, 말씀으로 세워주고, 능력 있는 전도자로 쓰임 받는 우리의 만남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만남의 축복
‘아볼로가’ 능력의 전도자가 되어 오늘날의 그리스 지역인 아가야의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도착하게 됩니다(19:1).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에서 이미 에베소에 들려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변론을 했었습니다(행18:19). 에베소에 있는 ‘20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갔습니다(행18:20-21). 이제 3차 전도 여행에서 에베소에 다시 찾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튀르키예터키의 서부 해안에 위치한 이오니아 주도州首都이며, 당시 최대의 상업 및 교통 중심지이고, 철학과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서, 세계 7대 유물에 속하는 아데미의 신전과 극장이 있었습니다(행19:1;계2:1).
사도 바울은 1‘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묻자,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하였고, ‘3바울이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고 하였습니다(19:1-3). “4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8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라고 하였습니다(19:4-8).
세례 요한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막1:7.참고/막3:11;눅1:26-27;요1:26-27).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며, 예수를 믿으라고 하였습니다(요1:15).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요한의 물 세례만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약속하신 ‘성령과 불 세례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마3:11). 이때 바울의 안수를 받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습니다(19:6). 이날 거룩한 체험을 한 사람이 ‘모두 열두 사람쯤’되었고요. 바울은 회당에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습니다(19:7-8).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도,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자,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이라는 ‘홀’Hall을 임대해서, ‘날마다 강론하’였고,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고 하였습니다(19:9-10). 이 말씀에 등장하는 '두란노'는 인명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에베소 출신의 유명한 철학자로서 서원을 세운 이로 추측하고 있습니다(Bruce, Lumby). 사도 바울은 ‘두란노 서원’Hall of Tyrannus에서 2년 동안 에베소 전도 강연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앞서 전도 때 3개월 정도 회당을 사용했으나, 유대인의 반대가 계속되자 두란노 서원을 빌려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19:9). 베자 사본Codex Bezae, D에 의하면, 바울은 이곳에서 ‘제5시부터 10시’, 우리 시간으로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강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간에 두란노에서 헬라의 철학 강의가 없었기 때문에 그 공간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 체재 기간 동안 바울은 날마다 복음을 강의하는 동시에 아시아 일대에 복음을 확산시키며,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였고요, 교회들이 세웠는데요. 요한계시록 2-3장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이때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골4:13;몬1:1-2;계1:4). 바울은 에베소를 아시아 복음화의 전진 기지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상황을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라고 전하고 있습니다(19:11).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거더라”고 하였습니다(19:12). 이를 본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사도 바울과 같이 흉내 내다가 오히려 악귀에 씌워 고통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19:13-18).
또한 에베소에는 점괘를 보는 마술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우리로 말하면 토정비결과 같은 책들을 다 모아 불살랐습니다(19:19). 그 값이 자그마치 ‘은 오만’에 달했습니다(19:19). 에베소는 당시 헬라 화폐 단위인 ‘드라크마’Drachma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로마 화폐 단위 ‘데나리온’Denarius와 같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 남자의 하루 품삯으로, 5만 여 명의 일당을 오늘로 환산해서 10만원으로 한다면 10억, 15만원으로 한다면 15억에 해당하는 상당한 금액입니다. 그 금쪽같은 마술책들을 태워 버렸으니,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진 복음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19:20).
앞서 설명해 드린 것과 같이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에서 에베소에 들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많은 형제들이 더 있기를 요청하였으나, 바울은 작별을 고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3차 전도 여행 첫 번째 도시로 에베소에 돌아와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다시 만남의 축복입니다. 앞서 만남의 축복을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만나, 말씀으로 세워주고, 능력있는 전도자로 쓰임받는 우리의 만남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만남에도 이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짧은 역사이지만, 여러 사정으로 함께 할 수 없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축복합니다. 청아비전교회가 에베소교회가 되어서, 돌아온 분들과 함께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이루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에게도 축복이요 다시 돌아온 분들에게도 축복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두 번째 가르침 다시 만남의 축복입니다.
