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사도행전 21:37-23:11 2022.11.13. 主日禮拜
“21:37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22:1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6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2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7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22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24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 대 25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27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30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23: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2:37-23:11)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 첫 번째 가르침 주를 향한 의지입니다. 바울은 두로의 제자들과 아가보 선지자와 동료들까지도,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결박하여, 이방인 손에 넘겨줄 것이니, 가질 말 것을 요청했지만, 바울은 ‘어찌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행21:4,10-13.참고/행11:27-30,20:24).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이 만류할 때, 인간의 의지이면 꺾일 수 있지만, 주를 향한 의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근린공원에서 개척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선 월세를 주고 공실을 그대로 예배만 드리는 조건으로 임시처소를 얻었을 때, 쓰다 버린 파라솔 테이블과 의자를 어떤 분이 갔다가 주어서, 강단으로 꾸미고 비품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존속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외형적인 큰 부흥은 이루지 못했지만, 여전히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신 것은, 주를 향한 의지를 하나님께서 주신 줄로 믿습니다. 주를 향한 의지를 분명히 합시다. 결단, 실행, 헌신할 수 있는 주의 도움이 있을 줄 믿습니다.
두 번째 가르침 주를 향한 중심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도착한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으며, 그동안 전도 여행에 하나님의 행하신 크신 일을 보고하였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행21:15-20). 그런데 장로들은 유대인 중 믿는 자 수만 명이 있는데,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로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배교자라고 본다고 하였습니다(행20:20-22.참고/행9:20,13:5,14,39,43,14:1,15:5,17:1,17,18:13,19,26,1
9:8). 그래서 바울이 나실인 서원한 이들의 비용을 부담하여, 율법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행21:22-23,26.참고/신10:16;롬2:29;행16:3;갈5:2-4). 아프리카 오지 선교사님이 원주민 의복을 입고, 그들의 절기에 참여한다고 동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의 매개이지, 주를 향한 중심은 흔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한 영혼이 구원 받는 일이라면, 절대적 진리, 복음, 예수 이외의 것은 필요와 요청과 협력에 부응해야 합니다(참고/행23:1). 흔들리지 않는 주를 향한 중심을 축복합니다.
세 번째 가르침 주를 향한 일념입니다. 아시아로 부터 온 유대인들이 오순절(맥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바울을 발견했습니다. 이전에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있던 헬라인 드로비모가 시내에 있는 것을 보고,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도 들어가 더럽혔다며, 무리를 선동하고 바울을 잡았습니다. 이 소요를 보고 받은 천부장은 현장에 도착하여, 바울을 결박하고, 진상을 알기 위해 영내로 압송했습니다. 무리는 그 자리에서 바울을 없애지 못한 분을 삯이지 못하고, “그를 없이하자” 소리치며 따라갔습니다(행21:26-36.참고/겔44:9;행13:45,14:5,19,17:5,13,18:6,19:23,20:4;딤후4:20). 성난 군중의 외침은 27여 년 전 인근 빌라도 관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하라고 소리쳤던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마27:23;막15:13;눅23:18;요19:13,15). 예수님은 인자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져 능욕하고 죽일 것이며, 너희도 내 이름으로 인하여 박해당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9:22,18:31-33,21:12.참고/행4:27). 이 예언이 바울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예수께 사명을 받고 달려가는 길은 중단할 수 없다”(행21:12-13.참고/행20:24). 그럼에도 주를 향한 일념에 중단은 없습니다. 모든 잃어도 믿음은 잃지 않는 자에게 주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울이 영내로 들어가다
아시아로 부터 온 유대인들은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더럽혔다며, 무리를 선동하였고, 로마 군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현장에 도착하여, 진상 파악을 위해,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고 묻자, 천부장은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며 놀랐습니다(21:37.참고/행21:26-36,23:26). 천부장은 바울이 유대인으로 히브리 말을 하는 줄 알았다가, 당시 로마 제국의 공용어인 헬라어를 구사하자 놀랐던 것입니다.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21:38) 천부장은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바울을 잡아 죽이려하는 것을 보고, 큰 범죄자로 본 것입니다. 당시로부터 약 3년 전, 애굽의 한 모험가가 예루살렘에 나타나, 스스로를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수 많은 추종자들을 감람산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령 한 마디면,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질 것이고, 로마의 수비대를 뚫고, 진격해 그곳을 차지할 수 있다고 선동하였습니다. 이자의 호언장담에 로마로부터 독립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를 같고, 많은 유대인들이 추종하며 소망에 부풀어 올랐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총독 벨릭스에 의해 군대가 패하자, 그는 조용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에 천부장은 바울을 도망간 그 애굽인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변론할 수 있기를) 허락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27:39). 이에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안토니아 요새) (영내로 들어가는) 층대 위에 서서, (아직도 바울을 죽이고자) 모여 있는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27:40).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는 헬라어로 하였지만, 유대 무리에게는 히브리어로 항변한 것입니다.
