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성전(3)
Ⅲ 제3성전과 예루살렘
역사적으로 성전과 예루살렘을 침략한자들의 말로가 어떠했는가를 먼저 알아야 볼 필요가 있다. 솔로몬성전을 파괴했던 느부갓네살은 광인이 되어 7년 동안 소처럼 들에서 풀을 뜯어 먹고 살았다. 제2성전을 초토화시킨 티투스는 황제에 오르지만 로마의 대화제와 폼페이화산폭발을 겪으며, 즉위 3년 만에 열병으로 죽었다.1) 알렉산더는 32세에 바벨론에서 사망하는데 그의 죽음을 독살로 보는 견해가 많다. 성전에 신상을 세우고 돼지 피를 뿌리며 더럽혔던 안티오코스 Ⅳ 에피파네스는 패전으로 퇴각하면서 질주하던 병거에서 떨어져 뼈가 하나도 남김없이 으스러졌고, 온몸이 구더기가 들끓고 썩어 악취가 진동했으며. 극도의 고통을 당하다가, 이국의 산골짜기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누구보다도 예루살렘 정복 열망에 사로잡혀 있던 나폴레옹은 그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영국군에 의해 세인트헬레나에 유폐되었다. 섬의 총독인 허드슨은 나폴레옹을 보나파르트 장군이라 부르며, 썩은 포도주를 따라주는 등 철저하게 조롱했다. 그는 결국 위암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까지 말하면 “너무 지나치게 예루살렘과 황제들을 연관 짖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에서 와서 보자.
이스라엘의 독립전쟁(1948-1949)에서 이집트의 나기브Mohammed Naguib,1901-1984 장군은 자국 군대와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 등과 함께 맞섰던 자이다. 그는 이 전쟁의 영웅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올랐고 무하마드 알리 왕조가 쿠데타로 무너진 후에는 공화정의 초대 대통령에 즉위한다. 그러나 독재와 군부갈등으로 자신을 대통령에 추대했던 나세르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당했다. 이스라엘과 2차(시나이-수에즈 전쟁,1956), 3차(6일 전쟁,1967)등 두 차례 전쟁을 벌인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Gamal Nasser,1918-1970는 1970년 9월 28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영토와 평화의 교환’Land for Peace 원칙을 처음 표방했던 베긴Menachem Begin,1913-1992수상은 이집트 사다트Muhammad Sadat,1918-1981대통령과 1978년 9월 17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공로로 두 사람은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1981년 10월 6일 사다트는 모슬렘 근본주의자의 총에 암살되었다. 그는 4차 중동 전쟁에서 직접 이집트 군을 지휘한바 있다(욤 키푸르 전쟁, 1973). 그와 손잡고 땅을 내주기로 한 베긴은 1982년 미국 체류 중 아내가 사망하였고 총리를 사임했다.
라빈Yitzhak Rabin,1922-1995총리는 1993년 9월13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 아라파트Yasser Arafat,1929-2004와 팔레스타인자치원칙을 선언 ‘오슬로협정’Oslo Accord=Declation of Principles을 체결하였으며, 이어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Hussein(ibn Talal),1935-1999와의 정상회담으로 46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 중동의 긴장완화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공로로 1994년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외무장관 페레스Shimon Peres,1923-2016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그러나 1년여 뒤인 1995년 11월 4일 10만 여 명이 참석한 텔아비브 시청 앞의 ‘중동평화 정착계획 지지 군중대회’를 마친 후, 극우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가 쏜 총탄에 희생됐다.
