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 천년설

십사만사천과 두 증인(1) | 개혁주의 전 천년설 핵심주제(3-1) | 이재현목사 | 파루시아 아카데미 | 개혁주의 전 천년설(14)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4. 3. 28. 15:43

십사만사천과 두 증인(1)

 

 

Ⅰ 서론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많은 논란거리가 되는 것이 십사만사천이다(이하144000). 현재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이단 가운데 하나가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이다. 교주는 이만희로 자신만이 요한계시록을 완전히 해석한 자로서 사도요한이요, 두 증인이며,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한다. 이 집단은 144000을 자신들의 만수로 본다. 신천지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144000은 이단 사이비들에게 악용을 당해왔다. 그러므로 144000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정립이 필요하다. 명확하게 해석할 수 없는 난제로 또는 논란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상징으로 덮어 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144000은 개신교 내에서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144000이 구원받은 총수로 모든 믿는 백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144000이 모든 믿는 성도들을 상징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144000의 자격에 대해 신앙순결이 있는 자’, ‘어린양을 따르는 자’, ‘사람가운데 속량함을 받은 처음 익은 열매’, ‘입에 거짓말이 없는 자’, ‘흠이 없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14:4-5). 이상 다섯 가지를 모든 성도들의 조건으로 본다면 무리한 해석이 될 뿐만 아니라 구원론에 큰 손상을 입히게 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자가 예수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갖는 것과 위에 열거된 것을 구비해야 할 자격으로 본다는 것은 억지이다. 144000에게 하나님의 인을 쳤다는 근거를 구원의 인으로 주장하기도 한다(7:2-3). 그러나 성도의 구원은 성령 인침 받았다고 하였다(1:13). 예수님도 인침 받았다(6:27). 그렇다면 이것이 구원의 인침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소유와 권세와 능력을 아들에게 주신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종말의 시대 사명을 감당할 종들을 천사들을 통해 인친 것이다.

 

다음으로 144000을 육적인 이스라엘로 주장하기도 한다. 12지파의 원형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블론, 잇사갈, , ,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이다(35:23-26;49).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로 나뉘게 된다(4:5-6;14:4;16:4). 대신 레위가 제외된다(1:47). 이 지파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제사장과 성막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로 성별되었다(1:50-53;18:1-2;18:7). 변형된 12지파는 에브라임, 므낫세, 르우벤, 시므온, 유다, 스불론, 잇사갈, , , 아셀, 납달리, 베냐민 순으로 되었다. 그런데 144000에 대한 지파를 살펴보면 레위가 포함되어 있는데, 요셉과 므낫세가 함께 기록되어 있고 단 지파는 빠져있다(7:4-8). 원형을 볼 때 요셉과 레위가 있다면,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가 포함될 수 없다. 변형을 볼 때도 므낫세가 있다면, 에브라임이 포함되어야지 요셉과 레위가 함께 있을 수 없다. 사도 요한이 12지파를 몰라 오류를 범하고 오기를 했다면 성경의 권위에도 타격을 입히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적 12지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144000은 누구일까? 이에 대한 답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요한계시록 73절에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정의해 주고 있다.1) 성경에서 종이라는 단어는 광의적으로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의 사자를 일컫는 말로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호칭한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의 종들을 무엇으로 해석하는가가 관건이 된다. 개혁주의 종말적 전 천년설에서는 종말의 사명자들로 본다. 이제 본론에서 그 논지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종말의 예언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선별한 종들이다.

요한계시록은 교회들에게 주신 서신’(1:4)으로 시작하여 교회에 주신 계시’(22:16)로 끝맺고 있다. 교회에게 종말에 있을 일을 알려 주신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성도들이 장차 있을 종말의 풍파 속에서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종들에서 우리교회로 보아야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 ‘우리 하나님의 종들교회 안의 하나님의 종들이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택한 종들로 종말의 예언 사역을 감당할 사명자들인 것이다.

 

74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라는 말씀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에서 이스라엘모든 믿는 자, 교회를 가리킨다. 신약에 와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볼 때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616절에는 이방인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각 지파 중에서는 바로 교회 중에서 택한 하나님의 종들인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모든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택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144000이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라고 하였다(2:28-29).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린 지금 교회시대에 유대인은 혈통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모든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것이다. “6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하였다(9:6-8). 은혜 시대인 지금에는 이스라엘 지파 출신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다(10:12-13). 지금은 성령시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교회시대 하나님 백성이 되는 길이다.

144000을 종말의 예언 사역을 감당할 하나님의 종들이란 것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이들 중에는 79큰 무리와 같이 해석한다. 전체 믿는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르지 않다. 144000큰 무리와 전혀 다른 존재이다. 144000은 교회에서 나온 종들이다. 큰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성도들로 분명히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 즉 세계의 교회들에서 나온 성도들이다. 종말의 사명자로 부름 받은 144000이 전 3년 반 동안 예언 사역을 통해, 깨어 준비된 성도들이 후 3년 반 동안 예비처로 인도함을 받게 되는데, 이 성도들이 큰 무리인 것이다. 144000이 종말의 사명자들이라면 큰 무리는 종말에 144000을 통해 영적으로 무장된 성도들을 말한다.