바울이 변호하다(참고/행9:1-19,26:12-18)
바울은 유대 무리를 향하여,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며 연설을 시작했습니다(22:1). 부형은 “My Brothers and Leaders” “형제들과 선배 여러분”을 뜻합니다. 한 동포로 친숙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바울이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고 하였습니다(22:2). 바울이 이렇게 결박당하기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던 이방에서 헬라어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히브리어로 말하자 의외인 듯 주목했고, 소요에 가세한 예루살렘 군중은 바울이 자신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자, 아마도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을 것입니다. 어떤 허점이라도 찾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체험을 이야기하다
바울은 ‘이어’서 증거한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22:2).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22:3). 바울은 나는 유대 사람으로 시리아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 태생이고, 예루살렘에서 자랐으며, 최고의 덕망과 학식을 겸비한 랍비 가말리엘Rabban GamalielⅠ의 문하생으로서, 누구보다도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고,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같이 하나님께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22;3). “4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22:4-5). 나는 이 ‘도',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여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감옥에 넣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내 말이 사실임을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가 증언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에 성도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22:4-5). 바울이 회심 이전의 신분에 대하여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6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22:6-9). 그런데 길을 가다가 정오쯤 다메섹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둘러 비추었습니다. 너무도 놀라 땅바닥에 엎드러졌는 내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주님,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큰 빛은 보았으나,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습니다(22:6-9). “10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22:10-11). 경이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주님, 어떻게 하라 하십니까?' 하고 말하였더니, 예수님께서 ‘일어나 다메섹으로 가라. 거기에는 네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누가 말해 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 빛의 광채 때문에 눈이 멀어서, 함께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가야만 했습니다(22:10-11).
“12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22:12-16) 다메섹에 도착하니 아나니아Anania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따라 사는 경건한 사람으로, 모든 유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내 곁에 와서, ‘형제 사울이여, 눈을 뜨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에 나의 시력은 회복됐고,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아나니아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셔서, 자기의 뜻을 알게 하시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보게 하시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보고 들은 것을 전파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망설이지 말고,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서, 세례를 받고 죄 씻음을 받으세요(22:12-16). 바울이 주님을 만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이방의 사도가 된 경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의 사도된 경위를 이야기하다
“17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22:17-21) 그 뒤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황홀한 중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둘러서 예루살렘을 떠나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에 관한 네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 내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는 곳마다, 회당에서 잡아 가두고 때리고 하던 사실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증언자인 스데반이 피를 흘리고 죽임을 당할 때, 나도 곁에 서서, 그 일에 찬동하면서, 그를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내겠다’하시며, 이방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22:17-21) .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자
이상과 같이 바울은 유대 무리에게 자신의 원래 신분과 주님을 만난 체험과 이방의 사도가된 경위에 대해서 변호했습니다. 그러면 군중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2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22:22-23)
유대인 무리는 바울의 변명에 더욱 분노를 발하며,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22:22). 바울이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이며,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 어느 유대인보다도 바울이 열심이었다면,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을 따르도록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모두 준수하지 못해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에 분개한 것입니다(참고/롬11:1;빌3:5). 회심 이전과 이후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된 무리는 그의 말을 더 경청하려 하지 않고, 귀를 닫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를 회상한, 본문 22장 18절에 유대인들에게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부르셨을 당시 9장 16절에는 ‘(바울이)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바울)에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 9장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고난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22장의 자신들과 동일시 한 것에 무리는 분노한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이미 예언하셨는데, 그자들이 다름아닌 바로 자신들이라고 하니, 얼마나 화가 치밀어올라겠습니까? 모욕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무리는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었습니다(22:22).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삼하16:13)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마26:65). 성경에 나타나는 옷을 벗고, 티끌을 날리는 행위들은 상대를 저주, 조롱, 정죄할 때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티끌을 날리는 것을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가 티끌을 날리는 것은 본 적이 있습니다. 소하면 고삐에 끌려 쟁기를 메고 논밭을 가는 모습을 떠올리는데요. 소도 일하는 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량소를 위한 품종우도 있고요. 싸움 소도 있습니다. 소 자체가 크지 않습니까? 그런데 싸움 소는 소 가운데도 월등합니다. 해마다 소싸움 대회가 있습니다, 출전한 소 두 마리가 멀리서 바라보다가도 힘겨루기를 하려고, “흐흥" 하고 콧김을 내뿜습니다. 그때 소가 티끌을 날립니다. 앞발로 흙을 몸에 뿌립니다. “내가 이만큼 세다”는 것을 보여주고, 당장에 달려갈 임전 태세를 취함입니다.