다른 만남의 축복
사도 바울은 2년 여 동안 에베소에서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이루고,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19:21). 최종 사역지인 로마로 가야 함을 성령을 통해 깨달았던 것으로 보입니다(참고/행20:22). 바울은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먼저)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19:22). 에베소에 남아 사역을 마무리해야 할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쯤 되어 (에베소에) 이 (예수)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습니다(19:23). 에베소는 아데미 우상 숭배 본거지로 신전이 있었는데 이 우상으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 ‘데메드리오라 하는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였습니다(19:24). 그런데 사도 바울로 인해 신전에 사람들이 발길이 끊기자 생업에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에 데메드리오는 ‘25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우리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19:25-27). 다른 직공들과 신전 수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세를 모은 것입니다. 우상 사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28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온 시내가 요란하여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고 하였습니다(19:28-29). 기록에 의하면 이 연극장θέατρον은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는 물론 지금으로 보아도 대규모였이었습니다. 가이와와 아르스다고가 본보기로 큰 위험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30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제자들이 말리고 31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였습니다(19:30-31).
그런데 예수의 도, 복음을 반대한 자들이 모인 에베소 연극장이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인 자들이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 모인 자들이 더러는 이렇게 외치고, 더러는 이렇게 외치는 통에 무리들이 왜 모였는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성령께서 분란하게 하신 것이지요. 주의 제자들을 핍박하려고 하는 자리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보내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소란함을 중지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라는 사람을)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였습니다(33). 그러나 ‘그들은’ 알렉산더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였습니다(34). 연극장에 모인 군중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렇기 유대인인 알렉산더 말을 막고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무려 두 시간 동안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맞섰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응답하소서’ 부르짖고 부르짖어도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기를 ‘정오’까지 하여도 응답이 없자, 더욱 ‘큰 소리로 부르고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한 것과 같은 모습을 에베소 연극장에 모여서, 아데미를 소리쳐 부르는 무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왕상18:26-28).
이 사태를 보고 받은 에베소 시장인 “35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41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19:35-41)
에베소의 책임자인 서기장은 무리에게 “우리의 도시 에베소가 위대한 아데미 여신과 하늘에서 내린 그 신상을 모신 신당 수호자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면서, 아데미 신을 더 이상 외쳐 부르지 않도록 자제를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마땅히 진정하고,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주의를 하고, 여러분들이 잡아 온 가이와와 아르스다고가, 신당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않았고, 여신을 모독하지도 않았음에도, 아무 이유 없이 여기에 끌고 왔다고 불법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를 걸어서 송사할 일이 있으면, 재판정도 열려 있고, 지방 총독들도 있으니, 당사자들이 서로 고소도 하면 될 것이고, 만약 그 이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은 정식 집회에서 처리되어야 할 것이지, 이렇게 무리를 선동하여 연극장에서 벌이고 있는 행위는 크게 잘못된 것이고, 우리는 오늘 일어난 이 일 때문에, 소요죄로 문책을 받을 위험이 있다고 경고 하고, 우리는 이 소요를 정당화할 수 있는 아무런 명분이 없다면서, 서기장이 모임을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예수의 도, 복음을 막고자 했던 행위는 이와 같이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무너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첫 번째로 만남의 축복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만나, 말씀으로 세워주고, 능력있는 전도자로 쓰임 받는 우리의 만남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만남에도 이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짧은 역사이지만, 여러 사정으로 함께 할 수 없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소망하고, 청아비전교회가 에베소교회가 되어서, 다시 돌아온 분들과 함께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이루기를 축복하였습니다. 두 번째 가르침 다시 만남의 축복을 말씀드렸습니다. 세 번째 가르침 다른 만남의 축복입니다.
