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부활(2)
1. 성경의 증언
(6) 요한계시록 20장 6절 -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자들
이들은 성도들 중 가장 먼저 부활하여 하늘 보좌에 있다가(계14:1), 예수 재림시 하늘 군대로 적그리스도와 이 세상을 심판할 자이며(계19:14), 천년왕국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왕권자인 것이다(계20:6).
(7) 요한계시록 11장 3절 - ‘두 증인’
첫째부활자를 연구하면서 빼놓지 말아야할 존재가 있는데, 요한계시록 11장 3절에 기록된 두 증인이다. 두 증인은 1260일 동안 예언사역을 감당한다(계11:3). 그 후 짐승(적그리스도)에게 죽임을 당한다(계11:7). 그의 유해는 전 세계에 걸쳐 널려지는 모욕을 당한다(계 11:9). 땅에 사는 자들로 상징된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이를 즐거워하며 기뻐한다(계11:10). 그러나 하나님은 대 반전을 준비하고 계셨다. 삼일 반 후 두 증인은 부활 승천하게 되는 것이다(계11:11,12). 그렇다면 그들은 부활 승천한 이후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그들이 바로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기록된 시온산 천상에 서있는 144000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재림 때 하늘의 군대로 함께 임하게 되는 것이다.
(8)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17절을 심도 있게 관찰해 보면 강림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첫째 부활에 대해 암시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씀 중 14절에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셨다. 15절에는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16절에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하였다. 그러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14), ‘자는 자’(15), ‘죽은자’(16)는 모두 예수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들이 누구이기에 하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을 함께 데리고 온다고 했을까? 이 구절에 들에 대한 해석의 관건은 14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이다. 여러 번역본과 주석들을 보면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것입니다’(새번역),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표준새번역), ‘예수님처럼 죽은 자들도 부활 한다’,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믿습니다’(현대인성경),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킹제임스 흠정역) 등 다양하다. 이러한 해석들의 잘잘못을 평가하려고하는 것이 아니다. 주해가들 마다 자신의 신학사상에 따라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것도 일치하는 해석이 없다는 사실이다.
14절이 15절로 이어지는 말씀인 것이 분명한 바, 14절의 시기는 예수 재림 때에 있을 사건이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에서, 하나님이 데리고 오는 자를 모든 성도로 볼 것인가? 첫째부활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스가랴 14장 5절, 고린도전서 15장 23절, 유다서 1장 14절, 요한계시록 11장 12절, 17장 14절, 19장 14절과 한 맥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데살로니가전서에 4장은 첫째부활자에 대한 계시가 기록된 성경의 각권들을 연결하고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주제가 강림이기에 거기에 중점을 두고 첫째부활에는 터치Touch하는 정도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엷은 물감으로 색칠된 그림들을 모아 뚜렷한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것이 문장적 해석이다.
그렇다면 왜 첫째부활에 관해서 성경은 아주 작은 분량밖에 남기고 있지 않는가? 반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대상이 지극히 한정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기록목적이 구원이고 대상은 전 인류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아야 할 대다수인 하나님 백성들을 향한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 반면 특정 인물과 사건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이 첫째부활과 함께 천년왕국이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이 한 구절을 통해 천년왕국이라는 신학적 용어를 도출해 냈다. 천년왕국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성경 전체에 해석이 달라질 수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치열할 정도로 각자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어느 신학자는 성경 한 곳에만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제적 천년왕국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요계시는 반드시 반복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성경에서 ‘목사’라는 칭호는 에베소서 4장 11절 한 곳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만 있는 직분을 부정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아니면 용어는 한 곳에 기록되었지만 성경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같은 사역을 뜻하는 구절들을 찾아 정립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천년왕국이 교회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대한데 부인하려드는가? 그와 못지않은 중요성을 갖는 것이 첫째부활이다. 첫째부활은 종말계시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와 같다. 그런데도 이것을 왜 묻어 두려하는지 목회자들은 심각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부활을 통해 한 맥들을 찾아 한 문장으로 정리하여 올바른 해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9) 히브리서 11 35절 - ‘더 좋은 부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일컫는다. 그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35절에 그들 중에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한 자들A Better Resurrection(KJB)이 있다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더 좋은 부활’Better Resurrection은 무엇인가? 똑같은 부활인데 그 부활을 좀 더 값진 것으로 표현할 말인가? 이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문맥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악형이 무엇인가? 형벌을 가리킨다. 이는 복음을 전하다가 겪게 되는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는 순교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악형으로 설사 죽는다 해도 구차히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순교자가 받을 더 좋은 부활 바로 첫째부활자가 되어, 예수 재림시 수많은 거룩한 자인 하늘의 군대로 이 세상을 심판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는 영광을 소망했기 때문인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35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라는 구절을 이전 구절들과 연결하여 사르밧 과부(‘그 집 주인 되는 여인’)와 수넴 여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주해가들이 있다(왕상17:17-24;왕하4:18-37). 이들은 죽은 아들들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두 여인도 그 안에 포함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죽었다가 살아난 이것보다 ‘더 좋은 부활’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영생체를 입는 부활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더 좋은’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는가? 부활을 귀하고 높게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인가?
