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사도행전 21:1-36. 2022.11.06. 主日禮拜
“1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27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행21:1-36)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나눈 고별 담화에 나타난 다섯 가지 가르침 첫 번째는 겸손입니다(행20:19).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는 지금까지 그의 사역 중 절정이었습니다(참고/행19:11-15,20). 그때 “내가 재림 예수다”고 한마디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겸손했습니다. ‘나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인데 하나님이 붙잡아 사용하셨다’고 하였습니다(엡3:7-8).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성도를 잡아 옥에 가두고 교회를 잔멸했던 자이었습니다(행:8:3). 그러한 자신을 친히 만나주신 주님 은혜에 항상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통해 아무리 큰 기적이 행해져도, 결과에 도취 되지 않고, 모든 겸손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모든 겸손’으로 교회를 섬깁시다(참고/잠16:18).
두 번째 “눈물”입니다(행20:19). 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눈물을 잊어버렸다”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섬기면서 얼마나 울었는가를 한번 쯤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눈물의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눈물이 없는 인생은 사막과 같습니다. 눈물이 없으면, 웃음 그 자체도 하나의 광대 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인생을 아는 사람입니다. 신앙에도 눈물이 믿음의 본질로 인도합니다. 애통하는 심령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랍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마5:4).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면서, 큰 능력이 나타났어도, ‘눈물’로 사역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울어야 할 때, 함께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경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들을 통한 시험이었습니다. “29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말씀하며, 이단의 계략을 경계하고 있습니다(행20:29-30.참고/고전9:1-2,29:30). 그러나 바울은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입니다(19). 시험은 누구나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어떤 간계의 시험에도 참고 주를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경외입니다.
네 번째는 “열정”입니다. ‘유익한 것’이란(행20:20), ‘믿음을 증언한 것’(행20:21) 즉 즉 복음을 일컫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공중 앞에서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든, ‘각 집에서나’ 집 집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동족이던 외인이던 신분고하 남녀노소 식자무식자 부한자빈한자 누구에게든지 가리지 않고 전했다는 것입니다(20-21). 이것은 “열정”입니다. 그렇기에 “26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만의 소리가 아니라 충성을 다한 후회 없는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역에 그리고 내 이웃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성령에 매여’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행20:22-23). 우리도 성령충만함으로 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절제”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20:33). 지난날 같았으면 응당 내 것으로 취해야 할 순간 “아니지! 주님의 기뻐하시는 것으로 드려야지”라며, 타인에게 기꺼이 베풀 수 있는 것. 내 유익을 타인의 유익으로 바꾸는 크리스천의 고귀한 절제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셨기 때문입니다(행20:35).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눅6:38).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15:1/참고/갈6:2).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로서, 주인의 명령에 따라, 당연히 준다는 정신으로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겸손, 눈물, 경외, 열정, 절제 이 다섯 가지가,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삶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행20:18).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그러면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행20:35). 오늘 우리에게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라면서(행20:32), 자신의 걸어온 한결 같은 삶을 간곡히 권면했습니다. 예수 믿은 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섬겼던 것, 기도한 것, 드린 것이 있나,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지난날 다짐한 사명을 잃어버리고 있었거나, 잊고 있었다면, 찾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깨우쳐주고 계시는 음성을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들린 밀레도 항구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고별 담화를 나눈 후, ‘다 크게 울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였습니다(20:22,37-38). 이렇게 바울과 일행은 에베소 장로들과 ‘1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이스라엘 위쪽에 위치한 ‘페니키아’Phoenicia “2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고 하였습니다(1-3). 오늘날 시리아 ‘튀레’Tyre 지역입니다.
이 두로에서 바울은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일주일)을 머물’렀습니다(4). 두로는 시돈에서 약 40km 아래에 위치하는 지중해 연안 도시국가로, 이스라엘의 아셀지파 북쪽 접경지역에 위치했습니다(참고/수19:29).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두로와 시돈 지방’을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다(마15:21). 그때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면서, 고쳐주시기를 간청했던 사람이 ‘가나안 여자’인데요(마15:22-23). 두로와 시돈을 가나안으로 불린 것은 이방의 땅이요 우상의 도시이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막7:26). ‘수로보니게 족속’이란 시리아-페니키아Syrian –Phoenicia 출신이라는 뜻으로 두로와 시돈 지역을 일컫습니다. 예수님은 도움을 구하는 가나안 여인에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면서, 거부하셨습니다(마15:24).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재차 간청을 했습니다(마15:25).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면서, 유대인은 자녀요, 두로 사람은 개라고 하였습니다(마15:26). 모욕적으로 받을 수 있는 말씀에도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더욱 간절히 아뢰었습니다(마15:27). ‘이에 예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마15:28).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땅의 사람이라고 배척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가나안 여인을 통해 본보기를 보여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눅10:13). 유대 땅 고라신, 벳세다에 복음을 전한 것 같이, 이방 땅 두로와 시돈에 하였더라면, 그들은 모두 회개 하고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두로에 이미 복음을 전하셨고요. 본문에 바울이 이곳에서 제자들을 찾았다는 것은 두로에 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예루살렘의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로 보입니다(참고/행11:19). 복음은 위대합니다. 이방의 지역에 주의 거룩한 백성들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두로의 ‘제자들(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4). ‘성령의 감동’은 “성령을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말씀을 나눈 것 같이 바울은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고 하였습니다(행20:22-23). 그러면 두로의 제자들이 성령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 하고,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는데, 성령이 충돌하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두로의 제자들이 “가지 말라”는 것은 성령의 명령이 아니라,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것인지를 알린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렇게 제자들의 예언에 흔들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 역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고난이 있을지라도, 바울이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 또한 성령에 순복한 것입니다.
바울과 일행은 두로에서 ‘여러 날을 지낸 후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였고, ‘서로 작별한 후 (바울과 일행은)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하였습니다(5-6). 두로의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이 서로를 위해 눈물로 간절히 기도한 것은 믿음 안에서의 교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일행은 두로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그곳에서도)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7)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8). 예루살렘에 가까이 온 것이죠. 바울과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고 하였습니다(8). 빌립 집사님은 스데반 집사님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에서 택함 받은 일곱 집사 가운데 한 분입니다(참고/행6:3-6) .
스데반 순교 후,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박해는 극에 달했습니다(행8:3). 성도들은 피신해야 했지만, 흩어진 가운데도 복음의 말씀을 전함을 계속했습니다(행8:4). 그 가운데 빌립 집사님은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파하고 표적도 행하자, 그 성의 무리가 그가 하는 말을 따랐습니다(행8:5-6).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가도,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예수 이름을 믿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행8:7,12). 이미 예수께서 친히 사마리아를 찾아가 복음을 전하셨고요(요4장), 부활 승천하시면서, 사마리아에도 복음 전파를 당부하셨습니다(행1:8). 이런 주님의 명을 받들어 빌립 집사님이 전도하였고,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도 방문하여, 이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행8:1-25,9:31,15:3).
사마리아 성에서 복음을 전파한 빌립 집사님에게 주의 사자가, 가사로 내려가라고 명합니다(행8:26). 빌립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를 만나게 됩니다(행8:27). 내시는 돌아가는 길에 수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행8:27-28.참고/사53:7). 그때 성령이 빌립에게 그에게로 나아가라고 명하십니다(행8:29). 빌립이 읽는 것을 깨닫느냐 묻자, 내시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며, 청하여 수레에 올라 오도록 하였습니다(행8:30-31). 빌립은 구약 선지자의 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하고,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행8:32-38). 빌립 집사님은 이후 주의 영에 의해 가사에서 아소도로 이동하여,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행8:39-40). 이렇게 가이사랴에 정착한 빌립 집사님은 약 20여 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었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 집사님에게는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9). 빌립 집사님은 자녀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은 여러분과 똑같은 집사님이라는 사실을 상기했으면 합니다. 여러분도 자녀들도 위대한 하나님위 사람으로 세워지고 세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를 향한 의지
바울은 가이사랴 빌립 집사님 집에서 ‘여러 날 머물 던’ 중 ‘아가보라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왔습니다(10). 아가보 선지자는 ‘바울(이) (차고있는)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는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고 하였습니다(11). 아가보는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며, 그 상황을 퍼포먼스로 보여 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아가보 선지자는 이전에도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고 성령으로 예언했으며,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A.D.41-54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행11:27-30). ‘(바울의 일행들은) (아가보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 곳 (가이사랴)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였습니다(12).
그러나 ‘바울이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13). 바울은 자신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결박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전 장에서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을 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다짐한 바 있습니다(행20:24). 그러므로 두로에서 제자들이 또 가이사랴에서 아가보 선지자의 말을 들은 일행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 것을 만류하여도, 주를 향한 그의 의지를 꺽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일행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그쳤’다고 하였습니다(14.참고/삼상3:18;마6:10;눅 22:42;약 4:13-15).
오른 말씀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의지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반복해서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따라, 성령에 말씀함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을 예언하고, 일행들까지도 만류하였지만, 바울의 주를 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의지는 결단이고 실행이고 헌신입니다. 그러나 그 의지가 인간의 의지이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본문과 같이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이 가지 말 것을 애원할 때, 인간의 의지이면 꺾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향한 의지이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 기도회를 드리고 있는데요. 둘째 날 강사 김성제 선교사님은 선교사로 부름 받기 이전에 1998년 전도사 시절 서울 변두리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당시 물질이 없어서 고물상에 가서, 남들이 쓰다 버린 연탄불에 까맣게 타버린 장판을 구해다가, 월세로 얻은 지하에 예배당에 깔고, 개척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6년 선교사의 소명을 받아서는 파송교회도 없고, 후원자도 없는 가운데 필리핀 마닐라 외각에 위치한 ‘뿔로 빈민촌'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가난한 아이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전기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 하천이 심각하게 오염된 데다, 더러운 하수구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악마의 섬'이라 불린 곳입니다. 게다가 갱들과 마약·폭력·살인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삶의 생사가 오고가는 위험한 지역입니다. 김 선교사님은 2018년 한꺼번에 찾아온 두 개의 암으로 큰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지독한 가난과 폭력, 그리고 불결한 환경에서 신음하는 어린 생명들을 품고, 그들에게 구원의 예수를 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있는 귀한 선교를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마을의 이름이 ‘예수님이 왕이신 동네'라고 명명될 정도이니, 김 선교사님이 얼마나 큰 희생을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도 꺽을 수 없는 주를 향한 의지의 한 예라 하겠습니다. 그렇기 주님께서 결단하고 실행하고 헌신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김성제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한 없이 부끄러운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와 함께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은 1998년 국내 목회 시절 물질이 없어 연탄가스에 시커멓게 타버린 장판을 얻어다가, 지하 예배당에 깔고, 개척 예배를 드렸고, 2006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국가 중 하나인 필리핀 마닐라 외각 빈민촌인 뿔로에서, 하천 위에 녹슨 양철 슬레이트로 얼기설기 만든 집에 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하였는데요. 우리 교회는 2014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 중 하나인 대한민국 신도시 근린공원 벤치에서, 개척 예배를 드렸습니다. 2015년 선 월세를 주고, 아무 시설도 하지 못하고, 공실을 그대로 예배만 드리는 조건으로 임시처소를 얻었을 때, 쓰다 버린 파라솔 테이블과 의자를 어떤 분이 갔다가 주어서, 강단으로 꾸미고 비품으로 사용했습니다.
김 선교사님의 간증과 우리 교회의 역사를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때의 청아비전교회가 오늘까지 존속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더더욱 감사한 것은 외형적인 부흥은 이루지 못했지만, 여전히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청아비전교회가 누구도 꺽을 수 없는 주를 향한 의지를 하나님께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와 함께 한 성도님들에게 하늘의 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성도 여러분 주를 향한 의지를 분명히 합시다. 그러면 결단하고 실행하고 헌신할 수 있는 주님의 도움이 있을 줄 확신합니다.
