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계보에서 생명책으로
하나님말씀 : 창세기 5:1-32
1. 다음 ‘계보와 생명책’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창세기 5에는 4장에서 가인과 그 후손들의 세상적인 성공을 장황하게 기록한 것과 달리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가인이 장자인데도 말입니다. 반면 4장에서 짧게 언급되어 있는 셋, 아담과 그의 아들 셋을 통해 내려오는 후손들만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속의 문화’, ‘세상의 성공’이 아닌, ‘예배의 문화’, ‘신앙의 승리’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가인의 후손 야발을 통해 성별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축은 자라면 잡아 피를 흘려야 목적을 이룹니다. 인간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가축을 잡아 피를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야발은 조상 가인과 같이 자신을 위해서는 짐승을 잡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룩한 제사의 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부유한 자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인색한 자였습니다(참고/눅12:20). 우리는 성별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헌금이 아닙니다. 성경은 ‘십일조와 봉헌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말3:8).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말3:9.참고/창14:20,28:22;레27:30-33;민18:21-24;신12:5-18,14:23:27-29,26:12-15).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그중의 십 분의 일을 드리면 모든 것을 드린 것으로 인정한다고 하였습니다(참고/대상19:14;말3:10-12;고후9:6-7).
십일조는 구약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2:42-45;4:32-37) 신약에서는 예수 믿고 영생 얻은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 전부를 드렸습니다. 십일조로 교회를 운영하고 교육과 선교를 하고 소외된는 분들이 없도록 나눔으로 성경적인 초대교회의 거룩한 헌신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배척하는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자녀가 중요하다면 인재와 공간과 교재등 교육에 물질이 있어야 합니다. 십일조에 인색한 것은 아직도 내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다른 분들이 십일조를 드리고 교회가 유지되겠지 생각한다면, 어쩌면 그렇게 다들 생각하고 교회에 다니고 있을 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분들이 다수일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은혜받으면 즐거이 자원해서 한다고 합니다. 초신자가 아니라 20년 신앙생활을 한 분이 그런 말을 한다면 어떻게 그 시간 동안 은혜를 받지 못해 십일조를 드리지 못할까 생각해 봅니다. 신앙의 영역에 은혜와 감동과 기쁨만이 있습니까?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 발에 부은 마리아의 애통이 있었습니다(요12:3). 허리가 휠 정도도 가난한 중에도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과부의 헌신이 있습니다(눅12:44). 주님의 사역을 위해 자기들의 소유로 섬긴 막달라 마리와 여인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눅8:1-3). 그럼에도 신앙의 영역에서 은혜와 감동과 기쁨 만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라는 우상, 미신, 무속의 신앙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께 애통과 헌신과 희생을 드릴 때, 우리의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고, 비로서 하나님의 신앙 안에서, 진정한 은혜와 감동과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책임과 권리가 있습니다. 의견은 많은데 예물은 없다는 것은 권리만 내세우고 책임은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처럼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내가 말씀을 받는 제단에 물질을 드릴 때, 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마6:21.참고/말3:10). 그렇지 않으면 마당만 밟는 자, 교회 다니는 사람 수준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참고/사1:12). 우리는 백 가지 말보다 먼저 하나님의 것을 성별하여 드리기를 소망하고 교훈하며 축복합니다. 물질은 항상 부족합니다. 수입이 있으면 바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지출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전혀 생각지 않은 일들로 금전에 손해를 볼 때 중보를 하다보면 십일조를 결단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에게만 쌓고 하나님에게는 가난한 에덴의 동쪽에서 사는 가인과 그의 후손의 가치와 정신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하나님의 것을 성별하여 성경의 정신과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셋과 그의 후손들의 족보인 아담의 계보에 올려야 되고, 그것이 저 천국 ‘생명책’에 녹명 되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계21:27.참고/계20:15).
2. 다음 ‘사람과 자연인’ 글을 보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본문의 계보에서, 특별히 설명을 덧붙여진 인물들을 통해 생명책에 녹명된 자의 삶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름을 ‘사람’이라고 칭하셨습니다(창5:1-2). 이 세 단락 연결해보면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그분의 형상대로 만들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을 알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고, 그에게 복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아담’Adam 뜻인 붉다 사람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한 인격을 가지고 호흡하는 ‘자연인’Natural Man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요, 그것이 가장 큰 복임을 고백하고 있는 가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든바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첫째이다.”, “그것이 가장 큰 복이다,”, “이를 믿는 나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이런 고백으로 날마나 살아가는 자, 그의 삶이 곧 능력입니다.
그의 삶에 감사가 얼굴에 기쁨이 행동에 활기가 대화에 소망이 발걸음이 가볍지 않겠습니까? 주변에서 그 이유를 물을 때, “부러워 예수 믿어!” 그 한 마디가 자연인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 이 고백과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곧 사람입니다.
