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 천년설

7년환난과 7년평화조약(1) | 개혁주의 전 천년설 핵심주제(5-1) | 이재현목사 | 파루시아 아카데미 | 개혁주의 전 천년설(20)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4. 3. 29. 19:37

7년환난과 7년평화조약(1)

 

 

Ⅰ 서론

 

한국교회에서는 7년환난과 7년평화조약Seven Year Tribulation & Seven Years a Peace Treaty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이들이 많다. 종말의 7년을 환난 기간으로 인정하면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로 보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7년환난을 세대주의 산물로 보는 것을 넘어 시한부 종말론자라고 속단하는 이들도 있다. 과연 그런가? 7년 환난의 경우 이 낱말은 결코 세대주의 신학의 창작품이 아니다. 종말에 대한 성경적 예언으로 분명히 성경에 명기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용어는 분명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7년이라는 기간은 다니엘 927절에 한 이레로 명시되고 있다. 이 기간을 요한계시록에는 절반으로 나누어 기록되어 있다. 3년 반은 천이백육십일’(11:3), 3년 반은 마흔 두 달’(11:2;13:5), ‘천이백육십일’(12:6),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12:14)로 나타나 있다. 다니엘 927절에는 이레의 절반이라는 분기점을 말씀하며, 725절에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3년 반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면 7년환난의 환난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찾은 것인가? 마태복음 243절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으리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이다. 8절에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하셨다. 이어 9절에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라고 하심으로 환난의 시작이 어떻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되어 질 일을 예언하신 것이다. 환난 중간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15절의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다니엘 927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와 데살로니가후서 24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라는 구절과 비교해 볼 때, 환난의 중간에 있을 사건도 계시해 주시고 있다. 29절에는 환난 후에라는 직접적인 언급을 통하여 대환난의 시작과 중간 끝에 있을 일을 선명하게 알도록 하셨다. 21절에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없었던 큰 환난즉 대환난Great Tribulation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7년환난은 성경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참고/13:1-37;21:5-38).

 

이를 또 7년평화조약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또한 예수님이 직접 구약을 인용한데 얻을 수 있다.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라고 했다(24:15). 이 말씀 출처를 볼 때 이 사건은 7년의 하프Half 이후에 있을 일이다. 먼저 한 이레7년이라는 말씀이 나온다(9:27). ‘한 이레에 다음에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이어지고 있다.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인 것이다. 이 계약의 전 3년 반이 지난 시점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때이다. 그렇다면 이레의 절 반이전 이레의 시작 때에는 자유롭게 제사와 예물을 드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평화조약이라는 단서이다. 다니엘서는 유대인들에게 있을 종말의 사건이 그들에게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성전에서 예배인 제사와 예물을 명시한 것이다. 그 때 전 세계적으로는 평화조약이 도래한 시대임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교회가 겪어야 할 7년간의 일들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것이다.

 

이와 같이 주제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피고 본론을 이어가고자 한다. 특히 7년 환난을 인정하면 세대주의인가? 라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동안 갖고 있던 이해 견지에서 열려진 자세로 본고를 대해주기 당부한다. 통념적 견해가 성경의 증언을 제한한다면, 전자를 안전의 장치로 여기기보다, 후자를 발전의 계기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베뢰아 교인들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가 요청된다(17:11). 그러한 자들에게 사랑의 주님이 만나주실 것을 믿는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24:3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어떤 지론보다 오직 진리를 사모하는 독자들의 간절함에 이와 같은 고백이 있기를 소망한다.

 

 

Ⅱ 본론

 

1. 7년 환난은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온 것인가?