다른 만남이란 우리와 다른 사람들입니다. 에베소 연극장의 소요사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먼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우상 물품 공급자 데메드리오입니다. 그리고 그의 직공들과 같은 업을 가진 영업자들입니다. 또 무리로 하여금 아데미 신을 부르짖게 한 알레산더입니다. 또 한 사람 에베소 서기장입니다. 이들은 예수의 도,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요. 주의 제자들을 핍박하려했던 자들이며, 곧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대적자들로 모임 자체가 와해하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실 때 반대자를 통해서도, 성도를 보호하며,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주님을 증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나 개인, 우리 가정,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만을 붙잡고 있다면 어떤 사람, 단체, 권력에 위축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적대적으로 해도 두려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개입하지 않더라도, 다른 자들을 통해서, 그 적대자들을 무너뜨립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만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개인 우리 가정 교회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불의 한 세력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들어 우리를 돕게 하십니다. 이것이 다른 만남도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진입니다. 사람의 눈치 보지 말아야 합니다. 여건이 좋은 때를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변이 바뀔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말씀으로 정진하고, 여건이 좋은 때를 기다리지 말고 기도로 정진하고, 주변이 바뀔 것을 바라지 말고 헌신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면 방해자들이 나타나도, 그 방해자들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까지 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와 다른 만남도 복이 되게 만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를 축복합니다, 다른 만남의 축복입니다.
정리
만남의 축복
사도 바울이 본격적인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기 전 ‘아볼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18:23-24). 정통 유대인 학자로서, 세례 요한의 제자이었던 그는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었습니다(18:25). 이러한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18:26).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 말씀을 전하고 싶어했고, 에베소의 ‘형제들이 (아가야)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그를 ‘영접하라’고 부탁하였고, 아볼로는 ‘은혜로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고, ‘성경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 이’는 능력의 전도가 되었습니다(18:24,27-28).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만남을 통해,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만남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만남 가운데 보아스와 룻이 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룻을 보게 됩니다(룻2:3-6). 보아스가 룻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였을까요? ‘보아스’는 “유복한 자”라는 이름 뜻 그대로 어디로 보아도 흠잡을 때 없는 ‘유력자’이었습니다(룻2:1). 반면 룻은 사별하였고, 궁핍하여 잘 꾸미지 못하였습니다(룻1:3-5,2:3-6). 그렇다고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당시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들이 추수하는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은 율법이 정한 바입니다(참고/신24:19). 룻만 아니라, 다른 과부들도 쉬지 않고 이삭을 주었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룻2:11). 보아스는 룻의 효성과 신앙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룻2:12).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시모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의 효성과 신앙을 보고, 하나님의 보답과 보호와 온전한 상이 있을 것을 예견했던 보아스는 이미 아내로 맞이할 결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기에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쉬웠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계대결혼’繼代結婚, Revirate Marriage에 의해 자신 보다 먼저 기업 무를 자와 담판을 짖고, 그가 의무를 포기한다는 말을 듣고, 룻을 아내로 막이하기 위해, 죽은 룻의 시부인 엘리멜렉의 밭을 샀지만, 자신의 소우가 아닌 죽은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과 기룐의 유산이 되었고, 재산은 룻에게서 난 자가 상속자가 되며, 룻의 시모 나오미까지 부양해야 했습니다(참고/룻4:6-8). 이러한 내용을 알면서도,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하는 것은, 룻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고 헌신 할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이러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난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입니다(롯4:17). 이 계보에서 메시아 예수님이 오십니다(참고/마1:5,16).
룻은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어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초라한 신분이었습니다. 어쩌면 룻은 밭에 떨어진 이삭과 같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룻을 보아스는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헌신을 아끼지 않고 아내로 맞이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는 룻의 효성과 신앙을 보고, 하나님의 보답과 보호와 상이 있을 것을 예견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만남입니다. 사도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만남, 그리고 본문의 브리스길라와 아굴아와 아볼로 만남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소중한 것은 이와같이 말씀으로 세워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만남이기에 귀한 것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재현목사님을 만난 것이 너무나 기쁩니다.