주를 향한 중심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15). 그 길에 바울은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갔는데, 그것은 (바울과 일행이) (예루살렘에 있는 나손의) 집에 머물려 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16). 바울과 일행이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기꺼이 영접하’였습니다(17).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형제들도 바울의 환대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튿날 바울(과) (일행은)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고 하였습니다(18). 이 말씀에 등장하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젖동생입니다(마13:55;막6:3).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는 그분의 메시아 성을 믿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후 신앙을 갖게 되었고,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참고/마13:54-58;요7:3-5;행1:14).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의 장로가 된 것입니다. 본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는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다른 여러 지역으로 사역을 떠난 것으로 보이고요. 이제 야고보는 다른 장로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는 대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그를 이전에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만난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라고 하였습니다(갈 2:9). 야고보와 함께 있던 장로들πρεσβύτεροι을 성경학자들은 대략 70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모 교회로서 든든히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에게) 문안하고 (그동안) (1, 2, 3차 전도 여행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행)하신 (놀라운)일을 낱낱이 말하’였습니다(19). 바울의 거룩한 선교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었습니다(20).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바울(에게)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 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고 하였습니다(20).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유대인 중에 믿는 자’란 유대인 중 예수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이 ‘수만 명’이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이들은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로 여전히 율법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전도를 하였는데요(행9:20,13:5,14,43,14:1,17:1,17,18:19,26,19:8). 그들과 마찰 빚었던 문제가 율법을 따라 철저히 할례도 행하며,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대었습니다(참고/행13:39,15:5,18:13). 예루살렘에도 이러한 자들이 수만 명이 되었고, 이들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들었도다’며,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예루살렘에) 온 것을 들으리니’(21-22). 예수를 믿노라 하지만, 여전히 율법에 열성을 가진 유대인에게, 바울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조장하는 배교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이들이 배척하고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을 넘어, 물리적으로 공격을 당할 것을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은 염려했던 것입니다. 상투를 자르려면 다 잘라야 하는데 자르다가 말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자들이 바로 유대인 가운데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도,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바울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여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23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23-24)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방 교회에서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참고/행24:17;롬15:25-27;고전16:1-4;고후8:13-14,9:12-13,갈2:10). 모 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의 복음을 빚진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구제에 동참을 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방교회의 아름다운 연보와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예루살렘에 알리려는 선한 뜻을 갖고 있었지만, 수만의 율법의 열성을 가진 자들로 인해 손상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이 바울에게 한 제안 내용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율법을 지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나실인 서원을 한 네 명이 있는데, 이들이 율법에 따라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최소 30일 동안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고, 시체와 같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아야 하며, 이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한 기간이 마쳐지면, 이발하고, 제물과 잘라낸 머리카락을 제단 불에 올려 살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실인과 함께 다른 이스라엘 사람 하나가, 그들이 드리는 제물의 비용을 부담하면 성전에 가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바울에게 그 역할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경건하고 자애로운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울도 정화를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 동안 이방인의 땅에 거주한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정화를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서원한 나실인으로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나실인 의식에 비용을 지불하는 자로서, 행위를 요청한 것입니다(참고/민19:22).
이에 ‘바울이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고 하였습니다(26). 바울이 제안을 아무런 조건 없이 동의하고 따른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를 통하여, 바울에 대한 율법주의자들의 비난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고자 하였는데요.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25).
여기에 편지가 등장하는데요. 과거 수리아안디옥교회에 유대로부터 온 어떤 자들이 이방인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행15:1). 이에 수리아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대표로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 보내 정식 답변을 듣도록 했습니다(행15:2). 베드로는 이 안건에 대해 자신도 이방에게 우리와 똑같이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다며,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15:4-9.참고/행10:1,24,34,45-46,11:1-3,15-18,14:27,16:5). 베드로의 답변을 들은 당시 야고보 장로는 이인도 할례와 관계 없이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자고 했습니다(행15:19). 그리고 편지에 이방 지역에서 우상에 제물로 드려진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 등의 교훈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낸 것입니다(행15:20.참고/고전8:1-10).
여기에서 이방인에 편지가 나오는데요. 이 편지는 과거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친 바울과 일행은,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선교를 보고하고, 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행15:1). 수리아 안디옥교회 성도는 대부분 이방인이었고, 유대인들도 헬라화된 유대인으로 사실상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어떻게 탄생하였습니까? 수리아 안디옥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행11:20-21). 이방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수리아) 안디옥’에 보내었고,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였고, ‘다소에 가서’ 사울을 ‘만나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거룩한 부흥을 이루었으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고,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자,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보내’었습니다(행11:22-30). ‘성령이 이르’심에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행13:2). 이방 교회 중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자들이, 이방인은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고, 육체의 언약 표징을 받아야 한다니,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그동안 우리가 믿은 복음이, 완전한 복음이 아니었느냐는 회의까지 들기 시작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 지도자이자 선교사인 ‘바울 및 바나바와(는) (유대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행15:2). 수리아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대표로 예루살렘교회에 보내, 유대에서 내려온 자들이 주장에 대해, 당시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의 공식적인 답변을 듣도록 하였고요(행15:2). 앞으로 이방 지역에 세워질 교회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오도록 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전송을 받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행15:3).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였습니다(행15:4). 이때 정통파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발언하였습니다(행15:5). 상정된 정식 안건을 두고,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을 하게 되었습니다(행15:6). 예루살렘 회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행15:7-9).
베드로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예전에 이방인 로마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파한 적이 있습니다(행10:1,34). 고넬료 집에 모인 그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게 성령이 부으심과 방언을 말함을 보았습니다(행10:24,45-46). 그런데 당시에도 이 일로 예루살렘교회에 있던 할례자들이 베드로가 무할례자들에게 함께 먹었다함을 듣고 비난하였습니다(행11:1-3). 바울도 이전에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한 바도 있습니다(행14:27.참고/행16:5). 베드로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이방인)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며,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가 임했음을 보고 하였고, 이에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도,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하였습니다(행11:15-18).
이와 같이 이전 이미, 이방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기로 하고, 하나님도 ‘차별하지 아니하’신 것을, ‘지금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면서,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하였습니다(행15:9-11). 베드로는 답변에서, 할례자들인 유대인들이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은 자신들도 감당하지 못한,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우려고 한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당시에 베드로의 답변을 들은 ‘야고보 (장로)가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면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 (베드로가)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며, 구약 아모스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 성전을 재건하고, 주를 찾게 될 때, 유대인들의 남은자들 만이 아니라. ‘만국’ 이방인들도, 주를 찾게 하여, ‘기업’ 유대인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15:13-18.참고/암9:11-12).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였습니다(행15:20-21). 이와 같이 이번 회의에서 결정된, 이방인도 할례와 관계 없이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자는 것입니다(19-21). 그리고 편지에 이방 지역에서 우상에 제물로 드려진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 등의 교훈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낸 것입니다(참고/고전8:1-10). 예루살렘교회는 야고보 장로의 말씀과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결정하고,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 (대표자를)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으로 (인편에) (편지를) 보내기를 결정하’였습니다(행15:22).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예루살렘교회 대표로 함께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교회에 ‘작별하고 (수리아)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였습니다(15:22-30).
그때 야고보 장로가 제안한 편지 내용을 본문에서 야고보 장로와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지금 바울이 율법의 규례대로 나실인을 위한 비용을 대신 지불하고, 정화 운동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이방 교회가 듣고, “그러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 믿은 이방인도 이전에 행하던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행해도 되는가”라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전에 이미 편지로 보냈기 때문에 이방 교회에 미칠 영향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바울에게 한 제안은 유대인 중 예수를 믿지만,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갖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실인의 비용을 부담한 바울의 행위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요.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 자신도 이전에 나실인 서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로 떠나기 위해 겐그레아 항구에 갔을 때,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았더라’고 하였습니다(행18:18). 바울은 당시 1, 2차 전도 여행을 거치면서, 육적 영적으로 소진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자신을 보며, 다시금 서원을 통해 주의 사명을 다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율법을 따라 서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지막까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서원한 것입니다. 율법의 서원을 신앙의 결단의 해석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갖고 정한 기간 동안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작정기도는 서원과 유사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율법의 서원을 따라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에 적용한 것입니다.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19-20). 바울은 율법을 고수하는 유대인 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서라면, 유대인같이 그리고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어야 한다는 했습니다.
바울은 이방 교회에 말씀을 증거할 때, 믿음으로는 불충분하기에 할례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은 구원의 능력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갈5:2-4). 그러나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행하는 할례를 막을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전도를 위해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행16:3). 그러므로 바울의 예루살렘교회의 요청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복음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유대인과 타협했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중심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것이나, 전통에 따라 할례를 행했어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는 마음에 하라는 가르침입니다(롬2:29.참고/신10:16). 할례와 같은 외적 표지가 주를 향한 중심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 방생한 끔찍한 이태원 참사는 ‘핼로윈’Halloween 때문이었습니다. 핼로윈은 우상에 산 사람을 바치는 제의祭儀가 기원입니다. 악령을 부르는 서양 샤머니즘이 어린이집, 초등학교에서는 프로그램으로 정착되고, 성인들은 축제로 열리고 있습니다. 문화콘텐츠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반하는 문화는 수용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반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오지 선교사님이 원주민 의복을 입고, 그들의 절기에 참여한다고 동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님이 토착민의 풍습에 함께 하는 것은 전도를 위한 매개일 뿐이지, 주를 향한 중심은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지역에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진리, 복음, 예수 이외의 것은 이웃의 필요와 요청과 협력에 부응해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하였습니다(행23:1). 주를 향한 중심이 분명했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주를 향한 중심을 축복합니다.
주를 향한 일념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26) 바울이 나실인 서원을 한 네 사람의 규례를 모두 마쳤습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27) 바울도 이방 땅에 두루 다니다 왔기 때문에 7일 동안 정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었다고 하였습니다(27).
예루살렘에 있는 수 만 명의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잡은 것입니다. 바울이 이전에 전도 여행에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 등에서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방해를 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행13:45,14:5,19,17:5,13,18:6,19:23). 이들이 오순절인 맥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가 바울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들은 ‘(소리를 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 (바울)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 (예루살렘 성전)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고 하였습니다(28).
그러나 바울은 앞서 스스로 정화하는 정결의식을 행함으로써 결코 율법을 폐하거나 모세를 비방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헬라인을 데리도 성전에 들어와 더럽혔다는 것인데요. 성전의 뜰은 안뜰과 바깥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성전의 안뜰은 유대인에게만, 그리고 바깥들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안뜰로 가기 위해서는 바깥뜰을 지나갈 수 밖에 없으니, 이 바깥뜰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뒤섞여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바깥뜰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들까지도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기 때문에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방인이 출입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곳이 성전같지 않게 마냥 시장통 같은 곳은 아니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의하면 이방인의 뜰에는 회당 같은 기능을 하는 모임 장소도 있었고, 이방인의 뜰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율법을 토론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의 뜰과 경계를 이루는 안쪽 뜰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전의 뜰에는 안뜰과 바깥들을 구분하는 담장이 있습니다. 이방인이 출입할 수 있는 경계가 되는 담장 안으로는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담장에는 화강암으로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이방인은 안쪽 뜰과 성소 주변의 난간 주변으로 들어올 수 없다. 들어오다가 잡히는 모든 사람들 (이방인들)은 죽을 것이다.”