 

1) 7년 환난이라는 용어의 등장 시기

 

7년 환난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도 세대주의자들이 그 시발점이 된 것이 아니다. 세대주의 신학과 세대주의 종말론은 18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의 다비John Nelson Darby,1800-1882에 의하여 정립되었지만, 7년 환난이란 술어는 이미 그 보다 2세기 전인 16세기 미래론자1)의 시조인 스페인 예수회Spanish Jesuit의 리베라Francisco Ribera,1537-1591가 쓴 미래주의 해석2)에서 이미 등장하고 있는 말이다. 리베라가 미래주의 주석에서 이러한 해석법을 주장한 이후, 다비, 스코트Walter Scott, 반하우스D. G. Banhouse 등이 이러한 견해를 선택 및 발전시켰다. 이 중 세대주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다비의 영향으로 7년환난이라고 하면 세대주의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종말론을 연구하는 한 단체의 목회자3)는 리베라의 저작 미래주의 주석은 반종교개혁4)의 일환으로 연구된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을 전후하여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공격한 개신교 지도자들이 많았다. 위클리프John Wycliffee,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후스John Huss, 사보나롤라Savonarola, 낙스John Knox, 칼빈John Calvin, 틴데일William Tyndalee, 바안스Robert Barnes, 번얀Bunyan, 피니C. Finney, 무디D. L. Moody, 테일러Hudson Taylor,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몰간Campbell Morgan 등이 그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도 높게 비판을 가한 것이 루터Luther Martin,1483-1546이다. 그는 1534년 판 루터성경The Luther Bible에서 요한계시록 17장의 짐승을 탄 음녀에게 교황의 삼층관을 씌워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했다. ‘바티칸은 바벨론의 매춘부라며 맹공을 가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로마 가톨릭은 예수회 소속의 두 사제를 통해 교황에 대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리한 집중 공격을 쉽게 피하거나, 깨뜨릴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이전에 존재했던 사상들을 참고하고 집대성하여, 새롭게 창출한 알카자Luis de Alcazar,1554-1613의 과거주의Preterist와 리베라의 미래주의Futurist라는 예언 해석법이다.

 

알카자는 40년에 걸친 연구 끝에 9백 페이지 분량의 요한계시록 주석5)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계시록의 전반부는 유대인의 메시아 거절과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것으로, 후반부는 이교 로마의 멸망과 기독교로의 개종에 관한 것으로 돌리면서, 적그리스도는 네로 황제라고 못을 박아 중세 로마 교회와는 상관없는 예언으로 만들었다. 반면 리베라는 5백 페이지나 되는 요한계시록 주석을 출판하여 계시록의 적그리스도가 교황권이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그는 계시록의 첫 부분은 요한 당시에 해당되는 예언이지만, 나머지는 재림 직전에 나타나 성도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모독할 무신론적 인물인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활동하는 3년 반 동안 이루어질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하나님처럼 행세하고 세상을 다스리며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한계시록을 미래주의로 보는 것은 로마 가톨릭의 음모에 휩싸이는 것이라는 논리를 반론자는 펼치고 있다. 반론자는 래드George Eldon Ladd,1911-1982 박사의 저서를 인용하여 자신의 견해의 타당함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미래주의적 예언 해석이 일찍이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회복되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비교적 현대에, 교부의 미래주의적 해석에 회귀한 최초의 학자가 스페인 예수회(Spanish Jesuit)의 리베라(Ribera)라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많은 현대 미래주의자들에게 충격적인 사실이 될 것이다. 1580년에 리베라는 교황을 적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신교도 사이에 퍼져 있는 견해에 대한 반대 해석(Counter-Interpretation)으로서 요한계시록 주석을 발행했다. 리베라는 처음 장들을 제외하고는 요한계시록의 모두를 교회 역사에 보다는 마지막 때에 적용시켰다.6)

 

그러면서 반론자의 요한계시록 해석 방향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사도 요한은 그가 받은 계시가 먼 후일에 될 일이 아닌 반드시 속히 될 일에 대한 계시라고 전제했다.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는 계시이다. 즉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A. D. 95년경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은 때부터 신약 시대가 다 지난 후, 재림 직전의 3년 반 동안 일어날 사건에 대한 계시가 결코 아니라, 그가 계시를 받은 때부터 반드시 속히전개될 사건에 대한 계시인 것이다. …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미래주의 해석 체계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로마 교회가 교황에 대한 압력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 낸 함정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물론 예수님의 재림을 중심으로 전개될 일련의 사건들도 예언하고 있지만,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근본적으로 1:1의 서론처럼 반드시 속히 될 일에 대한 예언이지, ‘먼 후일에 될 일에 대한 계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7)

 

그러나 위 래드의 견해는 리베라의 미래주의를 잘못된 세대주의로 발전시킨 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그가 책을 저술한 목적 중의 하나가, 세대주의와 비밀 휴거를 19세기에 발생한 비성경적 가르침으로 비평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미래주의에 대한 그의 반박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을 초대 교회부터 교회가 당할 핍박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논증의 시작이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알카자가 주창한 과거주의에 동의한다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종교개혁가들 중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공격한 이들의 견해를 취하고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오늘날 무천년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요한계시록을 과거주의로 해석한다. 그러면 그들도 다 로마 가톨릭의 음모에 빠져있다는 말이 되는가?