교회는 외모를 보고 만나 사이도 아니요, 무슨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만난 사이도 아닙니다. 내가 예수 구원 받은 것과 같이, 내 옆에 있는 성도도 같은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만남이어야 합니다. 룻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보답과 보호와 상이 있을 것을 알았던 보아스와의 만남과 같아야 하겠습니다(참고/룻1:16). 외모도 아니요. 일을 잘함을 봄도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만남입니다. 전도는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인도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초신자가 변화되고, 나약한 자가 당당한 자가 되고, 교회를 떠났던 자들이 돌아와 신앙을 회복하는 것 너무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그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람의 만남으로서, 말씀으로 세워주고, 능력 있는 전도자로 쓰임 받는 우리의 만남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만남의 축복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첫 번째 도시로 ‘에베소’에 도착하게 됩니다(19:1). 지난 2차 전도여행 중 이곳 회당에 들러 유대인들과 변론했습니다(18:19).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래 있기를 청했지만,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말을 남기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었습니다(18:20-21). 이제 다시 찾은 바울은 에베소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 묻자,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것과, 세례도 ‘요한의 세례’만을 받있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19:1-3). 바울은 요한의 물 세례만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약속하신 ‘성령과 불 세례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19:4-6.참고/마3:11). 이때 바울의 안수를 받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습니다(19:6). 이날 거룩한 체험을 한 사람이 ‘모두 열두 사람쯤’되었고요. 바울은 회당에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습니다(19:7-8).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도, ‘도를 비방’하는 자들이 있었고,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이라는 ‘홀’Hall을 임대해서, ‘두 해 동안’ ‘날마다 강론하’였습니다(19:9-10).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확산시키며, 아시아 선교의 전진기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이때 세워졌습니다(골4:13;몬1:1-2;계1:4).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상황을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라고 전하고 있습니다(19:11).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거더라”고 하였습니다(19:12). 이를 본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사도 바울과 같이 흉내 내다가 오히려 악귀에 씌워 고통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19:14-15). 또한 에베소에는 점괘를 보는 마술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우리로 말하면 토정비결과 같은 책들을 다 모아 불살랐습니다(19:19). 그 값이 자그마치 ‘은 오만’에 달했습니다(19:19). 에베소는 당시 헬라 화폐 단위인 ‘드라크마’Drachma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로마 화폐 단위 ‘데나리온’Denarius와 같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 남자의 하루 품삯으로, 5만 여 명의 일당을 오늘로 환산해서 10만원으로 한다면 10억, 15만원으로 한다면 15억에 해당하는 상당한 금액입니다. 그 금쪽같은 것들을 태워 버렸으니,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진 복음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19:20).
앞서 설명해 드린 것과 같이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에서 에베소에 들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많은 형제들이 더 있기를 요청하였으나, 바울은 작별을 고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3차 전도 여행 첫 번째 도시로 에베소에 돌아와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다시 만남의 축복입니다. 앞서 만남의 축복을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만나, 말씀으로 세워주고, 능력있는 전도자로 쓰임받는 우리의 만남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만남에도 이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짧은 역사이지만, 여러 사정으로 함께 할 수 없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축복합니다. 청아비전교회가 에베소교회가 되어서, 다시 돌아온 분들과 함께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이루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에게도 축복이요 다시 돌아온 분들에게도 축복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두 번째 가르침 다시 만남의 축복입니다.
다른 만남의 축복
에베소에서 위대한 부흥의 역사가 있을 때, 예수의 ‘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큰 ‘소동’이 발생했습니다(19:23). 에베소에는 아데미 숭배 본거지로 우상을 만들어 돈벌이를 하는 ‘데메드리’가 바울로 인해 신전에 사람들이 발길이 끊기자 생업에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19:24). 이에 데메드리오는 다른 직공들과 신전 수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바울로 인해 자신들의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으며, 풍족하던 생활이 끝이 나게 되었고, 아데미 신전도 무시당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아데네 여신을 위하는 위신이 떨어지고 있다며, 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19:25-27). 데메디리오의 말을 들은 우상 사업자들은 크게 분노하며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크다 소리 쳤고, 이로 인해 온 시내가 요란해 졌고,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의 동역자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19:28-29).