이렇게 이방인들은 성전의 바깥뜰은 방문할 수 있지만, 안뜰에 들어가는 것은 엄격히 금하고 있었습니다(참고/겔44:9). 폭동을 일으킨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드로비모’Τρόφιμον를 내세웠습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29). 드로비모는 에베소 사람으로 헬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시아 유대인들이 예전에 에베소 시내에서 드로보미가 바울과 함께하고 있었던 것을 보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다시 나타난 것으로 보면서, 바울이 으레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드로비모는 바울의 훌륭한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에베소에서 만났고, 또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할 때, 이방인의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이곳까지 동행을 한 것이다(행20:4). 그리고 이 후에도 계속적으로 바울과 함께 하였는데, 바울 서신의 가장 마지막인 디모데후서에는 그가 병이 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딤후4:20).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전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기초 사실조차도 확인하지 않고, 폭동을 일으키고,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30). 군중들이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에 동조하면서, 바울을 잡아 성전 안뜰에서 계단을 거쳐 바깥뜰로 끌어냈습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31). 짐승같이 끌고 온 바울을 유대인들이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폭력을 가했을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부근에는 상주하는 로마 군인들이 요새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요새는 약간 높은 지대에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지형이었습니다. 따라서 군인들은 언제나 망대에서 예루살렘 안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폭동이 일어나자, 즉각 상부에 보고가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소란함을 전해들은 성전 바로 옆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안토니아 요새의 책임자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 Lysias는 백부장들과 함께 분대를 소집하고, 급히 성전 바깥뜰의 층대 계단을 통하여, 성전 뜰에 도착하게 됩니다(참고/행23:26). 천부장이라는 천 명의 군인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그 휘하에 백 명의 군인을 통솔하는 백부장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32). 천부장이 사건 현장에 도착하자, 바울을 폭행하던 유대인들도 그쳤습니다.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 자리에서 바울을 폭행했던 군중에게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었지만,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33-34). 바울에 대하여 무리 가운데 어떤 이는 이런 말로 또 다른 이는 저런 말로 말을 하니, 너무 소란하여 그 진상을 알 수가 없자, 영내로 압송했습니다.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35-36). 그런데 안토니아 요새 영내로 들어가는 층대 계단에 이를 때, 바울은 무리의 폭행으로 인하여, 군인들에게 들려가게 됩니다. 이를 본 무리는 바울을 그 자리에서 제거하지 못하고, 로마 군대의 손에 넘어간 것에 대하여, 분한 마음에 일제히 죽여 없이하자고 외치면서 따라가는 장면입니다. “그를 없이하자” 바울을 향해 부르짖던 성난 무리의 외침은 27여 년 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로마 총독 빌라도 관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해달라고 요구했던 유대인들의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마27:23;막15:13;눅23:18;요19:13,15). 예수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며, 또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눅9:22,18:31-33.참고/행4:27). 이 말씀 그대로 당하신 예수님은 너희들도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눅21:12). 이 예언이 바울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앞서 가이사랴 빌립 집사의 집에 유할 때, 유대로부터 내려온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는 것을 보이면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이와 같이 결박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 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0-11). 지금 그대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의 일행은 바울에게 예루살람에 올라가지 말 것을 권하였습니다(12). 그러나 바울은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13).
‘마부정제’馬不停蹄 “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않는다”. “달리는 말은 뒤돌아 보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격언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바울의 일생을 대변하는 이 말씀은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행20:24). 바울의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바울의 일념에 그가 가려는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권면 하던 일행들도,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며, 그의 길을 축복했습니다(14). 오늘 말씀의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다니엘 기도회 셋째 날 강사 최인선 목사님은 시골에서 힘들고 힘들게 목회하던 아버지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도 목회자가 되어 삼대 초반에 김천의 한 교회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담임으로 첫 목양지에서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자리를 잡아가려던 때이었습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운동하던 집사님이 음주운전을 한 경찰관의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한 분도 아니고 두 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 신실하신 보배 같은 믿음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지났습니다. 상처가 아직 아물기도 전에 또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부목사님이 오랜 시간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얻은 너무나도 예쁜 15개월 된 딸이 이었는데, 일명 햄버거병으로 불리는 덜 익은 고기를 먹을 때, 신장이 파괴되는 병으로 갑자기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몸서리치는 큰 아픔이 연이어 있은지, 삼개월 후, 이번에는 목사님의 친구로 교회를 섬기던 집사님의 세 아들 가운데 참 잘생기고, 어른이 돼서 목사가 되겠다며, 어릴 때부터 목사 놀이를 하던 둘째 아들이, 온몸에 붉은 반점에 나서, 병원에 진료를 받으니, 큰 병원 진료가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 서울의 모 대학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은 후, 하나님 곁으로 갔습니다.
최 목사님은 초임지에서 6개월 사이 네 명의 성도를 떠나보내야 하는 고난을 당한것입니다. 그리고 당사자의 아픔은 얼마나 더 컸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이라면 성도들의 동요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젊은 목사가 부임해서 교회에 큰 환난만 찾아 왔다. 목사를 내보내자” 그런 말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성도님들이 한 분도 없는 거에요.
더 더욱 놀라운 일은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를 잃은 분들입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분의 아내는 새신자 영접 담당이었는데요. 장례를 마친 후, 주일에 교회에서 처음 오신 새신자 옆에 앉아서, 묵묵히 성경과 찬송을 찾아 드리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분의 아내는 예배 중 떠들거나 우는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달래도 주고 먹을 것도 사주는 봉사를 했는데요. 그 분도 주일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었던 중 사정을 알 리 없는 철없는 한 아이가 울자, 안고는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 토닥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모습을 설교하는 목사님과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세 아들 중 어른이 되면 목사가 되겠다며, 어릴 때부터 목사 놀이를 하던 둘째 아들을 잃은 부부는 장례를 마친 바로 다음 날, 어린이여름성경학교이었는데요. 오셔서 밥과 반찬을 만들며, 눈앞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삼일 전 떠나보낸 아들이 어른거리지 않았겠어요. 그 장면 또한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보았습니다.
또 오랜 기간 가질 수 없다가, 갖게 되었던 예쁘고 예쁜 15개월 된 딸을 주님 품에 보낸 부목사님은 목양실에 찾아와 “저는 감사합니다”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교육전도사로 처음 와서, 전임전도사가 되었고,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고, 목사가 되었고, 너무도 소중한 아이를 안을 수 있었고, 이제 천국에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이 말은 들은 목사님과 부목사님은 서로 안고 크게 울고 울었습니다.
최 목사님은 간증하시면서 “그래도 가야할 길은 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를 이루고 있는 성도님들의 살아 있는 간증입니다. 변하지 않는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우리에게 크나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정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밀레도 항구에서 사도 바울의 초청을 받은 에베소 장로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고별 담화를 나눈 후, ‘크게 울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배에까지 전송’하였습니다(20:22,37-38). 바울과 일행은 고스, 로도, 바다라를 거쳐, 이스라엘 위쪽 ‘페니키아’Phoenicia, 베니게 행 배로 환승한 후 수리아 두로에 이르러 일 주일을 머물게 됩니다(1-4).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두로와 시돈 지방’을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다(마15:21). 그때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다면서, 고쳐주시기를 간청했던 사람이 ‘가나안 여자’인데요(마15:22-23). 두로와 시돈을 가나안으로 불린 것은 이방의 땅이요 우상의 도시이었기 때문입니다(참고/막7:26). 예수님은 유대인은 자녀요, 두로는 개라고 하였지만,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며, 고침받기를 간절하게 아뢰었습니다(마15:26-27). ‘이에 예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마15:28). 예수님은 두로 사람을 배척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가나안 여인을 통해 본보기를 보여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눅10:13). 이렇게 예수님께서 두로에 이미 복음을 전하셨고요. 본문에 바울이 이곳에서 제자들을 찾았다는 것은 두로에 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참고/행11:19).
그런데 두로의 ‘제자들(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4). 그러나 바울은 앞장에서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하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행20:22-24). 이것은 상이한 것이 아닙니다. 두로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어떠한 고난이 있을 것인지를 알린 것이고, 바울이 흔들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 역시 또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로의 제자들과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작별한 후’ 바울과 일행은 ‘돌레마이에 이르러 (그곳에서도)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5-8). ‘가이사랴’는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를 가리킵니다(참고/마16:15-16;막8:29). 예루살렘까지는 170km, 도보로 삼사일 정도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목적지에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바울과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 머물게 되었습니다(8.참고/행6:3-6). 과거 스데반 순교 후,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박해는 극에 달했습니다(행8:3). 성도들은 피신하며 흩어진 중에도 전도를 계속했습니다(행8:4). 그때 빌립 집사님은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파하고 표적도 행하자, 그 성의 무리가 그가 하는 말을 따랐습니다(행8:5-6).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가도,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예수 이름을 믿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행8:7,12.참고/요4장;행1:8-25,9:31,15:3). 빌립 집사님 이후 가사에서 아소도로 이동하여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행8:39-40). 약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 집사님은 ‘딸 넷’ 모두를 ‘예언’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양육했습니다(9). 빌립은 평신도 집사님이라는 사실을 상기했으면 합니다. 여러분도 자녀들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세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를 향한 의지
바울이 가이사랴 빌립 집사님 집에 ‘여러 날 머물 던’ 중 ‘아가보 선지자가’ 방문하여, 바울의 띠로 자신의 수족을 묵으면서,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유대인들에게 결박을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0-11.참고/행11:27-30). 바울의 일행은 그 ‘말을 듣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였습니다(12). 그러나 ‘바울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συνθρύπτοντές,낙담하게하느냐, 나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13.참고/행20:24). 두로에서 제자들이 또 가이사랴에서 아가보 선지자도 그의 말을 들은 일행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 것을 만류하여도, 주를 향한 그의 의지를 꺽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권함을 받지 아니하’자, 일행도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고 하였습니다(14.참고/삼상3:18;마6:10;눅 22:42;약 4:13-15). 오른 말씀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의지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반복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을 예언하고, 만류하였지만, 바울의 주를 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인간의 의지이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본문과 같이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이 가지 말 것을 애원할 때, 인간의 의지이면 꺾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향한 의지이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 기도회를 드리고 있는데요. 둘째날 강사 김성제 선교사님은 선교사로 부름 받기 이전에 서울 변두리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당시 물질이 없어 고물상에 가서, 남들이 쓰다 버린 연탄불에 까맣게 타버린 장판을 구해다가, 월세로 얻은 지하에 예배당에 깔고, 개척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소명을 받아서는 파송교회도 없고, 후원자도 없는 가운데 필리핀 마닐라 외각 ‘뿔로 빈민촌'에 천막을 치고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전기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 하천이 심각하게 오염된 데다, 더러운 하수구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악마의 섬'이라 불린 곳입니다. 게다가 갱들과 마약·폭력·살인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삶의 생사가 오고가는 위험한 지역입니다. 김 선교사님은 한꺼번에 찾아온 두 개의 암으로 큰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현재까지도 어린 생명들을 품고, 귀한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을의 이름이 ‘예수님이 왕이신 동네'라고 명명될 정도이니, 김 선교사님이 얼마나 큰 희생을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도 꺽을 수 없는 주를 향한 의지의 한 예라 하겠습니다. 그렇기 주님께서 결단하고 실행하고 헌신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김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큰 부끄러움과 함께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은 1998년 국내 목회 시절 물질이 없어 연탄가스에 시커멓게 타버린 장판을 얻어다가, 지하 예배당에 깔고, 개척 예배를 드렸고, 2006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국가 중 하나인 필리핀 마닐라 외각 빈민촌인 뿔로에서, 하천 위에 녹슨 양철 슬레이트로 얼기설기 만든 집에 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하였는데요. 우리 교회는 2014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 중 하나인 대한민국 신도시 근린공원 벤치에서, 개척 예배를 드렸습니다. 2015년 선 월세를 주고, 아무 시설도 하지 못하고, 공실을 그대로 예배만 드리는 조건으로 임시처소를 얻었을 때, 쓰다 버린 파라솔 테이블과 의자를 어떤 분이 갔다가 주어서, 강단으로 꾸미고 비품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때의 청아비전교회가 오늘까지 존속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더더욱 감사한 것은 외형적인 부흥은 이루지 못했지만, 여전히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아비전교회가 누구도 꺽을 수 없는 주를 향한 의지를 하나님께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와 함께 한 성도님들에게 하늘의 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주를 향한 의지를 분명히 합시다. 그러면 결단하고 실행하고 헌신할 수 있는 주님의 도움이 있을 줄 확신합니다.
