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와 권능
하나님말씀 : 마가복음 6:1-6
1. 다음 ‘과거의 목수와 현재의 권능’의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지도했거나,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평가절하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 사람 다 아는데”라면서, 그에게 점수를 후히 주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은 예수님도 당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가 일찍 죽자 ‘목수’木手,Carpenter일로 가장 역할을 하였습니다(막6:3.참고/마13:55;눅3:23). 예수님이 공생애를 위해 가정을 떠난지 오랜만에 제자들을 대동하고 나사렛을 방문했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다른 동네에서와 마찬가지로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막6:2).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에 놀아워하였습니다다(막6:2.참고/마7:28-29). 한 인간에게서가 아닌, 하늘의 신적 권위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전에 목수였지 않은가?”, “그의 모친과 동생들은 지금도 우리와 한 동네에 살고 있지 않은가?”라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막6:3).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도敎導에서 지금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의 행적行蹟에서 과거 목수를 보고 배척했습니다. 권능을 보고 영접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2. 다음 ‘나는 메시아이다’의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눅4:17-19.참고/사61:1). 그리고 “내가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다.”, “내가 너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다.”는 것을 선포했지만, 나사렛 동네 사람들에게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여기면서도,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 여전히 ‘요셉의 아들’로 보일 뿐이었습니다(눅4:20-22).
예수님은 그들의 심중을 꿰뚫고 당시 속담에 “네가 의사냐 그렇게 잘 고쳐 그러면 네 병도 고쳐봐”라는 비아냥거림이 있는데, 이를 가지고 “네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들었는데, 거기서 많은 사람들 고쳤다며, 여기 고향에서도 그 일을 한번 해 보아라!”. 나사렛의 조롱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눅4:23-24).
유대인들의 배척은 지금만 아니라, 엘리야와 엘리사 때에도 있었다며 두 가지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눅4:25-27). 당시 북이스라엘은 바알 우상이 장악한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알 숭배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과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때 3년 6개월 동안 심한 가뭄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회적 약자인 과부들은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과부가 아닌 이방 시돈 지방의 사렙다 과부에게 보내셨습니다. 또 엘리사에게는 이스라엘의 많은 나병 환자가 아니라 이방 아람 왕의 군대장관 이방인 나아만에게 보내어 치유함을 얻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바알과 아스다롯을 심각하게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이방인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나사렛 동네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있음을 깨우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 기준으로 판단함으로써,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선지자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눅4:28).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예수님을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눅4:29).
예수님의 교도에서 지금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의 행적에서 과거 목수를 보았던 데에서, 출발한 것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목수로 보고 배척했습니다. 권능을 보고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면, 이렇게 악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왜 복음에 관해서, 교회에 대해서, 신앙에 관해서 거부합니까? 바로 이 이유 때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했다고 중단된 분들 가운데는 “나도 다녀보아서 알라”하면서, 오히려 더 완악해지고, 교회를 경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3. 다음 글을 보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 자택이 타워형 아파트입니다. 승용차는 벤츠 중에도 가장 큰 사이즈입니다. 저는 그러한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기준의 차이가 있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 그렇게 살고 탈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보여집니다. 그 교회가 위치한 동네가 빈촌이지만, 그럼에도 성도님들이 목사님을 위해 그렇게 섬겨 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외적으로는 그렇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검소한 것이고 비판적으로 보면 빈한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 말한 그 목사님의 부유함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하는 분은 저와 같이 궁핍한 목회자는 존경할까요? 그런 분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 않은 예도 있습니다. 목회자가 부유하면 부유하다고 비판하고, 목회자가 궁핍하면 “지금까지 뭐했기에 그렇게 살까”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부유하다 궁핍하다가 아니라, 목회자 부유하면 “부유한 목사의 말을 들을 것 없다.”고 듣지 않고요. 목회자가 궁핍하면 “궁핍한 목사의 말을 들을 것 없다”라며 듣지 않고요. 이렇게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은 시대가, 오늘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을 과거 목수로 보고, 그 분에게서 전해지는 권능을 배척한 나사렛 동네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4.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예배당 뒤 공간에, 조그마한 저의 사무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온난방이 되지 않아서요. 여름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덥고, 겨울에는 한기에 사시나무 떨듯이 몸이 떨립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가끔 들리던 카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찬양이 틀어진 적이 없어요. 그분은 진보 성향의 교회를 출석하신 분들이세요. 그곳은 일반적으로 믿음을 보이고, 성별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믿음 가치보다. 