무리가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렸다는 것은, 싸움 소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발악을 하듯이 지금 사도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 그 옛날 스데반 집사님을 죽일 때처럼 말이지요(참고/행7:58). 그래서 티끌을 날리며 달려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 장에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나 되었습니다(행23:12-13). 유대 무리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분노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22:18)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는데요. 이 예언과 같이 지금 바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에 유대 무가 분노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자신의 정체가 들켰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음성을 듣고,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라고 여쭈었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라는 말씀에,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다메섹에 간 바울은 ‘아나니아’로부터, ‘네가 (예수)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는 말을 들었고,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주께서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22:6-21). 바울은 자신을 존재를 알고 있는 주님의 명령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유대 무리는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었습니다(22:22-23).
우리들은 예수님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숨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우리의 약점을 잡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부름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행9:15).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부르신 것은 우리 각 각에게 주신 은사와 복을 따라, 가장 귀한 그릇으로 만들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계획을 모르는 자는 유대 무리와 같이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벌거벗음에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과 같이 ‘진리를 대적하(고)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되어서는 안됩니다(딤후3:8). 우리는 나를 알고 계신 주님의 뜻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울같이 주님의 인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향하신 주님의 계획대로 나를 가장 귀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말씀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
사도 바울의 변명을 들은 유대 무리의 분노로 큰 혼란이 일 자, 이를 막기 위해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바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고 하였습니다(22:24). 로마 병사들이 채찍질을 하려고 ‘가죽 줄로 바울을 매’자,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22:25). 당시 로마 시민은 정당한 재판 없이 형벌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피식민지인 유대인으로 공영어인 헬라어를 구사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그가 로마 시민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였습니다. 이에 놀란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임을 고 하였습니다(22:26). 백부장의 보고를 받은 ‘천부장이 (화급히 찾아)와서 바울에게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바울이)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22:27). ‘천부장이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나는 나면서부터라’(22:28). 로마 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은 신분 상승에 큰 도움이 되었기에 권력자들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시민권을 사서, 신분 세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천부장도 그와 같은 케이스이었는데요.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다고 하니,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바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였습니다(22:29).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게 된 천부장은 신중하게 사건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22:30) 이스라엘의 최고 읜결 기관인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를 열어 바울의 유무죄를 정확하게 알고자 한 것입니다. 먼저 바울에게 발언을 하도록 하고, 공회 반론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23:1). 바울은 공회원들을 주목하고, 나의 형제들로 부르면서, 나는 이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하였습니다. 나도 당신들과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일성에 공회의 대표인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였습니다(23:2). 대제사장들은 27년 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신성모독이라며 정죄하였었습니다(마26:63-65). 그들은 이제 바울의 ‘하나님 앞에서 바른 양심을 갖고 살았왔다’고 하자, 이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긴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참고/출20:7). 이에 ‘바울이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용어와 유사한 표현) (안에는 다 허물어 졌으나 겉에만) 회칠한 담(같이) (성하게 보이는 자들)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고 비난하였습니다(23:3.참고/겔13:10-16;마23:27).