‘더 좋은’을 뜻하는 헬라어 ‘크레이트토노스’κρείττονο는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이것을 모든 믿는 자의 부활로 볼 것인가? 아니면 특정 부류를 지칭한 것으로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모든 성도가 아닌 첫째부활자들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히브리서 11장 전체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곳에 열거된 인물들을 보라 그들이 모두 순교자들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적자들에게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은 것만을 순교자로 보는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순교의 기준만큼 일생 동안을 살았다면 그것도 순교자로 볼 수 있는가? 한 예로 사도 요한을 들 수 있다. 그는 밧모 섬에 유배되어 종말의 계시를 받아 기록하고 인생의 마감했다. 이런 그의 삶을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순교로 보는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11장에 등장한 믿음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순교자로 보는데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35절의 더 좋은 부활은 순교자가 받는 첫째부활과 한 맥이 되는 것이다.
부활의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부활이 있고 그 다음 모든 성도 부활이 있다. 첫째부활자들을 찾아가다 보니 그들이 순교자들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예수가 재림할 때 함께 임할 자가 되게 하셨고, 악의 무리를 멸하도록 하셨으며, 그 후 천년왕국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순교자들이 일반 성도들과 확연한 구분되는 영광을 성경 속에서 발견하고 성경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논거에 대해 추상적이거나 판타지Fantasy 또는 픽션Fiction 소설로 보는 독자가 있다면, 첫째부활을 해석하기 위해 신구약에 나타난 동일 계시를 연결한 것에 대한 성경적 반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성경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10) 마태복음 24장 45절 -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
더 좋은 부활과 함께 첫째부활자의 또 다른 연관성을 간접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것이 마태복음 24장 45절에 기록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A Faithful and Wise Servant’(KJB)이다. 이들에 대해 먼저 염두 해두어야 할 것은 마지막 시대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들이 모두 첫째부활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첫째부활에 참예하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문맥상 첫째부활자와 전혀 관계없는 종들로도 볼 수 있다.
종말의 시대에 사명을 감당했다고 모두 첫째부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첫째부활자의 선택은 하나님 주권에 있다.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포함되지 않았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첫째부활자에 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전 3년 반 동안 성도들을 깨어 준비시킬 하나님의 종들이다. 적그리스도의 통치기간인 후 3년 반 양 무리들을 안전한 예비처에서 함께할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사역은 전 3년 반 이전에도, 종말의 사명을 감당할 주의 종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술한 바와 같이 이들은 문맥상 첫째부활자와 전혀 관계없는 종들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 중에서, 첫째 부활자들이 배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24장 46절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은 성도들과 함께 예비처에 있다가, 7년 환난이 끝난 시점에 예수님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올 때’라는 표현을 예수님 재림뿐만 아니라, 전 3년 반 동안 성도들이 경성하여 재림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로 볼 수 도 있다. 이 기간 동안 성도들에게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리고 예수 재림에 소망을 두며 살아가도록 훈련시킨 것이다. 47절에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첫째부활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천년왕국에서 성도들을 다스리는 ‘왕 노릇’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게 된다(계20:6).
그러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과는 달리 ‘악한 종들’은 종말의 시대 거짓선지자의 미혹에 빠져 자신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적그리스도에게 숭배토록 할 가능성이 지대하다(마24:48-49). ‘외식하는 자의 벌’이 그들이 결말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마24:50-51;참고구절/사56:9-12;빌3:2;계14:9-10;21:8,15;21:27;22:15).
2.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의 부활은 천년왕국 후에 있다.
무천년주의자인 이승구 박사는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의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는 것에 대한 원어 ‘에제산’ἔζησαν을 “이 단어는 이미 죽었던 신자들의 영혼들이 지금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기 상태 동안에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에다 후크마 교수님은 덧붙여서 ‘ἔζησαν’을 ‘중생’으로도 해석하여,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서 왕노릇 하는 신자의 숫자에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을 포함시키고 있다.”1)고 해석하고 있다.2)
이와 같이 첫째부활을 중생이라고 해석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살아서’를 영적인 부활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5절의 ‘살다’는 육체적인 부활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모순이 많은 해석이다. 원문에 살아서는 ‘카이 에제산’καὶ ἔζησαν으로 살다는 뜻의 ‘자오’ζάω의 제1부정과거 직설법 3인칭 복수이다. 그 뜻은 첫째부활에 동참하는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약의 용법을 볼 때에 살아서라는 단수 헬라어 에제산은 무천년주의 대표적 학자인 렌스키R C.H.Lenski 조차 항상 완전한 몸과 영이 혼합된 사람에게 적용되는 단어로서 몸 없는 상태로서의 영靈에게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 단어라고 주장하였다.3)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는 “4절의 동사는 5절에서처럼 같은 뜻(육체 부활)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면서, “4절의 ‘살아서’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갖는 영적 부활을 뜻한다면, 우리는 한 작은 단원 안에 있는 똑같은 동사를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어떤 설득력 있는 이유를 결코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4) 이와 같이 4절의 ‘살아서’와 5절의 ‘살다’ 모두 육체적 부활을 명시하고 있는데, 4절은 성도들의 죽은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왕 노릇하는 영적 부활로, 5절은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전 인류의 육적 부활로 보는 이유가 무엇인지 뚜렷하지 못하다. 언어의 의미를 크게 훼손시키는 문제를 갖고 있다. 5절의 사는 것이 육체적 부활을 의미한다면, 4절의 살아서도 육체적인 부활로 보아야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문맥적 표현과 원어의 사용이 그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무천년주의 해석에 대한 알포드Henry Alford,1810-1871의 주장이다.