주를 향한 중심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15). 예루살렘교회에서 예수님의 젖동생인 야고보 장로와 다른 장로들을 만난 바울은 그동안 전도 여행에서, 이방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전했고, 거룩한 선교 보고를 들은 이들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16-20.참고/ 마13:54-58;막6:3;요7:3-5;행1:14;갈2:9).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인데 이들은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20). 바울은 들린 도시마다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를 했습니다(행9:20,13:5,14,43,14:1,17:1,17,18:19,26,19:8). 그때 마찰 빚었던 자들이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참고/행13:39,15:5,18:13). 예루살렘에도 이러한 자들이 수만 명이 되었고, 이들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며, 이제 그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것을 들으리니, 테러를 당할 수도 있다고, 염려한 것입니다(21-22).
그래서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이 바울에게 한 제안이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이라고 하였습니다(23-24). 바울이 율법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나실인 서원을 한 네 명이 있는데, 이들이 율법에 따라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최소 30일 동안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고, 시체와 같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아야 하며, 이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한 기간이 마쳐지면, 이발하고, 제물과 잘라낸 머리카락을 제단 불에 올려 살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실인과 함께 다른 이스라엘 사람 하나가, 그들이 드리는 제물의 비용을 부담하면 성전에 가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바울에게 그 역할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참고/민19:22). 이에 ‘바울이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였습니다(26).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를 통하여, 바울에 대한 율법주의자들에 비난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바울에게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25). 여기에서 이방인에 편지가 나오는데요. 과거 수리아안디옥교회에 유대로부터 온 어떤 자들이 이방인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행15:1). 이에 수리아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대표로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 보내 정식 답변을 듣도록 했습니다(행15:2). 베드로는 이 안건에 대해 자신도 이방에게 우리와 똑같이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다며,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15:4-9.참고/행10:1,24,34,45-46,11:1-3,15-18,14:27,16:5). 베드로의 답변을 들은 당시 야고보 장로는 이인도 할례와 관계 없이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자고 했습니다(행15:19). 그리고 편지에 이방 지역에서 우상에 제물로 드려진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 등의 교훈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낸 것입니다(행15:20.참고/고전8:1-10).
여기에서 이방인에 편지가 나오는데요. 이 편지는 과거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친 바울과 일행은,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선교를 보고하고, 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떤 자들이 유대로부터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와서 이방인은 예수를 믿어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행15:1). 수리아 안디옥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행11:20-21). 이방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수리아) 안디옥’에 보내었고,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일 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고’ 거룩한 부흥을 이루었으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고,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자,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보내’었고, ‘성령이 이르’심에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행11:22-30,13:2). 이방 교회 중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그동안 완전한 복음을 믿은 것이 아닌가 회의까지 들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자로 바울과 바나바 당시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의 보내 공식적인 답변을 듣도록 하였습니다(행15:2-3).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였습니다(행15:4). 이때 정통파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였습니다(행15:5). 이에 ‘사도와 장로들이 많은 변론’을 하였고, ‘베드로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행15:6-9). 베드로는 예전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방인 로마 부대 백부장 고넬료와 그 집에 복음을 전파했을 때, 성령의 부으심과 방언이 임함을 보았습니다(행10:1,24,34,45-46). 그런데 당시도 예루살렘교회의 할례자들이 베드로가 무할례자와 함께 먹는다고 비난을 했었습니다(행11:1-3). 이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며,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가 임했음을 보고 하였고, 이에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도,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인정을 했습니다(행11:15-18). 그런데 또 다시 율법 문제로 구원을 결부시키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고, 할례자들인 유대인들이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은 자신들도 감당하지 못한,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우려고 한다고 책망한 것입니다(행15:9-11)
당시 베드로의 답변을 들은 ‘야고보’ 장로는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베드로가)이 말하였으니’ 이는 선지자 아모스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 성전을 재건하고, 주를 찾게 될 때, 유대인들의 남은자들 만이 아니라. ‘만국’ 이방인들도, 주를 찾게 하여, ‘기업’ 유대인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예언이 성취라고 하였습니다(행15:13-18.참고/암9:11-12). 그러면서 이번 회의에서 결정된, 이방인도 할례와 관계 없이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자는 것입니다(19:19-21). 그리고 편지에 이방 지역에서 우상에 제물로 드려진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 등의 교훈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낸 것입니다(참고/고전8:1-10). 예루살렘교회는 야고보 장로의 말씀과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결정하고,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대표자를)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으로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기를 결정하’였습니다(행15:22). 그때 야고보 장로가 제안한 편지를 본문에서 야고보 장로와 예루살렘 장로들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지금 바울이 율법의 규례대로 나실인을 위한 비용을 대신 지불하고, 정화 운동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이방 교회가 듣고, “그러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 믿은 이방인도 이전에 행하던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행해도 되는가”라는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전에 이미 편지로 보냈기 때문에 이방 교회에 미칠 영향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바울에게 한 제안은 유대인 중 예수를 믿지만,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갖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실인 비용을 부담한 바울의 행위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요. 그러나 바울도 이전에 나실인 서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겐그레아에서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았더라’고 하였습니다(행18:18). 당시 바울은 1, 2차 전도 여행을 거치면서, 육적 영적으로 소진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자신을 보며, 다시금 서원을 통해 주의 사명을 다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율법에 따라 서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지막까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서원한 것입니다. 율법의 서원을 신앙으로 해석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갖고 일정 기도를 드리고자 했을 때, 작정기도는 율법의 서원과 유사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고수하는 유대인 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서라면, 유대인같이 그리고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어야 한다는 했습니다(고전9:19-20). 바울은 이방 교회에 믿음으로는 불충분하기에 할례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갈5:2-4). 그러나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행하는 할례를 막을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전도를 위해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행16:3). 그러므로 바울의 예루살렘교회의 요청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복음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유대인과 타협했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중심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것이나, 전통에 따라 할례를 행했어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는 마음에 하라는 가르침입니다(롬2:29.참고/신10:16). 할례와 같은 외적 표지가 주를 향한 중심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 발생한 끔찍한 이태원 참사는 ‘핼로윈’Halloween 때문이었습니다. 핼로윈은 우상에 산 사람을 바치는 제의祭儀가 기원입니다. 악령을 부르는 서양 샤머니즘이 어린이집, 초등학교에서는 프로그램으로 정착되고, 성인들은 축제로 열리고 있습니다. 문화콘텐츠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반하는 문화는 수용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반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오지 선교사님이 원주민 의복을 입고, 그들의 절기에 참여한다고 동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님이 토착민의 풍습에 함께 하는 전도의 매개일 뿐이지, 주를 향한 중심은 흔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지역에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진리, 복음, 예수이외의 것은 이웃의 필요와 요청과 협력에 부응해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하였습니다(행23:1). 주를 향한 중심이 분명했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주를 향한 중심을 축복합니다.
주를 향한 일념
바울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제안대로 모든 규례를 마쳤습니다(26-27).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수 만 명의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결박했)’습니다(27). 이전에 바울의 전도 여행에서 방했던 자들입니다(행13:45,14:5,19,17:5,13,18:6,19:23). 이들은 바울이 “우리 민족과 율법과 성전을 적대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방 헬라인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거룩한 성전을 더럽혀 놓았다"고 했습니다(28). 이전에 에베소에서 이방 헬라인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있는 것을 목격했는데,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것을 보고는 사실 관계도 학인하지 않고, 바울이 이방인인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더렵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28-29.참고/겔44:9;행20:4;딤후4:20). 군중들이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에 동조하면서, 바울을 잡아 성전 안뜰에서 계단을 거쳐 바깥뜰로 끌어냈고, 이 소란이 예루살렘 성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안토니아 요새의 책임자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에게 알려졌고, 그는 백부장들과 함께 부대를 소집하고, 급히 현장에 도착하였고, 바울을 폭행하던 유대인들도 그쳤습니다(30-32참고/행23:26). 천부장은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령하고, 군중에게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었지만, 어떤 이는 이런 말로 또 다른 이는 저런 말로 말을 하니, 너무 소란하여 그 진상을 알 수가 없자, 영내로 압송을 했습니다(33-34).
그런데 안토니아 요새 영내로 들어가는 층대 계단에 이를 때, 바울은 무리의 폭행으로 인하여, 군인들에게 들려가게 됩니다(35-36). 이를 본 무리는 바울을 제거하지 못한 분한 마음에 “그를 없이하자” 소리치며 따라 갔습니다(36). 그들의 외침은 27여 년 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빌라도 총독 관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해달라고 요구했던 유대인들의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마27:23;막15:13;눅23:18;요19:13,15). 예수님은 인자가 유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버림을 당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져 능욕하고 죽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9:22,18:31-33.참고/행4:27). 그리고 너희들도 나로 인하여 박해당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눅21:12). 이 예언이 바울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가이사랴 빌립 집사의 집에 온 아가보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10-11). 일행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간곡히 요청했으나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12-13).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바울의 일생을 대변하는 이 말씀은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행20:24). 바울의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오늘 말씀의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다니엘 기도회 셋째 날 강사 최인선 목사님은 시골에서 힘들고 힘들게 목회하던 아버지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도 목사가 되어 삼대 초반에 김천의 한 교회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담임으로 첫 목양지에서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자리를 잡아가려던 때였습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운동하던 집사님 두 분이 음주운전 차량 사고로, 부목사님의 15개월 된 딸이 햄버거병에 걸려 신장이 손상되어, 친구이자 교회를 섬기던 집사님 둘째 아들이 급성 백혈병으로 하나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6개월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성도들의 동요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젊은 목사가 부임해서 교회에 큰 환난만 찾아 왔다. 목사를 내보내자” 그런 말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성도님들이 한 분도 없는 거에요.
더 더욱 놀라운 일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분의 아내는 장례식을 마친 후 주일에 새신자 영접 담당으로 새신자 옆에 앉아 묵묵히 성경과 찬송을 찾아 드리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또 한 분의 아내는 예배 중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목사 놀이를 하던 둘째 아들을 잃은 부부는 장례를 마친 바로 다음 날, 어린이여름성경학교에 와서, 밥과 반찬을 만들면서 섬겼습니다. 이 모든 모습을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가질 수 없다가, 갖게 되었던 예쁘고 예쁜 15개월 된 딸을 주님 품에 보낸 부목사님은 목양실에 찾아와 “제가 이 교회에 교육전도사로 처음 와서, 전임전도사가 되었고,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고, 목사가 되었고, 너무도 소중한 아이를 안을 수 있었고, 이제 천국에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최 목사님은 간증하시면서 “그래도 가야할 길은 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를 이루고 있는 성도님들의 살아 있는 간증입니다. 변하지 않는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우리에게 크나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결론
주를 향한 의지, 주를 향한 중심, 주를 향한 일념으로 나아갈 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는 역사가 오늘 우리 가정과 기업과 교회에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아끼는 이들이 결박과 환난을 당할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두 번이나 만류했을 때, 인간의 의지이었다면, 꺾였겠지만, 주를 향한 의지였기에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주를 향한 의지를 분명하게 하옵소서. 결단하고 실행하고 헌신할 수 있는 주님의 도움을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중 믿는 자 수만 명을 바른 신앙을 위해 율법의 규례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주를 향한 중심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전도를 위해 절대적 진리외에 그들의 필요와 요청과 협력에 부응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것을 감당할 영권과 물권과 인권을 주옵소서. 주를 향한 중심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 주를 향한 일념을 갖게 하옵소서. 모든 잃어도 믿음은 잃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모든 일 위에 주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사도행전 21:1-36. 2022.11.06. 主日禮拜
“1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27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행21:1-36)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나눈 고별 담화에 나타난 다섯 가지 가르침 첫 번째는 겸손입니다(행20:19).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는 지금까지 그의 사역 중 절정이었습니다(참고/행19:11-15,20). 그때 “내가 재림 예수다”고 한마디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겸손했습니다. ‘나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인데 하나님이 붙잡아 사용하셨다’고 하였습니다(엡3:7-8).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성도를 잡아 옥에 가두고 교회를 잔멸했던 자이었습니다(행:8:3). 그러한 자신을 친히 만나주신 주님 은혜에 항상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통해 아무리 큰 기적이 행해져도, 결과에 도취 되지 않고, 모든 겸손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모든 겸손’으로 교회를 섬깁시다(참고/잠16:18).