본문에 등장하는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AD47년에 칼키스의 헤롯헤롯 아그립바 1세의 동생에게 대제사장직을 받았으며, 그 직을 12년 정도 유지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오만하고, 혈기 방자하고, 속되며, 탐욕스러웠다고 합니다. 특히 일반 제사장으로부터 십분의 일 세를 받아 개인 재산으로 착복을 하였으며, 로마 고관들에게는 아낌없이 뇌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그의 친親로마주의적인 술수에 유대인 국수주의자들이 그의 집을 불태웠으며, 결국은 그가 헤롯 대왕의 궁전 뜰에 있는 도수관導水管 속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율법도 우리 법같이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피고가 유죄로 판명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가정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제 변론을 시작하려는 상황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폭력을 조장하는 것은 불법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회 재판관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나니아에게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고 반박한 것입니다(23:3). 이러한 바울의 발언에 ‘곁에 선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고 하자, ‘바울이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4-5).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지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율법에 백성의 관원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했는데요(참고/출22:28). 이것은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을 율법의 교도에 따라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을 관리, 상관으로 존중하고 있으니, 당신도 나를 율법의 교도에 따라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대제사장 격에 맞는 것이지, 범죄가 입증되지도 않았는데 치라는 명은 감정적인 것이지 합법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부당하게 처신한 대제사장이라도 말씀을 따라 존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을 살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은 바른 처사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말씀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입니다.
양춘길 목사님은 미주의 대표적인 한인교회로 2천 여 명이 출석하는 필그림선교교회Pilgrim Mission Church를 담임자이십니다. 이 교회는 2017년 12월 소속 총회인 미국장로교PCUSA을 탈퇴했습니다. 그 사유는 이 교단이 동성애 옹호 정책을 시행, 동성애자 결혼과 목사 안수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양 목사님은 말씀의 기준을 분명히 전했습니다. “동성애자는 치유받아야 할 영혼이다. 그러나 동성애는 성경에서 죄이다. 수용할 수 없다” 이러한 양 목사님의 견해는 저와도 일치합니다. 제가 그동안 수차례 강단에서 그와 같은 메시지를 여러분에게 나누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총회는 즉각 세상법에 소송 탈퇴 시 예배당 건물과 은행 계좌, 심지어 원래 교회 이름인 필그림교회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맞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도 재산권을 위해 소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 목사님은 “세상 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말씀을 따랐습니다(고전6:1-11). 동성애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이기 따르지 않고, 교회 재산은 지키기 위해 성경에 반하게 소송한다면 이율배반이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안건에 대한 공동의회 결과 교인 98%가 모든 소유를 놓고, 탈퇴하는데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예배당 건물만 미화 12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30억원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말씀에 따른 결정으로 광야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인근 학교와 다른 교회 장소를 빌려 예배드리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의 예배당보다 더 좋은 공간에 마련된 예배당을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양 목사님은 “인본주의 물결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 창조질서와 성경의 권위를 진리로 지키는 사명을 반드시 붙들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간증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양 목사님은 예배당을 포기하고 떠나라는 총회의 소송에 같이 불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총회가 성경에 위배된 불의를 행했지만 존중했습니다. 존중과 인정은 다른 것입니다. 총회의 결정은 인정하지 않지만, 총회를 존중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양 목사님과 필그림선교교회 성도들은 우리 교회는 말씀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리고 총회를 향하여 너희들도 우리를 보고, 불의에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입니다.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데 우선하는 것입니다. 그 총회와 같이 자신들은 성경의 죄를 용납하고, 성경을 따르는 교회를 세상법으로 처리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을 율법으로도 맞지 않는 자신을 치라 명한 대제사장을, 나는 율법에 명시한 것처럼, 당신을 비방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통해 찾은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순종하는 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혜안을 주셨습니다. 어떤 영적 시야를 갖게 하셨습니까?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23:6).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종파들 가운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리새파’Pharisees은 율법 연구와 준수에 철저하여, 금식이나 레위기의 정결 의식을 엄격히 지키켰고, 구전 율법이라 할 수 있는 조상의 유전인 장로들의 전통을 중시했으며, 레위기식 규범을 적용 세속과 분리를 통해 정결과 정화를 이루고자 했고,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었고,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자신들이 참되고 경건한 이스라엘인으로서 하나님과 각별한 관계가 있고, 장차 다윗의 후손인 기름 부음 받은 주의 힘으로 다윗 왕국의 영광이 재현될 것으로 확신했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는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높임을 받을 것을 믿었습니다(참고/시17:13-18:50;마7:3-8,9:10,14,12:2,5-6,23:2-7;행23:6,8;빌3:5;갈1:14). 바리새파의 엄격한 율법 준수와 신앙적 모범으로 유대인들에게 큰 신망과 존경을 받았으며, 회당 조직을 통해 전 유대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당대 종파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상, 전성기 때는 예루살렘 인구 2만 5천에서 3만 명 가운데 약 6천 명의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Josephus).