샤론Ariel Sharon,1928-2014총리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그렇듯이 전형적인 야전군 사령관 출신이다. 독립전쟁 육일전쟁 등 굵직굵직한 전쟁에 참전한 전쟁영웅이다.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그는 야당 당수시절 동예루살렘을 방문 초강경 발언을 한 것은 물론 그 이전부터 대 팔레스타인 정책 선봉에 선 사람이다. 국방부장관 재임 때인 1983년에는 레바논 베이루트 난민촌에서 800여명을 무참히 학살한 배후로 지목돼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 후 중동의 ‘살인자’, ‘암살자’, ‘점령자’로 불렸다. 결국 이 사건으로 사임하게 되었지만 다시 정계에 복귀 총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렇게 강경했던 그가 어찌된 일인지 2005년 8월 16일부터 가자지구내 군부대와 유대인 정착민 철수를 단행했다. 명분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고 했지만 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에게 내준 것이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점령한 지 38년 만의 대사건이다. 샤론 총리가 정치적 명운을 걸고 추진해 온 절연정책Disengagement Plan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로 인해 극우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기도 했지만, 세계인에게는 ‘이-팔 평화공존주의자’로, 자신들의 땅을 양보한 ‘평화주의자’로까지 칭송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도 잠시 수개월이 지난 2006년 1월 5일 심각한 출혈성 뇌졸중 증세로 입원한 뒤 깨어나지 못하다 2014년 숨을 거두었다. 그가 내준 가자지구는 오늘까지 살육이 끊이지 않고 있다.
느부갓네살에서 부터 샤론까지 기술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지난 역사가운데 등장한 황제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예루살렘을 손대는 자는 온전히 보전되지 못했다. 그 사실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이스라엘을 공격한 외세의 지도자들이 무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총리들 중 처음에 아무리 강경한 대 팔레스타인 정책을 펼쳤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주권 및 영토에 조금이라도 해가되는 일을 하면 암살과 중병으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반면 이스라엘 총리 중 가장 강경파인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1949-총리는 사기 혐의로 기소된 프랑스 사업가로부터 뇌물수수와 아내와 자녀까지 부정부패에 연루되었고, 민주주의의 핵심 중의 핵심인 삼권분립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사법개혁안과 의회에서의 야당의 견제를 무력화를 시도하며, 정교분리 원칙도 무시하고 유대교 랍비들의 의사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로 변모시킨다는 비판 속에 국민으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고 있다. 그러나 2023년 10월 7일 발발한 하마스 전쟁에서 최대 우방인 미국의 말조차 듣지 않고, 가자지구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 이렇게 외적으로는 추악하고 잔인하게 보이지만, 무려 14년간 총리로 재직할 수 있었던 것은 내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데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네타냐후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는 불의한 자도 그의 도구에 포함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에는 종말론 연구가들에게 주는 의미 있는 메시지가 있다. 하나는 제3성전이 건축될 때까지. 두 번째는 적그리스도가 후 3년 반인 마흔 두 달 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예루살렘을 핍박하기까지.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택한 민족으로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구원의 그 날까지 독립된 이스라엘은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3성전은 장차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제3성전은 종말시대 7년환난 중 후 3년 반 적그리스도에게 유린당하게 될 것이고, 적그리스도는 지난 역사 가운데 모형들보다 가장 가혹한 형벌을 받고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 인 지옥에 떨어진다(계11:2,19:20). 예루살렘을 핍박하고 성전을 짓밟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Ⅳ 제3성전과 이스라엘 회복
이스라엘 회복이 이루어지면 종말이 온다는 것은 문장으로만 보면 바른 정의이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현재 구원 완결을 이루어감으로 종말의 최종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또 미래 구원의 시기로 향해가는 종말의 징조로 보는 입장이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영적대각성이 현재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성취하기 위해 공격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이로 인해 유대교는 물론 이슬람교도들에게도 강한 거부감을 불러오게 된다. 또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정세 등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게 한다. 현상을 보고 종말을 예단 혹은 속단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것은 종말론에 대한 성경 연구가 부족한데서 온 것이다. 정성욱 박사도 잘못된 이스라엘 회복 운동의 오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스라엘 회복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세대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교회가 가장 힘써서 감당해야 할 일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오늘날의 이스라엘 정부와 그 정책을 지지하고, 물질적으로도 적극적으로 후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와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혈육의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교회의 선교적인 사명입니다. 하지만 이런 선교적인 맥락을 떠나서 육적의 이스라엘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현재의 정치적인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 백성의 중심 구성원이기 때문에 이방인의 교회가 현재 정치적인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도와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2)
성경에서는 장차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7년평화조약을 체결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단9:27). 그리고 숙원인 제3전을 건축하게 되고,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에게 환호하고 메시아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전 3년 반이 지난 후 적그리스도가 본색을 드러낸다. 제사와 예물을 금하고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이라고 칭하게 된다(단9:27;막13:14;살후2:4). 그제야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게 된다. 동시에 2천 여 년 전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메시아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후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의 통치에 맞서 투쟁하다가 재림하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게 된다(슥14:4-5;마24:15-16;계1:7). 이것이 이스라엘 회복이다.