 

저자는 본장에서 7년 환난이란 용어가 세대주의자들에 의해 창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7년 환난을 인정한다고 로마 가톨릭의 음모에 빠져드는 것인가? 이상근 박사는 요한계시록 주해 총론 해석법 중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을 소개하면서, 과거적 해석법에서는 알카자, 미래적 해석법에서는 리베라를 언급하고 있다.8) 그러면 이 주교들을 인용한 이 박사도 천주교의 정략에 이용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7년이라는 기간을 믿는다.

 

자신의 편견에 빠져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이 무엇이 말하고 있는가에 귀 기울이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로마 가톨릭 사제가 7년환난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해서 부인해버리고, 세대주의 창시자가 7년환난을 정립시켰다고 사멸시켜 버릴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예수님 재림 전 7년이라는 기간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해서 성경적인 종말론을 정립하자는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요한계시록 주석 머리말에서 학자들의 학설을 인용할 때에 어떤 문구에 있어서는 혹시 신학 처지가 다른 주석가들에게서 인용한 바도 있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 사상 체계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신학 사상이 정통이 아닌 그들까지도 별 수 없이 그 문구 해석에 있어서는 우리와 일치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뿐이다.”9)고 하였다.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7년환난을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에 대하여 김명용 박사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3년 반이라는 숫자가 나오면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3년 반은 마귀가 통치하는 통치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마귀와 연결되는 숫자는 3년 반이라는 숫자이다. 요한계시록 11(2)12(14)3년 반이 나오는데 이 두개를 합치면 안된다. 세대주의자들이 요한계시록 113년 반과 12장의 3년 반을 합해서 만든 7년 대환난이라는 이론은 세대주의자들 자기들 머릿속에서 만든 이론이 불과하다.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론이 아니다.10)

 

김 박사는 7년 환난은 세대주의자들 자기들 머리 속에서 만든 이론이 불과하다고 하였다. 저자는 세대주의자가 아니다. 기존 천년설에서는 역사적 전 천년설에 속하며, 저자가 세분한 역사적 전 천년설에서는 세대주의, 상징주의, 개혁주의 종말적 전 천년설 중 요한계시록 6장 이후를 철저히 마지막 7년 환난과 그 이후에 있을 사건에 대한 계시로 보는 개혁주의 종말적 전 천년설에 속한다. 이러한 천년설에서 7년 환난의 근거를 다니엘 9한 이레를 보며, 이 기간에 있을 교회시대의 계시가 요한계시록으로 보고, 요한계시록 113절의 천이백육십 일을 전 3년 반, 135마흔 두 달을 후 3년 반으로 보고, 이를 연결 7년 환난으로 본다. 이러한 성경적 근거를 어떻게 머릿속에서 만든 창작으로 여기는지 답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김 박사의 견해는 그 혼자의 주장만이 아니라는데 심각성이 있다. 전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교수로 대구동신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권성수목사는 주일예배 설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으로 비유하여,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였던 것처럼, 7년 환난은 상징입니다(2:19).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이전 어떤 환난의 때를 말하는 것이지 7년이라는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고 하였다.11)

 

