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 천년설

7년환난과 7년평화조약(2) | 개혁주의 전 천년설 핵심주제(5-2) | 이재현목사 | 파루시아 아카데미 | 개혁주의 전 천년설(21)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4. 3. 29. 19:39

7년환난과 7년평화조약(2)

 

3) 적그리스도의 등장은 이미 인류 종말의 시한부적 경종이다

 

성경에서는 적그리스도의 등장과 인류 종말의 시기에 대하여 분명한 언급이 있다. ‘저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란 말씀에서, 인류의 종말에 임박해서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며, 그가 등장할 때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휴거) 관하여곧 임박 한 줄 알고 준비해야 한다는 경종이다(살후2:1-4,8).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등장 모습에 관하여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자세히 언급해 주고 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의 인물이다(13:3-4). 42달간 세계를 지배하는 인물이다(13:5).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인류들로 그 우상 앞에 경배시키는 인물이다(13:15). 인류들로 그 우상에게 경배케 하므로 짐승표를 받게 한다(13:16). 만약 한 이레의 언약을 시한부 종말로 규정한다면, 적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이 되는 마흔두 달간도 시한부 종말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의 예언을 비판한다면, 인류의 종말에 관한 예언 그 자체를 매도하므로,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말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종말적인 예언의 성취에 대하여, 무조건 부인하는 처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벧후3:3-4).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우리의 교만과 억지와 고집과 강변을 버려야 할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성경에서 예언해 주고 있는 이 같은 징조가 틀림없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경계하고 배척해야 할 시한부 종말인 것이 아니라 종말에 이르렀다고 하는 하나님의 경종이요, 실제적인 긴박한 상황인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적그리스도에 의한 한 이레의 언약이 성취되고, 권능 받은 두 증인의 예언의 사역이 우리들 현실 앞에 나타나, 우리들에게 종말의 예언의 징조로 분명히 나타나 보여주는데도, 그 때 그 상황을 시한부 종말이란 말로 매도할 수 있겠는가? 7년 환난설을 시한부 종말론으로 공박하려면 지금 이 시기가 아니라, 그런 사건이 역사적 현실의 무대 위에 실제로 등장하여 어느 누가, ‘이제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한 이레의 언약의 성경적 예언이 성취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7년 환난 중에 들어와 있다고 외칠 그 때, 그들과 대항하여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등장하지 않으며 짐승표도 거짓말이며 7년환난이 왔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이같은 시한부 종말론에 미혹 받지 마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세상은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항상 동일하다고 외친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과 같이 말이다(벧후3:3-4).

 

2. 7년이란 기간은 실제적인가? 상징적인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일에 있어서 7년이란 기간을 문자대로 인정하느냐, 7년을 상징적으로 보느냐는 문제는 요한계시록 해석이나 다니엘서 해석에 근본적인 차이점을 드러내는 문제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1) 다니엘서에 계시된 한 이레7년의 기간

 

7년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 근원지는 요한계시록이 아니라 다니엘에서 비롯되어 있다. 다니엘 927절에 나오는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란 말씀이 그것이다. 이 말씀에서 그가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굳게 정한다고 하는 한 이레의 언약에서 나온 말이다.

 

개혁주의 신학자 중에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류의 종말에 실현될 메시아 왕국(신약적 의미에서는 천년왕국)으로 보지 않고 교회시대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이 예언하고 있는 인류종말의 하나님의 나라가 메시아왕국이 아니라, 교회시대라면 한 이레의 기간은 상징적으로 보아야 하며, 그 한 이레는 전 교회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요한계시록은 종말의 계시인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과 비슷한 의미에서 신약시대 교회 모습으로 특히 로마 황제 등 세력에 의해 교회가 핍박을 당하는 모습(주로 1세기경)을 계시해 준 것으로 해석이 된다.

 

그러나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을 성경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한 이레란 기간이 7년으로 계시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계되어 있고, 메시아왕국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한 이레란 기간은 숫자적으로는 7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상징적 해석이 아니라, 날짜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제시되어 있다(14:34;4:6). 우리는 또 다니엘 725절에서 종말적인 기간으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란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다니엘 927절 말씀은 다니엘 725-26절 말씀과 같은 내용이다. 여기서 725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 나오는 계시는 한 이레의 절반(후반부인 후 3년 반)을 의미하는 말이며,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라고 한, 927절의 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계시이다. 그리고 927절 후반부의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고 하신 말씀은 726절의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라고 한 말씀과 같은 사건의 계시인 것이다.

 

이런 사건의 진행으로 미루어볼 때 한 이레의 기간은 교회시대를 의미하는 상징적 수효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이 인류의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침입하여,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핍박할 일에 대한 예언으로 주신 계시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동안 지내게 될 것인데, 이 기간은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종교적인 핍박을 유대인들에게 가하는 기간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직전까지 계속될 것임을 계시해 주고 있다.

 

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에 대해서는 그 기간이 상징적으로 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간 한 해와 두 해와 반 해를 의미하는 3년 반을 가리킨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에 대한 부연적인 설명에 있어서, 요한계시록에 와서 혹은 1260일 혹은 42달이란 표현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지는 것이다.