그러나 ‘사두개파’Sadducees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로마 정부에 비판적이며,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바리새파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는데요. 이들은 성문화成文化된 율법모세 오경만 받아들이고, 구전인 장로의 전승은 거부했습니다. 또 부활이나 천사, 영생, 영혼의 존재는 믿지 않았습니다(막12:18;눅20:27;행23:8). 그러나 납세 등 현실 문제에는 관대하여 ‘물질주의자’ 혹은 ‘현실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마3:7-8,16:6-12).
이렇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같은 율법을 갖고도, 교리가 다른 것을 사도 바울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공회에서 외쳐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23:6). 바울은 자신은 바리새인이라고 하면서, 바리새파의 교리를 증거했습니다(23:6). 이러한 논거에 바리새파는 동의했으나, 사도개파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23:7). 공회에 모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서로 의견 충돌로 패가 나뉘게 된 것입니다(23:7).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23:8). 두 종파의 교리로 갈라지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23:9). 심지어 바리새파 편에 있던 율법학자인 서기관 몇 명이 “우리는 바울에게서 조금도 잘못을 없다”며, “만일 영이나 천사가, 바울에게 말하여 주었으면 어찌하느냐”면서, 그의 증거가 하나님이 보낸 천사의 말, 즉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다며, 바울을 옹호하는 것입니다(23:9). 서기관의 견해에 긍정하는 바리새파와 부정하는 사두개파 사이에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23:10).
예전에 에베소에서 바울의 복음 전도로 아데미 신전에 사람들이 발길 끊자, 생계에 위협을 받은 우상 물품을 납품하던 데메드리오가, 직공들과 동업 종사자들을 규합 시내에 소요를 일으키고, 바울의 동역자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연극장에 모였지만, 무리가 분란하여 절반 이상이 왜 모였는지 알지 못하게 되자, 서기장이 개입하여 범법하지 않은 사람을 잡아들이는 것은 불법이라며, 모임을 흩어버리지 않았습니까?(참고/행19:23-41). 본문에서도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자중지란으로 공회가 해산되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대립을 간파하는 혜안을 주셔서, 그들 스스로 붕괴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23:11). 바울의 최종 목적지는 로마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죽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 결박 된 것은, 로마 시민인 바울이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도록하여,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바울의 전도 여행을 완성하시고자 하는 주님 섭리에 기인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고별 담화에서 나눈 말씀입니다.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3). 예루살렘에 오기 전 두로의 ‘제자들이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가이사랴에서는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바울의 일행과 가이사랴의 동역자들이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였습니다(행21:4,11,12). 이에 ‘바울이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행21:13). 지난 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져 능욕하고 죽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9:22,18:31-33.참고/행4:27). 그리고 너희들도 나로 인하여 박해당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9:22,18:31-33,21:12). 이 예언대로 바울이 주님의 고난의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바울을 로마로 가게 하신데 왜 죄수의 신분으로 결박을 당해 가게 하셨을까요?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을 해 보면, 조용할 때 듣지 않고, 평안할 때 듣지 않고, 여유있을 때 듣지 않고, 그래서 끌려서 교회에 오게 되신 분들 많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최종은 로마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 무리의 폭행과 산헤드린 공회에서 하나님이 건져 내신 것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기 위해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최종 목적지인 로마로 가기 위해 지금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골1:24). 주님의 고난에 자신이 채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의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다니엘 기도회 9일째 강사 김마라나타 선교사님은 자신의 걸어온 선교의 발자취를 전하면서, 종전 1년밖에 되지 않는 이라크에 선교를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 때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7:4). 이 말씀은 선뜩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다고 해야 맞기 때문입니다. “18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3:18-20).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그러므로 김 선교사님은 세상이 보기는 어리석은 자 같이 보이지만, 초상집이된 이라크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1년밖에 안 된 그 땅에서, 얼마나 고난이 많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지혜자로 세워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생업과 교회를 돌아볼 때, 세상에서 매력으로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초상집 같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고난이라도,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며, 주님의 고난의 순종하는 자는 지혜자 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보존하는 이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최종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마지막도 승리하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기를 원하고, 그 길이 고난이라도, 주님의 고난임을 믿고, 순종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리
바울이 변호하다(참고/행9:1-19,26:12-18)