두 번째 “눈물”입니다(행20:19). 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눈물을 잊어버렸다”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섬기면서 얼마나 울었는가를 한번 쯤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눈물의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눈물이 없는 인생은 사막과 같습니다. 눈물이 없으면, 웃음 그 자체도 하나의 광대 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인생을 아는 사람입니다. 신앙에도 눈물이 믿음의 본질로 인도합니다. 애통하는 심령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랍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마5:4).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면서, 큰 능력이 나타났어도, ‘눈물’로 사역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울어야 할 때, 함께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경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들을 통한 시험이었습니다. “29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말씀하며, 이단의 계략을 경계하고 있습니다(행20:29-30.참고/고전9:1-2,29:30). 그러나 바울은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입니다(19). 시험은 누구나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어떤 간계의 시험에도 참고 주를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경외입니다.
네 번째는 “열정”입니다. ‘유익한 것’이란(행20:20), ‘믿음을 증언한 것’(행20:21) 즉 즉 복음을 일컫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공중 앞에서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든, ‘각 집에서나’ 집 집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동족이던 외인이던 신분고하 남녀노소 식자무식자 부한자빈한자 누구에게든지 가리지 않고 전했다는 것입니다(20-21). 이것은 “열정”입니다. 그렇기에 “26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만의 소리가 아니라 충성을 다한 후회 없는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역에 그리고 내 이웃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성령에 매여’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행20:22-23). 우리도 성령충만함으로 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절제”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20:33). 지난날 같았으면 응당 내 것으로 취해야 할 순간 “아니지! 주님의 기뻐하시는 것으로 드려야지”라며, 타인에게 기꺼이 베풀 수 있는 것. 내 유익을 타인의 유익으로 바꾸는 크리스천의 고귀한 절제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셨기 때문입니다(행20:35).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눅6:38).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15:1/참고/갈6:2).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로서, 주인의 명령에 따라, 당연히 준다는 정신으로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겸손, 눈물, 경외, 열정, 절제 이 다섯 가지가,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삶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행20:18).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그러면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행20:35). 오늘 우리에게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라면서(행20:32), 자신의 걸어온 한결 같은 삶을 간곡히 권면했습니다. 예수 믿은 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섬겼던 것, 기도한 것, 드린 것이 있나,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지난날 다짐한 사명을 잃어버리고 있었거나, 잊고 있었다면, 찾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깨우쳐주고 계시는 음성을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들린 밀레도 항구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고별 담화를 나눈 후, ‘다 크게 울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였습니다(20:22,37-38). 이렇게 바울과 일행은 에베소 장로들과 ‘1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이스라엘 위쪽에 위치한 ‘페니키아’Phoenicia “2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고 하였습니다(1-3). 오늘날 시리아 ‘튀레’Tyre 지역입니다.
이 두로에서 바울은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일주일)을 머물’렀습니다(4). 두로는 시돈에서 약 40km 아래에 위치하는 지중해 연안 도시국가로, 이스라엘의 아셀지파 북쪽 접경지역에 위치했습니다(참고/수19:29).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두로와 시돈 지방’을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다(마15:21). 그때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면서, 고쳐주시기를 간청했던 사람이 ‘가나안 여자’인데요(마15:22-23). 두로와 시돈을 가나안으로 불린 것은 이방의 땅이요 우상의 도시이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막7:26). ‘수로보니게 족속’이란 시리아-페니키아Syrian –Phoenicia 출신이라는 뜻으로 두로와 시돈 지역을 일컫습니다. 예수님은 도움을 구하는 가나안 여인에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면서, 거부하셨습니다(마15:24).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재차 간청을 했습니다(마15:25).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면서, 유대인은 자녀요, 두로 사람은 개라고 하였습니다(마15:26). 모욕적으로 받을 수 있는 말씀에도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더욱 간절히 아뢰었습니다(마15:27). ‘이에 예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마15:28).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땅의 사람이라고 배척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가나안 여인을 통해 본보기를 보여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눅10:13). 유대 땅 고라신, 벳세다에 복음을 전한 것 같이, 이방 땅 두로와 시돈에 하였더라면, 그들은 모두 회개 하고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두로에 이미 복음을 전하셨고요. 본문에 바울이 이곳에서 제자들을 찾았다는 것은 두로에 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예루살렘의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로 보입니다(참고/행11:19). 복음은 위대합니다. 이방의 지역에 주의 거룩한 백성들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두로의 ‘제자들(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4). ‘성령의 감동’은 “성령을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말씀을 나눈 것 같이 바울은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고 하였습니다(행20:22-23). 그러면 두로의 제자들이 성령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 하고,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는데, 성령이 충돌하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두로의 제자들이 “가지 말라”는 것은 성령의 명령이 아니라,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것인지를 알린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렇게 제자들의 예언에 흔들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 역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고난이 있을지라도, 바울이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 또한 성령에 순복한 것입니다.
바울과 일행은 두로에서 ‘여러 날을 지낸 후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였고, ‘서로 작별한 후 (바울과 일행은)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하였습니다(5-6). 두로의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이 서로를 위해 눈물로 간절히 기도한 것은 믿음 안에서의 교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일행은 두로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그곳에서도)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7)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8). ‘가이사랴’는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마16:15-16;막8:29).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70km, 도보로 삼사일 정도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온 것이죠. 바울과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고 하였습니다(8). 빌립 집사님은 스데반 집사님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에서 택함 받은 일곱 집사 가운데 한 분입니다(참고/행6:3-6)
스데반 순교 후,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박해는 극에 달했습니다(행8:3). 성도들은 피신해야 했지만, 흩어진 가운데도 복음의 말씀을 전함을 계속했습니다(행8:4). 그 가운데 빌립 집사님은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파하고 표적도 행하자, 그 성의 무리가 그가 하는 말을 따랐습니다(행8:5-6).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가도,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예수 이름을 믿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행8:7,12). 이미 예수께서 친히 사마리아를 찾아가 복음을 전하셨고요(요4장), 부활 승천하시면서, 사마리아에도 복음 전파를 당부하셨습니다(행1:8). 이런 주님의 명을 받들어 빌립 집사님이 전도하였고,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도 방문하여, 이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행8:1-25,9:31,15:3).
사마리아 성에서 복음을 전파한 빌립 집사님에게 주의 사자가, 가사로 내려가라고 명합니다(행8:26). 빌립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를 만나게 됩니다(행8:27). 내시는 돌아가는 길에 수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행8:27-28.참고/사53:7). 그때 성령이 빌립에게 그에게로 나아가라고 명하십니다(행8:29). 빌립이 읽는 것을 깨닫느냐 묻자, 내시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며, 청하여 수레에 올라 오도록 하였습니다(행8:30-31). 빌립은 구약 선지자의 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하고,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행8:32-38). 빌립 집사님은 이후 주의 영에 의해 가사에서 아소도로 이동하여,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행8:39-40). 이렇게 가이사랴에 정착한 빌립 집사님은 약 20여 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었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 집사님에게는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9). 빌립 집사님은 자녀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은 여러분과 똑같은 집사님이라는 사실을 상기했으면 합니다. 여러분도 자녀들도 위대한 하나님위 사람으로 세워지고 세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를 향한 의지
바울은 가이사랴 빌립 집사님 집에서 ‘여러 날 머물 던’ 중 ‘아가보라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왔습니다(10). 아가보 선지자는 ‘바울(이) (차고있는)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는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고 하였습니다(11). 아가보는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며, 그 상황을 퍼포먼스로 보여 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아가보 선지자는 이전에도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고 성령으로 예언했으며,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A.D.41-54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행11:27-30). ‘(바울의 일행들은) (아가보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 곳 (가이사랴)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였습니다(12).
그러나 ‘바울이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13). 바울은 자신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결박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전 장에서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을 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다짐한 바 있습니다(행20:24). 그러므로 두로에서 제자들이 또 가이사랴에서 아가보 선지자의 말을 들은 일행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 것을 만류하여도, 주를 향한 그의 의지를 꺽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일행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그쳤’다고 하였습니다(14.참고/삼상3:18;마6:10;눅 22:42;약 4:13-15).
오른 말씀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의지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반복해서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따라, 성령에 말씀함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을 예언하고, 일행들까지도 만류하였지만, 바울의 주를 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의지는 결단이고 실행이고 헌신입니다. 그러나 그 의지가 인간의 의지이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본문과 같이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이 가지 말 것을 애원할 때, 인간의 의지이면 꺾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향한 의지이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 기도회를 드리고 있는데요. 둘째 날 강사 김성제 선교사님은 선교사로 부름 받기 이전에 1998년 전도사 시절 서울 변두리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당시 물질이 없어서 고물상에 가서, 남들이 쓰다 버린 연탄불에 까맣게 타버린 장판을 구해다가, 월세로 얻은 지하에 예배당에 깔고, 개척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6년 선교사의 소명을 받아서는 파송교회도 없고, 후원자도 없는 가운데 필리핀 마닐라 외각에 위치한 ‘뿔로 빈민촌'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가난한 아이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전기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 하천이 심각하게 오염된 데다, 더러운 하수구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악마의 섬'이라 불린 곳입니다. 게다가 갱들과 마약·폭력·살인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삶의 생사가 오고가는 위험한 지역입니다. 김 선교사님은 2018년 한꺼번에 찾아온 두 개의 암으로 큰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지독한 가난과 폭력, 그리고 불결한 환경에서 신음하는 어린 생명들을 품고, 그들에게 구원의 예수를 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있는 귀한 선교를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마을의 이름이 ‘예수님이 왕이신 동네'라고 명명될 정도이니, 김 선교사님이 얼마나 큰 희생을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도 꺽을 수 없는 주를 향한 의지의 한 예라 하겠습니다. 그렇기 주님께서 결단하고 실행하고 헌신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김성제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한 없이 부끄러운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와 함께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은 1998년 국내 목회 시절 물질이 없어 연탄가스에 시커멓게 타버린 장판을 얻어다가, 지하 예배당에 깔고, 개척 예배를 드렸고, 2006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국가 중 하나인 필리핀 마닐라 외각 빈민촌인 뿔로에서, 하천 위에 녹슨 양철 슬레이트로 얼기설기 만든 집에 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하였는데요. 우리 교회는 2014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 중 하나인 대한민국 신도시 근린공원 벤치에서, 개척 예배를 드렸습니다. 2015년 선 월세를 주고, 아무 시설도 하지 못하고, 공실을 그대로 예배만 드리는 조건으로 임시처소를 얻었을 때, 쓰다 버린 파라솔 테이블과 의자를 어떤 분이 갔다가 주어서, 강단으로 꾸미고 비품으로 사용했습니다.
김 선교사님의 간증과 우리 교회의 역사를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때의 청아비전교회가 오늘까지 존속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더더욱 감사한 것은 외형적인 부흥은 이루지 못했지만, 여전히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청아비전교회가 누구도 꺽을 수 없는 주를 향한 의지를 하나님께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와 함께 한 성도님들에게 하늘의 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성도 여러분 주를 향한 의지를 분명히 합시다. 그러면 결단하고 실행하고 헌신할 수 있는 주님의 도움이 있을 줄 확신합니다.