 

이외에도 144000에 대한 견해들은 다양하다. 그 중 현존하는 개혁주의의 산실로는 가장 대표적인 곳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총장 김명용 박사의 설명을 들어 보겠다.

 

144천의 기본적인 정신은 무엇인가. 그 당시 콘텍스트(초대교회) 속에서 어쩌면 예수 믿는 사람의 전체 숫자가 144천이 안되던 시절이라고 볼 수가 있다. 당시 워낙 박해가 심하기에 박해 속에서 누가 과연 구원을 받을 것인가 하는 회의가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요한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확실하게 다 보았다는 것이다. 무려 144천명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서 어린양 앞에 서서 찬양을 하더라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믿음의 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내가 확실히 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印)치신 사람은 한사람도 남김없이 다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다 어린양 앞에 서서 찬양하는 그 영광의 비전을 확실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144천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희망을 주려는 희망의 숫자이다. 우리 가운데 구원에 실패할 사람이 한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치신 백성을 틀림없이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144천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이다(14:4).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에 큰 음녀 바벨론이 나온다. 그것은 로마제국이다. 로마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기에 이미 사라져간 바벨론 왕국을 가지고 표현한 것이다. 음녀는 우상숭배하는 것이다. 주님만 섬기고 예수님만 따라야 하는데 우상을 섬기는 그리고 우상 섬기기를 강요하는 로마제국을 음녀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라는 의미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로마황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고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라가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하늘나라에서만 주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제 멀지 않는 장래에 세상 나라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11:15). 그리고 너희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토록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어떤 책인지를 잘 이해하고 요한계시록에 있는 상징과 암호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잘 인식하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이단들의 말들이 너무나도 우습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

 

김 박사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수가 144000이 안되던 시절이라고 볼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심한 박해 속에서 누가 과연 구원을 받을 것인가 하는 회의에 빠져있는 초대교인들을 희망을 주기 위한 수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 시대이면 A.D. 90년대인데 전체 교인 숫자가 144000이 안 된다는 것을 어떤 근거에서 말하는 것인지? 당시 초대교인들이 믿음에 대한 회의 퍼져나갔다는 것은 어떻게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카타굼, 갑바도기아, 데린구유 등에서 마라나타 신앙을 지킨 초대교인들은 무엇으로 설명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이런 해석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144000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144절을 인용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자로 음녀를 따라 우상숭배하지 않은자라고 하는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만 섬기고 예수님만 따라야 하는데 우상을 섬기는 그리고 그것을 강요하는 로마제국을 음녀라고 표현한 것이다고 한 것은 다시 초대교회로 회귀하게 된다. 종말 시대 종교다원주의 등으로 교회를 변질시킬 음녀, 거짓선지자등의 존재에 대한 대비는 주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큰 문제이다.

 

요한계시록 1115절 예수가 왕이 되어 세세토록 왕 노릇할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하여, 144000으로 상징된 초대교회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만 주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제 멀지 않는 장래에 세상 나라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그리고 너희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토록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지상의 천년왕국을 인정하는 것인지, 이 땅에서 왕 노릇한다는 것은 현재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왕 노릇한다는 무천년주의 주장과 상반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3)

 

김 박사는 칼 바르트의 신학’4)을 출간 하면서, 부제로 ‘20세기 최고의 신학이 교부라고 칼 바르트를 극찬할 정도로 칼 바르트 신봉자로서, 신정통주의자에 속한다.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 신학자에 가까운 그의 논지는 그 각도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된다.5)

 

그러나 정통보수개혁주의에서 수학한 목사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분당우리교회를 개척 대형교회로 성장을 이끌고 있는 이찬수 목사는 개신교 차세데 리더로 까지 손꼽히고 있다. 그는 주일예배에 요한계시록 17절을 본문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라는 제하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을 강해하였다.6) 그 중 요한계시록 7장을 환난 중에 보호하시는 하나님’(7:1-14.6.2), ‘좁은 마음을 깨뜨리고’(7:9-12.6.9), ‘지금은 전쟁 중이다’(7:13-14.6.16), ‘눈물 씻어주실 그 날을’(7:13-17.6.23). 네 번에 나누어 강설했다. 이 목사는 144000이 구원 받은 성도들로 그들의 올려드리는 찬양과 영광의 삶에 초점을 두고 설교했다. 구체적으로 144000에 대하여는 이필찬 박사는 전투하는 교회임을 전제하는 숫자라고 주장합니다. 부연하기를 민수기 1장에 이스라엘 군대에 계수 기록을 자료로 하여 이 요한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고 해석합니다.”고 강해했다.7)

 

그러나 민수기 1장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군대와 요한계시록 7장에 등장하는 144000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발견할 수 없다. 두 곳에 기록된 숫자도 지파도 동일하지 않다. 이 역시 전형적인 무천년주의 입각에서 상징적 영적으로 해석하는데서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8)

