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 천년설

첫째부활(3) | 개혁주의 전 천년설 핵심주제(2-3) | 이재현목사 | 파루시아 아카데미 | 개혁주의 전 천년설(13)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4. 3. 28. 12:57

첫째부활(3)

 

3. 천년의 어간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416, 17절과 고린도전서 1551절은 전통적으로 한 사건(휴거)으로 보았다. 전자가 예수님이 재림시까지 생존한 성도의 휴거 사건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때 성도는 변화체가 아니라 육을 입은 상태 그대로 들림 받게 된다. 왜냐하면 말씀 어디에도 변화되어 휴거된다는 직접적인 표현이나 암시가 없다. 약간 어리둥절하게 생각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후자를 전자와 동일한 사건으로서 휴거시 변화를 입증하는 말씀으로 본 것이 기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성도의 휴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체를 입는 시점을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50절의 하나님 나라즉 천국에 입성할 성도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51절의 변화는 휴거시와는 전혀 다른 시기에 관한 말씀이다. 최종 천국에 들어갈 성도들의 존재에 관한 기록인 것이다. 이처럼 성도들의 변화는 휴거시가 아니라, 부활시점인 천년왕국 후 마지막 부활과 동시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파격적인 해석들은 문장적해석을 통해 첫째부활을 성경적으로 입증하면서 찾아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이 두 구절들을 전혀 다른 시점으로 나누고 무려 천년의 어간이 있는 사건임을 발견한 것뿐만 아니라(휴거와 천년왕국 후). 휴거된 성도들만이 첫째부활자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것임을 밝혀냈다. 천년동안 모든 죄의 저주에서 회복된 온전한 몸으로 번성하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휴거 전에 이미 천국에 올라간 성도들은 천년왕국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저자와 같은 견해에 있는 민병석 목사는 역사적 전 천년설이 무 천년설로부터 비판받는 원인중 하나를 부활론으로 본다. 역사적 전 천년설에서는 예수님 재림시 모두 부활한다고 한다. 그러면 천년왕국에서 부활한 자들이 살게 된다는 논리를 갖게 되고, 그들이 자손까지 생산한다고 하니, 전혀 성경적일 수 없는 것이 무 천년설의 비판이다. 이러한 공격에 마땅한 대응할 수 없는 것이 역사적 전 천년설의 한계이다. 사실상 스스로 모순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무 천년설은 역사적 전 천년설을 반박하면서, “미지수인 천년이란 낱말은 적당히 교회시대의 상징적 표현으로 돌려대면 된다. 그러면 종말론이나 요한계시록에 따르는 시끄러운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판단에서, 무천년설이 머리를 들게 된 것이다.”1) 이러한 민 목사의 분석은 역사적 전 천년설이 갖고 있는 부활론에 대한 문제를 제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년왕국 이전 첫째부활자와 이후 성도들의 부활을 구분하고, 예수님 재림시 휴거된 성도들만 천년왕국에 입성하게 된다면, “어떻게 영생체인 성도들이 천년왕국에서 자손을 낳을 수 있는가?”는 난제와 비판 두 가지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감한 해석도 문장적으로 첫째부활을 연구하면서 얻게 된 보배들이다.

 

4. 나팔에 관한 논점

 

데살로니가전서 416절과 고린도전서 1551절을 한 해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나팔(살전4:16-재림)마지막 나팔(고전15:51-흰보좌심판) 그리고 일곱 번째 나팔(11:15-지구완멸)을 동일하게 보는데서 기인한다. 이에 대한 반증을 문장적으로 해석해 보기로 한다.2)

 

전통적인 이 해석은 나팔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번째 나팔이나, 하나님의 나팔이나, 마지막 나팔을 다 동일한 나팔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 일곱 번째 나팔은 하나님의 나팔도 아니고, 마지막 나팔도 아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나팔은 종말론적인 환난을 나타내는 나팔인데, 첫째부터 넷째까지의 나팔은 8장에 나오고, 다섯째 나팔과 여섯째 나팔은 9장에, 일곱 번째 나팔의 언급은 1115절에 쏟아지는 대접 재앙으로 16장에 나온다.