그런데 예수의 도, 복음을 반대한 자들이 모인 에베소 연극장이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인 자들이 더러는 이렇게 외치고, 더러는 이렇게 외치는 통에 무리들이 왜 모였는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19:32). 당연히 성령께서 분란하게 하신 것이지요. 주의 제자들을 핍박하려고 하는 자리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보내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소란함을 중지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라른 사람을)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였습니다(19:33). 그러나 ‘그들은’ 알렉산더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였습니다(19:34). 연극장에 모인 군중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렇기 유대인인 알렉산더 말을 막고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무려 두 시간 동안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자신들의 신에게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자,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왕상18:26-28).
이 사태를 보고 받은 에베소 책임자인 서기장은 무리에게 “우리의 도시 에베소가 위대한 아데미 여신과 하늘에서 내린 그 신상을 모신 신당 수호자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면서, 아데미 신을 더 이상 외쳐 부르지 않도록 자제를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마땅히 진정하고,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주의를 하고, 여러분들이 잡아 온 가이와와 아르스다고가, 신당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않았고, 여신을 모독하지도 않았음에도, 아무 이유 없이 여기에 끌고 왔다고 불법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를 걸어서 송사할 일이 있으면, 재판정도 열려 있고, 지방 총독들도 있으니, 당사자들이 서로 고소도 하면 될 것이고, 만약 그 이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은 정식 집회에서 처리되어야 할 것이지, 이렇게 무리를 선동하여 연극장에서 벌이고 있는 행위는 크게 잘못된 것이고, 우리는 오늘 일어난 이 일 때문에, 소요죄로 문책을 받을 위험이 있다고 경고 하고, 우리는 이 소요를 정당화할 수 있는 아무런 명분이 없다면서, 서기장이 모임을 해산시켜 버렸습니다(19:35-41). 예수의 도, 복음을 막고자 했던 행위는 이와 같이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무너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세 번째 가르침 다른 만남의 축복입니다. 다른 만남이란 우리와 다른 사람들입니다. 에베소 연극장의 소요사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먼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우상 물품 공급자 데메드리오입니다. 그리고 그의 직공들과 같은 업을 가진 영업자들입니다. 또 무리로 하여금 아데미 신을 부르짖게 한 알레산더입니다. 또 한 사람 에베소 서기장입니다. 이들은 예수의 도,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요. 주의 제자들을 핍박하려했던 자들이며, 곧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대적자들로 모임 자체가 와해하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실 때 반대자를 통해서도, 성도를 보호하며,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주님을 증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나 개인, 우리 가정,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만을 붙잡고 있다면 어떤 사람, 단체, 권력에 위축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적대적으로 해도 두려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개입하지 않더라도, 다른 자들을 통해서, 그 적대자들을 무너뜨립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만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개인 우리 가정 교회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불의 한 세력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들어 우리를 돕게 하십니다. 이것이 다른 만남도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진입니다. 사람의 눈치 보지 말아야 합니다. 여건이 좋은 때를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변이 바뀔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말씀으로 정진하고, 여건이 좋은 때를 기다리지 말고 기도로 정진하고, 주변이 바뀔 것을 바라지 말고 헌신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면 방해자들이 나타나도, 그 방해자들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까지 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와 다른 만남도 복이 되게 만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를 축복합니다, 다른 만남의 축복입니다.
결론
만남의 축복, 다시 만남의 축복, 다른 만남의 축복으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는 역사가, 교회와 가정과 기업에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만남의 축복입니다. 교회에서 외모를 보고, 하는 일을 보고도 아닌, 십자가 구원의 동질성을 보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하나님 사람의 만남으로서, 말씀으로 세워주고, 능력있는 전도로자로 쓰임받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다시 만남의 축복입니다. 교회 역사 가운데 함께 할 수 없었던 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옵소서. 청아비전교회가 에베소교회가 되어서,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에게도 축복이요 다시 돌아온 분들에게도 축복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다른 만남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성도를 보호하며,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주님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진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말씀으로 정진하게 하옵소서. 여건이 좋은 때를 기다리지 말고 기도로 정진하게 하옵소서. 주변이 바뀔 것을 바라지 말고 헌신으로 정진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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