그는 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에 대하여(13:14), “1차는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 2차는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한 성전 더럽힘과 파괴로 보고 종말의 때도 그와 같은 핍박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12)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13:14)에 대하여 디도 장군이 성전을 포위했을 때, 그 안에 있었던 자들은 죽었지만 산으로 도망한 자들은 살았다고 해석했다. 그것이 당시 예수님의 예언 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두 가지로 보는, 멀리서는 산이 하나이지만 가까이 가면 그 뒤에 또 다른 산이 있다13)는 주장의 2차는 맞지만, 1차 안티오코스 4세 때에도 같이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을 하려는 것인지 의문이 간다. 또 마지막 때 있을 환난으로도 확대한다면, 그 때는 산으로 도망가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은 없었다. 권 목사 역시 종말에 있을 7년환난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발생하는 오류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과거주의이며 상징주의인 무천년설에 기인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 강단이 무천년주의로 얼마나 점철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성욱 박사는 7년환난이 세대주의자들이 집중적으로 사용하여 왔기 때문에 개혁주의권에 속한 학자들이나 성도들은 7년환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해오거나 비판해 왔다고 평한다. 그러면서 이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주 예수님 자신이 대환난에 대해서 친히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대환난의 기간이 7년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일정한 기간의 대환난이 있을 것이며, 대환난의 시기는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연계될 것이고…우리 주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신 교훈입니다(24:15-28).14)

 

2)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적 사건의 계시이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여러 번 정독하는 중에 요한계시록은 그 주제가 예수의 재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재림에 관한 계시와 예언과 징조에 관한 사건만으로 일관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리고 예수 재림에 대한 그 날짜와 시기에 대해서는 절대 비밀로 감춰 두고 있지만, 예수 재림에 관한 징조로 7년환난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같은 계시는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의 환난의 시기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들의 예언의 사역을 위한 회개의 기간을 통해서, 실로 여러 가지 형태로 거듭 거듭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철저하게 종말적 해석을 취해야 한다.15)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만만치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다음은 한 신학자가 7년환난을 종말로 보는 견해에 대한 반론이다. “성경은 7년 대환난을 가르치지 않는다. 계시록에 나오는 1260, 한때와 두때 반, 3년 반 등은 모두 수학적으로 3.5의 상징적인 개념이며, 다니엘서 9:27 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7년 대환난과 아무 관련이 없다. 단지 칠십 이례의 마지막 이례의 절반에 제사가 끝이리라는 것뿐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므로 구약의 제사법이 끝난다는 말이다.”16)

 

이와 같이 7년환난이라는 용어 자체를 아예 부정해 버리고 있다. 그 이유는 세대주의의를 지지하는 잘못된 해석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개혁주의가 아니라고까지 못 박고 있다.17)

 

그러나 저자가 견지하고 있는 개혁주의 종말적 전 천년설에서 7년환난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고 하여, 세대주의적 입장을 따른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요 착각이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7년환난 전 공중 재림설과 휴거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7년환난 전 공중 재림 설은 자연히 예수님 재림을 둘로 나누게 된다.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이중 재림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그리고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는 교회의 휴거를 7년환난 전으로 공식화하므로 7년 기간의 환난 기간을 유대인을 위한 회복 기간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해석이 위험한 이유는 교회는 이 땅에서 전 3년 반을 통과하며, 그 기간 동안 적그리스도에 의한 많은 핍박을 받게 되는데, 이 사실이 감추어지므로 결과적으로 교회가 이 적그리스도에 의한 피해를 가장 크게 받는데서, 오는 엄청난 손상을 입게 된다는 사실이다.

 

다른 또 한 가지는 종말에 관한 징조는 7년환난의 시기로부터 오는데, 교회의 휴거 후에 이 같은 환난이 세상 온다고 믿는다. 이로 인해 휴거 일자에 지나친 관심을 갖게 되는 시한부 종말론의 온상이 되고 있다. 또한 전혀 예기치 못할 때 재림하신다는 비성경적인 비밀 휴거를 주창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1992EU의 통합 논의에서 오는 성급한 판단 같은 것으로 인류의 종말의 시기를 예언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7년환난을 인정하게 되면 시한부 종말론이 된다고, 주장을 일삼는 이들은 사실상 시한부 종말론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시한부 종말론이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예언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앞으로 언제인가 종말이 오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은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그리고 그 종말이 성경에 계시된 예언의 말씀대로 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시한부 종말론이라 할 수 없다. 성경적 종말론이다.