안토니나 요새Antonia Fortress 층계 위에 선 바울은 부형My Brothers and Leaders, 나의 형제들과 선배들아 내 말을 들으라며 변호를 시작했습니다(22:1). 무리는 그가 히브리어로 말함을 조용히 듣고, 어떤 허점이라도 찾으려 했습니다(22:2).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당대 최고 랍비 가말리엘Rabban GamalielⅠ의 문화생으로 율법에 정통했고,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열성적인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22:3). ‘도’ 예수 믿는 자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박해하고 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하였고, 공회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 성도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처벌하려 했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증인이라며, 회심 이전의 신분에 대해서 먼저 밝혔습니다(22:4-5).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늘로부터 큰 빛이 자신을 둘러 비추었고, 너무도 놀라 땅바닥에 엎드러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에 ‘주님, 누구십니까?’는 질문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이다’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22:6-9). 주님은 바울에 다메섹으로 가면 네가 할 일을 누가 말해줄 것이라 하셨고, 그곳에서 만난 아나니아Ananias로부터, 이제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보고 들은 것을 전파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그 뒤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예수님께서 ‘서둘러서 예루살렘을 떠나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에 관한 네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내겠다’하시며, 이방의 사도가 된 경위를 설명했습니다(22:10-21).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자
바울의 변호에 무리는 분노하며,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22:22). 그렇게 율법에 열성적인 자라면, 이방인들을 유대인 같이 율법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하는데,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에 화가 치솟은 것입니다(참고/롬11:1;빌3:5). 그들은 더 이상 바울의 말을 더 경청하려 하지 않았고,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었습니다(22:22.참고/삼하16:13;마26:65;행7:58). 상대를 저주하거나 조롱하거나 정죄할 때 행위입니다. 다음 장에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나 되었습니다(행23:12-13). 유대인들이 분노가 이렇게 하늘을 찌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주께서 내게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22:18). 이 예언과 같이 지금 바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음성을 듣고,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라고 여쭈었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라는 말씀에,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다메섹에 간 바울은 ‘아나니아’로부터, ‘네가 (예수)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는 말을 들었고,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 ‘주께서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는 명령을 받고 따랐습니다(22:6-21). 그러나 무리는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었습니다(22:22-23).
우리들은 예수님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숨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우리의 약점을 잡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부름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행9:15).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부르신 것은, 우리 각 각에게 주신 은사와 복을 따라, 가장 귀한 그릇으로 만들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계획을 모르는 자는, 유대 무리와 같이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벌거벗음에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과 같이 ‘진리를 대적하(고)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되어서는 안됩니다(딤후3:8). 우리는 나를 알고 계신 주님의 뜻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울같이 주님의 인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향하신 주님의 계획대로 나를 가장 귀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말씀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
사도 바울의 변명을 들은 무리의 분노로 큰 혼란이 일 자,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 채찍질로 심문하여, 어떤 일인지를 알고자 했습니다(22:24). 바울은 집행을 담당하는 ‘백부장더러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묻자, 당황한 백부장은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22:25-26). 놀란 천부장이 화급히 바울에게로와 그것이 맞는지 확인한 후,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고하자, ‘바울이 나는 나면서부터라’답했고, 결박한 책임을 받게되지 않을까 모두가 두려워하였습니다(22:27-29).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게 된 천부장은 신중하게 사건을 처리해야 했기에 ‘이튿날’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를 열어 유무죄를 알고자, 먼저 바울에게 발언을 하도록 하고, 공회의 반론을 듣고자 하였습니다(22:30).
바울은 공회원들을 주목하고, 나의 형제들로 부르면서, 자신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하였습니다(23:1). 바울의 일성에 공회 대표인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 명하’였습니다(23:2.참고/출20:7;마26:63-65). 이에 바울은 율법은 유죄로 판명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가르치고 있는데, 변론을 시작하려는 상황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폭력을 조장하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며, 재판관으로서 자격이 없고, ‘하나님이 (아나니아)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고 항변하였습니다(23:3.참고/겔13:10-16;마23:27). 그러면서도 바울은 율법에 백성의 관원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참고/출22:28). 자신을 치라 한 대제사장을 율법의 교도에 따라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을 관리 상관으로 존중하고 있으니, 당신도 나를 율법의 교도에 따라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부당하게 처신한 대제사장이라도 말씀을 따라 존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을 살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바른 처사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말씀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입니다.