주를 향한 중심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15). 그 길에 바울은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갔는데, 그것은 (바울과 일행이) (예루살렘에 있는 나손의) 집에 머물려 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16). 바울과 일행이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기꺼이 영접하’였습니다(17).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형제들도 바울의 환대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튿날 바울(과) (일행은)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고 하였습니다(18). 이 말씀에 등장하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젖동생입니다(마13:55;막6:3).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는 그분의 메시아 성을 믿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후 신앙을 갖게 되었고,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참고/마13:54-58;요7:3-5;행1:14).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의 장로가 된 것입니다. 본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는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다른 여러 지역으로 사역을 떠난 것으로 보이고요. 이제 야고보는 다른 장로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는 대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그를 이전에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만난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라고 하였습니다(갈 2:9). 야고보와 함께 있던 장로들πρεσβύτεροι을 성경학자들은 대략 70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모 교회로서 든든히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에게) 문안하고 (그동안) (1, 2, 3차 전도 여행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행)하신 (놀라운)일을 낱낱이 말하’였습니다(19). 바울의 거룩한 선교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었습니다(20).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바울(에게)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 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고 하였습니다(20).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유대인 중에 믿는 자’란 유대인 중 예수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이 ‘수만 명’이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이들은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로 여전히 율법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전도를 하였는데요(행9:20,13:5,14,43,14:1,17:1,17,18:19,26,19:8). 그들과 마찰 빚었던 문제가 율법을 따라 철저히 할례도 행하며,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대었습니다(참고/행13:39,15:5,18:13). 예루살렘에도 이러한 자들이 수만 명이 되었고, 이들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들었도다’며,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예루살렘에) 온 것을 들으리니’(21-22). 예수를 믿노라 하지만, 여전히 율법에 열성을 가진 유대인에게, 바울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조장하는 배교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이들이 배척하고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을 넘어, 물리적으로 공격을 당할 것을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은 염려했던 것입니다. 상투를 자르려면 다 잘라야 하는데 자르다가 말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자들이 바로 유대인 가운데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도,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바울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여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23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23-24)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방 교회에서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참고/행24:17;롬15:25-27;고전16:1-4;고후8:13-14,9:12-13,갈2:10). 모 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의 복음을 빚진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구제에 동참을 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방교회의 아름다운 연보와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예루살렘에 알리려는 선한 뜻을 갖고 있었지만, 수만의 율법의 열성을 가진 자들로 인해 손상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이 바울에게 한 제안 내용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율법을 지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나실인 서원을 한 네 명이 있는데, 이들이 율법에 따라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최소 30일 동안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고, 시체와 같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아야 하며, 이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한 기간이 마쳐지면, 이발하고, 제물과 잘라낸 머리카락을 제단 불에 올려 살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실인과 함께 다른 이스라엘 사람 하나가, 그들이 드리는 제물의 비용을 부담하면 성전에 가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바울에게 그 역할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경건하고 자애로운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울도 정화를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 동안 이방인의 땅에 거주한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정화를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서원한 나실인으로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나실인 의식에 비용을 지불하는 자로서, 행위를 요청한 것입니다(참고/민19:22).
이에 ‘바울이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고 하였습니다(26). 바울이 제안을 아무런 조건 없이 동의하고 따른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를 통하여, 바울에 대한 율법주의자들의 비난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고자 하였는데요.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25).
여기에 편지가 등장하는데요. 과거 수리아안디옥교회에 유대로부터 온 어떤 자들이 이방인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행15:1). 이에 수리아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대표로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 보내 정식 답변을 듣도록 했습니다(행15:2). 베드로는 이 안건에 대해 자신도 이방에게 우리와 똑같이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다며,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15:4-9.참고/행10:1,24,34,45-46,11:1-3,15-18,14:27,16:5). 베드로의 답변을 들은 당시 야고보 장로는 이인도 할례와 관계 없이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자고 했습니다(행15:19). 그리고 편지에 이방 지역에서 우상에 제물로 드려진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 등의 교훈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낸 것입니다(행15:20.참고/고전8:1-10).
여기에서 이방인에 편지가 나오는데요. 이 편지는 과거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친 바울과 일행은,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선교를 보고하고, 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행15:1). 수리아 안디옥교회 성도는 대부분 이방인이었고, 유대인들도 헬라화된 유대인으로 사실상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어떻게 탄생하였습니까? 수리아 안디옥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행11:20-21). 이방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수리아) 안디옥’에 보내었고,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였고, ‘다소에 가서’ 사울을 ‘만나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거룩한 부흥을 이루었으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고,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자,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보내’었습니다(행11:22-30). ‘성령이 이르’심에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행13:2). 이방 교회 중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자들이, 이방인은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고, 육체의 언약 표징을 받아야 한다니,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그동안 우리가 믿은 복음이, 완전한 복음이 아니었느냐는 회의까지 들기 시작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 지도자이자 선교사인 ‘바울 및 바나바와(는) (유대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행15:2). 수리아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대표로 예루살렘교회에 보내, 유대에서 내려온 자들이 주장에 대해, 당시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의 공식적인 답변을 듣도록 하였고요(행15:2). 앞으로 이방 지역에 세워질 교회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오도록 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전송을 받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행15:3).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였습니다(행15:4). 이때 정통파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발언하였습니다(행15:5). 상정된 정식 안건을 두고,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을 하게 되었습니다(행15:6). 예루살렘 회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행15:7-9).
베드로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예전에 이방인 로마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파한 적이 있습니다(행10:1,34). 고넬료 집에 모인 그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게 성령이 부으심과 방언을 말함을 보았습니다(행10:24,45-46). 그런데 당시에도 이 일로 예루살렘교회에 있던 할례자들이 베드로가 무할례자들에게 함께 먹었다함을 듣고 비난하였습니다(행11:1-3). 바울도 이전에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한 바도 있습니다(행14:27.참고/행16:5). 베드로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이방인)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며,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가 임했음을 보고 하였고, 이에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도,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하였습니다(행11:15-18).
이와 같이 이전 이미, 이방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기로 하고, 하나님도 ‘차별하지 아니하’신 것을, ‘지금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면서,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하였습니다(행15:9-11). 베드로는 답변에서, 할례자들인 유대인들이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은 자신들도 감당하지 못한,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우려고 한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당시에 베드로의 답변을 들은 ‘야고보 (장로)가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면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 (베드로가)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며, 구약 아모스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 성전을 재건하고, 주를 찾게 될 때, 유대인들의 남은자들 만이 아니라. ‘만국’ 이방인들도, 주를 찾게 하여, ‘기업’ 유대인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15:13-18.참고/암9:11-12).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였습니다(행15:20-21). 이와 같이 이번 회의에서 결정된, 이방인도 할례와 관계 없이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자는 것입니다(19-21). 그리고 편지에 이방 지역에서 우상에 제물로 드려진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 등의 교훈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낸 것입니다(참고/고전8:1-10). 예루살렘교회는 야고보 장로의 말씀과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결정하고,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 (대표자를)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으로 (인편에) (편지를) 보내기를 결정하’였습니다(행15:22).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예루살렘교회 대표로 함께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교회에 ‘작별하고 (수리아)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였습니다(15:22-30).
그때 야고보 장로가 제안한 편지 내용을 본문에서 야고보 장로와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지금 바울이 율법의 규례대로 나실인을 위한 비용을 대신 지불하고, 정화 운동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이방 교회가 듣고, “그러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 믿은 이방인도 이전에 행하던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행해도 되는가”라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전에 이미 편지로 보냈기 때문에 이방 교회에 미칠 영향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바울에게 한 제안은 유대인 중 예수를 믿지만,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갖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실인의 비용을 부담한 바울의 행위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요.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 자신도 이전에 나실인 서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로 떠나기 위해 겐그레아 항구에 갔을 때,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았더라’고 하였습니다(행18:18). 바울은 당시 1, 2차 전도 여행을 거치면서, 육적 영적으로 소진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자신을 보며, 다시금 서원을 통해 주의 사명을 다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율법을 따라 서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지막까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서원한 것입니다. 율법의 서원을 신앙의 결단의 해석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갖고 정한 기간 동안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작정기도는 서원과 유사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율법의 서원을 따라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에 적용한 것입니다.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19-20). 바울은 율법을 고수하는 유대인 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서라면, 유대인같이 그리고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어야 한다는 했습니다.
바울은 이방 교회에 말씀을 증거할 때, 믿음으로는 불충분하기에 할례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은 구원의 능력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갈5:2-4). 그러나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행하는 할례를 막을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전도를 위해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행16:3). 그러므로 바울의 예루살렘교회의 요청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복음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유대인과 타협했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중심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것이나, 전통에 따라 할례를 행했어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는 마음에 하라는 가르침입니다(롬2:29.참고/신10:16). 할례와 같은 외적 표지가 주를 향한 중심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 방생한 끔찍한 이태원 참사는 ‘핼로윈’Halloween 때문이었습니다. 핼로윈은 우상에 산 사람을 바치는 제의祭儀가 기원입니다. 악령을 부르는 서양 샤머니즘이 어린이집, 초등학교에서는 프로그램으로 정착되고, 성인들은 축제로 열리고 있습니다. 문화콘텐츠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반하는 문화는 수용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반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오지 선교사님이 원주민 의복을 입고, 그들의 절기에 참여한다고 동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님이 토착민의 풍습에 함께 하는 것은 전도를 위한 매개일 뿐이지, 주를 향한 중심은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지역에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진리, 복음, 예수 이외의 것은 이웃의 필요와 요청과 협력에 부응해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하였습니다(행23:1). 주를 향한 중심이 분명했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주를 향한 중심을 축복합니다.
주를 향한 일념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26) 바울이 나실인 서원을 한 네 사람의 규례를 모두 마쳤습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27) 바울도 이방 땅에 두루 다니다 왔기 때문에 7일 동안 정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었다고 하였습니다(27).
예루살렘에 있는 수 만 명의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잡은 것입니다. 바울이 이전에 전도 여행에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 등에서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방해를 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행13:45,14:5,19,17:5,13,18:6,19:23). 이들이 오순절인 맥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가 바울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들은 ‘(소리를 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 (바울)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 (예루살렘 성전)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고 하였습니다(28).
그러나 바울은 앞서 스스로 정화하는 정결의식을 행함으로써 결코 율법을 폐하거나 모세를 비방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헬라인을 데리도 성전에 들어와 더럽혔다는 것인데요. 성전의 뜰은 안뜰과 바깥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성전의 안뜰은 유대인에게만, 그리고 바깥들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안뜰로 가기 위해서는 바깥뜰을 지나갈 수 밖에 없으니, 이 바깥뜰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뒤섞여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바깥뜰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들까지도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기 때문에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방인이 출입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곳이 성전같지 않게 마냥 시장통 같은 곳은 아니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의하면 이방인의 뜰에는 회당 같은 기능을 하는 모임 장소도 있었고, 이방인의 뜰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율법을 토론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의 뜰과 경계를 이루는 안쪽 뜰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전의 뜰에는 안뜰과 바깥들을 구분하는 담장이 있습니다. 이방인이 출입할 수 있는 경계가 되는 담장 안으로는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담장에는 화강암으로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이방인은 안쪽 뜰과 성소 주변의 난간 주변으로 들어올 수 없다. 들어오다가 잡히는 모든 사람들 (이방인들)은 죽을 것이다.”
