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을 이기리라
하나님말씀 : 고린도전 15:54-58
1. 다음 ‘사망의 왕 노릇’하게 된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롬5:14).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 대하여 ‘사망이 왕 노릇’이란 원래 왕이 아닌데 왕처럼 행세한다는 것입니다(롬5:14). ‘아담의 범죄’로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고 합니다(롬5:14). 에덴의 모든 것은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금기禁忌를 깨트렸습니다. 그 죄로 사망이 왕 노릇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간을 지배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기는 고사하고 본적도 없는데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아담이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는 아버지가 양반이면 아들이 양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관비이면 아들이 아무리 유능하고 공부를 잘해도 관비입니다. 그와 같이 아담이 범죄는 아담을 조상으로 둔 모든 인간이 죄인이요. 숙명입니다. 만약 죄인이 아니라면 죽지 않으면 됩니다. 죄의 삯이 사망인 것입니다(롬6:23). 어느 인간도 사망의 왕 노릇을 피할 수 없습니다.
2. 다음 ‘만왕의 왕 예수님’에 대한 글을 읽고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참고/계17:14).
인간의 왕은 사망이 아닙니다.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계17:14). 우리의 왕은 어린양 예수님입니다(참고/요1:29).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신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사망을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죄가 용서됩니다.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예수님은 죽임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은 죄인만 가는 곳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고기 배속에 있던 요나가 삼일 후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로 토해냈듯이,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욘2:10). 사망권세를 패퇴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용서 받습니다.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입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죽음을 세상 사람들처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사망의 왕 노릇 죽음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은 ‘사망아 네가 성도들 지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고전15:55). 이제 사망이 왕 노릇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사망이 공격할 대상은 죄인데 성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가 용서받았기에 죽음이 우리를 쏠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전15:56).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사망이 왕 노릇 아니라,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누구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세요. 이 승리가 어떤 것입니까? 바로 죽음을 이기고 사망의 왕 노릇을 커트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3. 다음 ‘부활의 믿지 못하는 자에 대한 경종’에 대한 글을 읽고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부활을 믿지 못하면 믿음이 헛되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다고 하였습니다(고전15:17).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압니다.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 갈림길은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나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서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도마에게 재차 나타나는 예수님은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요20:27). 그러므로 지금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헛된 믿음이 아니라, 믿는 믿음으로 사망을 삼키고 이기는 승리하는 믿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종국이 망亡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는 예수 믿고 죽은 성도들입니다(고전15:17). 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땅에서 믿음 생활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망하였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8). 예수 믿고 죽은 성도들은 반드시 부활한다는 역설이며, 지금 예수 믿는 성도들은 부활을 부인하여, 멸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영생을 얻는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망亡하는 자들이 아니라 생生,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 이 육체의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으로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부활체로 사망을 삼키고 이기기를 축복합니다(고전15:54). 부활을 믿지 않으면 그 종국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음으로 영생을 이미 얻은 줄 확신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가장 불쌍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나, 그 가치와 정신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고 한다면, 즉 십자가와 부활 등과 같이 영적인 것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예수 믿고 있지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면,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15:19.참고/요일2:16). 구원받은 인생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신33:9).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행복자가 되어야지, 예배당에 발을 들이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의 가치와 정신에 빼앗겨서는 불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정신과 가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죄 사함과 죽음을 이긴 영원한 정신과 가치가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4. 다음 ‘죽음을 문제를 해결해줄 자’에 대한 글을 읽고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구약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를 인용한 것입니다(사25:8). 이사야 선지자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자를 찾습니다.
‘범신론’汎心論,Pantheism,만유신교(萬有神敎),다신교(多神敎)는 세상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합니다. 인도 계열의 힌두교나 불교가 대표적인 데요. 세상을 벗어나 저 밖에 큰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종교는 자력 구원론으로 고행 등으로 노력을 해서 자기를 구원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신론’理神論,Deism은 거꾸로 신의 초월은 강조하나, 신의 내재, 즉 신이 인간을 구원하러 인간에게로 와야 한다는 측면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신론입니다. 이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알라가 하늘 저 꼭대기에 고고히 앉아 있기에 메카를 순례하고, 금욕을 하며, 라마단 금식을 하고,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냥을 주어서 적선을 많이 하고, 거룩한 전쟁에 가서 전사해야, 알라에게 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또한 자력 구원론입니다. 자력 구원론 좋은 말 같지만 인간의 절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당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구원을 스스로가 얻을 수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자가당착自家撞着입니다.
그러므로 타력 구원이어야 합니다. 자기 죄를 대신 감당해야 할 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처럼 자신이 고행으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슬람처럼 신이 하늘 위에만 있기에 자신이 선행으로 그 신에게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늘에 오를 수 없기에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 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화로운 몸을 입고, 천국에 입성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5.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타 종교에 비해 개신교는 굉장히 독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선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① 신앙을 논할 때 도덕이 앞서서면 안 되고, 성도를 논할 때 인격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② 신앙을 지칭할 때 진리가 우선되어야 하고, 성도를 지칭할 때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③ 신앙이 도덕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는 인격을 배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④ 도덕이 구원을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인격이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의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⑤ 신앙의 진리에는 도덕이 따르고, 성도의 믿음에는 인격이 따르는 것이지, 도덕과 인격이 진리와 믿음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종교가 어떤 진리를 따르고 있느냐, 그 신도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가 ‘퍼스트’First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순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따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행4:12).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하나만 열어 놓으셨습니다. 참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절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영접하고,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승리 사망이 쏘’는 공격을 무찌르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5:55-57). 우리는 천국에 입성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몸을 입고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였습니다(고전15:20).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보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처럼 죽지 않고 부활한다는 보증입니다. 아멘!
6. 다음 글을 읽고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세 가지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의 높은 장벽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붙들고, 범람하는 패악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넉넉하지 않은 가운데 헌신을 쌓으며, 수많은 유혹 가운데도 오직 예수 신앙정절을 드리며,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히12:12)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1). 부활하신 예수님같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영화로움을 입고, 살아갈 저 영원한 나라에 약속된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을 확신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며, 우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아는 부활 신앙인 줄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사람은 탄생과 죽음이 카운트다운입니다. 그렇기 아이들도 건강을 지키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원해 사망이 왕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을 대속하신 어린양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사망이 승리 사람이 쏠 수 가 없습니다. 이 확신할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헛된 믿음이 아니라, 부활을 믿음으로 반드시 영원한 나라에서, 이 육체의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으로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부활체로 사망을 삼키고 이기기는 믿음으로 갖게 하옵소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부활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는 확신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살아있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가장 불쌍한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십자가, 부활, 영생, 재림, 천국의 영원한 가치와 정신을 지향하는 날마다 행복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며,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아는 부활의 신앙으로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몸으로 천국에 입성하는 날까지 정진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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