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 천년설

"바울신학과 요한신학" 한국교회 종말계시(2) | 절대적 성경과 상황적 징조 | 개혁주의 전 천년설을 통해 본 종말계시(3-2) | 이재현목사 | 개혁주의 전 천년설(99)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4. 4. 14. 20:01

1. 바울신학과 요한신학 - 교회론과 종말론

 

신약에서 바울이 기록한 말씀을 바울서신으로 분류한다. 이 성경들은 교회시대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대한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론에 정립에 긴요하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바울과 전도여행에서 초대교회의 생성, 흥왕, 부흥, 기적, 역사를 전해 듣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바울서신과 깊은 관계가 있고 해석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렇기에 사도행전 또한 교회론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와 같이 바울이 기술한 서신과 증언은 현재 교회를 어떻게 섬기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주석과 설교에서도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서신에 비해 요한서신은 심구深究와 빈도頻度에서 주목받고 있지 못하다. 물론 신학자와 목회자들에 성향과 선호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또한 요한신학이라는 학문 장르에서 주는 요한복음이고, 요한 1, 2, 3서는 상호의 관계성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동일한 저자임에도 요한계시록은 요한신학 범주 안에서 연구를 찾기가 희소하다. 이러한 데에는 예언서라는 특성상, 요한의 복음서, 서신서와는 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울신학은 물론 요한신학에서도, 요한계시록은 다른 성격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Irony 한 것은 바울서신 라인Line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무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 적용 시기를 초대교회부터 전 교회시대와 주 재림 때까지 보고 있다. 즉 그 기간 안에 신앙생활의 교훈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바울 서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신학의 서신서와 요한신학의 예언서와 구별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의 바른 분별을 요청한다. 성경을 구분할 때는 서신서와 예언서로 구분하는데 주석의 성격은 같다. 물론 요한계시록에서 신앙생활의 교훈을 찾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바울서신으로 통해서도 충분한 교회시대의 교회론을 요한을 통해 계시록에서 중첩重疊하게 하셨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신학부 1학년에서 수강하는 과목가운데 하나가 신약개론이다. 신약성경은 크게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예언서로 나뉜다. 예언서는 당연히 요한계시록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주해하는 데는 서신서와 동일한 관점을 가진다. 과연 이것이 바른 자세인가?

 

2천 여 년 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마지막 시대이다. 그렇기에 교회시대는 곧 종말시대와 동의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종말시대를 주 재림 전 후 시점으로 하고, 논지를 이어가고자 한다. 필자는 바울신학의 서신서는 교회시대 교회론을, 요한신학1)의 예언서는 종말시대 종말론으로 주신 말씀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교회시대의 성도들에게 올바른 믿음을 보존하고 헌신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 바울신학이고, 종말시대 성도들이 진리를 사수하고 재림을 맞이하게 위해 주신 말씀을 요한신학인 것이다.

 

바울 서신으로 바울 신학의 권위자인 이한수 박사는 무천년주의자였다. 그런데 최근 역사적 전천년주의로 선회했다. 그는 그 계기를 설명하면서 본인은 무천년설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천년 통치에 대한 명시적 교훈을 하지 않는 바울의 편지들을 전공한 학자로서 무천년설이 신약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 서신과 관계없이 계시록 자체의 이야기 흐름에 주목하면서, 적어도 17-21장의 논지 흐름이 연대기적 순서를 따라 점진적으로 전개되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되면서 기존에 채택한 무 천년설을 접어두고 역사적 전천년설을 굳히게 되었다.”고 했다.2)

 

바울 신학의 대가로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논지에는 바울 신학을 통해서는 종말론 정립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신학과 요한신학을 통해 교회시대의 교회론과 종말시대의 종말론을 구분하지 못하면, 종말계시는 영원한 미제로 남거나,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 종말 시점에 있을 예언을 교회 전시대를 위한 서신 위치에 배열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만약 종말시대가 없고, 오늘날 신앙생활이 그대로 지속된다면, 신약성경으로만 구분할 때, 복음서, 역사서 그리고 바울과 공동 서신서로 충분하다. 어디 부족함이 있는가?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예언서로 분류한다. 범주는 나누면서 내용은 서신서와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시대의 끝 종말시대에 성도들을 위해 주신 책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는 예언서를 서신서와 구약 심지어는 문헌과 전설들까지, 연결하는 노력에 심혈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 사이 재림의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가 될 수 있다.

 

바울신학과 요한신학을 통해 교회시대의 교회론과 종말시대의 종말론을 구분하여 주해하지 못하면, 결정적으로 종말의 시대가 감춰지게 된다. 이 기간은 예수님 재림 전 7년 환난이다. 한국교회에서 7년 환난은 유물처럼 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상기 주제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교회시대 상징으로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교회시대 2천년을 알고 있는가? 모른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자기들 눈앞에 2천 년 전 오셨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지금 교회시대 구원받은 이방인은 종말시대 7년이 베일’veil이다. 바울신학과 요한신학을 구분하지 못한 결과이다.

 

한국교회에서는 7년 환난Seven Year Tribulation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이들이 많다. 종말의 7년을 환난 기간으로 인정하면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로 보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7년 환난을 세대주의 산물로 보는 것을 넘어 시한부 종말론자라고 속단하는 이들도 있다. 과연 그런가? 7년 환난의 경우 이 낱말은 결코 세대주의 신학의 창작품이 아니다. 종말에 대한 성경적 예언으로 분명히 성경에 명기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용어는 분명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7년이라는 기간은 다니엘 927절에 한 이레로 명시되고 있다. 이 기간을 요한계시록에는 절반으로 나누어 기록되어 있다. 3년 반은 천이백육십일’(11:3), 3년 반은 마흔 두 달’(11:2;13:5), ‘천이백육십일’(12:6),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12:14)로 나타나 있다. 다니엘 927절에는 이레의 절반이라는 분기점을 말씀하며, 725절에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3년 반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참고/24:15).

 

그러면 7년 환난의 환난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찾은 것인가? 마태복음 243절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으리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이다. 8절에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하셨다. 이어 9절에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라고 하심으로 환난의 시작이 어떻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신 것이다. 환난 중간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15절의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다니엘 927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와 데살로니가후서 24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라는 구절과 비교해 볼 때, 환난의 중간에 있을 사건도 계시해 주시고 있다. 29절에는 환난 후에라는 직접적인 언급을 통하여 대환난의 시작과 중간 끝에 있을 일을 선명하게 알도록 하셨다. 21절에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없었던 큰 환난즉 대환난Great Tribulation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7년 환난은 성경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참고/13:1-37;21:5-38).

 

성경의 증거가 이렇게 명백함에도, 종말의 시대 7년을 부정하려고 하는가? 종말시대의 신앙을 경각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로마서를 중심으로 한 교회론 연구에서, 계시록을 중심으로 한 종말론 연구에 대한 한국교회의 각성이 요구된다.

 

 

尾註>

 

1) 본고에서 요한신학은 요한계시록을 지칭한다.

 

2) 이한수, 「요한계시록」, 솔로몬, 2018.8.25., p.9.