이렇게 이방인들은 성전의 바깥뜰은 방문할 수 있지만, 안뜰에 들어가는 것은 엄격히 금하고 있었습니다(참고/겔44:9). 폭동을 일으킨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드로비모’Τρόφιμον를 내세웠습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29). 드로비모는 에베소 사람으로 헬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시아 유대인들이 예전에 에베소 시내에서 드로보미가 바울과 함께하고 있었던 것을 보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다시 나타난 것으로 보면서, 바울이 으레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드로비모는 바울의 훌륭한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에베소에서 만났고, 또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할 때, 이방인의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이곳까지 동행을 한 것이다(행20:4). 그리고 이 후에도 계속적으로 바울과 함께 하였는데, 바울 서신의 가장 마지막인 디모데후서에는 그가 병이 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딤후4:20).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전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기초 사실조차도 확인하지 않고, 폭동을 일으키고,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30). 군중들이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에 동조하면서, 바울을 잡아 성전 안뜰에서 계단을 거쳐 바깥뜰로 끌어냈습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31). 짐승같이 끌고 온 바울을 유대인들이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폭력을 가했을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부근에는 상주하는 로마 군인들이 요새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요새는 약간 높은 지대에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지형이었습니다. 따라서 군인들은 언제나 망대에서 예루살렘 안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폭동이 일어나자, 즉각 상부에 보고가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소란함을 전해들은 성전 바로 옆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안토니아 요새의 책임자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 Lysias는 백부장들과 함께 분대를 소집하고, 급히 성전 바깥뜰의 층대 계단을 통하여, 성전 뜰에 도착하게 됩니다(참고/행23:26). 천부장이라는 천 명의 군인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그 휘하에 백 명의 군인을 통솔하는 백부장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32). 천부장이 사건 현장에 도착하자, 바울을 폭행하던 유대인들도 그쳤습니다.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 자리에서 바울을 폭행했던 군중에게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었지만,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33-34). 바울에 대하여 무리 가운데 어떤 이는 이런 말로 또 다른 이는 저런 말로 말을 하니, 너무 소란하여 그 진상을 알 수가 없자, 영내로 압송했습니다.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35-36). 그런데 안토니아 요새 영내로 들어가는 층대 계단에 이를 때, 바울은 무리의 폭행으로 인하여, 군인들에게 들려가게 됩니다. 이를 본 무리는 바울을 그 자리에서 제거하지 못하고, 로마 군대의 손에 넘어간 것에 대하여, 분한 마음에 일제히 죽여 없이하자고 외치면서 따라가는 장면입니다. “그를 없이하자” 바울을 향해 부르짖던 성난 무리의 외침은 27여 년 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로마 총독 빌라도 관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해달라고 요구했던 유대인들의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마27:23;막15:13;눅23:18;요19:13,15). 예수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며, 또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눅9:22,18:31-33.참고/행4:27). 이 말씀 그대로 당하신 예수님은 너희들도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눅21:12). 이 예언이 바울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앞서 가이사랴 빌립 집사의 집에 유할 때, 유대로부터 내려온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는 것을 보이면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이와 같이 결박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 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0-11). 지금 그대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의 일행은 바울에게 예루살람에 올라가지 말 것을 권하였습니다(12). 그러나 바울은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13).
‘마부정제’馬不停蹄 “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않는다”. “달리는 말은 뒤돌아 보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격언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바울의 일생을 대변하는 이 말씀은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행20:24). 바울의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바울의 일념에 그가 가려는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권면 하던 일행들도,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며, 그의 길을 축복했습니다(14). 오늘 말씀의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다니엘 기도회 셋째 날 강사 최인선 목사님은 시골에서 힘들고 힘들게 목회하던 아버지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도 목회자가 되어 삼대 초반에 김천의 한 교회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담임으로 첫 목양지에서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자리를 잡아가려던 때이었습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운동하던 집사님이 음주운전을 한 경찰관의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한 분도 아니고 두 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 신실하신 보배 같은 믿음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지났습니다. 상처가 아직 아물기도 전에 또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부목사님이 오랜 시간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얻은 너무나도 예쁜 15개월 된 딸이 이었는데, 일명 햄버거병으로 불리는 덜 익은 고기를 먹을 때, 신장이 파괴되는 병으로 갑자기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몸서리치는 큰 아픔이 연이어 있은지, 삼개월 후, 이번에는 목사님의 친구로 교회를 섬기던 집사님의 세 아들 가운데 참 잘생기고, 어른이 돼서 목사가 되겠다며, 어릴 때부터 목사 놀이를 하던 둘째 아들이, 온몸에 붉은 반점에 나서, 병원에 진료를 받으니, 큰 병원 진료가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 서울의 모 대학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은 후, 하나님 곁으로 갔습니다.
최 목사님은 초임지에서 6개월 사이 네 명의 성도를 떠나보내야 하는 고난을 당한것입니다. 그리고 당사자의 아픔은 얼마나 더 컸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이라면 성도들의 동요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젊은 목사가 부임해서 교회에 큰 환난만 찾아 왔다. 목사를 내보내자” 그런 말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성도님들이 한 분도 없는 거에요.
더 더욱 놀라운 일은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를 잃은 분들입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분의 아내는 새신자 영접 담당이었는데요. 장례를 마친 후, 주일에 교회에서 처음 오신 새신자 옆에 앉아서, 묵묵히 성경과 찬송을 찾아 드리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분의 아내는 예배 중 떠들거나 우는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달래도 주고 먹을 것도 사주는 봉사를 했는데요. 그 분도 주일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었던 중 사정을 알 리 없는 철없는 한 아이가 울자, 안고는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 토닥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모습을 설교하는 목사님과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세 아들 중 어른이 되면 목사가 되겠다며, 어릴 때부터 목사 놀이를 하던 둘째 아들을 잃은 부부는 장례를 마친 바로 다음 날, 어린이여름성경학교이었는데요. 오셔서 밥과 반찬을 만들며, 눈앞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삼일 전 떠나보낸 아들이 어른거리지 않았겠어요. 그 장면 또한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보았습니다.
또 오랜 기간 가질 수 없다가, 갖게 되었던 예쁘고 예쁜 15개월 된 딸을 주님 품에 보낸 부목사님은 목양실에 찾아와 “저는 감사합니다”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교육전도사로 처음 와서, 전임전도사가 되었고,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고, 목사가 되었고, 너무도 소중한 아이를 안을 수 있었고, 이제 천국에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이 말은 들은 목사님과 부목사님은 서로 안고 크게 울고 울었습니다.
최 목사님은 간증하시면서 “그래도 가야할 길은 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를 이루고 있는 성도님들의 살아 있는 간증입니다. 변하지 않는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우리에게 크나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정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밀레도 항구에서 사도 바울의 초청을 받은 에베소 장로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고별 담화를 나눈 후, ‘크게 울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배에까지 전송’하였습니다(20:22,37-38). 바울과 일행은 고스, 로도, 바다라를 거쳐, 이스라엘 위쪽 ‘페니키아’Phoenicia, 베니게 행 배로 환승한 후 수리아 두로에 이르러 일 주일을 머물게 됩니다(1-4).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두로와 시돈 지방’을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다(마15:21). 그때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다면서, 고쳐주시기를 간청했던 사람이 ‘가나안 여자’인데요(마15:22-23). 두로와 시돈을 가나안으로 불린 것은 이방의 땅이요 우상의 도시이었기 때문입니다(참고/막7:26). 예수님은 유대인은 자녀요, 두로는 개라고 하였지만,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며, 고침받기를 간절하게 아뢰었습니다(마15:26-27). ‘이에 예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마15:28). 예수님은 두로 사람을 배척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가나안 여인을 통해 본보기를 보여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눅10:13). 이렇게 예수님께서 두로에 이미 복음을 전하셨고요. 본문에 바울이 이곳에서 제자들을 찾았다는 것은 두로에 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참고/행11:19).
그런데 두로의 ‘제자들(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4). 그러나 바울은 앞장에서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하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행20:22-24). 이것은 상이한 것이 아닙니다. 두로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어떠한 고난이 있을 것인지를 알린 것이고, 바울이 흔들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 역시 또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로의 제자들과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작별한 후’ 바울과 일행은 ‘돌레마이에 이르러 (그곳에서도)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5-8). ‘가이사랴’는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를 가리킵니다(참고/마16:15-16;막8:29). 예루살렘까지는 170km, 도보로 삼사일 정도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목적지에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바울과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 머물게 되었습니다(8.참고/행6:3-6). 과거 스데반 순교 후,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박해는 극에 달했습니다(행8:3). 성도들은 피신하며 흩어진 중에도 전도를 계속했습니다(행8:4). 그때 빌립 집사님은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파하고 표적도 행하자, 그 성의 무리가 그가 하는 말을 따랐습니다(행8:5-6).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가도,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예수 이름을 믿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행8:7,12.참고/요4장;행1:8-25,9:31,15:3). 빌립 집사님 이후 가사에서 아소도로 이동하여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행8:39-40). 약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 집사님은 ‘딸 넷’ 모두를 ‘예언’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양육했습니다(9). 빌립은 평신도 집사님이라는 사실을 상기했으면 합니다. 여러분도 자녀들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세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를 향한 의지
바울이 가이사랴 빌립 집사님 집에 ‘여러 날 머물 던’ 중 ‘아가보 선지자가’ 방문하여, 바울의 띠로 자신의 수족을 묵으면서,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유대인들에게 결박을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0-11.참고/행11:27-30). 바울의 일행은 그 ‘말을 듣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였습니다(12). 그러나 ‘바울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συνθρύπτοντές,낙담하게하느냐, 나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13.참고/행20:24). 두로에서 제자들이 또 가이사랴에서 아가보 선지자도 그의 말을 들은 일행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 것을 만류하여도, 주를 향한 그의 의지를 꺽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권함을 받지 아니하’자, 일행도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고 하였습니다(14.참고/삼상3:18;마6:10;눅 22:42;약 4:13-15). 오른 말씀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의지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반복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을 예언하고, 만류하였지만, 바울의 주를 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인간의 의지이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본문과 같이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이 가지 말 것을 애원할 때, 인간의 의지이면 꺾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향한 의지이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 기도회를 드리고 있는데요. 둘째날 강사 김성제 선교사님은 선교사로 부름 받기 이전에 서울 변두리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당시 물질이 없어 고물상에 가서, 남들이 쓰다 버린 연탄불에 까맣게 타버린 장판을 구해다가, 월세로 얻은 지하에 예배당에 깔고, 개척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소명을 받아서는 파송교회도 없고, 후원자도 없는 가운데 필리핀 마닐라 외각 ‘뿔로 빈민촌'에 천막을 치고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전기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 하천이 심각하게 오염된 데다, 더러운 하수구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악마의 섬'이라 불린 곳입니다. 게다가 갱들과 마약·폭력·살인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삶의 생사가 오고가는 위험한 지역입니다. 김 선교사님은 한꺼번에 찾아온 두 개의 암으로 큰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현재까지도 어린 생명들을 품고, 귀한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을의 이름이 ‘예수님이 왕이신 동네'라고 명명될 정도이니, 김 선교사님이 얼마나 큰 희생을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도 꺽을 수 없는 주를 향한 의지의 한 예라 하겠습니다. 그렇기 주님께서 결단하고 실행하고 헌신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김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큰 부끄러움과 함께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은 1998년 국내 목회 시절 물질이 없어 연탄가스에 시커멓게 타버린 장판을 얻어다가, 지하 예배당에 깔고, 개척 예배를 드렸고, 2006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국가 중 하나인 필리핀 마닐라 외각 빈민촌인 뿔로에서, 하천 위에 녹슨 양철 슬레이트로 얼기설기 만든 집에 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하였는데요. 우리 교회는 2014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 중 하나인 대한민국 신도시 근린공원 벤치에서, 개척 예배를 드렸습니다. 2015년 선 월세를 주고, 아무 시설도 하지 못하고, 공실을 그대로 예배만 드리는 조건으로 임시처소를 얻었을 때, 쓰다 버린 파라솔 테이블과 의자를 어떤 분이 갔다가 주어서, 강단으로 꾸미고 비품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때의 청아비전교회가 오늘까지 존속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더더욱 감사한 것은 외형적인 부흥은 이루지 못했지만, 여전히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아비전교회가 누구도 꺽을 수 없는 주를 향한 의지를 하나님께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와 함께 한 성도님들에게 하늘의 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주를 향한 의지를 분명히 합시다. 그러면 결단하고 실행하고 헌신할 수 있는 주님의 도움이 있을 줄 확신합니다.