일곱 번째 나팔 가운데 나오는 일곱 대접 심판 중 여섯 번째 대접은 예수 재림에 있을 사건이요, 일곱 번째 대접은 이 지구의 종국을 가져올 심판을 말한다. 그것으로 모든 나팔은 끝난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나팔은 이같은 사건 외에 다른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사건이 끝나면 나팔도 끝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데살로니가전서 416절의 하나님의 나팔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일곱 나팔과는 별도의 나팔임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팔은 일곱 번째 나팔로 일어나는 일곱 대접 심판 중 여섯 번째 대접 심판 때 예수 재림이 있게 되는데, 그 때 예수의 재림 신호로 부는 나팔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때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말씀이 성취된다(24:31).

 

또한 하나님의 나팔은 고린도전서 1551절에 있는 마지막 나팔과는 또 다른 나팔이다. 마지막에 불었다고 해서 계시록에 있는 일곱 나팔 중 일곱 번째 나팔을 의미하는 것도 또 예수의 재림시에 부는 하나님의 나팔도 아니다. 마지막 나팔의 의미를 찾는다면 맨 마지막에 부는 나팔로써 인류의 마지막 부활시에 부는 나팔로 “28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신 예수의 음성이 이 마지막 나팔로 나타날 것이다”(5:28,29).

 

고린도전서 15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에서 마지막 나팔은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먼저 죽은 자들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앞서 흰보좌 심판을 거쳐야 하는데, 이곳에는 모든 죽은 자들이 살아나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은 물론 생명의 부활자들을 말하고 있으나, 이 때 심판의 부활자들도 함께 부활하여 자기 갈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다음에 우리도 변화하리라는 것은 재림의 예수를 맞이한 성도들이 육을 가진 그 상태로 휴거되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천년왕국에서 살게 되는데, 이제는 천년 동안 죽음이 보류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영원히 벗어 버리는 몸의 변화를 말한다.

고린도전서 1553절에는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하였다. 이 날엔 우리가 비록 죽은 상태로 우리의 몸이 무덤 속에 있다고 해도, 우리의 이 썩을 것들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는 생명의 부활에 동참할 것이며, 그때까지 우리가 살아 있다면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부활과 변화는 같은 의미이지만 구분하는 이유가 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요 살아있는 상태에 썩지 않을 영원한 몸을 입은 것이 변화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문장적 해석을 통해, ‘하나님 나팔’, ‘마지막 나팔’, ‘일곱 번째 나팔등 나팔로 인해 계시의 본뜻을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5. 사망이 영원히 멸할 시기는 흰 보좌 심판이다.

 

고린도전서 15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이같은 부활의 날이 오면, 그 날은 바로 이사야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이 응하리라가 성취된 날이 될 것이다(25:8). 이 이사야의 예언은 천년왕국이 끝나서 이 세상의 사망이 전부 사라질 때, 흰보좌 심판에서 사망과 음부까지 둘째 사망 속에 집어넣는 사망, 그 자체에 대한 심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사야서에는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25:8), 이 예언에 대한 성취로써 요한계시록 2014절에서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고 말씀해주고 있다.

 

사망이 흰 보좌 심판에서 영원히 없어진다면, 그 전 천년왕국이 끝난 이후에는 사망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첫째부활자외의 모든 성도의 부활은 흰 보좌 심판 전인 천년왕국이 끝난 이후가 되는 것이다. 천년왕국은 죽음이 천년동안 보류 된 곳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년왕국 끝날쯤에 무저갱에서 풀려나는 사탄에 의해 미혹된 자들은 흰 보좌 앞에서 천년왕국 이전에 죽었던 불신자들과 영벌을 받게 된다. 그들에게도 부활 있지만 그 부활은 심판의 부활인 것이다.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천년왕국에서 마귀에 미혹되지 않은 성도들과 천년왕국 이전에 죽은 성도들이 된다.