그 이전까지 유대인들에 이 계시는 닫혀 있다. 그것을 구약 다니엘 12장 4절에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약 로마서 11장 25절에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 즉 교회시대의 구원의 수가 차기까지 유대인들은 ‘우둔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금은 유대인인 원감람나무가지가 꺾기고 대신 이방인인 돌감람나무가 접붙임을 받아 원감람나무에 진액을 공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돌감람나무는 꺾기고 이전에 꺾였던 원감람나무 가지는 붙여지게 된다. 이방인의 구원시대와 유대인의 배교시대에서 역전하게 된다. 이방인 교회가 배교를 하게 되고 유대인 이스라엘이 구원의 시기가 찾아오게 된다(롬11:17-27). 이 때 이스라엘 회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들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가 바로 적그리스도 등장 이후에 즉 7년환난 중 후 3년 반에 있을 일이다.
현재 이스라엘 안에서 유대인 중 구원 받는 자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나 이스라엘 회복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회복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종말의 징조로 보아야 맞다. 정성욱 박사도 “오늘날 혈육의 유대인들이 빠른 속도로 예수님께로 돌아오고 있음은 위의 예언의 성취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재림의 중요한 징조이기도 하다.”3)라고 하였다. 저자와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이방인 교회시대가 끝나고, 유대인 구원시대가 도래되기 까지는 어떤 능력과 방법으로도 이스라엘 회복을 이룰 수 없다. 메시아닉 쥬라고 불리는 지금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그러면 누군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포괄적으로 교회시대에서 구원받은 자들로 보아야 한다. 역으로 지금 이방인의 구원 시기인데도 준비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 같이 적그리스도의 통치에 떨어질 성도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후 3년 반 동안 뒤늦게 회개하여 짐승표를 받지 않고 처절하게 믿음을 지킬 자들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은 교회시대에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교회의 남은자들로 유대인 중 이스라엘의 남은자들과 같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계12:17). 이 관계를 이해하면 현재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것이 이스라엘 회복의 완성이라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단 이스라엘 회복이 가까이 오고 있는 종말의 징조로서 보는 것은 합당하다.