주를 향한 중심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15). 예루살렘교회에서 예수님의 젖동생인 야고보 장로와 다른 장로들을 만난 바울은 그동안 전도 여행에서, 이방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전했고, 거룩한 선교 보고를 들은 이들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16-20.참고/ 마13:54-58;막6:3;요7:3-5;행1:14;갈2:9).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인데 이들은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20). 바울은 들린 도시마다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를 했습니다(행:20,13:5,14,43,14:1,17:1,17,18:19,26,19:8). 그때 마찰 빚었던 자들이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참고/행13:39,15:5,18:13). 예루살렘에도 이러한 자들이 수만 명이 되었고, 이들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며, 이제 그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것을 들으리니, 테러를 당할 수도 있다고, 염려한 것입니다(21-22).
그래서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이 바울에게 한 제안이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이라고 하였습니다(23-24). 바울이 율법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나실인 서원을 한 네 명이 있는데, 이들이 율법에 따라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최소 30일 동안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고, 시체와 같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아야 하며, 이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한 기간이 마쳐지면, 이발하고, 제물과 잘라낸 머리카락을 제단 불에 올려 살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실인과 함께 다른 이스라엘 사람 하나가, 그들이 드리는 제물의 비용을 부담하면 성전에 가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바울에게 그 역할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참고/민19:22). 이에 ‘바울이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였습니다(26).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를 통하여, 바울에 대한 율법주의자들에 비난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바울에게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25). 여기에서 이방인에 편지가 나오는데요. 과거 수리아안디옥교회에 유대로부터 온 어떤 자들이 이방인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행15:1). 이에 수리아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대표로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 보내 정식 답변을 듣도록 했습니다(행15:2). 베드로는 이 안건에 대해 자신도 이방에게 우리와 똑같이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다며,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15:4-9.참고/행10:1,24,34,45-46,11:1-3,15-18,14:27,16:5). 베드로의 답변을 들은 당시 야고보 장로는 이인도 할례와 관계 없이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자고 했습니다(행15:19). 그리고 편지에 이방 지역에서 우상에 제물로 드려진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 등의 교훈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낸 것입니다(행15:20.참고/고전8:1-10).
여기에서 이방인에 편지가 나오는데요. 이 편지는 과거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친 바울과 일행은,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선교를 보고하고, 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떤 자들이 유대로부터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와서 이방인은 예수를 믿어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행15:1). 수리아 안디옥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행11:20-21). 이방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수리아) 안디옥’에 보내었고,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일 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고’ 거룩한 부흥을 이루었으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고,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자,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보내’었고, ‘성령이 이르’심에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행11:22-30,13:2). 이방 교회 중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그동안 완전한 복음을 믿은 것이 아닌가 회의까지 들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자로 바울과 바나바 당시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의 보내 공식적인 답변을 듣도록 하였습니다(행15:2-3).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였습니다(행15:4). 이때 정통파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였습니다(행15:5). 이에 ‘사도와 장로들이 많은 변론’을 하였고, ‘베드로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행15:6-9). 베드로는 예전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방인 로마 부대 백부장 고넬료와 그 집에 복음을 전파했을 때, 성령의 부으심과 방언이 임함을 보았습니다(행10:1,24,34,45-46). 그런데 당시도 예루살렘교회의 할례자들이 베드로가 무할례자와 함께 먹는다고 비난을 했었습니다(행11:1-3). 이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며,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가 임했음을 보고 하였고, 이에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도,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인정을 했습니다(행11:15-18). 그런데 또 다시 율법 문제로 구원을 결부시키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고, 할례자들인 유대인들이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은 자신들도 감당하지 못한,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우려고 한다고 책망한 것입니다(행15:9-11)
당시 베드로의 답변을 들은 ‘야고보’ 장로는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베드로가)이 말하였으니’ 이는 선지자 아모스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 성전을 재건하고, 주를 찾게 될 때, 유대인들의 남은자들 만이 아니라. ‘만국’ 이방인들도, 주를 찾게 하여, ‘기업’ 유대인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예언이 성취라고 하였습니다(행15:13-18.참고/암9:11-12). 그러면서 이번 회의에서 결정된, 이방인도 할례와 관계 없이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자는 것입니다(19:19-21). 그리고 편지에 이방 지역에서 우상에 제물로 드려진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 등의 교훈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낸 것입니다(참고/고전8:1-10). 예루살렘교회는 야고보 장로의 말씀과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결정하고,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대표자를)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으로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기를 결정하’였습니다(행15:22). 그때 야고보 장로가 제안한 편지를 본문에서 야고보 장로와 예루살렘 장로들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지금 바울이 율법의 규례대로 나실인을 위한 비용을 대신 지불하고, 정화 운동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이방 교회가 듣고, “그러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 믿은 이방인도 이전에 행하던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행해도 되는가”라는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전에 이미 편지로 보냈기 때문에 이방 교회에 미칠 영향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바울에게 한 제안은 유대인 중 예수를 믿지만,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갖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실인 비용을 부담한 바울의 행위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요. 그러나 바울도 이전에 나실인 서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겐그레아에서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았더라’고 하였습니다(행18:18). 당시 바울은 1, 2차 전도 여행을 거치면서, 육적 영적으로 소진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자신을 보며, 다시금 서원을 통해 주의 사명을 다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율법에 따라 서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지막까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서원한 것입니다. 율법의 서원을 신앙으로 해석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갖고 일정 기도를 드리고자 했을 때, 작정기도는 율법의 서원과 유사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고수하는 유대인 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서라면, 유대인같이 그리고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어야 한다는 했습니다(고전9:19-20). 바울은 이방 교회에 믿음으로는 불충분하기에 할례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갈5:2-4). 그러나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행하는 할례를 막을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전도를 위해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행16:3). 그러므로 바울의 예루살렘교회의 요청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복음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유대인과 타협했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중심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것이나, 전통에 따라 할례를 행했어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는 마음에 하라는 가르침입니다(롬2:29.참고/신10:16). 할례와 같은 외적 표지가 주를 향한 중심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 발생한 끔찍한 이태원 참사는 ‘핼로윈’Halloween 때문이었습니다. 핼로윈은 우상에 산 사람을 바치는 제의祭儀가 기원입니다. 악령을 부르는 서양 샤머니즘이 어린이집, 초등학교에서는 프로그램으로 정착되고, 성인들은 축제로 열리고 있습니다. 문화콘텐츠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반하는 문화는 수용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반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오지 선교사님이 원주민 의복을 입고, 그들의 절기에 참여한다고 동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님이 토착민의 풍습에 함께 하는 전도의 매개일 뿐이지, 주를 향한 중심은 흔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지역에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진리, 복음, 예수이외의 것은 이웃의 필요와 요청과 협력에 부응해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하였습니다(행23:1). 주를 향한 중심이 분명했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주를 향한 중심을 축복합니다.
주를 향한 일념
바울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제안대로 모든 규례를 마쳤습니다(26-27).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수 만 명의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결박했)’습니다(27). 이전에 바울의 전도 여행에서 방했던 자들입니다(행13:45,14:5,19,17:5,13,18:6,19:23). 이들은 바울이 “우리 민족과 율법과 성전을 적대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방 헬라인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거룩한 성전을 더럽혀 놓았다"고 했습니다(28). 이전에 에베소에서 이방 헬라인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있는 것을 목격했는데,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것을 보고는 사실 관계도 학인하지 않고, 바울이 이방인인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더렵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28-29.참고/겔44:9;행20:4;딤후4:20). 군중들이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에 동조하면서, 바울을 잡아 성전 안뜰에서 계단을 거쳐 바깥뜰로 끌어냈고, 이 소란이 예루살렘 성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안토니아 요새의 책임자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에게 알려졌고, 그는 백부장들과 함께 부대를 소집하고, 급히 현장에 도착하였고, 바울을 폭행하던 유대인들도 그쳤습니다(30-32참고/행23:26). 천부장은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령하고, 군중에게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었지만, 어떤 이는 이런 말로 또 다른 이는 저런 말로 말을 하니, 너무 소란하여 그 진상을 알 수가 없자, 영내로 압송을 했습니다(33-34).
그런데 안토니아 요새 영내로 들어가는 층대 계단에 이를 때, 바울은 무리의 폭행으로 인하여, 군인들에게 들려가게 됩니다(35-36). 이를 본 무리는 바울을 제거하지 못한 분한 마음에 “그를 없이하자” 소리치며 따라 갔습니다(36). 그들의 외침은 27여 년 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빌라도 총독 관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해달라고 요구했던 유대인들의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마27:23;막15:13;눅23:18;요19:13,15). 예수님은 인자가 유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버림을 당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져 능욕하고 죽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9:22,18:31-33.참고/행4:27). 그리고 너희들도 나로 인하여 박해당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눅21:12). 이 예언이 바울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가이사랴 빌립 집사의 집에 온 아가보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10-11). 일행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간곡히 요청했으나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12-13).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바울의 일생을 대변하는 이 말씀은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행20:24). 바울의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오늘 말씀의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다니엘 기도회 셋째 날 강사 최인선 목사님은 시골에서 힘들고 힘들게 목회하던 아버지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도 목사가 되어 삼대 초반에 김천의 한 교회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담임으로 첫 목양지에서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자리를 잡아가려던 때였습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운동하던 집사님 두 분이 음주운전 차량 사고로, 부목사님의 15개월 된 딸이 햄버거병에 걸려 신장이 손상되어, 친구이자 교회를 섬기던 집사님 둘째 아들이 급성 백혈병으로 하나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6개월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성도들의 동요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젊은 목사가 부임해서 교회에 큰 환난만 찾아 왔다. 목사를 내보내자” 그런 말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성도님들이 한 분도 없는 거에요.
더 더욱 놀라운 일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분의 아내는 장례식을 마친 후 주일에 새신자 영접 담당으로 새신자 옆에 앉아 묵묵히 성경과 찬송을 찾아 드리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또 한 분의 아내는 예배 중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목사 놀이를 하던 둘째 아들을 잃은 부부는 장례를 마친 바로 다음 날, 어린이여름성경학교에 와서, 밥과 반찬을 만들면서 섬겼습니다. 이 모든 모습을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가질 수 없다가, 갖게 되었던 예쁘고 예쁜 15개월 된 딸을 주님 품에 보낸 부목사님은 목양실에 찾아와 “제가 이 교회에 교육전도사로 처음 와서, 전임전도사가 되었고,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고, 목사가 되었고, 너무도 소중한 아이를 안을 수 있었고, 이제 천국에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최 목사님은 간증하시면서 “그래도 가야할 길은 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를 이루고 있는 성도님들의 살아 있는 간증입니다. 변하지 않는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우리에게 크나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결론
주를 향한 의지, 주를 향한 중심, 주를 향한 일념으로 나아갈 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는 역사가 오늘 우리 가정과 기업과 교회에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아끼는 이들이 결박과 환난을 당할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두 번이나 만류했을 때, 인간의 의지이었다면, 꺾였겠지만, 주를 향한 의지였기에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주를 향한 의지를 분명하게 하옵소서. 결단하고 실행하고 헌신할 수 있는 주님의 도움을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중 믿는 자 수만 명을 바른 신앙을 위해 율법의 규례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주를 향한 중심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전도를 위해 절대적 진리외에 그들의 필요와 요청과 협력에 부응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것을 감당할 영권과 물권과 인권을 주옵소서. 주를 향한 중심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 주를 향한 일념을 갖게 하옵소서. 모든 잃어도 믿음은 잃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모든 일 위에 주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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