 

이 때 비로소 모든 사망은 흰 보좌 심판에서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 후로는 더 이상 죽음 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3)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망을 영원히 멸할 시기로 볼 때도, 첫째부활자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의 부활은 흰 보좌 심판에서 있게 됨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흰보좌 심판에서 첫째부활자를 제외한 의인과 악인 모두가 부활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정리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다(고후5:10). 이 말씀에서 심판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심판이 아니다. ‘심판에 묻어 해석해서는 안 된다. 재림의 심판과 본문의 심판대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같은 시기의 심판이 아니다. 전자는 예수님 재림시 심판주로서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세상 임금과 그 군대들을 멸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후자는 심판대 앞에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그 존재가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서게 되는 흰 보좌 심판을 말한다.

 

흰 보좌 심판 때 부활자는 의인의 부활(생명의 부활-선행에 따라 상급(2:10)), 악인의 부활(심판의 부활-행위에 따라 형벌(20:13)) 모두 있게 된다. 악인들은 큰 자나 작은 자나 심판 받기 위해 모두 서게 된다(20:12). 이를 위해 무덤에 자는 모든 자들이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528절에 무덤 속의 모든 자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건 믿지 않건 간에 죽은 모든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외의 많은 성경 구절에서 의인(생명)과 악인(심판)의 부활 시기는 동일함을 밝히고 있다(12:2;5:29;6:39;24:15;14:10;고전15:51,52;고후5:10;20:5)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에게 왕 노릇 하였던, 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도, 흰 보좌 심판 때이다(5:14;20:14). 사망은 불 못에 던져지게 되는데, 이곳에는 이미 마귀도 적그리스도도 거짓선지자도 가 있는 곳이다(19:20,20:10). 사망 뿐 아니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진다고 기록하고 있다(20:14). 음부는 지금까지 악인들이 죽어 육과 영혼이 분리되어 영혼으로 가있는 지옥의 상태를 말한다. 영혼만을 심판할 수 없다. 흰 보좌에서 악인의 영혼 만을 심판하는 것으로 본다면 개혁주의 신학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이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서게 되는 것도 흰보좌 심판 때인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악인은 보좌 앞에 있는 책들’(20:12)인 행위책4)에 따라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의인은 또 다른 책’(20:12)인 생명책에 기록된 자로서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되는 것이다(참고구절/69:28;12:1-2;4:33:5;13:8;17:8;20:12).

 

 

Ⅲ 결론

 

지금까지 첫째부활에 대한 결론을 문장적해석을 통해 입증했다. 요한계시록 205, 6절에만 명시된 첫째부활은 그 표현만 다를 뿐 성경 전체에 산재해 계시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 첫째부활을 설명한 것이 문장적해석의 전형이다.

 

이뿐 아니라 첫째부활을 해석하면서, 고린도전서 1552절과 데살로니가전서 416절은 같은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재림과 이 후 천년왕국이 마친 시점의 차이로 천년이라는 어간이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 나팔, 하나님 나팔, 일곱 번째 나팔 등 나팔이 포함되었다고 해서, 동일한 나팔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도 논증했다. 나팔은 종말의 사건 계시를 상징하는 것으로 기록된 것도 있고, 재림을 알리는 신호로 기록된 것도 있으며, 흰보좌 심판의 시점으로 기록된 것도 있다는 사실도 밝혀낸 것이다.

 

또한 성경을 해석할 때 같은 의미를 뜻하는 단어가 있는 구절이라 할지라도, 그 문장의 주제에 대한 비중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서신서는 보내는 교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재림이 중심 주제이다. 그 외의 것들은 구성상 설명을 위한 부제 혹은 배경정도로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잊고 성경이 기록한 주제가 아닌 주제에 주안점을 두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부활에 관해서 탈피하여야 할 고정관념이 있는데 부활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활에 순서가 있다는 사실이다. 부활을 설명할 때는 고린도전서 1523절을 보아야지, 데살로니가전서 416절을 보아서는 안 된다. 한 단어가 언급되었다고 그것만을 보지 말고, 전체 문맥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하며, 어떤 포커스로 기록되어 있고, 무엇이 주제 중의 주제 핵심 포인트를 찾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이러한 연구들도 문장적 해석을 통한 열매이다.

