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 천년설

"결론" 천지창조에 나타난 종말계시(12) | 개혁주의 전 천년설을 통해 본 종말계시(1-12) | 이재현목사 | 파루시아 아카데미 | 개혁주의 전 천년설(85)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4. 4. 12. 19:37

정리

 

1. 종말의 증거-하나님이 창조는 완전했지만, 인간의 범죄로 더럽혀졌다. 죄는 사람만 아니라, 짐승과 땅도 저주를 받았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종말을 맞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 눈물, 사망, 질병이 없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 천지창조에 대해 하나님은 오늘까지도 창조의 운행과 섭리를 계속하신다는 것은 교회시대의 관점이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신천신지까지 계획하셨다는 것은 종말시대의 관점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 살고 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천국에 속한자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성도는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존의 세계를 세우실 재림 주를 소망하며,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 미련 두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천국의 메시지을 부지런히 전해야 한다. 종말의 증거이다.

 

2. 종말의 나라-하나님의 명령을 아담은 거역했다. 죄의 결과 죽음이 찾아왔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통치 권한이 상실되었다. 아담이 하와에게 책임 전가는 가정이 와해를 가져왔다. 하나님은 실낙원 에덴기쁨의 복락원을 교회를 통해 이루게 하셨다. 그러나 교회를 에덴의 회복 전부로 보면 교회시대가 결론이 된다. 초림의 예수님 대속은 인간의 죽음을 해결했다. 그러나 저주받은 자연은 회복되지 못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지도 않았다. 이 두 가지가 실현될 나라가, 재림 심판 후 조성하실 천년왕국이다.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통해 받으시고자 했던 영광을 올려 드리게 된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원수의 장벽이 무너지고, 예수님을 한 왕으로 섬기게 된다. 황금시대가 이루어진다. 종말의 나라이다.

 

3. 종말의 신앙-뱀은 마귀, 사탄으로 온 천하를 꾀한다. 하와 유혹을 시작으로 예수님까지 시험했다. 종말에 마귀는 하늘 전쟁에서 미가엘에게 패해 공중 권세를 빼앗기고, 지상으로 쫓겨나 무저갱의 열쇠로 갇혀 있던 귀신까지 동원, 총공세로 교회를 공격, 많은 성도들을 배교에 빠지게 한다. 한국교회의 예배 대체는 숨길 수 없는 배교의 증거이다. 마귀는 최후에 적그리스도에게 권세를 주고, 지구를 통치하게 하여 인류를 음부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악행을 한 마귀의 종국은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가 있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지게 된다. 배교에 빠진 자들도 같은 운명에 처한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하였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종말의 신앙이다.

4. 종말의 예배-창세기 4장은 아벨의 예배로 시작해서, 에노스의 예배로 마쳐진다. 이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이란 예배자들을 말한다. 지금의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의 5대 사명, 예배, 전도, 교육, 봉사, 친교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예수님은 코로나 팬데믹 같은 전염병과 자연재해가 창궐하는 마지막 때,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고 임금과 집권자 앞에 끌려갈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예배의 통제는 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협조를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정부는 더욱 강력한 조치를 법제화하고 있다. 더더욱 경성해야 할 것은 세상만 아니라 교회가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 이 또한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이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예배 때문이다. 예배는 생명이다. 예배에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종말의 예배이다.

 

5. 종말의 위로- 아담의 계보에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존재가 없다. 셋과 그의 후손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가인이 발전시킨 세속문화에 관심이 없다. 셋이 올려드리는 예배문화에 관심이 있다. 아담의 계보는 생명책을 보게한다. 세상에서 부와 번영과 발전을 이루었어도,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노아 이름의 뜻은 안위이다. 그는 6백 여 년 동안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런데 심판 임박함을 알리는 노아의 말에 사람들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홍수가 쏟아졌다. 120년 동안 노아가 당했던 조롱과 멸시가 위로를 받는 날이다. 심판의 최종은 예수님의 재림이다. 악을 심판하시고, 선을 보응하신다. 그날에 생명책이 기록된 성도는 지금의 신앙이 옳았음을 목도하고,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종말의 위로이다.

 

6. 종말의 은혜-예배문화를 세운 셋의 후손 하나님의 아들이, 세속문화를 이룬 가인의 후손 사람의 딸들과 통혼을 했고, 그 사이에서 고대의 명성을 얻는 용사, 영웅이 태어났다. 이들은 사람을 규합 하나님을 대적했다.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갔다. 하나님은 한탄하사 근심하셨고, 죄악이 관영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는 심판을 계획하셨다. 베드로는 대홍수를 물 심판이라고 하였고, 마지막 불 심판에 관해서 예언했다. 불 심판에서,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되어야 한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는 물 심판에서 불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종말의 은혜이다.