양춘길 목사님은 미주의 대표적 한인교회인 필그림선교교회Pilgrim Mission Church 담임자입니다. 이 교회는 2017년 12월 소속 총회인 미국장로교PCUSA을 탈퇴했습니다. 그 사유는 이 교단이 동성애 옹호 정책을 시행, 동성애자 결혼과 목사 안수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총회가 세상 법정에 소송 탈퇴 시 예배당 건물과 은행 계좌, 교회 이름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맞대응을 위해서는 교회도 소송을 통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양 목사님은 “세상 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말씀을 따랐습니다(고전6:1-11). 이 안건에 대해 공동의회에서 교인 98%가 찬성을 했습니다. 예배당 건물만 미화 12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30억원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의 예배당보다 더 좋은 공간에 마련된 예배당을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양 목사님은 총회가 성경에 어긋난 불의를 행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존중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양 목사님과 필그림선교교회 성도들이 말씀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고, 총회 너희도 불의에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순종하는 자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혜안을 주셨습니다. 공회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23:6). ‘바리새파’Pharisees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를 표방하면서도, 조상의 유전인 장로들의 전통을 중시했으며,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인정했고, 회당을 조직 유대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참고/시17:13-18:50;마7:3-8,9:10,14,12:2,5-6,23:2-7;행23:6,8;빌3:5;갈1:14). 반면 ’사두개파’Sadducees는 바리새파와 달리 장로의 전통을 거부했고, 부활이나 천사, 영생, 영혼의 존재는 믿지 않았습니다(참고/막12:18;눅20:27;행23:8). 이렇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교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을 간파한 바울은 자신은 바리새인이라고 하면서, 그 교파의 교리를 증거했습니다(23:6,8). 당연히 바리새파는 동의했으나, 사도개파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공회에서 두 파가 의견 충돌로 갈리었습니다(23:7). 바리새파 편에 있던 서기관들은 “우리는 그에게서 조금도 잘못을 없다”며, “만일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여 주었으면 어찌하느냐”면서, 바울의 증거가 하나님이 보낸 천사의 말, 즉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다며, 바울을 옹호하였습니다(23:9).이로 인해 양쪽이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23:10). 바리새파와 사두개인들의 자중지란으로 공회가 해산되어 버린 것입니다(참고/행19:23-41).
이것은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하신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23:11). 바울의 최종 목적지는 로마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죽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 결박 된 것은, 로마 시민인 바울이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도록하여,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바울의 전도 여행을 완성하시고자 하는 주님 섭리에 기인합니다. 오늘 말씀의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고별 담화에서도, 두로의 제자들과 아가보 선지자와 가이사랴의 동역자들과 바울의 일행까지도,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했을 때, ‘바울이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행21:13.참고/행20:22-23,21:4,11,12). 주님의 예언대로 바울이 주님의 고난의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참고/눅9:22,18:31-33,21:12;행4:27). 예루살렘에서 유대 무리의 폭행과 산헤드린 공회에서 하나님이 건져 내신 것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기 위해 살리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최종 목적지인 로마로 가기 위해 지금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자신이 채운다고 하였습니다(골1:24).
김마라나타 선교사님은 지난 발자취 가운데 종전 1년밖에 되지 않는 이라크에 선교를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전7:4). 인간의 이성으로는 반대가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고전3:19),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하셨습니다(고전1:21). 우리의 가정과 생업과 교회를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초상집 같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고난이라도,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며, 주님의 고난의 순종하는 자는 지혜자 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보존하는 이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최종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마지막도 승리하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기를 원하고, 그 길이 고난이라도, 주님의 고난임을 믿고, 순종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우리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고난 가운데 위로가 얼마나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의 위로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연약합니다. 위로해 주던 사람도 지칠 수 있고, 원치 않게 변할 수 있고,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고난 가운데 찾아오시는 주님의 위로는 처음 그대로입니다. 달라지지 않습니다. 계속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1:5.참고/벧전4:13).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고난에 순종할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은혜와 복과 위로는 넘칠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한 해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볼 때, 다사다난한 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고난에 순종하여, 지금, 이 예배자리에까지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공동체 가족들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복과 위로가 넘칠 것입니다. 모두 받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복을 따라, 좋은 그릇으로 만들어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손길을 내밀 때 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가장 귀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우리에게 부당하게 하는 자에게 세상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말씀을 따르는 우리를 보고 너희도 불의에서 돌아오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게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목적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정, 기업, 교회가 고난이라도, 주님의 고난을 내게 채우는 것을 믿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복과 위로를 넘치게 받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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