한 인간으로서 모습을 진지하게 보이는 인성 가치를 중시해요. 그러다 보니 카페도 일반 대중음악을 들려주는 것이지요. 그것은 정죄할 일은 아닙니다. 그분들의 신앙은 그런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근무하는 직장이 사업장에서, 혹은 이웃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수 믿는 것을 보이고 계세요. `주변 분들이 여러분을 볼 때 “아 저분은 크리스천이야!”라고 인정을 받고 계세요.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도를 성도로 보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성도님들도 굳이 나서서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밝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로서 해야 할 신앙적 행위를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권능을 보이지 않았다면 동네 사람들이 겸손하게 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나 목수 출신이 그렇지 하고 얕잡아 보았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와 같이,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거부와 배척의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 다음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된다’의 글을 읽고 의견을 나누시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고 말씀합니다(막6:5). 예수님을 과거 목수로 보고 권능을 보고도, 배척한 나사렛은 구원을 상실하고, 주님으로부터 큰 권능,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결국 모든 불행은 자신들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나사렛을 이상이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막6:6). 이 말씀은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되는 것임을 알게 해 줍니다(막6:6). 우리는 나사렛 사람들과 같이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된 데에는, 예수님을 누구로 보았기 때문이라고요. 목수입니다. 즉 사람으로만 본 것입니다. 이것이 원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고, 성도를 성도로 보지 못하는 시대라고 하였는데요. 세상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목사와 성도가 아니라, 혹 교회 안에서도 목사를 목사로 또는 성도를 성도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인지, 우리는 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부유하건 궁핍하건 사람이 아니라, 증거되는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것을 정립하지 않으면, 그 성도는 어느 목사님이 증거하는 말씀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사람으로만 보이고, 말씀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조차도,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자세를 알게 하지 않습니까?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배척한 것입니다. 즉 목사님이 증거하는 말씀이 진리이면, 우리는 아멘해야 합니다. 그 외의 것은 하나님이 평가하시고, 결정하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도님을 통해서도, 사람을 보지 말고, 성도님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으로 본다면 나 보다 잘난 성도가 하나도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한 주님을 섬기는 지체로 그 많은 교회 가운데, 한 교회를 섬기는 것에 사랑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를 통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의 신앙에 적용해야 할 목사와 성도의 관계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고, 성도를 성도로 보지 않은 시대에서도, 청아비전교회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서 힘을 얻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사를 목사로 성도를 성도로 봅시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를 목사로 보는 자에게 목사를 통해 전해지는 진리가 나를 온전하게 할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자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엡4:12). 성도를 성도로 보는 자에게 성도를 통해 전해지는 섬김이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2:26).
7. 다음 글을 읽고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오늘 말씀에서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도敎導에서 지금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의 행적行蹟에서, 과거 목수를 보았던 데에서, 출발한 것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목수로 보고 배척했습니다. 권능을 보고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면, 이렇게 악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왜 복음에 관해서, 교회에 대해서, 신앙에 관해서 경멸합니까? 바로 이 이유 때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배척한 나사렛 ‘가운데로 지나가셨다’고 했습니다(눅4:30). 나사렛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상이 이와 같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지나치는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와 같이 목사를 목사로 보는 자에게, 목사를 통해 전해지는 진리가 온전케 될 것입니다. 성도를 성도로 보는 자에게 성도를 통해 전해지는 섬김이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교회에 주신 이 복을 모두가 받기를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께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보좌에 기도를 쌓을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기 기뻐하시는 찬양을 올릴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아직도 예수를 배척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도 나사렛은 목수로 보았습니다. 주님이 지나치는 동네가 되었습니다. 이를 적용할 때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는 시대, 우리는 그 목회자가 부유하건 궁핍하건 그 사람이 아니라 증거되는 진리를 보게 하옵소서.
성도를 성도를 보지 않는 시대, 우리는 성도를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고 한 교회 공동체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예수님이 보낸 자를 영접하면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자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인도하고 영접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모든 것을 얻은 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나의 권능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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