 

7. 종말의 진리- 노아는 칠일 후 심판이다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방주를 완성하고 모든 명령을 이행했다. 사십 주야로 하늘과 땅의 샘에서 물이 쏟아지고, 솟구쳐올라, 150일 동안 물이 땅에 창일하였다.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명체는 죽임을 당했다. 대홍수 심판 전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노아가 아니다. 하나님이 닫으면 열 자가 없다.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엄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하나님이 정한 날이 지나면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날을 칠 일 전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불 심판의 마지막 날은 아무도 모르게 하셨다. 중요한 것은 노아가 심판을 사람들에게 알렸는데도 믿지 않았다. 안 믿는 자는 끝까지 안 믿는다. 창세기에는 최초의 심판이 계시록에는 마지막 심판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전자는 실제로 보는데 후자는 상징으로 본다. 완악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구 최후의 심판은 음행 배교의 결과이다. 끝까지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사수해야 할 종말의 진리이다.

 

8. 종말이 회개-지구는 대홍수 후, 전혀 다른 모습을 갖게 했다. 파괴로 변이된 세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드린 제물을 받으시고,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성경은 종말에 불 심판을 예언한다. 하나님은 물 심판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최종적인 불 심판이 없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 노아 홍수 이후 죄악과 불의가 해일처럼 세상을 덮고 있는데, 하나님은 잠잠하신 것인가? 지금은 구원시대이기 때문이다. 첫 심판인 물 심판이 세상의 죄악이 관영함 같이, 지금 구원의 시대에 죄가 쌓이고 있다. 이 구원시대에 지금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여 이르기를 원할 때, 우리는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코로나 19같은 종말의 징조를 보면서, 그날이 가까이옴을 알고, 엄중함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난 이 땅의 죄악을 주의 백성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사, 이 나라를 살리실 줄 믿는다. 회개를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종말의 회개이다.

 

9. 종말의 언약-무지개는 언약의 표이다. 언약을 통해 심판을 보아야 한다.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심판이다. 하나님은 심판을 결정하시면 행하시는 분이다. 언약을 통해 구원을 보아야 한다. 심판 중에도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 언약을 통해 하나님만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다. 언약의 표를 잃어버리면, 짐승의 표를 받게 된다. 코로나19 방역 조치로 교회, 기관, 마트, 식당, 카페에 입장하려면, 이마와 오른손은 체온기에 태그하고, 신상정보가 담긴 QR코드를 모니터에 인식해야 한다. 짐승의 표의 트레일러이다. 주님은 종말의 전조를 보면 경성하여 대비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사실상 공적 예배 중단을 선언하고 있다. 예배는 한국교회가 진리를 수호할 촛대교회가 될 것인가? 반대로 적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음녀교회가 될 것에 대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재림의 신앙이 요청된다. 주 오심을 고대하며, 그의 통치를 바라야 한다. 지금 우리의 신앙이 소중한 것은 그가 다시 오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예배와 신앙과 믿음에 저해되거나, 퇴보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종말의 언약이다.

 

10. 종말의 도하-니므롯은 강력한 전사로 인류 최초의 영웅이다. 부와 힘의 상징인 대도시를 곳곳에 건축했다. 용맹과 재력으로 사람들이 추앙을 받고 권력까지 쟁취했다. 첫 번째 심판인 대홍수의 원인 용사들이었음에도, 사람들은 영웅을 찾는 심리가 있다. 세상을 주름잡던 영웅의 최후는 스올이다. 성경은 영웅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함에도 사람들은 지구를 구할 영웅을 구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위기를 단번에 해결할 자를 찾는다. 계시록은 인류의 마지막 영웅을 기록하고 있다. 짐승으로 지칭된 적그리스도이다. 지구를 위기에서 구하는 평화 왕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지배를 공고히 한 다음 하나님이라 자칭하며, 외적은 매매수단이요, 내적은 통치수단인 짐승표를 받게 한다. 현재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스템들은 짐승표와 세계단일정부의 예표임을 부인할 수 없다. 니므롯의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바벨탑 배교 운동이 전개되던 때, 에벨은 영적 개혁과 종교적 정화운동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에벨은 이름 뜻이 건너온 자이다. 우리들은 세상을 건너야 한다. 절대 예배 신앙 믿음에서 물러서는 행위를 하지 않을 때, 세상의 영웅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들은 주님이 오셔야 해결할 수 있다는 일념을 갖고, 지금 교회를 떠나지 말고, 신앙에 집중하고, 믿음에 정진해야 한다. 종말의 도하이다.

 

 

요약정리

 

종말의 증거. 천지창조는 소멸되고 신천신지가 도래한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 미련 두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천국 메시지을 부지런히 전해야 한다. 종말의 나라. 초림의 예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지만, 땅의 저주는 그대로이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통해 받으시고자 했던 영광을 재림 예수님이 천년왕국에서 이루어 드린다. 종말의 신앙. 마귀는 배교로 인류를 음부에 처하게 한다. 하나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종말의 예배.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예배 때문이다. 예배에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예배는 생명이다. 종말의 위로. 예수님 재림은 악을 심판하시고, 선을 보응하신다. 주 오심을 사모해야 한다.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그날에 우리의 믿음이 옳았다는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종말의 은혜. 물 심판에서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는 물 심판에서 불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종말의 진리. 창조를 실제로 종말을 상징으로 보는 완악한 자가 되지 말자. 지구의 심판은 음행 배교의 결과이다. 끝까지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 종말의 회개. 하나님을 떠난 이 땅의 죄악을 주의 백성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사, 이 나라를 살리실 줄 믿는다. 종말의 언약. 언약의 표를 잃으면 짐승의 표를 받게 된다. 현재 예배와 신앙과 믿음에 저해되거나, 퇴보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종말의 도하. 인류의 첫 번째 영웅 니므롯에서 마지막 영웅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말고, 세상을 건너서, 오직 주가 다시 오셔야 해결할 수 있다는 일념을 갖고, 교회를 떠나지 말고, 신앙에 집중하고, 믿음에 정진해야 한다.