 

다니엘 423, 32절에는 일곱 때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교만해진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을 자신이 건설하고 자신의 영광을 받기 위함이라는 망발을 쏟아낸 후,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광인이 되어 짐승처럼 지내는 고통과 수치를 가리키는 상징적 기간이다(4:30-33). 그리고 무천년주의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이 으로 해석하여 7년으로 보는 견해를 지지한다. 그렇다면 다니엘 721절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3년 반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무천년주의자들은 전자의 일곱 때7년으로 보지만, 후자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에 대해서는 상징으로 본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한 성경에 똑같은 용어가 기록되어 있는데 둘에 대한 해석에 이런 큰 차이를 갖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다니엘 434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후 그 기한이 차매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총명이 다시 돌아왔다고 말씀하고 있다. 7년이라는 기간이 끝난 후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니엘 725-26절에 성도들에게 핍박을 가할 적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으로 명시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3년 반이 마친 후에는 재림하시는 예수께서 그의 권세를 빼앗고 멸절할 것 또한 인정해야 함은 마땅한 것이다. 이에 반론을 한다면 성경적 근거를 통한 타당한 사유를 설명해야만 한다.

2)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1260, 마흔두 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와 7년의 기간

 

이런 사실은 요한계시록에서 더 자세히 그리고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도 7년을 의미하는 명백한 문구나 숫자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니엘서의 한 이레한 이레의 절반그리고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12절에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는 말씀이 나온다. 성전 밖 마당을 주관할 적그리스도는 또한 거룩한 성(예루살렘 성)42달간 짓밟을 것이다. 이것은 다니엘 725절에 있는 종교적 핍박을 유대인들에게 가할 것임을 의미해주는 신약적인 계시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35절에는 적그리스도가,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마흔 두 달은 요한계시록 112절에 나오는 42달로 7년 환난 중 후 3년 반을 의미하는 기간인데, 이 기간은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뿐 아니라 세상의 지배자로 활동할 것임을 의미해 준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13절에서 베옷을 입고,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예언하는 사명을 가진 두 증인의 활동 기간으로 1260일간의 기간이 나오는데, 이 기간은 42달간의 기간과는 다른 기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이 증거 하는 기간은 후 3년 반이 아닌 것이 이들이 예언을 전하다가 적그리스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데, 그들이 죽임을 당하는 시기가 1260일 마지막 시기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11:7). 만약 이 시기가 후 3년 반이라면 적그리스도는 아마겟돈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의해 생포되어 산 채로 불붙는 못에 던져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시기가 될 것임으로 합당한 해석이 될 수 없다(19:20).

 

요한계시록 12장에는 대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보호하실 일에 대한 은혜로운 계시가 나온다. 그런데 그곳에 1260일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기간이 한 사건이 함께 겪는 기간으로 나오고 있다. 아들을 낳은 여인이 그 아들을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려 보내고, 자신은 1260일간의 양육을 받기 위해 자기 곳으로 도망하게 되는데, 이 여자는 용의 핍박을 피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 날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가 양육을 받을 기간이 6절에서는 1260일로 나오고, 14절에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 나온다. 같은 기간을 이처럼 둘로 나눈 것은 이 두 가지 표현의 날 수가 동일한 기간임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전 3년 반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연단과 회개의 시기로 주신 기간으로 두 증인이 전 세계적으로 다시 예언하는 기간이요(11:3). 3년 반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온 세계가 지배를 받는 대 환난 기간으로, 이 기간은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이 다니엘 725, 스가랴 121-5, 마태복음 2416-21, 요한계시록 135절에 기록된 모든 예언의 말씀을 이루는 무서운 대환난의 날이 될 것이며, 그 후에 예수님의 재림이 뒤따르며 곧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임을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1260, 마흔두 달, 한 때, 두 때, 반 때 등. 중요한 사건이 진행되는 기간을 계시해 주신 사실을 무시하면 사건 자체가 공중분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런 명백하고 분명한 기간을 상징으로 돌려버리면, 요한계시록을 주신 의미가 소멸되어 버린다.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셨다(1:3).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셨다(22:20). 예수님의 때가 가까운 시기에 주신 종말 계시가 요한계시록이다. 만약 그 계시 안에 사건이 진행되는 때에 대한 정확한 계시를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리무중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1:3).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일은 7년 환난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많은 문제점들을 갖는다. 여러 시대적 징조에 대해 아무런 경성도 대비도 할 수 없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7년이란 종말 기간을 실제적으로 보고 해석하는 견해는 성도들이 예수님 재림을 준비하는 일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3) 3년 반 과 후 3년 반의 7년의 기간

 

