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담의 계보와 생명책:창세기 5장
1) 아담의 계보
아담의 계보에는 아담부터 노아까지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아담의 장자는 가인인데 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앞 장에서는 가인과 그 후손들의 부와 번영과 발전을 장황하게 나열된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와 반대로 창세기 4장에서는 짧게 언급되어 있던 셋, 아담과 그의 아들 셋을 통해 내려오는 후손들만을 창세기 5장에 열거하고 있다. 왜!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장자인 가인과 그의 후손은 생략되고 있고, 죽은 아벨 대신 주신 셋과 그의 후손만이 레코드Record되어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후손들이 발전시킨 세속의 문화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문화에 관심이 있다. 제물, 신앙, 예배, 영적 충돌로 살인이라는 육적 충돌을 가져온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부와 번영과 발전을 이루었어도, 그것은 하나님 떠나서 얻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신 흠이 없는 온전한’ 제물을 드린 아벨, 그리고 그와 같은 셋의 후손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올려드린 예배자들이었다. 이 참된 예배자들은 모든 영적인 충돌을 물리칠 수 있다.
2) 생명책의 녹명
그러므로 가인과 그의 후손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면서 전혀 언급이 없고, 셋과 그의 후손들을 성경에 남기신 것이다. 이 말씀을 보는 우리는 영적 충돌의 가인과 그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흠이 없이 온전한 제물’을 드린 셋과 그의 후손들로서, 아담의 계보에 올려져야 되고, 그것이 저 천국 생명책The Book of Life,生命冊에 녹명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렇게 본문 아담의 계보는 종말에 멸망 당할 자가 아니라, 천국에 입성할 자, 생명책의 녹명을 보게 하는 것이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천국에 들어갈 자에 대하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하였다(계21:27). 창세기 5장 아담의 계보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생명책이 녹명되어야 함을 말씀해주고 있다. 이 세상에서 부와 번영과 발전을 이루었어도, 그 마지막이 생명체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고 지칭된 부자와 다를바 없다(눅12:20). 모든 것을 가졌어도 구원을 얻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하였다(계20:15). 그러나 이 세상에서 믿음 때문에 환난과 궁핍을 당했더라도, 그는 ‘실상은 부유한 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다. (계2:9). 왜 그런가? 그에게 ‘생명의 관’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계2:10). 그가 바로 생명책에 녹명된 자인 것이다.
3) 노아의 위로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5:29). 안위는 위로와 같은 말이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 노아를 통해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의 계보를 통해 생명책에 녹명되어야 함을 믿는 성도들은 사람들에게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어려워하는가? 그들을 한숨 돌리게 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
노아 하면 대홍수를 생각나게 된다. 노아가 홍수 후에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다는 말씀을 볼 때, 노아는 대 홍수이전 6백년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창9:28-29). 그 6백 년의 시간 동안 노아는 사람들에게 안위를 주는 삶을 살았다. 노아의 이름의 뜻이 안위라는 것은 노아가 대홍수 이후 그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된 세상에 안위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홍수 이전에도 6백 년 동안 사람들에게 안위를 주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육백년 동안 노아가 사람들에게 안위를 주는 삶을 살았음에도, 사람들은 대홍수의 임박함을 알리는 노아의 말을 들었는가? 듣지 않았다. 노아의 말을 들은 사람이라곤 고작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세 자부뿐이다.
중국 의사 ‘리원량’李文亮은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확진 환자 7명이 발생했다는 병원 문건을 얻게 되었다(2019.12.30). 신종코로나바이러스를 처음에는 사스로 본 것이다. 리원량은 그날 의대 동기 의사 7명이 같이 있는 SNS 단체 대화방에서 화난수산물도매시장에서 사스 확진 환자들이 발생했다는 글을 올렸고, 이후 이 사실은 인터넷에 급속히 전파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중국 공안은 리원량과 다른 의사 친구들을 데리고 가 이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사회 질서를 해쳤다면서, 괴담 유포자로 몰려 ‘훈계서'를 받았다. 2003년 사스 위기를 겪은 공안 당국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 후 리원양은 “진실은 마음에 있다”고 심경을 밝히며, 신종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를 치료하던 중, 자신도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다(2020.2.7). 리원양의 죽음으로 국가 지도부 책임론이 대두되고 있다.