 

 

 

결 론

 

무천년설은 현재론적 교회가 종말론적 교회로 완성을 천국으로 본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갱신Renewal이라 한다. 천년왕국을 상징으로 보고, 영원한 나라와 혼동하여, 종말에 지금 세상이 천국으로 변한다는 논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천년설 관점을 취하면, 현재에서 해답을 도모하려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지상에서 천상이 완성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재림의 소망은 몽매蒙昧하고 약화된다. 그러나 개혁주의 종말적 전 천년설1)에서는 지구 완멸End로 본다. 심판 후 조성된 천년왕국에서 모든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가 실현된다.2) 그리고 천년왕국은 천국으로 이어진다.3)

 

무천년설은 초림의 예수님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었고 한다. 그렇게되면 현세주의 신앙에 빠질 수 있다. 그 실례를 온라인 예배 대체를 들 수 있다. 세상에는 어떤 타협도 ,미련도 두지 말아야 한다. 모든 악이 심판은 재림종말이다. 어떻게 죄로 더렵혀진 지구가 갱신되는 것이 신천신지가 될 수 있는가? 그 정도가 아니라 완멸 이후 새 창조로 이루어질 것이다. 종말의 심판 없이 창조의 완성은 없다. 종말에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주님이 세세토록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다.4)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창조에서 종말까지를 준비하셨다.

 

무천년설의 결론은 교회는 승리한다이다. 이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무천년설은 지금의 교회로 본다. 그러나 개혁주의 전 종말적 천년설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주님을 한 왕으로 섬기는 천년왕국으로 본다. 그날이 교회가 승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 차이는 현재의 신앙에 큰 차이를 갖게 한다. 무천년설은 선행을 강조하게 된다. 되도록 세상과 대립하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야 함을 교훈하게 된다. 이 땅이 장차 천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구하고도, 평화가 바르다고 가르친다.5) 성도들이 훌륭한 인품과 성실한 생활하도록 힘쓴다. 불신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빛과 소금이 되라와 같은 성구를 애용한다(5:13-14).

 

그러나 개혁주의 전 천년설은 진리 사수를 강조한다. 세상에서 화합보다 성별聖別을 우선한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우상숭배자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메시지를 증거한다(고후6:15-16). 성도들이 의로움과 담대함과 무장함을 갖도록 힘쓴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22:11.참고/딤전4:6).6)

 

강단에서 어떤 메시지를 증거해야 하는가? 균형은 가져야 한다. 그러나 안 믿는 자들도 마지막 때라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님은 “45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반면 악한 종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하였다(24:45-48). “내 마음에 주님이 임재하고 계시다. 영적인 일이 우선한다. 인류의 흥망성쇠는 계속된다.”는 주장은 교리적 재림이다. 물질적 세계도 하나님이 만드셨다. 인간의 전인적인 구원, 지구의 창조영광 회복은, 주 오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종말에 가져야 할 믿음, 역사적 재림이다.

 

 

尾註>

 

 

1) 이재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PBI. 20218.8.1. pp.15-39. <개혁주의 종말 적 전 천년설 개론>.https://blog.naver.com/bcc4671/221353059286.를 참조하라.

 

2) 9:24

 

3) 7:27;65:17-25;21:2. 역사적 전 천년주의자 가운데도, 무천년주의와 동의하는 이들이 상당수이다.

 

4) 만약 종말시대가 없고, 오늘날 신앙생활이 그대로 지속된다면, 신약성경으로만 구분할 때, 사복음서, 역사서 그리고 바울과 공동 서신서로 충분하다. 어디 부족함이 있는가? 그러나 계시록은 예언서로 분류한다. 범주는 나누면서 내용은 서신서와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계시록은 교회시대의 끝 종말시대에 성도들을 위해 주신 책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는 예언서를 서신서와 구약 심지어는 문헌과 전설들까지, 연결하는 노력에 심혈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 사이 재림의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가 될 수 있다.

 

5) 배교에 빠지면 평황의 왕으로 가장하는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6) 그렇다고 개혁주의 종말적 전 천년설이 세상에 전도와 구제 등 교회의 기본적인 사역을 등한히 한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무천년설은 진리 수호를 외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무천년설과 개혁주의 종말적 전 천년설의 관점의 차이가, 결과로 나타나는 신앙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다. 필자의 사견임을 전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