이상에서 기술한 것처럼 이스라엘 회복과정에서도 제3성전은 깊은 연관을 갖는다.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가 종말의 시대 위기에서 평화를 가져오고, 염원인 성전을 건축을 이룰 수 있도록 중재하자, 메시아로 받아들인다(단9:27). 메시아왕국을 세우고 세계 통치를 꿈꾸며, 비로소 이스라엘이 회복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7년환난 중 후 3년 반 적그리스도가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라 칭하자, 단성론을 믿는 그들은 반발하게 된다(살후2:4). 적그리스도는 무자비한 진압과 무참히 성전을 짓밟는다(슥14:2;눅21:24;계11:2).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제1, 2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던 같이 제3성전 또한 비참한 최후를 보면서, 이스라엘 회복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후 3년 반이 지난 후, 재림 예수님을 보고서야 메시아로 받아들이며, 천년왕국에서 주님이 거하시는 ‘사랑하시는 성’이 소망하던 성전임을 알게 될 것이고, ‘성도들의 진’에 살며 이스라엘 회복을 얻게 될 것이다(슥12:10;계1:7,20:9)
Ⅴ 결론
“지금 이 땅의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현명하다”는 카이저의 말을 재인용하며 결론의 서두를 기술하고자한다. 한국교회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성경의 인명이 아닌 현재의 국명과 관계된 사건으로 연결하면 시니컬Cynical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 이유는 시한부 종말론의 온상이 되고 있는 세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과 연계하거나, 로마가톨릭의 이론인 대체신학에 인식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세대주의를 비판하면서 대체주의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카이저가 강조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돌아오리라’는 구약의 예언은 신약 초대교회시대를 넘어 오늘까지 그리고 마지막까지 유효한 말씀인 것이다. 성경 속 예언을 죽었던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영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사실로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3성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누구도 아닌 예수께서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하시면서 구약의 다니엘을 인용하셨다. 그 때 이루어질 일 가운데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셨다. 지난날 안티오쿠스 4세가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던 것처럼 종말의 때,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그와 같은 짓을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거룩한 곳’이란 두 말할 것 없이 성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마24:15;계11:2). 그러면 지금 존재하지 않는 성전은 어느 역사의 시기에 세워질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 할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제3성전 준공 후 대반역을 행할 자이다. 아래로는 언약을 파괴하여 제사와 예물을 금한다. 위로는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으로 내세’울 것이고,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을 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한다(살후2:4;계13:5-6). 이렇게 제3성전은 종말의 최대징조인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계시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제3성전은 ‘이레의 절반’ 짧은 기간 수명을 다하게 된다(단9:27). 이렇게 제3성전은 7년평화조약의 시작과 파기를 알려주는 증거이기도하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로 언약의 맺어짐으로 봉합되었던 전쟁의 위기가 발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제3성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마치시는데 필요한 것이기에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성전을 건축하게 할 자가 적그리스도요, 이에 환호와 열광하는 유대인들은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레의 절반 본색을 드러내어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에는 큰 충격과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제1성전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 제2성전은 로마의 티투스장군에게 파괴되었던 것처럼, 제3성전은 적그리스도에게 유린당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증언하고 있다(계11:2).4) 또한 이때 세계적으로 벌어질 대전이 마지막 전쟁인 것이다. 제3성전도 그와 같이 종말 빙거憑據의 표식標式이다. 그러므로 종말의 징조 진행과정에 제3성전을 배놓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본서의 연구 목적이다.
尾註>
1)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사인을 말라리아, 또는 남동생 도미티아누스에 의한 독살 가능성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2) 정성욱, 『정성욱교수의 밝고 행복한 종말론』, (주)눈출판그룹, 2016.3.7., pp.131-132.
3) Ibid. p.134.
4) 요한계시록 11장 2절에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자’를 ‘이방인’이라고 하였다(참고눅21:24). 이방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13장 4-5절을 보면 분명해 진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짐승이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고 하였다. 용은 사탄이고 짐승은 적그리스도인바 이방인이 적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구절이 같은 계시임은 ‘마흔두 달’이라는 동일한 기간을 통해 입증된다. 이방인이 원어로는 복수이다. 그것은 짐승과 그를 따르는 열 왕들을 포함한 것이다(계17:12). 대부분의 주석은 ‘거룩한 성’을 성도로 해석한다. 11장 1절의 ‘하나님의 성전’과 연결한다. 이 해석은 교회시대의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주해로서는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대인에 대한 구원이 이방인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다. 종결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제3성전은 존재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미 성전에서 영광이 떠났는데도, 유대인들은 기어이 제3성전을 건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국 제3성전이 적그리스도에게 짓밟힘을 당한 후에야 깨닫고, 유대인의 구원이 시작될 것으로 본다. 이 관점에서 해석한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