3. 다음 “동행과 유혹”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두 번째 동행입니다. 에녹은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은 다른 이들과 구분이 있습니다(창5:21-22). 에녹은 삼 백년 동안 하나님과만 동행한 사람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당하지 않고, 살아있는 상태로 그대로 들림 받아, 변화되어 천국에 입성했습니다(창5:24). 이러한 에녹의 마지막 보았을 때, 그는 정말 일생 동안 오직 하나님과만 동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만 동행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6). 세상의 유혹 하나님외에 다른 것과 동행하게 만들고, 마지막은 하나님과 결별하여 세상과 동행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 육신의 정욕은 소유욕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갖게 되었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솔로몬만큼 금은보화를 많이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없습니다. 그의 ‘부귀영화’富貴榮華는 전무후무하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손에 넣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하였습니다(전5:10). 소유욕에 한 번 빠져들었다 하면, 끝가지 끌려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인 소유욕은 하나님과만 동행을 막는 무서운 유혹입니다.
안목의 정욕.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일종의 쾌락 욕입니다. 솔로몬이 자기 주변에 공식적으로만 아름다운 미녀 천 명을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도 하고 싶은 데로 다 누려보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솔로몬은 즐겨보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려보았지만 끝이 없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1:8).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고 말한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인 쾌락욕은 하나님과만 동행을 막는 무서운 유혹입니다.
이생의 자랑. 이생의 자랑은 과시욕입니다. 무대 기질을 발휘하여, 사람들 앞에 자랑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기를 꺽어 놓고 과시해보려는 것입니다. 허파에 바람 든 여인들의 형태를 한번 보십시오. 유명메이커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동이 납니까? 남자들 보십시오. 자기 사랑하는 여인 앞에 놓고 “야! 이 오빠만 믿어!” 한껏 객기를 부립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6). 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인 과시욕 은 하나님과만 동행을 막는 무서운 유혹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하루아침에 우연히 발생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빠지면 하나님 앞에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우리는 하나님과만 동행해야 합니다.
4. 다음 “위로와 심판”에 대한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세 번째는 안위입니다. ‘노아’Noah의 뜻 안위는 위로와 같은 말입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 노아를 통해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창5:29). 노아는 대홍수 이전 6백년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했습니다(창9:28-29). 그러나 대홍수 직전 사람들은 물 심판의 임박함을 알리는 노아의 말은 듣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노아를 통해 고생에서 한숨 돌리는 위로를 받았지만 결정적인 말씀인 심판에 대해서는 귀 기울지 않았습니다. 위로가 무엇입니까? 따듯하게 감싸주는 것만 위로가 아닙니다. 진정한 위로는 심판입니다. 성도가 믿음 때문에 당한 고통과 환난에 대한 위로하심이 심판 때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대홍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며 비통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면으로는 지난 120년 동안 수많은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홍수로 심판이 시작되고, 자신들의 지난 120년 동안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던 것이 분명함을 알게 합니다. 이것만큼 큰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심판의 최종은 종말입니다.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악을 심판하시고, 선을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심판이 진정한 우리의 위로인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 우리가 지킨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신원합니다(계6:10). 이 호소를 들은 하나님은 ‘흰 두루마리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말씀합니다(계6:11). 순교자의 동무들이란 순교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교자가 있는데, 그 수가 다 찰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고 하셨습니다(계19:2). 요한계시록 6장에서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 값을 갚아 달라는 신원이 19장에 와서 하나님이 심판하심으로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서 갚으셨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 최종적인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 때,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은 대적자들이 심판을 받는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지 않겠습니까? 내가 정말 이 세상에서 피 흘리면서까지, 지킨 믿음이 승리함을 보고, 위로를 얻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는 심판입니다. 그 심판에 빠지지 않고, 건짐 받는 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위로에 이러한 심판에서 건짐 받게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전한 위로는 진정한 위로는 심판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히려 심판에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눈물로 믿음을 지킨 것이 승리함을 보는 위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위로는 인간적인 위로함에 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가 마지막 날 심판을 당하지 않고, 그 심판에서 자기의 신앙이 옳았음을 목도하는 위로를 얻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양화진 외인 선교사 묘원에서 이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5. 다음 제목으로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① 아담의 계보는 궁극적으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가 되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자기에게만 쌓고 하나님에게는 가난한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정신과 가치를 버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 등을 성별하여 드릴 수 있게 하옵소서.
② 신앙의 영역을 은혜와 감동과 기쁨만을 따르려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기라는 우상, 미신, 무속의 신앙을 버리고, 애통과 헌신과 희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신앙에서 진정한 은혜와 감사와 기쁨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③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아담, 사람이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을 확신할 때 우리의 삶에 감사, 얼굴에 기쁨, 행동에 활기, 대화에 소망, 가벼운 발걸음을 갖게 됩니다. 나를 보고 사람들이 그 연유를 물을 때 “당신도 예수 믿어” 증거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연인이 아닌 성경적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④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하나님과만 동행해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인 소유욕, 안목의 정욕인 쾌락욕, 이생의 자랑인 과시욕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과만 동행하게 하옵소서.
⑤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된 인생에서 따듯한 언어와 포옹은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심판입니다. 종말에 예수님이 심판하셔서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보응하실 때,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심판입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모든 이들이 진정한 위로인 심판에 귀 기울이고 예수를 영접하여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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