7년의 기간은 전 3년 반과 후 3년 반으로 나눈다. 7년의 기간을 7년 환난이라고 부르는데 실상은 적그리스도가 지배하는 기간은 후 3년 반이다. 그렇다면 전 3년 반은 실제적인 환난은 아니다. 그러난 전 3년 반도 환난에 포함해야 하는 이유는 영적 환난이기 때문이다. 이 때 적그리스도는 이미 등장했다. 그에 의해 체결된 7년 평화조약으로 그는 세계의 위대한 영웅으로 부상한 상태이다. 그런데 그의 정체를 알고 경각시켜야 할 교회들이 거짓 선지자의 책동에 휘말려 음녀교회로 전락해 버린다. 그럼으로 이러한 상황이 영적으로 환난인 것이다. 종말의 최대 징조가 적그리스도이 등장이고, 그 자의 출현이 곧 환난인 것이다.1)

 

이때 이 거짓과 음모를 알릴 자가 있다. 교회가 진리를 사수케 하여 촛대교회로 이끌 자가 두 증인인 것이다(11:3). 이렇게 적그리스도와 두 증인은 7년 환난의 시작 점에서 함께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구분한다면, 3년 반은 두 증인을 통한 예언사역기간이고, 3년 반은 적그리스도의 통치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3년 반 이 두 세력 간에 펼쳐지게 될 치열한 영적 전투에서 교회가 어디를 따를 것인가? 그에 따라 가깝게는 예비처와 세상 종국에는 휴거로 들림 받는 자와 잔멸로 멸망 받는 자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3년 반 독자가 섬기는 교회는 반드시 두 증인을 따라야 할 것이다.

 

3년 반에 대하여 다니엘서 구체적인 명시는 없다. 하지만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는 말씀에서 그 기간에 있을 사건을 알 수 있다(9:27). 이레의 언약 중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이 전에는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요한계시록에는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하였다(11:3). 3년 반 활동 기간을 말씀하고 있다. 두 증인과 적그리스도 정점들 간의 대결이 벌어질 시기인 것이다.

 

3년 반에 대하여서는 전 3년 반에 비해 많은 분량이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서에는 그가(적그리스도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고 하였다(7:25). 요한계시록에는 적그리스도가 ‘5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7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10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라고 했다(13:5,7,10). 적그리스도의 잔혹한 통치 기간과 폭정에 대하여 두 성경이 동일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기고만장하던 자의 최후는 어떠한가?(살후2:4). 이 역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다.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그의 종말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고 하였다(7:26,11:45). ‘19짐승(적그리스도)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19:19-20).

 

이상에서 7년환난 중 전 3년 반과 후 3년 반을 나누면서,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조명했다. 특히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비교해가며 서술했다. 그 이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종말 계시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마지막은 다니엘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전 세계 교회의 최후에 관한 말씀이다. 지금은 교회시대로 이방인은 구원의 시기 이지만 유대인은 배교의 시대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7년환난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관계는 역전이 된다. 바로 교회의 배교이다(살후2:3). 반면 전 3년 반의 마친 후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루어지게 된다.

 

다니엘서에는 초림이후 바로 종말의 7년환난이 시작되고 메시아왕국에 입성하게 된다. 유대인들에게는 교회시대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초림의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 선포로 시작되고 있다. 2천 여 년 전 이 땅에 오신 목적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이는 곧 심판의 최종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7년환난 안의 일들을 상세히 알지 못한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에 주신 종말계시이기 때문이다. 왜 전 3년 반과 후 3년 반을 잘 구분하여 연구해야하는지 답이 된다. 유대인들과 교회시대에 준비되지 못한 성도들은 후 3년에 가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금 진리 교회의 부르짖음이 있어야 한다.

 

 

尾註>

 

1) 민병석 목사도 그의 저서에서 주 재림의 결정적 징조를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로 보고 있다. “우리는 인류의 종말을 알리는 7년 환난이 언제 우리들 앞에 닥쳐올지 전혀 알 수 없다. 이 일을 안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재림의 시일을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음으로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이 일에 대해 주님은 마24:36절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재림의 징조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셨는데 성경을 보면 우리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시대적 징조에 대해 언급해 주고 있는 말씀을 찾을 수 있다. 짐승에 의해 열강 간에 맺어지는 한 이레의 언약이 메시아의 재림의 징조적 시기로 계시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9:27절 말씀에는 한이레의 언약에 대해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이 말씀에서 그가라고 지칭하는 인물은 한이레의 언약을 맺을 주역으로 종말에 예루살렘에 침노하여 유대인들에게 제사와 예물을 금지시키는 짐승(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임할 이런 유대인들의 환난은 한 이레의 절반인 후반부에서 이루어질 일이다. 그리고 그 끝에 이르면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메시아가 출현하는데 이 일이 예수님의 재림으로 나타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한 이레가 도래하는 시기만 알면 우리는 주 재림의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짐승이 언제 등장하며 언제 열강과 더불어 한 이레의 언약을 맺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이 일은 장차에 이루어질 일이란 사실밖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 시일은 모르지만 마치 예수님이 장차 언제인가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와 다를 바 없다(민병석,『개혁주의 전 천년설』, 밤중소리신학연구원, 도서출판 신생, 2016.9.20. pp127-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