이렇게 리원양을 통해서도 보듯이 사람들은 들을 말을 안 듣는다. 노아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홍수를 알리고 전했는데도. 듣지 않았다. 노아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고생에서 한숨 돌리게 하였다. 위로를 주었다. 안위를 얻게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정적인 말씀인 심판에 대해서는 귀 기울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좋은 것만 받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나와 함께 해도, 신앙만은 합일하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위로는 따듯하게 감싸주는 것이다.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이 위로이다. 흘린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위로이다. 당한 아픔을 싸매주는 것이 위로이다. 이상은 국어 정의로 위로이다. 신앙 행위로도 위로이다. 우리에게 육적으로 영적으로 필요한 위로이다다.
4) 심판의 위로
그러나 위로는 이것만이 위로가 아니다. 진정한 위로가 있다. 진정한 위로는 심판이다. 왜! 심판이 진정한 위로인가? 성도가 믿음 때문에 당한 고통과 환난에 대한 위로하심이 심판 때이기 때문이다. 노아는 대홍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며 비통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지난 120년 동안 수많은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 방주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대홍수로 심판이 시작되고, 자신들의 지난 120년 동안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던 것이 분명함을 알게 한다(창8:20-21). 이것만큼 큰 위로가 어디 있는가?
5) 종말의 위로
심판의 최종은 예수님의 재림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악을 심판하시고, 선을 보응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심판이 진정한 우리의 위로인 것이다. 마지막 심판 때, 우리가 지킨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만큼 우리에게 위로가 어디 있는가?
“10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6:10-11).
지금 신원하는 이들은 순교자들이다. ‘우리의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는 말씀을 볼 때, 이들은 순교자임이 분명하다. 순교자들은 빨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시기를 청원하고 있다. 이러한 간청을 들은 하나님은 그들에게 ‘흰 두루마리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말씀한다. 순교자의 동무들이란 순교자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교자가 있는데, 그 수가 다 찰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날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다.
이 말씀 후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고 하셨다(계19:2). 요한계시록 6장에서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 값을 갚아 달라는 신원이, 19장에 와서 하나님이 심판하심으로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서 갚으셨도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 재림 때, 최종적인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순간, 예수님 재림 때,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은 대적자들이 심판을 받는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지 않겠는가? 내가 정말 이 세상에서 피 흘리면서까지, 지킨 믿음이 승리함을 보고, 위로를 얻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는 심판이다. 그 심판에 빠지지 않고, 건짐 받는 것이 진정한 위로이다. 우리가 전하는 위로에 이러한 심판에서 건짐 받게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아가 전한 위로는 진정한 위로는 심판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오히려 심판에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눈물로 믿음을 지킨 것이 승리함을 보는 위로였다.
“5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6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7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계16:5-7)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보라, 개개인의 건강과 생업은 물론, 국가 전체의 인명피해와 막대한 경제 손실을 자져왔다. 문명은 발달하고 발달하는데, 의술은 나날이 진보를 이루는데, 그 의술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전염병. 주님께서 마지막 때, 주 재림이 있기 전,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눅21:11).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사는 우리들의 진정한 위로는 인간적인 위로함에 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다. 그가 마지막 날 심판을 당하지 않고, 그 심판에서 자기의 신앙이 옳았음을 목도하는 위로를 얻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창세기 5장에서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예수님 재림은 악을 심판하시고, 선을 보응하신다. 주 오심을 사모해야 한다.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그날에 우리의 믿음이 옳았다는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종말의 위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