 

정성욱 박사는 “‘십사만사천을 장차 나타날 참 선지자들의 총수를 상징하는 숫자로 해석하는 관점을 가진다고 밝히면서, ‘이런 해석 역시 정통교리와 충돌하지는 않기에 이단적이거나 사이비적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없다.’”9)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해석이 가장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부합한다고 하였다.10)

 

144000은 육적 이스라엘도 아니고 모든 성도들도 아니다. 144000은 종말에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만방에 알릴 사명자들인 것이다. 성도들이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깨워 준비시켜, 예수 재림의 신앙으로 무장하도록 만드는 사명을 감당할 하나님의 종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언제나 지도자를 먼저 세우신다. 대표적인 것이 모세를 들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출애굽 역사이다. 종말도 예외일 수 없다.

 

尾註>

 

1) 민병석 목사는 요한계시록 7장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 장은 7장이다. 7장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을 주셨는가를 보여주시는 해답 장이다. 7장에는 환난 날에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조치에 관한 말씀이 계시되어 있다. ‘우리 하나님의 종들흰 옷 입은 큰 무리들과 이들을 보호해 주실 하나님의 장막’(예비처)에 대하여 계시해 주고 있다. 만약 요한계시록에서 7장이 없다면 요한계시록을 교회에 주실 이유나 필요가 없게 된다. 7장은 요한계시록의 구심점이며, 종말의 짐승 통치하에서 하나님의 교회의 승리 장이다. 7장을 제대로 열지 못하면 계시록을 열 수 없다. 핵심이 잘못 해석되거나 제 방향을 잃으면 요한계시록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민병석 목사는 7장을 1대지-이마에 인 맞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계시(1-8), 2대지–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의 계시(9-14), 3대지–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를 보호해줄 장막’(예비처)의 계시(15-17)로 나누고 있다(민병석, 『개혁주의 전 천년설』, 도서출판 신생, 2016. 9. 2. pp.55-56.).

 

2) “요한계시록 144천은 희망의 숫자”. 장신대 김명용 총장, 뉴욕 교협 요한계시록 세미나 인도. 이종철. 2013.6.6. http://www.newspower.co.kr

 

3) 김명용 박사의 더 자세한 종말론 연구는 이재현. 『이어쓰는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김명용 박사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대한 변증」, 도서출판 헤이스, 2017.8.1. pp.149-166를 참조하라.

 

4) 김명용. 『칼바르트의 신학(20세기 최고의 신학이 교부). 도서출판:서울 이레서원 2007.09.11.

 

5) 본 연구에 사용된 김명용 박사의 요한계시록 해석 발췌본은 기자에 의해 정리된 것이다. 편집 과정에서 진의와 다르게 문서화된 것에 대해 저자가 변증을 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

 

6) 2013317

 

7) “지금은 전쟁 중이다”(요한계시록 7:13-14). 이찬수. 2013.6.16. 이필찬박사는 민수기 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군대의 계수 기록을 자료로 하여 요한의 목적에 맞게 사용한다. 요한은 민수기의 603,550명의 숫자를 144,000으로 변경시킨다. 이것은 144,000이라는 숫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숫자를 계시하고자 의도한 것이다. 144,00012×12×1000으로서 약속으로서의 구약의 백성(12)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12)에다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숫자인 1000을 곱하여 나온 숫자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온전한 숫자를 시사한다고 한다. 이 박사는 144000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 입성 전 군대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각 지파별로 인구를 계수한 민수기를 배경으로 보고 있다. 그와 같이 교회시대에 사탄과 전투할 그리스도 군사인 성도총수를 상징한다는 주장이다(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도서출판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00. 11.23. pp.91).

 

8) 이필찬박사의 십사만사천 해석은 개혁주의자인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1900-1982)의 견해와 일치한다. 헨드릭슨은 십사만사천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7장에 등장하는 십사만사천은 지상의 교회에서 전투하는 교회’(the entire church militant)를 말하고 14장은 천상의 교회 에서 영광스러운 교회’(the church triumphant)”고 말한다. 반면 세대주의자인 존 월부어드’(John. F. Walvoord,1910-2001)“7장은 환난기에 인 맞은 유대인을 말하고 14장은 재림 때 승리한 유대인이다고 말한다. 침례교 목사로 세대주의자이면서 개혁신학을 받아들이고 있는 존 맥아더’(John F. MacArthur,1939-)는 월부어드와 같이 유대인으로 보는 것은 같으나 십사만사천을 그 유대인 중 전도자라고 한다. “7장은 환난기에 신신할 유대인(전도자) 14장은 재림 때 승리한 유대인이다고 한다. 김명용, 이찬수, 이필찬 세 분에 대한 인격을 손상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의 종말론에 관한 반론이다.

 

9) 정성욱, 『정성욱교수의 밝고 행복한 종말론』, ()눈출판그룹, 2016.3.7, p.160.

 

10)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