 

단언하건대 첫째부활을 바로 해석하지 않고는 요한계시록은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첫째부활과 한 맥인 ‘144000’, ‘두 증인’, ‘하늘군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종말 계시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첫째부활이 마지막 시대에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재차 질문한다면 그들이 없다면 장차 7년 환난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 수 없고, 그 간교한 미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3년 반 동안 대배교자들이 될 수밖에 없다. 이 후 폭풍 같은 환난이 몰아닥칠 후 3년 반 동안 예비처로 인도함 받을 수 없게 된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고 싶다.

 

첫째부활자들은 결코 가상의 인물들이 아니다. 이미 성경에 약속된 복을 받은 자들이다. 첫째부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왕노릇을 하게 된다. 그들은 부활체로서 천년왕국에서 육적인 몸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다스리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세상에서 왕노릇 할 존재로 창조하셨다(1:27,28).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왕노릇은 상실되고 말았다. 타락함으로 오히려 인간을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5:14,6:12).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이 성도 안에 왕노릇하게 되었다(5:17,21).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이 왕노릇하게 된 것은 에덴동산에서 왕노릇하는 것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자는 현재 교회시대에서 성도들에게 영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천년왕국에서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왕노릇은 첫째부활자만이 에덴동산이 회복된 천년왕국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게 되는 것이다(20:4,6). 둘째 사망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 흰보좌 심판때도 심판받지 아니한다. 그들은 일반 성도들과는 달리 7년 환난 중 전 3년 반이 끝날 시점에 부활했기 때문이다(11:11,12). 흰보좌 심판대에서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게 된다(20:4). 이렇게 첫째부활 자들은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함으로 에덴동산 타락전의 왕 노릇을 하게되는 엄청난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라 순교자에 대한 상급이다.5)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는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선택한 후 시작된다. 종말 때에도 예외일 수 없다. 적그리스도에 맞서 당당히 진리를 선포할 하나님의 종들이 택함 받는다. 이들을 통하여 교회를 깨우고 준비시켜 성도들을 마지막까지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이다. 그들이 144000이고 두 증인이요 바로 첫째부활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부활자를 빼놓고는 종말 계시를 바로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첫째부활을 연구한 중요성이다.

 

尾註>

 

1) 민병석, 『개혁주의 전 천년설』, 도서출판 신생, 2016. 9. 2. pp.16-17.

 

2) ‘일곱 번째 나팔은 최종적인 환난인 셋째화(일곱 대접 심판)가 쏟아질 때를 지칭한다. ‘마지막 나팔은 흰보좌 심판 직전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을 입는 때를 지칭한다. ‘하나님의 나팔은 예수님 재림 때 부는 나팔로서 그때 생존한 성도들이 휴거되는 때를 지칭한다.

 

3) 눈물과 사망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요한계시록 21장에 가서이다(21:4). 20장 천년왕국 끝에서 천년왕국 2세들 중 마귀에 미혹당한 곡과 마곡 백성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흰보좌 심판으로 사망과 음부도 둘째 사망에 던져진다. 이로써 모든 죽음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4) 행위책은 책들로 복수로 쓰여 있고 생명책은 으로 단수로 쓰여 있음을 보라 이것은 서로 같은 책이 아닌 것을 구분해줌과 함께 행위책에 기록된 죄가 얼마나 많고 큰가를 알게 한다.

 

5)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는 첫째부활자의 왕노릇에 대하여 적그리스도의 우상숭배의 주장에 굳게 대항할 값으로 생명을 내놓은 자들을 위한 특별한 보상이다.”고 하였다. 마운스는 백위트(Beckwith) 글을 인용 종말시대 변절하지 않은 순교자의 확고부동한 태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안에서 최고의 생활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얻으리라는 마태복음 1039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주석(응답)이다.” 설명하고 있다(로버트 마운스, 홍성철역, 뉴인터내셔널성경주석/요한계시록 20, 생명의 말씀사, 1987. p.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