만일 두 부활이 언급된 말씀에서…첫째 부활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부활한다는 뜻이고 둘째가 무덤에서부터 일어나는 문자적 부활이라면 언어의 모든 의미가 끝장이 날 것이며, 성경도 어떤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의 가치를 잃게 된다.5)
따라서 원어적 의미로 볼 때도 살아서라는 표현은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 자체가 첫째부활은 영적인 것으로 둘째부활은 육체적인 부활로 구분하지 않는 한 임의적으로 바꾸는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부활은 죽은 자들의 육체와 영이 결합되는 사건이고Lived Again, 중생은 영이 거듭나는 사건이다Born Again. 서로 엄연히 다르다 부활과 중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6) 왜 본문이 분명하게 언급하지도 않는 것을 영적인 부활로 바꾸는지. 또 두 구절에 똑같은 단어를 전혀 다르게 정의하고 있는지. 이것은 종말론 연구에 심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경의 지지가 없는 한 아무도 그렇게 할 권리는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살아서를 중생으로 해석하는 데에 나름대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살아서로 번역된 에제산의 기본형 ‘자오’ 동사가 주로 영적 부활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에제산 역시 영적 부활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약 성경 곳곳에서 이 단어는 뚜렷한 육적 부활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9장 18절, 로마서 14장 9절, 고린도후서 13장 4절, 요한계시록 20장 4절도 예외 없이 다 육적 부활의 의미로 쓰였다. 그럼에도 무천년주의자들은 전술한바와 같이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쓰인 ‘자오’ 동사는 영적부활이라고 하면서, 5절에 기록된 ‘자오’는 육적 부활이라고 한다. 이처럼 일관성이 결여된 자신들의 해석에 대해 무천년주의자들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적 전 천년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상징으로 본다(순교자포함). 전 성도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들은 ‘흰보좌 심판’(계20:11)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계20:5)이 ‘불신자’들만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들이 ‘둘째 사망 당할 자들’이라는 것이다(계20:14).
그러나 첫째부활자를 해석하면서, ‘일반 성도’들도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에서, ‘천 년이 차기까지’라는 시점을 통해 천년왕국 후 흰 보좌 심판 때 부활할 것임을 알 수 있다(계20:5).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서 사도요한은 순교자들의 첫째부활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부활자들이 받을 최상의 상급을 말씀해 주면서 이들 순교 성도들이 아닌, 그 나머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시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왜 이곳에 불신자들의 부활이 나오겠는가? 그들이 첫째부활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곳에 심판 받을 자들의 부활이 언급되겠는가?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첫째부활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천년왕국이 지난 후 흰보좌 심판시 부활하게 되는 성도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첫째부활을 통해 연결된 값진 해석이다.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의 부활은 천년왕국 후에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해석은 자연스럽게 고린도전서 15장 23, 24절과도 연결된다.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부터 시작되고 있는 부활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부활의 첫 번째는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에게 ‘속한 자라고 하였다’(고전15:23). 그리고 ‘그 후에’도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고전15:24). 그런데 대다수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 말씀을 무시해버리고 ‘그 후는 끝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분명 부활의 순서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후에 부활이 있는데 그때가 바로 ‘나라’ 즉 천년왕국을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한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흰 보좌 심판 때이다. 요한계시록 20장 5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한 맥임을 발견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23, 24절도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에 관한 것이라면, ‘그 후’는 당연히 믿는 성도이어야지 불신자로 강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과 동일한 말씀이요(요5:29). ‘마지막 부활’ 도 이 때임을 증명한 것이다(요11:24). 이것은 첫째 부활에 대한 문장적해석을 통해 얻어진 결과인 것을 알아야 한다.
尾註>
1) 이승구. 『이승구교수의 개혁주의 종말론 서평』. http://blog.daum.net/7gnak/15712012
2) 개인적으로 이승구 박사를 존경한다. 단 그 분의 종말론에 관한 반론이다.
3) 이광복. 『계시록 원어강해』. 도서출판 흰돌. 2002. pp.407-408 요약.
4) Robert H. Mounce, 홍성철역, 뉴인터내셔널성경주석/요한계시록 20, 생명의말씀사, 1987. p.427.
5) Ibid.
6) 이광복. 『계시록 원어강해』. 도서출판 흰돌. 2002. p.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