예언의 말씀대로 임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 시기에 가서 성경에 종말적인 징조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재림하지 아니하신다. 그것이 다니엘 927절에 있는 적그리스도에 의한 한 이레의 언약이고,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의 예언 사역으로 나타난다(11:3-6). 그리고 그 한 이레의 절반에 나타나는 유대인의 종교적인 핍박은 후 3년 반에 들어선 징조로 임한다. 그러면 이 같은 징조가 실제적으로 우리의 현실 앞에 나타난다고 하면, 그 시기로부터 7년 후면 인류의 종말이 찾아올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시한부 종말론이 아니겠느냐? 는 주장이다.

 

한 이레의 출발 시기가 성경에 없기 때문에 시한부 종말론이 될 수 없다. 성경에는 한 이레의 언약이란 언급밖에 없다(9:27). 그 언약의 성취될 시기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적인 종말의 징조적 시기라고 부른다. ‘장차 적그리스도에 의해 한 이레의 언약이 성취되면, 종말에 이른 징조적 시기에 이르렀다고 하는 성경적 견해가 7년 환난설을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의 종말관이다. 이 같은 견해가 왜 시한부 종말론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예수님이 언제 오신다는 년, , 일의 거론 없이 성경에 있는 종말론적 징조를 논하는 것도 시한부 종말론인가?

 

 

尾註>

 

1)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환난을 겪을 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고 해석하는 주의자들이다.

 

2) 1585년『In Sacrum Beati Ioannis Apostoli & Evangelistiae Apocalypsin Commentarij』라는 원제로 출간 됐다.

 

3) 이하 반론자로 표기함.

 

4) 반종교개혁(反宗敎改革, Counter-Reformation): 17세기 무렵 종교 개혁에 대항하여 가톨릭교회 안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

 

5) 1614년 『Vestigatio arcani sensus in Apocalypsi』라는 원제로 출간됐다.

 

6) G. E. 래드, 이태훈 역, 『축복된 소망(The Blessed HOPE), 서울: 정음출판사, 1984, p.37.

 

7) 반론자의 프라이버시(Privacy)를 위해 실명과 인용 출처를 생략한다.

 

8) 이상근, 『신약주해요한계시록』, 도서출판 성등사, 1998.10.30. pp.31-33

 

9) 박윤선, 『성경주석요한계시록』, 도서출판 영음사, 2011. 5. 2. p.7

 

10) “요한계시록 144천은 희망의 숫자”. 장신대 김명용 총장, 뉴욕 교협 요한계시록 세미나 인도. 이종철. 2013.6.6. http://www.newspower.co.kr

 

11) “대환란을 대비하라”. 마가복음 1314-23. 2013.4.21.

 

12) Ibid.

 

13)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이에 대해 예언적원 통시법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언급한다.

 

14) 정성욱, 「정성욱교수의 밝고 행복한 종말론」, ()눈출판그룹, 2016.3.7, p.252.

 

15) 요한계시록을 종말적으로 해석한다고 하면 그 내용을 무시무시한 심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의 소치요 이해의 결여다.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라는 섬뜩한 표현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멸망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14:19). 그러나 곡식을 거둔다는 순화된 비유로 신자들에 대한 휴거도 기록되어있다(14:16). 요한계시록을 종말에 있을 계시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먼저 구원하신다는 구속사를 찾는 작업을 선행으로 한다. 악인이 받는 형벌은 그 후 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 차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그의 나라로 이끄시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신다는 그 분의 심경을 묘사한 말이다. 재림은 의인과 죄인 앞에서 동시에 나타나며, 천년왕국 후 썩어질 몸이 썩지 아니할 몸을 입는 시점도 성도는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도 같이 이루어지며, 백보좌 앞에서도 함께 서게 된다. 어떤 인생이건 피할 수 없다. 단 그 결과가 영멸과 영생으로 나뉠 뿐이다. 이것은 예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곧 구원의 완성이며 죄악은 진멸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천년왕국이 펼쳐지는 것이며, 종국에는 그 나라를 하나님께 받치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도래하는 것이다(살전4:15;65:17;고전15:24;21:2).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마침이다. 이러한데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믿음의 백성들이 두렵게 여기고 기피할 이유가 있겠는가? 요한계시록을 종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도의 환희와 승리이며 찬양과 영광인 것이다(저자 주).

 

16) “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김명도(튤립교육선교회). 출처: http://blog.daum.net/mi5602/4264

 

17)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